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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 시리아의 종교 분포 지도. 주황색인 수니파가 대부분을 차지, 연두색인 알라위파는 라타키아 근처 바닷가에 분포, 붉은색인 쿠르드족은 터키 국경 지역에 분포, 나머지 드루즈교, 기독교, 이스마일파 (시아파)가 흩어져 있는 모습이다.
1. 개요
2. 배경
2.1. 시리아를 구성하는 주체
2.2. 시리아 내전 이전 역사
3. 경과
3.1. 전선
4. 발생 원인
5. 복잡화 요인
6. 장기화 요인
7. 아사드 정권 붕괴 이전 주요 세력(2011~2024)
7.1. 바트주의 시리아(구 정부 진영)
7.2. 자유 시리아군
7.2.1. 시리아 국민군
7.3.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단체
7.4. 이슬람 근본주의 무장단체
7.5. IS
7.6. 쿠르드족
7.7. 튀르키예군
7.8. 시리아 외 주요 국가
8. 아사드 정권 붕괴 직후 주요 세력(2024~2025)
8.1. 시리아 신정부(구 반군)
8.2. 친아사드 반군(구 정부)
8.3. 드루즈족
8.4.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단체
9. 외국의 개입
9.1. 미국
9.2. 러시아
9.3. 튀르키예
9.4. 이스라엘
9.5. 이란
9.6. 헤즈볼라
10. 오해하기 쉬운 개념들
11. 분석
12. 참상과 난민 사태
13. 관련 문서
14. 둘러보기
1. 개요
2011년 아랍의 봄으로 촉발된 민주화 요구와 정부의 강경 탄압에서 시작된 시리아의 내전이다.
정부군, 반군, 극단주의 세력 간의 복합적인 갈등으로 확산되었고, 러시아와 이란, 튀르키예, 미국 등 외부 세력의 개입으로 국제적 양상을 띠게 되었다. 13년에 걸친 전쟁은 수백만 명의 사상자와 난민을 발생시켰다.
2024년 12월 8일, 하야트 타흐리르 알샴(HTS)이 주도한 반군 연합이 다마스쿠스를 점령하면서 아사드 정권이 붕괴했고, 미국 등 일부 국가가 이를 시리아의 합법 정부로 승인하고 외교 관계를 복원했다. 그러나 신정부의 출범에도 불구하고, 시리아 전역은 여전히 세력 분열과 무력 충돌이 이어지고 있다. 북동부의 쿠르드 자치정부(DAANES)는 신정부와 통합 협정을 맺었으나, 시행 과정에서 무력 충돌이 반복되며 긴장이 해소되지 않고 있다. 북부 일부 지역에서는 시리아 국민군 해체 이후에도 튀르키예의 영향력과 친튀르키예 세력이 강하게 남아 있다. 중부 사막지대에서는 IS 잔존 세력이 게릴라전을 지속하고 있다. 남부 수와이다 지역의 드루즈 공동체 또한 자치권을 요구하며 신정부와 충돌 중이며,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은 드루즈 보호를 명분으로 안보 개입에 나서는 등 혼란이 이어지고 있다.
신정부는 국가 통합과 재건을 시도하고 있으나, 종파·민족·이념 간의 균열은 여전히 봉합되지 않았으며, 이란, 튀르키예, 이스라엘 등 외부 세력의 개입 또한 시리아의 불안정성을 가중시키고 있다.
2. 배경[편집]
2.1. 시리아를 구성하는 주체[편집]
▲ 시리아의 종교 분포 지도. 주황색인 수니파가 대부분을 차지, 연두색인 알라위파는 라타키아 근처 바닷가에 분포, 붉은색인 쿠르드족은 터키 국경 지역에 분포, 나머지 드루즈교, 기독교, 이스마일파 (시아파)가 흩어져 있는 모습이다.
시리아는 중동에 위치한 다민족·다종교 국가로, 다양한 종파와 민족 집단이 복잡한 사회 구조를 이루고 있다. 시리아 내전이 일어나기 전, 시리아의 정체성은 다양한 세력이 갈등과 연대를 통해 형성되었으며, 이러한 갈등은 내전의 원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 아래 표는 시리아 국민을 종파와 민족, 이념·정치를 기준으로 나눈 것이다.
종파
| 세력 | 인구 | 특징 |
| 수니파 | 약 1610만 (74%) | 내전 초기 민주화 시위를 주도한 최대 종파로, 도시 상공인·중산층부터 농촌 농민층, 사막·초원 지대의 베두인 부족과 유목·반유목 공동체까지 다양하게 구성된다. 이념 성향도 세속·온건부터 급진 이슬람주의까지 폭넓으며, 일부는 FSA·온건 반군에, 일부는 알누스라·IS 등 극단주의 세력에 합류했고, 부족·유목 집단은 생존과 자치권 유지를 위해 정부·반군·HTS·IS와 유연하게 동맹과 휴전을 반복했다. 시리아 쿠르드족 다수도 수니파이지만, 아랍 수니파와는 성격이 다르다. 이들은 이슬람보다 세속적 쿠르드 민족주의를 중시하며, 아랍 국가가 아닌 쿠르드 자치·연방을 지향한다.[49] |
| 알라위파 | 약 260만 (12%) | 아사드 정권과 국가 기구의 핵심 지지 기반. 정부군 장교단·정보기관 다수를 차지. 소수종파 보호와 세속주의 유지를 명분으로 내전 내내 정권에 충성. |
| 그리스도교 공동체 | 약 200만 (9% →전쟁 후 2%) | 중립 또는 정부 측 협력 경향. 이슬람주의 세력에 의해 표적이 되자 아사드 정권 지지를 강화. 내전 중 대량 해외 이주. |
| 드루즈 | 약 70만 (3%) | 초기엔 중립과 자치 유지. 2024~2025년 수와이다 자치정부 수립으로 무장 세력으로 급부상. 전통적으로 베두인과 갈등. |
| 시아파[50] | 약 46만 (2%) | 이란·헤즈볼라 지원을 받으며 아사드 정부 측과 협력. 내전 내내 수니파 극단주의 세력의 공격 대상. |
| 기타(야지디·유대인 등) | 수십만 (<1%) | 야지디는 IS의 집단학살·노예화 피해를 가장 크게 입음. 유대인 공동체는 대부분 내전 전후로 해외 이주. |
| 세력 | 인구 | 특징 |
| 아랍인 | 약 1700만 (80~85%) | 국가 주류 민족. 종파·이념에 따라 내전에서 정부군, 반군, 극단주의 세력 등으로 분열. 수니 아랍은 대부분 반군, 알라위·기독교 아랍은 대부분 아사드 정부 지지 |
| 쿠르드족 | 약 230만 (5~10%) | 북부·북동부 거점. YPG/SDF를 기반으로 자치 행정(로자바 체제) 수립. IS·아랍 반군·튀르키예와 충돌. 미국 주도의 대IS 연합군과 협력 |
| 아르메니아인 | 약 20만 (~1%) | 기독교 소수민족으로 주로 도시 거주. 내전 중 안전을 위해 정부 지지, 이슬람주의 세력 피해 우려로 대규모 해외 이주. |
| 아시리아/칼데아인 | 약 20만 (~1%) | 기독교 소수민족으로 하사카·카미슐리 거주. IS·알누스라에게 학살당함. 쿠르드와 일부 협력. |
| 투르크멘 | 약 20만 (~1%) | 수니파 소수민족으로 북부에 집중. 튀르키예의 지원을 받아 SNA 등 반군 세력에 참여. 쿠르드 세력과 자주 충돌. |
| 체르케스 | 수만 명 (<1%) | 내전 장기화로 상당수가 해외 이주. |
| 세력 | 특징 |
| 세속주의 | 아사드 정권과 소수종파(알라위·기독교·드루즈)를 중심으로 안정된 세속국가 지향. 수니파 중에도 세속주의자가 꽤 많다(특히 도시 중산층·지식인층). 이들은 내전에서 아사드 정부군 핵심 축을 형성하거나, 일부는 FSA 등 온건 반군 세력의 기반이 되었다. |
| 온건 이슬람주의 | 무슬림 형제단 계열, 일부 FSA 기반. 샤리아 도입을 지지하지만 선거·의회제 수용. 세속주의자·극단주의 세력 모두와 갈등·협력 병행. |
| 이슬람 근본주의 | 현대 정치 제도보다는 이슬람 초기 공동체의 원형 복귀를 중시. 샤리아의 전면적·엄격한 적용을 지향하나, 무력투쟁이 필수는 아님. 일부는 극단주의와 협력하거나 그 경계가 모호해짐. 시리아 내전에서는 일부 무장단체·종교지도자 집단에서 나타남. |
| 이슬람 극단주의 | IS, 알누스라 등. 엄격한 샤리아 해석과 칼리프 국가 수립 목표. 비무슬림·소수종파·온건 세력까지 적대. 해외 지하디스트 유입. |
| 쿠르드 민족주의 | 쿠르드 민족주의자(쿠르드 인구의 대다수)는 로자바 자치 체제와 SDF를 중심으로 조직되어 IS 격퇴전에서 미국 주도 연합군과 협력했으며, 튀르키예와는 장기적으로 무력 충돌을 이어왔다. 그러나 같은 쿠르드 내부에서도 자치 확대를 목표로 하는 세력과, 종파·이념적 이유로 아사드 정권이나 아랍계 무장세력과 협력하는 세력 간에 갈등과 경쟁이 지속되고 있다. |
| 아랍 민족주의 | 범아랍주의·시리아 영토 보전 강조. 종파 혼합, 반쿠르드·반분리주의 성향. 아사드 정부 측과 반군 측 모두 존재. |
| 지방자치· 연방주의 | 쿠르드, 드루즈 등 중앙집권에 반대하고 지역 자치·연방제 확대를 추구. 종파·민족 정체성과 결합해 독립에 준하는 권한을 요구하거나, 무력으로 자치권을 방어함. |
| 부족주의 | 베두인·농촌·유목민으로 부족 자치와 전통 관습법 유지 우선. 내전 초기엔 반군 가담, 이후 상황에 따라 아사드 정부·반군·HTS와 유동적 동맹. 전통적으로 드루즈와 갈등. |
2.2. 시리아 내전 이전 역사[편집]
기원전 시리아
그리스도교가 들어오기 전의 시리아는 지리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어 여러 제국의 중심지 역할을 하며 다양한 민족과 종교가 공존하는 지역이었다. 이 시기 시리아 내에는 그리스도교, 수니파, 알라위파, 시아파, 쿠르드족이 살지 않았다. 있더라도 소규모 공동체로 산발적으로만 있었다.
1세기 시리아 내 최초의 그리스도교 공동체 형성
예수 그리스도의 사후 시리아 지역에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이슬람이 7세기 중반에 시리아로 확산되기 전까지, 시리아는 주로 그리스도교인들이 다수인 지역이었으며, 그리스도교는 매우 중요한 종교적, 문화적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7세기 시리아 내 최초의 수니파 이슬람의 유입
예언자 무함마드의 사후 강력한 이슬람 군대가 당시 시리아 지역을 통치하던 비잔틴 제국을 크게 무찌르면서 시리아 전역이 이슬람 통치 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초기 이슬람 제국은 "책의 사람들"인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정책을 펼쳤다. 이들은 이슬람으로 개종하지 않더라도, 지즈야(인두세)를 내는 조건으로 자신의 신앙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정책은 그리스도교인들이 새로운 이슬람 통치자를 덜 적대적으로 받아들이는 데 기여했으며, 군사적 저항이 크게 발생하지 않았다.
9세기 시리아 내 최초의 알라위파 이슬람의 유입
알라위파는 시아파의 독특한 분파로, 시리아 서북부의 산악 지대에 자리를 잡았다. 이 지역의 지리적 특성 덕분에 외부 세력의 영향을 비교적 덜 받으며 오랜 기간 독자적인 공동체를 유지할 수 있었다.
10세기 시리아 내 최초의 시아파 이슬람의 유입
10세기 이슬람 세계는 정치적, 종교적으로 분열된 상태였다. 당시 시리아 지역은 시리아 전역을 통치하는 세력이 없었고 지역 왕조들이 각자의 시리아 내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다. 10세기 후반 시아파인 파티마 왕조가 시리아 서부 지역을 침공하기 시작해 시리아 전역으로 영향력을 확장시키면서 시리아 내에 시아파가 유입되었다. 파티마 왕조는 시아파를 국교로 삼았지만, 다른 종파에 대해 관용적이었기 때문에 시리아 내에서 수니파와 시아파 간의 분열은 일어나지 않았고 공존하였다.
16세기 시리아 내 쿠르드족의 본격적인 유입[51]
16세기 이전 쿠르드족은 튀르키예 동부와 이라크 북부를 중심으로 수천년 간 살아왔으며 그들은 이 지역을 '쿠르디스탄'이라고 부른다. 16세기 초 수니파 오스만 제국과 시아파 사파비 제국은 메소포타미아 일대를 두고 여러 차례 전쟁을 벌였고 쿠르디스탄은 전쟁터가 되었다. 오스만 제국은 각 쿠르드 부족에게 자치를 허용하며 그들을 회유하였고 대다수가 수니파인 쿠르드족은 오스만 제국에 협력하여 시아파와 싸웠다. 한편으로는 조금 더 안전지대인 시리아 북부 쪽으로 이동하면서 이 시기 시리아 내 쿠르드족이 엄청 들어와 살게 되었다.
1918년 오스만 제국의 붕괴와 프랑스의 시리아 위임통치
오스만 제국은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면서 붕괴했고, 공식적으로는 1922년에 해체되었다. 이후 오스만 제국의 영토는 여러 승전국들이 분할하였고, 그 중 시리아 지역은 프랑스가 관리하게 되었다. 1920년 7월, 프랑스는 시리아의 민족주의 운동을 억압하고 미살룬 전투에서 시리아인들을 무력으로 제압하면서 시리아를 본격적으로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 후 1923년에 국제 연맹의 공식 승인을 받아 프랑스의 위임통치가 확립되었고, 이는 1946년 시리아가 완전 독립할 때까지 이어졌다.
1920년-1946년 프랑스 식민지 시대
프랑스는 시리아 내 다수파인 수니파를 견제하기 위해 소수파를 알라위파, 드루즈파 등 소수 종파 출신을 군대와 경찰에 적극 채용하는 전략을 썼다. 이로 인해 알라위파는 군대 내에서 점점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었고 이는 독립 이후 알라위파가 시리아군을 장악하고 아사드 정권 수립 이후에는 알라위파가 기득권층으로 올라서는데 주요한 역할을 한다.
1946년 시리아 독립
프랑스 군대는 시리아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1950년대 정치적 혼란기
독립 후, 시리아는 군부, 여러 정치 세력 간에 민족적, 종교적 갈등으로 엄청난 정치적 혼란에 빠졌다. 이 시기 동안 시리아는 4번의 군사 쿠데타가 있었다.
1958년-1961년 시리아와 이집트의 통합(아랍 연합 공화국)
1958년, 시리아는 이집트와 함께 '아랍 연합 공화국'을 결성하였으나[52], 이 연방은 3년 만인 1961년 무너졌다.[53] 시리아는 다시 독립국가로 돌아갔다.[54]
1963년 바트당 쿠데타로 하페즈 알아사드의 정권 장악
1963년, 시리아에서는 바트당(Ba'ath Party)이 군사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한다. 1966년, 하페즈 알아사드는 바트당 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정치적 기반을 다지기 시작했다. 그는 1970년 '백색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하고 시리아의 대통령이 된다.
1982년, 하마 학살
시리아 내 다수 민족인 수니파는 정치적 권력이 알라위파에 집중되어 있는 것에 불만을 품고 무슬림 형제단(Muslim Brotherhood)을 중심으로 반정부 운동을 이끌어낸다. 하페즈 알아사드는 군을 동원해 하마를 완전히 파괴하면서 민간인 약 2만 명이 사망하였고 이 사건으로 시리아 내 수니파와 알라위파 간의 갈등은 더욱 심화되었으며 시리아 내 정치적 불안이 악화되었다.
2000년,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 취임
2000년, 하페즈 알아사드가 사망하면서 그의 아들인 바샤르 알아사드가 대통령에 취임한다. 그는 민주주의를 약속하고 개혁적인 이미지를 내세우며 많은 기대를 받았지만, 실제로는 대통령 직을 수행하면서 정치적 반대파 억압과 권위주의적 통치로 돌아섰다.
아랍의 봄
2010년 12월, 튀니지에서 반정부 시위가 시작되었다. 이 시위는 결국 자이르 벤 알리 대통령의 축출로 이어졌다. 이후 이집트와 리비아 등 다른 아랍 국가들도 튀니지 혁명에 영향을 받아 대규모 시위를 벌였고, 무바라크 대통령이 이집트에서 물러나는 결과를 낳았다. 리비아에서는 카다피 정권에 대한 시위가 폭력적인 내전으로 발전하면서 국제적인 군사 개입을 초래했다.
2011년, 시리아 내전 발발
2011년, 시리아 역시 아랍의 봄의 영향으로 인해 시리아 전역에서 대규모 시위와 반정부 운동이 일어났다.
3. 경과[편집]
자세한 내용은 시리아 내전/경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1. 전선[편집]
자세한 내용은 시리아 내전/전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발생 원인[편집]
자세한 내용은 시리아 민주화 운동/원인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정치적 억압과 알라위파 위주의 독재 체제
시리아는 수니파가 인구의 약 70%를 차지하지만, 소수 종파인 알라위파가 권력의 중심에 있다. 이는 프랑스 식민지 시절(시리아-레바논)부터 형성된 구조적 불평등 때문이다. 당시 프랑스는 알라위파를 군과 행정 요직에 임명하며 소수 지배 체제를 강화했고, 이 체제가 독립 이후에도 유지되었다. 알라위파는 군사와 정치권을 장악해왔으며, 하페즈 알아사드와 바샤르 알아사드 부자의 독재 통치로 이어졌다. 알라위파는 석유, 군사, 행정과 같은 주요 산업을 통제한 반면, 수니파는 농업과 저소득 직종에 몰려 있다.[55] 수니파는 정치적 배제와 경제적 차별로 인해 불만을 품었다. 이로 인해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되었고, 이는 종교와 민족적 갈등으로 연결되었다.
아랍의 봄, 강경 진압과 반정부군의 형성
2010년대 초, 튀니지에서 시작된 '아랍의 봄'은 중동과 북아프리카 전역으로 확산되며 독재 정권에 대한 저항과 민주화 요구를 불러일으켰다. 시리아에서도 2011년 남부 다라에서 발생한 반정부 낙서 사건을 계기로 정치 개혁과 부패 척결을 요구하는 평화적 시위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정부는 이를 체제 위협으로 간주해 실탄 발포와 대규모 체포 등 강경 진압으로 대응했고, 이 과정에서 군 내부 일부 장교와 병사들이 발포 명령을 거부하거나 탈영하면서 무장 반정부 세력인 자유 시리아군이 결성되었다. 이로써 갈등은 단순한 시위 진압 국면을 넘어 정부군과 반군 간의 무장 충돌로 성격이 변화했으며, 각 지역의 시민들 또한 자위 목적의 무장과 지역 민병대 조직에 나서면서 충돌은 전국적 내전으로 확대되었다.
5. 복잡화 요인[편집]
시리아 내전은 처음에는 정부군과 반정부 세력 간의 충돌로 시작되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반군 진영의 구도 변화, 쿠르드 세력의 부상, 이슬람 극단주의 조직의 등장, 그리고 주변국의 개입이 겹치며 다자 간 충돌 구조로 변모하였다.
시리아 반군의 시리아 북부 및 동부 지역 진출
시리아 내전 초기 반정부 세력은 탈영병과 시민 무장 세력을 중심으로 결성된 자유시리아군(FSA)이 주축이었다. 이들은 남부의 도시 다라, 중부 지역의 홈스, 수도 다마스쿠스 외곽 동구타 등지에서 정부군에 맞섰다. 반군은 계속해서 비대해져 가는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 지속적인 자원과 물자 보급이 필요했는데 시리아 남부와 중부지역에는 반군을 충분히 보급할 자원, 물자, 식량이 부족한 환경이다. 서부 해안 도시와 수도 다마스쿠스 중심부는 아사드 정권의 지지 기반이 강한 지역이고, 정부군이 강력히 통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시리아 반군이 진입할 수 없었다. 시리아 북부는 정부군의 영향력이 약한 지역이고, 튀르키예는 시리아 반군을 지원했기 때문에 반군이 시리아 북부 지역으로 이동하면 튀르키예로부터 보급과 물자를 수월하게 지원받을 수 있다. 또한 시리아 동부에는 데이르 에조르 주를 중심으로 넓은 유전 지대가 있어 반군이 시리아 동부를 확보한다면 이 유전 지대를 발판 삼아 재정적 기반을 강화할 수 있었다.[56] 반군의 활동 범위가 남부에서 북부·동부로 확장되면서 전선은 전국적으로 분산되었다. 정부군과 반군의 대립은 특정 도시나 지역에 국한되지 않고 여러 지역에서 동시에 벌어지는 구조로 바뀌었다.
이슬람주의 무장단체의 부상
한편 반군 진영 내부에서도 변화가 나타났다. 이라크의 지하디스트 네트워크에서 파생된 알누스라 전선은 시리아 북부, 특히 이들리브와 알레포 농촌 지역에서 빠르게 활동 범위를 넓혔다. 이와 함께 아흐라르 알샴 등 이슬람주의 성향의 무장단체들도 북부 전선에서 존재감을 키워갔다. 이들 단체는 전투 경험이 있는 인물들을 중심으로 조직을 갖추고 있었고, 주요 전선에 지속적으로 참여하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북부 일부 지역에서는 자유시리아군(FSA)과 이슬람주의 단체가 같은 지역에서 활동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일부 전선에서는 협력하기도 했으나, 지역을 누가 어떻게 운영할지를 두고 갈등도 이어졌다. FSA 계열이 주로 정권 교체와 정치 개혁을 목표로 삼은 반면, 이슬람주의 단체들은 이슬람 율법에 기반한 통치 체제를 지향했다. 이러한 목표 차이는 행정 운영 방식과 지역 통제 문제를 둘러싼 갈등으로 이어졌고, 지역에 따라서는 무력 충돌로 나타나기도 했다. 그 결과 반군은 단일한 세력으로 보기 어려운 상태가 되었고, 전선은 단순한 정부 대 반군 구도를 넘어 여러 세력이 얽힌 형태로 바뀌었다.
시리아 북부에서 반군과 쿠르드족 간의 충돌
2012~2014년 내전 초기 시리아 북부 전선은 오늘날과 같은 '북서부는 반군, 북동부는 쿠르드족'이라는 분할 구도가 형성되기 이전의 상태였다. 내전 초기 쿠르드족의 주요 거주지는 아프린, 코바니, 하사카 세 곳을 중심으로 여기저기 흩어진 점 형태였고, 쿠르드족은 분산된 거주지들을 연결해 시리아 북부에 광범위한 쿠르드족 자치 구역을 구축하고자 했다. 반면 반군에게 코바니와 아프린은 튀르키예 국경으로 이어지는 보급 통로였기에 반드시 확보해야 할 지역이었다. 시리아 반군과 쿠르드족은 시리아 정부군에 반대하는 공통의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내전 초기 두 세력은 연합이나 협력 가능성이 있었다.[57] 실제로 반군이 시리아 북부로 처음 올라왔을 때 양측은 서로 간의 충돌을 피하고 탐색하며 상호불간섭적인 태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쿠르드족은 시리아 내전이 장기화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시리아 정부군의 힘이 약해진 이 기회를 살려 독립적인 자치권을 확보하는데 집중했으며, 자신들이 통제하는 지역에서 반군의 군사활동이나 이해관계에 휘말리는 것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반군 역시 거대한 세력을 장기간 유지하기 위해 북부지역을 튀르키예 국경 보급 통로로 확보할 필요가 있었고, 한동안 튀르키예로부터 물자 지원을 받아왔다. 다만 여기에는 조건이 걸려 있었다. 튀르키예는 시리아 반군에게 물자 지원을 해주는 대가로 쿠르드족을 억제하거나 공격할 것을 요구했다.[58] 결국 시간이 지나며 북부 지역에서 영토와 영향력을 둘러싼 긴장이 고조되었고, 쿠르드족이 자치구역을 확장하며 독립적인 입장을 고수하자, 반군과 쿠르드족 간의 충돌이 빈번해지면서 서로 간에 적대적인 교전이 발생했다.
2014년 ISIS의 등장
2014년경 ISIS가 시리아에 진입하여 영토 장악을 시도하면서, 내전 구도는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당시 ISIS는 이라크 북부 모술을 점령하면서 '이슬람 칼리프국'을 선포했다. 이후 다양한 언어로 된 선전 영상으로 인터넷과 소셜 미디어를 통해 전세계 수니파 이슬람 지지자들에게 합류를 독려했다. 이 메시지를 본 수많은 외국인 전투원이 유럽, 러시아, 아프리카 등 각지에서 튀르키예를 경유해 시리아와 이라크로 이동하였다.[59] ISIS의 목표는 이라크를 넘어서 광범위한 지역에 이슬람 제국을 건설하는 것이었고, 시리아의 혼란스러운 상황이 자신들에게 세력을 넓힐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하였다.[60] 또한 시리아 북부 방향으로 진격할수록 튀르키예를 경유해 ISIS에 합류하려는 외국인 전투원들을 받기 수월해진다.[61] 수많은 외국인 전투원을 흡수하고 거대해진 ISIS는 전력을 유지하고 확장하는 데 필요한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시리아 동부의 유전지대를 점령하였다. ISIS는 유전지대에서 생산된 석유를 밀수하거나 암시장에서 판매해 막대한 자금을 마련했고, 이를 통해 무기와 물자를 확보하면서 전력을 유지하고 세력을 확대할 수 있었다. 당시 쿠르드족은 초기 ISIS의 급속한 진격을 방어할 준비가 되지 않아 유전지대를 방어하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내주었다.[62] 시리아 반군은 정부군과의 전투에 많은 자원을 집중하고 있었고, 이런 상황에서 ISIS와 전면전을 감당할 여력이 없었다. 또한 반군은 조직이 파편화되었기 때문에 동부 유전지대 방어를 효율적으로 할 수 없었다. 결국 기존의 시리아 정부군과 반군 간의 대립에 더해 ISIS가 정부군, 반군, 쿠르드족 등 모든 세력과 충돌하면서 각 세력의 이해관계가 더욱 얽히고 다자간 충돌이 일어났다.
2019년 튀르키예의 쿠르드족 침공
튀르키예의 쿠르드족 침공으로 인해, 기존의 전투 구도에 튀르키예와 쿠르드족 간의 새로운 전선이 추가되었다. 쿠르드족은 미국을 비롯한 서방 세력의 지원을 받으며 ISIS에 대항해 왔는데, 튀르키예의 침공으로 미국과 튀르키예의 갈등이 발생했고, 러시아와의 관계도 복잡해졌다. 각국의 이해관계가 더욱 얽히면서 내전은 국제적 갈등 양상으로 확산되었다.
6. 장기화 요인[편집]
그리스도교와 시아파 등 소수파들의 아사드 정권 협력
그리스도교와 시아파 등의 소수파가 정부군에 협력한 배경에는 정권 교체 이후 자신들의 안전과 지위가 불안정해질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다. 그들은 시리아 반군이 주장하는 민주주의가 서방세계 민주주의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리라고 보았다. 시리아 반군은 여러 파벌로 구성되었고, 각 파벌에게는 독자적인 이념과 목표가 있다. 특정 파벌이 권력을 잡으면, 민주적 권력이 시리아 국민 전체로 분산되기보다는 특정 세력에 집중될 가능성이 크다. 서방 민주주의는 종교적 중립성과 사상, 표현의 자유를 중시하지만, 시리아 반군 내 일부 세력은 이슬람 원리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종교적 이념을 강화하려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종교의 자유나 사상, 표현의 자유가 서방 민주주의처럼 보장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정권 교체 후 수니파 극단주의 단체가 득세할 경우 종교적 탄압이나 소외를 겪을 것이라 우려했고 결국 종교적 소수파들은 정부군을 지지하였다. 아사드 정권이 무너지는 순간 소수인 드루즈, 알라위, 동방 정교회, 야지디[63], 시아파 계열은 자기들은 다 죽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심지어 정부군에 협력한 세력 중에는 극단주의에 반대하는 세속주의 성향의 수니파도 있었다. 이들의 협력으로 정부군은 반군을 상대할 병력과 지원을 얻을 수 있었다.
중동 지역 국가들의 개입
시리아 내전이 격화되면서 중동 지역 국가들도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개입하였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카타르 등 수니파 국가들은 반정부 진영 일부 세력을 재정적으로 지원하였고, 튀르키예 역시 북부 지역에서 반군을 후원하며 자국 국경 인접 지역에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다.# 그 외 카타르 등의 군소 수니파 국가들도 알 자지라의 인기와 저명도를 무기 삼아 수니파 반군의 투쟁을 미화하고 홍보하는 데 전력을 다했다. 반면 이란은 아사드 정권을 지지하며 혁명수비대(IRGC)를 파견했고, 레바논의 헤즈볼라를 비롯한 친이란 시아파 민병대들도 정부군과 함께 전투에 참여하였다. 특히 헤즈볼라는 주요 전투에서 정부군과 협력해 반군을 상대로 싸웠다. 이처럼 중동 국가들이 서로 다른 세력을 지원하면서 정부군과 반군 모두 외부 지원을 통해 전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 결과 결정적인 승패가 나지 않은 채 교착 상태가 이어졌다.
서방 국가들과 러시아의 개입
미국, 러시아를 비롯해 프랑스와 영국 등 서방 국가들도 군사적으로 개입하였다. 러시아는 공군력을 투입해 정부군을 지원했고, 이는 아사드 정권의 붕괴를 막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한편 미국과 서방 국가는 주로 IS 격퇴 작전에 참여하며 쿠르드 주도의 시리아민주군(SDF)을 지원하였다. 그 결과 쿠르드 세력은 북동부 지역을 장악하게 되었고, 시리아는 정부군·반정부군·쿠르드 세력이 각기 영역을 나누어 존재하는 구도가 굳어졌다. 이러한 국제적 개입은 분할된 전선을 고착시켰고, 전쟁은 쉽게 마무리되지 못했다.
평화 협상의 실패
여러 차례 평화 협상이 시도되었지만, 각 세력이 타협을 이루지 못해 협상이 실패했다. 시리아 반군은 아사드 대통령이 퇴진하고 아사드 정권이 억류한 수니파 정치범들을 석방해야만 협상할 수 있다고 밝혔다. 시리아 정부는 반군에게 정권을 내주면 알라위파 및 소수 종파에 대한 보복과 탄압이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또한 수니파 정치범들은 ISIS와 같은 극단주의 테러리스트이기 때문에 절대 석방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결국 서로의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한 채 평화 협상은 결렬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