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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쥐 친구
강벼리
쉿,
박쥐같은 친구를 만났다
이건 비밀이지만
그 애는 모른다
그렇다고
그 애가 박쥐처럼 생겼거나
검은 망토를 휘두르고 있는 게 아니다
살금살금 나만 붙어 다니는
그 애 그림자에서
우연히 날개가 숨어있는 걸 보았다
처음엔 잘못 봤다고 생각했다
피구시합 하는 날,
그 애는 내가 싫어하는
하진이 팀에 가서 파닥파닥 응원을 했다
막판에 우리 팀이 이길 것 같으니까
검은 날개를 잽싸게 감추고
나한테 쪼르르 달려왔다
오늘은 비가 후드득 오는데
우산 안 가져 온
내 눈치를 얼른 보다가
슬그머니 사라졌다
나랑 친한 줄 알았는데
하진이 우산 속에 찰싹 붙어 가는
그 애 뒷모습에서
검은 날개가 펄럭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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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와 웅덩이
고영미
웅덩이가 비에게
등 좀 긁어 달라했어.
등이 어딘데
여기
요기
조기
조금 더 위에
아이 간지러
웅덩이랑
비랑 호호
만날 때마다
그날 생각나
자꾸 웃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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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집 이야기
박예분
지난가을, 할아버지 병원에 입원하자
시골 식구들 뿔뿔이 흩어졌다
할머니는 우리 집으로 오시고
강아지 아롱이는 삼촌네로
다롱이는 이모네로
시골집 살림살이는 그대로 있다
가끔 삼촌이 둘러보고 이모가 둘러보며
마을 소식을 물어 나른다
지난 일 년 동안 오수댁 할머니 돌아가시고
아랫집 할머니도 돌아가시고
윗동네 김씨 할아버지는 요양원으로 가시고
박씨네만 마을에 남아 있다고
나는 속으로 안부를 묻는다
할아버지가 뒷산에 심은 감나무 밤나무 대추나무
할머니가 가꾸던 텃밭과 너른 마당에 피고 지는
수선화 철쭉 장미 바늘꽃 족두리꽃 맨드라미꽃
봉숭아 꽃씨 톡, 톡,
할머니 할아버지를 기다리는 이름들
조용조용 불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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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하였다면
정광덕
펼친 신문지 위에
북극곰 두 마리가 올라서요.
반 접은 신문지 위에
한 북극곰이 다른 북극곰을 업어요.
또 반 접은 신문지 위에
한 북극곰이 다른 북극곰을 업은 채 한 발로 서요.
또 반 접은 신문지 위에
한 북극곰이 다른 북극곰을 업은 채 한 발로 서서 발뒤꿈치를 들고 겨우겨우 버티다가
그만 신문지 밖으로 나동그라져요
후유, 신문지 접기 놀이니까 망정이지 방하였다면 어쩔 뻔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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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신발
한상순
책상 앞으로 나갈 때도 헐러덩
뒤로 물러날 때도 헐러덩
옆으로 비켜날 때도 헐러덩
헐렁헐렁해진 털신이 자꾸 벗겨졌어
거실에 나와 이리저리 옮겨 다닐 땐
한 짝 두 짝, 아예 도망친 적도 많았지
이런, 신발이 다 닳았구나
신발을 다시 신겨주며 아줌마가 말했어
자, 새 신발 신자!
아줌마가 축 늘어진 털신을 벗겨버리고
멋진 실리콘 신발을 신겨주었어
어어,
슬쩍 한 번 걸어보려 했더니 안 되네?
앞으로도 뒤로도 옆으로도 옴짝할 수가 없네?
어휴,
이번에도 꽉 낀 새 신발 길들이려면
눈물 꽤나 쏟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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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꽃장화는 디카시의 정수를 보여주네요.
시골집 이야기는 참 정겹고요,
빙하였다면, 은 정말 비유가 적절해서 가슴 아픈 공감을 일으키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