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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18.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연중 제29주일). 묵상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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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18.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연중 제29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http://www.ofmkorea.org/ofmhomily/586447 2026.10.17 20:50 2026년 10월 18일 일요일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학교 말씀 기도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마태 28,16-20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을 산 위에서 만나십니다. 그들은 엎드려 경배합니다. 그런데 복음은 솔직하게 덧붙입니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
놀랍지 않습니까? 부활하신 그분을 눈앞에 뵙고도 의심하는 이들에게, 주님께서는 세상을 향한 사명을 맡기십니다. 완벽한 사람이 파견되는 것이 아닙니다. 흔들리는 우리를 그분께서 그대로 쓰십니다.
그리고 마지막 명령을 주십니다.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라.” 이전에는 “이스라엘에게만 가라” 하셨지만(마태 10장), 이제 부활하신 그분은 ‘모든 민족’을 향해 문을 여십니다. 언어도 문화도 관습도 다른 모든 이에게 말입니다. 복음은 어느 한 민족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큰 사명 앞에서 우리는 쉬 지칩니다. 세상은 크고, 우리는 작고, 열매는 더디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래서 마지막 한마디가 있습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마태오 복음은 ‘임마누엘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로 열려서, ‘내가 함께 있겠다’로 닫힙니다. 처음과 끝이 ‘함께 계심’입니다.
평화·인내 주간의 눈으로 보면 여기에 평화와 인내의 뿌리가 있습니다. 평화란 다툼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그분께서 함께 계심’을 아는 데서 오는 안식입니다. 그리고 인내는 그 함께 계심을 믿기에 가능한 기다림입니다. 성 예로니모가 평생 말씀을 옮기며 그러했듯, 복음을 전하는 일은 한 세대에 끝나지 않습니다. 바오로 사도도 티모테오에게 당부합니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끈기를 다하여 가르치십시오”(2티모 4,2).
전교 주일에 우리는 묻습니다. ‘전교’란 남을 개종시키는 일입니까? 교황님들이 거듭 말씀하셨듯, 교회는 강요가 아니라 ‘이끌림’으로 자랍니다. 우리 삶에서 흘러나오는 평화와 기쁨을 보고 사람들이 그 근원을 궁금해하는 것 ― 그것이 전교의 첫걸음입니다. 오늘 기억하는 성 루카가 그러했습니다. 이방인 의사였던 그는 자비의 눈으로 복음을 적어, 가난한 이와 여인과 죄인에게 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의심과 부족함에도 파견하시는 그분을 신뢰하는가? 나는 열매가 더디다고 조급해하지 않는가? 나는 ‘함께 계심’ 위에 선 평화를 누리는가? 나의 삶은 누군가에게 복음을 궁금하게 하는가?
주님, 의심 많은 저를 그대로 파견하시니 감사합니다. ‘함께 계심’에 기대어 평화를 누리게 하시고, 열매를 서두르지 않는 인내로 복음을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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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18.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연중 제29주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2026.10.17. 23:50
우리 마음의 고향을 향한 그리움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당신은 지금 자신의 삶 안에서 집에 있는 듯한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까?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집으로 돌아감(귀가)! 우리 마음의 고향을 향한 그리움 2026년 10월 17일 토요일 "모든 것이 제 자리를 가지면서 모든 것에 속한다"라는 팟캐스트에서 제임스 핀리(James Finley)는 향수(그리움)을 영적 여정의 풍경 가운데 하나로 성찰합니다: 하루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해가 저물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아무렇지 않게 지나쳤습니다. 해는 매일 저무니까요. 그러나 그날 저녁은 유난히 아름다워서, 차를 멈추고 밖으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땅에 앉아 석양의 아름다움에 자신을 내어 맡기니, 석양 또한 자신을 내어 주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을 묵상해 보면, 우리는 그것이 깊은 의식의 고양임을 깨닫습니다. 그것은 무기력하거나 흐릿한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깨어 있음의 은총의 순간입니다. 동시에 그때는 머리로 생각하는 것이 거의 사라지거나, 설령 어떤 생각이 있더라도 그 풍요로운 의식의 깊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듯 느껴집니다. 이는 곧 관상적 은총 안에서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체험하는 순간입니다, 이 순간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생각하는 "나"와 그 모든 사유가 넘어서는 순간입니다. 우주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세월 동안, 오늘 밤의 석양은 단 한 번도 같은 모습으로 저문 적이 없었습니다. 앞으로 올 모든 세월 속에서도 다시는 이와 같은 방식으로 저물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석양은 처음처럼 순결하고 새롭습니다. 기억하는 ‘나’와 그 모든 기억 또한 넘어서는 순간이며, 오직 영원의 지금이 지닌 새로움만이 남습니다. 그 순간, 당신은 깊은 귀향(집으로 돌아옴)을 체험합니다. 마치 그곳이 당신의 자리인 듯, 그 안에서 안식을 누립니다. 또한 그 순간은 시간의 흐름을 넘어선 은총의 지속이기에, 당신은 '시간 안에' 있지 않습니다. 자리를 떠나 일어설 때에야 비로소 시계를 확인하며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알게 되는데, 그 이유는 당신이 그 순간 동안 시간을 초월한 '지금-여기' 안에 머물렀기 때문입니다. 집에 도착해 차를 차고에 세우고, 부엌에 서서 우편물을 정리하다가 문득 석양의 순간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왜 나는 깨어 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내 삶의 내적 풍요의 중심이 아니라, 그 바깥 둘레에 갇혀 살아가는가? 나는 그 내적 풍요가 있다는 것을 안다. 실제로 그것을 체험했으니까. 그런데도 마치 내 집 안에서조차 집에 있지 않은 듯한 낯섦을 느낀다." 나는 어떻게 하면 더 깊이 하느님 안에서 집에 있는 듯한 평화를 누리며, 내 안에서 하느님께 안식하고, 영원히 하느님 안에 머물 수 있을까? 그것은 곧 영원한 생명의 예고입니다. 나는 이것을 ‘귀향’이라 부르며, 곧 참된 고향을 향한 갈망이라 생각합니다. 우리의 모든 삶의 방식 안에는 이미 그러한 귀향의 기회가 담겨 있습니다. 더 깊은 통찰은, 이 갈망, 이 영적 향수병이 사실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향해 가지신 갈망의 메아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갈망이 서로 응답할 때, 그 갈망은 완성됩니다 Reference Adapted from Mike Petrow, Paul Swanson, hosts, with Richard Rohr, “Home and Homesickness with James Finley,” Everything Belongs, season 1, ep. 7 (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2024), podcast. Available as MP3 audio download and transcript.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Richard Bell, untitled (detail), 2022,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내적 성소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며, 우리가 누구인지와 하느님께로 향하는 여정을 밝혀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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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18.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연중 제29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10.18 04:13
- 선교할수록 행복이 커지는 선교
모순되게도 그래서 부끄럽게도 저는 선교에 대한 소명 의식을 40살 가까이 되어서야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그전에는 하느님께서 가라고 하시면 어디든 가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선교지 곧 외국은 빼놓고 국내 소임만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인데 그때는 왜 그랬냐 하면 외국에서 살 자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것 때문만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까 살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살 마음이 없었던 것이 더 큰 이유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선교 의지와 의식이 없었던 것입니다. 솔직히 그때까지 저는 휴머니스트였지 그리스도인이 아니었고, 설사 그리스도인일지라도 참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으며 그리스도인이기에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리스도인이기에 행복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나만 행복한 것이 행복치 않은 사람에게 미안하게 되었으며, 특히 북한 일 하면서 북한 사람들에게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같은 민족인데 누구는 북한 땅에 태어나서 굶주리게 되었고, 누구는 남한 땅에 태어나서 음식물을 쓰레기로 버리게 된 것이 너무 미안했습니다.
그리고 남의 불행이 나의 행복인 삶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그런 자각과 함께 이런 자문도 하게 되었습니다. 정말 나만 행복해도 되는 걸까?
하느님 사랑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행복하다면 그럴 순 없는 것인데 저는 그때 처음 그것을 느끼고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 복음을 선포해야겠다고 적극적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 그리고 이 선교 의지와 의식은 북한 복음화에서 시작되어 인접국들인 중국, 러시아, 카자흐스탄 등으로 확장되었고 가깝지만 배제하고 있던 일본이나 멀리 이슬람 사람들에게까지 점차 확장되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렇게 선교 의지와 의식이 확장될수록 제가 더 행복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그만큼 사랑이 확장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확장될수록 선교 의지와 의식이 확장되고, 선교 의지와 의식이 확장될수록 사랑이 확장되는 선순환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러니 선교는 이제 의무가 아니라 원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지 않으셔도 내가 원해서 가고 싶은 것이었습니다.
다만 가야 할 곳이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곳이 될 뿐이었는데 지금도 주님께서 가라고 하시면 어디든 가야겠다는 마음이 있고, 가면 주님께서 다 돌봐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이제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터무니없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이고, 실제 가게 되면 그런 마음과 믿음이 달라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저는 그런 꿈을 꾸기 때문에 행복하고 그래서 ‘그런 건 꿈도 꾸지 말라’고 저에게 다그치지 않고 내버려 둡니다.
그리고 이제는 멀리까지 가지 않아도 선교할 수 있습니다. 이곳에 와 있는 이주민들을 선교 대상을 생각하면 됩니다.
그래서 이주민 선교를 목적으로 선교협동조합을 세웠는데 저는 농담 반 진담 반 이렇게 얘기합니다. 이곳에 와 있는 이주민들은 제게 선교당하기 위해 온 분들이라고!
아무튼 전교주일을 맞이하여 먼저 우리 자신이 있는 곳에서 선교사가 되고, 선교 최전선에 있는 선교사들을 위해서도 기도하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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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18.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연중 제29주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2026.10.18. 05:56 주님께서는 우리를 처음의 자리로 초대해 주시고 당신께서 우리 안에서 하신 일을 상기하게 해 주십니다.... 열한 제자가 마침내 예수님께서 지시하신 갈릴래아 산에 도착합니다. 마태오 복음에는 '다락방 이야기'가 없기 때문에, 이 갈릴래아 산에서의 만남이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실제로 처음 뵙는 장면입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겪은 뒤에 예수님을 보고 경배하면서도 동시에 '의심'합니다. 여기서 '의심'이라는 단어는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믿음의 부재'와는 다릅니다. 사용된 그리스어는 '믿음'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단어가 아니며, 오히려 '결정하지 못함, 망설임'에 가까운 의미입니다. 사실 이 단어는 신약성경 전체에서 단 두 번만 쓰이는데, 하나는 베드로가 물 위를 걷다가 빠질 때, 또 하나는 바로 이 장면입니다. 두 이야기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초자연적 신비 앞에서 인간이 느끼는 놀라움과 혼란을 보여줍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혼란스러움을 느끼는 제자들에게 당신을 처음 만나 가졌던 영감을 상기하게 해 주시면서 그간의 과정을 뒤돌아보게 해 주십니다. 그 과정에서 어떻게 당신께서 함께해 주셨는지, 자기들을 어떻게 이끌어 주셨는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시고 치유해 주시며 하느님의 사랑이 결국은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가르쳐 주셨는지를 다시 상기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사실 이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했던 3년간의 시간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하며 가졌던 영감은 계속해서 그들 마음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그들 안에서 하시고 계셨던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갈릴래아로 돌아가라 하시고 거기에서 그들을 만나 그들 안에 주신 그 영감을 전파하라는 사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삶 안에서도 예수님께서는 같은 일을 하십니다. 우리를 치유해 주시고 용서해 주시며 하느님 사랑이 어떻게 모든 것을 이기는지를 차근차근 이해해 가도록 영감을 불어넣어 주십니다. 그러고는 그 모든 일을 상기할 수 있도록 우리를 처음의 자리로 다시 초대해 주십니다. 초심.... 그런데 이 관점에서 볼 때 이 초심은 우리가 처음에 먹었던 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첫 영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사실 뒤를 돌아보는 일은 그리 달갑지 않은 일이기도 하고 또 매우 긍정적인 일도 아닙니다. 하지만 지나온 삶을 뒤돌아보며 자신의 삶 안에서 하느님께서 어떻게 우리에게 처음으로 영감을 주셨고 그 영감을 어떻게 해서 계속 자라나게 하셨는지를 돌아보는 것은 꼭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무엇을 잘못했고 잘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서 이루신 일들을 살펴보는 것은 아주 긍정적이고 바람직하며 꼭 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살아오면서 많은 면에서 부족했고 실수를 반복하며 살아왔을지라도 그 안에서도 여전히 당신 사랑으로 일하시는 주님이 계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꼭 기억해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그분과 함께하는 삶을 온전히 살아가게 될 것이고, 또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명을 수행할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런 주님께서 앞으로도 여전히, 그리고 영원히 그렇게 함께해 주실 것이기에 우리는 우리의 한없는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내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향해 나아가는 믿음의 자세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지키게 하여라." 하고 분부하시는데, 이 분부는 사람들에게 그저 단순히 교회라는 제도 안으로 사람들을 이끌거나 올바르게 살아 하느님을 만나라는 분부가 아니라 우리의 한없는 부족함에도 여전히 우리를 사랑해 주시고 보살펴 주시며 당신 사랑 안으로 이끌어 들이시는 친밀함의 하느님, 관계성의 하느님을 만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라는 초대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우리를 당신 사랑 안으로 이끌어 주신 이 사랑의 하느님을 인격적으로 진솔하게 만나게 된다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이 사명을 수행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저와 함께 이 기도를 바치면 좋겠습니다! "주님, 저를 당신께서 부르시는 그 처음의 장소로 갈 수 있도록 힘을 주소서. 저의 한계를 넘어 일어서게 하시고, 당신의 권능에 의지하여 구원의 은총을 나누게 하소서. 겸손히 청하오니, 언제나 당신께서 주시는 그 사랑의 힘을 늘 의식하게 하여 당신께 마음을 돌리고 당신 사랑의 힘을 온전히 신뢰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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