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비(白碑)민간인학살지보성미력면 도개리산12번지추모행사(冤魂碑설치)
주최:한국전쟁전후민간인피학살자 전국유족회
주관:한국전쟁전후민간인피학살자 보성유족회
사회적공론회미디어 투쟁단
후원단체:광주전남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근로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광주여성회.(사)우리민족).통일WHO.(사)사단법인우리민족.광주시민단체협의회.전국농민회총연맹 순천시농민회.전국농민회보성군농민회.광주전남추모연대.21C광주전남대학생연합.광주교육희망네트워크.광주진보연대.전남진보연대.국민주권개헌행동.
冤魂碑설치(보성군 미력면도개리산 120번지
학산 윤윤기선생과 20여명의 민족주의자들이 온몸에 철사줄에 포박된채 총살되었다.
특히 학산선생은 온몸에 철사줄로 결박당해있었으며 양입술이 귀밑까지 찢어져있었으며 치아는 전부 빠져있었으며 가슴에는 수발의 총상을입은채 발견되었다.(학산차남 윤호철,학산동생윤점성.매제 임상춘유해수습)
사회적공론화미디어투쟁단 정재권대표
유족증언(윤봉순여사)
당시철사줄을 발견했던 박요종선생의증언
학살현장을 설명하는 현지주민 박요종선생은 어릴적 소먹이풀을 베기위해 이곳에온 그는 철사줄과 신발을 발견하였다.
유족윤봉순(80세)여사가 제를 올리고있다.
보성군 미력면 도개리산120번지학살현장에서
백비민간인학살지순례단이 ,보성학살지 1차순례일정을 마치고 결의를 다지는 화이팅!!!
겨레의 참 교육자 학산선생을 기리며
(詩人이윤옥 )
그의 이름을 가리고
겨레의 교육을 말하지 마라
애국을 논하지 마라
거칠고 메마른 들판에
천포간이학교세워
잠자는 조선의 넋을 일꺠우신 임
신사참배 창씨개명 거부하며
온 몸으로 일제에 맞서 지켜낸 조국
두 개로 쪼개짐에 비통해 하던일
어이타 예재 고갯길에서
그 푸른뜻 꺾였는가
흘러가는 흰 구름아
너는 알겠지
학산이 지켜낸 겨레사랑마음을
뭇 산새들아
너희는 알겠지
학산의 못다이룬 꿈을
보성군미력면 도개리산12번지 학살현장에 원혼비 표식을 설치하다.
보성군 미력면 도개리산12번지 민간인학살 현장(선용규3대보성회장.윤봉순유족.최성현2대보성유족회장
보성군미력면 도개리산12번지 학살현장은 보성결찰서에서 약10Km정도의 거리에있다.보성에서 광주를 가기위해서는 반드시 이길을 이용해야한다.일명 예재라 불리는 이고개는 험하기로 소문이 나있다,지금은 아스팔트로 포장되어있지만 예전에는구불구불한 신작로였다.1950년(음)6월7일 보성경찰서 경찰들은 후퇴를 하루앞두고 보성지역의 민족주의자 20여명을소환하여 이곳 예재에서학살을 하고 도주하였다.
대부분 20~30대의 보도연맹원으로 알려지고있으며 학산 윤윤기선생(50세)은 보도연맹원도 이닌데도 이들과 함께 학살당하였다.
[이봉하보성경찰서장]
이봉하(전)보성경찰서장(보성경찰서장 재임기간:1950년 5월 15일~1950년10월 12일)까지 재임하였으며 전남 고흥출신으로 알려져 있으며 일제 강점기시절 고등계 형사출신으로 재직하였다.해방이후에 이승만의 일제시대 순사출신의 재임용에 따라 영암,강진의 사찰계주임으로 재직하던중 이승만의 특진발령으로 보성 경찰서장으로 임명되었다.1950년 5월 15일 보성 경찰서장으로 부임하여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부터 보도연맹원및 사상의심자들을 법적절차없이 1,000 여명 이상 학살을 한 서장으로 악명이 높았다.
한국전쟁시 보성경찰서가 인민군에의해 1950년 7월 24일 공식 접수되어 1950년 10월 5일 퇴각한것으로 기록 (보성군지참조)으로 보아 이봉하의 보성경찰서장 재임기간은 불과 3개월의 짧은 재임기간이었지만1.000 여명 이상의 민간인을 학살한 경찰서장이었으며 학살방법또한 타지역에 비해서 악랄하고 처참하였다.
한국전쟁전후에 발생하였던 민간인 학살 에 대한 방법, 고문, 시신처리,등에대하여 철저한 연구조사를 하여 일제강점기에 충성하였던 군인,경찰들의 비인간적인 심리상태를 파악해여할것으로 여겨진다.
진실화해위원회는 보성지방의 민간인 학살진상규명이 미흡한채 졸속 ,축소되어 조사를 마치고 종료하였다. 미력면도개리산12번지에서 학살된 보도연맹원들이 20여명이었는데 진실화해위원회에 신고된 사건은 겨우2건에 불과하였다.(진실화해위원회 조사관:박현정 )학산선생은 진실규명조사결정이 확정되었으나 학살사건분류에 [보도연맹]으로 분류되어 4차례 조사를 받았으며 유족이 수차례 보도연맹사건 정정을 요구하였으나 묵살당하였다.(상임위원 김동춘 보도연맹팀장 한성훈.조사관 박현정)이는 진실화해위원회의 성과주의에 의한 졸속조사로서 진실규명은 뒷전이었다.학산의 유족들은 조사결정을 취하 하였다.
비단 학산선생뿐만 아니라 다른 학살유족들도 영문도 모르고 보도연맹으로 분류되어 결정문을 받은 경우가 허다하다.유족들이 어린나이에 부친이 학살당하였고 보도연맹명부가 발견되지 않고있기때문에 조사관의 일방적조사방법에 의해서 보도연맹으로 분류가되었다.앞으로 제2기 진실화해위원회가 가동되어 조사를 개시할때 반드시 이문제를 짚고가야만할것이다.
이봉하는 그후 화순, 담양, 장성 경찰서장을 끝으로 일선에 물러난후 일체의 공식기록이 남아있지 않으며 행방이 묘연한채 세인의 입에 희대의 살인마로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2005년 6월경 전남 지방경찰과 인사과 전화조회 확인)
학산과 이봉화의 관계는 일제 강점기시절 1944년 학산이 항일독립자금과 양정원운영자금조달을 위해 강진군 칠량면 영동리소재 고령토 광산을 운영할때 이봉하는 강진경찰서 사찰계에 근무하고있었다는 정황으로 보아 일제강점기시절부터 어느정도 이봉하의 뇌리와 정보망에 학산이 각인되어 있었을것이라는 추정이다.
2003년5월25일
한국전쟁전후민간인피학살자 전국유족회 윤호상 상임대표의장
2003년 5월25일 학산 윤윤기선생의 학살현장 (전남 보성군 미력면 도개리산 12번지 )에서 실로
53년만에 위령제를 봉행하였다.
신록의 계절 5월이 무색할만큼 엄청난 폭우와 비바람이 몰아쳤다. 학산선생이 하늘에서 피눈물을 쏟으시는것 같았다. 유족및 친지.호남지방 통일인사들 약200 여명이 참여한가운데 위령제가 봉행되었다.조국통일 범민족연합 남측본부 나창순의장의 추모사. 장기수 김영승선생.통일운동가이신선생,의 추모사에이어유족들은 쏟아지는 비와 함께 흐느낌이 이어졌다.
학산의 네째아들 윤호상이 위령제에 바치는 글을 낭독 할때 폭우는 계속퍼부었으며 유족들의 오열은 이어졌고 참석한 모든분들도 숙연한 마음으로 학산선생의 비참한 최후를 돌이켜 보았다.
" 위령제에 바치는 글 "
1950년 (음) 6월 7일 당시 친일 고등계 경찰출신 보성경찰서장 이봉하로부터 시국에 대한 자문을 구한다는 경찰의 통보를 받았으나 건강을 이유로 두치례거절 하였으나 세번째는 무장경관의 호위속에 자진출두 형식으로 출석 하였다. 그이틑날 보성군 미력면 도개리산 12번지 국도변에서 온몸을 철사줄에 묶인채 코를 짓이겨 놓고 치아가 전부 망가진채 입을 양귀밑 까지 찢어졌고 온몸에는 수발의 총탄을 맞은채 도저히 사람의 형상으로는 알아 볼수없는 처참한 형상의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하늘도 울고 땅도 울었습니다
아버님의 처절한 주검 앞에 조국의 강산과 겨레가 통곡 했습니다.
이제 어쩌란 말입니까? 우리의 조국과 민족은 어디로 가야하고 어떻게 살아 가야합니까 ?
돌이켜 보건데 일본 제국주의에 강탈되어 식민 통치된 조선의 해방을 위하여 일신상의 안위와 영화를 물리치고 분연입지 전 재산을 통 털어 무료 교육기관 양정원을 설립하여 한글과 역사교육을 시키셨고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반대하며 조선의 양심세력에 자유의 햇불을 활활 타오르게한 지사요, 의사요,투사이셨고 조선국민회와 조국광복회의 핵심성원으로 만주독립군부대에 철강석을 유출하여 군수품제조에 협력하였고 상해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전달하였으며 몽양선생과 뜻을 같이하여 건국 동맹의 맹원으로 이상적인 자주독립국가 건설을 꿈꾸셨던 아버님 !
해방 이후에는 외세 개입반대, 단선,단독정부수립반대.분단 조국의 반대,좌우극한대립의 반대로 통일 조국의 미래를 위해 분골쇄신하며 백의 종군 하셨습니다.
통일정부수립의 확고한 신념과 의지가 이승만을 비롯한 친일 매국노 일파와 분단 획책주의자, 매판 자본가들이 학산 선생을 음해하고 시기하고 모함을하여 친일 고등계경찰출신 이봉하 보성경찰서장을 하수인으로 하여 결국 보도연맹원학살때 힘께 묶어 이곳 예재에서 학살을 시키고말았습니다.
몽양 여운형선생, 백범 김구선생, 학산 윤윤기선생과 같은 애국 지사들의 암살 책임자외 배후세력은 50 여년이 넘었지만 지금까지도 밝혀 지지않고 있습니다.
들으라 !
* 민족을 배반하고 호의호식 하고 있는 친일, 친미 외세 의존적 매국노 들이여!
* 국토를 동강 내고 권력과 영화를 누리고 있는 분단 획책 주의자 들이여 !
* 외세를 등에 업고 권력과 유착하여 국민의 피를 뽑아 먹고 사는 매판 사이비 자본가 들이여 !
역사는 결코 그대들의 죄를 용서 히지 않을 것이다. 하늘을 손바닥으로 가릴수 없듯이 진실과 정의는 영원 불멸의 민족의 수레바퀴가 되어 앞으로 전진 할것이다.
1950년 7월 22일 입과 귀가 찟기던 고문 현장이었던 보성경찰서, 보성군 미력면 도개리산 12번지 학살현장을 오늘 만천하에 공개하며 다시는 이 땅에 이러한 천인이 공노할 비극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을 확실하게 밝히는 바입니다.
침묵의 54년 !
통한의 54년 !
서러움의 54년!
천추의 한을 품은채 54년을 어머님과 우리 칠남매는 모진 삶을 살아왔습니다.
아버님의 뒷바라지만 하셨던 어머님께서 갖은 풍파에 시달리며 우리 칠 남매를 성장시켜놓으시고 향년 58세를 일기로 그토록 그리워 하셨던 아버님 곁으로 떠나 가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못 이루신 부부의 정을 하늘 나라에서 마음것 누리 시옵소서. 그동안 연좌제의 혹독한 감시와 탄압으로 한많은 생 을 간직하고 살아온 큰형님, 두째 형님도 아버님, 어머님 곁으로 가셨고 세째 형님은 자주 통일의 염원을 안고 가깝고도 먼 길을 떠나 지금도 자주통일 세력의 선두에서 아버님의 뜻을 이어 가고 있습니다.
아버님이시여 !
오늘 이자리는 봉순, 종순 , 유복녀인 복순, 그리고 못난 네째 아들과 아버님의 손자들이 자리를 같이 하고 있습니다.아버님의 얼굴도 모르고 태어난 막내 유복녀인 복순이가 복스럽게도 착한 신랑을 만나 세 자녀를 낳아 건강한 삶을 누리고 있습니다.
아버님이시여 !
당신께서 당하신 몸부림치는 고통, 죽음 그 무엇으로 짐작 할수 있겠습니까 만은 피와 피를 통하여 온 몸속에서 아버님의 고통이 느껴지며 머리속에는 당시의 처절한 상황이 또 다시 전개 되어 오는듯 합니다.
위풍 당당하신 언행, 준엄하게 불의를 꾸짖으시며 대의를 굽히지 않았던 강인한 의지,아버님은 마지막 삶까지도 한시를 읆으시면서 생을 마감하셨습니다.이제 이렇게나마 54년이 흘러간 지금에서 아버님의 삶을 몇자의 글로 표현 하기에는 너무부족합니다. 남겨진 못난 네째아들은 두 누나와 복순이와 함께 힘을 모아 아버님의 사인을 정정당당하게 규명하고 다시는 이 땅에서 이러한 불행한일이없는 나라가 되기를 바라면서 1950년 7월 22일 이곳 학살 현장에서 억울하게 운명을 같이 하셨던 20여명의 희생자의 영혼 앞에 고개 숙여 슬픔의 눈물로 위로 드리오며 맑은 술을 올리나니 향음하시옵소서.
아버님 !
지금도 하늘 나라 어디에서 민족과 겨레의 앞날을 위하여 걱정하고 계실 아버님.
이제 편히 눈을 감으시고 부디 어머님과 행복한 영혼이 되시 옵소서.
2003년 5월 25일
불효소자 호상 올림
첫댓글 진실규명의 역사의귀한 발자취가 결코 헛되지않을것입니다.
폭염속에서 굳은 의지를 굽히지 않고 백비민간인학살순례단모든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이승만은 민족의 훌륭한 인사들을 이첨런 학살하고 부산으로 도주하였습니다.이게무슨 나라고 지도자입니까. 살인마에 불과합니다 문재인정부도 고약에대한 약속을 이행하여야하고 국회는 잠자고있는 과거사법을 조속히 통과시켜줄것을 촉구합니다.
15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게 없습니다. 단지 그때는 함부로 위령제를 지낼수도 없었던 시절이었고
지금은 그나마 마음대로 원혼들을 위로할 수 있게 된게 한발짝 나아갔다고나 할까요?
하루빨리 진실규명이 되어 가신분들의 명애를 회복시켜드리고 남아있는 유족들의 가슴의 엉어리를
풀고 편히 저세상으로 가서 뜻뜻하게 부모님들과 해후하는 그런날이 빨리오기를 고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