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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 광복 이후의 어린 나의 시절
이 글은 일제 강점기를 지나 8,15 해방 이후부터 6,25 전쟁 이전의 추억에 대한 나의 “회상기” 이다. 이런 “회상기”를 쓴다는 것은 나 보다 나이 많은 어르신들 앞에 건방 지고 버릇 없는 일 인 것도 같으나, 요즈음 젊은이 들이 앞만 보고 내달리면서 과거를 반추 하는 것에 너무 소홀 한 데다. 걸핏 하면 지금 젊은이 못지 않게 현명 하였고 용전 분투 하였던 늙은이들을 무시, 천대 하는 바라. 그렇다면 우리의 평범한 조상 들은 어떻게 살았던가를 젊은이 들이 되새김 해 달라는 의미에서 이 글을 쓴다.
해방 이후의 몇 년 간에 대한 나의 기억은 많지 않다,. 그 당시는 나의 나이가 어린 탓도 있었지만 6,25 사변 때와 비교 하여 비교적 사회가 안정 되었으므로 혼란스러운 기억이 많지 않았던 때문 이기도 하다.
(해방 이전 “일제 강점기”에 대한 추억은 “배 고팠던 시절-일제 시대 때의 추억” 이란 제목으로 이미 글을 올린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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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나의 아버지는 젊은 나이에 일제 강점기 시절 읍 사무소 부읍장 격인 호적,병사 계장의 업무를 수행 하던 “공무원”이었으므로, 일제 강점기 시대 “공무원” 이라면 무조건 “친일파”로 보아야 하는 오늘의 시각으로 볼 때는, 소위 “친일파”라 할 것 이다.
(배고프고 암울한 일제 시대를 경험 해 보지 못한 요즈음 젊은이들은, 당시 지게를 지고 땔감 나무를 하거나 소 꼴(풀)을 먹여야 하는 별 볼일 없는 일을 과감히 벗어 던지고 신식 학교를 다니면서 -아버지는 아르바이트를 하여 고학을 하였다.- 신학문. 신기술을 배우고 관청- 관계에 취직한 사람 이라면, 당연히 낙후한 조선 민중을 선도 하는 선각자라 할 것인데., 오히려 “친일파”로 규정 하여 비하 하고 있다,
내가 아버지를 “친일파”라 함은 오늘날 젊은이 들의 이런 한심한 역사 의식에 따른 것이다, - 오늘날의 젊은이 들은
읍 사무소 직원 이라 봐야 십 명 정도였는데, 오래 전에 세상을 버리셨던 어머니 말씀에 따르면 당시 읍 사무소 직원의 대다수는 일본인이었고 조선인 직원은 3~4 명에 불과 하였다 한다,
아버지는 숫자적으로 열세인 조선인 신분 이었지 만 일본인에게 무시, 천대 받지 않고 지지 않기 위해, <민,,형법, 소송법> 등 각종 법률학 책을 탐독 하였을 뿐만 아니라, “성주 풀이” 등 고전 민요를 듣기를 좋아 하셨다 한다,
<아버지는 배고팟던 당시부터 이미 “축음기” 한대를 귀 하게 구입 하여 고전 민요를 들으셨다 한다, 몆년 후 6,25 사변 당시 아버지께서 축음기 앞에 앉아 “심청가”, 임방울 “육자배기”등을 들으시던 모습이 기억 난다,>
또 10권 이나 되는
그게다 행정 능력과 사람을 감동 하게 하는 유창한 언변 까지 갖추었으니 아무리 일본인 이라 한들 아버지를 뛰어 넘을 수는 없는 일이고, 그래서 아버지께서는 부 읍장으로 고속 승진 할 수 있었다 한다.
그런 아버지가 해방이 되자 일제 시대에 읍 사무소-“관청”에 근무 하였다는 이유로 일부 동네 젊은이로부터 “친일파”란 오명과 폭행 위협을 당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폭행 위협을 당하자 더 이상 미련을 가지지 않고 읍 사무소 건물에 열쇄를 채워 문을 닫은 후 얼마간 피신을 하게 되었는데, 당시는 일본인이 8,15 해방으로 일본에 돌아 가면서 소유 하던 재산(가옥, 공장 등)을 한국인에게 위임 하여, 한국에 남겨둔 적산 가옥이 많았던 시절 이었다.
그렇게 돌아간 일본인이 다시 한국으로 돌아올 기미가 없자 위임 받은 한국인이 그 일본인의 재산을 자기 앞으로 명의 변경을 하여야 했는데, 그러한 명의 변경을 하기 위해서는 “주거 증명”, “인감 증명“, “기타 등록 증명” 등 공문서가 필요 했지 만. 읍 사무소가 문을 닫은 형편 이므로 그런 공문서를 발급 받을 방법이 없었던 것 이다,
그래서 민원-공문서 발급을 바라는 민원인이 매일 같이 우리 집에 찾아 와서 어머니에게 공문서 발급을 부탁, 읍소 했지만 이미 아버지는 어굴한 “친일파 폭행”을 피해, 형님이 계시는 시골로 피신을 가서 계시지 않아 부탁을 들어 줄 수 없는 형편 이었다.
(끝끝내 명의 변경을 하지 못하고 연고가 없는 일부 적산 재산은 나중에 국가 소유가 되긴 했으나, 가옥 수준의 대부분 적산은 나중 연고가 있는 개인이 취득 하였다,.)
(당시는 아버지가 “친일파”란 오명으로 읍 사무소 행정 사무를 볼 수 없으므로. 대민 민원 업무를 처리 하지 못하였지만, 아버지는 이를 매우 걱정 하셨다. 한다)
그러한 민원인의 읍소에 못 이겨 문을 닫은 지 몇 개월 후에 신변 폭행의 위험을 무릅쓰고, 한국에 남은 3-4명의 조선인 읍 사무소 동료 직원과 같이 읍 사무소 문을 열고 각종 대민 민원 행정 업무(결혼, 출생 신고 호적 정리 등)를 처리 하게 되었다.
(읍 사무소 문을 열었을 때 적산 가옥 100채를 소유한 “부산(釜山)”의 어떤 사람이 100채나 되는 적산 가옥에 대한 연고를 일일이 주장 하여 명의 이전 받는 것이 불가능 하자, 일본인이 8,15 해방 전 가옥 100채를 “부산”의 그 사람에게 명의 이전 하였다는 “인감 증명”을 8,15 해방 이전 날자로 소급 하여 발행 해 줄 것을 부탁 하였고 그 “인감 증명” 발급 댓가로, 적산 가옥 50채를 주겠다고 제의 했다. 한다,
그 때는 하지 군사 정부가 막 시작 할 때였고, “관청”의 기능이 없는 혼란 한 시기여서 “인감 증명”을 8,15 해방 이전 날자로 소급 발행 하드라도, 들어 나거나 지적 당할 일이 전혀 없었는데도, 소급 발행은 부정한 일이라 하여, 아버지는 적산 가옥 50채의 제의를 거절 하였다, 한다,
그때가 지금으로부터 불과 70년 전의 일인데 당시 아버지의 “청렴 결백”은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청렴 결백”이었던 것 이다, )
당시는 건국도 되기 전 이어서 국가 사무가 제 기능을 발휘 하지 못 하던 때였고 아버지는 매일 같이 읍 사무소에 출근 하였지 만 월급을 줄 사람도 없고 줄 월급도 없어 4-5개월 간은 월급 없이 “무보수”로 근무 하였고, 더군다나 어머니 삵 바느질로 염출한 아버지의 용돈을 털어 사무용 용지와 잉크 등 기자재를 구입 했다 한다.
[2] - 누가 무얼 먹는 것을 보면 손가락을 빨면서 멍하니 쳐다 보는 불쌍한 나의 모습
이와 같이 “무보수”로 근무 한지 몇 달 후 마침내 상급 기관 인 ”군청” 으로부터 쥐꼬리 “월급”이 나와 아버지도 월급을 받게 되었고, 그래서 차츰 읍 행정이 안정 되게 되었는데. 그러던 중 해방 되던 이듬 해였던지 상급 기관인 ”군청”으로부터 “군청”에 와서 근무 하라는 보직 변경 명령을 받고 아버지는 거주 하던 바닷가의 한적한 집(바닷가여서 비교적 먹을 거리가 많았다.)에서 울산 시내로 수십리를 이사 하여 “군청”에 근무 하게 되었다.,
당시 공무원 들은 모두 일제 강점기 시대 이미 공무원 직을 수행 하였던 소위 말 하는 “친일파” 공무원 이었는데, 당시 그러한 “친일파” 출신 공무원들이 새 나라를 건설 한다는 의욕과 명분으로 밤낮 없이 열심히 근무 하였지 만. 그 수가 너무 적어 공공 업무 수요를 감당 하기 어려운 형편이었고, 또 조선인 중에서 행정 업무 수행 능력 있는 사람을 발굴 할 수 없어 공무원 수를 보충 할 수 없는 형편 이므로. 부득이 “군청”에서는 아버지를 차출 하여 산적 한 군청 업무를 수행 하게 하였던 것 이다.
당시 국가 형편은 “공무원”에게 월급을 넉넉히 줄 형편이 아니다, 보니 아버지도 쥐꼬리 만한 봉급을 받았는데,
그러다 보니 이사 하면서 월세로 얻은 초가집 방도 세평이 못 되어 좁았고, 먹을 거리도 부족한 힘 겨운 가난한 생활을 하였던 기억이 난다.,
그 이사 할 때가 1946년 쯤으로 해방 다음해 되는 해였다
어머니는 나의 동생과 나를 안고 이사를 왔지 만, 방도 좁은데다. 무었 보담도 먹을게 없어 항상 배고팟 던 것이 어려웠다.,
(아침, 저녁 먹는 밥은 납딱 하지도 않던 시커먼 통 보리밥 이었는데 그것도 모자라 항상 무우나 시래기를 같이 넣은 무우 밥을 주로 끓여 먹었다.
우리는 밥에 쌀을 구경 할 수 없었고 가장이 되는 아버지 밥 그릇에만 쌀이 조금 있었다.- 납딱 보리쌀은 6,25 사변 휴전 할 때쯤 되어서야 나왔다., )
이사를 한곳이 친척이 있는 시내여서 상추라도 심을 수 있는 들판 이나 밭이 없어 무었에 갇힌 것 같이 답답 하였고, 무었보담도 아버지 월급으로는 “쌀, 보리”를 넉넉히 살 수가 없어 항상 배가 고팟다,
방 앞 마당에는 주인집 에서 키우는 “봉선화”가 있었던 기억이 나지 만 배고픈 것을 면하고자 “봉선화”를 따 먹었던 기억은 없다.
8,15 광복으로 일본 놈 들에게 빼 앗기는 “공출”이 없어 식량 사정이 좀 낳아지긴 하였으나, 여전히 부족 해서 배가 고팟고 전기는 정전이 잦아 하루 종일 정전이 되었다가 저녁 때 잠시 불이 들어 오기도 했지 만 드물었다.
수도 시설은 조선에 와 있는 일본 놈 이나 경찰서, 군청 같은 관청 위주로 되어 있고. 거의 모든 조선 시람 들은 주로 우물에 젊은 아낙이 물동이로 물을 길어 썻는데, 빨래를 넉넉히 할 정도는 아니어서 물이 항상 아쉬웠다,
빨래 하기도 그렇지만 그때는 화학 섬유가 없는 때여서 옷이나 옷감이 귀할 때였고, 그래서 옷을 버리면 어렵 사리 빨래를 하였지 만 갈아 입을 옷이 없었다.
당시 나 같은 어린이 들은 고무줄이 귀한 탓으로 바지 허리춤을 옷감으로 만든 끈으로 매고 다녔는데 용변이 급 할 때는 바지 허리춤을 내리지 못 해 바지에 똥이나 오줌을 싸군 하여, 어머니를 애 먹이고 갈아 입을 옷이 없어 벗고 다니기도 하였다. 옷을 버리면 빨래 하기가 어려울 때 인지라, 어머니 들이 4세 이하의 아동들에게는 똥이나 오줌을 싸는 바지 아랬도리를 툭 터서 허리춤을 내리지 않아도 앉기만 하면 바로 용변을 볼 수 있도록 하였는데, 해방 이듬해에 당시 4세 였던 나도 그런 우스꽝 스런 모습을 한 기억이 난다
당시 나는 배가 고파 하루 종일 먹을 것을 찾다가 누가 입만 들썩거려도 무얼 먹나 하고 쳐다 보군 하였는데, 어느 날은 이웃집에 있는 오촌 뻘 아저씨가 귀한 간식 인 감자 한 톨을 입에 물고 먹는 것을 보았다.
(이웃집 5촌 아저씨 댁은 당시 “농사” 를 지었는데 당시 “농사” 를 지내는 집은 우리 집과 같이 농사를 짓지 않는 집과 달리 먹을 것이 훨씬 풍부 했다.
농사를 짓지 않는 우리 집에서 자란 나는 해방 되기 전에는
물론 이고, 해방 이후에도 얼마나 굶주렸던지 몇년 후 내가
국민학교(초등 학교) 입할 할 때, 나의 별명은 “원숭이” 였고
주위에서 내가 얼마나 여위었던지 애기가 아닌 원숭이라
하는지라, 어머니가 나를 데리고 밖에 나 다닐 수 없었다
한다.)
그래서 나는 손가락을 입에 넣고 빨다가 엄마에게 “엄마 나도 감자 먹고 싶다, 감자 하나 줘!.” 라고 칭얼 대었는데, 어머니가 가진 게 없으니까 당시 나에게 감자 한톨을 주지 못 했다고 내가 나이 오십이 넘도록 몇번 이나 말씀 하셨다
(당시 누가 무얼 먹는 것을 보면 나도 먹고 싶지만 먹을게 없으니까 손가락을 입에 넣고 빨면서 먹는 것을 부러운 듯이 멍하니 쳐다 보군 했는데, 멍하니 쳐다 보는 그런 불쌍한 모습이 가슴에 알알이 밬혀, 나는 70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되고 선 하다.),
당시로 부터 이미 50년 전의 일인데 자식 입에 감자 한톨을 밀어 넣지 못했던 일이 얼마나 가슴이 아팠으면, 어머니 께서 50년이 지난 지금 까지도, 그 때의 일을 회상 하셔서 울적 해 하시는지라. 이젠 어른이 된 이 자식의 가슴을 어째 이렇게도 적시는가? 부모님의 은혜는 가이 없고 하염 없는 것 이다.
그런지 몇달 후 아버지께서는 근무 하던 군청에서 울산에 단 하나 뿐인 울산 공립 농업 중학교 (6년제-현 “울산 공업고등학교”)로 전근 하시게 되었다,
[3] - 맨발로 죽창을 들고 귀신 잡겠다는 아버지
그 당시는 국민의 학교 교육이 중요 했지만 귀국한 일본 선생을 제외 하다 보니 가르치는 선생의 수도 모자랐고 학교 학생 들이 워낙 가난 하여 학교 공납금을 내기가 어려운데다. 일부 학생 들은 “공산 파르티잔”으로 지리산에 입산 하는 경우도 있어 학교의 지속 운영이 잘 되지 않아 폐교 수준의 형편 이었다
그 때는 “
울산 공립 농업 중학교(현 “울산 공업고등학교”)주변은 현재 모두 도심지로, 빌딩이나 아파트가 들어 서 있지 만 당시는 작은 나무가 듬성한 평지-들판 이거나, 논밭 이었다,
(일제는 만주 등지를 침략 하여 많은 군인이 죽게 되었는데. 그 죽은 군인을 현 “울산 공업고등학교” 자리에 “공동 묘지“를 만들어 묻었다. 현 “울산 공업고등학교” 자리는 그 “공동 묘지”를 파 내고 밀어 붙여, 그 부지에 세운 학교다,.. 위 평지-들판은 그때 학교 부지로 쓰고 남은 땅이다.,)
아버지가 “울산 공립 농업 중학교”의 “서무 과장”으로 전보 되는데, 굶주림에 지친 어머니가, 굶주림를 면할 수 있는 오이나 호박을 위 들판에 심을 수 있어 크게 반겼다 한다
마침내 우리 집은 당시 5채 정도 되는 “울산 공립 농업 중학교”의 관사 중 하나로 이사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사 하자 말자 어머니가 크게 놀란 일이 있었다. 한다.
(당시 어머니는 굶주림에 시달리던 때라 “울산 공립 농업 중학교”로 이사 하면서 들판을 개간 하여 밭을 만들고 우리 형제들 입에 밀어 넣을 콩이나 감자 등을 열심히 심었다, 당시 어머니는 새벽에 일어나 남자 농부 못지 않게 험한 농사일을 하였던 일로 “울산 공립 농업 중학교”를 사실상 좌지 우지 하는 “서무 과장”의 부인 인데도 “사모님”이라고 불리워 지지 않고 별명이 “최 농부”라 하였다. 한다.
어머니는 우리 형제 들을 배 부르게 먹일려고 악착 같이 농사를 지었던 것이다. )
당시 우리 집은 학교 관사여서 그나마 초가집은 면 하고 오늘 날에는 볼 수 없는, 지붕을 양철로 덮은 집이었는데. 구름이 끼어 날씨가 흐린 날이면 비가 오지 않아도, 어김 없이 지붕에 주먹 만한 돌이 떨어 져서 지붕의 양철이 깨어 질 듯 펄쩍 거리니, 어머니가 혼비 백산 하였다 한다.,.
처음에는 어머니가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돌이 날아 올 때 지붕을 살펴 보니 돌이 날라와 양철에 떨어진 후 떼구락, 떼구락 굴러서 마당에 톡 떨어 지는 것 이다. 그 돌을 누가 던지나 싶어 돌 떨어 지는 소리를 듣자 말자 “삽짝문”을 열고 급히 나가 살펴 보니 주변이 모두 평평한 들판 이라 돌을 던지고 숨을 곳이 없는데도, 사람은 전혀 보이지가 않는 것 이었다,.
그래서 이것은 사람의 소행이 아니고 귀신의 장난 으로 알게 되었다,
마침내 아버지가 돌 던지는 귀신을 잡겠다고 나서게 되었다
그 때부터 아버지는 죽창을 다듬어 삽짞에 걸어 놓고, 돌 던지는 소리가 날 때 마다, 방 안에서 신발 신을 틈도 없이 맨발로 죽창을 들고 귀신 잡겠다고 들판에 나가는 것 이었다,
그런다고 귀신이 잡히겠는가? 죽창 들고 겁 없이 나썻지 만 죽창만 이곳 저곳 찌르면서 각개 전투 훈련을 하고 마는 것 이다.
당시 학교가 변두리에 있고 하여 선생님 들이 교대로 밤새 학교를 지키는 숙직, 일직 근무가 중요 했지 만 해가 지고 나면 학교 기물이 파손 되어도 아무도 숙직 순찰을 도는 사람이 없었다. 한다.
선생님 들이 숙직 하느라 밤에 숙직 방에서 잠을 자면, 꿈인지 생시 인지 숙직방 천장 귀퉁이에서 오뚜기 같은 다리 없는 몽달 귀신이 나와 숙직 하는 선생님의 목을 조르는 것 이다. 또 켁켁 하고 잠을 깨면 방문 밖에서 군인 들이 열을 지어 행군 하느라 “저벅 저벅-덜거럭” 하고 부산한 소리, 학교에서 키우는 돼지나 닭등 동물들이 울부짖는 소리 등으로 숙직 방문이 들썩하니, 아무도 겁이 나서 문밖에 나갈 엄두를 내지 못하는 형편 이었다.
(동남아 침공과 만주 사변으로 일본군에게 징집 당한 조선 사람들이 많이 죽었는데, 그때의 전사자 들을 학교 설립 전에는 학교 부지에 공동 묘지를 설치 하고 그곳에 매장 하였다 한다,;)
숙직 근무를 모두 기피 하자 학교를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아버지가 숙직을 자주 썻다 한다. 아버지는 비교적 담력이 큰 사람이라 귀신을 보아도 그렇게 겁을 내지는 않았다 하는데, 구체적으로 어쨋는지는 들은 것이 없어서 잘 모르겠고, 다만 아버지가 집에서 점심을 들기는 헸지만 밤에는 오지 않을 때가 자주 있었던 것이 기억 난다.
지금이야 귀신이 없는 시대 여서 “귀신”소리를 할 양 이면 귀신 씨나락 까 먹는 소리 한다고 비아냥 하지만 그때는 “귀신” 이야기가 중요 관심사여서 너나 없이 사람 들이 자주 입에 올렸다,
(필자도 어릴 때는 “귀신 불”을 자주 보았다. “귀신”은 기차나 중장비 같은 기계소리, 총소리를 싫어 하고 도망 간다고 한다,)
[4] - 남노당과 투쟁 하는 격동의 시절
그때는
어느 날은 5-60리 먼 거리를 걸어 고향 사람이 찾아 와 아버지에게 “고향 어른”이 찾는다고 하였다. “고향 어른”이 누구신가? 하늘 같은 어른이 아니신가?
(그 때는 어른 공경이 지금 하고 달랐다. “삼강 오륜”의 도덕으로 보면 지금 이 시대의 사람 들은 “야만인” 이다.)
지금이야 시내 버스가 5분 마다 쌩쌩 거리지만 그 때는 버스가 있긴 했지 만 하루에 한번 다닐 둥 말 둥 하였고 그것도 시간이 불규칙 해서 언제 출발 할지는 알수 없기 때문에, 걸음 못 걷는 어린 아이나 늙은이 외에는 보통 수십리의 거리는 모두 걸어 다녔다.
아버지가 득달 같이 60리 길을 걸어 달려 가서 동네 어른을 찾아 뵈오니 어른께서 말씀 하시는데
<지금 “보도 연맹”이 다니면서 마을 사람 들에게 농사 지을 땅을 공짜로 준다면서 “보도 연맹”에 가입 하라고 선전 하니, 동네 젊은이 들도 가입 하겠다고 하는데 우리 마을 사람들이 “보도 연맹”에 가입 하면 어떻겠는가?> 하고 묻는 것 이었다.
사골에 시국(時局)을 판단 할 만한 사람이 없어 (그 당시 시골에는 “신문”은 물론이고 “라디오”. “괘종 시계”도 없었다.) 동네 어른으로서는 물을 곳이 없었던 것 이다.
(아버지가 주무시는 자리의 머리맡에는 그 당시 귀 했던 진공관 “라디오”가 항상 있었다. 당시는 트랜지스터 라디오가 없을 때여서 아버지는 진공관에 빨간 불이 켜지는 진공관 라디오로 항상 일본 방송을 들으셨다. 당시 경남 지방에서는 서울에서 송출 되는 한국어 방송의 주파수가 잡히지 않았다. )
어머니 말씀에 의하면 아버지는 당시 이런 말씀을 어른에게 강력 건의 하셨다 한다.
<우리 동네 사람들이 보도 연맹 가입 한다는 것은 재고(再考) 하시고 좀더 시국을 관망 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좌 우익간 싸움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남노당 들이 무력 투쟁을 벌려 온통 나라가 들썩거리는 바라 우리 국민 들이 나라를 세울 수 있을지도 불투명 하고, 그래서 나라가 어떻게 될지 앞으로 시국을 전혀 알 수 없습니다.
보도 연맹이 땅을 공짜로 준다고 하지 만 자기들이 땅을 공짜로 만드는 재주가 있지 않는 한 무슨 재주로 땅을 공짜로 주겠습니까? 남의 땅을 빼았아 공짜로 주는 척 하는 것 인데,. 그 피눈물 나는 남의 땅을 아무리 공짜라 해도 어째 받겠습니까.? 땅을 공짜로 준다는 것은 보도 연맹(남노당)의 선전 일 뿐이라는 것이 밝혀 질 공산도 있습니다. 보도 연맹 이나 어디 가입 한다는 것은 신중 하시기 바랍니다.>
아버지의 이 말을 들은 동네 어른 들은 이후 고향 동네에서 보도 연맹 가입 하는 일이 일체 없도록 엄명을 내렸고 일부 젊은이 들이 보도 연맹에 가입 하겠다고 하였으나, 거의 모든 동네 사람 들이 어른 말씀을 잘 따라 보도 연맹 가입 하는 일이 일체 없었다 한다.
과연 3~4년 후 우리 나라 에서는 보도 연맹 가입자 들을 색출, 검거, 처형(총살) 하는 일이 벌어져, 고향 울산의 많은 동네 에서는 가입자 들이 밧줄로 포박 되어 뒷산으로 끌려가 총살 되는 참극이 벌어 졌고, 그런 동네 에서는 곡 소리가 끊이지 않았지 만. 고향 동네 (남목)에서는 그런 일이 전혀 없어서 전체 300 가구가 모두 무사 할 수 있었다. 한다.
<훗날 필자의 소견으로는 당시가 우리나라 건국 정부가 수립 되기 직전인 1948년 초쯤으로 제주 4,3 폭동 사건이 일어 날 때 쯤 인 것으로 짐작 된다.,
당시는 유엔이 결정 한 남북한 통일 선거 위원의 입북을 북한이 거절 하자, 유엔은 어쩔 수 없이 남한 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결의 하였는데, 이런 유엔 결의에 따리 당시 남한을 통치 하던 “하지” 군사 정부가 남한 만의 단독 선거를 추진 하자 남노당 계열은 이를 극열 반대-무력 투쟁(여수. 순천 반란 사건, 제주 폭동 사건)을 벌렸던 것 이다.
이후 유엔 결의에 따라 남한 만의 단독 선거로 우리나라에
오늘날에는 일부 젊은이 들은 당시를 경험 한바 없음에도, 보도 연맹 가입자가 처형 된 것에 대해
6,25 사변 직전 북한에 올라간 남노당 총책
-6,25 남침을 개시한 북한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후 계속 남하 하지 않고, 3일간이나 미적 거린 이유는
오늘날 진보로 위장 한 “친북 좌파” 또는 “보도 연맹” 가입자들은 부인 하겠지만 당시의 “보도 연맹”은 동족과 형제 들이 서로를 죽이는 철천 지한 6,25 사변 발생의 중요한 촉매제 였음을 당시를 살았던 나는 판단 하고 있다.>
만일 많은 사람이 “보도 연맹”에 가입 하였던 동네에 아버지 같은 “시국 판단 능력자”가 한 사람이라도 있어 가입을 만류 하였다면, 훗날 토지를 무상으로 공급 해 주겠다는 “보도 연맹”의 거짓 선전에 속아 “보도 연맹”에 가입 하여 온 동네가 처형 되는 참극을 면 할 수 있었을 터인데, 아쉽기 만 한 민족의 비극 이다..
오늘날 후손 들이 민주주의 사회에서 각종의 시비(是非)를 일삼고 공과 (功過)를 논(論) 하고 있지 만, 그것은 후손 혼자 만의 힘이 아니고, 공산 주의란 천길 낭떠러지를 치열하게 헤쳐 나갔던 아버지와 같은 선견 지명(先見之明) 선친이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 된다.
당시는 공산 주의가 무었 인지도 모르면서, 공산 주의가 인민의 생활을 평등 하게 하는 이상 사회를 추구 한다는 말에 속아 많은 젊은이 들이 자진 하여 지리산 파르티잔에 가입 하고, 대한 민국 정부가 수립 되기 전부터 무장 투쟁 하는 등으로 공산 주의가 만연, 유행 하던 시절 이었다.
당시 아버지가 “서무 과장”으로 근무 하였던 울산 농업중학교(6년제)에도 “공산 주의- 남노당 가입”이 유행 하여 지금의 고 3에 해당 하는 중학교 6학년 학생의 경우 1/3 정도의 많은 학생 들이 자진 하여 학교를 중퇴 하고 지리산에 입산 하여 공산 주의 파르티잔 활동을 하였다고 한다.
(학교를 자진 퇴교 하고 지리산에 입산하는 학생 수가 1/3 정도 였는지는 어머니 말씀이므로 정확 하지가 않다.,)
어쨌던 많은 학생 들이 학교로 출석 하지 않는 형편이 되어 수업이 되지 않아 학교가 그때(아마 1948년 쯤-
(교실 유리창이 깨지면 그때는 유리창 갈아 끼우는 것이 어려웠다.)
그 이후 아마 그 때 내 나이 일곱쯤(1949 년) 이었는지 어느 날은 며칠 동안 보지 못 했던 아버지를 찾으러 내가 학교에 갔는데, 그때가 아침 조회 시간 이었던 것 같다.
학생 들이 운동장에 도열하고 있었는데, 대표가 되는 연대장 학생이 지금의 군인과 같이 차고 있던 칼(지휘도)을 뽑아 휘둘러 얼굴 앞에 세우는 식으로 교장 선생님에게 경례를 하는 모습이 인상적 이어서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그 때의 연대장 학생과 대대장 학생은 학교 내에서는 물론이고. 학교 밖에서도 칼을 차고 다녔다. 이후 6,25사변 휴전(1953년) 때 쯤 되어서야 칼을 차고 다니는 일이 없어 졌다,)
나는 그때 아버지를 만나 맛 있는 설탕물을 얻어 먹고, 잠자리 잡느라고 학교 구석-울타리 옆에 있는 학교장 관사 옆으로 놀러 갔다.
(그 때는 과자가 없을 때여서 손님이 오면 노란 설탕을 물에 탄 설탕물이 큰 대접 이었다, 백설탕은 없었고 황 설탕도 귀할 때여서 시골에서는 구경 할 수 없었다.) ,
그런데 평소 사람 들이 왕래 하던 교장 관사가 그때는 쥐 죽은 듯이 고요 해서 비어 있는 집이었던 것이 기억 난다. 훗날 어머니 말씀에 의하면
당시 학교 학생 중에는 “웅촌 면”에 살고 있는 “이 후락(
“웅촌면”의 집에서는 밤낮으로 끊임 없이 영어 읽는 소리가 들렸다 한다.
학교 관사 5채 중에는 일본인 부인이 한 명 살고 있었는데, 남편이 조선인 이라서 해방 되어도 일본으로 돌아 가지 않고 조선에 남았다, 한다. 그러다 남편이 학교 선생 이라서 울산 농업 중학교 관사 사택에서 살게 되었는데 그러던 중 무슨 일로 남편이 죽어 버렸다., 하늘 같이 믿고 의지 하던 남편이 죽었으니. 그 일본인 부인이 낮 설은 한국 땅에서 살아 갈 길이 막막 하여 며칠을 두고 밤낯으로 애절 하게 울던 그 모습이 눈에 어린다고 50년이 지나서도 어머니께서는 말씀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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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필자는 지금의 젊은이와는 다른 민족 이다.,
그러다 아마 1949년 초쯤 되어 아버지는 다니던 학교를 그만 두고 사무관 급인 “공무원” 직을 사임 한 후 장사를 하기 위해 울산 시내로 이사 하게 되었다, 사무관 급 “공무원” 사직을 할 때 많은 사람 들이 공무원직 사퇴를 만류 하였는데 그 때 아버지는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한다.
<내가 아직 나이가 젊으니 정년 퇴직 하기 전에 아마 못 되어도 “군 수” 까지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군수”가 되어도 그 월급 으로는 4명이나 되는 내 아들 대학 공부 시키기가 어렵다.
군수가 되어 억지로 대학 공부 시키지 말고 장사를 해서 돈을 벌어 그 돈으로 자식 공부를 정당 하게 시키는 것이 옳은 일이다.>
장래 들어 갈 어린 아들 학비를 벌기 위해 장래가 촉망 되는 사무관직 공무원을 사직 하였다니 오늘날 세대에서는 구경 할 수 없는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청렴 결백” 이다.
이사 하기 전날 어머니는 떡이랑 약간의 음식을 하고 이웃 아주머니를 초청 하여 이별의 정을 나누었는데, 그 때 뫃인 아주머니들 여럿이 무슨 구슬픈 일본 노래를 합창 하면서 눈물을 흘리던 것이 기억 난다.
지금이야 이사는 커녕 이웃에서 사람이 죽어도 모르는데 이웃집이 이사를 하여 이별이 된다고 눈물을 흘리고 섭섭해 하는 것은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이야기다,
필자는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에 어린 시절을 보냈고 지금의 젊은이와는 다른 환경에서 성장 하였다., 그러니까 필자는, 춤이라면 남녀가 마주 보고 몸을 흔들어 대는 서양식 춤만 알고, 팔을 펴고 두둥실, 너울 너울 너름새 있는 우리 민족의 춤은 잊어 버린, 지금의 젊은이와는 사물을 해석 하는 방식도 다르고, 생각 하는 방식도 다른, 다른 민족 인 것이다.,
아무튼 나는 아버지가 마련한 이사 트럭을 타고 3~4 키로 떨어진 시내로 이사 하였는데 1949년 봄이었을 것으로 기억 난다. 이사 하고 보니 여러가지 신기한 일도 많고 해서 어느 날은 1kM 주변에 있는 5일장으로 놀러 갔다.
지금이야 그 5일장은 빌딩이 들어 선 도심지 이지 만 그때는 이곳 저곳에 포장이 몇 개 쳐 있는 황무지 였다. 시장에 들어 서기 전 “대장간” 이라던지 비석 같은 것을 다듬는 “석공장“ 등 온갖 신기한 것을 구경 하다가 시장에 들어서니 시장에 있는 사람이 모두 하얀 옷을 입고 있었던 것이 기억 난다. 그때는 젊은 여자들은 “광목”으로 나들이 옷을 해 입기도 했지만 남자 들은 주로 삼베로 옷을 해 입었던 고로 내 눈에는 횐 옷 입은 것으로만 보였던 것이다.
당시 5일장 시장 전체가 하얀색으로 질펀한 지라 그 모습이 어린 나에게 강열하게 인상 지워져 오랬동안 기억에 남았는데, 아마 내가 고등학교 학생 때쯤 되어서야 <아하! 그래서 우리 민족을 백의 민족 이라 하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아마 가을쯤 나는 일곱 살의 나이로 우리 집 옆에 있는 “국민 학교“(지금의 “소학교”)에 입학 하였다.
(1949년 당시는 국민 학교 입학을 가을에 하였다, 이듬해에는 6,25 사변이 터졌는데 그 해부터 각급 학교는 4월 달에 입학식를 하다가 1950년대 말쯤 되어서야 지금과 같이 3월 달에 거행한 것으로 기억 된다,)
어느 날은 잠자리 잡고 제비와 장난 치느라고 이사한 학교 운동장에 놀러 갔는데, 운동장 구석에 있는 강당 에서 벌떼가 왕왕거리듯 “붕”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이었다., 이상 해서 강당 창문을 올라 타고 보니. 그때 6학년쯤 되는 “형님, 누나”들이 열을 지어 서있는데 모두다 서럽게 울고 있었고
(아마도 ”졸업식” 하는 모양 이었다. 그 때는 가을에 “졸업식”을 하였다.),
대표가 되는 학생이 앞에서 무슨 두루마리를 읽으면서, 정든 학교와 선생님을 이별 하는 서러움에 눈물을 흩뿌리면서 목이 메어 피가 나게 읽고 있는 것 이다,.
(그 때는 “제비”나 “종달새”, “박쥐” 등은 하늘을 덮을 정도로 많아서 시내 어디에서도 볼수 있었다.- 각급 학교 졸업생들이 졸업 하면서 선생님의 은혜를 감사 하고 정든 학교를 떠나는 서러움에 눈물을 흘리면서 슬퍼했던 것은 아마도 1950년대 말 까지 이어진 것으로 오늘날에는 볼수 없는 일이다. )
그 즈음 나는 형님을 따라 생전 처음 영화 구경을 하러 갔다.
오늘날에는 수천명을 수용 할수 있는 극장이 여러군데 있지만 당시는 2~300명 정도 수용의 극장 한 개가 있었고. 그것도 극장 안에는 의자와 같이 앉을 좌석이 없고 입장객 들은 “가마니”를 깔고 그 위에 앉아 구 경하였다,
나는 당시 영화가 무었인지도 모르던 처지였는데, 마침내 실내 등이 꺼지 면서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지만,(아마도 “검사와 여선생님” 정도 인 듯) 앞에 있는 스크린에 신기한 사람 그림이 나타났다, 스크린에 어떤 사람이 나타나 움직이는 것이 신기 하여 한참이나 구경 하는데, 얼마 있으니, 극장이 무슨 벌통같이 웅웅거리는 것이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이상 하게 생각 하던 중 마침내 영화가 그치고 극장 실내에 전깃불이 들어 와서 살펴 보니, 극장 구경 하러 왔던 남녀 모두가 두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가마니 위에서 앉아 엉엉 울고 있었고, 그 많은 사람 들이 그렇게 한꺼번에 우는 소리가 어린 내 귀에는 웅웅거리는 소라로 들렸던 것이다.
(우리가 시내(市內)-그때는 “성내(城內)”라고 불렀다,-로 이사 오기 전-아마 내가 5살 때쯤- 어떤 악극단이 울산농업중학교 교실을 빌려 연극을 한 일이 있었다.
당시 어머니는 저녁 밥을 먹고 나를 앞세우고 동생을 업고 학교에 가서 구경을 하였는데 그 연극 내용이 무었인지는 알수 없지 만-아마 “장한몽” 이었는지.- 어머니는 그 연극을 구경 하면서 그 자리에서 하염 없이 눈물을 흘린 일이 있었다.)
오늘날에 보면 그 영화는 별 볼일 없는 영화 인데, 그 별 볼일 없는 신파조 내용을 얼마나 애절 하게 보았으면, 젊은 아낙네나 처녀 할 것 없이 모두 부끄럼 없이 눈물을 흘리고 울었을까?
학교 졸업생 들이 정든 학교를 떠나는 슬픔에 졸업식장에서 눈물을 흘리는 것이나, 영화 내용이 슬퍼 극장에서 눈물을 흘리는 것은, 오늘날에는 구경 할 수 없는 일로 실로 그 시대의 우리가 얼마나 순박한 정서를 가지고 살았던가 하는 것을 말 하고 있다.
오늘날에는 사람들이 모두 재리(財利)와 명리(名利)에 몰두 하는 바라, 모두 다 눈이 빨갛게 물 들은 빨갱이로 변종 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때 박꽃같이 맑고 청아 하였던 우리의 심성은 이제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호랑이 담배 피우는 일이 되어 버렸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 들은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에 성장 하였던 “꼴통 영감”의 냄새 나는 글을 여러 분들이 읽고 있음을 이해 하셨으면 한다.
그러다 내가 “국민 학교” 입학한 이듬해에 6,25 사변이 터졌고 그 참혹 힘은 지금의 젊은이가 상상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전반적으로 보아 6,25 사변이 일어 나기 전까지의 우리는 매우 가난 하였음에도 사람마다의 인정이 청아 하여 물 흐르듯 하였고, 남녀 노소의 규절이 분명 하였다. 젊은이는 늙은이를 공경 하였고, 지나간 늙은 세대가 구닥다리 한심 세대 인 것은 오늘날과 같지 만 늙은이를 “꼴통”으로 비하 하거나 폭행 하는 일은 전혀 없었다,. 또 남녀 간에도 예절이 분명하여 오늘날 같이 “성폭행”이니, 외간 남자, 여자가 서로 “데이트” 하는 일은 전혀 없었다.
즉 그 시대는 사회가 여,야로 분열 하여 서로 쟁투 하는 시대가 아니고, 법이 없어도 서로 화합 하고 질서를 지키는 시대였던 것 이다
이런 모든 일이 법률로써 강제 된 일이 아니고, 그 시대의 관습-풍습으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이 중요 하다,
즉 장래의 인류 행복은 그 사회 운영이 “법률” 또는 “민주주의” 같은 정치 이념이 아닌 관습-풍습이 가지런 하게 정립 되어 우선 되어야 달성 될 수 있음을 의미 한다.
역사를 공부 하는 이유는 앞으로의 일을 분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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