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의 세계
그때 법혜보살은 부처님의 신통력을 받아서 보살의 무량한 방편의 삼매에 들었다. 법혜보살이 삼매에 들자, 시방의 무수한 부처님 나라와 그 밖의 무수한 부처님들이 삼매의 힘으로 나타났다. 이 부처님들의 이름은 모두가 법혜(法慧)였다.
그때 모든 부처님은 법혜보살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훌륭하고 훌륭하다. 선남자여, 그대는 능히 보살의 무량한 방편의 삼매에 들었도다.
선남자여, 그대가 이 삼매에 든 것은 시방의 무수한 부처님이 그대에게 신통력을 주었기 때문이다. 또 일체 중생을 구하고자 하는 비로자나 부처님의 서원의 힘과 선근력(善根力)에 의한 것이다. 또 그대로 하여금 넓은 가르침을 설하게 하고자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또 가르침의 지혜를 키우고 진리의 세계를 열며, 중생의 세계를 분별하게 하고 장애를 없게 하여 장애 없는 경지에 들어가게 하기 위해서이다.
선남자여, 참으로 부처님의 신통력을 받아 오묘한 진리[法]을 설하여야 한다."
그때 모든 부처님은 저마다 오른쪽 팔을 뻗쳐 법혜보살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법혜보살은 삼매로부터 일어나 모든 보살들에게 말하였다.
"모든 불자들이여, 보살의 본성은 광대하고 깊어 흡사 허공과 같습니다. 일체의 보살은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의 본성으로부터 생긴 것입니다.
모든 불자들이여, 보살의 십주(十住)의 행(行)은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이 설하신 것입니다.
무엇을 십주(十住)라고 합니까. 그것은 초발심주(初發心住), 치지주(治地住), 수행주(修行住), 생귀주(生貴住), 방편구족주(方便具足住), 정심주(正心住), 불퇴주(不退住), 동진주(童眞住), 법왕자주(法王子住), 관정주(灌頂住)를 말합니다. 이것이 보살의 수행이 머무는 열 가지 장소입니다.
(<화엄경> 제 11장 보살십주품(菩薩十住品)’
- (‘서재영의 불교 기초 교리 강좌’에서)
그러면 유대 사람의 특권은 무엇이며, 할례의 이로움은 무엇입니까?
모든 면에서 많이 있습니다. 첫째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서 얼마가 신실하지 못했다고 해서 무슨 일이라도 일어납니까? 그들이 신실하지 못했다고 해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없어지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사람은 다 거짓말쟁이이지만, 하나님은 참되십니다. 성경에 기록한 바 "주님께서는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인정을 받으시고 재판을 받으실 때에 주님께서 이기시려는 것입니다" 한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한다면, 무엇이라고 말하겠습니까? 우리에게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다는 말입니까? (이것은 사람들이 말하는 방식으로 내가 말해 본 것입니다.)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세상을 심판하실 수 있겠습니까?
다음과 같이 반박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나의 거짓됨 때문에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서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간다면, 왜 나도 역시 여전히 죄인으로 판정을 받습니까?"
더욱이 "좋은 일이 생기게 하기 위하여, 악한 일을 하자" 하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사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그런 말을 한다고 비방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심판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러면 무엇을 말해야 하겠습니까? 우리 유대 사람이 이방 사람보다 낫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유대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다같이 죄 아래에 있음을 우리가 이미 지적하였습니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의인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
깨닫는 사람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사람도 없다.
모두가 곁길로 빠져서, 쓸모가 없게 되었다.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다. 혀는 사람을 속인다."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다."
"입에는 저주와 독설이 가득 찼다."
"발은 피를 흘리는 일에 빠르며,
그들이 가는 길에는 파멸과 비참함이 있다.
그들은 평화의 길을 알지 못한다."
"그들의 눈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빛이 없다."
율법에 있는 모든 말씀이 율법 아래 사는 사람에게 말한 것임을 우리는 압니다. 그것은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을 하나님 앞에서 유죄로 드러내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율법으로는 죄를 인식할 뿐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율법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율법과 예언자들이 증언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오는 것인데, 모든 믿는 사람에게 미칩니다. 거기에는 아무 차별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에 못 미치는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얻는 구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는 선고를 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예수를 속죄제물로 내주셨습니다. 그것은 그의 피를 믿을 때에 유효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사람들이 이제까지 지은 죄를 너그럽게 보아주심으로써 자기의 의를 나타내시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다가 지금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신 것은,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시라는 것과 예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의롭다고 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자랑할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무슨 법으로 의롭게 됩니까? 행위의 법으로 됩니까? 아닙니다. 믿음의 법으로 됩니다.
사람이 율법의 행위와는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유대 사람만의 하나님이십니까? 이방 사람의 하나님도 되시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이방 사람의 하나님도 되십니다.
참으로 하나님은 오직 한 분뿐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할례를 받은 사람도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고 하시고,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도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율법을 폐합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웁니다.
-(<로마서> 3장)
오늘 화엄경에서 [모든 불자들이여, 보살의 본성은 광대하고 깊어 흡사 허공과 같습니다.]를 보자.
오늘도 불경은 반복된다. 질리고 질려 내 마음이 텅 빌 때까지 이어가보자.
오늘 로마서에서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의인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 깨닫는 사람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사람도 없다. 모두가 곁길로 빠져서, 쓸모가 없게 되었다.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를 보자.
모든 사람을 이렇게 죄인으로 강하게 단정하는 이유는 그 다음 생각을 전개하기 위해서인데, 좀 심해 보인다. 탈출구가 없다. 너무 꽉 막혀 있다.
다음으로 [그렇다면 사람이 자랑할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무슨 법으로 의롭게 됩니까? 행위의 법으로 됩니까? 아닙니다. 믿음의 법으로 됩니다.]를 보자.
오늘도 성경은 반복된다. 오직 믿음이다. 믿음에 대한 긍정성이 조금이라도 생길 때까지 이어가보자.
<나무 다시 보기를 권함>에 나오는 글이다.
[나무줄기가 없는 나무가 있을까? 식물들은 햇볕이 잘 드는 자리를 서로 차지하려고 경쟁한다. 이 경쟁에서 나무가 우위를 차지하는 것도, 나무가 지구상에서 가장 키 큰 생물이 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나무줄기 덕분이다. 나름 큰 키를 가진 인간이 다른 생물을 우러러볼 일은 흔치 않지만 인간보다 키 큰 나무는 올려다볼 수밖에 없다. 어쩌면 우리가 나무에게 경외감을 느끼는 것도 이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무줄기는 나무의 특성을 알려주는 ‘명함’이기도 하다. 나무줄기의 성장 형태와 수피를 보면 어떤 종류인지, 건강에 이상은 없는지 아니면 균류의 습격을 받아 상했는지, 혹시 죽은 것은 아닌지 알 수 있다.]
현장 해설에서 “나무줄기는 00이다” 같은 걸 해봐도 괜찮을 것 같다. “나무줄기는 명함이다. 왜냐하면 나무의 특성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좋은 글을 써준 저자에게 감사드린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나오는 글을 보자.
[그러나 지금은 나를 그 어떤 것으로도 인도해 주지 못하는 이러한 순간들조차도 그 자체만으로 충분히 매력적인 것처럼 느꼈다. 나는 내가 기억하는 순간들을 그대로 되찾고 싶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제는 푸른 수국으로 반짝거리는 새하얀 루이 16세풍 아파트밖에 없었다.]
푸른 수국을 아파트와 연결시키는 문장이 경이롭다.
헤세의 <싯다르타>를 보자.
[“매우 아름다워요, 당신의 시는.” 카말라가 외쳤다. “만약 내가 부자라면 당신한테 그 대가로 금화를 드릴 텐데요. 그러나 시로 당신이 필요한 만큼의 많은 돈을 벌기란 어려울 거예요. 당신이 만약 카말라의 친구가 되고 싶다면, 많은 돈이 필요하니까요.”
“어떻게 입맞춤을 그렇게 할 수가 있소, 카말라?” 싯다르타는 더듬거렸다.]
만일 영상으로 이 장면을 봤으면 웃음 코드라 막 웃었을 것이다. 이야기는 긴장과 이완의 법칙을 따라야 한다는 것, 또 되새겨본다.
오늘도 게송으로 마무리하자.
요즘 나는 노인네가 되어간다
일찍 자고 일찍 눈이 떠진다
실제 나는 글쓰기 명상에 매달리지 않는다
시간이 많이 남아서 하는 만큼 하는 것이다
다른 더 좋은 일이 있으면 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은 글쓰기 명상을 하다가 잠시 중단했다
‘부부의 세계’ 재방송을 봤다
무(無) 같은 환(幻) 같은 공(空) 같은
우리 일상사가 왜 이리 재미나게 펼쳐질까
지나고 나면 다 허무인 것이
왜 그리 죽을 만큼의 일들로 보여질까
세상사 다 그런 것 아닐까
옴 샨티 샨티 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