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으, 이처럼 섭섭한 말이 어디 있을까? 당연히 주부의 입장임을 고려해달라는 말로 알아듣고 나는, 세월이 국자를 많이 건드려 놨구나! 하고 생각했다. 나의 치명적인 약점인 밴댕이 같은 소갈머리가 삐져나온 것은 그때문이었다.
"너만 철들었겠냐? 나도 철났다는 소리를 듣는단다." 못내 서운한 감정을 드러낸 셈인지라, 국자 왈, "지금 뭔 말을 하는 거여? 오빠네 큰집오빠 있능가 안."
하면서 펄쩍 뛰었다. 대충, 사촌형님의 처지를 모르지 않지만 자기의 처지도 난처하기 그지없다는 요지 같기는 한데 더 이상은 독해가 안 되었다. 다만, 순간적으로 가슴의 구름이 훌렁 벗겨지면서 안도와 함께 창피감이 몰려왔다. 그러면 그렇지. 뭔가 다른 뜻이 있지 않고서야 국자가 내게 그럴 리가 없었다.
"우리 형님? 근데 형님한테 뭔 일이 있대?" "워따매, 미치겄네. 오빠는 집안 일도 모릉가?"
내가 퍼뜩 정신을 차린 것은 여기서였다. 무슨 일일까? 사촌형님이 형수도 모르는 사고를 칠 가능성은 전무 했고……. 나는 부리나케 잰걸음을 걸었다. 그리고 그 다음 장면은 짧다.
"형님한테 무슨 일이 있어요?" 묻자, 형수가 대뜸 절벽 같은 답을 했다. "내가 아요? 형님한테 들으쑈."
애교 미(美)라고는 없는 말투 때문에 시집 와서 노다지로 핀잔을 듣고는 했지만 형수는 죽을 때까지 고칠 의사가 없나 보았다. 스무 고개까지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다섯 고개는 넘어야 소통을 맞춰줄 태세인데, 사실 형수와 바깥 일로 말 당기기를 하는 것처럼 피곤한 씨름은 없었다. 형수는 세속적 이해관계를 벗어난 모든 약속이나 활동을 모조리 위선적인 것으로 일단 낙인을 찍어 놓고 말해 왔으니.
형수의 반응으로 보아 사촌형님이 다급해하는 것은 틀림없이 집안 일이 아닐 터, 그리고 사촌 댁의 평안에 결정타를 먹일 운명의 일이 아닐 터. 훗날 생각해보면 내가 그 판에 말려들지 않을 첫 번째 기회는 일단 여기서 날아가 버렸다.
나는 사촌형님도 없는 집에서 가뜩이나 퉁명스런 형수만 쳐다보기 뭐해서 불가불 일어서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렇게 해서 다시 지나치게 된 자전거포 앞에서 공교롭게도 나의 귀향 임무를 알게 되었다.
자전거바퀴에 바람을 넣던 육촌이, "은제 왔냐? 잘 했다야. 안 그래도 전화 해볼락 했는디." 내가 내려온 것이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얼굴에 표정 한 자락 깔지 않고 목소리를 낮추었다.
나는 당황스러워서 할말을 못 찾고 인사만 꾸벅했다. 그러자, "이가(李哥)들이 이빨을 갈고 있어야. 고것들이 문가(文哥)들한테 두 번이나 져부렀냐 안."
육촌은 사뭇 진지하게 구느라 공기펌프가 쓰러지는 것도 잡지 못했다. 이가란 대촌(大村) 여섯 마을을 차지한 전주 이씨 문중이요, 문가란 대촌(大村) 두 마을에다 장터의 다수를 끼고 있는 남평 문씨를 가리킬진대, 육촌의 말만 들어서는 이 두 성씨가 무엇을 어떻게 한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내가 고장난 형광등처럼 한없이 깜박거리기만 하자 육촌은 더욱 낮게 속삭였다. 누가 엿듣는 사람도 없는데 공연히 혼자서 그러는 것이었다.
"느그 헹님이 이번에 큰 맘 묵었시야. 아다시피 펭판은 좋다마는, 그래도 지역사회서 공인이 되기가 쉽다냐. 말 그대로 공인 아니냐 공인."
그것이었다. 공인! 나는 공인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지목하는지 몰라 허겁지겁 집으로 와서 다시 형수를 찾았다.
"누가 무슨 공인이 된다면서요?" "읎마 뭔 공인?" "당숙네 형님이 그러던데요?" "웃겨, 선거 출마 헌다는 소린갑소." "선거라니요?" "내가 아요. 지자젠가 쥐잡젠가 헌다등만."
에게! 나는 풍선이 터지는 것처럼 일거에 긴장이 빠져나가 맥이 폭삭 풀려버렸다. 사촌형님이 나를 부른 절박한 사정이 기껏 군의원 선거였어?
이 배신감이 들 만큼 싱거운 뉴스를 소화하는 데 나는 한참 걸렸다. 사촌형님의 어디에 그런 야심이 숨어 있었는지 믿어지지 않았다. 인품으로 볼 것 같으면 말이 좋아 지역 유지이지 영락없는 사춘기 체질이어서 밖에서 싫은 말 한 마디만 들어도 최하 사흘씩은 잠을 설치는 소심쟁이였다.
군대 제대한 후 가업을 받아서 오늘날 밀래미 특산물협회 회장으로 환갑을 엿보기까지 동네 궂은일을 도맡아 왔으면서도 늘 거리낄 것 없이 의젓하지를 못하고 딴 데 눈 맞춘 여자를 두고 사는 양 조바심쳤다. 무슨 선거 나부랑이 같은 것들하고는 친할래야 친할 수가 없는 심성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그러나 상황은 분명히 그렇게 돌아가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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