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정체성 논란에 대해서는 '케케묵은 색깔론'이라고 잘도 떠드면서
(난 색깔론이란 말에 왜 정색을 해야 하는 지 모르겠다.
그래..니 색깔이 의심스럽다. 제대로 알고 싶은데 그럼 안되냐?)
친일문제는 뒤져야 한다는 열린우리당.
정작 일본에 가서는 친일청산 문제는 국내용이니 안심하시라-_-면서
도대체 이나라가 어찌 가는가?
김선일씨 목자른 테러리스트는 '자기 나라 지키려는 우리 독립군과 같은
사람들이니 이해'하고
그거 내버려둔 외교관은 죽일놈, 파병하는 정부는 전범이고 죽일놈.
기습공격으로6/25 일으킨 북한과 인민군은 뭐..어물어물..넘어가고
빨치산을 정식 인민군 취급안해주고 포로대접 안해준 우리나라
정부는 전쟁범죄자.
일제 식민지 시대에 우리를 수탈한 일본놈들은 외교의 파트너이고
그 때 식민지 시대에 공직자였거나 군인이였던 천하의
친일파 놈들은 다 색출해서 죽여야할 놈들.
(..6/25때 공산군에서 부역한 사람들은 '어쩔수 없이
가담했는데 좀더 가담한게 무슨 문제냐, 시대의 아픔으로 봐달라'
이고..뭐 물론 자기 장인이니까 그렇겠지만.)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가?
노무현 장인의 6/25당시 행적(양민학살주도)에 대한 기사가
있기에 올려 본다. 뭐 물론 니들이 욕하는 언론에서 나온거다.
노무현 따까리 경향신문 한겨레 KBS MBC에서야 나올 턱이 없잖어?
과거사 청산 좋은데 이왕이면 가까운데서부터 차근차근 밟아 올라가기
바란다.
그리고 박정희가 일본군 장교였다고 친일파라고 박근혜 욕하는 자들아
노무현 장인이 인민위원장이었다는 데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내가 이걸 가지고 '이놈도 잘못했으니 이놈은 잘못아니다'란 얘기를
하고싶진 않다. 다만 '여기에 대해서 니들 생각은 어떠냐?' 란 것이
궁금하다는 것이다.
학살당한 유족들이 盧武鉉·權良淑 부부에게 보내는 공개 편지
가족 대표집필·卞 在 奐 경제학 박사
1947년 경남 창원군 진전면 출생. 마산高·서울大 약학과 졸업. 워싱턴주립大 경제학 박사. 뉴욕시립大 교수, 충남대 교수 역임.
50여 년 전에 경남 창원군 진전면에서 토착 좌익들이 인민군의 비호 아래 11명의 양민을 학살한 사건이 최근 왜곡 보도되고 있다. 李仁濟 민주당 대통령 경선후보 측에서 盧武鉉 후보 장인의 좌익활동을 거론하고부터 장인 權五晳의 친족, 함께 좌익활동을 했던 사람들, 盧武鉉 후보 자신과 부인 權良淑씨, 盧후보의 여성특보 이은희 등이 사건의 전말을 축소, 왜곡하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 6¡25 당시 좌익들에 의해 무참히 학살당한 양민의 유족들은 이에 분노가 폭발하여 50년 간 묻어 두었던 아픈 상처를 들추어내서라도 사건의 진상을 밝혀 故人들의 넋을 조금이라도 위로해야겠다고 마음먹게 되었다.
이 글은, 6¡25 때 인민군이 우리 마을을 점령하기 전까지, 盧武鉉 후보의 장인 權五晳씨 등에 의해 학살된 卞百燮 면장의 사랑을 받고 자란 조카인 필자가 사건 당시 함께 학살된 양민 유족들의 뜻을 모아 쓴 글이다.
분노로 잠 못 이루는 밤
아무리 극악한 사건이라도 법의 심판을 받고 세월이 지나면 피해자이든 가해자이든 법의 판결을 수용하고 잊어버리면서 상처가 아문다. 그러나 그 사건이 재론될 때, 비록 5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하더라도, 가해자 측이 의도적으로 죄를 부정하거나 왜곡한다면 피해자는 사건 당시보다 더 큰 분노와 억울함을 느끼게 된다.
盧武鉉 민주당 대통령 후보의 장인 權五晳씨가 관련된 경남 창원군 진전면 치안대 사건이 바로 이런 경우이다.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李仁濟 후보가 盧武鉉 후보 장인의 좌익활동을 거론한 후 언론에 보도된 權五晳씨 측 해명과 변명을 보고, 權五晳씨에 의해 학살당한 사람들의 유족들은 가슴 깊이 묻어 두었던 분노가 새삼스럽게 치밀어 올라 밤잠을 못 이루고 있다.
權五晳씨의 친족과 權五晳씨와 함께 좌익활동을 했던 사람들은 權五晳씨가 시각장애인이었다는 점을 들어 범죄를 축소하고 연민의 정을 끌어내려 하고 있다.
權五晳씨의 조카라는 사람은, 『전혀 앞을 못 보는 종숙께서 공산당에게 부역을 했으면 얼마나 했겠습니까. … 공직에 근무하다 하루아침에 두 눈을 실명해 기나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외로운 종숙은 전쟁이 발발하자 아무도 찾아 주지 않는 외로움에, 주·객관이 무시된 채 군당위원회에 부역을 하였으나, 이름만 선전부장이지 종숙께서 행한 부역형태는 우리 모두가 그때 당시를 보지 못 했지만 이해가 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고 했다(月刊朝鮮 2002년 5월호).
그 외에도 『완전 실명한 상태에서 어떻게 좌익활동을 할 수 있었겠느냐』, 『당시 수사당국은 權씨가 장님이라는 점을 이용, 權씨의 손도장을 마구 찍은 뒤 온갖 죄명을 뒤집어씌운 것으로 알고 있다』, 『눈이 먼 뒤부터 집안에 틀어박혀 외부와 접촉을 끊었는데, 한밤중에 양민 학살을 감시했다는 게 도대체 상식적으로 말이 되느냐』, 『맹인이 학살현장을 어떻게 감시할 수 있었겠나』, 『눈먼 봉사가 좌익을 했으면 얼마나 했겠나』 등 權五晳씨가 시각장애인임을 들어 權씨의 좌익활동과 범죄사실을 축소하고 있는 발언들이 많다.
權五晳씨의 아들 권기문(盧武鉉 후보의 처남)씨마저도 『사고로 눈을 잃었는데 … 그런 상황에서 얼마나 주도적으로 역할을 할 수 있었을까 의문이지만 이를 입증할 방법은 없다』고 말했다.
權五晳씨가 시각장애인임을 부각하는 것은 듣는 사람의 동정도 살 수 있고, 상식적으로 설득력이 있는 발언들이다.
대검찰청의 「좌익사건실록」에 기술된 『학살하는 현장 부근에서 학살을 용이하게 감시하고』라는 표현과, 權五晳씨가 시각장애인이라는 사실이 서로 부합되지 않는다는 「상식」에서 보면 호소력이 더 커진다.
필자도 시각장애인이 「학살을 용이하게 감시」했을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말들을 뒤집어 생각해 보자. 얼마나 철저한 공산주의자였고, 얼마나 적극적으로 활동을 하였기에 시각장애인임에도 불구하고 노동당 선전부장이 되고,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이 되고, 치안대가 되었겠는가. 눈이 멀쩡한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유독 시각장애인을 간부로 기용한 사실은 權五晳씨의 좌익사상이 투철하였고 좌익활동에 적극적이었음을 방증하고 있다.
직속 상관을 학살한 냉혈한
權五晳씨에 의해 학살당한 필자의 仲父(중부) 卞百燮씨가 權씨가 면서기로 일할 당시 면장으로 재임한 사실로 보아 權五晳씨가 바로 직속 상관이었던 사람을 학살한 것이고, 그만큼 극렬한 공산주의자였고 냉혈한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필자가 들은 증언들에 의하면, 시각장애인임에도 불구하고 험준한 산의 비탈에 위치한 오지 마을에서 자행된 인민재판을 주도했고 절대 권력을 행사했다고 한다. 군 단위의 조직, 즉 창원군 노동당, 창원군 인민위원회, 창원군 반동조사위원회 등에서 부위원장을 했다고는 하나 당시 인민군에 의해 점령된 지역은 창원군 면 중 맨 서쪽에 위치한 진전면이 유일하였기 때문에 진전면 출신의 부위원장인 權五晳씨가 실질적으로 최고의 지위에 있었을 것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걸어다닐 때는 부인이 인도하였으며, 말은 분명하고 유식하게 했다고 한다. 「반동분자」를 심문하고 판별할 때 손바닥을 만져보고 손바닥이 거칠고 못이 박여 있으면 노동자 그룹으로, 손이 매끄럽고 부드러우면 부르주아로 분류하였다고 한다.
일제시대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면서기로 일했을 정도라서, 동료직원의 증언처럼 『외모도 준수하고 똑똑한 사람』이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양민을 학살하기로 결정한 인민재판에서 검사·변호사·판사 역할 등 1인 3역을 한 유일한 재판관이었고, 그의 말 한 마디로 양민의 生死를 가름하였다고 한다. 『인민군이 「반동분자」 색출작업에 협조하라고 요구하여 어쩔 수 없이 면직원과 경찰의 이름을 알려준 것』이 아니다. 자발적으로 적극적으로 용의주도하게 인민재판을 수행했던 것으로 확신한다.
權五晳씨의 아들 권기문씨가 『… 의문이지만 이를 입증할 방법은 없다』고 말한 것에 대해 분노를 금할 수가 없다.
입증할 방법은 있다. 지금도 생존해 있는 권기문씨의 어머니가 입증할 수 있다. 權五晳씨가 시각장애인이었기 때문에 권씨의 부인, 즉 권기문씨의 어머니가 항상 인도하여 다녔다. 그래서 권기문씨 어머니는 권씨의 일거수 일투족을 봤다. 시각장애인이라도 지팡이로 걸어다니면서 혼자 활동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권씨가 인민군 치하에서 활동한 장소는 보통 사람도 눈을 똑바로 뜨고 다녀야 할 정도로 길이 험하고 비탈진 곳이라서 안내자 없이 혼자서 지팡이로 다니기는 불가능한 곳이다. 권씨는 당시 실명한 지 5년이 채 안 되었기에 그런 험한 길을 혼자서 다녔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그래서 지금도 생존해 있는 權五晳씨의 부인, 즉 권기문씨의 어머니가 권씨의 활동내용을 이 세상에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본다. 당시 3세였던 盧武鉉 후보의 부인 權良淑씨도 아버지가 활동한 현장에 같이 있었다는 증언이 있고, 權五晳씨의 시각장애, 權良淑씨의 연령 등으로 보아 세 가족이 동거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權良淑씨는 세 살 때의 일을 기억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권기문씨의 어머니는 모른다고 하지 못할 것이다.
당신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한 고이즈미를 비판할 자격이 있나?
權五晳씨의 활동현장을 보지 않은 사람들이 權五晳씨가 시각장애인임을 부각시켜 동정심을 유발하고 상상을 동원하여 사건을 축소해서는 안 된다. 시각장애인인 남편을 뒷바라지하면서 현장을 목격하였기 때문에 權五晳씨의 활동을 가장 자세히, 가장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을 權五晳씨의 부인이 증언해야 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을 놓아두고 왜 주변에서 변명하려 드는가.
權五晳씨의 부인은 지금이라도 공개석상에 나와서 남편인 權五晳씨가 어떤 활동을 했는지, 남편의 진짜 사상은 어떠했는지, 왜 權五晳씨가 무기징역형을 받았는지, 수감중 폐결핵과 양안 실명을 이유로 형집행정지 처분을 받고 병보석으로 풀려 나왔다가 잔형 집형을 위해 再수감되는 과정은 어떠했는지, 왜 남편은 끝까지 전향하지 않고 옥중 사망을 하게 되었는지를 밝혀야 한다. 죄가 있으면 죄인으로서, 떳떳하면 떳떳한 대로 진실을 말해야 한다. 국민은 이것들을 알 권리가 있다.
사위가 사랑하는 아내의 아버지 묘소를 참배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길 사람도 없고 시비 걸 사람도 없다. 기쁜 일이든 슬픈 일이든 큰일이 있으면 조상의 영혼에 알리는 것이 우리의 미덕이고 미풍양속이다. 그러나 盧武鉉 후보가 장인의 무덤을 찾은 것은 보통 사람의 조상 성묘와 다르다.
盧후보가 필부가 아닌 대통령 후보이기 때문이고, 묘소의 주인공이 6¡25 때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으로서 양민 학살을 주도한 죄로 무기징역을 받고 옥사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盧武鉉 후보가 장인의 묘소를 찾은 것은 보통 사람의 경우와는 달리, 여당의 대통령 후보로 당선되어 자유민주주의를 국가 이념으로 삼고 있는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려는 사람이, 우리의 민주 국체와 정반대의 사상을 가지고 우리나라를 유린한 인민군의 힘을 빌려 양민을 학살한 사람의 무덤을 참배한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盧武鉉 후보가 장인의 묘소를 찾은 자리에서, 『(장인은) 사랑하는 아내의 아버지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깊이 생각해 본 적 없다』고 했다.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다. 일본 고이즈미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면서 『신사에 안장된 사람들은 우리 조상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고 했다. 우리나라와 중국 등 일본의 침략을 받은 국가들은 자기들 나라를 침범한 전범들이 함께 있다고 하여 일본 총리의 신사참배를 극렬히 반대했다.
만약 盧후보가 대통령이 되어 재직하고 있었을 때 일본 총리가 다시 위와 같은 변명을 하고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한다면 盧후보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묻고 싶다. 일본 총리가 자기 조상의 영혼에게 참배하는 것을 이웃나라 한국과 중국이 왜 극렬하게 반대하는지 모르겠다고 막무가내로 나올 때 「盧武鉉 대통령」은 어떻게 응징할 것인가?
盧후보가 장인 묘소를 참배할 때, 멀지 않은 거리(3km 이내)에 그 장인에 의해 무참히 학살당한 「반동분자」들의 묘소가 있다는 것을 의식하였는가. 좌익활동을 하고 양민을 학살한 장인의 영혼은 위로하고 또 후손의 출세를 고하면서, 그 장인에 의해 학살된 양민의 영혼은 무시해도 되는가. 아버지를 잃고 남편을 잃고, 형과 오빠를 잃고 평생을 가슴앓이한 후손들이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을 몰랐는가. 살인자의 자식이 출세하여 아버지 묘소에서 성대하게 성묘를 할 때 그 옆에 누워 있는 피해자의 영혼과 그 유족의 마음은 어떠할지 생각해 보았는가.
자기 가족만 생각하면 되는 보통 사람들의 개인과 개인 사이의 살인사건이라고 하더라도 가해자는 그 위세를 자제하고 삼가야 한다. 한 국가의 대통령이 되려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盧후보가 장인의 묘소에 참배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뜻이 아니다. 백보 양보하여, 盧후보의 말대로 『좌우로 갈라 싸운 사람 모두가 시대와 역사의 피해자였다』고 하더라도, 다른 한쪽 피해자에게 한 마디 위로의 말은 있었어야 하지 않는가?
당신이 대통령이 되면 좌익 유가족에게도 연금을 줄 것인가?
盧후보는 장인의 묘소에서 『막상 일선에서 죽창 들고 싸운 사람들은 정치하던 사람이 하는 대로 깃발만 보면 편 갈라 바닥에서 싸웠다. 어쨌든 좌우로 갈라 싸운 사람 모두가 시대와 역사의 피해자였다. 전쟁은 민중이 아니라 지도자가 했다. 지도자가 결정하면 수천, 수만의 민중은 무엇인지도 모르고 깃발 들고 사명감 갖고 목숨을 던진다』고 말했다고 보도되었다.
자신의 장인이 일선에서 죽창 들고 싸운 말단 노동당원이었고, 전쟁을 결정한 지도자 한 사람에게 책임이 있지 다른 사람들은 책임이 없다는 뜻으로 들린다.
盧후보가 장모나 부인으로부터 들어서 잘 알고 있겠지만, 盧후보의 장인 權五晳씨는 창원군 노동당 부위원장, 인민위원회 부위원장, 반동조사위원회 부위원장 등의 직함을 가진 양민학살의 최고책임자였다. 이런 사람을 민중의 한 사람으로 간주하여 죄상을 얼버무려서는 안 된다. 5共청문회 당시 盧후보는 광주사태의 최고책임자인 전두환 前 대통령은 물론 일선 지휘관에게까지 책임을 추궁하지 않았는가?
만약 盧후보의 부친이 토착 좌익에 의해 살해되었다면 「모두가 피해자」라고 말하겠는가? 모두가 피해자라면, 좌익에 의해 희생된 우익인사의 유족에게 국가에서 연금을 주듯이 좌익활동을 하다 감옥 간 좌익인사의 가족에게 똑같이 연금을 줄 것인가? 좌익의 유가족들이 『우리도 연금 탈 날이 올 것이다』고 공공연히 말하고 다닌다고 한다. 경찰을 시너불에 태워 죽인 동의大 학생들을 민주화운동가로 추앙하자는 판국이니 그들도 그런 기대를 가질 만하다고 본다. 다시 말하거니와 盧후보는 좌익과 우익 모두가 피해자라는 고도의 수사로서 장인에 관한 진실을 호도하려 해서는 안 된다.
盧후보는 장인 묘소를 찾은 자리에서 『장모와 처남은 다시 들추기 싫어한다. 조금 가담하고 더 가담한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한다. … 장인은 얼굴도 본 적이 없다. 변명하자면 나는 모른다. 남의 일이라 생각하고 의미를 붙인다면 그것은 백성의 일이다. 지난날의 일이다』고 했다고 보도되었다. 5共청문회도 「지난날의 일」을 두고 따졌다. 장모와 처남이 들추기 싫어한다고 묻어둘 일도 아니다. 盧후보 말대로 「백성의 일」이고 국민의 관심사다.
장모와 처남이 들추기 싫어하더라도 명백하게 밝혀야 한다. 盧후보가 모른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장인의 얼굴을 못 본 것은 사실이지만 장인의 행적을 모른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정말 모른다면 지금이라도 장모에게 진지하게 물어보아야 한다. 5共청문회 때 盧후보처럼 소위 「모르쇠」로 우겼던 「증인」에게 盧후보는 어떻게 행동하였는가?
권양숙씨, 모르면 어머니에게 물어보세요
조금 가담하고 더 가담한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한다고? 판사를 하고, 변호사를 하고, 국회의원을 하고, 장관을 역임한 盧후보가 어떻게 이렇게 사리에 맞지 않는 말을 인용할 수 있는가? 무식해서 분위기에 휩쓸려 아무 생각 없이 죽창 들고 따라다닌 것과 소신에 따라 양민 11명을 죽인 것과 차이가 없는가?
인민군 총부리 앞에서 어쩔 수 없이 노역을 한 사람과 자기가 모시던 직속 상관(卞百燮 면장)을 체포한 지 20여 일 만에 처형한 인민재판관 사이에 의미 있는 차이가 없는가? 盧후보가 판사로 재직할 때도 살인의 주범과 공범을 똑같은 형량으로 판결하였는가?
조금 가담하고 더 가담한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말은 盧후보의 장인이 아주 크게 가담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으로 들린다. 盧후보는 장인이 주범이었는지 공범이었는지 진실을 밝혀야 한다.
盧武鉉 후보의 부인 權良淑씨가 아버지 權五晳씨 양민학살 문제에 대해 언급한 것은, 지난 4월27일 盧후보가 민주당 大選 후보로 결정되는 것을 지켜보다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 응했을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인 것으로 알고 있다. 언급하기는 했으나, 『기억이 나지 않아 상세하게 얘기할 수 없습니다 … 사실 저는 부모님 일은 잘 모릅니다. 부모님 일을 모른다는 게 무책임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땐 나이가 어려서…』라는 말뿐이었다.
「옆에 있던 이은희(36) 여성특보는 『부친은 1948년 막걸리에 메틸알코올을 잘못 타 먹어 사모님이 두 살 때 실명했다. 그 상태에서 6¡25 당시 공산군의 부역을 강요받아 수복 후 구속됐으나 곧 석방됐다. 그런데 5¡16 이후 사회불안 요소를 격리한다는 차원에서 벌어진 예비검속으로 다시 투옥돼 1971년 마산교도소에서 옥사했다』고 설명했다」고 보도되었다.
두 사람 다 거짓말을 하고 있다. 權良淑씨가 사건 당시 어려서 그 때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수긍이 가지만, 부모님 일을 모른다는 것은 거짓말이라는 것을 확신한다. 필자도 權良淑씨와 동갑으로 6¡25 때 세 살이었는데, 그 때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그 때 피란을 동생 돌잔칫날 갔다는 것, 돌잔치 떡을 해놓고 먹지 못하고 갔다는 것, 피란길에 나에게 붙여진 별명이 뭐라는 것, 피란지가 어디라는 것, 인민군이 어머니에게 총부리를 들이대고 아버지의 소재를 대라고 했다는 것, 숙부님이 어떻게 살해되었다는 것, 우리 집 본채가 미군의 폭격으로 불에 탔다는 것 등 피란과 전쟁에 관련된 얘기는 귀가 따갑도록 여러 번 들어서 알고 있다.
權良淑씨는 지금도 생존해 있는 어머니로부터 6¡25 얘기를 듣지 않았는가. 어릴 때 아버지가 어디 계신다고 들었는가. 아버지가 무기징역형을 받고 복역중 질병으로 인하여 형집행정지 처분을 받고 가족과 함께 생활한 1956년에서 1961년 사이는 權良淑씨의 나이가 9세에서 14세이었는데, 성장기의 호기심에서라도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물어보지 않았는가?
얼마나 큰죄를 지었기에 무기징역을 받았느냐고 묻지 않았는가? 남은 형기를 집행하기 위해 아버지를 再수감할 때 아버지가 왜 감옥에 가야 하느냐고 물어보지 않았는가? 權良淑씨가 성인이 된 24세 때 옥사하였는데 아버지 면회를 가지 않았는가? 면회 가서나 갔다 와서 왜 감옥에 있는지 알아보지 않았는가? 그리고 아버지께서 자기 생각을 말해 주지 않았는가?
금년 말 盧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어 대통령 부인이 되더라도 3¡1 독립운동은 직접 못 보았기 때문에 모른다고 할 것인가? 盧후보의 부인 權良淑씨의 아버지 權五晳씨의 주도 아래 무참하게 학살된 진전면장 卞百燮씨의 외아들은 權良淑씨보다 세 살 아래로 더 어리지만 아버지가 어떻게 학살되었는지 생생하게 자세히 알고 있다.
태어난 지 3개월 만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기억은 할 수 없지만 수십 번 수백 번 들어서 아버지가 어떻게 살해되었는지 다 알고 있다. 언제 어떻게 피란 가고, 언제 어떻게 누구에 의해 치안대에 체포되고, 시신은 어떻게 누구에 의해 수습되었는지도 알고 있다. 權良淑씨 부친이 단독으로 행한 인민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되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權良淑씨는 충분히 기억할 만한 나이에 아버지와 5년 동안 같이 살았다. 비록 감옥이었기는 하나 성인이 된 후에도 아버지가 살아계셨다. 그런데도 어렸다는 핑계로 부모님 일을 모른다고 할 것인가?
가해자의 딸로서 피해자의 아들·딸들에게 이야기할 것이 없는가?
필자가 들은 증언에 의하면 權良淑씨도 인민재판 현장에 있었다. 인민위원회, 반동조사위원회, 치안대가 소재했던 진전면 일암리 대방마을에서 인민재판이 열린 당시 그 현장에 시각장애인은 權良淑씨의 아버지 權五晳씨가 유일했으며, 부인이 장님의 손을 붙잡고 인도하였고 다른쪽 손에는 서너 살짜리 여자아이가 있었다는 생생한 증언이 있다. 가족 세 사람이 마루에 앉아 있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놓은 것처럼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 지금 유추하면 바로 그 「여자아이」가 權良淑씨라고 생각된다.
생존해 계시는 權良淑씨의 어머니에게 물어보면 금방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權良淑씨에게 죄가 있다는 뜻도 아니고 기억해 내라는 뜻도 아니다. 어려서 부모님 일을 모른다고 하는 말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방증하기 위해서 한 말이다.
權良淑씨는 부모님의 일을 말해야 한다. 이제 필부의 아내가 아니다. 대통령 후보의 부인으로서 대통령 부인이 될지도 모르는 사람으로서, 아버지가 무슨 죄로 감옥살이를 하였는지, 아버지는 자신을 어떻게 해명하였는지, 아버지는 왜 끝까지 전향하지 않았는지,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등 국민들의 궁금증을 풀어 주어야 한다. 가해자의 딸로서 피해자의 아들과 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야 한다.
거짓말은 침묵보다 더 나쁘다
이은희 여성특보의 거짓말은 더 가증스럽다. 權五晳씨는 『6¡25 당시 공산군의 부역을 강요받아 수복 후 구속됐으나 석방』된 것이 아니다. 토착 좌익이었고 자발적으로 주도적으로 「반동분자」 색출과 처형 활동을 하였으며, 구속 후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복역중 폐결핵과 양안 실명의 사유로 형집행정지 처분을 받고 풀려난 것이다. 구속됐으나 죄가 가벼워 석방된 것이 아니다. 구속 후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중에 질병으로 형집행정지 처분을 받은 것이다. 사실이 이런데도 왜 죄가 가벼워 석방된 것처럼 호도하려 하는가.
『5¡16 이후 사회불안 요소를 격리한다는 차원에서 벌어진 「예비검속」으로 다시 투옥』된 것이 아니다. 5¡16 전인 1961년 3월27일 잔여 형기를 집행하기 위해 再수감한 것이다. 석방되었다 再수감된 것이 아니고, 형집행정지 처분을 받고 나와 있다가 남은 형기를 채우기 위해 再수감된 것이다. 再수감된 것이 5¡16 後가 아니고 5¡16 前이다.
예비검속과 잔형집행은 천양지차다. 朴正熙 대통령이 아무리 군사독재를 하였다고 하지만 예비검속으로 구속한 사람을 10년 넘게 복역시켰겠는가? 거짓말일 뿐 아니라 상식 이하의 말을 하고 있다. 군사독재의 만행을 연상케 하여 무기징역을 선고받을 정도의 중죄를 「강제부역」 정도로 오도하려 해서는 안 된다. 거짓말은 침묵보다 더 나쁘다. 盧武鉉 후보 측과 가해자 측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피해자 측의 가슴속 상처를 송곳으로 찌르듯 아프게 한다는 것을 아는가?
6¡25 전쟁의 와중에서 악질 좌익에 의해 무참하게 살해된 양민들의 유족들은 가슴 쓰라린 지난 일을 되새기고 싶지 않다. 그러나 누가 무슨 목적으로 발설하였건 간에 일단 거론된 이상 사건의 진실은 밝혀야 한다.
왜 왜곡하고, 은폐하고, 축소하고, 책임전가하고, 거짓 증언하고, 경거망동하여 아물어 가는 상처를 후벼 파는가? 무고한 양민들을 학살한 權五晳씨의 죄상을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밝히고 피해자에게 진심으로 사과해야 한다.
정직이 최선의 정책이고, 최고의 선거전략이다. 재론되게 한 원인제공자인 盧武鉉 후보가, 그 다음으로는 盧후보의 부인 權良淑씨가, 그리고 이 세상에서 사건의 진상을 가장 많이 알고 있는 盧후보의 장모가 지금이라도 사건의 진실을 공개하고 인정하여 억울하게 학살당한 사람들의 원혼과 그 유가족들의 피맺힌 한을 조금이라도 풀어 주고 유족들의 되살아난 슬픔과 억울함을 어루만져 주기 바란다.
피살자 딸의 자필 증언
예수님은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셨고 죄지은 자가 회개하면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다. 하나님을 믿는 나로서 그들이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면 그들을 용서하고 우리 하나님 말씀대로 남은 생애를 살고 싶다
<편집자 注: 이 글은 좌익들에 학살당한 卞百燮 면장의 둘째딸 慶淑씨가 자필로 당시의 상황을 증언한 내용이다. 慶淑씨는 자녀들 가운데서 유일하게 卞면장이 잡혀가는 걸 본 증인이다. 문법에서 크게 어긋난 글 외에는 고치지 않고 원문 그대로를 싣는다>
1950년 6월25일 주일 뜻하지 않은 전쟁이 터졌다. 우리 가족의 운명은 이날부터 불행이 왔다.
얼마 후 우리 식구는 헤어졌다. 아버님은 자기보다 아들을 생각하시고 어머니와 1남5녀를 마산 큰댁으로 피란을 보내고 아버님과 나 두 부녀는 집에 남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공산군이 가까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아버지와 나 그리고 친지들과 같이 피란길을 나섰다. 그때 아버님의 말씀이 먼저 면사무소에 가서 신고하고 가야 한다며 사무소에 갔더니 면민이 요동하면 안 된다는 이유로 못 가게 하여 우리 일행은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서 갑자기 진전면 도서리에 전투가 벌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내려 가려고 했으나 이미 길이 막혀 내려가지는 못하고 아버님과 중숙부님과 숙모님 등과 함께 피란을 갔다. 그러던 중 양촌리가 폭격을 당하여 집이 불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막내 숙모님께서 가시겠다고 하셔서 아버님께서 혼자가시면 위험하시다고 일행이 같이 양촌리로 가는 길에서 인민군을 만나 인민군에게 붙들려 아버지는 짐꾼으로 끌려가셨다. 나는 집에 가서 살림살이를 텃밭에 옮겨 놓고 친척들과 같이 피란을 갔지만 아버님은 돌아오시지 않고 같이 끌려가신 다른 분들은 돌아오셨다. 그러고 보니 더욱 더 내 마음은 초조하고 불안한 중에 있는데 며칠이 지나서 아버님은 초라한 모습으로 돌아 오셨다.
알고 보니 인민군들로부터 집으로 무사히 돌아올 수 있는 확인서를 가지고 오셨는데 건강이 나빠서 안정을 취해야 할 상황이라 2차 피란처로 진양군 금곡면 정자리에 있는 외가댁으로 가기로 하고 외가로 가기 위해서 우리 부녀는 길도 모르고 하여 안덕상씨의 부친(성명이 생각나지 않음)을 동행인으로 하여 외가로 향했다.
외가에도 외조부님과 외숙모님도 피란을 가시고 외조모님과 외숙부님이 계셨는데 거기 가셔서 아버님의 몸을 추스리고 있었다. 어느 날 양촌 치안대장 변영석이와 다른 한 사람과 안덕상씨 부를 앞세우고 세 사람이 찾아와서 아버님에게 저희들과 같이 가자고 하기에 나는 울면서 애원하였지만 허사였고 그들의 말이 며칠만 기다리면 돌아오신다고 나를 안심시키고 연행해 갔다.
날마다 눈물로 세월을 보내는 내 모습이 안타까워 외할머니가 아버님 뵈오러 가자고 하셔서 같이 창원군 진전면 일암리 대방부락 당 조직본부로 아버님을 찾아가 보니 죄없는 많은 사람들이 감금되어 있었다.
무더운 날씨에 창고 안에서 죄없이 많은 사람들이 고초를 당하고 있었다. 아버님을 보는 순간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못하고 울기만 하고 있으니 아버님 하시는 말씀이 지금 건강은 좋고 깡보리 주먹밥도 맛이 있고 소화도 잘 되고 하니 내 걱정은 말고 외할머니 하고 외가에 가서 기다리면 며칠 후에는 갈 것이라고 나를 달래셨다. 나는 외할머님과 같이 외가로 돌아왔다. 그날부터 기다려도 소식도 없고 아버님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던 중 어느 날 인민군 한 사람이 외가에 들어와서 하는 말이 이 집에 면장 딸이 있다는데 하기에 나를 체포하려고 온 줄 알고 겁에 질려 살며시 뒷문으로 도망하여 피신하였기에 지금까지 살아왔다.
그후 시일이 지나고 인민군들은 후퇴하고 양촌리 집에 와보니 상봉하기를 학수고대하던 아버님은 그들이 말하는 치안대원들의 손에 의하여 처참하게 억울한 죽음을 당하시고, 막내 여동생 현숙이는 피란중 사망하여 어머니와 우리 6남매만 상봉하게 되었다.
우리 아버님은 가난한 자와 소외된 자를 위하여 봉사하시며 면을 위하고 마을을 위하여 짧은 생애지만 열심히 사신 분이시다. 전답을 팔아가면서 면장의 의무를 다하시니 그때 아버님을 아시는 분들은 말씀하시기를 『卞면장이 일년만 더 면장하면 사랑채 대문까지도 팔아서 면 일을 볼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셨기에 피란중에도 말씀이 『나는 죄가 없기 때문에 괜찮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나를 안심시키셨다.
우리 아버님의 죄라고는 좌익에 동조하지 않은 것과 부모님 덕분에 약간의 농토를 소유하고 있은 것이 죄라면 죄일 뿐이다. 아버님의 사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그 와중에 총알 앞에서 만세 삼창을 부르시고 총에 맞아 쓰러졌다고 들었다. 총을 얼마나 쏘았는지 얼굴을 알아보지 못 하여 옷으로 시신을 찾아 중부님 내외분이 가매장해 놓았다가 그 후 몇 개월 후에 선산에 모시게 되었다.
이 불효 여식 한 많은 세월이 흘러서 결혼하여 살면서 때때로 아버님 생각에 남모르게 많은 눈물을 흘리면서 살아 왔다. 52년이 지나 내 나이 70을 바라보면서 지난 악몽을 다시 드러내게 되니 내 마음은 더 괴롭다.
오직 내가 바랄 것은 정치인들이 부정부패를 버리고 죄 없고 순진한 서민들을 해치지 말고 바른 정치를 하여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정치인들이 되었으면 한다.
예수님은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셨고, 죄지은 자가 회개하면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다. 하나님을 믿는 나로서 그들이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면 그들을 용서하고 우리 하나님 말씀대로 남은 생애를 살고 싶다.
억울하게 돌아가신 우리 아버님의 증인
불효여식 변경숙
盧武鉉 후보의 장인 權五晳씨의 良民 학살 가담 - 현장 목격자들의 증언
피해자 가족들은 증언하는 자리에 나오기까지 많이 망설였다고 한다.
『대통령이 될지도 모를 盧武鉉씨에게 불리한 얘기를 했다가 혹시 보복을 당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 때문이었다. 그래서 國營(국영) 연구기관의 임원인 卞면장의 외아들(52)은 물론, 자녀들이 공직에 있는 가족들도 이 자리에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卞면장의 사위 朴承用 교장은 『나는 停年(정년)이 1년 반쯤 남아 있어 괜찮다』며 쓴 웃음을 지었다.
『우리 집에서 머슴으로 일하던 사람이 어느 날 완장을 차고 와서, 아버지를 끌고 가서 虐殺(학살)했습니다. 우리는 피해자였지만 「세상이 언제든지 뒤집어 질 수 있다」고 겁을 내며 지난 50년 동안 살아 왔어요. 盧武鉉씨가 양민을 학살한 장인의 묘를 참배하고, 진실을 호도하는 걸 보고는 도저히 가만 있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어요』(卞百燮 면장의 한 딸)
가족들은 『盧武鉉씨 쪽에서 「장님이 부역을 하면 얼마나 했겠느냐」고 하지만, 權五晳씨는 누구를 죽일지 살릴지 결정한 사실상의 재판장이었다』며, 卞在源(변재원·72), 卞在雄(변재웅·63)씨부터 증언을 하도록 했다.
卞百燮 면장의 조카인 卞在源씨는 창원군 진전면 일암리 대방마을에 있었던 창원군 치안대 본부에 卞면장과 함께 감금돼 있었고, 卞在雄씨는 대방마을에 피란해 있었다.
피해자 가족들의 증언을 그대로 소개한다.
◈ 학살된 卞면장의 조카 卞在源씨 증언
『權五晳이 재판장이었다』
『죽을 놈은 죽고 사는 놈은 사는 거지』
6¡25가 났을 때 나는 晉州(진주) 농림학교 5학년으로 열아홉 살이었다. 경남 창원군 진전면 양촌리에 살고 있던 나는 작은 아버지(卞百燮 면장)와 함께 8월2일 피란길에 나섰다. 음력으로 6월19일이다. 晉州까지 인민군이 점령한 상태여서 馬山쪽으로 갈 생각이었다. 대가족이었던 우리 一家(일가)의 대부분은 馬山으로 이미 피란한 상태였다.
작은 아버지와 내가 8월1일 피란을 하려고 창원군 진전면 支署(지서) 앞을 지나는데 경찰관들이 『面의 유지분이 피란을 가시면 面民(면민)들이 동요하니 가지 말라』고 만류했다. 그래서 작은 아버지와 우리 일행은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8월2일 새벽 인민군 선발대가 진전면 지서를 점령했다. 우리는 그 무렵 피란길에 나서 경남 함안군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나는 우리 외가가 있는 함안군에 머물렀고, 숙부님과 중부님과 함께 2∼3일 머물다가 고성군으로 갔다. 고성군에 간 지 며칠 후 진전면 치안대장과 변영석이라는 사람이 총을 메고 나를 잡으러 왔다. 나는 고성군 구만면에 있는 창고에 감금됐다. 감금된 사람이 처음에는 4~5명이었는데 점점 불어났다. 내가 갇힌 다음날 삼촌(卞百燮)이 잡혀 왔다. 삼촌은 조카가 17명이나 되는데, 내가 함께 끌려갔던 유일한 조카다.
다음날 우리는 창원군 진전면 일암리 대방마을로 옮겨졌다. 대방마을의 許景九씨 「고방」(쌀 등을 보관하던 창고)에 갇혔다. 고방에는 다락방이 하나 있었는데, 다락방에는 나 같은 젊은이들이 생활했고, 아래에서는 나이 든 분들이 있었다. 고방에 갇힌 이는 열댓 명쯤 됐다. 이때가 8월9일 또는 10일쯤으로 짐작된다.
대방마을은 내 고향인 진전면 양촌리 바로 맞은 편으로, 양촌리에서 1km 이상 가파른 산길을 올라가야 하는 곳이다. 여기에는 창원군 인민위원회 본부, 치안대 본부가 있었다. 갇혀 있는 동안 金克五(김극오-창원군 임시 인민위원장)를 봤다. 이 사람의 집이 진전초등학교 입구에 있어서 전부터 잘 알고 있었다.
큰아들이 敵治下(적치하)에서 창원군 치안대장을 했다. 치안대 완장을 차고, 권총을 차고 다녔다. 둘째아들도 대방마을에서 돌아다녔다. 집안 할아버지되는 분(변상팔)이 金克五를 붙잡고 『우리가 뭘 잘못했느냐, 살려달라』고 애원을 했다. 金克五는 『죽을 놈은 죽고, 사는 놈은 사는 거지』라며 퉁명스럽게 얘기했다.
6¡25 직후 아들이 보도연맹(좌익 전향자 단체) 사건으로 죽은 「옥동댁」(朴玉伊·당시 63세)이 『원수를 갚아야 한다』고 소리를 지르며 돌아다니는 모습도 보였다.
일주일쯤 지났을까 군복을 입은 빨치산이 총을 거꾸로 메고 와서 『반동분자 놈의 새끼야』하며 다락방에 있는 나를 불렀다. 나는 고방 뒤편에 있는 방공호로 끌려갔다. 그는『너 이놈, 학도호국대 감찰부에 있으면서 악질로 굴었지』하고 추궁했다.
그때는 모든 학생이 학도호국대원이었다. 바지 주머니에 있던 「학도호국대 대원증」(오늘날의 학생증)을 꺼내 보여 주면서,『내가 감찰부원이라면 표시가 돼 있을 것 아니냐. 봐라』고 했다. 그는 나를 다시 고방으로 돌려 보냈다. 총을 멘 그가 나를 『반동분자』라고 하면서 방아쇠를 한 번 당기면 끝장나는 그런 때였다. 공포감이 왈칵 몰려왔다.
『그가 내 재판장이었다』
고방에 갇혀 있던 사람들은 하나씩 불려나가 조사를 받았다. 먼저 조사를 받은 작은 아버지(卞百燮)는 자포자기한 모습이었다. 작은 아버지는 나를 붙잡고 『너라도 살아 나가야 할 텐데』라는 얘기만 했다.
갇힌 지 1주일쯤 더 지나서 나를 불러냈다. 신문실은 고방 바로 옆에 있는 조그만 방이었다. 나를 신문한 사람은 한복을 입은 맹인이었다. 눈을 감은 맹인이 아니라, 눈은 그대로 뜨고 있는 「당달봉사」(경상도 사투리로, 눈을 뜬 장님이라는 뜻)였다. 그가 맹인이 아니었더라면 50년이 지난 지금, 그가 누구인지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나중에 그가 진전면 오서리에 사는 權五晳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權五晳씨는 나보다 아홉 살이 위다. 내가 고향에 쭉 살았으면 알았을 텐데, 晉州에 나가 공부를 하는 바람에 당시에는 그가 누군지 몰랐다.
방 안에는 그와 나 단 둘이 마주 앉았다. 재판이라는 것도 없이, 둘이 마주 앉아서 얘기한 것이 재판이고, 그가 내 재판장이었다.
맨 처음 『反託(반탁)을 하지 않았느냐』고 물은 기억이 있다. 나는 右翼(우익)인 학생연맹 소속으로 반탁을 지지하는 쪽이었다. 좌익 학생단체는 학생동맹이었다. 晉州는 좌익학생들의 활동이 성했다. 나는 특별한 이념이 있어서라기보다, 할아버지가 만석꾼인 집안 환경 때문에 右翼 학생단체에 별 생각없이 가담했다.
그의 질문을 듣고 나는 「학생연맹에 가담한 사실이 알려져 치안대가 나를 끌고 왔구나」 하고 불안해졌다. 나는 『反託을 한 적이 없다』고 했다.
맹인인 그는 이어서 『공산주의에 협력을 하지 않고, 反動(반동)을 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나는 『사상과 정치에는 관심이 없다. 나는 문학소년이다』고 대답했다. 『문학소년이라면 책을 많이 봤을 것이 아니냐, 어떤 문학을 했느냐』고 하길래, 삼촌과 형님들이 일본에서 가져와서 읽은 30권짜리 세계문학 전집의 제목을 줄줄이 얘기했다.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빅토르 위고, 투르게네프…. 있는 대로 들먹이자 그도 아는 척을 했다. 여러 가지 질문이 20분 이상 계속됐다. 마지막으로 決議書(결의서)를 불러 주는 대로 쓰라며, 16절지 한 장과 연필 하나를 줬다.
요지는 「金日成에게 충성을 다하겠다. 미온적인 것을 벗어나 적극적으로 인민공화국에 협력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는 또 쓸 게 있다며 「反動分子(반동분자)인 작은 아버지 卞萬燮(변만섭)과 작은형 卞在權(변재권)을 내 이름으로 고발한다」는 고발장을 쓰게 했다. 결의서를 쓰고, 指章(지장)을 찍고 나서 고방으로 돌아왔다.
총살된 작은 아버지
權五晳에게 신문을 받은 다음날 나는 고방에서 풀려났다. 하지만 許景九씨 집밖을 벗어날 수 없는 가택연금 상태였다. 나는 담배를 구해서 칼로 잘게 썰어 고방에 갇혀 있는 어른들께 드렸다.
연금된 며칠 뒤부터 나는 산 너머 봉암리에 주둔하고 있던 인민군 포대에 끌려가 취사 노무자로 일했다. 인민군이 먹을 밥과 국을 만들었다. 소 다리를 목도로 나르기도 하고, 부녀자들이 만든 떡과 주먹밥도 날랐다.
닷새쯤 일하는데 『인민군 포대가 鎭東面(진동면)으로 이동한다』는 얘기가 들렸다. 인민군을 따라가다 보면 가족과 영영 헤어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함께 있던 친구와 탈출했다.
탈출해서 나는 구만면에 피란해 있던 가족들에게 돌아갔다. 정자나무 옆 술집에 부엌방이 하나 있었는데, 생솔 연기에 심하게 그을려서 부엌방이 있는지 아무도 몰랐다. 밤에는 그곳에서 지내고, 낮에는 건너편 산의 솔밭에서 숨어서 지냈다.
9월 초쯤 작은 아버지와 11명이 대방마을에서 학살당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좌익들은 총살시킨 사람들을 둘로 나눠 대충 흙으로 덮어 놓았다. 여자들이 경비병들의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유품으로 시신을 확인해 알아볼 수 있는 자리에 다시 대강 묻었다.
그리고 인민군이 물러나고 추석이 지난 며칠 후 1950년 10월 초 고향으로 돌아와 시신을 수습했다. 그후 1950년 12월에서 합동 위령제를 지내고 시신을 제대로 모셨다.
◈ 학살된 卞曾燮씨 아들 在雄씨의 증언
『손바닥을 만져보고 굳은 살이 없으면 부르주아라고 판정했다』
『부인으로 보이는 여자가 장님의 손을 잡고 데리고 다녔다. 딸인지 아들인지, 두 사람 옆에서 자박자박 잘 걸어다녔다』
6¡25 때 나는 국민학교 4학년이었다. 진전면 양촌리에 살던 우리 가족은 경남 함안군으로 피란을 갔다. 공중으로 불이 날아다니자, 할아버지가 대방부락으로 가족을 이끌고 피란해, 치안대 본부가 있던 許景九(허경구)씨 집에서 우리는 묵었다.
許景九씨는 우리 卞씨와 촌수가 좀 먼 姻戚(인척)이다. 許씨는 좌익도 우익도 아닌 사람이었다. 처남 하나가 좌익을 했다는 얘기는 나중에 들었다. 許씨의 집은 본채가 사랑채보다 약간 높고, 돌 담으로 둘러쌓여 있었다. 최근에 대방마을에 들러봤는데 다 허물어지고 없었다. 전쟁 당시에는 20여 호가 있었으나, 지금은 11호만 있다고 한다.
우리는 許씨 집 본채에 머물렀고, 사랑채 고방에 사람들이 갇혀 있었다.
아버지(卞曾燮)도 고방에 갇혀 있다가 학살당했다. 卞百燮 면장과는 8촌 간이다.
대방부락은 꽤 높은 산(적석산) 골짜기에 위치해 미군이 폭격을 하지 못했다.
미군의 L-19 정찰기가 매일 떴다. 아주 낮게 떠서 우리가 조종사의 얼굴을 볼 정도였다. 정찰기가 왔다 가면 「호주기」라고 불리던 쌕쌕이가 마을을 폭격했으나, 대방부락에는 포탄이 떨어지지 않고, 마을 입구만 불바다를 만들었다. 함포사격도 했는데 마을은 멀쩡했다.
그때 許景九씨 집 주변을 장님 한 사람이 오갔다. 부인으로 보이는 여자 분이 장님의 손을 잡고 이곳으로 데려오고 데려 갔다. 두 사람은 어린 아이가 하나 있었는데 딸인지 아들인지, 두 사람 옆에서 자박자박 잘 걸어 다녔다. 네 살쯤 된 아이 같았다.
그 장님 가족이 대방마을 어디에 살았는지는 모르지만, 대방부락 안에서는 살았을 것이다. 權五晳씨가 살던 오서리에서 우리가 살던 양촌리까지 10리가 넘는다. 양촌리에서 대방마을까지 산길로 1km 이상이어서, 장님인 그가 그곳으로 출퇴근을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가 장님이 아니었다면, 나 역시 그 사람을 지금까지 기억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盧武鉉씨 가족은 「장님이 뭘 했겠느냐」며 그가 장님이었다는 사실을 내세운다. 우리는 權五晳씨가 장님이었기 때문에 생생하게 그가 학살을 준비하는 현장에 있었음을 기억하고 있다.
그때 『장님인 그가 심사를 한다. 심사할 때 「손을 내놓으라」고 해서, 손바닥에 못이 박여 있으면 가벼운 쪽으로 분류하고, 없으면 엄하게 처벌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할아버지께서 『한 3일 있으면 인민재판하러 晉州에 간다』고 얘기를 했다. 우리는 아버지(卞曾燮)가 재판을 받고 돌아올 줄 알았다. 晉州에 간다고 속이고 밤에 끌고가 처형해 버린 것이다.
대방마을에는 당시 『며칠만 있으면 부산이 점령된다. 부산이 해방되면 남조선이 해방된다』는 얘기가 돌아다녔다. 대방마을에 있으면서 「적기가」,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배웠다. 마을에서 인민군을 본 기억은 별로 없다. 치안대, 여자 치안대 같은 사람들이 많이 돌아 다녔다.
◈ 卞면장의 조카 卞在熙(67)씨의 증언
『自生 공산주의자들이 제 세상 만났다고 날뛰었다』
나는 6¡25 당시 마산상업중학 3학년이었다. 학살당한 卞百燮 면장의 조카다. 인민군은 추석 이틀 전 진전면에서 후퇴했다. 전선은 진북과 진전면 사이였다. 진영으로 피난 갔다가 11월쯤 고향으로 돌아오니 『장님인 權五晳이가 인민위원장이었다』는 얘기가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대방마을에 끌려갔다 온 사람들이 『權五晳이 위에 아무도 없었다. 제일 높았다』고 얘기해서, 우리는 權五晳이 郡黨 인민위원장인 줄 알았다.
당시 인민군은 창원군 南西 쪽 끝의 진전면만 차지했다. 나머지 면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창원군 인민위원회와 치안대 본부가 궁벽한 대방마을에 숨어서 활동했다.
權五晳은 창원군에서 유일하게 적의 수중에 넘어간 진전면 출신이어서, 대단한 힘을 썼다고 한다. 창원군에서는 인민위원회의 활동이 제일 활발한 곳이 진전면이었기 때문이다.
창원군이 완전 敵治下였으면, 인민재판도 거창하게 열고 총살도 하고 했을 텐데, 진전면만 수중에 넣고 있었으므로 좌익들은 우익 인사들을 몰래 산 속으로 끌고가 살해해 버린 것이다. 당시 진전면에는 인민재판을 해도 봐 줄 사람도 얼마 없었다.
중부님이 처형당한 것은 우리 집안이 地主(지주)였기 때문이다. 1949년에 토지개혁을 했지만, 그 전에 우리 할아버지는 2000석 추수를 했다고 한다. 전쟁 전에도 빨치산들이 밤에 습격해 곡식을 털어가곤 했다. 제일 큰 아버지(卞仁燮)는 좌익과 빨치산이 죽창과 곡괭이 들고 쳐들어오는 게 겁이나 전쟁 전에 마산으로 이사를 갔다.
그렇지만 해방 후 民選(민선) 면장을 지낸 중부님은 인자한 분이었다. 좌익과 우익이 싸우면 『사람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고 늘 얘기했다. 다른 사람들이 다 피란을 가도 『좌익 정부가 선다고 죄없는 나를 어떻게 하겠느냐』며 끝까지 피란을 가지 않았다.
처형대상으로 분류돼 현장까지 끌려갔다가 살아 온 사람이 있었다. 9촌쯤 되는 우리 妻族(처족)이다. 그가 『숙부님(卞百燮)이 총소리가 나기 전에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고 처형당했다』며 이런저런 얘기를 해줬다. 우리는 『처형장까지 갔다 온 사람이 어떻게 살아 올 수 있느냐』며 그를 不信(불신)했다.
그는 『전쟁에도 私(사)가 있다. 그래서 살아왔다』고 설명했지만, 우리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 그 사람은 權五晳씨의 일족이다.
진전면에서는 전쟁 전에도 자생하는 좌익들이 北에서 파견돼 내려온 빨치산들과 손을 잡고 활동을 벌였다. 인민위원회나 치안대는 다 이곳 사람들이 만든 것이다. 전쟁 나고 재빠르게 반동분자들을 잡아들이고 처형했다. 국군에 밀려서 도망가면서 학살을 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계획대로 양민을 학살한 것이다. 북한 공산당과 인민군이 내려와서 강제로 시킨 것이 아니라, 자생적인 공산주의자들이 인민군의 힘을 믿고 자기 세상이 왔다고 날뛴 것이다.
◈ 학살된 卞百燮 면장의 딸들의 증언
『우리 가족은 언제 또 세상이 뒤집어질까, 겁을 내며 살았다』
아버지의 시신은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돼 있었다. 아버지의 시신을 수습하고 장례를 지낸 어머니는 일곱 명의 딸과 생후 3개월인 핏덩어리 아들을 돌봐야 했다. 어머니는 당시 40세였다. 부자였던 어머니 친정에서 도움을 주긴 했지만, 우리 집안은 그후 가난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일곱 번째 딸인 여동생은 전쟁통에 굶고 병이 들어 죽었다. 막내 남동생도 비슷한 때에 병이 들었다. 어머니는 아직 핏덩이인 아들을 살리기 위해 쌀 몇 톨이라도 생기면 병든 딸을 굶기고 아들만 먹였다.
어머니가 어디서 점을 봤는데 점쟁이가 『딸이 죽어야 아들이 산다』는 얘기를 했다고 한다. 어머니가 무심결에 한 그 얘기를 앓고 있던 세 살짜리 여동생이 들었다. 동생은 철없이 『엄마 그러면 내가 죽을게』라고 했다. 얼마 후 동생은 죽었다.
돈이 없어 우리 딸들은 국민학교를 겨우 나왔다. 5¡16이 난 뒤에야 여섯째 딸만 원호자녀 혜택을 받아 겨우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다행이 외아들인 남동생은 일류대학을 졸업하고, 국립 연구소에서 높은 자리에 있다.
우리 가족은 언제 또 세상이 뒤집어져서 피해를 받을까, 겁을 내며 살았다. 면민들이 아버지의 송덕비를 세울 때 「흉악한 무리들에게 목숨을 잃었다」는 글을 넣으려는 것을 우리 가족들이 빼달라고 했다. 그 글이 문제가 돼 나중에 또 피해를 입을까 겁이 나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