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광호 목사
현재 우리나라에는 전반적으로 무속신앙의 바람이 강하게 불고 있다. 점쟁이들이 호황을 누리고 있으며 굿하는 무당들이 저들의 종교적 사업으로 인해 바쁘다. 많은 사람들이 무속신앙의 위험을 이야기 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실제는 줄어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번창하고 있다. 아마도 사람들은 외부로 드러나는 말로는 염려하면서 보이지 않는 내면의 삶이나 행동으로는 더욱 밀접히 무속신앙을 접하고 있는 모양이다.
심지어 과학적이며 지성적이라고 하는 대학들 가운데는 무속이나 풍수지리에 관련된 모임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것이 단순히 연구하는 학회라고 한다면 문제될 것이 없다 할지 모르지만 마치 종교써클과 같은 기능을 한다니 문제인 것이다. 나아가서는 어떤 대학에서는 무속이나 사주팔자, 풍수지리등을 정규과목으로 채택하여 실습도 병행하려는 채비를 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염려하는 바는 단순한 일반 사회의 현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내부에도 무속신앙적 요소가 판을 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수의 교인들은 남보다 더 많은 복을 받을 욕심으로 기독교적 모양새를 유지한 채 무속적 행위들을 상당부분 답습하고 있다.
그에 대해서는 많은 교회들이나 교회 지도자들도 크게 한 몫 하고 있다. 신년에는 더 많은 축복을 받기 위해 신년을 앞두고 '신년맞이 축복 대성회'를 하는 것이 이미 우리에게는 새롭지 않다. 얼마전에 있었던 대학입학 수능시험을 앞두고는 입시생을 둔 많은 종교인들이 절을 찾거나 산기도를 위해 산을 찾거나 혹은 교회당을 찾았다. 불교인들은 자기 사찰을 찾아가 기도하고 무속신앙인들은 용하다는 점집이나 신령한 산들을 찾아가 기도하는 모습들을 보였다. 그리고 많은 기독교인들은 교회당이나 기도원을 찾아가서 기도하기도 하고 목사님들의 축복기도를 받기도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녀의 수능시험에 어떤 효과가 있으리라는 기대를 했던 것이다. 이렇듯이 기독교가 다른 종교인들과 별 차별이 없는 동일한 신앙적 행보를 한다는 것은 이미 세속화된 것을 의미하며 한국인의 무속신앙의 영향을 심각하게 받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2
근자에 와서는 일반적인 무속행위 뿐만 아니라 풍수지리에 대한 관심이 부쩍 일고 있다. 그것은 기독교 내부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풍수지리가 무엇이길래 사람들이 그렇게 관심을 가지는 것인가?
풍수지리설은 지금 현재 뿐만 아니라 미래에도 지속적으로 복을 받고싶은 욕심으로 인해 더욱 인기를 끌고 있으며, 이는 음양오행설을 그 기반으로 하고 있다. 여기서 인간들이 결코 떨어져서 살 수 없는 천지(天地)는 그 중에서도 더욱 중요하며 땅은 무생물체가 아니라 기(氣)를 가진 살아있는 존재로 인식된다. 풍수신앙이 일반적인 기복신앙과 다른 점은 눈 앞의 단기적 축복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더욱 장기적이며 지속적인 축복을 기구한다는 점이다. 즉, 현세의 자신이나 가족 뿐 아니라 후세손들의 운명까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풍수(風水)란 바람과 물을 의미한다. 풍수란 장풍득수(藏風得水)라는 말에서 나왔다고 하는 데, 이는 '바람을 모으고 물을 얻는다'는 뜻이다. 즉, 바람이나 물처럼 흩어지기도 하고 고이기도 하는 천지의 기(氣)를 현세의 사람이 어떻게 응용하느냐에 따라 현재와 미래의 흉한 일을 길한 일로 바꿀 수 있고 반대로 길한 일을 흉한일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풍수라 하면 양기(陽氣)풍수와 양택(陽宅)풍수, 그리고 음택(陰宅)풍수가 있다. 양기풍수라 함은 민족이나 국가등 집단 단위의 취락이나 도읍과 관련이 있다. 그에 대해서는 고려시대 초기나 조선시대 초기에 새로운 국가의 도읍 선정을 두고 터를 보았던 사실을 우리는 기억한다. 또한 양택풍수란 사람들이 살고 있는 개인 주택에 관련된 풍수를 말한다. 옛날 사람들은 집을 지을 때에도 아무데나 짓지 않고 풍수지리를 보아서 지었으며 그 방향이나 집안의 구조, 그리고 대문의 방향등은 매우 중요했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는 많은 사람들이 아파트 혹은 현대식 가옥에 살게되면서 그에 대해 크게 구애받지 않는 듯 하다. 하지만 오늘에 와서는 집단가옥인 아파트마저도 풍수를 따지는 경향이 점차 확산되어 가고있다.
그리고 음택풍수란 죽은 사람의 시신이 묻히게 될 묘지에 관련된 것이다. 이 음택풍수는 현재의 가족 뿐만 아니라 먼 미래의 후손들에게 까지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양택풍수 보다 오히려 더 중요하게 인식되고 있다. 양택풍수에 대한 관심이 점차 줄어든데 반해 음택풍수에 대해서는 지금도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즉, 현세의 인간이 잘 살기 위해서는 죽은 사람들의 음택으로 부터의 지기(地氣)를 흡수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풍수지리에서는 산 사람의 공간인 현재의 주택 보다는 오히려 죽은 자의 시신이 묻히는 공간인 무덤을 중요시한다. 따라서 죽은 사람의 묻힐 장소를 중시하며, 특히 산세나 물길의 흐름, 그리고 방향을 중시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소위 명당(明堂)을 찾는데 그 명당이란 곧 명(明)이라는 한자글이 보여주듯이 일(日)과 월(月)의 조화 즉, 양과 음이 조화되는 곳을 일컫는 것이다. 그래서 음기(陰氣)인 지기(地氣)가 왕성한 곳에 묘(墓)를 쓰면 그 후손들이 살고 있는 곳에 양기(陽氣)가 가득하여 만사가 잘 된다는 것이다.
3
과학문명과 더불어 살아가는 현대 한국인들 조차 풍수신앙에 대한 이러한 무속적 믿음을 가지게 된데는 사회지도계층의 공로(?)가 지대하다. 잘 알려진 정치가들이나 경제인들 중에는 소위 명당(明堂)을 얻기 위해 애쓰는 자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소위 지도계층의 사람들은, 앞으로 사람이 묻힐 묘지가 차지하게될 공간이 증가됨으로써, 농지나 혹은 달리 사용할 수 있는 땅들이 잠식되기 때문에 장례문화가 바뀌어져야 한다고 목소리들을 높히고 있다. 이것은 국무회의나 국회에서 논의가 될 정도로 중대한 사안이다. 그래서 장례문화에 대한 획기적인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주된 주장의 내용은 아파트식 무덤을 만들거나 매장(埋葬)이 아니라 화장(火葬)을 하도록 국민들을 계몽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그것이 옳은 일이라면 지도계층의 사람들이나 그것을 논의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앞장서 솔선수범하면 된다. 즉, 대통령이나 국회의원들이 자기부터 미리 그렇게 하기로 약속을 하고 자기 가족들에게 미리 그것의 필요성을 계몽한 후, 그런 연구나 주장을 한다면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높은 사람들 가운데 어느 누구하나 자기는 죽고나서 스스로 화장을 원한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다. 일반 시민들에게는 그렇게 하기를 촉구하면서 자기들은 국립묘지의 터좋은 자리를 잡아 묻히기를 원하는 것이다. 얼마나 이기적이고도 모순된 요구인가? 자기들은 산수가 좋은 곳을 골라 묻히기를 원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화장이 좋다느니 아파트식 무덤이 좋다느니 이야기한다면 극단적인 이기주의자가 아닐 수 없다.
풍수지리를 주장하는 자들은, 박 정희 대통령은 경북 구미의 금오산 기슭에 조상의 묘를 잘 썼기 때문에 대통령이 될 수 있었으며, 전 두환 대통령은 조상의 묘지가 명당이기 때문에 출세했고, 노 태우 대통령이 최고 권력자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조상묘가 팔공산의 명당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들은 아무도 박 대통령이 처참한 죽음을 당한 것이나, 전, 노 대통령이 감옥에 갇혀있는 이유가 조상의 묘를 잘못 썼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지는 않는다.
현 정부는 세인들로부터 기독교 정부라고 따가운 비난 받을 정도로 교인들이 중요한 자리에 있다고 하면서 적어도 그 문제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들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 어느 유명 월간지는, 구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는 과정에서 청와대가 지관(地官)들의 자문을 구했다는 사실을 폭로한 바 있다.
지도자들이 방황하고 있다. 소위 '명당' 자리를 찾는 것은 사회 각계각층의 지도자들이다. 가난한 시민들은 현재의 삶에 쫓기기 때문에 소위 명당자리를 찾아나설 엄두도 내지 못한다. 그렇지만 여유있는 내노라 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만은 않은 모양이다. 누구나 알고 있는 잘 알려진 저명한 몇몇 정치 지도자들은 조상의 묘를 원래의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겼다. 그렇게함으로써 자기 목적을 이룰수 있다는 판단을 한 것이다. 그러한 자들은 그 명당자리의 기(氣)를 힘입어 더욱 출세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 자들 조차도 대중 앞에서는 자기가 기독교인이라고 당당히 말하고 다닌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그런 사람들의 무속적 신앙을 정면으로 질타하지 않는다. 이는 저들도 그것을 어느정도 수용하고 있음을 반증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에 편승하여 젊은 청년들은 오늘을 성실히 사는 것에 대한 관심 보다 내일의 운세에 대해 더욱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뿐만 아니라 열심히 살아감으로써 얻는 행복보다는 어떤 계기를 통한 일확천금을 노리거나 갑작스런 어떤 명예나 출세를 기대한다.
소위 문화센터를 자임하는 여러 단체들에서는 <교양강좌>라는 미명하에 역학, 기공, 관상이나 수상 보는 법, 그리고 풍수지리등을 강의하며 고객들을 끌어모으고 있다. 일간지나 주.월간지에서는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무속신앙 관련 특집들을 다루고 있다. 그러한 무분별한 기사들을 통해 시민들의 정서를 어지럽히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 민족에 대한 애착이 더한 것인 양 오해하는 모양이다.
TV나 신문을 비롯한 언론들은 종종 갑자기 스타가 되어 명예와 함께 돈방석에 앉게 된 스포츠 스타들을 부각시키며, 성실하게 일하는 보통 사람 수십명이 한 평생을 벌어도 모으지 못할 액수의 고액을 어떤 스타들은 불과 몇일 만에 벌어들이는 모습을 보여 준다. 그리고 종종 풍수를 보는 지관(地官)들이 나오는 허망한 보도까지 한다. 그 때 그들은 대개 TV 앞에 앉아있는 서민들을 충분히 압도할 만한 권위있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언론은 어려움에 빠져있는 사람들의 가려운데를 적절히 긁어주면서 스스로의 이득을 취하자는 심산인 것이다. 그것은 책임있는 언론의 자세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언론사들이 그러한 보도에 엄청난 열들을 올리는 것을 보면서 동시대를 살아가는 한 성도로서 안타까운 마음 금할 길 없다. 그렇지 않아도 유명 신문사에서 출간한 <아파트에도 명당이 있다> 라는 책이 베스트 셀러에 올라있고, 소위 잘된 사람들의 묘자리나 형태를 설명하고 있는 책이 사람들에게 큰 인기를 누리고 있는 터다. 현재 무속신앙에 관련된 책들은 천여종이 넘는다고 하며 고전과 같은 다른 양서들은 팔리지 않는데도 그런 류의 책들은 불황이 없다고들 한다.
. 뿐만 아니라 PC 통신에는 500여종에 육박하는 정보들이 저장되어 있다고 하며, 천리안, 유니텔, 데이콤, 나우누리 등 모든 통신들에는 아예 사주팔자, 운세풀이, 사주박사, 점성술 등이 개설되어 있어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런 현실적 형편 가운데서 사람들은 그런 어떤 행운이 자신에게도 찾아오기를 무의식 중에 기대한다. 오히려 그런 기대조차없이 성실하게 하루 하루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의 눈에는 어리석게 보일지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무속적인 어떤 요행을 기대하게 되고, 현실에서 그런 것을 주관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사람들은 풍수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며 지관(地官)들의 허망한 조언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리하여 조상의 묘를 다른 곳으로 이장하기도 하고 터가 좋은 다른 집으로 이사를 가기도 한다. 이러한 행위를 하는 사람들은 배우지 못하고 가지지 못한 가난한 사람들이 아니라 도리어 많이 배우고 사회를 지도하는 계층의 사람들에게 더욱 성행한다. 그것이 문제다. 그들의 그런 행위가 사회전반에 엄청난 파급효과를 가지게되는 것이다.
"000 국회의원과 000 회장은 어느 점쟁이의 고객이며, 000 점쟁이는 국회의원중 00명의 고객을 갖고 있다"는 말을 우리는 어렵잖게 들을 수 있다. 그들 가운데는 스스로 기독교인들이라고 주장하는 자들도 적잖다.
4
한국교회내에 무속신앙적 요소가 있는가? 얼마전 소위 교회의 지도자들이 모인 자리에 참석한 적이 있다. 휴식시간의 대화 가운데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주제는 건강문제였다. 그 건강에 관한 이야기가 요즘 한창 유행하는 수맥(水脈)에 관한 이야기로 옮겨졌다. 사람이 살고있는 가옥의 수맥이 흐르는 곳을 잘 파악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건강에 해롭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 따른 이야기가 풍수지리에 관한 내용으로 이어졌다.
그 때 맺어진 결론 아닌 결론은, 우리가 아무리 기독교인이지만 그것을 전혀 무시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미신이라기 보다는 우리 조상들의 경험에 따른 지혜라는 것이다. 오히려 기독교가 이러한 것들을 긍정적인 측면에서 잘 이용하면 교회가 더욱 부흥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지도자들의 자세가 이정도라면 일반 평신도들의 그에 대한 자세는 어느정도 짐작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한국 기독교는 무속신앙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는 말을 자주 들을 수 있다. 이는 한국교회내에는 무속신앙적 요소를 부추기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한 예로, 송구영신예배를 보면서 연보를 곁들여 원하는 바를 기도하면 하나님이 그것을 들어주신다고 가르치는 것은 무속신앙의 영향이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당을 세우면서도 '자리'를 본다. 그리고 기도원을 지으면서도 '자리'를 본다. 단순히 보기좋은 장소에 건축한다는 의미와는 다른 뜻이 담겨있는 것이다. '자리'가 좋아야만 교인들이 몰려든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풍수지리와는 관련이 없는 실용주의적인 사고인듯하지만 여간 위험한 발상이 아닐 수 있다. 어쩌면 그것은 현대판 풍수지리의 영향일지도 모른다. 결국 '자리'와 '잘됨'은 깊은 연관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교회당은 그 '자리' 때문이 아니라 그곳에 모인 성도의 무리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찾아와야 한다. 또한 점을 보고 길흉에 따라 연보하는 기독교인이 있다고 하는 것은 교회내의 비 신앙적 요소에 대한 깊은 반성이 요구된다.
교회의 교사, 즉 목사들은 인간이 누릴수 있는 복에 대해 올바른 성경적 가르침을 제시해야 한다. 자녀의 수능시험에서 더 높은 점수를 받기위해 목사를 찾아오는 학부모나 학생들에게 그들이 생각하는 바를 그대로 되도록 축복기도를 해주는 것은 잘못이다. 목사들은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한다. 축복기도의 정도나 여부에 따라 점수를 많이 받고 적게 받는 것이 아니다. 그런 교인들에게는, 그동안 준비한대로 떨지말고 푸근한 마음으로 노력한 만큼 시험에 임할 수 있도록 주님을 의지하게끔 격려하고 돌려보내면 된다. 더욱 좋기는 그런 축복기도를 받기 위해 목사를 찾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음을 말씀으로써 일깨우는 것이다.
어느 젊은 학자가 "기독교 내에서 풍수지리를 가장 많이 따르는 사람들은 일반 평교인들이 아니라 교회의 지도계층에 있는 사람들이다"라고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에 의하면 기독교내에서도 경제력이 풍부하고 살기가 괜쟎은 소위 나름대로 출세한 지도자들 가운데는 자기가 죽어서 묻힐 곳을 미리 봐 두는 경향이 많은데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풍수지리를 본다는 것이다.
설혹 그의 말 처럼 꼭 그렇지는 않다손 치더라도, 기독교인들 가운데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더 나은 장소에 묻힘으로써 사후의 자기 몸(?)에 대해서나 후손들을 염려하는 이들이 많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점쟁이나 무당 가운데 기독교 출신(?)이 상당수 있다는 점만 봐도 그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5
풍수지리는 결국 조상신의 문제이다. 그리고 범신론적인 개념이다. 신령들은 땅에도 깃들어 있으며 그것들은 죽은 조상의 묻힌 장소와도 관련이 있다. 즉, 죽은 조상의 혼령과 땅의 기의 조화가 현생의 인간들의 화복(禍福)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그러나 풍수지리설은 허구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것을 믿고 있는 것이다. 현실의 불확실한 세계에 대한 불안으로 인해 허구를 사실로 믿고싶은 것이다.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은 그것을 미신으로 인정을 하면서도 그에 대해 완전히 부정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복음을 알게된 성도이면서 한국인의 무속적 심성을 완전히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은연중에 풍수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효(孝)를 핑계삼아 죽은 조상의 묘자리를 더욱 좋은 곳에 쓰고자 한다. 좋은 자리에 조상의 묘를 쓰고 호화 단장을 하는 것은 효가 아니라 어떻게 보면 단순한 자기과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죽은 사람에 대해서는 더 이상 효도라고 하는 개념이 있지 않다.
지금은 모든 것이 불안한 시대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심지어는 과학에 이르기까지 어느하나 염려스럽지 않은 것이 없다. 이러한 형편은 전반적인 불신을 더욱 팽배하게 해가고 있다. 그렇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자기와 자기 집은 잘되어야겠다는 이기적인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 우리 인생이기도 하다.
이제 교회는 단순한 성장 위주의 자세에서 성경적 원리 속으로 돌어와야 한다. 성장위주의 신앙을 강조하다 보면 자연적으로 따라 오는 것이 교인들에게 '축복'이라는 무기(?)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게 하다가 보면 교인들은 축복의 맛(?)을 알아 축복을 얻기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될 우려가 없지 않은 것이다.
지난해 어느 기관에서 풍수지리에 관한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다. 1100명의 사람들을 대상으로하였는데, 명당과 풍수지리를 믿느냐는 질문에 전적으로 믿는다는 사람들이 5.9%, 대체로 믿는 편이라는 사람들이 65.7%, 믿지 않는다고 답변한 사람들이 28.4%였다고 한다. 이 조사에 의하면 71.6% 정도의 사람들이 풍수지리를 믿고 있다는 것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그 조사 대상이 서울.경기 지역의 사람들이고 보면 그들은 지방의 시골 사람들 보다는 상대적으로 과학의 영향을 많이 받는 지적인 사람들일 것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시골의 농어촌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풍수지리에 대한 신뢰도는 이보다 훨씬 상회할 것이다. 바로 이러한 무속신앙들이 기독교인들의 주변에 그대로 널려있는 것이다.
통계자료들을 보면 기독교인들의 복에 관련된 의식구조가 무속신앙을 가진 사람들과 별반 차이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세상에서 남보다 출세하고 싶고, 남보다 더 많이 벌어 잘 살고 싶다. 그리고 자기 자식이 남의 자식들 보다 더 잘되기를 소원하는 것이다. 성경의 가르침은 분명코 그렇지 않다. 성경에서 말하는 복은 이 세상에서의 어떤 좋은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천국에 소망을 두고 오히려 이 세상을 포기하고 사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그러니 성도들은 진리로 말미암아 때로 박해를 당하기도 하고 세상으로부터 환영을 받지 못하기도 하는 것이다.
저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은채 복에 대한 관심들이 팽배한 이러한 혼란의 시대에 처해 있는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 더욱 명확한 자세를 취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앞으로도 사람들은 민족주의를 들먹이면서 각종 무속신앙의 활성화를 주장할 것이다. 그리고 민족전통의 회복이라는 어줍잖은 주장을 내세워 우리 성도들을 비롯한 일반 시민들의 귀를 간지럽게 할 것이다. 이러한 때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진리의 터 위에 더욱 굳건히 서 가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