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산책길 / 한정숙
두 해 전, 가을이 깊어지면서 살던 곳에서 도로 하나를 건너 이사했다. 이전 집은 흙 운동장이 있는 초등학교 바로 옆이라 아침저녁을 가리지 않고 맨발 걷기를 즐겼었다. 옮겨온 집이 운동장과 멀어지자 한 번 두 번 걷기를 거르는 일이 생겼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미루니 마음도 답답하고 조바심이 났다.
이번 4월 초에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후문을 기점으로 10분 이상을 걸을 수 있는 말쑥한 산책길이 생겼다. 진즉부터 있었던 공원인데 군데군데 위험한 쓰레기도 있고 길이 울퉁불퉁하여 맨발로 걷기엔 조심스러웠었다. 그런데 보름 남짓 정비를 하더니 고맙게도 시원하게 뚫린 흙길이 생긴 것이다.
아파트에서 나와 왼쪽으로 돌면 바로 공원 입구다. 슬리퍼를 벗고 멈춰 서서 심호흡을 한다. 공원의 첫 구역은 쉰 걸음 정도를 걸을 수 있다. 바닥은 마사토라서 발바닥에 닿는 까끌까끌한 촉감이 아주 그만이다. 왼편엔 식자재 마트와 돼지고기 요릿집, ‘퇴근 후’라는 술과 안줏거리를 파는 가게, 커피숍이 나란히 자리 잡았다. 일주일 전부터 ‘퇴근 후’에 ‘임대’가 붙었다. 볼 때마다 짠하다.
오른 편으론 어느 모텔의 뒷모습이 보이고 가로등이 하나,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필요한 사람들이 찾는 정자가 있다. 그곳은 이름표는 붙지 않았지만 딱 ‘흡연구역’이다. 좋은 기운을 만드는 공원은 아침을 시작하는 이가 누구든지 받아주는 모양이다. 내가 걸으려고 이곳을 찾는 것처럼 가족을 배려하며 정자에 앉아 담배를 피우는 이들을 나무랄 수는 없는 것이다. 나는 천천히 걷는다. 양손을 뒤로 모으고 발바닥 전체가 땅에 닿도록 꼭꼭 밟는다. 인기척에 답하는지 나뭇가지에서 자고 있던 새들도 소리를 낸다. 사람이고 새들이고 맘껏 쉬고 나면 어찌 그리 기분이 좋은지, 이른 아침에 듣는 새소리는 청량하기 이를 데 없다.
보도블록을 70보쯤 걸어 두 번째 구역으로 건너간다. 구역마다 꽝꽝나무와 철쭉이 야트막이 자리 잡아 화단을 만들고 그 한쪽엔 상수리나무가 울창하게 자라고 있다. 안쪽에는 크기와 모양이 다른 소나무가 시선을 붙잡는다. 이 구역의 왼편엔 가요주점과 ‘임대’가 안내된 병천 순대, 그 위층엔 딸기가 그려진 노래방이 있다. 음식점 앞에 쉴 수 있는 긴 의자와 가로등이 있고 간이 쓰레기통이 누군가를 기다린다. 오른 편엔 24시 게임방을 시작으로 백반 전문식당이 있는데 스산하다. 식당 간판과 유리창에 ‘확장 이전’과 ‘임대’ 안내가 나란히 붙어 있다.
‘임대’가 붙은 가게가 늘어 공원길이 썰렁하기도 하지만 사연이야 어떻든 후박나무를 비롯한 키 큰 나무와 화초들은 생기발랄하다. 눈꽃처럼 날리던 벚꽃이 개나리와 함께 멀어진 어느 날, 붉은 철쭉꽃이 공원을 뒤덮더니 그마저 몸을 감추자 나무들은 빈자리에 잎을 붙이고 키우느라 부산하다. 연두에서 시작하여 한 겹 두 겹 붓 칠을 더하여 초록을 입힌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8순은 되어 보이는 노인과 강아지가 공원길로 접어든다. 내가 없을 때는 분명히 산책로 중앙으로 당당하게 걸었겠으나. 예의를 갖추는지 낮게 자리 잡은 화단 쪽으로 방향을 틀어 가만가만 움직인다. 강아지와 주인은 서로에게 운동 친구이다. 마음이 푸근해진다. 분명히 아침 용변도 보게 하고 운동도 시켜야 해서 할아버지는 강아지의 목줄을 당겼을 것이고 덕분에 함께 산책도 할 수 있으니 참 좋은 사이다. 서로 빚을 나누는 셈이다. 서로 은혜를 베푸는 셈이다. 흰색 털을 가진 귀여운 ‘보름달’은 품종이 비숑프리제로 사회성이 좋은 프랑스 개라고 한다.
2층 노래방에서 건장한 남자가 쓰레기 봉지를 들고 나온다. 지난 저녁의 흔적을 꾹꾹 눌러 담아 이곳의 이야기가 아닌 양 쓰레기차에 실어 보내고 싶은 모양이다. 켜켜이 쌓인 쓰레기 속엔 어떤 사연이 구겨져 있는 것일까? 지친 밤은 현란하게 치장한 불빛을 재우고 술기운을 빌어 존재감을 과시했던 사람들의 가면도 떼어낸 후 스스로 얼굴을 바꿔 새벽이 되었을까? 이른 아침을 맘껏 호흡하며 이곳 텃새들의 마중을 받는다. 비비새(붉은 머리 오목눈이), 참새, 까치의 목청이 당당하기 그지없다. 이곳 두 번째 구역의 길이는 내 걸음으로 100보 가량 된다.
키 재기를 하는 여덟 그루의 소나무가 모여 사는 둥근 교차로를 지나 세 번째 구역으로 넘어가면 왼편 골프연습장 앞에 운동기구가 있다. 서너 가지뿐이지만 사람들이 오가며 자주 이용한다. 라이브 카페도 보인다. 오른 편으론 큰 모텔의 주차장을 등 뒤로 하고 정자가 있는데 오늘 아침에도 어김없이 젊은 여자 둘이 다정히 앉아 담배를 피우고 간다. 그들은 매일 아침 이곳을 찾는다. 내가 없을 때도 오는지는 모르겠다. 내 걸음으로 150보가 소요되는 이 구역엔 가로등이 3개, 긴 의자가 2개 있다. 이른 새벽이나 퇴근시간이 지난 때에도 의자에 몸을 깊숙이 기댄 체 휴대폰에 눈를 디밀거나 연신 담배를 피워대는 남자들을 보기도 한다. 그들은 공원에 지고 있는 빚을 알기나 하는지 모르겠다. 장담할 수 있는 것은 공원은 언제고 기분 좋은 빚을 베풀며 서운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조용하고 아늑한 휴식공간은 필요하니까.
집 앞 공원 입구에서세 번째 구역 끝까지는 대략 5분이 걸린다. 나는 이 거리를 왕복으로 서 너 번 걸으며 아침을 시작한다. 보통 금강경을 들으며 걷는데, 임윤찬의 피아노와 간단한 영어 회화도 돌아가며 친구가 된다. 그러나 맨 귀로 공원 식구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으뜸이다. 아침 산책길이 주는 기분 좋은 빚을 맘껏 누린다.
첫댓글 산책길이 보이는 것 같아요.
선생님, 감사합니다. 회색 건물 아래, 어쩜 이리 예쁜 길이 만들어졌는지요. 이젠 눈에 보이는 모든 것에 감사할 때인가 봅니다.
아침 산책길을 이렇게 자세히 묘사하시다니, 저도 이런 글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대단하세요.
글 공부 덕분인가 봐요. 조금씩 조금씩 낱낱이 애정을 주는 시간이 많아져요. 궁시렁 궁시렁 얘기 나누는 시간도 많아지구요.
좋은 데로 이사하셨습니다. 마음도 정신도 건강해지는 곳으로요. 좋은 글이 나오는 건 덤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모든 계 마음 먹기 나름이겠지요? 소리 내어 깨지며 내 의식을 바로잡는 그릇에게도 감사합니다. 하물며 흙과 나무가 눈 앞에 있다니 이보다 좋을 순 없답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의 글을 읽을 수 있는 것도 기쁨과 감사의 한 자락입니다.
함께 그 길을 걷는 듯 사실적이네요.
맨발 걷기를 꾸준히 하시는 선배님, 대단하세요.
오늘 아침 그 길을 걸으며 다시 둘러보니 후박나무랑 단풍나무가 자기네들 이름 빠뜨렸다고 입이 쭉 나왔어요.
잎으로^^
선생님이 재밌게 읽었습니다. 저도 임윤찬 연주 좋아해요.
윤찬군의 연주도 좋지만 인터뷰할 때 서투른 표정도 이뻐요.크크
묘사하는 글쓰기, 선생님들의 글 읽으며 따라하면서 배우면 되겠네요. 다음에 도전해 볼게요.
사실은 글벗님들이 선생님들이세요. 향라님 글도 저는 전과(아시지요?), 아니다 지도서 처럼 읽는답니다.ㅎ
눈여겨 보지 않으면 그냥 지났쳤을 일상적인 일들이 좋은 글감이 되었네요..
선생님, 고맙습니다. 선생님 글이 늘 산책길 같아요. 정겹고 새롭고 귀히 생각된답니다.
늘 선생님 글 읽으며 스스로 공부합니다.
산책하기 좋은 계절이에요.
유튜버에서 임윤찬 피아노 연주 찾아 들었어요.
정말 대단하네요. 어느 한 분야에 특별한 재능이 있는 이들이 부러워요.
천재는 1%의 재능과 99%의 노력으로 만들어진다는 말을 새겨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