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도 사나이
최 순 태
대한민국의 피 끓는 젊은이들이 함께 모여 사는 곳 여기는 군대사회이다. 1977년 여름 나는 내 고향 김천의 어느 초등학교에서 집결하여 김천 역으로 이동하였다. 거기서 열차를 타고 낯선 땅 논산 제2훈련소로 향하였다.
연무대역에 내리자마자 군인들은 우리들의 군기를 잡는다고 훈련소 정문까지 오리걸음을 시켰다. 갑자기 바뀐 환경이라 상당히 당황하였으나, 진정한 사나이로 태어나기 위해 당장 훈련에 돌입해야 했다.
때는 7월 중순이라 매우 더웠다. 이전까지 들어보지 못한 교관, 조교란 이름이 익숙해지고 훈련과 더불어 각종 정신교육이 계속되었다. 그분들은 훈련병들이 더위를 먹을까봐 온도계와 소금, 물을 상시 준비하여 일사 사고를 막으려고 정성을 쏟았다.
낮에 고된 훈련이 끝나고 밤이 되면 병사들은 연병장에 모여 오락시간을 가졌는데 나와 함께 입대한 유명가수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김민식”이다. 노래 제목은 기억나지 않으나, “해가 없어도 살 수 있지만, 달이 없어도 살 수 있지만”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감미로운 노래로 훈련병들의 심신을 달래주었다.
약 6주간의 훈련이 끝나고 각자 더블 백을 메고 대기하였다. 나는 기차로 서울 용산역으로 이동하였다. 그 역에서 잠시 대기한 후 춘천행 기차를 타고 출발하였다. 강원도로 가는 것이 분명하였다.
춘천의 103보충대에서 며칠을 보낸 후 60트럭을 타고 가는 보충병을 선두로 자대배치가 시작되었다. 나는 고속버스를 타고 마침내 강원도 홍천에 도착하였다. 내가 복무할 곳은 일명 젓가락부대로 불리는 11사단이었다. 여기서 보병대대로 전출되었다.
1년 중 약 1/3을 텐트를 치는 야영을 하고, 훈련소와 다름없는 생활이 지속되었다. 행군, 사격, 구보의 연속이었다. 이런 덕분에 나는 지금도 걷기와 등산은 다른 사람보다 더 잘할 수 있다. 부대 인근의 높은 산에서 훈련을 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체력단련이 된 탓이었다.
13연대 중대에 배치되어 자대생활에 돌입하였다. 소대장님은 ROTC출신 신동근 중위였다. 그는 상당히 자애롭고 다정스러웠다. 나와 같이 전입되어 온 전라도 출신 나이병을 불러 다독이며, “내가 너히 둘을 잘 돌봐 줄께”라고 하며 많은 관심을 쏟았다.
그러나 소대장과 달리 내무반장을 비롯한 고참들은 상당히 엄격하였다. 초등학교, 중학교를 졸업하고 입대한 선임병도 있어서 같이 생활하기가 마냥 쉽지는 않았다. 그러나 앞서 이야기한 나이병과 서로를 위로하며 내무반 생활을 이겨내려고 노력했다.
이렇게 정신없이 보내던 어느 날 연대본부 통신병으로 발령이 나서 나는 통신 중대 가설병으로 변신하였다. 보병소대와 달리 분위기가 좋았다. 통신 중대장인 윤동규 대위는 상당한 인격자여서 병사들을 편하게 대해 주었다.
통신병의 임무를 마치고 다시 보병으로 돌아왔다. 이때 새로운 소대장은 서울 중앙대학교 음악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한 학군단출신 장교인 “노성학”중위였다. 유쾌한 성격과 멋있는 풍채로 때때로 부대원들 앞에서 “선구자” 등 가곡을 불렀던 기억이 새롭다.
훈련 중에도 항상 형님같이 소대원들을 격려하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어느 해 크리스마스 때였다. 소대장님은 전소대원을 모두 모이게 하여 노래자랑 대회를 열었다.
“제군들 지금부터 노래자랑을 하겠다. 위문품으로 온 사과가 개인별로 다 돌아가지 않아 잘 부른 사람은 사과5개, 제일 못 부른 사람은 반개를 주겠다. 모두 이의 없지”라며 환한 웃음을 지었다.
평소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던 나는 분대원의 열화 같은 요청에 따라 출전하여 최백호 가수의 “그쟈”를 열창하여 사과 5개를 받아서 여러 병사들과 나누어 먹은 기억이 있다. 이때의 일은 지금도 가끔 생각이 난다.
이렇게 분위기 좋은 소대에서 재미있게 지내다가 우리 대대가 훈련소로 바뀌는 바람에 교관, 조교 요원을 제외한 전 대대원이 다른 연대로 전근을 가게 되었다. 환송식에서 대대장님은 연병장에 모인 병사들 앞에서 일장 연설을 하였다.
“여러분들과 같이 끝까지 고락을 함께 하려고 했는데 원치 않게 헤어지게 되어 대단히 아쉽구나. 울고 싶은 심정이다.”며 아쉬움을 나타내셨다. 군인의 엄격함을 보이지 않고 지극한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나는 낯선 연대인 20연대에 배속되었다. 그 당시 상병이었는데 소대에서 중간층이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 시급하였다. 군대는 팔도의 사나이가 생활하는 공간이라 그들과 융화도 중요하였다.
우리 소대에 경상도 상주출신 “용범”이가 있었다. 그는 군대에 와서 이발 기술을 배워 소대원들의 머리를 손질해 주었다. 이발 솜씨가 뛰어나 대대 내에 명성이 자자하였다. 어느 날 연대장의 부관으로부터 간단한 이발도구를 지참하여 연대장 관사로 오라는 연락을 받고 연대장님의 이발 출장을 떠났다.
좋은 식사를 대접받고 관사에서 하루 밤을 보낸 뒤 돌아와서 다음과 같이 내게 이야기 했다. “최상병 연대장님 이발이 너무 힘들었어.” 이유인즉 연대장의 머리가 너무 크고 뒤 곰배가 튀어나와 이발 면적이 넓었다는 것이다. 연대장의 머리가 얼마나 크냐 하면 머리에 맞는 전투모와 철모가 없어서 특별 주문할 정도였다.
고된 훈련을 하면서도 휴식 시간이 되면 나와 취미를 공유할 수 있는 전우가 있었으니 서울 출신의 “진근”이었다. 우리는 그의 기타 반주에 맞춰 좋아하는 노래를 불렀다. 소대원들은 “진근과 순태”라고 부를 정도였다.
흘러간 팝송부터 당시 유행하던 노래를 불렀다. 여름철 나무에서 우는 매미처럼 말이다. 그에게는 한달에 한번 씩 면회를 오는 영희란 아가씨가 있었는데, 그녀의 편지가 오면 전소대원들 앞에서 낭독하기도 하였다. 소대원들은 편지 내용을 들으며 즐거워했다. 그녀는 편지 말미에 항상 “진근만의 영희로부터”라고 적었다.
어느 가을 우리 소대는 통신기지로 경계근무를 가게 되었다. 해발 1100m가 넘는 고지에서 통신소대와 함께 근무했다. 하필 이때 그 여인이 자대로 면회를 온 것이다. 위병소에서 애인이 부대에 없으므로 면회가 안 된다는 말을 듣고서도 꼭 김상병을 만나겠다고 하여 통신기지 아래서 만난적도 있다.
병장으로 진급하고 난 뒤 한미연합 군사훈련인 팀 스피리트 훈련이 시작되었다. 훈련에 필요한 통역요원이 필요하였다. 중대본부의 행정병이 나를 대상자로 추천하여 연대본부에서 간단한 테스트를 거쳐 연대 대표로 사단본부에서 영어교육을 받게 되었다.
그때 만난 전우 중에 “팔용”이란 병사가 있었다. 그는 까무잡잡한 얼굴에 호리호리한 몸매를 지니고 상당히 명석한 병사였다. 서울대학교 경영학과 출신으로 다방면에 걸쳐 해박한 지식을 가졌다. 이름 때문에 우리들은 그를 나폴레옹으로 불렀다. 그의 성이 나씨인 까닭이다. 영어교재 뒷면에 나의 초상화를 그려주기도 할 만큼 그림실력도 뛰어났다.
팔도의 사나이를 만나다보니 자연적으로 사투리를 많이 알게 되었다. 13연대에서 복무 시 전북 김제가 고향인 “규상”이가 있었다. 철봉에 매달려 멀리뛰기를 하였는데 그의 앞에 있던 내게 “최일병님! 치나요 치나요”라고 말하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비키라는 말이었다.
22개월 만에 병장으로 진급하고 난 뒤 중대본부로부터 받은 계급장을 달았을 때 전라도 광주 출신 병사인 인수는 “야! 벌써 달았시야”라며 축하해준 일들과 그 지방 사람들은 사람들을 부를 때 “애기”라고 말한다.
군인가족들이 병사들을 위해 김장하기 봉사를 할 때 아기들을 데리고 오는데 일부 병사들은 김장재료를 나르고 나머지 병사들은 가족들이 데리고 온 아기를 보기도 하였다. 서울 출신 재석이는 얼굴도 여자같이 곱상하였고, 아기를 업고 과자도 사주며 잘 놀아주었다.
팔도의 여러 사나이들을 만나면서 겪었던 이야기는 좋았거나 힘들거나를 떠나서 이 세상의 군대를 다녀온 사람들은 그 시절을 잊지 못한다. 이글을 통해 이름이 밝혀진 여러 병사들이 있다.
만일 그들이 이글을 읽게 된다면 과연 어떻게 생각할까 걱정도 되지만 좋았던 기억만 이야기 했으니 별로 상관이 없을 것 같다. 나의 추억 속에 남은 여러 사람들을 생각하면 절로 웃음이 나온다. 요즈음 코로나19 바이러스 때문에 고달픈 심신을 위로하는 청량제가 되기 때문이다.
(2020. 4. 6)
첫댓글 저와 비슷한 시기에 다녀 왔군요. 저는 가평군 현리에 있는 맹호부대(수도기계화보병사단)출신입니다.
남자들은 군대이야기를 평생 한다고 합니다. 남자 둘만 모여도 밤샌다고 했는데, 거기다가 소낙비 맞으며 펜티만 입고 축구한 이야기까지 보태면 여자들이 제일 싫어 한다고 합니다.
그때 그 시절, 힘들고 어려웠던 아득한 옛날이 그리움이 되어 다시 오늘로 오는 것 같습니다.
생각해 보면 그때 그 3년이 있어서 넓은 세상, 많은 사람들을 알게 된 것 같습니다.
옛날을 회상하며 잘 읽었습니다.
군대 얘기는 아무리 해도 끝이 없나봅니다. 그만큼 고생을 많이 했다는 뜻. 지금에 와서 생각하니 웃음이 나고 하나의 에피소드로 치부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나는 후방에서 근무 했었는데 전방 근무자들의 생활 모습 잘 스케치 해 주셨습니다. 각양각층의 전우들 그리고 팔도의 사나이들 얘기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남자들의 시집살이 군 생활에서 만난 팔도 사나이 이야기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래된 이야기지만 군생활 이야기는 남자들이 가지는 특권입니다. 요즘은 여자군인도 상당합니다. 아름다운 추억 전우들을 한번 만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