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복(福)있는 사람은 악인(惡人)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罪人)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傲慢)한 자(者)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1:1 복 있는 사람 - 시편은 이처럼 서두(序頭)를 '복'이라는 말로써 시작한다. 히브리어 '아쉬레이 하이쉬'는 직역하면 '그 사람의 복이여'이다. 즉,'아쉬레이'는 '올바르다', '번영하다'라는 의미의 동사 '아솨르'에서 유래된복수 명사의 연개형인데, 여기에서는 감탄사 형식으로 사용되었다. 히브리어에서는 어떤 명사가 뒤따르는 단어와 의미상 소유격 관계에 놓일 때 앞의 명사를 연계형으로 만들어 '...의'로 해석한다. 한편 구약 성경에서 '븍'이란 뜻을 가진 단어로는 '바라크'와 '아솨르'가 있다.
먼저 '바라크'는 파생어까지 포함하여 415회정도 나오는데 주로 하나님이 누군가를 축복할 때 하나님에 의해 사용되었거나(창1:22;2:3;12:2;17:16;22:17;25:11;35:9;민 6:27;대상 13:14;말 3:10), 신적 권위를 가진 대리인에 의한 축복선포 때 사용되었다(창 27:4;47:9;출 39:43;신 1:11;삼화19:39). 이 단어는 또한 복을 간구하거나 축원할 때에도 사용되었다(3:8;왕상 1:47;잠3:33). 이처럼 '바라크'는 하나님의 축복을 나타내는 가장 일반적인 단어로 인간의 선행과 관계없이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의 큰 긍휼과 자비를 인하여 인간의 산업과 후손과 육체에 내려주시는 복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
그리고 이 단어의 또 다른 특징은 항상 하나님의 언약과 관계가 있다는 점이다. 한편, 70인역에서는 이 '바라크'를'율로기아'로 번역하고 있다. 다음으로 '아솨르'는 거의 복수 연계형인 '아쉬례이'로 사용되었는뎨 구약에 총 44회 중 시편에 26회, 잠언에8회가 나오고, 유기와 전도서에서는 각각 1회씩 나온다(욥 5:17;전 10:17).
이 단어는신 33:29에서 맨 처음 나오는데 성문서 외에는 왕상 10:8;대하 9:7;사30:18;32:20;56:2;단 12:12에서 사용되었다. 그런데 이 '아솨르'는 대개 하나님과의인격적 교제 안에서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 대한 보상으로 내리는 복에 대하여인간이 고백 혹은 기원하는 형식으로 사용되었다(Weiser). 한편, 70인역에서는 이 단어가 '마카리오스'로 번역되었다.
이 '마카리오스'의 독특한 특징은 하나님 나라에의 참여를 통해 오는 특이한 즐거움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는 점이다(Kittle). 따라서 구약 지혜 문학의 첫 권인 시편의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말씀,즉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하는 자의 복에 대한 선언은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하나님 나라의 복을 예표하는 것으로 볼 수있다. 다음으로 '사람'의 히브리어 '이쉬'는 원래 남성을 뜻하는 단어이다(창 2:23).
그러나 여기에서는 모든 인간을 가리키고있는 바, 여성도 축복의 대상에서 제외되지 않는다(Luther). 특히 사람이란 단어는 그앞에 정관사 '하'가 붙은 단수인 반면 복이란 단어는 복수임을 주목해 보아야 한다. 이에는 누구든지 야훼의 율법에 따라 사는 그 사람만이 여러 형태의 복을 누릴 것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있다. 따라서 시편 기자는 복을 기원하는 큰 탄성으로 시편이라는 대단원의 막을 열면서 그러한 복을 누릴 사람의 삶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있음을 알 수 있다.
악인의 죄를 좇지 아니하며 - '악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사'는 '유죄한자', 곧 '법정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자'를 의미한다(Kraus, Twot). 그런데 여기서는 하나님의 율법 앞에서 죄인으로 입증된 자를 말한다.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율법대신에 자신의 삶의 원리가 있다. 이것이 바로 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에차')이다.
이 말은 의도, 도모 등으로 번역될 수 있으며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 없는 인간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 '죄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타임'은 표적을 빗나가거나 또는 길을 잃어버린다는 의미의 '하타'에서 파생된 말로서 하나님의 율법에서 빗나간 자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들은 하나님의 길(율법)을가지 아니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간다.오만(傲慢)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 '오만한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레침'은 '조롱하다', '비웃다'는 뜻의 동사 '루츠'에서 파생된 명사형으로 '조롱하는자'를 의미한다. 여기서는 하나님을 향하여 악한 말로 조롱하는 자를의미한다(Kraus). 이들이 조롱하는 말들은 73:8-11;사 28:15;말 3:14 등에 잘 나타나있다. 한편, 본절에 언급된 세 동사들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즉, '좇다', 할라크), '서다', '앉다'는 말들은 죄의 점진적인 과정을 시사해 주고 있다(Weiser).
다시 말해서 죄의 성질이 점점 더 악화됨을이 용어들의 배열을 통해 알 수 있다.
1절. '복 있는.'우리 주님의 유명한 산상수훈처럼, 시편 역시 축복으로 시작하고 있음에 유의하자. '복 있는'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매우 의미심장하다. 히브리어 원문에는 복수형으로 되어 있으며, 그것이 형용사인지 아니면 명사인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많다.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에게 주어질 축복의 다양성 및 그가 누릴 축복의 온전함과 위대함을 배울 수 있다. 우리는 그 내용을 읽고서 '오, 그 놀라운 축복들!'이라고 감탄하게 되며, 그것을 (에인즈워스가 그렇게 하듯이) 은혜받은 사람이 받을 놀라운 축복에 대한 즐거운 탄성으로 간주해도 무방하다. 동일한 축복이 우리에게도 임하기를 기원한다!
다윗은 은혜받은 사람에 대해 소극적인 표현(1절)과 적극적인 표현(2절)으로 묘사한다.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그는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는 사람이다. 그는 더 지혜로운 조언을 받아들이며, 여호와 하나님의 계명 안에서 행한다. 그에게 있어 경건의 길이란 평안과 즐거움의 길이다. 그의 걸음은 하나님의 말씀의 지시를 받으며, 육욕적인 사람들의 교활하고 악한 계략을 따르지 않는다.
우리의 외적인 삶이 변화되고 불경건한 행동으로부터 멀어진다는 것은 내적인 은혜를 풍성하게 받았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그는 예전에 비해, 더욱 선별된 사람들과 더불어 동행한다. 비록 그 자신이 죄인이긴 하지만, 이제 그는 보혈로 씻음을 받은 죄인이며, 성령에 의해 소생함을 받았고, 또한 그 심령이 새로워졌다.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로 의인의 회중 가운데 서 있는 그는 악을 행하는 무리들과 감히 어울리려 하지 않는다.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그는 금욕주의자들의 냉소 안에서 아무런 안식도 발견하지 못한다.
어떤 이들은 죄와 영생, 지옥과 천국, 그리고 영원하신 하나님 등에 대해 비웃는다. 하지만 그는 신앙심이 없는 사람들보다 더 나은 철학을 배웠고, 하나님의 임재를 분명히 자각하고 있는 까닭에 그분의 이름이 모독받는 것을 견딜 수 없다. 오만한 자의 자리는 매우 높아 보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지옥의 문에 아주 가깝다. 거기로부터 달아나자.
왜냐하면 그곳은 이내 공허해질 것이며, 멸망이 거기 앉는 사람을 삼킬 것이기 때문이다. 1절에서 사용된 점층법에 유의해 보라.
악인의 꾀를좇지 아니하며죄인의길에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사람들이 죄 가운데서 살아갈 때 그들은 점점 더 나쁜 길로 들어서게 된다. 처음에는 단지 부주의하고 악한 자, 곧 하나님을 망각한 자의 꾀를'좇는다'-
그 죄악이 상습적이라기보다는 실리적이다. 하지만 후에 그들은 상습적으로 악행을 저지르게 되며, 하나님의 계명들을 의도적으로 어기는 죄인의 길에 '서게' 된다. 또한 이를 그대로 방치하면, 그들은 한 단계 더 나아가 스스로 유해한 선생 혹은 다른 이들을 유혹하는 자들이 되며, 그리하여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게'된다. 그들은 죄악 가운데서 학위를 취득하고, 파멸 박사로 임명되며, 다른 이들에 의해 악마의 권위자로 높임을 받는다.
반면에 복 있는 사람, 곧 하나님의 모든 축복들을 소유한 사람은 그러한 인물들과 더불어 아무런 교제도 나눌 수 없다. 그는 이 문둥병자들로부터 자신을 순결하게 지킨다. 그는 마치 더러워진 의복을 벗어 버리듯이, 자신에게서 악한 것들을 제거한다. 그는 악한 자들에게서 이탈하여 동지도 없이 홀로 걸어가며, 그리스도께 대한 비난을 스스로 짊어진다. 죄인들로부터 그처럼 격리된 자에게 얼마나 놀라운 은혜가 임하겠는가! 이제 복 있는 자의 적극적인 특성에 대해 알아보자.
1절.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그들의 서로 다른 성격과 행실을 보여주는 특정한 상황들에 주목해 보라. (1) 불경건한 자는 자기 나름대로의 분별력을 갖고 있다. (2) 죄인은 자신의 길을 걷는다. (3) 오만한 자는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악인은 종교에 관심이 없다. 그는 자신의 구원이나 다른 이들의 구원을 위해 열심을 내지 않는다. 또한 그는 다른 사람들을 권고하고 조언하여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계획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하며, 기도나 말씀 공부, 회개 등의 일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그런 일들을 할 필요가 없다. 다만 정직하게 살고, 종교 문제로 법석을 떨지 말라. 그리하면 마침내 잘되어 갈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람의 권고를 좇지 않는 자는 복이 있다. 그는 이런 사람들의 방법을 따르지 않으며, 그들의 계획에 따라 행동하지도 않는다.
죄인이 범죄에 빠지는 구체적인 방식들이 있다. 어떤 사람은 주정뱅이이고, 어떤 사람은 부정직하며, 어떤 사람은 정결하지 못하다. 온갖 종류의 모든 죄악에 빠진 사람은 드물다. 탐욕에 빠져 있으면서도 주정뱅이를 혐오하는 자들이 많으며, 탐욕을 혐오하는 주정뱅이들도 많다. 각자에게는 자신이 쉽게 범하는 죄가 있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악한 자로 하여금 자신의 길을 버리게 하라'고 말한다.
그런 사람의 길에 서지 않는 자는 복이 있다. 오만한 자는 모든 종교와 윤리를 자신과는 무관하게 생각하고 자신에게 적용하지 않는다. 그는 불경건함 가운데 자리를 잡고 앉아 나름대로의 확신을 갖고 있으며, 또한 죄를 조롱한다. 그의 양심은 마비되었고, 그는 모든 불신에 대한 신봉자이다. 그러나 그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다. -아담 클라크.
1절. '복 있는.' 히브리어 원문에 '복'이라는 단어는 복수형 명사 '아쉬레이'(yrva)이다. 이는 모든 축복들이 탈선하지 않은 자의 몫임을 뜻한다. 그것은 마치, '······하는 사람은 범사에 형통한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당신이 논쟁에 빠지는 이유가 무엇인가? 왜 공허한 결론을 이끌어 내는가? 만일 어떤 사람이 값비싼 진주를 발견했다면, 즉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하고 악한 자로부터 분리되는 길을 발견했다면, 모든 축복들이 그의 것이 된다.
하지만 그가 이 보석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는 축복들을 찾아 헤맬 것이지만 결코 하나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순수한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순수하듯이,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사랑스럽고, 선한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선한 법이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은 당신 자신의 상태에 달려 있다. 비록 하나님은 피조물이 아니시지만 피조물의 상태에 맞추어 자신을 나타내신다.
그분은 사악한 자에게는 악하게 대하시며, 거룩한 자에게는 거룩하게 대하신다. 그러므로 악한 자에게는 선하거나 좋은 것이 전혀 없다. 하나님의 율법을 달콤하게 여기지 않는 자에게는 아무것도 달콤하지 않다. 여기서 '꾀'라는 단어는, 법령과 법률에 의해 구성 및 존속되지 않고서 존재할 수 있는 인간 사회란 하나도 없다는 점에서, 법령과 교훈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다윗은 이 용어를 통해 악인의 교만을 겨냥하며 그의 만용을 꾸짖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여호와의 율법 안에서 행할 정도로 자신을 낮추지 않을 것이며, 자기 자신의 꾀를 좇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가 그것을 가리켜 그들의 “꾀”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것이 그들이 사리를 분별하는 방법이며, 그것이 그들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없는 듯이 보이는 길이기 때문이다. 악한 자가 멸망당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들은 자신의 눈에, 그리고 자신의 사리 분별에 따라 옳은 길이라고 여기는 옷 속에 자신의 잘못을 감추고 있다. 만일 그들이 자신의 잘못을 공공연하게 노출시킨다면, 우리가 그들과 함께 행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토록 축복받는 일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다윗은 여기서, “악인의 어리석음” 혹은 “악인의 잘못”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는 옳은 듯이 보이는 것에 조심하도록, 즉 광명의 천사로 변장한 마귀가 우리를 간교하게 꾀지 못하도록 최선을 다하라고 우리에게 권고하고 있다. 또한 그는 악인의 꾀를 여호와의 율법과 대조시켜 우리로 하여금 양의 옷을 입은 늑대를 조심하라고 말한다. 악인은, 그 어떤 사람보다도 무자격자이면서도, 모든 사람들에게 조언을 하고 가르치며 도와주겠다고 준비하고 있다. “서지”라는 단어는 그들의 완고함과 완악함을 서술하는 용어이다.
그들은 스스로 매정해지며, 적의를 품은 말로 변명하고, 또한 자신의 불경건함 가운데서 교정 불가능한 상태에 빠져 있다. 성경의 상징적 표현 방식에 있어 ‘선다’는 것은 굳건히 고정됨을 나타낸다:“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롬 14:4). 그러므로 ‘기둥’이라는 말은 히브리어에 의하면 ‘서다’라는 동사로부터 유래된 것이다. 라틴어의 ‘상’(像)도 ‘서다’라는 동사에서 유래된 말이다. 하지만 악인이 서는 것은 자기 변명이요, 스스로 완고해지는 것일 뿐이다.
그들은 옳은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며,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뛰어난 일을 하여 영원토록 빛나는 듯이 보이고자 한다. “자리”라는 용어와 관련하여서는, 자리에 앉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며 지도자와 선생으로서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마 23:2)라는 말씀과 같다. 그들은 교회 안에서 해악을 끼치는 자리에 앉아 있으며, 철학자들의 견해들과 사람들의 전승(傳承)들과 그들 자신의 두뇌에서 나온 권면들을 늘어 놓고, 하나님의 말씀과 양심에 따라 살고자 하는 성도들을 억압한다. 반면에, 그들은 영혼을 살리고 살찌우며 보존해 주는 하나님의 말씀은 가까이하려 하지 않는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
1절. “오만한 자.” 악인은 깊은 죄악 가운데 빠지면 다른 사람들을 경멸하게 된다. 히브리인들은 “누가 너로 우리의 주재와 법관을 삼았느냐”(출 2:14)라고 모세를 경멸했다.
아합은, 미가야가 자신에게 유리한 예언을 하지 않는다고 하여 그를 핍박했다(왕상 22:18). 벧엘의 모든 아이들은 엘리사를 비웃으며 “대머리여” 하고 함부로 조롱했다(왕하 2:23).
조그만 독 한 방울이 증가되어 거대한 독의 바다를 이룬다. 독사의 독 한 방울이 손에 묻어 혈관 속으로 들어가서 온 몸에 퍼지고, 마침내 가장 중요한 부위인 영혼까지 질식시키고 만다. 하나님이 저희를 비웃으실 것이다(시 2:4). 왜냐하면 저가 그분을 비웃었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 계신 그분을 경멸하는 자는 결국 경멸을 당할 것이다. 하늘을 향해 뱉은 침은 결국 자신의 얼굴에 떨어지고 만다.
당신이 영적 의사들을 경멸하면 당신은 재가 되어 파멸에 이를 것이다. 하지만 당신의 영혼이 심판에 처하지 않도록 오만한 자의 자리에서 일어나라. -토머스 애덤즈(Thomas Adams, 1614).
본 시편은 구체적인 제목이 없으나 분명히 예레미야 시대 이전에 기록된 것으로 알려졌다. 왜냐하면 예레미야 17:5-8에 시편 1편의 일부 구절이 인용되었기 때문이다(PurKiser). 일반적으로 주석가들은 이 시편 1편이 전체 시편의 서론격인 서문이라고 보았는데 '제롬'(Jerome)에 의하면 많은 사람들이 본문을 '성신의 머리말'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또 어떤 교부들은 시 1편을 전혀 시로 인정하지 않고 두 번째 시를 첫 번째 것으로 간주하면서 단지 1편은 서문으로만 보았다(Conder).
실제로 이에 대해서 신약의 많은 사본들 중에서는 행 3:33의 '둘째 시편'을 '첫 번째 시편'으로 표기하고 있는 것들이 많다.
한편 본 시편은 시편 전체의 중심적 주제를 '복 있는 사람'이라는 표제적 용어로 압축시키고 있는바 '헹스텐버
그'(Hengstenberg)는 이에 대해서 '본 시편은 시편의 전체적 주제를 짧게 압축적으로 요약한 서론격의 시다. 즉 하나님께서 악인에게는 멸망을, 의인에게는 구원과 흥함을 허락하신다는 것인데 이것은 시인이 괴로운 삶의 풍부한 경험 가운데서 터득한 위대한 진리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구조상 본 시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대구적인 병행을 이루고 있는데 1-3절은 의인의 성격과 조건이 서술되어져 있으며, 그들에 대한 보상이 주어져 있고, 4-6절에서는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 필경은 그들의 궁극적인 파멸로 나타남을 강조하고 있다(Conder).
영국 런던의 테임즈 강변에 재판소가 있는데 그 재판소의 뜰에포도나무 한 그루가 있었읍니다. 그런데 이 포도나무에서 열리는 포도는 영국에서 가장 맛이 좋았읍니다. 그래서 식물학자들이 이 포도나무를 번식시켜 널리 보급하기 위하여 조사를 해 보니 다른 포도나무와 조금도 다른 점이 없었읍니다. 학자들이 어떻게 하여 이 포도나무가 다른 포도나무보다 맛있는 열매를 맺는지 자세히 알아봤더니 이 포도나무의 뿌리가 강 밑바닥에까지뻗어 있었읍니다. 뿌리가 강 밑바닥에 뻗어 있으니 웬만한 가뭄에도 충분한 수분을 빨아들일 수 있었고 다른 곳보다 더 많은영양을 섭취할 수 있어 영국에서 가장 맛있는 열매를 맺을 수있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복 있는 사람이 되면 겉보기에는여느 사람과 다름이 없지만 그 사상과 삶의 철학과 신앙의 뿌리가 하늘보좌에까지 뻗어 있으므로, 온갖 기근과 세상의 변혁이다가온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므로 영혼이 잘됨같 이 범사에 잘 되어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으며 남에게꾸어 줄지언정 꾸지 아니하며 기적이 나타나 수많은 사람들에게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게 되는 것입니다. 풍수지리설처럼 자연환경을 통하여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악인의 꾀를 쫓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여 하나님 앞에 복 있는 사람이 되면, 이 복 있는 사람은가는 곳마다 넘치는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복 있는 사람.' 복 있는 사람을 뜻하는<vyaih; yrev]a' ; 아쉐레 하이쉬>는 어원학 상으로 '엄격하게 아주 바른 길'이란 의미에서 유래된 말로서 이런 길을 가는 자들은 형통하게 될 것이라는 뜻을 전제하고 있는 단어이다. 또 문법적으로는 '축복의 절규' 혹은 '축복이 그런 자에게 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Moll, Conder). 이 말에 대해서 70인 역에서는 '마카리오스'(makavrio")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 용어는 마태복음 5:3-11에 언급되는 팔복에서도 사용된다(PurKiser). '악인.' 이 단어의 히브리말은<!y[iv;r] ; 레솨임>인데 이 어휘에 대해서 커크패트릭(Kirkpatrik)은 '악의 본래 개념을 생각해 볼 때 그 용어는 인간 본성에 초래되었던 본질적 부조화를 말하는데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라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악인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자'를 뜻한다. 한편 이러한 자를 따르는 자는 아직까지 확고부동한 신앙적 기준으로 살지 못하는 자로서 '악인과 우연하고 일시적인 교제를 가지는 자'이다(PurKiser). '죄인의 길.' 여기서 말하는 죄인은 행동적인 측면에서 분명히 죄를 일삼으며 사는 자로서 상습적이고 고의적인 범죄자, 즉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살아가는 자를 말한다. 따라서 죄인의 길은 죄를 밥 먹듯이 일삼으며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의미한다.
본 시편 제1편은 시편 전체의 서론과 같은 것으로, 하나님이 의인에게는 구원을 악인에게는 멸망을 주신다는 것이며, 이 진리는 시편 전체의 주제입니다. 본문에서는 '복 있는 사람'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1. 가치관의 문제 1)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함 여기에서 말하는 '악인'은 하나님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불경건한 소극적인 죄인으로서 도덕적으로 정당한 가치 기준에서 벗어난 자를 가리킵니다. '꾀'는 계획, 기도, 경영 등을 뜻하는 것으로 악인의 인격에서 나오는 생각 전반을 가리킵니다. 즉 '악인의 죄를 좇지 않는다'는 것은 악인의 사상과 그의 계획에 동조하거나 추종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도덕성의 타락은 악인들과의 접촉, 불경건한 도서, 매체물 또는 악한 생각을 되풀이함으로써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양심과 의지력과 도덕적 감각이 무디어져 가는 데서옵니다 악인은 하나님을 공경하지 알기 때문에 도덕성의 타락을 일깨워 주고 그들의 타락에 제동을 걸만 한 기준인 '말씀'이 없으므로 사탄의 유혹에 무방비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악인의 죄를 좇는다는 것은 자기의 운명을 사탄에게 위임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2) 가치관의 문제 '악인의 꾀'를 좇지 않게 되는 데에는 가치관의 정립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인간이 어떤 일에 가담한다는 것은 자기 가치관에 의하여 먼저 자기 자신이 그 앞에 승복해야 합니다. 하와가 뱀의 유혹에 가담하게 될 때에도 그러했습니다. 하와는 뱀의 말에 동조하고 그의 유혹에 승복함으로써 죄를 범했습니다(참조, 창 3:4-6). 이 범죄 과정에서 우리는 하와의 가치관이 뱀에게 동조, 승복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요셉은 보디발 아내의 유혹을 물리쳤습니다. 그가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고상한 가치관이 그러한 부도덕한 죄를 용납할 수 얼었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창 39:9). 가치관은 종교의 소유 여하에 따라 또는 어떤 종교를 신봉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종교는 모든 가치의 고향이기 때문입니다.
2. 인생관의 문제 1)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함 '죄인'은 의도적이고 행동적으로 야비하고 분명한 죄를 공공연히 짓는 자를 가리키며, '길'은 방향을 뜻하고 있습니다.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한다'는 것은 삶의 방향이 죄인과 같지 않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언제나 두 길의 분기점에 서 있습니다. '보라 내가 오늘날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신 30:15) 복 있는 자는 언제나 생명과 복의 길을 선택하고 죄인은 언제나 사망과 화의 길을 선택합니다. 어느 길을 선택하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인생관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선택의 결과에 따른 책임은 매우 엄중하고도 필연적임을 알아야 합니다. 2) 인생관의 문제 사람이 어떤 인생관을 갖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삶의 방향은 달라집니다. 삶의 방향뿐만 아니라 삶을 어떻게 영위해 가느냐 하는 것도 인생관에서 비롯됩니다. 인생관은 인간관 및 물질관을 포함하고 있으며, 직업관, 처세관, 윤리관도 이 인생관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인생관의 형성은 가치관에 의해서이며, 가치관의 형성은 종교관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3. 종교관의 문제 1)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함 여기에서 '오만한 자'란 종교를 비방하고, 거룩하고 건실한 것에 대하여 조소하여 멸시하는 태도를 갖는 자를 말합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종교는 무력한 자의 도피처이며, 거룩과 진실은 다만 위선과 허구일 뿐입니다. 이들은 종교를 인간의 자주성을 마비시키는 아편으로 생각하며, 종교적 삶을 노예 제도에 얽매인 삶으로 규정합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자기 또는 인간의 능력에 최대의 경의를 표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바벨탑을 쌓고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빛내자'(참조, 창 11:4)고 하는 자들입니다. 여기에는 힘(능력)의 오만, 지식의 오만, 도덕적 오만, 그리고 때로는 영적인 오만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2) 종교관의 문제 이 '오만한 자'들의 종교는 휴머니즘입니다. 인본주의. 인간만능주의가 그들의 신앙입니다. 휴머니즘이 종교의 빛을 받으면 정당한 가치를 발휘 할 수가 있으나 그것이 종교와 대등하게, 또는 우월한 위치에 서려 할 때에는 반드시 종교의 적이 됩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 십자가를 져야 한다(참조, 마 16:21)는 것은 종교입니다.
그리고 '주여 그리 마옵소서'(마 16:22)라고 하는 것은 휴머니즘입니다. 종교는 '하나님 의 일'(마 16:23)이며, 휴머니즘은 '사람의 일'(마 16:23)입니다. 오만한 자들은 '사람의 일'로 '하나님의 일'을 대신하려 하며, '사람의 일'을 성취하기 위해 '하나님의 일'을 무시합니다. 이들의 모든 생각과 사상은 그것의 기저를 '인간'에 둔 인본주의의 가치관입니다. 그러나 복 있는 사람은 가치관, 인생관, 종교관을 하나님께 그 근거를 두고 있는 사람입니다.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시 1장] [내용개요] 본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의인이 받는 복(1-3절)과 악인이 당할 저주(4-6절)에 대해서 대조적으로 노래하고 있다. 이는 전시편의 주요 사상과 일관된 것으로서 시편 전체의 서론 부분에 해당한다.
[강 해] 시인은 복 있는 사람과 악인을 대조시키면서 하나님의 공의로 다스리심을 노래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영육간에 복을 주시어 모든 일에 형통케 하시지만 악인에 대해서는 진노의 심판을 내려 멸망케 하십니다. 의인과 악인에 대한 심판은 이 땅의 삶 속에서도 이루어지지만 궁극적으로는 마지막 심판 날에 완성될 것입니다.
1. 복 있는 사람
1) 악인의 죄를 좇지 아니함 복 있는 사람은 세상의 재물이나 명예나 권력을 소유한 자가 아닙니다. 진정한 복은 물질적인 면에 있지 않고 영적인 면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복 있는 사람의 정의를 악인의 죄를 좇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여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는 자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모두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비정상적인 상태를 가리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언제나 의인을 본받아 행하고 겸손한 자리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자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과의 잘못된 관계를 벗어 버리고 바른 관계를 맺는 자가 복 있는 자인 것은, 하나님께서 그러한 자에게 복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a. 임의대로 행함(시81:12) b. 불선한 길(시36:4)
2) 여호와의 율법을 사랑함 복 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항상 묵상하는 자입니다. 여호와의 율법을 사랑한다는 것은 곧 여호와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속성을 계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에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묵상하는 자는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으나 죄로 말미암아 그 형상을 상실한 인간이 율법을 묵상함으로써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됩니다. 율법을 즐거워하여 묵상하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하나님의 법을 좇아 행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자에게 복을 내려 주십니다. a. 심중에 있는 법(시40:8) b. 범죄치 아니하려 함(시119:11) c.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요일5:3)
2. 의인과 악인의 결국
1) 형통하는 의인의 행사 죄악의 길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하여 지키는 자는 그 행사가 다 형통하는 복을 누리게 됩니다. 수분이 충분히 공급되는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는 시절을 좇아 과실을 풍성하게 맺고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않습니다. 복 있는 자는 복의 근원이 신 하나님께서 항상 동행하시기 때문에 모든 일에서 형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영혼이 잘 되면 범사가 형통하게 되는 것이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축복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그 행위의 열매를 먹게 하시므로 의인은 복이 있는 것입니다. a. 수고한 대로 먹게 됨(시128:2) b. 주께서 함께하심(창39:3) c. 행위의 열매를 먹음(사3:10)
2)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악인 의인이 시냇가에 심은 나무같이 그 행사의 형통함을 누리는 반면에 악인의 행사는 바람에 날아가 버리는 겨와 같습니다. 바람 앞에서 겨는 순식간에 날아가 버려 그 자취를 감추어 버리고 맙니다. 이는 악인의 행하는 일이 허무하고 무가치함을 의미합니다. 악인은 스스로 승리하기 위하여 계획을 세우고 그 일을 추진하지만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 속히 멸망상하여 사라져 버립니다. 즉 그들의 행사는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입니다. 악인이 이와 같이 사라짐을 당하는 이유는 창조주요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이면서도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치 않고 스스로 교만히 행하는 자에 대하여 반드시 심판을 내리십니다 a. 불에 태워질 쭉정이(마3:12) b. 악인의 소득인 바람(시11:6) c. 바람에 나는 겨(욥21:18)
3. 하나님의 심판
1) 악인은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함 하나님께서 선악간에 심판하실 때 악인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고 멸망당하여 악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공의로 행하시므로 의인에 대해서는 복을 주시고 악인에 대해서는 징벌을 내리십니다. 최후의 심판 날에 의인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받아 영생을 누리는 복을 받습니다. 그러나 악인은 의인과 함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사도 요한은 계시록에서 이와 같은 사실에 대해 증거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문에 들어갈 권세를 얻게 되지만 개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밖에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참조, 계22:14-15) a. 의인과 분리됨(마13:49) b. 영벌에 들어감(마25:46)
2) 의인과 악인의 길 시인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라는 말씀으로 시를 마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는 길은 형통과 승리의 길입니다. 반면에 악인의 길은 망하는 길입니다. 이 세상의 일들 속에서는 의인이 고난을 당하고 악인이 승승장구하는 것같이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최후의 심판자가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시므로 의인이 승리하고 악인이 망하는 원리는 반드시 성취되어집니다. 악인들이 자고하고 스스로 높일지라도 그들의 결국은 멸망일 뿐입니다. 이러한 심판의 완성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날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a. 자기 백성을 아심(딤후2:19) b. 심은 대로 거두어들임(갈6:7) c. 악인의 소욕은 멸망(시112:10)
결론 성도는 의인과 악인의 결국이 어떠함을 증거하는 본문 말씀을 믿고 그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의인의 길보다는 악인의 길이 더 넓고 걷기가 쉽습니다. 의인의 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최후의 승리와 영광의 길이 의인의 길임을 잊지 말조 언제나 주의 말씀을 좇아 행하는 복된 자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단어해설] 1절 .복. 원어 <yrEv]a':아쉬레이>는 '번영, 행복'을 뜻하며 '올바르다, 번영하다'라는 <rv,a,:아솨르>에서 유례. 즉 하나님의 은총에 의한 행복을 나타냄. 악인. 원어 <[v;r::라솨>는 '유죄한 자, 법정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자'를 뜻. 2절. 율법. 원어 <hr:/T:토라>는 하나님의 교훈과 훈계가 담겨 있는 모세오경을 가리킴. 3절. 시냇가. 원어 <gl,P,:팔라그>는 자연적인 냇물이 아니라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수로임. 4절. 바람에 나는 겨. 곡식은 까부려서 쭉정이는 바람에 날려 보내는 것을 말함. 5절. 심판. 원어 <fP;v]mi:미쉬파트>는 '공의, 심판, 정의'를 뜻. 의인의 회중.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떳떳이 설 수 있는 사람들의 모임. 6절. 망하리로다. 원어 <db'a;:아바드>는 '소멸하다, 멸망하다, 죽다'를 뜻.
[신학주제] 성경이 말하는 복의 사상. 본시가 말하고 있는 복의 개념은 무병장수와 물질적 풍요를 복으로 생각하는 일반적 복의 정의와는 다르다. 다시 말해서 본시가 말하고 있는 참된 복은 우선 말씀을 깨달음으로서 마음에 기쁨이 찾아 드는 것이라고 규정 짓고 있다. 사실 영적인 순결함 없이는 말씀을 깨달을 수 없는 것이다. 또한 본시는 복이 필연적인 결과로 주어지는 것임을 밝히고 있다. 이는 오늘날 만연하고 있는 기복 신앙과는 차원이 다른 것으로서, 진정한 복은 의식적인 종교 생활만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가 계절을 따라 열매를 맺는 것처럼 자연적인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다.
[영적교훈] 본시는 복 있는 사람의 생활은 악을 거부하는 생활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날마다 묵상하는 생활임을 보여 준다. 반면에 악인은 참 생명과 진정한 기쁨을 소유하지 못한 허망한 존재임을 보여 주고 있다. 따라서 의인은 하나님의 율법 안에서만 참 기쁨을 공급받을 수 있음과 생활의 순간 순간마다 말씀을 기억하며 생명의 길로 나아가야 함을 배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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