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과 가족,
핵가족의
붕괴에 대한
유쾌한 묵시록』
「기생충」은 어떤 영화인가?
계급의 문제, 빈부격차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작품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지만,
‘빈부격차’라는 한마디로
정리하기엔 뭔가 부족해 보인다.
웃으면서 보기 시작하지만,
극장을 나설 때 느껴지는
찜찜함의 정체는 무엇일까?
고전평론가 고미숙은
‘핵가족’이라는 키워드로
이 찜찜함과
막막함의 정체를 밝혀낸다.
부자건 가난한 사람이건
가족의 외부를 상상하지 못하고,
‘계획’이란
오직 비슷한 사람들을 밟아서
없애 버리는 것만을 의미하는 현실.
이런 현실 속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반지하에서 대저택으로의
단숨의 도약만을 꿈꾸고,
부자들은 ‘선을 넘는 것’에 대한
극도의 불쾌함과 불안감에
어쩔 줄 모르면서 살아가고 있다.
저자는 이런 꽉 막힌 현실이
핵가족을 중심으로 한 소유욕과
서로에 대한 정서적 집착만을 지니고 살아가는
우리 시대의 자화상이라고 분석한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계획을 버릴 것’,
가족의 이익과 서로에 대한 집착만을
증대시키는 ‘계획’이 아닌
‘생명 차원의 연대의 장’으로
가족을 변화시킬 것,
그리하여 가족의 구성원들이
‘세상을 향해 나아가도록 응원해 주는 관계’로
새롭게 가족의 윤리를 구성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가족이라는
폐쇄회로에서
탈출하기
평소에는 무기력하지만,
누군가를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계획’이 세워지면
기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가족 간에 하는 일이라고는
돈 이야기와 먹고 마시는 일밖에 없는
가난한 사람들.
그 반대편에는
타자에 대한 면역력이 전혀 없이
가난한 사람들이 선을 넘어오는 것에 대한
짜증과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는,
쇼핑과 이벤트로만
가족 간의 사랑을 확인하는
부유한 사람들이 존재한다.
두 가족의 욕망 모두
‘핵가족의 폐쇄회로’에 갇혔다는 점에서
지하의 문광 씨(이정은 분) 부부와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폐쇄회로에서 탈출할 것인가?
지은이는 봉준호 감독이 이 영화에서
‘출구 없음’,
‘대안 없음’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명과 생명의 연대로서의 가족’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하는
돌파구를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기생충」에서는
이런 실낱같은 희망조차 사라진다.
「기생충」에는 외부와 관계 맺지 못하는
핵가족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영화의 제목으로 고려되었던
‘데칼코마니’라는 말이 시사하는 것처럼,
반지하에 사는 김기사(송강호 분)네와
대저택에 사는 박사장(이선균 분)네 모두
‘아빠-엄마-아들-딸’이라는
대칭적 구조를 보여 준다.
하지만 이러한 대칭적 구성은
지하의 문광 씨 부부로 인해
흔들리게 되는데,
이 부부 역시 남편이 자녀의 역할까지를
담당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사 ‘핵가족’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핵가족 간의 투쟁으로 전개되는
이 영화에서 계급적 연대,
비슷한 처지에 대한
공감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같은 계층이나 처지에 있는 사람들은
내가 무언가를 차지하기 위해
밟고 ‘치워야’ 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
봉준호 감독은
우리 사회의 이런 섬뜩한 측면을
세 가족의 이야기로 풀어내고 있는 것이다.
책속으로
생명 차원에서 생각해 보면,
모든 존재는 부모의 돌봄을 받다가
자기의 생을 영위하기 위해 떠나요.
이건 너무 당연하지 않나요?
아무리 단란해도
결혼을 하려면 집을 떠나야죠.
아니, 그 이전에
머나먼 타국까지 유학도 가잖아요?
학교를 간다는 것 자체가
이미 집을 떠나는 행위입니다.
학교를 가는 순간
대부분의 시간을 집 바깥에서,
낯선 존재들과 지내는 거죠.
학교를 마치면, 직장으로,
그다음엔 결혼으로.
특별한 경우엔 출가를 하기도 하고요.
이것이 인생의 행로죠.
그러니까 이게 대전제라면,
아예 처음부터
가족에 대한 표상을 바꾸자는 거예요.
집에 문제가 있어서
길에 나서는 게 아니라,
길을 나서는 게 인생이니까
집에 대한 의존과 집착을 버리자는 거죠.
그렇게만 되어도
가족끼리 서로 상처를 주고받는 일은
훨씬 줄어들 겁니다.
또 소위
정상적 가족을
이루지 못한 경우라고 해도
전혀 문제될 게 없겠죠.
그저 다를 뿐이지
모자란 게 아니니까요.
---「지은이의 말」중에서
제가 주목하는 건
봉준호 감독의 문제의식이
늘 생태계를 향하고 있다는 거예요.
「괴물」에서는
한강에 흘러든 미군의 독극물이
괴물을 만들어 냈는데,
이것도 역시 문명 혹은 제국의 폭력성이
생태계를 오염시키고
그게 다시 거대한 재앙이 되어
삶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식으로
되돌아오는 거죠.
국가나 시스템은 그걸 감당하지 못해
허둥대고 온갖 부조리를 연출하고….
「설국열차」에선
비슷하게 지구온난화에 대처한답시고
한 짓이 온 지구를 다
얼어붙게 만든다는 발상인데,
이거야말로 문명의 폭력성과
기술의 오만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설정입니다.
--- p.28
박사장 집에서
한 가지 더 주목해야 하는 것은
창밖에 사람이 없다는 겁니다.
단 한 명의 사람도
거기를 통과할 수도 없고 오지도 않아요.
세상에 나는
이런 ‘집구석’은 처음 봤어요.
그 정도로 살면 형제든 부모든
사돈의 팔촌이든 막 와 보려고 그러고,
파티든 모임이든 해야 하잖아요.
어떻게 그렇게 인적이 드물 수가 있죠?
그 넓은 집을
어떻게 네 명이 쓸 수가 있어요?
엄마, 아빠, 아들, 딸.
여기도 딱 일촌으로 이루어져 있죠.
가족 구조가 김기사네랑 똑같죠.
창문이 크고 창밖으로 자연이 우거졌지만
오줌 싸러 지나가는 사람도
소독차도 없는 것은 다르지만….
--- p.44
이제는
‘꿈’이라고는 하지 않는 거예요.
“부자를 털어먹을 수 있는
계획이 생겼어요, 아버지”,
이런 식이죠.
사기를 치는 일이 계획이에요.
이 가족한테.
그러니까 가족이 다
직업을 얻는 게 계획인데,
‘직업을 정직하게 해서는 못 얻는다’,
‘남을 속이고 약탈을 해야만 얻는다’.
이게 아주 뼛속 깊이
이미 박혀 버린 거예요.
조금 과장하면,
이건 상당히 큰
변화의 징후라 할 수 있습니다.
드디어 지난 10년간 성행했던
‘꿈’ 담론이 와해된 셈이니까요.
‘꿈타령’은 이제 됐고,
지금 중요한 건 ‘계획’인 거죠.
--- p.50
어쩌다가 이렇게 됐죠?
여기에는 출구가 없습니다.
이 가족이 하는 일은 뭐냐면,
직업이 없을 땐 무력하게,
엉망으로 살아요.
그러다가 누군가 돈을 벌어오면 뭘 하죠?
바로 술과 피자
이런 음식을 진탕으로 먹는 거죠.
나중엔 네 명이 다 취업을 했으니까,
이제 돈을 잘 모아서
빨리 반지하를 탈출하고
새출발하고
이런 계획을 세울 줄 알았는데,
그런 계획 같은 건 일체 없어요.
그냥 큰 집에 대한 욕망만 있는 거죠.
그래서 박사장네가 캠핑 가니까 졸지에
거기 다 모였는데 거기서 또 뭘 해요?
한바탕 때려먹는 거죠.
--- p.74
문제는
아직도 핵가족을 기준으로 해서
그게 안 되면
결핍이라고 해석을 하는 거죠.
기준은 여전히 핵가족인 겁니다.
이런 식의 정치담론이나
휴머니즘 타령이 솔직히 좀 지겨워요.
가족의 화목함, 사랑, 막 이런 게
삶의 어떤 중요한 표지가 되는 것이….
가족은 그냥 생명의 베이스인 거예요.
태어나서 이 베이스캠프를 배경 삼아서
자기의 길을 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수신’을 하고 ‘제가’를 하고
‘치국’을 하고
‘평천하’를 하는 쪽으로 가는 겁니다.
누구든 나아가서 새로운 가족이든
새로운 네트워크든
형성을 하는 거라고요.
왜 평생 자꾸
이 핵가족으로 되돌아오냔 말이죠.
--- p.88~89
[예스24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