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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23 / 하나님께는 다 있는데 (눅15:11-24)
시골 어느 마을 아주 가난한 집에 홀어머니와 아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사는 게 너무나 가난했는지라 하루는 아들은 더 많은 돈을 벌어 오겠다며 외국으로 나갔습니다.
이후, 아들이 매달 어머니께 편지를 보내긴 했지만, 본인도 얼마나 고생이 심했는지 이제껏 한 번도 돈을 부치지 않았기에 어머니는 여전히 가난하고 굶주리며 힘들게 사셨습니다.
어느 날 어머니는 그런 아들을 걱정하는 마음에 목사님을 찾아와 아들 편지를 보이며 기도를 부탁합니다. 그런데 편지를 보고 난 목사님은 아무 걱정하지 말라며 그 이유를 설명해줬습니다.
아들은 외국에 나간 첫 달부터 꼬박꼬박 돈을 부쳐 왔다는 겁니다. 단지 그게 현금이 아니라 우편환이다 보니 평생 수표나 우편환 같은 걸 모르고 살아온 어머니는 돈을 잔뜩 갖고 있으면서도 돈이 없어 생고생하고 계셨으며 아들이 돈도 못 벌고 고생만 한다며 허구한 날 울고만 사셨더라는 겁니다.
항간에는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이 있는가 하면 아는 게 힘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어느 게 맞을까요?
굳이 영어까지 사용하자면 ‘케이스 바이 케이스’입니다.
물론, 살다 보면 몰라야 할 건 모르는 게 좋지만, 알아야 할 건 반드시 알아야만 합니다. 특히나 우리가 믿는다고 고백하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모르면 안 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아는 게 힘이고 아는 만큼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모르고 믿다 보면 그게 미신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 잘 모르다 보니 하나님에 대해 크게 두 가지 정도의 잘못된 태도를 보이게 됩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부인하고 무시하는 태도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지나치게 어려워하는 태도라고 합니다.
어떤 경우든 간에 사람들의 이런 태도는 하나님을 모르는 불신이거나 불신앙적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부터라도 우리가 제대로 된 믿음으로 신앙생활을 해 나가려면 우린 다른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이 누구신지부터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 생각엔 어떠십니까? 하나님은 누구실까요?
신학적으로는 너무나 방대한 주제지만, 우리가 믿어야 할 하나님은 실생활에서의 나의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내가 살아가는 중에 나를 위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누구실까요?
우선 먼저 아셔야 할 것이, 인간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과 인간의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하나님은 어떤 일이 닥치기 전에 이미 아시고 역사하신다는 것이고 인간은 일이 지나고 나서야 후회한다는 것입니다.
혼자만의 힘으로 애만 쓰며 살다가도 지나고 나면 후회할 일이 꼭 있게 되는 인생에서 후회할 일이 닥치기 전에 미리 아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산다면 내가 만나게 될 현실은 과연 어떤 결과로 펼쳐질까요?
오늘 본문이 그런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우선 본문을 보면 아버지의 뜻을 저버린 채 자기 욕심과 자기 계획을 따라 집을 나갔던 아들이 연속적으로 맞닥뜨리게 되는 혹독한 현실 앞에서 모든 걸 잃고 난 후에 후회하고 고생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런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아버지는 아들이 마주할 결과를 이미 예상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아들이 다시 돌아오기를 무한히 기다리는 세월을 사셨으며 우여곡절 끝에 돌아온 아들을 다시 아들로 품어 주십니다.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왔기 때문에 용서하신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는 이미 다 용서해 놓고 기다리고 계셨기에 돌아온 아들이 그 용서를 받을 수 있었던 겁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우린 아버지가 아들을 용서하는 ‘타이밍’에 주목해야 합니다.
왜 이 타이밍이 중요한가 하면 이미 용서해 놓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이시라면 축복에 관해서도 그러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돌아오면 그때 가서 복을 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주실 복을 손에 들고 저와 여러분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렇기에 어느 때라도 다시 하나님을 찾는 자라면 누구라도 그 복을 받겠지만,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하나님께 구하지도 않는다면 하나님이 나에게 주려고 이미 예비해 놓으신 그 복은 내 수중이 아니라 아직도 나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손에만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타이밍과 관련하여 이제라도 우린 제대로 된 믿음을 갖고 제대로 된 신앙생활을 하려 해야 합니다.
잘 아시는 홍길동 전에 보면 길동이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라며 탄식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21절에서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24절을 보면 아버지는 아들을 가리키며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라고 하십니다.
너는 내 아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를 다시 그리고 언제나 아버지라 불러주기만을 기다리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21절에는 내용 못지않게 우리가 특별히 주목해서 봐야 할 부분이 두 곳 있습니다.
첫 번째는 ‘아버지’라는 말입니다.
물론 아들이 집 떠나기 전처럼 ‘아버지!’하고 불렀던 건 아닙니다. 단지 이젠 전처럼 ‘아버지’의 아들이 될 순 없겠지만 이란 의미로 아버지라 했을 뿐인데 듣는 아버지로서는 기다렸던 아들에게서 다시 아버지란 말을 들은 그 자체로 이미 되었다는 겁니다.
상식적으로 아버지가 자녀에게서 아버지라 불림을 받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한 일 같지만, 하나님 아버지께는 이것보다 더 좋고 기쁜 말이 없으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하나님을 다시 아버지라 부르는 것이 하나님께만 좋은 일은 아닙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를 다시 아버지라 불렀다는 것은 하나님 편에서 보자면 이제부턴 우리가 다시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이라고 불림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젠 우리도 누릴 수 있게 된 겁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것들을.
그러므로 살기가 어렵고 힘들 때, 또는 인생이 궁지에 몰렸을 때, 하나님을 하나님이라 부를 수 있는 것. 하나님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것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믿음이고 우리도 하나님의 복 받는 비결인 것입니다.
특히나 22절에서 아버지가 아들을 위해 하인들에게 이런저런 것들을 준비하라고 지시하실 때 보면 원문에는 우리말 성경에는 생략된 단어 하나가 나옵니다. 헬라어 ‘타키’라는 말인데, 영어로는 ‘quick’이고, 우리말로는 ‘빨리, 속히’라는 말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좋았고 급했으면 “속히 입혀라!” “빨리 잡아라!”라고 외치셨을까요?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빨리 복 주시려고, 속히 응답하시려고 우리가 하나님께 나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불러주기만을 언제나 기다리시는 하나님이 내가 믿는 나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또 21절에서 주목해 봐야 할 두 번째 단어를 보자면 21절 맨 마지막을 보세요. 어떤 단어가 기록되어 있습니까?
아들이 아버지에게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그렇습니다. “하나”라는 단어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19절을 보시면 아들은 아버지께 가서 어떤 말을 해야 다시 아버지 집에서 살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아버지를 만났을 때 해야 할 말을 연습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즉 아들은 아버지에게 가서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라고 말하려 했던 겁니다.
그런데 실제론 어땠습니까?
아들이 첫 문장을 채 맺지도 못했는데 아버지는 ‘하나’라는 단어로 아들의 입을 막아버립니다. 그러고는 선포합니다. ‘그 입 다물라! 누가 뭐래도 너는 내 아들이다!’라고.
아버지에겐 다른 말들이 필요가 없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다시 아버지라 불러주는 것만으로 아버지는 기쁘고 만족하신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 되십니다. 그러므로 오늘부터는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서 내 인생이 어떻게 될지라든가 나에게 무엇이 필요할지 등을 다 아시고 그것들을 나에게 복으로 주시려고 이미 준비해 놓고 계시는 분이 내가 믿어야 할 나의 하나님이신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동시에, 살아가는 내 인생이 지나간 뒤에 후회하는 인생이 아니라 살아갈수록 감사와 만족함이 넘치는 인생이 되기 위해서라면 우리에겐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을 다시 나의 하나님 아버지로 부르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도 믿으셔야 합니다.
우리도 다시 하면 됩니다. 현재의 상태나 형편이 어떠하든 일단은 하나님을 찾아가 하나님 앞에 다시 서는 것에서부터 여러분의 인생을 다시 시작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어느 모임에서 하나님이 있느냐, 없느냐로 논쟁을 벌이던 중에 한 남자가 벌떡 일어나더니 식탁에 있던 칼을 집어 들고는 ‘하나님은 없습니다.’라고 하더니 이번엔 하늘을 향해 칼을 휘두르며 ‘하나님! 만약 하나님이 진짜로 있다면 이 칼로 나를 5분 내로 죽이시오!’라고 외칩니다.
이후 5분이 지난 후에도 아무런 징후가 없자 남자는 의기양양해하며 ‘거봐요. 하나님은 없어요.’라고 외치더니 자리를 떠나려고 합니다. 바로 그때 모임에 참석했던 할머니 한 분이 남자에게 다가와 ‘여보게 자네 행동은 잘 보았네! 그런데 자네에게 자식이 있는가!’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물론 있지요!’라고 대답하는 그에게 할머니는 아까 그가 들었던 칼을 그의 손에 쥐여주며 ‘만일 자네 자녀 중의 한 명이 자네에게 와서 이 칼로 나를 죽이세요라고 한다면 자넨 어쩔 건가?’
그러자 ‘할머니. 내가 미쳤어요? 내가 내 아들을 어떻게 죽일 수 있습니까?’라고 대답하는 남자에게 할머니는 그의 손을 잡고 조용히 말을 합니다. ‘그것 보게!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시라네! 어찌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을 찔러 죽이겠나?’
‘하나님은 안 계신 것이 아니라 자네가 하나님께 가질 않으니 하나님을 뵙지 못할 뿐이라네.’라고 하셨답니다.
본문에서도 객지를 떠도는 탕자가 아버지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그에게 아버지는 없는 거였습니다. 그러나 그랬던 그가 아버지 집으로 돌아온 순간 그에겐 자기에게도 아버지가 계심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객지에 있는 동안 탕자는 자기는 더 이상 아버지에게서 아들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아버지 집으로 돌아온 순간 아버지에게서 자기는 여전히 아들이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믿으세요. 하나님은 우리를 실망시키는 분도 아니지만 나에 대해 실망하시는 분도 아니십니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은 나를 향해 “나는 너에게 실망했다.”라든가 “나도 이젠 너를 포기하겠다.” 같은 말씀은 절대로 하지 않으십니다.
이후로는 여러분의 착각이 여러분의 믿음이 되게 하지 마세요.
어떤 젊은 여성도가 목사님을 찾아와 하는 말이 ‘목사님 제 교만 죄를 용서해 주세요.’라고 하기에 목사님이 뭘 그리 교만했느냐고 물었더니 자기가 얼굴이 조금 예쁘다는 것 때문에 여전도 회장을 무시했고. 얼굴 조금 예쁘다는 것 때문에 사람들을 깔보고 살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안경을 고쳐 쓰고 여성도분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시더니 한참 후에 이렇게 말씀하셨답니다.
‘성도님. 성도님의 죄는 교만 죄가 아니고 착각 죄입니다.’라고.
인생의 착각은 질병이고 신앙의 착각은 불신이 됩니다.
본문에서도 보면 탕자는 착각했습니다. 내가 아버지에게 그런 망나니짓을 하고 가출했으니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일 수는 없을 거라고. 또한 아버지도 나 같은 건 아들로 여기지 않으실 거야 라고.
나의 착각이 믿음이 되면 안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데는 갖춰야 할 조건이나 복잡한 절차 등이 필요 없습니다. 탕자가 그랬듯이 우리도 하나님을 찾아가서 하나님을 다시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자마자 모든 게 용서가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자마자 하나님께 있던 모든 복이 내 수중에도 있게 됩니다.
이를 두고 어떤 분은 이런 은혜를 일컬어 “하자마자의 은혜!”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오자마자, 우리가 죄를 고백하자마자, 우리가 예수님을 향해 ‘주여!’ 하고 부르자마자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은혜를 내려주시는 분이시며, 우리가 믿자마자, 우리가 기도하자마자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 인생에도 믿음대로의 은혜와 기도한 것들의 응답이 있게 해 주십니다.
다시 아버지를 생각하는 믿음이 탕자를 살게 했듯이 다시 하나님을 생각하는 믿음이 우리도 살게 합니다. 특히나 17절을 보세요.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아버지께로 돌아오기 직전에 가졌던 탕자의 믿음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다시 말해, 그로 하여금 아버지를 다시 찾아가리라고 결심하게 만든 그의 확신은 무엇이었을까요?
“아버지께는 다 있는데...!”였습니다.
탕자의 이런 믿음을 보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믿음도 이래야 합니다. “하나님께는 다 있는데!” “하나님은 다 하시는데!”가 우리 믿음이 시작해야 할 출발점입니다.
(한 번 따라 하세요.) “하나님께는 다 있는데!”
혹시라도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막막한 때를 만났다면,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답답한 때를 만났다면, 혹은 내 능력으론 해결되지 않는 문제를 만났거나 꼭 되었으면 하는 희망이나 바람이 있다고 하면 그땐 이 한마디를 기억했다가 되뇌어보세요.
‘하나님께는 다 있는데.’라고.
이 시간까지 여러분에게서 안 되었던 것들은 무엇입니까?
이제까지 여러분에게 없는 것들은 무엇입니까?
또한 이제부터 여러분에게 있으면 좋겠다. 되었으면 좋겠다 하는 것들은 무엇인가요?
믿으세요. 하나님께는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다 있습니다.
하나님께는 실패를 극복할 능력이 다 있습니다.
하나님께는 나에게 있어야 할 것들이나 내가 원하는 것들을 다 이루어주실 힘이 다 있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본문의 탕자가 객지에서 가진 것 다 탕진하고 설상가상으로 흉년을 만나 끼니조차 해결하지 못할 처지에 빠진 순간 그에게 떠오른 한 가지 믿음은 다른 건 몰라도 아버지께 가면 나는 살 수 있다는 확신 하나만은 분명했습니다. 그런 확신이 있었기에 늦게라도 그는 결행합니다. “그래! 가자! 아버지께로!”라고.
이제부턴 우리가 그래야 합니다. 불확실한 인생을 사는 것이기에 다른 건 다 불확실할지 몰라도 분명한 한 가지는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면 나도 살 방도가 있다는 믿음 하나만은 꼭 붙들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결행해야 합니다. “그래! 가자! 하나님께로!”라고.
“그래! 믿자! 하나님만!”이라고.
“그래! 기도하자! 예수님의 이름으로!”라고.
그러면 됩니다.
유대 교훈집인 탈무드를 보면 “우리가 하나님께 일 보 전진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백 보를 달려오신다.”는 말이 있습니다.
들어보셨겠지만 ‘무엇을 기대하든 그 이상’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인생에서 무엇을 기대하든 또는 무엇을 소망하든 하나님께는 그 이상의 것들이 다 있다는 믿음을 다지시기를 바랍니다.
이제부터라도 이런 믿음을 갖고 여러분 각자가 하나님을 향해 믿음의 한 발을 내디뎌 보세요. 그리하면 우리가 그리하자마자 나를 향해 기대 이상의 복을 들고 나를 향해 백 보를 달려오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나를 위해 이미 예비하셨던 모든 복을 다 받으며 살아가는 은혜가 있게 될 것입니다.
이후로 여러분 모두가 그런 은혜의 주인공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