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버릴 것 같은 그런 밤, 이기채는 홀로 우두커니 앉아 가슴이 패어
나가는 허전함을 담배로 매우려 한다. 그때마다 다친 곳처럼 욱신거리면서 떠오르는 얼굴은 외아들 강모였다. 그러면 이기채는 가슴이 마쳐 숨을 들이쉬어도 시리고 내리쉬어도 답답하였다. 가슴 밑바닥에 무엇이 박히는 것처럼 아프고, 한숨을 쉬면 공이처럼 걸려 이기채는 때때로 담이 걸린 듯도 했다. 그런 강모가 눈앞에 앉아 검은 통을 불쑥 내밀어 열어 보이면서, 무슨 말인가를 하려하고 있다. 강모도 심약한 눈빛이 불안하기는 하였지만, 단단히 벼르어 온 말을 하려는 모양이었다. 이기채는 일부러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강모를 쏘아보고만 있다. 바이올린의 네 가닥 줄과 이기채의 날카로운 침묵이 서로 칼날같이 맞부딧 치면서 방안을 터질 듯이 숨 막히게 한다. 이기채와 강모, 그리고 서로 이 침묵의 줄다리기에서 삼각형으로 팽팽하게 맞서며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었다.
"일본으로 건너가서 음악 공부를 좀 하고 싶습니다."
드디어 강모가 쫓기는 사람처럼 단숨에 뱉어내듯 말해 버린다. 순간 이기채의 눈이 번쩍한다. 그리고는 이기채와 감모의 사이에 부웅 소리가 날 만큼 공간이 팽창한다.
"그래서?"
역시 말끝을 내리누르며 잘라 버린 질문이다. 강모가 말을 잇지 못한다. 이미 이기채의 노여움이 목까지 차올랐다는 것을 감지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어?"
"... ."
"네가 이 앵금을 쳐들고 댕기면서 풍각쟁이 노릇을 허겠다, 이 말이냐?"
"... 아버지."
"아니면 남사당이 되겠다아, 이 말이냐?"
"아니올시다."
"아니올시다? 그럼, 그러면 무엇이 되겠다는 것이냐?"
목 안에 짓눌려 삼킨 목소리가 조금씩 터져 나오면서 점점 언성이 높아진다.
그러나 이기채의 성품으로 미루어 아직은 지그시 참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풍각쟁이와 음악가는 다릅니다. 저는 음악을 공부하려는 것입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동경에 있는 음악학교에 들어가서... ."
"왜? 허구 많은 공부 중에 하필이면 네가 음악인가 허는 풍각을 공부하려는, 무슨 뜻이 있을 게 아니냐? 왜 그러는 거냐?"
강모는 역시 대답을 못한다.
... 이곳을 떠나고 싶어서입니다. 제발 그럴 수만 있다면 굳이 음악이 아니라도 상관없어요. 측량 기사가 되어도 좋습니다. 구실이야 무엇이 되었든 저는 이곳을 떠나고 싶습니다. 도주하고 싶어요. 저는 이 집안이 무겁고 무섭습니다. 아무도 저를 때리려는 사람 없고, 아묻 저를 해치려는 사람 없건만 저는 마치 가위눌린 것처럼 답답하고, 쫓기는 사람처럼 초조합니다. 왜 그러할까요. 집채덩이 같은
불안을 속에다 삼키고 있으니 무엇에도 마음을 붙일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 벗어나게 해 주십시오. 아무것에도 매이지 않고, 속하지 않고, 훨훨 좀 돌아다니고 싶습니다. 할머니로부터도, 아버지로부터도, 아아, 그리고... .
"네, 이노옴, 왜 말을 못하느냐? 갑자기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느냐? 말을 해라."
드디어 이기채가 상체를 곧추세웠다.
"왜 말을 못하는 것이냐? 이 철딱서니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천하에 쓰잘데 없는 놈 같으니라고, 네 이놈, 네가 대체 중정이 있는 놈이냐 없는 놈이냐, 집구석이 멸문하여 성이 없어지고 문짝에 대못을 치게 생긴 이 마당에, 기껏 네가 하는 일이, 소위 종가의 종손이라는 놈이, 애비는 피가 바트고 뼈가 마르는 마당에 떠억 버티고 앉아서 허는 말이, 뭐가 어쩌고 어째? 음악을 공부하러 일본으로 가야겄습니다? 허허, 집구석이 망헐라면 대들보가 먼저 내려앉는다더니, 일본 놈 창씨개명 나무랄 거 하나도 없구나아, 하나도 없어, 아니 내 집구석에서 내 자식 놈이 먼저 항허느라고, 제가 자청해서 풍각쟁이가 되겠다니, 성시가 있으면 무얼 허며 가문이 있으면 무얼 헐 것이냐? 아이고, 아주 너한테는 잘되어 버렸구나, 으응? 잘되어 버렸어. 너 같은 놈한테 물려주자고 할머님이 한평생을 그렇게 노심초사 허시고, 너 같은 놈을 자식이라고 믿고, 너 같은 놈을 자식이라고... ."
이기채의 말이 뚝 끓어진다. 강모가 순간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끼고 숙인 고개를 들었다. 이기채의 모가 선 눈빛이 벌겋다. 그는 외침을 두 손으로 움켜진 채 강모를 노려보았다.
"아버지."
"네 이노옴. 네 놈이 감히 누구보고 지금 애비라고 허는 게야? 네가 내 자식이라면 어찌 이런 짓을 헐 수가 있단 말이냐. 감히 네가 누구 앞에다가 이 따위 것을."
채 말을 맺지 못하는 이기채가 차오르는 숨을 내뱉기라도 할 듯이 몸을 일으키다 말고, 움켜쥐고 있던 커다란 의침을 바이올린 면상에다 여지없이 동댕이쳐 집어 던진다. 의침은 팽팽한 바이올린 줄에 부딪쳐 공중으로 튀어 오른다. 바이올린 줄이 비명을 지르며 울린다. 기표가 이기채의 손을 잡으려 하는데 이기채
는 벌떡 일어서 버린다. 그의 노기가 쩌엉, 소리를 내는 같았는데, 이미 바이올린은 그의 손에 잡혀 허공에서 한 바퀴 맴을 돌아, 방바닥에 후려쳐지고 있었다.
바이올린의 몸통이 한순간에 부러지면서 팽팽하던 네 가닥 줄이 힘없이 늘어져 버린다. 강모의 얼굴은 흙빛으로 질려 부르르 떨린다. 그 바람에 귀밑의 궤털이 허옇게 일어선다.
"천하에 몹쓸 놈, 썩 나가라. 이 방에서 썩 나가, 너 같은 놈은 자식도 아니다. 꼴도 보기 싫다."
이기채가 버선발로 방바닥을 구른다. 강모는 얼어붙은 듯 움쩍도 못한다. 무릎 위에 놓인 강모의 두 주먹이 오그라진다.
"왜 그러고 앉어 있어? 꼴도 보기 싫다는데, 아주 집구석이 제대로 망허는구나, 가지가지로, 제대로 망해. 며느리라 허는 것은 손만 컸지 침선 하나 제대로 헐 줄을 아나, 남편의 마음을 잡을 줄 아나, 자식이라 허는 것은 나이 열아홉을 먹도록 사람 구실을 헐 줄을 아나... . 내가 천년을 살겄느냐, 만년을 살겄느냐,
도대체 언제까지 그렇게 어린아이 티를 못 벗고 매사에 천방지축이냐. 나 죽고 나면 누가 어른 노릇을 챙겨서 헐 것인가. 그냥 앉아서 그대로 망헐 것이다. 그냥 앉어서. 기왕에 가운이 기울어져 망허는 집안이라면 기다릴 거 무에 있어. 서둘러서 망해 버려야지. 그럼 일찌감치 속이나 편허지. 대체 언제부터 집안이 이 꼴로 각동 삼동으로 찢어져서 가닥을 추릴 수가 없게 됐단 말이냐. 대관절 언제부터 이러는 게야."
이기채는 방 가운데 선 채로 노기와 탄식을 가누지 못한다. 기표가 강모에게 손짓으로 바깥쪽을 가리킨다. 나가라는 시늉이다. 강모는 망연하게 앉아 부러진 바이올린 패어나간 장판 자리, 그리고 아까 바이올린을 내던지는 순간, 그 몸통에 맞아 흩어진 담배통과 타구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 반은 넋이 나간 사람 같다.
"그다지도 지각이 없어서야 어디 그걸 사람이라고 허겠느냐. 내가 네 나이 대는 집안 살림이 문제가 아니라 종중 살림까지도 혼자서 떠맡다시피 했었다. 그래 네 나이가 그게 적은 나이 같아서, 나이티를 내고 있는 게야? 어엉?"
강모는 망연히 앉아만 있었다. 바람 한 점 없는 여름나절의 햇빛 속에 효원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얼굴이 떠오르자 별안간 강모는 가슴을 깨물린 듯 한 통증을 느꼈다. 마치 이빨 하나가 가슴에 박힌 것 같은 얼얼하고도 깊은 아픔이었다.
"어서 나가거라. 큰방 할머님도 뵈어야지. 사랑이 소란하면 공연히 근심하신다. 어서 일어나."
기표는 애써 목소리를 평온하게 하며 강모를 일깨워 부추긴다. 강모가 마지못한 듯 자리에서 일어서자
"안서방."
기표가 바깥에 대고 안서방을 부른다.
"좀 들어오게."
아마 방을 치우라는 말일 것이다. 강모는 허리를 구부리고 들어오는 안서방과 엇갈려 마당으로 내려서서, 안채로는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고 멍하니 마당 귀퉁이의 꽃밭을 바라본다. 꽃밭에도 여름은 무성하였다. 자라나는 것들이 더욱 뻗어가는 자라나고 있는 여름 꽃밭에는 햇빛이 눅진하게 녹아내리고 있다. 저마다 빛깔을 내뿜으며 피어 있는 꽃송이가 잎사귀들이 녹아내리는 햇빛을 양껏 빨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그 햇빛은 조청처럼 무겁다. 그래서 꽃잎과 잎사귀에는 먼지가 부옇게 앉은 것도 같다. 어찌 보면 식물들이 햇빛을 빨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햇빛이 끈적이처럼 꽃잎과 잎사귀에 엉겨서 소리 없이 그 진을 빨아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꽃잎의 입술과 대궁이 허옇게 말라들어 미농지로 만든 조화같이 변한다. ... 나는 한낱 그림자로다. 그는 정말로 자신이 걸어가는 그림자에 불과다고 절감한다. ... 내가 무슨 넋이 있으며, 몸이 있으랴. 또 그런 것들이 있은들 무엇에 쓰겠느가, 무엇에... . 강모는 가슴 밑바닥이 갈라지는 것 같아 숨을 참는다. 갈라터진 사이에 빠짓이 피가 배어나며 쓰라리다. ... 강실아, 기어이 그 생각을 하고 만다. 아까, 동구에서부터 참아 온 생각이다. 아니, 그것이 어찌 동구에서부터만 참아 온 것이었을까. 아까 오류골 작은집의 사립문을 지나면서도, 일부러 살구나무 쪽으로는 눈길도 돌리지 않았던 것이었는데. 그때 무너지게 검푸른 살구나무의 녹음이 강모의 얼굴에 푸른 그늘을 드리워 주었으나, 강모는 그냥 지나쳐 버리고 말았었다. ... 네가 없는데, 이제 나를 무엇에다 쓰겠느냐... . 접시꽃 촉규화, 붉은 작약, 흰 작약, 황적색 꽃잎에 자흑점이 뿌려진 원추리들. 그 현란한 꽃밭 그늘에 꽈리가 몇 그루 모여서 있는 것이 눈에 띈다. 그것들은 등롱 같은 열매를 조롱조롱 푸르게 달고 있다. 지금은 그 꽈리 초롱에 물이 돌아 초록으로 열려 있지만, 저것은 가을이 되면 익으면서 주홍으로 투명해진다. 그것이 영락없이 등롱의 모양이어서 이름도 등롱 초라고 불리던가.
...강실아.
강모는 그만 가슴이 사무친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말없이 등불을 잡아 주던 강실이의 모습이 꽈리밭에 그대로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2권에 계속)
3부에 계속
8. 바람닫이
며칠 사이에 벌써 여름 기운이 끼친다. 달구어진 햇빛에서 훅 놋쇠 냄새가 난다. 더위가 익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덥다가도 한 번씩 비가 쏟아져서, 초목은 날로 무성하여지고, 집 안팎에는 파리, 모기가 극성이다. 고샅에도 토담 밑에도 잡초가 검푸르게 우거질 지경으로 농부들은 일손이 바쁘다. 봄보리, 밀, 귀리를 베어 내고, 논밭에 서로서로 대신하여 번갈아 들면서 김매기를 하느라고, 땀이 흘러 흙이 젖고, 땅에서 올라오는 지열과 위에서 내리쪼이는 놋쇠 같은 햇볕 때문에 헉, 헉, 숨이 막힌다. 거기다가 손이 많이 가는 면화 밭은 그 공이 몇 배나 더 하여, 호미질을 하고 나면 어깨가 빠지는 것만 같다. 그런 중에도 누우런 오조 이삭이 어느덧 묵근하게 살이 차고, 청대콩도 익어간다. 비워 놓고 나온
집에서는 어린 것이 집을 보면서 명석에 보리를 널어 말리고 있을 것이다. 마침 뙤약볕이라 참으로 잘 마르겠다. 그러나 아이들이란 자칫 헛눈을 팔고 해찰하기 일쑤라.
"아이고오. 저 노무 달구새끼이. 훠어이. 야야, 너는 멋 허고 있간디 달구새끼가 저렇게 달라들어서 멍석에 보리를 다 쪼사 묵게 두고 있어어. 참말로 기양 한 대접은 찍어 묵었겄네에."
마당 가운데 빨랫줄을 받치고 서 있는 바지랑대를 잡아채, 거꾸로 들고 휘둘러 닭을 쫓던 아낙은 목청을 돋군다.
"호랭이 물어갈 놈, 아, 그렇게 두 손 놓고 간짓대같이 섰을 라먼, 멋헐라고 너보고 집 보라고 허겄냐야."
그네는 아이를 향해 발을 굴러 보인다. 아낙은, 보리 한 톨, 수수 한 알갱이도 살점같이 아깝다. 무심하게 입으로 들어가는 그 곡식 한 톨에 허리가 몇 번이 구부러지며 손이 몇 번 가는지를 잘 알기 때문이다. 하물며, 이런 뙤약볕에 등이 뜨끈뜨끈하게 익어가면서, 흘러내린 땀으로 발등을 적시고 흙을 젖게 한 쌀이야 말로 더 말할 나위가 있으랴. 그 하얀 쌀은 그저 바라보기도 아깝고, 소중하며,
심지어는 경건한 심정까지도 드는 것이다. 거기다 손 안에 뿌듯이 쥐었을 대의 느낌이라니.
"그렇게 왜놈덜이 인자는 놋그륵, 숟구락끄장 다 공출을 헌디야?"
"놋그륵 숟구락이 문제가 아니라, 제기도 다 걷어 간다네."
"하이고매."
"말도 말어, 절깐에 불상도 끄집고 가 부렀다는디?"
"어쩔라고 그러까잉... ."
수군수군 김매던 사람들은, 때마침 논둑 저편에 안서방네와 바우네가 광주리를 이고 오는 것을 보고는 일손을 놓는다. 점심밥이다. 그들은 목에 건 수건을 들어 땀을 닦으며 하나씩 둘씩 정자나무 밑으로 모인다. 발걸음들이 무겁다. 옹구네, 평순네, 춘복이, 공배 들은 논에 엎드려 있던 다른 놈들과 함께 웅기중기 광주리 곁에 둘러앉는다. 공배네가 밥 광주리를 덮은 삼베 보자기를 젖히자, 된
장 사발과 풋고추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고추는 약이 올라서 꽁지를 하늘로 쳐들고 있다. 금방 따서 씻어 왔는지 물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참말로 이날 이때끼 욕심 낸 거라고는 보리밥 한 사발허고 풋고추 된장 한입뿐인디, 내가 늙마에 이거이 무신 마음 고상잉가 모르겄네."
공배는 털썩 주저앉은 채 하늘을 올려다보며 힘없이 말한다.
"아재도 참. 아, 보리밥 한 술에 풋고추 된장이나 욕심내고 살았잉게, 이날 펭상 이러고 살다가 이 모냥이거이제 머."
춘복이 되받아 핀잔을 준다.
"언지는 머 우리가 농사 지어 갖꼬 우리 입으로 들어왔간디요? 땅바닥에 어푸러져 주딩이서 단내가 풀풀 나고, 손톱 발톱이 모지라지는 놈 따로 있고, 청풍멩월에 노래 부름서 손꾸락 하나도 까딱 안허고 받어묵는 놈 따로 있잉게. 우리사머 왜놈 주딩이로 들으가나 지주 곳간으로 들어가나, 빼 빠지게 헛고상 허능 거는 펭상 마찬가지 라요."
"춘복아, 너는 어째 그 셋바닥을 그렇게 가만 못 두고, 꼭 입빠른 소리럴 뱉고 있냐. 있기럴."
"아, 창씬가 머인가 허능 것도 그렇제. 우리덜 쌍놈이 머 언지는 성씨 갖꼬 이름 갖꼬 살었간디요? 성짜가 있다고 빤 듯이 써 볼 일이 있능교오, 이름짜가 있다고 어따 대고 떳떳허게 불러 볼 일이 있능교. 양반들이나 그렁 거 챙기제 우리가 멋 땀세 속이 상헌다요? 말이사 바로 말 이제. 우리들 이름이랑 거의 맹랑
허다고요. 달구새끼, 뒤야지, 퇴깽이 이름이나 머 매한가지 아닝교?"
공배는 야무지게 쇳소리를 내며 말하는 춘복의 얼굴이 똑 약 오른 고추 같다고 생각한다.
"아나, 밥이나 어서 묵어라. 암말도 말고잉? 말 많이 허먼 매급시 헛심만 팽긴다. 뱃속에다 쟁에 논 것도 없이 씨잘디 없는 소리만 긁어 내지 말고. 말 안헌다고 속도 모르능 것 아닝게로."
공배네가 보리밥 사발을 춘복이 앞에 놓아 준다.
"됩대 우리 같은 사람덜한티는 잘된 일 이제 머. 어런 때 성씨도 하나 새로 맨들고 이름도 처억 바꿔 불먼 누가 누군지 알 거잉교? 그러다가 누가 아요? 우리도 지아집 짓고 종 부림서, 에얌, 허고 사는 날이 올랑가아... . 하도 요상헌 시상 이라, 알 수 없제."
침을 탁, 뱉어가며 쏘아붙이는 춘복이 말에 공배가 밥 순가락을 입에 넣다가 말고
"자 좀 바라, 자 좀 바. 너 어디 가서는 당최 그런 소리 말어라. 덕석말이 일당헌다. 몰매 맞어어. 나 듣는 연에나 말허까, 무단시 비얌맹이로 그 방정맞은 셋바닥 조께 날룽거리지 말란 말이여."
하면서 눈썹을 찌그린다. 눈썹을 찌그러지자, 나이보다 늙어 보이는 공배의 얼굴은 그만 우는 시늉이 되어 버린다. 그 옆에서 밥을 푹푹 퍼먹고 있던 옹구네는, 어느새 밥그릇을 비우고 입가심으로 찬물을 벌컥벌컥 마시더니 입술을 손으로 닦아 낸다. 마침 정자나무 위에서 참매미가 시원하게 울어 젖힌다. 옹구네의 삼베 적삼은 접시만한데, 그것도 앞자락이 두르르 말려 올라가 있어 검은 젖퉁이가 비죽 내밀어 보인다.
"먼 걱쟁이 그렇게 많다요? 무신 신주단지가 있는 인생도 아니고, 뻬 빠지게 일만 허다 게발 같은 맨발로 가신 조상님들이 머 성멩 삼자 찾어서 헤매고 댕길 것도 아닌디, 아무 꺼이나 이름 붙이고 살제잉, 어차피 넘으 꺼인디, 우리덜이사머 이름만 넘으 꺼이간디? 농사진 쌀도 내놔라 허먼 내놔야고, 손꾸락이 닳어지게 헌 질쌈 미영(무명)도 내놔라 허먼 내놔야고, 어디 그거뿐 이여? 몸뗑이도 내 놔라 허먼 그거이 내 몸땡이간디? 그저 등 따시고 배 불르먼 그것이 내 팔자로 는 닥상이제잉."
평순네는 그 말에 대꾸를 하지 않고 풋고추 꽁지에 된장을 찍는다.
"서방 없다고 그렇게 막말 허능 거 아니여, 누가 그께잇 노무 몸뗑이를 내노라 고나 허능게비네."
공배네가 민망한지 핀잔을 준다. 공배네는 나이로 보아도 옹구네보다 십여 년이 위였지만, 매사에 조심성이 있어 입을 함부로 놀리지 않고, 심중이 깊은 아낙이었다. 그런 점을 옹구네도 모르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렇기 때문에 이상하게도 옹구네는 공배네가 만만하게 여겨지는 것이었다.
"말이 그렇다 그거이제 머. 무신 못헐 소리 했간디? 내가 서방 없는 년이라고 성님이 나한티 외나 막말을 허싱만."
"아고매, 호랭이 물어갈 노무 예펜네. 누가 그런다냐? 됩대 꼬깔을 씌우고 자빠졌네에."
옹구네와 말이 붙어 보아야 득이 될 것은 하나도 없다.
"그리도, 양반은 확실히 근본이 달르드라. 저번에 주재소 순사 왔을 적에 말이여. 청암마님한티 순사가 되게 꾸지람만 듣고는 마당에 선걸음으로 쬐껴났다네. 어쩌든지 목심을 걸고, 목에 칼이 들으와도 창씨개명은 못허겄다고 허셌드란다."
공배는 곰방대에 담배를 재우며 춘복이한테 말한다. 아무래도 그는 창씨개명을 한 것이 꺼림칙하였다. 그러나 주재소 순사와 면사무소 서기가 무슨 장부를 들고 찾아와 공배에게 눈을 부릅뜨는데, 우선 겁에 질려 앞뒤 생각할 것 없이 그만 덜컥 도장을 눌고 말았던 것이다. 도장이라야 시뻘건 인주 범벅이 된 손도장이었지만, 그 순간 공배는 마음이 허퉁해지면서 마치 조상을 팔아먹은 듯 죄
가 되고 면목이 없었다.
"나까무라 요이찌? 허... 참... ."
그때 공배는 횟새가 일어날 때같이 어지러워, 정짓간으로 들어가 물을 바가지로 퍼 마셨다. 생각 같아서는 물독아 지를 그대로 기울여 들이켜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때 순사와 면서기는, 거멍굴, 아랫볼, 중뜸 할 것 없이 집집마다 들어가서 이름을 하나씩 지어 주고, 우격다짐으로 도장을 받아 갔다. 사람이 없는 집은 논밭에까지 일일이 찾아가 그렇게 하였다. 그런데 엉겁결에, 순사의 허리춤에서 철그렁거리는 칼 소리에 놀라 도장을 눌렀던 사람들은, 바로 그 순사가 청암부인에게 큰 꾸중을 듣고 선걸음에 쫓겨났다는 소문을 들었다. 면서기는 머리를 긁적이고, 순사는
"요오시!"
하면서 칼 소리를 일부러 날카롭게 내며 땅을 구둣발로 차고 갔다는 말도 있고, 그대로 혼비백산 달아났다는 말도 있었다. 어찌 되었든, 청암부인이 호통을 친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네는 대청마루에 서서, 서기가 들고 있는 검은 뚜껑의 창씨개명 장부를 가소롭다는 듯 내려다보며 서릿발 같은 호령을 했던 것이다.
남녀가 유별한데 아무리 조선의 법도를 모르기로소니, 무례하고 상스럽게 남의 내정에 돌입하여 허락 없이 들어선 것부터 크게 나무라는 그네의 서슬에, 결국, 청암부인에 대해서 잘 알고 있던 서기는 순사와 귓속말을 주고받더니 그냥 돌아갔다. 그때, 순사가 필요 이상 일본도의 칼집을 철그럭, 소리가 나게 두드린 것도 사실이었다. 집안의 사람들은 그들이 돌아간 다음에도 공연히 가슴이 서늘하고 두근거려 뒤안의 헛간 모퉁이, 장독대 곁에 움줄움줄 모여서서 소리 죽인 채 눈짓만 할 뿐, 일손이 잡히지 않았었다. 기표는 밤이 깊어지도록 집으로 내려가지 않고, 기채와 함께 종대의 사람에 있었다.
"형님, 용단을 내리셔야지 이러고만 계시면 어떻게 합니까? 차일피일 미루다가 이제 큰 봉변당하게 됩니다. 그게 어디 종가 한 집에만 닥칠 일인가요? 문중에서도 대강 이야기가 되어 가고 있는데 형님이 결단을 허십시오. 생각해 보세요. 일본이 어디 쉽게 망헐 나랍니까? 그 사람들 무섭습니다. 허는 짓을 보면 모릅니까? 요시찰인이 되어서 좋을 게 뭐 있습니까? 그렇잖어도 총독부에서 위험 분자는 총검거하라는 검속 명령이 내렸다는데, 공연한 화근을 왜 불러일으킵니까?
그렇기만 헌 것이 아니라, 일전에 고등께 나까지마 주임이 그런 얘길 해요, 곧 징병 령이 발표될 거랍니다. 아 왜, 그 육군 특별지원병 모집헐 때도, 조선 청년들을 모두 강제로 끌어가다시피 허지 않았어요? 끌어가면 끌려갈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강모, 강태가 징병에 나가서 총대 잡고 싸우다가 무슨 변이라도 당헐 때는, 그때는 어쩔 셈이신가요? 일본은 절대 쉽게 안 망헙니다. 이런 시국일수록 지혜롭게 살어야지, 고집만으로는 아무것도 안되지요."
"어머니께서 저러시니 낸들 어쩌겠는가? 어머니 말씀이 사리에 어긋남이 없는데 내 고집대로 일을 할 수도 없어. 또 이것이 어린아이 장난처럼 간단한 일도 아니고, 한 번 해다가 물릴 수 있는 일도 아니지 않은가... ? 내가, 종가의 종손이 아니라면 건 모르겠지만, 나 하나가 어디 나 하나로 그치야 말이지. 참으로 이런 문제야말로 생사가 걸린 것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 아닌가. 한 가문의 문을 닫는 일인데."
"백모님은 아무리 여중호걸이요, 여중군자라고 하시지만 역시 아녀자가 아니십니까? 여자가 아무리 출중하다 하여도 결국 집안에 사는 사람이라, 세상 돌아가는 이차와 변화를 어찌 다 알겠습니까? 막말로 , 백모님이 무슨 서류를 제출할 일이 있습니까아, 학교에 다닐 일이 있습니까, 그리고 어디 관직에 나갈 일이 있습니까, 하다못해 그분 이름으로 누구를 만나 사교할 일이 있습니까? 그러니 도리를 지키고 가문을 지키면 살 수 있지만, 남자가 어디 그렇습니까? 날만 새면 밖에서 살아야 허고, 해야 할 일투성이인데, 나 혼자서 고고하고, 나 혼자서 성씨를 지키다가, 거미줄같이 얽히고 걸리는 그 많은 장애를 어쩌실 것입니까? 단순히 거미줄같이 얽히기만 한 것이라면 또 별 일 아니지요. 그 거미줄이 밧줄이 되고 차꼬가 되면 어쩔 것인가? 오도 가도 못하고 납작 없이 앉은 자리에서 죄수 노릇 하게 됩니다. 형님, 이런 난세일수록 정신 바짝 차려야 그나마 목숨 보존하고 살아남습니다. 더구나 강모, 강태는 지금 학생이니, 그렇잖아도 조선 학생이라면 무조건 요시찰인 대상에 오르는데 굳이 위험을 사서 부를 건 없지 않습니까, 그러고, 이 집안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도 창씨개명은 불가피한 것입니다."
기표는 마지막 말에 힘을 주었다. 기실은 그 말이야말로 처음부터 하고 싶었던 말이었으며, 기표에게는 가장 중요하고 관심이 있는 부분이었는지도 모른다.
오히려 기채는 그렇지 않은 편이었다. 비록 양자로 종가에 들어와 종손이 되었지만, 자신은 한 번도 자기가 양자라는 생각을 해 본 일이 없었다. 이기채의 생모 이울댁은 평범하고 정이 많은 부인이었다. 이기채는 그네를 작은어머니라고 부르며 성장하였다. 이울댁 또한 분에 넘치게 다정하지 않고, 그저 자상하고 따뜻한 정도를 스스로 잘 지켜 주었다. 그런 세월이 저절로 흘러 그네가 생모임을 깨닫게 되었을 때도, 엄격하고 정중하면서 기품 있는 청암부인을 몹시 어려워하기도 했지만 내심 어머니로 섬기는 심정으로 변함이 없었다. 그리고 어쩌든지, 종가의 종손으로서의 할 일을 다 하려고 하였다. 그가 세상에 나 맨 먼저 눈에 익인 사람도 청암부인이었으며, 기어 다니면서 가지고 놀던 것도 청암부인의 반짇고리와 실패였고, 처음으로 일어설 때 붙잡은 것 역시 그네의 문갑이 아니었던가. 나중에 천자문을 떼고, 동몽선습을 배울 무렵에야 자신에게 어머니가 두 분이며, 내내 작은어머니라고 부르던 분이 바로 생모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사실로 받아들여졌을 뿐, 철이 들어 사물을 이해하게 될 때까지도 생모와 양모의 구분은 실제로 어려웠다. 그만큼 이기채는 온전히 청암부인의 아들로, 종가의 종손으로 길러졌던 것이다. 그런데, 바로 자신의 대에 와서 자신의 손으로 이 대종가의 문을 닫아야 한다는 것이 어찌 기색을 할 일이 아니랴.
더구나 평탄하게 번영하며 이어져 내려온 종문도 아니요, 자기가 어찌하여 양자로 종가에 들어왔는지를 그는 누구보다도 소상히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닌가. 그렇게 대단한 명분이 아니라도 좋았다.
"머슴이 발로 한 번 찼는데 그만 힘도 없이 허물어져 버리더라. 허망했지."
청암부인은 그때 이야기를 하면 꼭 웃었다. 어이없었던 그 순간이 회상되는 때문이리라. 또한, 허망한 흙더미로 무너지던 그 퇴락한 집안을 열아홉 청상의 여인 몸으로, 이날 이만큼 세워 일으킨 한 세월에 대한 감회가 가슴에 사무쳐서 그랬을 것이다.
"내, 저 동구에 열녀비 앞을 지날 때면 참 생각이 많아지느니라. 이만하신 어른이 이 집안에 며느님으로 들어오셨길래 은연중 이와 같은 가풍이 내게까지 전해져 오는 것이 아닌가 싶어서 말이다."
청암부인은 어린 이기채를 마주하고 앉아 집안 내력을 들려주면서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던 선대 할머님의 이야기를 몇 번이고 하였다. 본디 말수가 많지 않은 부인이었으므로 한 번의 말도 곡진한 터이라, 이토록 여러 번 말씀하신, 그 열녀 정문까지 내려 받은 할머님의 생애를 어찌 심중에 새겨듣지 않을 수 있었으리. 청암부인은 말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실제로 정문과 비각을 정성껏 돌보았다. 누구라고 그 앞을 지나칠 때는 옷자락을 여미었으며, 특히 부인들은 자신의 행실에 대한 거울로 삼을 만큼 조심스럽게 섬기었다. 뿐만 아니라, 아직 출가하지 않은 과년한 처자들도 이 정문과 비각 앞에서 자신의 정절을 새삼스럽게 다짐하였다. 그리고 철모르고 뛰어다니는 어린 것들까지도
"열녀 할머니, 열녀 할머니."
하며 살아 있는 사람한테처럼 그 이름을 불렀다.
"내가 만일 종부가 아니었더라면, 나도 진즉에 칼을 물고 자진을 했을 거야."
청암부인은 효원이 시집오고 나서 얼마 후 그렇게 말했었다. 부인이라면, 능히 스스로 자결을 할 수 있는 성품인 것을 효원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전에 그런 열녀가 있었더란다. 옛날 중국 제나라의 장공이 거 땅을 칠 때의 이야기지. 장공이 누군고 허면 중국에 춘추 때, 제나라 임금이었단다. 영공의 아드님이었는데, 본 이름은 빛날 '광'자였단다. 헌데 나중에 시호를 '장'이라 했거든. 그래서 그렇게들 부르지. 그분이 어떤 싸움터에서 용맹한 장수 하나를 아깝게 잃고 말았더래. 그 장수 이름은 기량식이라. 장공이 이 소식을 듣고는 그 마음에 몹시 애통히 여기고 슬퍼했는데, 어느덧 싸움을 끝내고 본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기량식의 아내를 만났드란다. 그래 장공은 얼른 신하를 보내서 그 남편이 죽은 것을 애도했단다. 신하는 가서, 저희 주군께서 보내신 신하올시다, 얼마나 분하고 망극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랬겄지. 길에서 만난 김에 그렇게 조상을
한 것인데, 기량의 처가 분연히 떨치고 돌아서며 말했드란다. ... 이제 저의 남편 기량은 죄를 졌사온데, 왕께서는 어찌 욕되이 저에게 조상을 하시나이까... 그렇지 않고 제 남편에게 죄가 없다고 하면, 저의 집이 바로 여기 가까운 곳에 있사온데, 어찌 하필 길거리에서 이렇게 조상을 받게 하시나이까... . 그 말을 전해들은 장공은 아차, 잘못을 깨닫고는, 그 집으로 친히 가서 식의 아내에게 문상을 정중히 하고 갔지. 그 아내의 생각에, 비록 남편은 세상을 떠났지만, 이미 죽은 사람한테라도 바르고 정당한 대접을 받게 해 주어야 헌다고 생각해, 그렇게 한 게 아니겠느냐? 죽은 이에게 그러할진대, 하물며 날마다 함께 모시고 섬기고 사는 남편한테야 더 말하여 무엇하리. 마땅히 도리를 다하여 남편의 뜻을 하늘같이 받들고 살도록 해라. 남편이 남들에게 대접을 받고 못 받는 것이 다 안사람 하기에 달린 것이니라."
청암부인은 손부 효원을 앞에 앉혀 놓고, 기량식의 아내가 지아비를 잊고 통 곡한 '식처곡부'의 행실을 들려주었다. 그때 기량식의
아내는 자식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안팎으로 오복의 동족인 오속의 어느 가까운 일가 하나도 없어, 의지하고 살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었다. 오복이라 하면, 초상을 당했을 때 망자와의 혈통관계를 따라 입는 다섯 종류의 단계별 상복으로 참최, 재최, 대공, 소공, 시마를 말한다. 상복 가운데 가장 중한 참최는, 극추생마포 제일 굵고 거친 삼베로 지어 아랫단을 꿰매지 않은 상복이다. 이는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혹은 아버지를 여읜 맏아들이 할아버지 상사를 당해 상주가 된 승중조부의 상에 삼 년을 입는다. 또한 양자가 양부의 상을 당했을 때, 아내가 남편의 상을 당했을 때, 그리고 첩이 정실부인의 상을 당했을 때도 참최를 입니다. 재최는 차등추 생포 굵은 베로 옷을 지어 단을 꿰매는데, 아들이 어머니를 위해서 삼 년 입는
상복이다. 아버지 없는 손자가 할머니 상을 당했을 때, 어머니가 맏아들 상을 당했을 때, 며느리가 시어머니 상을 당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대공복을 입는 대공친으로는 남편의 겨레붙이 모두인 남편의 조부모, 백숙 남편의 종형제, 종자매, 질부를 말하며, 소공 복을 입는 경우는 종조부모, 재종형제, 종질,
종손이고, 시마는 그 중 복이 가벼워 삼 개월만 입으면 되었다. 남편 형제의 증손과 남편 종형제의 손자를 비롯하여, 서모, 유모와 사위, 장인, 장모에게 입는 이 시마를 입을 사람조차 아무도 없었다함이니, 막막한 천지에 혈혈단신 기량식의 아내만 홀로 남은 것이다. 그 아내는 남편의 시체를 성 아래에 누이고, 머리를 풀어 피를 토하며 통곡하였다. 길을 가던 사람도 무심하지 못하여 모두 발걸
음을 멈추고 서서 이 정경을 보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이렇게 밤낮으로 처참하게 통곡하니, 열흘째 되는 날에는 그 통곡이 진동하여 흔들리고 눈물에 금이 가서, 성이 그만 절로 허물어지고 말았다. 그 아내는 그제서야 드디어 남편을 장사지내고, 탄식하며 말하였다.
"이제 나는 어디로 갈 것인가. 여자란 대체로 반드시 의지하는 데가 있게 마련이건만 나는 천지에 혼자로구나. 여자란 일찍이 아버지가 계실 때에는 아버지에게 의지하고, 남편이 있으면 남편에게 의지하고, 자식이 있으면 자식에게 의지하는 것이다. 허나 지금 나의 처지는 위로 아버지가 계시지 않고, 옆에는 남편도 없으며, 슬하에 자식도 없다. 안으로 의지할 사람이 없으니 내 정성을 어디에 보일 것이며, 밖으로도 의지할 곳이 없으니 내 절개를 누구에게 보인단 말이냐. 그렇다고 내가 어찌 딴 남편을 고쳐 섬길 수 있겠느냐. 차라리 죽음이 있을 뿐이로다."
그리고는 하늘을 우러러 울면서, 마침내 시퍼런 치수에 몸을 던져 죽고 말았다.
"내가 일찍이 식처곡부의 이야기를 왜 모르겠는가, 아녀자 오륜 행실의 본이 되는 그 사람은 열녀로서 가히 장한 사람이었으니, 내가 그를 따라 목숨을 버리는 것은 자랑이면 자랑이었지 아무 흉될 것은 없었지만, 그때 내가 기량식의 아내 못지않은 기구한 형상 중에도 목숨을 버리지 않고 살아남은 것은, 오로지
종부였기 때문이었느니라. 내게는 나 홀로 져야 할 책임이 있고 도리가 있었던 게야."
청암부인은 효원의 숙인 이마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같은 말을 몇 번씩 하는 것은 듣기에 따라 공치사도 같고 부질없는 일도 같다마는, 너 또한 책임과 도리가 나와 조금도 다를 바 없어서 이렇게 새겨들으라고 자꾸 말하느니, 허나, 처지로 비기면 야 어찌 너와 나를 한자리에 놓을 수 있으리. 우선은 서로 낯이 덜 익어 설다고 하지만 배필과 더불어 한 지붕 밑에 있고, 위로는 층층이 어른들이 계시고... .끼니를 당하여 식량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매, 이만하여도 너는 호사로다. 다만, 내가 밤이나 낮이나 근심하는 것은 일점혈육이 무릎 아래 곰실거리면서 노니는 모습을 못 보는 것이구나. 늙은 할미 망령이라고 속으로 웃을는지 모르나, 나한테는 그 일이 가장 사무치는 일이니라. 아가, 너, 내 심중을 헤아리겠느냐?"
효원은 숙인 이마를 더욱 깊이 수그렸다. 그네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랴, 그네 자신이 주도하여 하는 일이라면, 두부를 자르듯이 네모반듯하게 경경하여 어여쁘게 할머님 앞에 놓아드릴 수도 있겠지만, 혼자 앉아 아무리 각골명심 새 겨들어본들 무슨 하릴 있으리오.
(할머님의 심성을 제 어찌 모르겠습니까... . 하오나, 다만 헤아려드리올 뿐 더 어쩌지도 못하고, 제 몸으로 남의 인생사는 것이 무슨 희롱인지 알 수 없습니다. 어인 운명이, 제가 바라는 대로 살지 못하고, 살라고 주어지는 것을 살아야 하는지요. 여인이라 그러한가, 남들도 나 같은가. 만들고 고치고 소망하는 것이 모두 다 홀로 달을 바라봄과 같으니 손발이 있으면 무엇하고, 뜻이 있으면 무엇 하겠습니까.)
효원의 수그린 이마와 각이 진 어깨에 그 단단한 마음이 글자처럼 드러나 보였는지 청암부인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손부의 손을 따뜻하게 잡는다.
"기다리는 것도 일이니라. 일이란 꼭 눈에 띄게 움직이는 것만이 아니지. 모든 일의 근원이 생각에서 비롯되는 것인즉, 네가 중심을 가지고 때를 고요히 기다리자면 마음이 고여서 행실로 넘치게 마련 아니냐. 이런 일이 조급히 군다고 되는 일이겠는가. 반개한 꽃봉오리 억지로 피우려고 화덕을 들이대랴, 손으로 벌리랴. 순리가 있는 것을. 허나, 나는 이렇게 하루가 다르게 늙어가고, 시절은 흉흉하여 앞날을 예측하기 어려운지라, 어린 너한테 과중한 짐을 부려 저리고자 이렇게 자꾸 다짐을 하는 것이니라."
청암부인은 쥐고 있는 효원의 손을 조용히 어루만지고만 있었다. 부인 손의 다순 온기가 효원에게로 번지며 스며드는 것을 효원은 느낀다. 그 온기 속에는 추상의 찬 서리 기운도, 뇌정의 울음소리도 아닌 그저 한 아낙의 간절한 심정만이 어려 있는 것 같았다. 마당에서 콩심이가 달랑거리며 뛰어가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온다. 누렁이와 함께 뛰는지 무어라고 땍땍거린다. 그때 겨우 아홉 살이 된 콩심이는 효원이 대실에서 신행올 때 교전비 몸종으로 데리고 왔으나, 그까짓 코흘리개가 무슨 수발을 제대로 들겠는가. 저 혼자 제 머리 빗기에도 어린 것이었으니, 말이 몸종이지, 친정 뜨락의 낯익은 돌멩이 하나를 주워 오는 심정
으로 함께 왔던 것이다. 고것은 안서방네에서 가끔씩 쥐어 박히면서도 그 옆에 가서 쪼그리고 앉아, 이런저런 자잘구레한 이야기의 말동무도 되어 주고 낫낫하게 잔심부름도 곧잘 하였다.
"아이고, 이년아. 너는 무신 노무 목청이 그렇게 때까치맹이로 땍땍 땍땍. 내 귀가 마대. 조신허게 가만 가만 좀 못허겄냐?"
안서방네는 콩심이의 주동이를 향하여 주먹을 질러 보인다. 콩심이는 혓바닥을 날름하며 눈을 질금 감는다. 알았다는 시늉이다.
"너 이년, 이 댁의 청암마님이 어뜬 양반인지 알기나 허냐? 매급시 천방지축 팔랑거리고 댕기다가, 다리몽생이 분질러질 중 알어라."
"아앗따아, 워찌 고렇코롬 무선 양반이다요."
"이년, 이 주둥팽이, 어른이 무슨 말을 허는디 그렇게 비얌 셋바닥맹이로 날름 말을 받아먹냐? 그렇다먼 그렁갑다, 허고 속으로만 알어들을 일이제."
안서방네는 옆에 놓인 사기대접의 물을 한 입 물더니, 푸우우, 물먹은 이불 호청 위에 뿜어낸다. 푸른빛이 도는 광목 호청에 순간 부연 안개가 어리는 듯싶다.
"내가 내 눈으로 보든 안했는디, 아조 유명헌 이 얘기가 하나 있제잉. 너 들어 볼래?"
안서방네의 말에 콩심이의 눈이 반짝한다. 이야기라면 무엇을 마다하리. 고것은 턱을 추켜들고 침까지 꿀꺽 삼킨다.
"마님이 이 댁으로 신행오실 적으 이얘긴디... ."
비록 반겨 줄 이 없는 애통하고 적막한 집으로 가는 초상 길의 가마였으나 명색이 신행이므로, 청암의 친정에서는 격식을 제대로 갖추어 교군꾼과 하님들을 챙겨 보냈다. 그러나 다만 호화롭고 아름다운 청홍의 술을 늘이운 꽃가마가 아니라, 이 서러운 신부의 가마는 흰 덩이었다. 그 흰 덩을 따라서 이고 진 사람들의 행렬은 사흘 밤낮을 걸어, 드디어 하루해만 걸으면 될 숲말에 당도하였다.
마침 목도 마르고 다리도 아파, 잠시 객주집 근처에서 일행은 쉬게 되었다. 그때 근방에 사는 민촌의 아낙 하나가, 일행들 행차로 보아서는 신행길이 분명한데 난데없이 웬 가마가 하얗게 길목에 앉아 있는 것이 흥미로웠던지, 가마 문을 벌컥 열어젖히고는 고개를 쑤욱, 안으로 들이밀고 청암부인을 들여다보았다.
"아이고메, 신부가 과분가아? 벨 일이 여이. 무신 노무 신부가 이렇게 생겠당가, 흐윽허니 참말로 요상허그만, 무섭게도 생겠네에. 호랭이맹이로. 하나도 이쁘도 안허고, 구신도 같고?"
아낙은 질겁을 하며 가마 문짝을 꽈당, 닫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속에 앉아 있는 신부는 어두컴컴한 가마 안에서 허연 소복을 하고 있었으며, 그 용색 또한 굵직하고 매서웠으니, 아낙이 소리를 지른 것은 순간의 일이었으리라. 호들갑스러운 비명에 요란한 몸짓으로 달려드는 아낙의 수선에, 객주 집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고개를 틀어 돌아보았다. 교군꾼 하나는 막걸리 사발을 기
울이던 손목을 꺾은 채 눈이 동그래져서 깜박이지도 못하였다. 하님 하나는 아예 일어서 버렸다. 무슨 일이 난 줄로 알았던 것이다. 아낙은 그만큼 야단스럽게 놀라며 낄낄거렸다. 일순 가마 주변에는 정적이 돌았다. 그것은 고즈넉한 것이 아니라 터질 듯이 팽창해 오르는 정적이었다. 그런 것도 모르고 민촌 아낙은 치맛자락을 거머쥐고 배를 내밀어 뒤뚱 걸음을 걸으며, 금방 구경거리를 본 것에 대하여 호기롭게 자랑하려는 듯 궁둥이를 내둘렀다. 그때였다.
"네 이녀언."
벽력같은 고함소리가 쩌엉, 울리며 공기의 폭을 갈랐다. 뒤꼭지를 할퀸 사람처럼 자지러지며 돌아선 민촌 아낙은, 가마 문을 열고 나와 우뚝 서 있는 청상을 보았다. 얼른 보아도 이십 미만의 여인이 분명한데 어디서 그런 서릿발이 돋는 것일까. 마흔이 훨씬 넘었을 아낙은 주춤, 그 자리에 서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제서야 객줏집 평상과 마루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두렵게 웅숭웅숭 일어나 길목으로 나왔다. 햇발 아래 청상의 소복은 날이 선 푸른빛을 눈부시게 뿜어냈다.
"저년을 잡아 오너라."
부인은 말끝을 칼날같이 잘랐다. 아직 부인이라기에는 애띠고 어린 여인의 분부라지만, 감히 누구도 말을 붙일 수가 없는 위엄이 전신에 어렸다. 그래서 교군꾼 두 사람이 가까이 그 아낙의 곁으로 걸어가지도 전에, 아낙은 저절로 주저앉고 말았다. 비실비실하는 아낙을 가마 앞까지 데리고 왔을 때, 부인은 아낙의 머리채를 잡아낚아 그 얼굴을 쳐들게 하였다. 아낙의 낯빛이 노랗게 질리는 것을 역력하게 보였다. 반면에 청상의 안색은 새파랗게 바래는 것이었다.
"네가, 감히, 누구를."
청암부인은 옆 사람에게조차도 들리지 않을 만큼, 숨을 잘라 뱉어내듯이 말했다. 그러더니 동댕이치듯 머리채를 놓아 버렸다. 아낙이 휘청하며 그만 길바닥으로 동그라졌다. 아무러면 어린 여인의 힘 때문에 그네가 쓰러졌을까. 아마도 창졸간에 너무 놀라 얼이 빠진 탓에 그렇게 힘없이 나가떨어지고 말았으리라.
"사람이란 엄연히 상하가 있는 법이거늘, 너 이년, 어디서 배운 버르장머리로 누구한테 그런 막된 행실을 하는 게냐. 내, 네년을 단단히 가르칠 것이니 그리 알아라."
청암부인은 길바닥의 아낙에게 일별을 던지고는, 누구에게랄 것 없이 한 마디로
"가자."
하더니, 몸을 돌려 가마에 탔다. 그네가 소복 입고 오는 신행길에 버릇없이 민촌 아낙을 끌고 와, 마당에 꿇어 엎드리게 해 놓고는 불칼 같은 호령으로 나무란 일은, 훗날에까지 두고두고 안팎에 일화거리가 되었다. 그러다가 몇 십 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러 타관 땅에서 몸종으로 주인을 따라온 아홉 살짜리 교전비
콩심이에게까지 그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말 한 마디 잘못허고 행실 한 가지 비끗허먼 그렇게 큰일 나능 거이여. 알겄냐? 어른 뫼시고 사는 사램이란 것은 언제든지 조심을 해야 헌다. 그저 어쩌든지 입이 무거야고, 놀리는 일손은 번개같이 빠름서도, 그렇다고 눈치 없이 아무디나 촐랑촐랑 나서지 말어야고오."
안서방네는 눅눅해진 이불 호청을 네모반듯하게 개키며 콩심이에게 다짐을 둔다. 그러면서, 새앙쥐 꼬랑지만한 콩심이 머리꼬리에 웃음이 나와 다시 한 번 대가리를 쥐어박아 준다. 그러나, 사람들 모두가 그 이야기를 안서방네처럼 받아 들이는 것은 아니었다.
"혼인허고 사흘 만에 신랑을 잡아먹었으먼, 원 하늘이 무섭고 세상이 부끄러서 고개도 못 들고, 어디 쥐구녁 없능가, 삿갓을 씨고 있어도 모지래겄그만. 서방 죽어 초상난 신부가 겁도 없이 고래고래 남 다 듣게 외장을 침서 멀 잘했다고 죄인끄장 이바지맹이로 끄집고, 시집으로 온당가. 첨 오는 질에. 아이고, 배짱도
무서라."
"쌍것으로 태어난 설움을 톡톡이 받었그만 그리여. 그께잇 가매 뚜껑 조께 열어 봤다고 그렇게까지 헐 거 머 있당가? 하도 요상허게 뀌민 가매라 지내감서 한 번 디리다 봤을티제잉. 가매란 거이 보통 호사시럽제, 그렇게 흰 덩을 탄 신부가 어디 흔헝가, 머? 나라도 디다 보겄네. 아 자네 같으먼 안 보고 싶겄능가? 난생 첨 보는 거인디. 사람 귀경도 죄가 되는 노무 인생. 무신 좋은 날을 볼라고 이러고 사능고."
그때 당시에나 몇 년이 지난 후에나 그보다 더 긴 세월이 흐른 뒤에나, 거멍 굴 사람들에게는 그 이야기가 바로 엊그제 있었던 일처럼 생생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자신들의 처지를 그만큼 절실하게 깨우쳐 주면서도, 매안의 문중에 대하여서는 일종의 두려움을 새로 일깨워 주는 이야기인 때문이었다. 그들은, 이씨 문중과 청암부인의 서슬에 금방이라도 살을 베일 것 같은 아찔함을 한두 번 맛본 것이 아니었다.
"가매를 열어 본 사램은 또 얼매나 놀랬겄능가잉. 연지 찍고 곤지 찍고 녹이 홍생을 떨쳐입은 꽃각시가 앉었능게미 재미로 열어보다가, 무신 구신맹이로 흐옇게 앉아있는 젊은 여자를 보이니, 그것이 나였드라도 놀래 자빠졌겄네. 아, 누가 안 놀래겄능가? 거그다가 지금은 그 냥반이 늙어잉게 보타져서 그만이라도 쬐깐해졌제, 옛날으 젊었을 적으는 무신 지둥맹이로, 가매 뚜껑을 뚫어 불라고 앉은키가 우뚝허니 솟았을 거인디 말이여. 거그다가 엥간치 매섭게 생겠능가? 참말로 자개 생긴 것은 생각도 안허고, 넘보고 놀랜 넘보고만 허물을 따지자니이... ."
옹구네는 그 이야기만 나오면,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같은 말을 곱씹었다. 그네로서는 매안 동구에 서 있는 열녀비라든가 피투성이 같은 시뻘겋게 칠갑을 한 창살을 나무기둥 정문을 바라만 보아도 울컥, 아니꼬운 심정이 드는 것이었다.
"허엉. 열녀? 니가 멋으로 열녀를 했능가는 모리겄다마느은, 너도 참말로 불쌍헌 헛세상을 살다가 갔다. 인생이 한 번 왔다가 죽고 말먼 그거뿐인디 어디 눈에 맞는 머심 등짝엘가도 엡헤서 밤도망을 갔다먼 또 말도 않겄다. 속절없이 죽어간 것은 누구 보라고 헌 짓이냐고오. 너도 매급시 넘으 비우 맞출라고 애간장
녹게 아까운 목심을 덜컥, 끓었겄지마는, 그거이 무신 지랄이냐. 나는 지발도 먼저 죽은 서방 따러 죽었다고 누가 열녀라고 해 주도 않지마는, 내가 죽도 안헌다. 내가 왜 죽겄냐. 나느은 살라안다아."
언젠가 옹구네는 남편의 제사를 지내고는, 홀짝 홀짝 따라마신 음복주에 흥건하게 취해서 허벅지 장단을 두드리며 타령조로 사설을 하다가, 열녀비 쪽을 향하여 코를 팽, 풀어 던졌다. 그러면서도 그네는 찰진 입심만큼 손끝도 야물어, 원뜸 일이라면 자기 손바닥처럼 훤히 알고 궂은일 잔일을 잘 찾아 하였다. 거멍 굴에서 나서면 공방담배 석 대는 피워야 겨우 아랫몰로 건너가는 도랑물에 닿는다. 그 도랑을 건너고도 또 그만큼이나 걸어가야 겨우 아랫몰에 이르는데, 기운 없는 여름에는 팍팍하고 힘 팽기는 거리라고도 할 수 있었다. 옹구네는 도랑물을 건널 때마다, 이것이 서로의 신분을 금 긋는 경계처럼 느껴졌다. 그 물을 건너면서는 말씨도 조심하고 걸음걸이도 안존하게 하려고 한다. 그리고 고샅에 돋아나는 풀포기 하나라도 뽑아내고, 발끝에 채이는 돌멩이 한 개라도 골라내는 것이었다. 그것은 청암부인의 성품이, 보이지 않는 곳에까지 서려 있기 때문이었다. 고샅을 지나는 사람의 마음이 그러할진대, 그 댁의 마당은 말하여 무엇하겠는가. 그대로 맨발로 디뎌도 흙이 묻어나지 않을 만큼 반드럽고 탄탄하였다. 네
모진 귀퉁이의 날카로운 각은 누가 보더라도 그 집안의 서슬을 하였다.
그 마당을 쓸어내는 새끼머슴 붙들이 솜씨 또한 여간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우선 대빗자루로 초벌을 쓸고, 다음에 부드러운 싸리비로 재벌을 쓸었는데, 바깥에서 안쪽으로 먼지 한 점 일우지 않고, 마당이 세수라도 한 것 마냥 매끄럽게 일을 해냈다.
"집안에 먼지일게 허지 마라. 마당 하나 쓰는 데도 정성이 들어가야 합심이 되는 법이거늘, 쌓인 흙이라고 마구 쓸어내면 종당에는 마당이 돌짝밭 되고 마는 것이다. 세상에 그저 되는 일은 없느니."
그렇게 단속하는 청암부인의 성품 탓으로 큰일, 작은일, 큰손님, 작은손님이 끊일 사이 없는 종가의 부엌 행주에서는 언제나 맑은 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러자니 심지어는 이런 일까지도 있었다. 본디 침착한 안서방네가 그날은 웬일이었는지, 청암부인이 마실 냉수를 받쳐 내오다가 발목이 비끗하면서, 물을 부엌 바
닥에 흘리고 말았다. 물론 그릇을 엎은 것도 아니도, 다만 자칫 잘못으로 한 모금이나 될까 한 물을 엎지른 데 불과한 것이었다. 그것은 그대로 두면 바람에 마를 일이었다. 그러나 언제, 안방에 앉아 있던 부인이 부엌 바라지 앞에 서 있었지, 그런 안서방네를 보고는 혀를 끌끌 찼다. 막 시집와서 얼마 안되었던 안서방네는 청암부인에게 죄송스러운 몸짓으로 허리를 굽히고는, 급히 냉수 한 대접을 다시 뜨려고 하였다.
"바닥에 물을 닦아야지."
청암부인은 짤막하게 말했다. 안서방네는 그 말에 당황하여 부뚜막과 살강을 둘러보았으나 눈에 뜨는 것은 행주뿐이었다. 그래서 종종걸음으로 부엌에 딸린 뒷방 문을 열고는 방걸레를 지어 들었다.
"허허어, 살림하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로고, 방에 쓰는 것, 부엌에 쓰는 것, 마당 헛간에 쓰는 것이 다 용도가 있고 자리가 있는 법 아닌가. 어찌 방걸레로 부엌 바닥을 훔칠까."
안서방네는 부인의 말에 얼어붙은 듯 서 있다가 황망히 행주치마를 벗어 바닥의 물을 찍어냈다. 그때 청암부인의 나이는 안서방네와 별반 차이 나지 않는 이 십 중반이었다. 안서방네는 그 일을 오래 잊지 않았다.
"상전은 다르시다."
그네의 가슴속에는 이 생각이 깊숙이 새겨졌던 것이다. 그러나 요즘의 청암부인은 그때 같지가 않으시다. 하루가 다르게 늙어가고, 눈에 띄게 초췌하여지는데다가, 전에 않던 말씀도 힘없이 하시지 않는가.
"여보게, 인제 나 죽으면 저 마당 귀퉁이에 풀 날 것이네."
한 번은 부인이 대청마루에 앉아, 붙들이가 마당 쓰는 것을 보며 안서방네에게 그렇게 탄식하는 말을 듣고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었다. 안서방네는 민망하여 아무 대답도 못하였지만, 청암부인은 바로 며칠 전에도 이기채를 앞에 하고 또 그 말을 뇌었다.
"인제 두고 보아, 나 죽으면 저 마당 귀퉁이에 풀 날 것이니."
청암부인은 이기채의 반박에도 대꾸를 하지 않고, 말없이 고개를 기울이고만 있었다. 그런데 이 마당에 와서 창씨개명이라니, 이기채는 밤이면 잠을 못 이루었다. 특히 곡성의 유건영과 고창의 설진영이 비장하게 죽어간 이야기를 들은 다음부터는 더욱 그러했다. 어찌하면 ㅈ을꼬. 과연 이 일을 어찌하면 좋을꼬. 이
기채의 생각을 깨뜨리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옆에서 기표가 말을 던진다.
"사람은 죽어 버리고 성씨만 남으면 뭘 합니까? 몸뚱이도 없는데 빈옷껍데기 만 너울거리는 격이지요."
그러더니 답답한지 입을 다물어 버린다. 사실 이와 같은 시국에 이만큼이라도 별 탈 없이 집안을 유지해 나가고 있는 것은, 기표의 덕분이랄 수가 있었다. 그는 아는 사람이 많았다. 그것도 단순히 그냥 친분이 있는 정도의 사람도 있었지만, 상당한 권한이 있는 사람들과 자주 자리를 같이하였다. 그래서 이기채도 기표의 권유에 따라 기부금이며 군량을 내기도 하였다.
"제 말씀을 들으십시오. 형님, 한 푼을 아끼다가 때를 놓치면 아차 집칸을 잃는 수도 있습니다. 호미로 막을 걸 가래로 막는 수도 있고, 반대로 가래로 막을 걸 호미로 막는 수도 있으니까요."
기표는 민활한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이기채는 한 치도 빈틈없이 어긋남도 없이,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야 하는 성격이다. 그 성격은 이재에서도 그대도 드러났다. 한 번 움켜쥔 것은 놓지 않으려 하고, 마음이 질긴 사람이어서 쉽게 무슨 일을 포기하거나 새로 시작하지 못한다.
"안 먹고, 안 입고, 안 쓰면, 그것이 어디로 갈 것인가? 결국에는 내 앞으로 모이지 않겠느냐."
그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마치 그런 이기채의 뜻을 증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는 위장이 실하지 못하였다. 실하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거의 무기력하다는 쪽이 옮을 것이다. 본디 체수도 작고, 위장까지 좋지 않으니, 그는 오로지 강단 하나로 자신을 버티면서 집안을 관리해 나갔는데, 그는 언제부터인가 밥을 제대
로 먹지 못하게 되었다. 주식으로는 녹말가루를 멀겋게 쑤어서 먹고, 좀 괜찮을 때는 마음이나 죽을 끓였으며, 밥은 그야말로 어쩌다 한 번밖에는 입에 댈 수가 없었다. 더구나 심기가 좀 언짢을 때는 아예 아무것도 소용없어서 율촌댁이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 대신 이기채의 사랑마루에는 언제나 웬만한 약재가 갖추어져 있었다. 뿐만 아니라 약재를 자르고 써는 작두, 갈아서 가루를 내는 정교한
맷돌, 빻아서 가루를 내는 약절구와 작은 공이가 반들반들 윤이 나게 닦이어 있었다. 거기다가 물론, 약을 밭치는 체와 비상도 달 수 있는 약저울이며 약 탕관도 늘 약장 위에 얹혀져 있었다. 웬만한 선비 사인의 집에는 크고 작은 간에 하나씩 갖추기 마련인 이 약장은, 그 서랍이 적게는 여남은 개에서부터 많게는 칠팔십 여개에 이르기까지 층층으로 빼곡하여, 그 안에 칸칸마다 썰어 넣어 놓은 약재가 가득 담기어 있었는데. 사랑에만이 아니라 안방에서도 약재를 쓰이어, 머리맡에 내방 약장을 두기도 하였다. 그래서 집안 안팎식구들이 용도가 있을 때, 혹은 일가와 문중, 마을 사람들이 아플 때, 화제를 내어 약을 지어 주었으니, 선비라면 누구라도 스스로 화제를 낼 줄 알았다. 이기채는 의서를 두루 갖추어 가
까이 두고 읽으며, 음식을 멀리 하였다. 그러니 자연 다른 집안사람들도 따라서 소식을 하게 될 수밖에, 그래서 이 집에 찾아왔던 손님들이 마침 끼니때가 되어 함께 상을 받으면 그 소반에 우선 놀라 버린다. 그러기에 율촌댁이 마늘 한쪽을 반으로 잘라서 아침에 반절, 저녁에 반절 나누어 양념 무친다는 소문이 돌 정도인 것이다. 물론 율촌댁이 살림 규모가 또 그만큼 알뜰하고 인색한 것도 사실이었지만, 그러나 기표의 생각은 그와 달랐다. 크고 작은 모든 일에, 수단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그는 일찍이 깨달았던 것이다. 어느 때는 기표의 옷자락 끄트머리에서 칼빛이 번뜩이는가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의 혈색과 풍신 때문에 그것은 쉽게 누구의 눈에 띄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기표를 보고 어쩌다
기응이 미간을 깊이 찡그리는 일이 있었는지, 그 기색을 기표도 놓치지 않고 반박하였다.
"사람의 한평생이란 참으로 예측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반드시 그렇지도 않어. 기회와 수단, 이것이 서로 잘 맞어 주면 뜻을 한 번 이루어 볼 만도 하지."
기표는 오류골 동생 기응에게 그렇게 말한 일도 있었다.
"분북대로 살지요."
기응은 중형 기표의 하는 일이 오히려 걱정스럽다는 투로 대답했다.
"분목? 그것도 다 사람이 짓는 대로 몫이 돌아오는 게야. 큰집의 농토며 소작 미만해도 그것이 가만히 앉아서 지켜지는 것인가? 분복대로 산다고 하늘만 쳐다보고 앉어 있었더라면, 진즉에 무슨 일이 났을 것이야. 이 어지러운 세상에."
그렇게 말하는 기표가 큰집을 위하여 여러 모로 힘쓰고 있는 것은 기응도 알고 있었다. 일본은 최근, 양정 계획으로 일만자족정책을 세우고, 지난 1937년부터 연간 천만 석 이상의 미곡을 조선에서 일본으로 반출하였다. 그동안 일본의 식량 사정이 급속히 악화되자, 제7대 조선 총독 남차랑은 작년 1939년부터는 양곡 반출에 대한 계획을 다시 세웠다. 즉 조선에서 나는 양곡의 총 수확량을 지금까지 책정하였던 실 수확량보다 이할 오 푼이나 높여서 허위로 책정한 것이다.
"인자는 조선사람한티는, 일 년 양식으로 한 사람 앞에 쌀 서 말 여덜되 여덜 홉만 냉겨 놓고, 나머지는 다 공출헌다네."
"아니 고매, 쥑일 놈들. 호랭이 물어가고 자빠졌네. 깟낫애기 암죽만낄일라도 그께잇 거 갖꼬는 어림 택도 없겄다."
"아니, 지어 바치라는 것은 숫짜가 눈깔이 돌아가게 엄청나고, 먹으라고 냉게 놓는 것은 싸래기만큼배끼 안된디, 그나마 아홉 말에서 서 말 여덜 되 여덜 홉으로 먹을 양석을 깎어 내리머언, 우리는 기양 앉아서 비툴어져 죽으라는 말이구 만잉."
"아홉 말썩 쳐서 냉게 놀 때도, 그거이 어디 사람 먹는 거이였간디. 밀지울 섞어 먹고, 깻묵 섞어 먹고, 똥이 안 빠져서 똥구녁 찢어진 놈이 어디 한둘이었가니? 인자는, 똥구녁끄장 갈 것도 없이 창새부터 짝짝 찢어지겄네."
"나무 껍닥 벳게 먹고, 풀뿌랭이 캐 먹고, 또랑물 퍼 마시고 살어야제잉.... . 개 짐생만도 못허게."
그런데도 그들은 그렇게 결정하였다. 그리고는 미곡 수급 계획에 의하여 각 농가마다 할당량을 정해 주고, 할당 수확량에서 정해 준 소비량을 뺀 나머지 양곡은 모조리 곡출해 가 버렸다. 그러니 농민들은 실제 수확량보다 엄청나게 높은 할당량 때문에 기가 질렸고, 거기다가 도저히 그것만으로는 입에 풀칠하여
살 수조차 없는 적은 양곡 때문에, 헤어날 길 없는 빈사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여기저기서 부황이 났다. 오래 굶주린 사람들, 그들은 살가죽이 누렇게 붓고 들떠서 밀룽밀룽해져, 서로 얼굴을 알아보기가 어려웠다. 그래도 나이 젊은 축은 좀 나았지만 병약한 노인이나 어린 것은 버치어 내지 못하고, 허깨비처럼 픽픽 쓰러져 힘없이 죽어 나갔다. 말이 천만 석이지, 평년작을 전제로 할 때, 오백만 석 이상은 조선에서 반출할 능력이 없었음에도, 일본 본토로부터 배정받은 공출 할당량은 요지부동 절대적인 것이었다. 그때 총독부에서는 단 한 평의 땅이라도 놀리지 말자고, 소위 '일평원예'라는 것을 실시하였다. 학교 마당, 가정집의 뒤 뜰, 그리고 도로변이나 자갈밭까지도 개간을 하여 식물을 심게 하고는, 농업 생산 책임제를 강행하여 쌀과 보리 종류, 잡곡, 소채, 누에고치 할 것 없이 책임 품목을 지정하고, 그 책임수량을 할당하였으니, 조선인은 설령 자기가 굶어 죽은 한 이 었어도 서슬이 시퍼렇고 찰거머니 같은 공출을 피할 수는 없었다. 임실의 중농인 한 남정네는 넋이 나간 사람 모양으로 툇마루 끝에 걸터앉아, 마른 입술이 쩍쩍 달라붙는 담뱃대 꼭지를 연방 빨더니
"에에이 벌어 처묵을 노무 시상."
하면서 연기 대신 한숨을 내뿜었다.
"저노무 외양깐, 팍 뿌수거 부러라. 체다 뵈기도 싫다. 하이고오, 웬수엣 노무 시사앙. 두 눈꾸녁을 이렇게 버언히 뜨고 자빠져서 황소가 끄집혀 가는 것을 체 다만 보고 있었이니... ."
그 남정네의 안사람이 짚북더미 같은 머리에서 꾀죄죄한 수건을 벗겨 내리며 따라서 한숨 쉰다.
"글 안허면 어쩔 거이요? 생우 공출이 머 어지 오널 일이간디? 넘 다 당헐 때는 넘 일인가 싶드니마는 참말로 발 등에 베락 떨어졌소. 인자 이 동네에는 소 새끼라고는 씨알머리도 없응게, 농사 질라면 재 너머로 황소 빌리로 가야겄구만요."
"재 너머에는 무신 소가 남어 있다간디? 거그도 다 진작에 씨가 말러부린 지 오래여... . 이러다가는 조선 팔도에 송아치새끼 씨종자가 멜종을 허고 말 거이네."
"아, 재 너머에 왜 황소가 없당가? 이런 난리 속으서도 황소 암소 짝맞춰서 키우는 집이 있는디."
그것은 청암부인댁을 이름이었다. 그 말소리 속엔ㄴ 미처 다 토하지 못한 억하심정이 꼿꼿하게 머리를 쳐들고 있었다.
"그렁게 어쩔 거이여? 임자가 쫓아가서 한 마리 끄집고 올랑가?"
남정네가 담뱃대를 토방에 탁, 탁, 치며 비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