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전 '시에'에 실렸던 제 수필를, 크게 콩트로 볼 수도 있겠다 싶어 올립니다.
환절기 감기
송원근
9월이 오면, 나는 대흥동 가톨릭 문화회관 거리를 찾곤 한다. 성심당 제과점에서 빙수를 먹고 횡단보도를 건너 회관 주변을 천천히 둘러본다. 길가의 상점들은 한산하고, 회관 입구 입간판에는 몇 해 전까지 붙어 있던 연극 포스터도 눈에 띄지 않는다. 나는 본관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그늘진 곳을 찾아 앉았다.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이 회관에서 학교 문예반이 주관하는 문학의 밤 행사가 열렸다. 72년 10월 유신에 따른 계엄이 끝난 지 몇 해 지났지만 살벌한 분위기가 아직 남아 있어 학교 밖에서 문학의 밤을 갖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개교 후 첫 문학의 밤이라는 의미를 살리고 싶다는 학생들과 내실을 기한 후 학교 밖에서 열자는 학교 측 간 옥신각신한 끝에 교장 선생님의 결단으로 개관한 지 몇 해 안 된 가톨릭 문화회관에서 열릴 수 있었다. 지금이야 볼거리, 즐길 거리들이 지천이지만, 그 시절 문학 활동은 답답한 학교생활에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취미이자 오락이기도 했다.
행사 1주일 전부터 문예반 학생들은 학교가 파하면 낭송할 시나 산문이 적힌 쪽지를 들고 이 계단에 모두 모였다가는 인원확인 후 각자 흩어져 골목골목을 누비며 중얼거리기도 하고, 가로등 불빛에 자신이 외운 내용이 맞는지 비춰보기도 하면서 암송했다. 밤늦은 시간에 다시 모인 우리는 3학년 선배의 간단한 점검을 받고 나서야 집으로 돌아갔었다.
그해 여름은 9월까지도 무더위가 이어졌다. 문학의 밤이 열리던 그 날, 하얀 반소매 교복 상의에 청색 바지를 입은 남학생들과 흰 블라우스에 검은 치마를 입은 여학생들의 뜨거운 열기가 회관을 가득 메웠다. 300 좌석은 물론 사방 통로까지 시내 남녀 학생들로 채워져 마치 검은 바다 위의 짙은 안개 같았다. 나는 밤하늘의 별처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눈동자들과 정면으로 마주 서서, 탁자 위에 타오르던 촛불과 천장의 조명을 받으며 산문을 낭송했다.
낭송을 마치고 단상에서 옆 계단으로 내려서는데 한 여학생이 꽃다발을 안겨주었다. 열띤 낭송으로 흥분한 탓에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살짝 고개를 숙이며 건네는 모습이 단아하다는 느낌이었다. 어둠 속에서 유난히 흰 목덜미와 까만 머리카락에 눈이 부셨다. 누군지 얼굴도 모르는 여학생으로부터 꽃을 받아들며 설핏 스친 그녀에게 온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
문학제가 끝나고 다음 월요일에 우리는 흰색 여름 하복을 벗고 검은 동복으로 갈아입었다. 교실에서는 그 여학생을 두고 친구들의 놀림과 찬탄이 이어졌다. 내가 단상에서 낭송하는 동안 계단 아래에서 꽃다발을 들고 다소곳이 서 있었다고 했다. 날씬한 데다 뽀얗고 예쁜 얼굴이어서 남학생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는 것이다.
그녀가 누구일까 궁금해 하며 그녀로부터 연락이 오기만 기다렸다. 아니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녀를 만나면 멋지게 문학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좁은 문>을 구입했고, <독일인의 사랑>을 다시 읽었다. 1주, 2주, 3주가 지나도 그녀에게서 소식이 없자,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학교가 파하면 부리나케 문화회관 계단으로 달음박질쳤다. 지금 생각하면 엉뚱하기 그지없지만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녀를 만날 수 있는 근거지가 회관 말고는 없었으므로.
//주여 때가 왔습니다./지난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당신의 그림자를 해시계 위에 얹으시고/ 들녘엔 바람을 풀어놓아 주소서./이틀만 더 남국의 햇살을 베푸시어/ 과일들의 완성을 재촉하시고, 짙은 포도주에는 마지막 단맛이 스미게 하소서/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지금 혼자인 사람은 그렇게 오래 남아/ 깨어서 책을 읽고, 긴 편지를 쓸 것이며/ 낙엽이 흩날리는 날에는 가로수들 사이로/ 이리저리 불안스레 헤맬 것입니다.//
오직 그녀를 만나고 싶은 일념으로 계단에 앉아서는 주문처럼 릴케의 ‘가을날’을 암송했다. 그러나 남국의 날은 오지 않았고 날은 점점 쌀쌀해졌다. 나는 길 건너편 성심당에서 빵과 우유로 늦은 저녁밥을 대신하며 마냥 그녀를 기다렸다. 빵집 안에 혼자 앉아 있는 여학생이 있으면 그 앞을 서성거렸다. 그녀가 아닌지 묻고 싶은 충동을 참아가면서.
창밖으로 보이는 플라타너스 이파리가 낙엽이 되어 뒹구는 10월이 다 지나가도록 그녀를 만나지 못했다. 성심당에서 그녀를 기다리다가 어스름이 깔리면 부치지 못할 편지를 썼다.
편지가 책상 서랍에 차곡차곡 쌓여가던 어느 날 그녀의 편지 대신 성적표가 집에 배달되었다. 문과 학생 240명 중 거의 꼴찌에 가까운 성적이었다. 크게 실망하신 아버지는 내가 학교에 간 사이에 방을 뒤지고 문제의 편지를 발견하셨다. 편지는 물론이고 문학 관련 책들까지 마당에 긁어모은 낙엽과 함께 불태웠다.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시집, 소설류의 문학 서적은 모두 사라지고 책꽂이에는 교과서만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다. 마치 남의 방에 잘못 들어온 것처럼 낯선 풍경이었다. 잠시 멍하니 서 있던 나는 황급히 서랍을 열어 보았다. 서랍은 먼지 한 올 없이 깨끗하게 비어 있었다.
나는 이틀 동안 문을 걸어 잠그고 방안에 틀어박혀 얻을 것 없는 항거를 하였다. 아버지는 담임 선생님에게 지난여름 더위에 지친 아들이 지독한 몸살감기에 걸렸다고 전화하신 모양이다. 생활기록부에는 이때의 결석 사유가 ‘환절기 감기’로 적혀 있다. 이틀이 지나 수척해진 모습으로 방에서 나오는 나를 보고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연륜이 지극해야 좋은 문학 작품도 나오고, 연애도 좋은 대학에 가야 맘껏 할 수 있는 법이다.”
늦가을, 친구가 속해 있는 문학 서클에서 문학의 밤을 열었다. 대흥동 천주교 성당 맞은 편, 지금도 이름을 기억하는 시온예식장이었다. 행사 중간에 여학생이 찬조 출연을 하여 가곡 ‘가려나’를 열창하였다.
“끝없는 구름 길…… 사랑의 스물은 덧없이 저물고 앞길은 멀어라, ……맘만이 아파라, 아파라”
가사 한 구절 한 구절이 내 마음을 갈가리 찢었다. 마치 그녀가 나를 보고 ‘가려나’ 하고 노래하며 다가오는 것 같았다. 노래가 끝나자 오랫동안 구름 위를 떠돌다가 땅에 발을 딛고 서 있는 나를 발견하였다. 나는 행사가 끝나기 전에 밖으로 나와 걸었다. 길 건너 가톨릭 회관 거리는 어두웠고 길가에는 잎이 다 떨어진 플라타너스가 나목이 되어 몸을 떨고 있었다. 불빛이 환한 성심당에 눈길 주지 않고 그냥 지나쳐 집으로 걸어 돌아왔다.
“이 말을 할까 말까 망설였는데, 네 성적이 그렇게 나온 게 아무래도 그 여학생 때문인 것 같아서…….”
그날 반 친구들을 대표해 꽃다발을 준비한 반장은 그 자리에 참석한 여학생들 중 가장 예쁘게 보이는 그녀에게 꽃다발을 전달해 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태연하게 “나도 알고 있었어.” 하고 대꾸했지만, 학교에서 집에 돌아온 나는 책상에 머리를 묻었다.
마당 한 모퉁이, 단풍나무 아래 희미해진 검은 재의 흔적 위에 낙엽이 쌓이고 서리가 내려앉으면서 내 마음도 차가워졌다. 더 이상 회관 주변을 배회하거나 성심당을 찾지 않았다. 그 후 1년 동안 나는 책상에 붙박여 공부만 파고들었다. 성적을 회복한 나는 예비고사를 잘 치르고 원하는 대학에 입학하였다.
아버지 말씀처럼 대학에 입학하여 연애도 해보고, 취업하여 현실의 벽에 부딪혀 가며 어른이 되어 살아왔다. 이제 나는 그 시절의 아버지보다 더 깊어진 연륜으로 문화회관 계단에 앉아 그해 가을을 추억하고 있다. 얼굴도 모르는 소녀에 대한 지독한 그리움의 열병은 나의 삶에 단맛을 들이기 위한 마지막 여름 햇살이었다. 부치지 못하고 재가 되어버린 그 숱한 편지들과 그녀를 찾아 헤매던 시간들은 그녀가 아니라 나를 찾아가기 위한 여정이 아니었을까?
10월, 가을이 깊어지면 성심당에 앉아 밤늦게 까지 그녀를 기다려 볼 생각이다. 설령 그녀를 만나지 못한다 해도 앳된, 그러나 가슴만은 뜨거웠던 소년만은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말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