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리랑고개 최 건 차
부산 영도 아리랑고개는 봉래동 한진조선소 앞에서 청학동으로 넘어 다니는 가파른 고갯길이다. 조선 시대는 나라에서 쓰는 말들을 기르고 훈련을 시키는 ‘국마장國馬場’이 있었다고 한다. 그곳에서 조련되는 말들이 어찌나 빠르게 달리던지 마치 그림자가 끊어질 듯하게 보인다고 해서 ‘절영도絶影島’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1881년부터는 태종대 앞 ‘중리(한국해양대학교가 시작된 곳)’라는 곳에 수군 절영도진絶影島津이 생겼고 해변에 사람이 모여 살기 시작했다. 그곳에 사는 주민들이 바닷고기를 잡아 팔려고 넘어 다녔던 고갯길이 지금의 아리랑고개다. 더불어 북한 피난민들과 함께 내 소년 시절의 고달픔과 시련이 서려 있는 고갯길이기도 하다.
초등학교 졸업 후 영도에서 살던 1953년, 선망했던 K중학교에 진학을 못하게 되었다. 1년을 더 기다리는 동안 학비를 벌려고 여름에 아이스케키 장사를 시작했다. 시내의 자리가 좋은 곳은 체구가 크고 장사에 이력이 붙은 이들의 몫이어서, 어리고 초보자인 나는 끼어들 수가 없어 변두리로 밀려다녔다. 그들이 100개 이상을 가지고 나가 팔 때면 나는 30∼40개 정도를 받아서 시장 뒷골목으로 해서 산동네를 돌아다니다가 아리랑고개를 넘어 청학동 피난민촌을 찾아다니게 되었다. 미군용 천막들만 즐비해 있는 그곳에서는 나를 견제하거나 경쟁하려 드는 자가 없었고, 어린 학생이 참 부지런하다고 알아주는 이들이 있어 마음에 위로가 되었다. 더욱이 내가 오기를 기다리는 단골도 생겨 한 번에 보통 20개 정도를 쉽게 팔 수가 있어 낮에는 두어 번, 밤에도 한 차례씩 팔러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고개를 넘어오다가 으슥한 곳에서 불량배들과 마주쳤다. 돈과 아이스케키를 뺏기지 않으려고 저항하다가 두들겨 맞고, 한 개를 팔면 300환이 남는데 십여 개를 빼앗겨 버렸다.
봉래산자락 아리랑고개 남항 쪽으로는 토담 판자집이 즐비한 신선동이었다. 우리 집은 신선동 3가였는데, 바람이 심한 곳이라 돌담이 많았고 꾸불꾸불한 길가 모퉁이에는 채소밭 거름으로 쓰려고 인분을 모아둔 웅덩이가 군데군데 있었다. 상하수도는 물론 석유 등을 켜던 시절이라 밤이면 사방이 캄캄하여 술 취한 사람들과 나쁜 사람들 그리고 담이 허술해서 인분이 넘치는 웅덩이를 조심해 다녀야 했다. 어느 날 밤은 아리랑고개를 넘어 천막촌에 갔다가 절반도 못 팔고 돌아오게 되었다. 그 시절에는 ‘중고부’라고 했던 조선소 앞을 막 지나려는데 담 너머에서 아이스케키 열 개를 달라는 이가 있어 넘겨주고 1만 환을 받았다. 기분이 좋아 지폐를 밝은 곳에서 펴보니 교묘하게 물감으로 그린 가짜 돈이었다. 하룻밤 장사를 공치게 된 것 같아 어떻게 해서든 써먹어 볼 방법을 궁리하다가 그냥 찢어버리고 말았다.
집에 들어가 못된 놈들에게 당했다는 말을 하지 않고 더 열심히 팔러 다녔다. 영도에는 우체국과 은행이 없고 예금할 방법이 없었다. 어쨌든 하루하루 번 돈을 집에 들여놓지 않고 내 방법으로 모아봐야겠다는 생각에 집중하고 있었다. 마침 합천에서 온 등치가 큰 청년이 나랑 같이 장사를 시작했는데, 그만두고 공장에서 먹고 자면서 아이스케키 만드는 일을 하게 되었다. 그가 한동안 나와 친한 말동무가 되어주었기에 믿을 수 있다 싶어 매일 번 돈을 그에게 꼬박꼬박 맡겨 두었다.
어깨뼈가 으스러지도록 무거운 통을 매고 다니고 있는데 추석이 지나자 아이스케키를 찾는 사람이 줄어들었다. 장사를 그만두어야 했기에 청년에게 맡겨 둔 돈을 달라고 했다. 그런데 그가 태도를 확 바꾸며 위협적인 자세로 다 써버리고 없다고 배짱을 부렸다. 돈을 맡겼다는 증서나 내세울 증인이 없어 억울하고 분해 그 자식을 어떻게든 죽여야겠다는 생각이었다. 허탈해서 치를 떨다가 문득 일본에서 귀국했을 때의 유년 시절이 생각났다. 동네 애들에게 놀림을 당하고 얻어맞고 들어올 때면 ‘얘야 너를 놀리고 때린 애들은 밤에 웅크리고 잔단다. 그렇지만 얻어맞고 온 너는 발을 쭉 뻗고 잘 수 있다’라고 위로해 주시던 어머니의 말씀이 생각났다. 마음과 정신에 심한 상처를 입었지만, 몸을 다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이듬해 희망했던 중학교를 포기하고 미션계 ‘덕원중학교’로 진학하게 되었다. 등교하면 먼저 기도회 시간을 갖고 매 주일 한 시간씩은 교목으로부터 성경을 재미있게 배웠다. 그리고 학교의 방침에 따라 일요일에는 교회를 정하고 예배를 드렸다는 담임목사님의 확인을 받아 교목에게 제출해야 했다. 나는 1학년 3반 급장이어서 학교의 지시를 따르려 했다. 지금도 그곳에 있는 ‘명신교회’를 이웃 또래의 소개로 찾았다. 교회가 맘에 들어 학생면려회와 주일학교 반사가 되어 열심히 다녔다.
서울로 이사한 후 삼양동 개척세대로 살게 되면서 교회 생활을 더 잘하게 됐다. 삶의 향방도 천국에 소망을 두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이 믿어져 실천하며 가르치는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하지만 가끔은 아이스케키 통을 메고 넘어 다녔던 영도 아리랑고개가 생각나 마음은 벌써 부산에 가 있곤 한다. 영도다리를 건너 명신교회를 둘러보고 봉래동에서 청학동으로 가는 아리랑고개로 달려간다. 2025.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