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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카시의 구성
△ 그림(20) 디카시의 구성
디카시는 제목, 작자명, 사진, 시, 사진을 찍은 날짜와 장소 다섯 영역으로 구성된다. 이를 반드시 <그림(20)>과 같은 차례로 배치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전하고자 하는 주제를 가장 잘 반영할 수 있는 형태로 배치하면 된다.
① 제목
디카시의 제목은 여느 예술작품의 제목과 같은 기능을 한다. 디카시 초기 단계, 즉 실시간 소통이 이루어질 때에는 제목 없이 사진과 날시만 전송했다. 그러나 디카시라는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되려면 사진과 시를 아우르는 제목이 있어야 한다.
그렇기에 제목은 사진과 시를 결합하여 작자가 드러내고자 하는 주제의식을 적는다. 직설적이어도 되고 상징적인 제목이어도 좋다. 사진의 피사체 이름이어도 되고 즉흥적으로 떠오른 영감을 나타내는 하나의 단어일 수도 있다. 다만 사진과 시를 아우를 수 있는 제목이 적당하다. 사진 속 대상의 이름일 수도 있고, 전혀 다른 영감 혹은 사진과 시가 결합하여 만들어내는 주제일 수도 있다.
간혹 제목이 없는 디카시를 접할 때가 있는데 이름이 없는 제품을 보는 것과 같이 허망하다.
② 작자명
글자 그대로 작자 이름이다. 반드시 밝혀야 한다. 단 시집으로 묶을 경우, 여러 편을 한꺼번에 지면(紙面, 誌面)에 발표할 경우 굳이 매 작품에 작가명을 넣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또한 공모전에 응모할 경우에는 공정한 심사를 위해 이름을 반드시 가리도록 제한한다.
③ 사진
디카시의 사진은 시인이 시적 영감을 얻은 사진으로, 때로는 다른 사람이 찍은 사진을 가져올 수도 있으나, 자신이 직접 찍은 것일수록 작품의 가치를 높여준다.
사진의 형태는 디카시 초기 단계, 즉 실시간 소통을 할 때에는 원본 사진을 그대로 쓰기도 하지만 발전단계 이후부터는 적당한 크기로 재단하여 사용한다. 이때 전하고자 하는 주제를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형태로 잘라서 사용한다. 정사각형, 직사각형, 가로형, 세로형, 마름모꼴, 원형…… 등 자유롭다. 포토샵을 이용하여 얼마든지 주제에 걸맞은 사진 형태를 만들 수 있다. 세로로 긴 사진 형태도 좋고 가로로 마치 파노라마식으로 만들 수도 있으나, 단순히 멋을 부리기보다는 주제를 효과적으로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직사각형 형태의 사진일 경우 그 규격은 제한이 없으나 흔히 황금비율( 1:1.618, 1: 1.414)로 사진을 오려 활용하기를 권한다. 이 황금비율일 때에 가장 편안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경우 사진을 찍다가 자신이 찍은 사진을 보고 어떤 영감이 떠오르기도 하지만 때로는 특정 영감이 떠오른 후에 그에 걸맞은 이미지를 찾아 찍기도 한다. 또한 자신이 찍은 것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찍은 사진이라도 그것을 통해 영감을 얻어 표현해기도 한다.
사진의 배치는 <그림(21)>과 <그림(22)>에서 보듯이 가로, 세로 어느 것이든 무방하다. 주제를 잘 드러낼 수 있는 형태를 시인이 결정하면 된다. 물론 출판인가, 지면에 발표할 것인가 혹은 프린트하여 액자 형태로 전시를 할 것인가 하는 용도에 따라 다르게 배열할 수 있다.
△ 그림(21) 사진배치 (1)
△ 그림(22) 사진배치 (2)
④ 시
흔히 디카시에 쓰이는 시를 사진을 찍을 당시 영상을 보는 순간 떠오른 영감을 적은 것이라 하여 아직 시로 정제되지 않은 것, 날시(raw poem)라고 한다. 그러나 디카시 초기 단계에서는 실시간 소통을 위해 즉흥적으로 떠오른 영감을 몇 개의 단어 혹은 문장으로 표현했지만, 발전단계 이후에는 그 날시를 다소 정제된 표현으로 정리한다. 즉 사진을 찍던 순간의 영감을 표현한 아주 짧은 글이 이후 디카시로 구성하면서 좀 짜임새를 갖춘 시로 정리된다.
디카시의 시는 사진을 찍는 순간 그리고 디카시로 만들며 떠오른 영감을 몇 줄로 적은 것이다. 이때 굳이 일반적인 시 창작에서 많이 언급되는 비유나 상징과 같은 문학 용어는 몰라도 좋다. 그냥 사진을 찍다가 혹은 찍은 사진을 보고 곧바로 떠오른 영감이면 충분하다. 때로는 단어 하나 문장 하나가 떠올랐어도 이를 잘 다듬어 정리해 주면 된다.
흔히 시적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을 관찰하고 여기에 시인의 상상력이 결합하여 하나의 주제의식을 표출하는 갈래를 시라고 한다. 그런데, 거듭 강조하지만, 디카시에 쓰이는 시는 한 편의 완결된 시로 형상화되기 이전의 영감, 즉 어떤 영상(사물 이미지)을 보고 곧바로 떠오른 생각을 몇 줄로 표현한다. 디카시에 쓰이는 이런 날시는 한 편의 완결된 시상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시로 정제되기 이전의 영감을 적어놓은 것이다. 즉, 시인의 상상력에 의해 예술적으로 재구성, 혹은 변용되기 이전에 존재하는 시의 형상이다.
디카시의 길이를 어떤 이는 다섯 줄 이내여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굳이 그런 제한을 둘 필요는 없다. 자유시 시대에 시조가 살아남기 위해 3장 6구 45자 내외라는 외형적 틀을 깨고 행갈이와 연 구분을 통해 운율과 글자수에 변형을 주고 있는데, 디카시에 굳이 글자 수 혹은 행 수에 제한을 둘 필요는 없다. 상상력의 폭, 혹은 영감의 깊이에 따라 누구는 열 줄 문장을 떠올리기도 하고 누구는 한 개의 단어만 생각하기도 한다. 게다가 열 개의 단어로 된 한 문장을 행갈이를 통해 얼마든지 5 줄 이상의 행으로 만들 수 있기에 이를 5행 이내라 제한하는 것은, 누구의 주장인지는 모르지만, 터무니 없는 제약이다. 사실 디카시를 써 본 사람이라면 엄밀하게 말해 다섯 줄도 길다. 디카시에 쓰이는 시의 길이는 그냥 ‘사진을 찍는 순간 떠오른 영감’이란 범위면 족하기에 이를 굳이 다섯줄로 제한 할 필요는 없다. 사실 대부분 두세 줄 정도이다.
또한 시가 사진과 결합할 때에 비로소 한 편의 주제를 표출해야 하기에 사진이 없이도 한편의 시상(詩想)을 전할 수 있다면 디카시의 시로는 적합하지 않다. 그런 시라면 독립된 시로 발표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즉 사진과 시의 결합에서 어느 한 쪽이 다른 쪽의 보조물이 아니라 1 : 1로 결합하여 새로운 의미를 표출할 수 있어야 한다. 사진 혹은 시만 보고는 무슨 내용인지 모르지만 사진과 시가 결합된 상태를 보고 비로소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기성 시인의 경우 디카시에 쓸 시를 자꾸 다듬어 한 편의 완성된 시로 만드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완벽한 시를 적어 사진이 보조 역할을 한다면 디카시로는 부적절하다. 시만 읽고는 독자들이 ‘이게 뭔 소리지?’ 하고 느껴야 한다. 사진과 결합했을 때 비로소 한 편의 주제가 드러나게 만들어야 디카시의 매력을 살릴 수 있다.
디카시에 쓰일 시를 쓸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르게 바라보기’와 ‘다르게 생각하기’이다.
첫째, 남들과는 다른 시선이다. 사물의 일반적인 느낌보다는 자신만의 독특한 영감이 나와야 한다.
둘째, 기존의 관념 혹은 인식을 뒤집는 사고가 필요하다. 누구나 다 생각할 수 있는 영감은 식상한 것이 된다. 흔히 말하는 천편일률, 진부한 것보다는 개성이 넘치는 표현으로 독자들이 ‘아, 맞아!’하는 느낌을 갖도록 해야 한다.
셋째, 단순한 사진 설명이어서는 안된다. 굳이 사진이 무엇을 찍은 것이라는 사실을 말하기보다는 전혀 생소한 자신의 느낌으로 그 사물을 표현해 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넷째, 독자들을 가르치려는 태도는 지양해야 한다. ‘이게 뭔지 알아? 이게 바로 뭐야.’란 식으로 글을 쓴다면 독자들은 거부감을 느끼게 된다.
다섯째, 형용사는 되도록 빼는 것이 좋다. 시에 쓰인 형용사는 시인 자신의 주관적인 느낌일 뿐이다. 오히려 명사와 동사를 활용하여 독자들이 형용사를 느끼게 해야 한다.
⑤ 사진을 찍은 시간과 장소
대부분의 디카시인들이 간과하는데 이는 반드시 필요하다. 내가 접한 수많은 디카시 작품들에는 이것이 빠져 있다. 사진을 찍은 날짜와 장소도 디카시의 한 부분이다. 왜냐하면 같은 대상을 찍은 사진이라도 언제 어느 곳에서 찍었느냐에 따라 영감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같은 꽃이라 해도 수목원의 꽃과 거리 화분의 꽃은 그 느낌이 다르다. 사진 찍은 날짜와 장소를 표기하는 것은 바로 ‘이 날 이 곳에서 이 사진을 찍으며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를 밝히는 것이기도 하다. 여기에 <그림(20)>의 ‘종가시나무’처럼 제목이나 시 속에 피사체가 나오지 않는 경우 그 이름을 명시해줄 수도 있다.
게다가 남의 사진을 빌어오는 경우 날짜와 장소는 물론 직접 사진을 찍은 사람을 밝혀두어야 한다.<그림(19) 참조> 같은 사진이라도 보는 사람에 따라 영감이 다르기에 비록 자신이 찍은 사진이 아니라도 디카시에서 활용할 수 있다. 이때 사진 찍은 사람을 밝혀두는 것은 예의이다.
사진을 찍은 시간과 장소는 작품 말미에 밝힐 수도 있고 보다 명확하게 하기 위해 사진 바로 밑에 넣을 수도 있다.
※ 시와 사진의 관계
앞에서 설명한 포토포엠, 포토에세이나 수석시와는 달리 디카시에서 시와 사진은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보완하는 관계가 아니다. 시와 사진이, 정확하게 수치로 계산하기는 힘들지만, 거의 대등한 관계이다. 즉 비율로 따져 1 : 1의 관계로 합쳐져 그 합이 2 이상의 의미를 표현해야 한다.
△ 그림(22-1) 시와 사진의 관계
따라서 시 없이 사진만으로 의미를 표현할 수 있다거나, 사진 없이 시만으로 의미를 나타낸다면 디카시의 의미가 사라진다. 그런 경우 사진 따로 시 따로 독립된 작품으로 발표하는 게 더 낫다. 사진을 보고 ‘이게 뭐지?’ 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시를 읽고서야 전체 의미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하고, 마찬가지로 시만 읽고는 ‘이게 뭔소리야?’ 하는 의문이 들었다가 사진을 보는 순간 시와 어울어진 사진과 시의 합의 뜻을 알고는 ‘그래, 맞아!’하며 고개를 끄덕이게 해야 한다.
<그림(22-1)>에서 보듯이 디카시를 원이라 가정할 때 정확히 직선으로 1 : 1로 나뉘어 시와 사진이 차지하는 게 아니라 사진의 어느 부분이 강조되고 시의 어느 단어가 독자들 가슴에 꽂혀 그것이 합쳐지며 주제를 표현한다. 그래서 사진을 찍은 날짜와 장소가 필요하고 때로는 사진 속 피사체까지 밝혀줘야 한다.
사진을 찍은 날짜와 장소가 밝혀지지 않는다면 독자들로서는 자신만의 기억대로 사진을 판단하고 그 의미를 판단한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 찍은 꽃’이라는 기록이 필요한 것이고 그럴 때에 비로소 독자는 그 시간과 장소를 상상하며 시와 사진의 결합 의미를 감지할 수 있게 된다.
Ⅵ 디카시 실제
디카시인 줄도 모르고 창작 메모의 한 방편으로 만들어 놓은 것을 포함하여 디카시를 알게 된 이후 지금까지 만든 디카시 작품이 1,000 편이 넘는다. 요즘도 다시 꺼내 재구성하고 윤문하고 사진을 다듬는다. 디카시의 초기 단계에서는 실시간 소통을 통해 SNS로 전송하며 작품이 소비되고 말지만(물론 손전화에 저장은 되어 있을 것이다) 디카시의 완성 단계에 오면 대부분의 디카시인들이 사진을 찍고 그 순간 떠오른 영감을 적어두었던 것을 꺼내어 새롭게 정리하여 한 편의 디카시를 만들어낸다. 바로 완성된, 독립된 작품으로서의 디카시이다.
내가 만든 디카시 중에서 디카시를 이해하는 데에 자료가 될 만한 몇 작품을 소개한다.
△ 그림(23) 디카시의 실제 (1)
2012년 9월 15일 문학기행에 나섰다가 채석강에 들렀다. 처음 본 채석강의 바위들이 내 눈에는 마치 책을 쌓아놓은 것처럼 보였다. 한 편의 시가 될 것 같아 사진을 찍고 짧게 메모를 해 두었다. 그런데 이 때에 나는 이것이 디카시가 될 줄은 몰랐다. 후에 디카시를 접하고 나 스스로 디카시를 만들면서 예전의 사진과 메모를 꺼내 사진을 찍을 당시의 영감을 그대로 글로 다듬었다.
사진의 각도를 달리하여 두 편을 만들었는데 <채석강에서 (2)>에서는 ‘용왕님은 다 읽은 책들을 / 왜 여기에 쌓아놓았을까’라 적었다. 두 편 다 채석강의 바위를 ‘책’으로 인식했고, (1)에서는 ‘언제’부터, ‘누가’, ‘여기’에를 강조하려 행을 구분해서 많은 책을 쌓아두었을까에 초점을 맞추고 (2)에서는 용왕님이 책을 쌓아놓은 것으로 상상하며 왜 그랬을까에 초점을 맞추었다.
채석강의 바위를 보며 쌓아놓은 책으로 상상한 사람이 나 혼자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진과 함께 짧은 영감이 그럴 듯한 디카시를 만들게 되었다.
△ 그림(24) 디카시의 실제 (2)
2013년 1월 18일 전북을 여행하다가 정읍 한우촌의 숯불갈비집에 들러 저녁을 먹었다. 불판 위에 꽃등심이 놓였는데 그 무늬가 눈길을 끌었다. 얼른 손전화로 사진을 찍으면서 이런 무늬를 만들기 위해 소는 얼마나 많은 힘을 기울였을까를 생각하고는 곧이어 되새김질을 얼마나 해야 이렇게 아름다운 무늬가 만들어질까를 상상했다.
말 그대로 상상력의 산물이다. 그렇게 사진을 찍고 메모를 해 놓을 때에도 이것이 디카시가 될 줄은 몰랐다. 그냥 단순한 창작 메모였는데 훗날, 이렇게 디카시의 형태로 만들어졌다.
△ 그림(25) 디카시의 실제 (3)
디카시를 알고 접하면서 만든 작품이다. 부천의 상동 도서관에 강의를 하기 위해 버스에서 내려 걸어가다가 문득 눈에 든 능소화. 게다가 꽃잎을 떨구고 있다. 누군가에게는 그냥 꽃이지만 꽃이름을 알고 있다면 능소화가 될 것이다. 그러나 떨어진 꽃잎을 치워야 하는 청소부에게는 한낱 쓰레기에 불과하다.
동일한 사물이지만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인식의 차이’란 제목으로 말하고 싶었고 네 단어뿐이지만 3행으로 배열하여 세 가지 인식을 드러냈다.
△ 그림(26) 디카시의 실제 (4)
늘 지나다니던 부천 대학로와 부일로. 참 많이 보고 지나쳤을 텐데 그날따라 저 나무에 난 구멍이 예사로 보이지 않았다. 내 마음이 그래서였는지 떠나간 사랑 그리고 남은 상처가 떠올랐고, 마치 내 가슴에 구멍이나 뚫린 듯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늘 보던 사물이라 하더라도 문득 영감이 떠오를 때가 있다. 바로 이 작품의 사진이 그러하다. 떠오르지 않는 영감을 쥐어짤 필요가 없다. 시인이라면, 시적 감수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문득 영감이 떠오를 때가 있다. 그때 사진을 찍고 시를 쓰면 된다.
△ 그림(27) 디카시의 실제 (5)
이 작품은 의도적으로 만든 작품이다. 잡지에 실린 초승달 사진을 보다가 저런 영감이 떠올랐다. 내 손전화로는 저렇게 선명한 사진이 나오지 않는다. 아들에게 부탁하여 초승달이 뜬 날 카메라로 찍어달라 했다. 수십 장 사진 중에서 고른 것이다.
이렇게 사진이 먼저냐 영감이 먼저냐고 묻는데 그 순서는 상관없다. 대부분이 사진을 찍으며 영감이 떠오르지만 다른 곳에서 영감이 떠올라 부러 그 영감에 걸맞은 사진을 후에 찍기도 한다.
‘초승달 = 하늘님이 인간 세상을 엿보는 들창’이란 상상이 그럴 듯하다.
△ 그림(28) 디카시의 실제 (6)
이 작품은 사진을 찍을 당시에는 이런 영감이 떠오른 게 아니다. 단풍이 드는 계절, 남산 한옥마을에 갔다가 멋진 단풍 풍광을 여러 장 찍어 두었는데 며칠 후 산불이 마을에까지 덮친 뉴스가 보도되었다. 그 뉴스를 듣자마자 떠오른 영감, 얼른 한옥마을에서 찍은 사진을 뒤져 적당하게 오려내어 디카시를 만들었다. 담을 넘어 높게 자란 단풍나무 붉은 빛 – 이것을 산불이 번져 담을 넘어 들어오는 것으로 상상했다.
여행을 하면서 혹은 산보를 하면서도 마음을 이끄는 풍광이나 사물이 있으면 우선은 사진을 찍어두라. 디카시가 실시간 소통에서 비롯되었지만 디카시의 완성은 이렇게 사진을 찍은 후에 되살아난 영감이 결합하며 이루어진다. 앞에서 우선 영감을 얻은 후에 그 영감에 걸맞은 사진을 구한 경우를 소개했는데 대부분의 디카시는 사진이 먼저다. 그러니 기왕이면 많은 사진을 찍어두기를 권한다.
Ⅶ 나오면서 - 문제와 전망
1. 시대는 변하고 사회 문물도 변한다. 예술의 갈래 역시 마찬가지이다. 산업화가 이루어지며 많은 기계 장치가 생겨나고 이를 발판으로 만들어진 것이 영화라는 예술의 갈래이며 여기에서 시나리오라는 문학의 갈래가 나왔다. 디카시도 마찬가지이다. 사진예술과 문학예술이 결합하여 새로운 형태의 예술 갈래가 만들어지고 이제 소위 ‘움짤’ 혹은 gif와 같은 형식의 동영상 파일이 시와 결합하고 있다. 디카시는 이제 그 영역을 넓혀 단순히 jpg 혹은 pnc와 같은 이미지만이 아니라 동영상을 포함하는 보다 폭넓은 영역으로 확대될 것이다.
2. 그렇게 되면 디카시는 더 발전하여 동영상이 결합하며 ‘디카시’가 아니라 ‘영상시’란 이름으로 불릴 날도 머지 않을 듯하다. 왜냐하면 디지털 카메라가 처음 나왔을 때에는 예전의 수동식(필름) 사진기에 견주어 획기적인 것이었지만 디지털이 보편화되고 이제 누구나 사용하는 손전화에 사진기 기능이 내장된 만큼 굳이 ‘디카’란 명칭을 앞에 내세워야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다. 이 또한 누군가에 의해 명칭이 새롭게 변화하리라 기대한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디카시’란 명칭이 썩 내키지 않는다. 물론 ‘디지털 카메라’를 줄여 ‘디카’라 하고 여기에 우리말 ‘시(詩)’를 결합하다 보니 영어 발음 두 글자에 한국말 한 글자가 결합된 셈인데, 이는 우리말의 합성법에 어긋나는 발상이다. 왜냐하면 우리 국어의 합성법은 ‘고유어+고유어’, ‘한자어+한자어’ 혹은 ‘외국어+외국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휴대+폰’이 아니라 ‘휴대+전화’이고 ‘새사(寺)’나 ‘신(新)절’이 아니라 ‘신사(新寺)’가 맞는 합성법이다.
게다가 ‘디카’란 말 자체가 콩글리시 격인 줄임말이다. digital camera란 영어를 한국식 발음으로는 ‘디지털 카메라’라 하는데 이를 줄여 앞 글자만으로 대신한 말이다. 영어식이라면 당연히 첫 글자(이니셜)를 가져와 DC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디카시는 영어식으로 DC Poem, 즉 디씨포엠이 된다. 비근한 예가 바로 텔레비전이다. 영어 tele-vision을 영어 발음 그대로 가져온 외래어이다. 표준어는 ‘텔레비전’이며 일상에서는 tele-vision의 이니셜 TV를 함께 쓴다. 한때 이를 ‘테레비’라 하기도 했는데 결코 한국어 발음 텔레비전을 줄여 ‘텔비’라 하지 않는다. 디카시의 ‘디카’는 텔레비전을 ‘텔비’라 하는 것과 같은 경우이다.
물론 디지털 카메라의 출현, 그 사진기로 찍은 사진과 거기에 붙은 시를 결합하여 명명하다 보니 ‘디카시’란 발상이 나왔다는 것을 이해는 하지만 우리말 합성법에 맞지 않을뿐더러 차라리 영어를 쓰려면 몽땅 영어에 걸맞게 ‘DC Poem’ 즉 ‘디씨포엠’이라 하는 것이 더 어울린다. 외국어 발음의 무분별한 축약과 합성은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문제이다.
3. 또한 ‘SNS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사진과 함께 실시간으로 공유해 순간의 시적 감흥을 담는 것’이란 디카시의 개념은 수정해야 한다. 이미 실시간을 넘어 독립된 하나의 예술 형태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물론 여전히 실시간으로 소통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디카시인'이란 말이 생겨나고 그만큼 전문가 그룹이 형성되었으며 지면을 통해 발표되고 공모전까지 시행하고 있기에 더 이상 ‘실시간 소통’이라든가 ‘SNS’에 국한된 개념 설정은 그 의미를 축소시키는 결과를 빚게 된다.
4. 출판과 관련하여 고려할 때 디카시에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흑백 사진이라면 몰라도 요즘의 사진들은 천연색이다. 이 천연색을 출판물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사진 인화지에 근접한 고급 종이를 써야 하고 1도나 2도 인쇄가 아니라 3도 인쇄를 해야 하기에 그만큼 인쇄 비용이 증가한다. 그렇다고 시집이나 소설집처럼 흑백으로 인쇄했을 경우 출판 비용은 절감할 수 있을지 몰라도 사진의 맛 즉 디카시의 매력을 살리기 힘들다. 따라서 디카시가 IT시대에 출현한 갈래인 만큼, 디카시집은 종이 인쇄물보다는 시대에 걸맞은 e-Book의 형태로 출판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5. 초기 디카시를 만들어 발표하고 전파한 사람들에 비하면 나는 뒤늦게 디카시를 접했다. 사실 휴대전화에 사진촬영 기능과 메모장 기능이 합쳐지면서부터는, 그것이 디카시가 되는 줄도 모르고, 나는 손전화 속 사진과 메모장 앱을 활용하여 창작메모장으로 활용했다. 어느 순간 떠오르는 영감을 사진과 메모로 저장해 두었는데, 디카시를 알고 보니 나는 디카시 초기 단계를 근 20년 거친 셈이다. 나중에 여러 디카시인들의 작품과 공모전 수상작품들을 접하면서 내가 그간 해 온 창작메모장 작업들이 결국 디카시였다는 것을 알고는 그 매력에 푹 빠졌다.
시와 소설 창작도 하지만 문학을 학문으로 연구하고 있기에 새로운 것을 접하면 깊게 파고드는 성격이다. 그런 성격 덕에 뒤늦게 알게 된 디카시를 폭넓게 그리고 보다 많이 구하여 연구했다. 안타까운 것은 아직 일정한, 누구나 수긍하는 창작기법은 물론이요 확정된 개념도 명확하게 정립되어 있지 않다. 그럼에도, 학문을 하는 사람이라고, 부천디카시 회원들의 청을 받아 디카시 강의를 하게 되면서 더 깊게 공부하였다.
그러나 이 글, <디카시, 그 이론과 실제> 속에 있는 이론은 오로지 내가 접한 디카시들과 나 개인의 디카시 창작 활동 경험을 바탕으로 정리한 것일 뿐이다. 게다가 학술적 이론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 칼럼 형식으로 이해하기 쉽게 설명을 했다. 따라서 언젠가는 내 글을 뛰어넘는 보다 구체적이고 명확한 개념 설정 그리고 디카시 창작 방법이 후학들에 의해 제시되리라 기대한다.
6. 나보다 훨씬 먼저 디카시를 만들고 전파하고 발전시킨 한국디카시연구소 이상옥 대표 외에 많은 초기 디카시인들이 참 대단하다. 불모지에서 새로운 예술 갈래를 만들어냈으니 당연히 찬사를 받아 마땅하다. 그들에게 경의를 표하며 모쪼록 이 글이 독자들에게 디카시가 무엇인지 보다 널리 알리고 아울러 초심자들의 디카시 만들기에 도움이 되기를 기대한다. ♣
(필자 : 소설가 · 문학박사 · 시인)
※ <디카시, 그 이론과 실제 (1)> 바로 가기 →
https://blog.naver.com/lby56/222202546116
디카시, 그 이론과 실제 (1)
<논단>디카시, 그 이론과 실제 (1) Ⅰ 들어가면서 에피소드 1 성남고등학교 국어교사로 재직하던 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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