민수기 22:12-20 대화할 때 '이것'을 빼고 들으세요 그러면 경청이 잘 되고, 말과 행동 이면의 소리도 들립니다!
하나님은 발람에게 "일어나 발락이 보낸 자들과 함께 가라"(20)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런데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들고 발람과 그 나귀를 죽이려고 길목에 서 있었다(22). 어제는 가라고 말해놓고 왜 오늘은 죽이려고 하셨을까? 왜 줏대 없이 이랬다저랬다 하실까?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시다. 삼상 15:29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하지 않으심이니이다 그렇다면 모압 왕 발락이 보낸 자들과 함께 가라는 뜻은 무엇일까?
발락 왕이 첫 번째 사신을 발람에게 보냈을 때, 하나님은 분명히 "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 그들은 복을 받은 자들이니라"(12)라고 발람에게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발락 왕으로부터 또 다른 제의가 들어와도 일거에 거절하면 된다.
발락은 1차 때보다 더 높은 고관들을 더 많이 보냈고 발람을 크게 존귀하게 하고 원하는 소원을 다 들어줄 테니 와서 발락을 위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라고 압박[부담] 수위를 높였다. 이에 대해 발람은 "발락이 그 집에 가득한 은금을 내게 줄지라도 내가 능히 여호와 내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 덜하거나 더하지 못하겠노라"(18)라고 강력하게 거절했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그다음 말이 문제였다. 그의 속내가 드러나는 말을 흘렸다. 함께 가고 싶은 여운을 남겼다. "너희도 이 밤에 여기서 유숙하라 여호와께서 내게 무슨 말씀을 더하실는지 알아보리라"(19)
하나님으로부터 뭘 더 알아보겠다는 말인가! 이미 하나님은 가지도 말고 저주하지도 말라고 못 박으셨는데. 그러나 발람에게 발락 왕의 제안이 너무 솔깃했다. 처음엔 완강하게 거절했으나 이번 제안을 거절해 버리면 부귀영화[권세, 부, 높은 자리]가 모두 날아간다. 이 기회는 평생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제안이다. 변방 촌구석에서 실력을 썩히며 세월을 허비하느니 차라리 중앙 무대에서 실력 발휘하며 사는 것이 훨씬 현명하다. 이 기회를 날려버리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았다. 이 탐욕이 발람의 마음에서 들끓고 있었기 때문에 처음엔 단칼에 거절했지만, 하룻밤 지내면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더하실는지 알아보겠다고 사신들에게 여지를 남겼다.
하나님은 불의의 삯을 사랑하고 있는 발람의 심리를 정확하게 꿰뚫고 계셨다. 이미 돈에 꽂혀 있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너를 부르러 왔거든 일어나 함께 가라[그래 네 맘대로 해]"(20)고 마음에도 없는 말씀을 하셨던 것이다. 벧후 2:15 그들이 바른 길을 떠나 미혹되어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따르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 유 1:11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따라 멸망을 받았도다 겉으로 보면 하나님께 알아본다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이는 발람처럼 보이지만, 그는 철저히 탐욕에 의해 움직이고 있었고, 하나님은 그 탐욕에 대해 심판하기 위해 여호와의 사자를 보냈던 것이다.
발람은 하나님의 허락 같은 거절을 알아차려야 했다. 그러나 탐욕[불의의 삯]에 눈이 멀어버린[어두워진] 발람은 하나님의 마음을 전혀 읽지 못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소원을 들어주신 줄로만 알았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서 자기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모압 고관들과 함께 갔다. 오직 자신의 탐욕을 채우는 일에만 온 신경을 집중시키는 그의 모습이 느껴진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 사람이 있다. 말귀가 무슨 뜻인가? 남이 하는 말의 뜻을 알아듣는 총명함이다. 남의 말이나 행동을 보고 그 사람이 뭘 말하는지 알면 소통이 잘 된다. 말과 행동 이면에 있는 의도까지 읽어내면 말귀가 매우 밝은 사람이다. 더 소통이 잘된다. 하지만 내면의 소리는 고사하고 직설적으로 말한 것도 읽지 못하면 소, 돼지와 말하는 것 같이 답답함이 밀려온다. 왜 그럴까? 내 생각, 탐욕이 강하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이 강할수록 경청 능력이 떨어져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 상대의 말을 내가 유리한[원하는] 방향으로 해석한다. 탐욕이 강해서 발람은 그들과 함께 가라는 속에 숨어 있는 가지 말라는 하나님의 의도를 읽지 못했다. 가라는 말을 곧이곧대로 들었다. 더 나아가 자기를 가라고 응원해 주는 것처럼 해석했을지도 모른다. 탐욕이 강해서 고지식해져 버린 자들은 가라고 해놓고 왜 지금은 가지 말라고 하는 거냐며 불쾌감을 드러낸다.
하나님의 본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탐욕대로 움직이는 발람을 보면서 하나님은 불꽃처럼 타오르듯이 진노하셨고 여호와의 사자를 보내 발람을 막으려고 길에 서게 하셨다(22).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선지자라면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빼어 손에 들고 길에 선 것을 보아야 한다. 그러나 나귀에겐 보이는 여호와의 사자가 탐욕에 가려진 발람에겐 전혀 보이지 않았다.
발람을 태운 나귀는 그 사자를 보고 너무 무서운 나머지 길에서 벗어나 밭으로 들어갔다. 갑자기 가던 길을 벗어나 이상 행동을 하는 나귀를 다시 가던 길로 돌이키려고 발람은 채찍질했다(23). 그러자 여호와의 사자는 발람을 막아 세우려고 좌우에는 담이 있는 포도원 사이 좁은 길에 섰다(24). 나귀는 그 사자를 보고 겁에 질려 도저히 그 좁은 길을 갈 수 없어서 담에 대고 발람의 발을 그 담에 짓눌렀다(25). 발람은 계속 이상 행동을 보이며 자기 발을 다치게 하는 나귀에게 화가 나서 다시 채찍질했다(25). 그러자 여호와의 사자가 더 나아가서 좌우로 피할 데 없는 좁은 곳에 섰다(26). 오갈 때 없이 꼼짝없이 묶인 나귀는 죽음의 공포 앞에서 발람 밑에 엎드려졌고 결국 분노가 폭발한 발람은 자기 지팡이로 나귀를 사정없이 때렸다(27).
여호와의 사자는 나귀를 궁지에 몰아 나귀에 타고 있던 발람의 그릇된 마음을 깨우치려 했다. 평생 이상 행동 한 번 하지 않고 순종한 나귀가 갑자기 이상 행동을 하면 ‘뭐지? 왜 갑자기 나귀가 이러는 거지? 어디 아픈가?’하며 나귀를 걱정해 보고, 더 나아가 이 이상 현상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뭘 말씀하시려는 거지? 나에게 뭔가 문제가 있는가?’하며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상황과 환경을 통해 말씀하신 하나님의 음성을 듣길 바란다. 상황 너머에 숨겨진 하나님의 음성을 경청하길 바란다. 그러나 불의의 삯[탐욕]에 눈이 멀어버린 발람은 자신의 황금길 인생을 초장부터 망치는 나귀에게 화가 치밀어 올라 채찍으로 2번, 지팡이로 1번 때리며 분풀이 대상으로 여겼을 뿐 이런 깊은 영성은 흘러나오지 않았다.
주위가 여러분이 계획했던 것과 다르게 흘러가거나, 이상하게 잘 돌아가지 않으면 분노하고 좌절하기보다 하나님이 그 상황을 몰아가는 것임을 깨닫길 바란다. 우연히는 없다. 하나님이 하고 계신다. 잘 돌아가지 않는다고 분노한다면 이미 여러분도 탐욕에 젖어 있다는 뜻이다. 이를 속히 깨닫고 겸손하게 기도로 역추적해 보길 바란다. 여러분이 무슨 죄를 짓고 있는지. 성령께서 알려 주실 것이다.
지독한 탐욕으로 어두어진 발람에게 하나님이 나귀의 입을 열어 말하게 했다. "내가 당신에게 무엇을 하였기에 나를 이같이 세 번을 때리느냐?"(28) 그러자 발람은 이렇게 말한다. "네가 나를 거역하기 때문이니 내 손에 칼이 있었다면 곧 너를 죽였으리라"(29) 이에 대해 나귀는 "일생 동안 당신을 태운 내가 언제 당신에게 이같이 하는 버릇이 있었더냐?"(30)라고 물었다. 발람의 대답은 "없었지!"(31)였다. 이상 행동을 한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는 뜻이다. 벧후 2:16 자기의 불법으로 말미암아 책망을 받되 말하지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여 이 선지자의 미친 행동을 저지하였느니라 나귀가 엎드러지고,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을 걸어와 대화하는 바람에 가던 길이 멈춰졌다. 아직 발람의 눈에 여호와의 사자가 보이지 않았다.
나귀와 실랑이를 하며 악감정이 최고조로 올라갔을 때 그제서야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칼을 빼들고 길에 선 것이 발람에게 보였다(31). 발람이 본 것인가?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약 1:20)고 하셨다. 분노가 하늘을 찌르고 있을 때 이 세상 어느 누구도 거룩한 하나님을 볼 수도 없고 묵상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분노라는 악과 거룩하신 하나님이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보다 못해 여호와께서 발람의 눈을 밝히셨다. 탐욕의 비닐을 벗긴 것이다. 여호와의 사자를 본 발람은 자동적으로 머리를 숙이고 엎드렸다(31). 죄로 물든 영혼은 진짜 여호와를 경험하면 본능적으로 엎드려진다. 왜냐하면 거룩한 하나님 앞에 서면 하찮고 죄 많은 나의 존재가 여과 없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죄를 결코 숨길 수 없다. 그래서 머리를 숙이고 엎드릴 수밖에 없다. 사 6: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이렇게 마음을 낮추고 납작 엎드린 자에게 말씀을 주신다. 말씀을 들어도 낮춘 자에게만 들린다. 낮춘 자에게만 하나님이 보인다. 교만하여 배우기 싫고 듣기 싫고 훈계를 외면한 자들에겐 들리지 않는다. 여호와의 사자는 머리를 숙이고 엎드린 발람에게 나귀를 때린 것에 대해 책망하면서 왜 나귀가 이상 행동을 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했다. "너는 어찌하여 네 나귀를 이같이 세 번 때렸느냐 보라 내 앞에서 네 길[탐욕]이 사악하므로 내가 너를 막으려고 나왔더니 33 나귀가 나를 보고 이같이 세 번을 돌이켜 내 앞에서 피하였느니라 나귀가 만일 돌이켜 나를 피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벌써 너를 죽이고 나귀는 살렸으리라"(32,33)
발람은 이제야 "그들과 함께 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거절이었음을 깨닫고 "내가 범죄하였나이다"(34)라고 고백하면서 "당신이 나를 막으려고 길에 서신 줄을 내가 알지 못하였나이다"(34)라고 어두운 자신을 인정했고, "당신이 이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면 나는 돌아가겠나이다"(34)라고 자신의 탐욕을 꺾었다. 욥 42:5,6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6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잘못된 말과 행동]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 눅 5: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하나님을 경험하지 않는 자, 보지 못한 자, 경험하고 보았으나 쉽게 잊어버린 자들은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뻣뻣함을 바꾸지 않는다.
발람은 여호와의 사자의 말씀(33)에 비로소 자신이 어떤 상황인지 깨닫고 잘못을 인정했다. 그러나 나중에 사악한 꾀를 모압 왕에게 일러 주어(31:16), 이스라엘로 음란죄를 짓게 만든 것을 보면(25:1-18), 발람의 회개는 참된 회개라 할 수 없고, 다만 하나님의 사자가 너무 두려워서 거기에서 벗어나고자 회개한 것에 불과하다. 회개는 그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보고 진정한 회개임을 알 수 있다. 그 열매로 그 사람의 신앙을 알 수 있다.
결론 - 불의의 삯은 경청을 방해한다. 말귀를 못 알아듣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