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이야기
김애자
누군가에게 편지를 쓸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물론 편지를 받는 이도 행복할 것이다. 나의 전자우편함에는 삼천 통이 넘는 편지가 들어있다. 앞으로도 내가 보낸 횟수만큼 저쪽에서 보내오는 답신은 계속해서 편지함에 쌓일 것이다. 적어도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편지를 쓸 수 없는 불행한 상황이 벌어지기 전까지 우리의 새벽 편지 쓰기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나는 가능한 편지를 보낼 때 앞에다 시를 한 편씩 골라 넣는다. 그러기 위해 웹 서핑을 나서는데 사이버 공간으로 들어가면 참으로 많은 시인들의 시를 접할 수 있도록 사이트를 개방해 놓았다. 진실로 고마운 일이다. 음악도 “이동활의 음악 산책”을 치고 들어가면 해설과 함께 좋은 음악을 감상할 수 있도록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나는 잠시 눈을 감고 음악을 듣다 보면 내 입에서 ‘당신은 참 멋진 사람’이란 찬사가 저절로 나온다.
새벽에 일어나 시와 그림과 음악을 찾는데 소요되는 시간은 30분에서 길게는 한 시간 정도 걸린다. 이렇게 정성껏 자료를 찾아 시와 그림을 넣고 편지를 쓰노라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가슴속으로 기쁨이 차오른다. 내가 보낸 편지를 받으면 그분도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읽을 것이란 생각이 들어 서다. 그러나 이보다 중요한 것은 매일 시 한 편씩 서핑을 하다 보면 1년 동안 365편 시를 읽게 된다는 사실이다. 한 편의 시가 때론 밥이 되기도 하고, 김이 오르는 배춧국이 되어 서로의 시린 가슴을 덥혀주기도 하고, 들꽃들이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의 말에 귀를 기울여보기도 한다. 이럴 때 시를 통해 교류하는 문학적 공감은 뜻이 맑은 운문이다.
편지 이야기를 꺼내고 보니 프란츠 카프카의 인형 편지가 생각난다. 폐결핵 말기 환자였던 카프카는 죽기 몇 달 전 베를린에서 겨울을 보냈다. 그는 매일 연인 도라 다아만트와 집 근처에 있는 공원으로 산책하러 나가곤 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산책길에서 인형을 잃어버리고 울고 있는 소녀를 만나게 된다. 그때 이 작가는 꼬마를 달래기 위해 멋진 상상력을 발휘한다. 네가 가지고 놀던 인형이 멀리 여행을 떠났다고.
아이는 울음을 멈추고 아저씨가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묻는다. 이에 카프카는 천연덕스럽게 자신은 인형의 우편배달부인데, 인형이 너에게 쓴 편지를 깜박 잊고 그냥 나왔다고 한다. 그리고 내일 네가 다시 여기로 오면 인형의 편지를 가지고 와 읽어주겠다고 약속한다.
카프카는 그날 밤부터 인형의 우편배달부가 되어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병들고 가난했던 그는 부품을 주워모아 조립한 램프로 불을 밝혀 놓고 밤마다 편지를 써 놓았다가 날이 밝으면 아이가 기다리는 공원으로 나가 인형이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다가 여행길에서 만난 근사한 청년과 사랑에 빠지고, 마침내 결혼하고 신혼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와 신접살림을 차리고 ....... 그리하여 소녀에게 다시는 돌아갈 수 없게 된 사연을 드라마틱하게 써서 읽어주었다.
그 뒤, 병이 악화하여 프라하로 돌아간 카프카는 도라 다아만트와 친구 막스 브로트에게 자신이 죽으면 모든 원고를 불태워 버릴 것을 유언으로 남긴다. 안타깝게도 카프카는 생전엔 자신이 쓴 작품들이 빛을 보지 못했다. 게다가 엄격하게 군림하는 아버지 밑에서 자신이 원하는 문학이 아닌 법학을 전공하게 된다. 변호사 자격증까지 땄으나 그는 변호사가 되지 않고 노동 자재해보험공사로 들어가 법률고문을 맡는다. 하지만 문학에 대한 열정을 포기할 수 없어 집으로 돌아오면 오로지 소설 쓰기에만 매달렸다. 글 쓰는 행위만이 삶의 정체성과 유대인이란 실존적 위기감을 떨쳐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결핵에 걸리면서 카프카는 심한 우울증과 불안감에 시달린다. 하루가 다르게 쇠잔해 가는 육체에서 죽음의 그림자를 감지한다. 요양을 빌미로 착한 여자 도라 다아만트를 데리고 베를린으로 갔다가 우연히 공원에서 만난 한 소녀를 위해 삼 주간 서른 통의 인형편지를 쓰게 되었던 것이다.
다음 해(1924년 6월 3일)그는 41세를 일기로 외롭고 우울했던 생을 마치고 프라하에 묻힌다. 그가 죽자 막스 브로트는 친구 유언을 어기고 원고를 정리하여 책으로 엮는다. 하지만 작품이 제대로 빛을 본 것은 사후 20년이 지나서였다. 이렇게 우여곡절을 겪고서야 「변신」 「소송」 「꿈」 「성」 「시골 의사」등 작품들이 고전으로 남게 되었고, 알베르 까뮈와 함께 실존주의 작가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인형 편지는 임종을 지켜보던 도라 다아만트를 통해 알려졌을 뿐 편지 행방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나는 가끔 눈을 감고 상상한다. 공원 벤치에 앉아 다섯 살가량의 꼬마에게 다정한 목소리로 인형편지를 읽어주던 낯빛이 창백한 한 남자 옆모습을. 그의 따뜻한 입김과 숨결을....... 이래서 카프카를 사랑하는 독자들은 그의 “인형편지”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편지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다산 정약용 선생이 유배지에서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가 더 가멸차다고 여긴다. 특히 선생이 만든 「하피첩(霞帖)」에 얽힌 이야기를 읽으면 가슴이 뭉클해진다.
선생께서 강진에서 귀양살이할 때였다. 몸져누운 아내가 해어진 치마 다섯 폭을 남편에게 보냈다. 병중에 얼마나 남편이 그리웠으면 장롱 속 깊이 넣어두었던, 그것도 시집올 때 입었던 치마를 뜯어 보냈을까. 붉은색은 이미 담황색으로 변색되었지만, 선생은 그것을 받아들이고 아내에게 다함 없는 그리움을 시로 써 보낸다. 그런 다음 치마 네 폭을 재단하여 첩으로 만들어 두 아들에게 훈계의 글을 적어 나누어 주었다. 첩 제목을 하피(霞)라 한 것은 치마 색이 노을처럼 붉어서였다고 한다. 선생께선 이번엔 딸의 몫으로 남겨둔 치마폭에는 매조도(梅鳥圖)를 그렸다. 마침 딸이 혼사 날을 받아 둔 터라 딸에게 결혼선물로 준비했다. “사뿐사뿐 새가 날아와/ 우리뜨락 매화나무 가지에 앉아 우네/ 매화꽃 향 내 짙게 풍기자/ 꽃향기 그리워 날아왔네/ 이제부터 여기에 머물러 지내며/ 가정 이루고 즐겁게 살아라/ 꽃도 이제 활짝 피었으니/ 열매도 주렁주렁 맺으리”
다산 선생은 아들 여섯과 딸 셋 도합 아홉 남매를 두었다고 한다. 그러나 여섯 남매를 어려서 잃고 학연과 학유와 딸 하나만 성장하여 결혼하게 되었다. 선생은 시집가는 딸 얼굴도 보지 못하고 멀리 귀양지에서 아내가 보낸 붉은색 치마폭에다 매화나무 가지에 앉은 새 한 쌍을 그리고 시를 지어 사랑스러운 딸에게 보내주었다. 선생은 18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면서 서울에 있는 가족들과 편지 왕래를 통하여 자기 뜻과 사랑을 전해주었다.
특히 두 아들에게 폐족(廢族)이 학문을 게을리하면 남들에게 멸시당한다며 벼슬은 못 해도 문장가는 될 수 있으니 배움에 있어 게으름을 부리지 말라는 당부가 갈피마다 구구절절하다. 고려사와 좋은 문장을 만나면 머릿속으로 들어올 때까지 필사하라고 권장했다. 또 필사할 땐 해독하기 어려운 문장이 나오면 따로 조목조목 적어 보내라 이르고 편지 말미엔 너희들은 아버지의 아들이면서 스승과 제자가 되면 더 좋을 것이라는 의사도 밝혔다. 실학의 태두였던 선생은 이렇듯 가족에게 자상한 가장이었고 학덕 높은 스승으로서 본을 보이셨다.
역대 인물 중 가장 편지를 많이 남긴 분은 퇴계 선생이다. 그분이 전에 남긴 편지가 3천 통이나 된다고 퇴계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밝힌 바 있다. 그중 아들에게 보낸 편지만 516통인데 내가 소장하고 있는 서간집에는 큰아들 준에게 보낸 편지 164통만 수록되어 있다. 편지는 이렇듯 서로가 만날 수 없는 공간과 공간 사이를 문장이란 매개가 넘나들며 서로의 생각과 뜻과 정을 전해주고 수렴케 하는 아름다운 가교이다.
문단으로 들어온 지 26년이 되었다. 그동안 나도 상당히 많은 분량의 편지를 받았다. 지금은 육필편지를 받아보기 어렵지만, 1990년대엔 책을 받으면 정성껏 축하와 책을 보낸 고마움을 써 보내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했었다. 새로운 밀레니엄이 열리는 2천 년으로 접어들면서 점차 육필 편지가 줄어들었다. 다시 2010년으로 넘어와선 스마트폰과 이메일을 이용해 간단한 문자 편지로 바뀌었다. 손가락끝 한 번만 잘못 움직여도 감쪽같이 날아가는 허공 속 편지이다.
나는 그동안 책을 낼 적마다 받은 편지를 바인더에 정성껏 철해두었다. 한 분 한 분의 편지를 백지를 끼워 넣어 간직한 것이 일곱 권을 채웠다. 5백 통이 넘는데 나는 이 편지 모음을 분신처럼 아낀다. 편지를 보낸 문단의 대선배들은 거반 명부전에 드신 터라 가끔 편지를 꺼내 읽어보면 울컥 목이 잠기곤 한다.
그중에서 병약한 나에게 글 기둥 하나 잘 붙잡고 살면 고통도 기쁨이 될 것이라고 일러주시었던 매원 박연구 선생과 누이동생처럼 아끼면서 자청해 평을 써주시었던 솔내 유경환 선생은 지금도 무척이나 그리운 분이다. 또 멀리 진도에서 외과병원 원장인 조영남 선생은 나의 졸저 「숨은 촉」을 받고 자그마치 A4 용지 26장이나 되는 길고 긴 독후감을 써 보내어 입을 다물지 못하게 했다. 네트워크로 빠르고 간결한 정보가 고속으로 오고 가는 시대에 만년필로 쓴 이렇게나 긴 독후감은 귀한 보물이 아닐 수 없다. 이슥한 밤, 정성이 담긴 이런 편지를 호젓이 앉아 꺼내 읽노라면 편지를 써 보낸 모든 이들에 대한 고마움과 그리움이 새록새록 되살아난다.
사람이 한 생을 사는 동안 내가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 또 나의 진심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 그리하여 서로의 마음을 기탄없이 털어놓을 수 있다면 이는 크나큰 축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10월은 나뭇잎이 저마다 빛깔로 물드는 계절이다. 곱게 물든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져 내리면 나는 그분에게 10월에 부는 바람은 율려(音樂)가 아름다운 풍악(風樂)이라고 써 보낼 것이다. 외롭고 쓸쓸한 세월의 길목에서 어찌 부부만이 반려(伴侶)라 할 수 있겠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