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성하다
김정옥
‘처음 가는 길이라 낯설겠지? 경험해 보지 않았으니 무엇이든 서툴 거야. 삐거덕거리는 몸으로 삶의 무게를 견디려니 얼마나 힘들겠어. 하지만 어차피 가야할 길이라면 당당히 들어가자. 성큼성큼 말이야. 세월에 등 떠밀려 들어왔으나 용감하게 가보는 거야.’ 전학 온 첫날 설은 교실로 선뜻 들어가지 못하고 쭈뼛쭈뼛 망설이는 아이 같은 나를 다독인다.
며칠 동안 심하게 몸살을 앓았다. 입성하는 행사를 톡톡히 치렀다. 울적한 늪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을 찔끔거리기 일쑤였다. 남들이 알면 그게 뭐가 울 일이냐고 할 테지만 내 속을 어찌 짐작이나 할까.
며칠 전 탁구장에서 일이다. 복식 게임을 하자며 편을 갈랐다. 편 가름을 보니 지거나 이기거나 승률이 엇비슷하려니 했다. 웬걸, 내 편이 턱없이 졌다. 5판 3선승제에 3:0이다. 그것도 거푸 두 게임이나 말이다. 우리가 좀 안 돼 보였는지 멤버를 바꿔서 하자고 한다. 이번엔 승산이 있으려나하고 기대를 했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라고 우리 편이 아까랑 똑같이 두 판을 연거푸 내리 졌다. 나하고 한 팀인 J의 표정이 묘하다. 게임에 지고 기분이 안 좋은 것은 인지상정이지만 그것이 내 탓인 것만 같아 눈치가 보인다. 씁쓸했다.
요즈음 순발력이 떨어지고 발이 움직이지 않아 번번이 공을 놓친다. 그래서 내가 이리 왔다, 저리 갔다 하는 뒤퉁거리가 되었나. 이러다 나하고 한 팀을 안 하려는 것은 아닌가. 젊은이들과 어울리며 좋다고 행복해하는 내가 눈치 없는 것인가. 이런저런 생각이 실타래에서 실이 풀려나오듯 연신 꼬리를 문다.
동호회에서 제일 연장자고 초대 회장을 5년 동안 했다. 고문으로 추대된 지도 3년이 되었다. ‘70이 되었으니 이제 동호회에서 탈회할 때가 온 것인가’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탁구는 혼자 하는 운동이 아니고 상대가 있어야 하는데 상대에게 민폐가 된다면 굳이 이 운동을 해야 할까. 이런 일로 계속 스트레스 받으며 운동하는 것이 옳을까. 근 20년 하던 탁구를 이제 그만둘 때가 온 것인가. 나이가 많아 이 사단이 난 것 같아 공연히 코끝이 시큰하더니 눈물이 핑 돈다.
오랜 기간 같이 동호회 활동한 k에게 내가 동호회를 언제 나가는 것이 좋을지 조언을 해달라고 했다. 나이 먹고 게임도 잘 안되고 몸이 내 마음대로 안 움직인다며 회원들에게 뒤퉁거리, 골칫거리가 되기 전에 지금 나가는 게 어떠냐고 했다. 기함할 듯이 놀라며 극구 말린다. 우리 동호회의 기둥이 그런 말씀을 하시면 어떡하느냐, 그런 생각 꿈에도 하지 말라고 펄쩍 뛴다. 나이 들어 그 정도면 잘하는 것이라나. 위로하려고 애쓰는 모습이 역력하다.
설 명절에 식구들 모두 모인 자리에서 내가 올해 70이 되니 ‘서글프다’고 했다. 그랬더니 말 끝나기가 무섭게 ‘나도 그렇다’고 이구동성으로 한마디씩 한다. 갓 18살 된 손녀나, 45살 먹은 딸이나, 올해 중학교 입학하는 14살 손자나 모두 똑같다니 당혹스럽다. 말 꺼낸 사람이 무색하다. 77이 된 남편은 가관이라는 듯 아예 말문을 닫는다. 나이가 많으나 적으나 한 살 더 먹어 기분 좋을 리 없나 보다. 세상모르는 여섯 살 난 손자만 신났다.
“언니 마음 저도 이해해요. 쉰이 되니 서글퍼요. 그렇지만 언니는 5년 후가 궁금하지 않으세요? 어떻게 살고 있을지 저는 참 궁금해요. 그래서 한번 가보려고요. 언니, 우리 함께 가요.” 세월의 수수로움에 우울해 하는 나에게 같이 영어 공부하는 Y가 하는 말이다. 앞으로 미지의 세계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며 나를 다독다독한다. 나이는 50이지만 생각은 경륜 많은 70대 학자 같다.
뇌종양으로 고통 받았던 윌파이의 『인생이 바뀌는 하루 세줄』에서 ‘하루를 시작할 때’가 생각난다. ‘간밤을 무사히 넘기고 살아있는 내 몸을 바라보고 깊은 호흡을 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면 그 자체만으로 행복해진다.’ 내 건강을 위해 이 나이에 이 정도 운동하면 됐지. 감사한 줄 모르고 세상 끝난 사람처럼 한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하면서 우울해하고 서글퍼한 교만함이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어느 시인이 ‘불지 않으면 바람이 아니고 /늙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고 /가지 않으면 세월이 아니라’고 했다. 바람은 불어야 바람이고 세월이 가면 늙는 것이 사람인 것을. 당연한 순리를 가지고 무슨 호들갑을 그렇게 떨었는지. 참으로 볼썽사납다.
몸살을 된통 앓은 덕분에 신경성 위염이 도졌는지 명치끝이 큰 돌 덩어리를 얹혀 놓은 듯 무지근하다. 마음을 고쳐먹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탁구장에 갔다. 여전히 게임을 했다. 지난번은 모두 졌지만 오늘은 모두 이겼다. 맑은 날이 있으면 흐린 날도 있는 것이 자연의 섭리인 것처럼 지기도 하고 이기기도 하는 것이 세상살이인 것을 잠시 잊었나 보다.
70이라는 나이 굴레를 내가 스스로 쓰고 70이라는 숫자 놀음에 놀아났다. 하루하루 여느 날과 다름없이 지나가던 날들이었다. 그저 그렇게 흘러가는 세월 중 한해인 것이다. 강물이 흘러가다 풀등에 걸려 잠시 주춤거리다 더 빠르게 가는 것처럼 69에서 한 단계 오르며 급물살을 타 세월의 유속이 조금 빨라졌을 뿐이다. 속상할 일도 슬플 일도 아니다.
69와 70의 간극에서 소우주를 보았다. 시룽거리는 마른 나뭇가지 사이에서 지나간 삶의 궤적들을 되새겨 본다. 거미줄에 걸린 벌레처럼 나갈 길을 몰라 허우적거리고 갈팡질팡 헤매고 있었다. 이제 겨우 실마리를 찾았다.
인문학 공부를 위해 읽은 책에서 보니 성경에 ‘7’이라는 숫자는 항상 완전수이다. 이렇게 완전함을 나타내는 수 7과 완벽한 하나님의 질서를 나타내는 수 10을 곱한 것이 70이다. 성경에서 70은 죄로부터의 완전한 회복과 구원을 상징한다고 한다. 70이라는 수가 새롭게 다가온다. 나를 완성하는 나이로 말이다.
입성이다. 성 안에 어떤 일들이 있을지 호기심으로 설레기까지 한다. 작은 것이라도 이루려나하는 기대감에 귀가 솔깃하다. 내 인생 70에 사고의 전환이다. 서글픔을 떨치고 감사한 마음을 품에 안으며 무궁무진한 미래로 성큼성큼 들어가리라. 아자! 아자. 행운에 칠십이다.
첫댓글 인생은 60부터라고 했지만 100세 시대인 요즘은 70부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뭐든 하고 싶은 일이 있으시다면 주위 눈치 보지 마시고 당당하게 즐기셨으면 좋겠네요.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김순옥선생님, 용기를 주셔서 고맙습니다. 답글 감사드립니다.
에그...ㅎㅎ 그저 웃자구요 선생님...완성을 향해 가고있다고 생각하고...사고의 전환...희망입니다^^
최아영선생님, 나중에 경험해보세요~~^^
행운의 70~~
감사합니다.
탁구 저의 주간반은 77세도
있는데 엄살이세요
저는 나이가 많다 생각되면
100세 부터 거꾸로 세어 본
답니다 선배님, 행운의 숫자
7 럭키 세븐입니다 글 잘 읽
었습니다
100에서 거꾸로 생각하는 것 좋은 생각이네요. 읽어주고 답글 달아줘서 고마워요.
20년의 탁구 내공도 일흔이라는 나이에 밀렸나봅니다.
70,저도 그리 멀지않은 곳에서 손짓합니다. 인생의 완숙인 70을 저도 굳이 마다하지는 않을겁니다. 잘 읽었습니다.
회장님, 70이 인생의 완숙인것을 미리부터 알았으면 된통 몸살을 앓지 않아도 될것을 그랬나 봅니다. 답글 고맙습니다.
굳이 70 말씀하지 마세요.ㅎㅎㅎ
저보다 적으신줄 알고 실수할 뻔 했네요
연세들어도 건강하고 재미있게 사시는 게 보기 좋고 행복해 보이십니다
삶을 생각해 보는 작품 잘 읽었습니다
나이 많은 것 굳이 말하고 싶지 않은데 어쩌다보니 공개하게 됐군요. 답글 고맙습니다.
69와 70의 차이는 엄청나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는 한사람입니다.
100세 시대인 만큼 인생은 70부터라고 위안을 해보지만
쭈볏쭈볏 할때가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도 용기내어야 겠죠?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니까요.
이난영선생님께서는 아직이시지요? 공감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축하드립니다. 이제 어르신이 되셨어요. 칠십을 고희라고도 하지만 從心이라고도 하대요. 마음이 하고자하는 바 대로 따라서 해도 법에 어긋남이 없다는 말이랍니다.
저는 아직은 6학년입니다. 내년이면 저도 선생님을 따라 입성하게 될 것 같아 두렵습니다.
아직은 아닌 것 같은데요. 그러나 선생님께서 행운의 칠십이라 하시니 기대해 보겠습니다
이제 어르신이 되었으니 더욱 몸가짐을 잘 해야되겠군요. 그리고 마음이 하고자하는 바 대로 따라서 하겠습니다. 그렇게 순응하면서 살아가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