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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 다다오(安藤忠雄)를 찾아가는 일본 여행
I. 첫째날
2009. 11. 19.부터 22까지 3박4일간 CAP 8기 동기들과 일본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원래 한 달 전에 계획되어 있던 졸업여행인데, 한예종측에서 신종플루를 이유로 일방적으로 1박2일의 경주여행으로 변경하여, 한번밖에 없는 졸업여행인데 이렇게 끝낼 순 없다며 CAP 8기 회장단에서 학교와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일본여행을 추진한 것이죠. 그리하여 졸업 직후인 19일자로 여행계획을 잡았는데, 처음에는 과반수 이상의 동기들이 여행을 가겠다고 신청하였다가 여행날짜가 다가오면서 이런 저런 이유로 하나씩, 둘씩 빠져나가 최종적으로는 13명의 동기들이 김봉렬 교수를 모시고 떠나게 되었습니다. 사실 저도 여행을 앞두고 아내가 신종플루 증세를 보여 여행사엔 보류 통지를 하고 시일을 지켜보는데, 정작 아내가 회복되어감에 반하여 저에게 몸살감기 증세가 나타나 '이거 나도 신종플루에 걸리는 것 아닌가'하는 걱정이 되더군요. 그러나 이런 기회를 그냥 흘러버리면 다시 이런 기회는 오지 않을 것이기에 눈 딱 감고 여행을 강행하였습니다.
11. 19. 오전 10시 힘차게 인천공항의 상공을 떠오른 비행기는 1시간 40분 만에 오사카(大阪) 간사이(關西) 공항에 도착합니다. 보통 다른 나라 공항에 도착하면 현지 시간으로 시계바늘을 조절하는데 일본은 같은 표준시를 사용하니 그럴 필요가 없는 것 하나는 좋군요. 간사이 공항은 저에게는 좋은 공항으로 각인되어 있습니다. 오래 전에 간사이 공항에서 비행기를 갈아탈 때에 제가 갈아탈 곳을 찾지 못해 헤매는 것을 보고 공항 여직원이 단지 설명만 해줄 뿐 아니라 갈아타는 곳까지 꽤 먼 거리를 동행하여 그곳 직원에게 잘 안내해주라고 부탁까지 하고 가는데, 그 친절함에 감탄하였었죠. 그 여직원도 지금쯤 시집가서 애 몇 낳고 잘 살고 있겠죠? 입국수속을 하는데 이곳도 신종플루 때문인지 체온 감지기를 설치했네요. 저는 순간 감지기에 걸려 입국을 거부당하면 어떡하나 걱정하는데 다행히 기준치를 넘지는 않은 모양입니다. 공항건물 밖으로 나서는데 철도가 있네요? 공항이 워낙 커서 공항 내를 오가는 철도가 있는 모양입니다.
마중 나온 버스에 타니, 가이드가 자기 소개를 합니다. 황수남이라고 합니다. 순간 황수관 박사가 생각나는데, 그렇지 않아도 여행객들이 황박사님 동생이냐고 묻는다네요. 간사이 공항이 인공섬에 건설된지라 육지로 연결된 긴 다리를 건너면서 황가이드는 자기 본분을 발휘합니다. 왼편으로 우리가 들어갈 오사카, 그 옆으로 고베, 오른편으로는 와카야마, 앞에 보이는 산들의 연봉을 넘어가면 나라 등등.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우린 어느 빌딩 꼭대기에 있는 식당부터 들릅니다. 식당에선 오사카가 잘 내려다보이고, 우리가 건너온 간사이 공항도 잘 보입니다. 여기서 보니 간사이 공항이 바다를 매립하여 만든 인공섬이라는 것을 한 눈에 알겠습니다.
가. 사야마이케(狹山池) 박물관
처음 우리가 들르는 곳은 사야마이케(狹山池) 박물관. 한국인이 많이 오는지 한글로 된 팜플렛도 있습니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616년경의 댐식 저수지에서 발굴한 유물을 전시하는 박물관입니다. 다른 박물관도 많을 텐데 왜 하필 저수지 유물 박물관이냐고요? 이번 여행의 주제가 일본이 낳은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다다오(安藤忠雄)의 건축을 찾아가는 여행인데, 사야마이케 박물관도 바로 안도가 설계하여 만든 박물관입니다. 박물관을 찾아가는 차안에서 김교수의 설명이 이어집니다.
안도가 고베 출신이라 이 지역에 안도의 건축물이 많은데, 김교수는 일본에서 건축가로 성공하려면 3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고 합니다. 첫째는 지방출신으로 그 지역 상공인의 전폭적 지지를 받아야 한답니다. 일단 지역 상공인의 눈에 들면 일본 기업가들은 그 건축가를 전폭적으로 밀어준다는군요. 둘째 키가 160cm를 넘으면 안 된답니다. 좀 의아하지요? 일본 기업인들이 대체로 키가 작아 자기가 올려다보아야 할 정도로 키가 큰 건축가라면 지원을 않는다나요? 하긴 좀 만만해 보여야 밀어줄 마음도 생기지 자기를 압도할 정도로 키가 크면 그런 마음이 잘 안 생기겠지요? 셋째, 마흔 살 전에 결혼하면 안 된답니다. 이건 또 뭔 소리? 처음 건축가로서 입지를 넓혀갈 때에는 먼저 부띠끄를 경영하는 옷집 아줌마들이 의뢰하는 소규모 건축을 많이 하게 되는데, 이 옷집 아줌마들이 노총각 건축가에 설계를 많이 맡긴다네요. 결혼도 미루고 오직 건축에만 열심히 매진하였다고 생각하는 것이라는데, 에이! 그보다는 아무래도 유부남보다는 노총각이 조금 더 끌려서 그런 것 아닐까요? 김교수가 웃자고 얘기한 것이겠지만 아무튼 재미있네요.
물론 안도도 바로 이 3가지 조건을 다 갖추었겠지요. 특히 안도는 공고 출신으로 정식 건축은 공부해보지 못했답니다. 심지어 젊었을 때 건축사 사무실 시다로 일하면서 부업으로 권투 스파링 파트너를 했는데, 27살에 인도 여행을 갔다가 건축에 대한 깨달음을 얻고 돌아와 본격적으로 건축을 공부하였다는군요. 안도가 이곳 기업인들의 눈에 띄자, 이곳 기업인들은 일본이 잘 나갈 때에 전세계에 문화 기부를 하면서 그 조건으로 안도 작품으로 건축하도록 하여 안도로 하여금 세계적으로 클 수 있도록 하였다는군요. 이런 명성에 동경대 사상 첫 고졸 출신 교수로 영입되기도 하구요. 물론 60세에 동경대 교수가 되어 2년 만에 정년퇴직하고, 그 사이 다른 과에 비해 상대적으로 뒤쳐졌던 동경대 건축과는 안도로 인하여 위상이 올라갔다니, 동경대로서는 남는 장사였을 듯 합니다.
사야마이케는 고대에만 존재하던 저수지가 아니고 지금까지도 저수지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곳이 넓은 평야지대이니 지금도 이 물을 필요로 하는 농토는 그대로 있는 것이지요. 저수지 댐으로 올라가니 초등학생들이 한창 그림을 그리고 있더군요. 후후! 저희 어렸을 때도 이렇게 야외로 사생대회를 나오지 않았습니까? 저수지 앞에는 일본 역사공원 100선에 들었다고 축하하는 펼침막이 걸려있네요. 작년에 도야마현에 있는 3000m가 조금 넘는 다데야마(立山)에 오를 때 다데야마 밑의 산지에서 마시던 샘물에서도 일본 샘물 100선에 들어있는 샘물이라는 안내판을 보았는데, 일본사람들은 무슨 무슨 100선이라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박물관 건물로 들어섭니다. 전시실은 지하에 있어 지하로 내려가려는데, 지하전시실 지붕은 얕은 물로 채워져 있고 물은 벽면을 따라 폭포처럼 아래로 흘러내리도록 되어 있으며, 흘러내린 물은 지하 광장에서 흔들흔들 하며 건물의 벽체와 하늘을 비추고 있습니다. 저수지 박물관이니 이런 식으로 설계를 했나요? 건물의 벽면은 직사각형의 콘크리트 구조물을 그대로 쌓아올린 듯이 아무런 색깔로도 포장되지 않은 콘크리트가 그대로 노출되어 있고, 콘크리트 면에는 규칙적으로 조그만 원들이 파여 있습니다. 김교수 얘기로는 일부러 이런 원을 디자인한 것이 아니고 철근 콘크리트를 양생하고 겉의 거푸집을 제거한 후 연결나사가 있던 부분을 예쁘게 마감하다보니 이런 규칙적인 원이 생기는 것이라 합니다.
이 박물관 건물뿐만 아니라 계속되는 안도의 작품은 이런 콘크리트 입방체를 직선으로, 곡선으로 때로는 사선으로 연결하며 일체의 장식을 배제하고 색깔도 따로 사용하지 않은 콘크리트 그대로의 색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처음 일본에서는 안도가 고졸 출신이라 배운 게 없으니 저렇게 단순하게 건축하는 것이 아니냐는 비웃음도 받았다고 하는데, 이런 안도의 건축이 때마침 세계적으로 유행하던 미니멀리즘의 예술 사조에 부합하는지라 세계적으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는군요.
안으로 들어가보았습니다. 안에는 절개한 높이 15.4m 댐의 종단면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데, 단면에는 약 1,400년간의 개수한 역사가 토층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당연히 가장 밑에는 고대에 쌓았던 댐의 단면이겠지요. 김교수는 하단부의 한 토층을 가리키며 한 층을 다지고, 그 위에 다시 흙을 깔고 다지는 판축(版築) 기법으로 치밀하게 다진 토층이라며 이러한 판축기법은 한반도에서 건너간 것이라고 합니다. 연약지반에 제방을 쌓기 위해 나뭇잎과 나뭇가지를 깔아서 기초를 만드는 부엽(敷葉)공법도 보이는데 판축기법과 부엽공법은 같이 많이 쓰이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판축기법이나 부엽공법은 댐을 치밀하게 단단하게 만드는 기법인데, 풍납동의 풍납토성에도 이런 기법이 사용되었지요.
그런데, 댐의 위의 단면에서는 이러한 판축기법이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고대에는 한반도에서 직접 한국인 - 주로 백제인이겠지요? - 들이 건너가 댐공사를 지도, 감독하였지만 후대에는 이런 기술 전수가 되지 않으니 판축기법이 사라진 것 아닐까요? 설명문에는 부엽공법이 고대 중국에서 탄생되어 한반도를 거쳐 일본에 전래되었다고 쓰여 있는데, 이 설명문은 바뀌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얼마 전에 전남 보성군 조성면 조성리 저습지 유적에서 풍납토성보다 최소 200년 이상 전에 부엽공법을 사용한 보(洑) 시설이 발견되었기 때문이죠. 이 연대측정이 맞다면 부엽공법이 중국보다 앞서서 한반도에서 사용된 것이기 때문에 이 설명문도 바뀌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걸 이들에게 알려주어야 하는데... 김교수! 김교수가 관련학자들과 이런 일을 해야 하는 것 아니유?
박물관에는 이외에도 고대의 수조(水槽), 수로, 댐공사 도구 등과 개수공사에 공이 큰 행기(行基), 홍인(弘仁), 중원(重源)스님의 좌상 조각이나 초상화도 있습니다. 박물관을 나오면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제천의 의림지, 김제 벽골제, 밀양 수산제 등을 생각해봅니다. 그중 지금까지도 저수지로서 역할을 하고 있는 의림지의 경우에는 왜 이곳 사야마이케처럼 멋진 건축가의 박물관으로 사람을 끌어들이지 못하는가 하는 아쉬움이 있네요. 비록 의림지 주변 소나무 숲을 2006년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20호로 지정하였다지만, 일본보다 더 역사 오랜 의림지를 지금처럼 물위에 오리 놀잇배나 띄우고 관광지로 사람 몰이할 생각을 하지 말고, 사야마이케처럼 역사와 예술을 하나로 하여 좀 더 품격 있는 역사체험장으로 할 수는 없을까 생각해봅니다.
나. 오사카 시립 동양도자미술관
다음 행선지는 오사카 도심의 나카노시마(中之島) 공원에 위치한 오사카 시립 동양도자미술관. 도심순환도로(環狀線)를 타고 오사카 시내로 들어갑니다. 일본 도시에는 이런 고가도로가 잘 발달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동경에서도 느낀 것이지만 가다보면 일본의 고가도로는 옆의 빌딩에 바짝 붙어있는 것을 자주 보게 됩니다. 건물에 입주한 사람이 창문을 열면 바로 눈앞에서 차들이 달리고 있는 것인데, 왜 이리 고가도로를 건물에 바짝 붙인 것일까요? 일본 땅값이 워낙 비싸서 경제적으로 도로 건설을 하다보니 그런가요? 우리나라 같으면 저렇게 고가도로를 건물에 붙여 건설하면 당장 난리날 것 같은데...
또 하나 느끼는 것은 일본 도로에 고급 승용차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분명 우리보다 경제력이 훨씬 높은 나라이거늘 일본인들의 성격 탓인지 거리에는 소형차, 중형차들만 보입니다. 이것만은 본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동안 우리나라는 승용차가 마치 신분의 척도인양 고급 승용차를 선호하였는데 - 나 또한 예외일 수는 없겠지요. - 그러나 이제 우리나라도 승용차가 일상화 되어 있고, 그렇다면 차라는 것은 결국 이동수단에 불과한 것인데 그렇게 휘발유 많이 잡아먹는 고급 승용차를 굳이 그렇게 타야 하겠습니까?
이 동양도자미술관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아타카(安宅) 컬렉션을 기증받은 것이 계기가 되어 지어졌답니다. 아타카 컬렉션이란 안택산업 주식회사의 회장 아타카 에이치(安宅 英一)가 수집한 한국 도자기 793점과 중국, 일본, 베트남 도자기 등을 합한 1,000여점의 컬렉션을 말하는데, 1977년 위 회사가 2차 오일쇼크로 도산하자 안택 컬렉션이 유출될 것을 우려한 - 이미 1차 오일쇼크 때 일부 작품을 팔았답니다. - 일본 국회가 보존 결의를 하여 1982년 이를 수용하기 위해 이 미술관을 만든 것이랍니다.
이제 미술관 안으로 들어가 한국 도자기 전시실부터 들어갔습니다. 기획 전시실을 제외하면 전시실의 절반이 한국 도자기 전시실일 정도로 한국 도자기가 많습니다.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군요. 한국 도자기가 그렇게 많을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멋진 고려자기, 조선백자들이 일개 오사카 시립미술관에만도 이렇게 많다니!!! 이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일본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 대부분 일제 시대를 거치며 일본놈들이 약탈해 간 것이 아니겠습니까? 막연히 일본놈들이 한국 도자기를 많이 약탈해갔을 것이라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한국에 오면 당장 국보로 지정될 많은 도자기들이 일본땅에 있다니...
또 하나의 전시실은 이병창 박사의 기증 도자실입니다. 이박사는 1949년 초대 오사카 영사를 지낸 분으로 일본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협화상사주식회사를 설립하여 목재무역업에 종사하며 많은 도자기를 수집하였다는데, 1999년 그동안 수집한 한국도자기 301점과 중국도자기 50점을 이 미술관에 기증하였다는군요. 이박사는 오랜 숙고 끝에 한일친선에 도움이 되고 재일한국인의 지위향상에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하고 이 도자기들을 이곳에 기증했다고 하는데, 글쎄요... 이런 멋진 도자기들을 굳이 일본땅에 남겨두었어야 할까요? 저는 이박사의 수집품을 감상하면서도 이박사의 뜻에 동의할 수 없어 조금은 착잡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박사가 소장품을 일본에 기증하게 된 데에는 당시 한국과 뭔가 코드가 맞지 않은 데에 있었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처음 이박사는 한국에 기증할 뜻을 가지고 자기가 아끼던 백자 하나를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하며, 온도와 습도를 맞춰 전시해줄 것을 바랬는데, 당시 박물관에서는 그만한 요구조건에 맞출 설비가 없다고 하였고, 그럼 자기가 돈을 내어 전시실을 짓겠다고 하였는데도 이 또한 성사되지 않아, 한국의 유물보관 능력에 확신을 갖지 못하고 일본에 기증했다고 합니다. 이게 사실이라면 당시 한국 정치가나 문화재 관리원들은 도대체 일을 어떻게 했길래 이 아까운 한국도자기를 이곳에 기증토록 했단 말인가요?
다음에는 일본 도자기 전시실로 들어가보았습니다. 다 아시다시피 일본 도자기는 임진왜란 이후 한국 도공들을 잡아가며 눈에 띄게 발전하지 않았습니까? 김교수는 임진왜란 때 일본 최대의 전리품은 도자기라고 말하더군요. 일본이 임진왜란 때 약탈해가 국보로 애지중지 하는 이도다완이라는 것도 당시 조선의 서민들이 많이 애용하던 막사발이 아닙니까? 전시실로 들어가니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스모 선수들의 씨름 모습을 표현한 1680년경의 도자 인형입니다. 눈매에서 역시 한국인과 다르다는 것을 느끼게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도자기에서는 화려한 색깔을 자제한 은은한 맛을 느끼게 하는데, 일본 도자기에는 빨간색, 파란색, 녹색 등의 원색을 그대로 사용하여 금방 눈에 띄기는 하지만 깊은 맛은 느끼지 못하겠습니다.
한국, 일본 도자기 전시실이 있으니 중국 도자기 전시실도 있겠죠? 당나라 때의 손잡이가 달린 상아 모양의 잔이 있는데 설명에 3채(三彩)라고 되어 있는 것을 보면서, 퍼뜩 학교 다닐 때 배운 당삼채(唐三彩)가 생각났습니다. 당나라 때 장안은 인구 100만이 넘는 국제도시라 외국문물도 많이 유입되었을 텐데, 이 잔도 서역의 영향을 받은 것 같습니다. 또 도자기의 색깔이 한국에서는 전혀 비슷한 것을 찾아볼 수 없는 하늘색 비슷한 색이 나는 도자기가 있는가 하면, 나뭇잎의 작은 잎맥까지 세밀하게 표현된 도자기도 있습니다. 아무래도 나뭇잎을 그렸다기보다는 실제 나뭇잎을 사용한 것 같습니다.
인접한 동양 3국이지만 도자기만 두고도 어느 나라 도자기인지 알 수 있을 정도로 나라마다 특색이 있군요.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는 동양 3국의 도자기를 비교하면서 조형의 3요소를 형(形)·색(色)·선(線)이라고 할 때 중국도자기는 형태에, 일본도자기는 색채에, 한국도자기는 선에서 그 특징을 찾을 수 있다고 평했답니다. 또 중국도자기는 형태의 완벽성과 위엄, 일본도자기는 색채의 화사함과 장식성이 특징이라면 한국도자기의 아름다움은 무엇인가 우리의 가슴을 저미게 하는 것을 곡선 속에서 느끼게 한다는 것이에요. 또 어떤 이는 중국도자기는 보기에 좋고 일본도자기는 사용하기에 좋지만 한국도자기는 그것을 어루만지며 사랑하고 싶어진다는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고 하고요. 어쨌거나 저는 한국 사람이라 한국 도자기에 더 끌리는 것은 어쩔 수 없나봅니다.
오늘의 문화기행은 여기까지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일이 있었습니다. 같이 여행 온 권정애 동기가 시어머니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급히 서울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이번 여행을 오기 위하여 여러 일정을 조정하느라 고생하셨다는데 일본까지 와서 오자마자 가셔야하니 안타깝군요. 처음에는 시숙모가 돌아가셔서 간다고 하여 저희는 저녁을 먹으면서 모처럼 일본여행 왔는데 남편이 호탕하게 여행 마저 하고 오라고 하지 못하나 하는 아쉬움을 표했는데, 여행 갔다 와 들으니 실제 시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동기들이 걱정할까봐 시숙모라고 둘러댔다는군요. 시어머니라면 당연히 서둘러 가셔야했겠지요.
아무리 문화기행으로 공부하러 왔다지만 일본의 밤을 그냥 보낼 수 있나요? 우리는 저녁 후 오사카 번화가로 나왔습니다. 오사카는 교포들이 많이 사는 곳이라 한글 간판도 눈에 띄는군요. 그런데 무료안내소라는 간판이 보여 그런가보다 하며 지나치는데 얼마 안 가 또 무료안내소, 또 얼마 안 가 무료안내소. 웬 무료안내소가 이렇게 많지? 우리가 들어간 조그만 한국 카페주인에게 물어보니 술집을 찾는 손님들에게 적당한 술집을 무료로 안내해주는 곳이라네요. 뭔 술집까지 다 무료안내 해주나 했더니 손님들에겐 무료로 안내해주고 안내해준 술집에서 수수료를 받는 모양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대충 이 집 저 집 둘러보다 들어가는데, 역시 일본인들은 술집도 이렇게 사전에 꼼꼼하게 안내받아 들어가는군요.
저는 아직 제 컨디션이 아니라 먼저 택시를 타고 숙소인 뉴오타니 호텔로 돌아가는데, 운전사가 한쪽을 가리키며 뭐라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짧은 일본어로 그곳이 우리가 가려는 호텔이냐고 하니 운전사는 웃으면서 뭐라고 합니다. 가만히 보니 옛 성 하나가 조명을 받으며 서있습니다. 순간 저는 저게 오사카성이라는 생각이 금방 듭디다. 이번 여행은 안도 다다오를 찾아가는 여행이라 오사카성 답사는 일정에 빠져 있지만 저는 대하소설 대망을 읽을 때 나오던 오사카성을 내일 일찍 다녀와야겠다는 마음을 먹으며 호텔 제 방으로 들어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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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양번호사님, 이토록 귀한 글 올려주신데 대해 감사드립니다. 법조인으로서 바쁘실터인데도 짧은 일정의 여행담을 다채로운 사진을 곁들여 쓰신 글, 큰 감동으로 읽었습니다. 전에 월간중앙에 연재하신 산행기에서도 직업 문필가 못지 않은 변호사님의 문학적 역량을 알 수 있었습니다만, 여기 올리신 '안도 다다오를 찾아가는 여행기'도 단숨에 쭈욱~ 끝까지 읽히는 수작으로 참 대단하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덕분에 저도 간접적이나마 변호사님과 동행이 되어 문화기행에 동참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연말연시 잘 보내시구요, 늘 건안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늘 존경하고 또 늘 부럽습니다, 건강하세요
예, 연말연시 건강하게 잘 보내십시요. 감사합니다.
좋은 글 그저 부릅기 그지없소이다.건필을 기원 드립니다. 石人 여 해 룡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