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든 사이 붉은 가로등이 켜졌다 붉은 가로등이 켜지는 사이 달에 눈이 내렸다 달에 눈이 내리는 사이 까마귀가 울었다 까마귀가 우는 사이 내 몸의 가지들은 몸속으로만 뻗어갔다 몸속에 가지들이 자라는 사이 말〔言〕들은 썩어 버려졌다 말들이 썩어 버려지는 사이 나는 구두 위에 구두를 또 신었다 구두를 신는 사이 겨울이 지나고 여름이 왔다 여름이 오는 사이 도시의 모든 지붕들이 날아갔다 도시의 지붕들이 날아가는 사이 길들도 사라졌다 길들이 사라지는 사이 지붕을 찾으러 떠났던 사람들은 집을 잃었다 그사이 빛나던 여름이 죽었다 여름이 죽는 사이 내 몸속에선 검은 꽃들이 피어났다 검은 꽃이 피는 사이 나는 흰 구름을 읽었다 흰 구름을 읽는 사이 투명한 얼음의 냄새가 번져갔다 얼음 냄새가 번지는 사이 나는 구두 위에 구두를 또 신었다 열두 켤레의 구두를 더 신는 사이 계절은 바뀌지 않았다 구두의 계절이 계속되는 사이 나는 구두의 수를 세지 않았다 구두 속에서 나오지도 않았다
『구두를 신고 잠이 들었다』 (창비 2009)
<박준 시인 감상>
숱한 사이들과 내가 사이좋게 지냈으면---
세상 모든 것에 ‘사이’가 있습니다. 먼저 시간이 그렇습니다. 새벽과 아침과 한낮과 저녁과 밤, 그리고 절기와 계절. 아무리 촘촘하게 눈금을 그어도 이 사이를 메울 수 없습니다. 공간도 그렇습니다. 이편과 저편, 혹은 내가 딛고 있는 곳과 닿고자 하는 곳. 이 사이를 좁힐 방법도 요원합니다. 또 사람과 사람이 그렇습니다. 인연과 관계라는 사이. 잡고 잡히고 놓고 놓치고. 더 가까워지고 싶은 사이가 있는 반면 모르는 편이 더 좋았을 먼 사이도 있습니다. 이 사이에서 우리는 종종 발이 빠집니다. 자주 길을 잃습니다. 물론 그러다가도 새로운 사잇길을 만들어냅니다. 부디 숱한 사이들과 내가 사이좋게 지냈으면 합니다.
*시간과 공간 사이=전과후, 좌와우, 상과하, 안과밖 -------------------------------------------------------------------------- <진은영 시인 감상>-삶이 끝나지 않는 한, 우린 계속 구두를 신고 있는 건지도---
● 구두를 벗는다는 것은 집에 왔다는 징표. 아파트 복도나 보도블럭에 누워 잠든 취객이 가지런히 벗어놓은 신발을 보면 확실히 그래요. 그런데 삶이 끝나지 않는 한, 우린 계속 구두를 신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강가나 절벽에서 투신한 사람이 덩그러니 벗어놓은 신발을 보면 그래요. 구두를 신고 잠이 드는 일은 어떤가요? 잠 속에서도 걷고 있는 피곤한 기분일지, 혹은 끝없는 도보여행을 즐기는 방랑객의 기분일지? 그 구두는 무쇠구두인지 깃털구두인지? 베를렌느는 랭보를 '바람구두를 신은 사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 구두라면 신고 잠들만 하겠네요. 하얀 발가락들 사이로 미풍이 불어오는 느낌이겠지요. 경쾌해진 그 발걸음이 우리에게도 허락되기를. ------------------------------------------------------------------
<최선옥 시인 감상> -미래의 불확실성에서 오는 불안, 즉 현대인의 불안한 삶과 불안한 사유를 말하고자 한 것은 아닐까. *화자는 옷은커녕 구두조차 벗지 않은 채 잠이 든다. 불편함은 물론 불식간에 닥칠지도 모를 어떤 상황에 대한 불안감이 느껴지지 않는가.
● 시를 장황하게 해석한다는 자체가 의미의 망을 헐겁게 할 때가 있다. 위의 시가 바로 그런 예라 할 수 있겠다. 앞의 행을 반복하며 사건을 나열하고 있는 이 시는 우선 제목만 보아도 어느 정도는 화자의 전달하고자 하는 뜻을 감지할 수 있다.
‘구두를 신고 잠이 들었다’ 라는 제목부터 살펴보자. 우리의 통념으로는 잠자리에 들 때면 편한 옷차림으로 갈아 입고 신발은 물론 양말까지도 다 벗어버리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화자는 옷은커녕 구두조차 벗지 않은 채 잠이 든다. 불편함은 물론 불식간에 닥칠지도 모를 어떤 상황에 대한 불안감이 느껴지지 않는가.
시 곳곳마다 불안감이 조성되고 있어 읽는 이로 하여금 동시에 불안에 들게 한다. 잠든 사이 가로등이 켜지고 달에 눈이 내리고 까마귀가 울고 말들이 썩는다. 서양에서는 까마귀가 길조에 속한다고 하지만 우리의 전통적인 사고에 의하면 까마귀는 어떤 불길한 징조의 상징쯤으로 여겨지는 새이다. ‘까마귀가 운다’ 라는 자체 만으로도 알 수 없는 불안을 느낀다. 게다가 말(언어)들은 썩어 버려지는 것이다.
화자, 즉 시인이 쏟아놓거나 생각하는 말들은 이미 온전한 것이 되지 못하고, 말들이 썩어 버려지는 사이 화자는 구두 위에 구두를 또 신을 뿐이다.강박적으로 되풀이되는 불안, 구두를 신는 사이 겨울이 가고 여름이 오고 지붕들이 날아가고 길들이 사라지고 사람들이 집을 잃고 여름이 죽는다. 화자는 아무것도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한다. 그저 진행되는 상황을 지켜보거나 고작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마지막 행처럼 ‘구두 속에서 나오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그럼 시인은 실체도 불확실한 이런 현상들을 나열하면서 무엇을 말하고자 한 것일까. 바로 미래의 불확실성에서 오는 불안, 즉 현대인의 불안한 삶과 불안한 사유를 말하고자 한 것은 아닐까.
시 자체가 독자를 의식하거나 독자의 사고의 작동을 배려한 흔적은 없다. 남이 아닌 바로 ‘나’ 자신을 중심으로 한 시이기도 하다. 요즘 소위 말하는 실험시의 경향이라고 해야 할까. 그렇지만 시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 전달은 충분히 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