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을 위한 행진곡의 유래]
(김필재, 2015년 5월 14일 작성)
범민련 등 좌파단체는 자신들이 주최한 행사에서
‘호국선열’ 및 ‘호국영령’에 대한 묵념을 하지 않는다.
대신에 ‘민주열사에 대한 묵념’, ‘국민의례’를 대체한 ‘민중의례’,
‘애국가’를 대체한 민중가요(임을 위한 행진곡)를 부르면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貶毁(폄훼)해 왔다.
이 가운데 <임을 위한 행진곡>은
1980년 12월 작곡된 민중가요로 광주사태 주동자인 윤상원을
기린 노래로 알려져 있다.
백기완의 詩(제목: 묏비나리)에서 歌詞(가사)를 따와
황석영(소설가, 前 범민련 대변인)이 作詞(작사)를 하고,
김종률(1980년 대학가요제 은상 수상자)이 作曲(작곡)을 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의 작사자인 황석영은
1989년~1991년 기간 동안 다섯 차례에 걸쳐 입북하고,
일곱 차례에 걸쳐 김일성을 만났던 인물이다.
황씨는 독일에서 체류하다 1993년 한국으로 돌아온 뒤
수감(징역 7년형)되어 1998년 대통령 특사로 풀려났다.
아래는 당시 황석영의 범민련 활동을 다룬
1993년 8월호 <월간조선> 보도이다.
<黃씨가 서울을 떠난 것은 1989년 2월28일이었다.
소설 《무기의 그늘》 일본어판 출판기념회에 참석하려고
일본에 간 그는 이토 나리히코 교수와 일본 사회당 위원장
도이 다카코에게 부탁하여 3월16일 북한 ‘조선문학예술 총동맹’
백인준 위원장(범민련 북측 의장) 명의의 초청장을 받았다.
북경을 거쳐 3월20일 평양 순안비행장에 도착한 黃씨는
세 차례 김일성을 만났는데 한번은 文益煥(문익환)씨와 함께
金日成(김일성)을 만나기도 했다.
이때 金日成은 “黃동무의 소설 《장길산》을 읽어보았는데
재간이 대단하더라. 앞으로 통일의 역군이 되어 달라”는
말을 하였다 한다. (중략)
1989년 9월 독일 체류 중이던 黃씨는 북한에 있는 이모
전경숙이 사망했다는 연락을 받고 다시 평양에 갔다.
이모의 장례식과 평양에서 개최된 윤이상 음악회 등에 참석한
그는 10월 독일로 돌아왔다.
1990년 4월18일에는 黃씨의 처 김명숙씨(39)와 아들이
독일로 출국, 黃씨와 합류했다.
1990년 8월2일 그는 가족을 데리고 범민족대회의 남측대표
자격으로 세 번째로 입북하였다.
8월13일엔 백두산에서 열린 ‘범민족대회 개막식 겸
백두·한라 대행진 출정식’에 참가했으며 다음날엔
金日成경기장에서 열린 ‘범민족대회 대표단 환영 평양시
군중집회’에 참석, “조국의 허리에 채워진 철쇠의 상징고리
판문점을 넘어 대행진을 하자. 반제 자주화, 반파쇼 민주화,
조국의 평화통일 만세”라고 연설하였다.
8월15일 판문점 북측 통일각에 온 그는
“강철같이 단결하여 한줌도 안 되는 매국노와 외세를 몰아내자”라고
주장했다. 8월19일 범민련 출범식에서 대변인에 임명된
黃씨는 범민련 출범을 공식선언하였다.
그가 독일로 돌아온 것은 8월29일이었다.
1990년 12월6일 네 번째로 북한을 방문하고 1991년 1월에는
허리 디스크 치료를 명목으로 부인과 함께 다섯 번째로
북한을 방문하였다.…(중략) 또 ‘4·15창작단’에서 집필한
金日成 80돌 기념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1,2권 원고를 감수했다.
다섯 번째 입북에서 黃씨는 金日成을 두 차례 만났다.
이때 黃씨가 미국으로 가려고 한다는 것을 안 金日成은
“黃동무는 조국통일의 보배이니 미국에 가지 말고
물 좋은 조선에서 나의 회고록 집필을 도와주고 치료나 하며
살면 어떻겠느냐고”고 권유하였으나 완곡하게 거절하였다 한다.
1991년 5월 그는 4개월간의 체북(滯北)생활을 마치고
독일로 돌아왔다. 黃씨는 1991년 6월29일부터 이틀간 열린
‘범민련 해외본부 의장단 회의 및 1991년도 범민족대회
준비회의’에 맞춰 독일에 있던 전대협 소속의 성용승군과
박성희양을 만나 이들을 환영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1991년 11월15일 미국 뉴욕으로 옮겨간 黃씨는
잠시 범민련 활동을 중단하고 6·25전쟁시의 소위
‘신천대학살’을 집필하고 계간지 <남·북·해외>의 발간을 추진하였다.
1992년 12월 중순엔 유엔 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에 온 북한 통일전선부 부부장 한시해로부터
미화 25만 달러(약2억원)를 받았다.
올해(1993년) 출범한 김영삼 정부가 보안법 위반사범들에
대한 특별사면을 단행하자 ‘민족문학작가회의’ 등이
黃씨의 귀국을 추진하면서 ‘정부의 사전보장 없이도 귀국할
것인가’ 등을 묻는 공개질의서를 黃씨에게 보냈다.
黃씨는 ‘남북정상회담의 물밑 대화 역할을 하고 싶다’는
식의 요지를 전해왔다고 한다.
마침내 뜻을 굳힌 黃씨는 金日成에게 ‘민족문학의 길에
다시 서기 위하여 귀국을 택하였다’는 요지의 편지를 보냈다 한다.
黃씨는 귀국에 앞서 북한 유엔대표부의 주동진에게
11만 달러를 돌려주었다 한다.
“정전 협정은 평화협정으로 바꿔야 한다”,
“북한의 핵사찰 거부는 자주권의 발동이다”,
“나는 구시대의 유물인 보안법의 마지막 피의자가
되어야 한다”는 등의 귀국성명서를 발표하고 지난 4월27일 귀국하였다.>
백기완 “박근혜 정부를 타도해야”
‘임을 위한 행진곡’의 또 다른 작사자인 백기완은
1964년 韓日협정반대운동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1970∼1980년대 운동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이다.
1974년 ‘유신헌법철폐 100만 명 서명운동’을 주도해
구속되어 이듬해 형집행정지로 석방됐다.
1979년에는 ‘YMCA위장결혼 사건’에 연루되어 계엄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1972∼1980년 백범사상연구소 소장,
1984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을 지냈으며
1992년 대선에 무소속후보로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백씨는 <미디어오늘>과의 인터뷰(2012년 5월16일자 보도)에서
아래와 같이 ‘임을 위한 행진곡’을 언급하며 자신이
“박근혜 정부를 타도해야 한다고 굳게 믿고 싸우는 사람”이라고 밝혔다.
<▲백기완: “노랫말에 나오잖아. ‘임을 위한 행진곡’에
나오잖아. 산자여 따르라고. 내가 40㎏로 떨어져 감옥에서
죽어가면서 나는 죽지만 산자는 따르라는 거야.
그게 임을 위한 행진곡 마지막이야.
그 끔찍한 분단 악독 독재를 다 합친 것보다
이명박 분단 억압 독재가 더 악질이고 더 반동이야.
난 깜짝 놀랐어. 선거라고 하는 완만한 형식을 가지고서
나타난 정권이 이렇게 악독하고 反민주적이고 反민중적이고
反진보적인 정권이 나타나리라고는 꿈에도 몰랐어.
아무리 한나라당이라도 눈치는 볼 줄 알았는데
눈치도 안 보는 놈들이야. 이명박 정권은 타도를 해야 해.
이명박 정권의 그 잘못된 점을 그대로 이어받은 박근혜
연장되는 정권연장 음모를 타도해야 한다고 나는 굳게 믿고
싸우고 있는 사람이야.”
△미디어오늘: 박근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이 당 이름도
바꾸고 우리는 과거와 단절했다고 주장하는데
박근혜 위원장과 이명박 대통령이 다르다고 보나.
▲백기완: “거짓말이야, 똑같아. 당명을 바꿨다고 해서
정치·경제적인 여러 내용이 바뀌는 게 아니잖아.
이명박의 정치조직이었던 한나라당이 그대로 박근혜 정당으로
들어갔으니깐 이명박의 부패가 박근혜의 부패고 이명박 타도는
바로 박근혜 타도이지, 똑같은 거여.”>
[이명박 정부, 공무원의 '민중의례 금지' 공문 발송]
행정안전부(이하 행안부)는 공무원 노조가 각종 행사에서
‘국민의례’ 대신 ‘민중의례’를 실시하고 있어 공무원의
품위를 손상시키고 있다는 지적에 따라, 이러한 행위를
금지하는 공문을 각급 기관에 통보(2009년 10월) 했다.
당시 행안부는 “공무원이 주먹을 쥔 채 민중가요를 부르고
대정부 투쟁의식을 고취하는 이러한 행위는 헌법의
기본질서를 훼손하는 행위로서 국민전체에 대한 봉사자 신분인
공무원의 품위를 크게 손상시켜 국가공무원법 제63조 및
지방공무원법 제55조의 공무원 품위유지 의무에 위반된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정부는 나라 사랑하는 마음의 확산을 위해
각종 행사(운동경기, 시민축제 등)에서 국민의례의 시행을
권장하고 있는데, 정작 솔선수범해야 할 공무원이
국민의례 대신 민중의례를 하는 것은 공무원으로서의
기본자세에 문제”라고 밝혔다.
행안부는 이에 따라 각급기관이 소속 전 직원에게
이러한 내용을 전달하고, 민중의례를 실시하는 경우에는
관련자를 엄중 조치토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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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재님의 글 펌)
●'임을 위한 행진곡'은
'김일성'을 위한 행진곡,
종북 반역자들의 '반체제 혁명가요'이다!
(링크 보세요)
https://t.co/zYDWJsgwC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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