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T는 '멤버십 트레이닝'의 약자다.
대학시절에 특히 M.T를 자주 갔었다.
청량리역에서 춘천행 완행열차를 타고 춘천, 강촌, 가평, 대성리, 샛터, 수동(화도) 등으로 갔다.
그곳에서 야무지게 청춘을 노래했고, 밤새 토론을 이어가곤 했었다.
나는 '봉사' 동아리에서 활동했다.
그래서 특히 동아리 사람들과의 협력과 한마음이 중요했다.
그런 까닭에 자주 뭉쳤고 또한 죽이 잘 맞았다.
대개 '봉사'를 좋아하고 '헌신의 개념'을 아는 사람들이 그 동아리에 들어왔으니까.
학교를 졸업하고 각자 일터로 헤어졌다.
저마다 열심히 살았다.
동아리 친구들을 만나 귀한 우정을 엮은 지 어느새 40여 년이 되었다.
세월 참 빠르다.
동아리 친구들 중 여성들은 몇 명을 제외하고 대부분 은퇴했고, 남성들도 절반 이상이 현업을 떠나 제 2막을 살고 있다.
작년 늦가을 제주도 2박3일 엠티에 이어 다시 일년만에 강원도 영월로 1박2일 간 엠티를 다녀왔다.
영월군 수주면 두산리.
지금은 영월군 무릉도원면 두산리가 되었다.
우리가 캠퍼스 시절에 농활(농촌 봉사활동)을 했던 무대였다.
근 40여 년 만에 추억의 장소를 방문해 보고 싶었다.
펜션도 그 마을 부근에 잡았다.
지난주 토요일 오후, 숙소에 여장을 풀고 가벼운 심신으로 '두산리'로 갔다.
그 때 그 시절, 가물거리는 기억을 더듬으며 '두산분교'를 찾아갔다.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
당시에도 낡았던 학교건물은 사라지고 없었다.
운동장을 '오토 캠핑장'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봉사 후에 멱을 감곤했던 작은 개울은 크고 반듯하게 확장됐고, 더욱이 개천 안쪽 양안의 경사면을 큼지막한 사각형 돌로 굳건하게 쌓아올렸다.
폭우에도 끄떡 없을 정도였다.
마을도, 집도, 전답도, 울창한 숲도 모두가 '상전벽해'였다.
도무지 과거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변하지 않은 건 딱 두가지였다.
운동장 한켠에서 세월의 흔적을 그대로 뒤집어 쓴 채 녹슬어 있던 '이순신 장군'과 '이승복'의 동상이었다.
특히 '이순신 장군' 동상은 우리가 아침에 선착순 구보를 할 때마다 찍고 왔던 포스트여서 기억이 뚜렸했다.
많은 세월이 흘렀다.
그날 밤 우리는 그 때 그 시절 '농촌 봉사활동'의 추억과 열정을 떠올리면서 숱한 대화 보따리를 풀어나갔다.
그렇게 '와인'을 홀작 거리며 산골의 가을밤은 자꾸만 깊어 갔다.
우리도 나이가 들어서인지 서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따뜻한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며 순수하고 예쁜 우정을 잘 지켜나가고 있다.
그런 친구들에게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대학교에서 진실한 우정을 쌓긴 쉽지 않다고.
하지만 나는 초, 중, 고 친구들보다 대학친구들이 더 좋고, 더 반가우며 정겹다.
그리고 서로를 향한 신뢰도도 더 높다.
숙소를 잡고, 와인과 안주, 각종 먹거리 구입에 일박이일간 동선, 교통편, 시간배분까지 세심하게 계획을 짜고 리드하는 일이 때론 번거롭고 싫을 때도 있지만, 어떤 모임이든 나에게 건강이 있을 때까지는 기쁜 마음으로 나의 역할을 하려고 한다.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이라면 눈치 보지 말고 솔선하고 싶다.
누군가가 먼저 일어나 마당을 쓸고, 물을 긷고, 군불을 때야 한다면 남에게 미루지 말고 먼저 행동하면 된다.
그리 생각하고 그리 실천하면 되지 싶다.
내가 조금 손해를 보고, 먼저 행동하는 것이 모두를 위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면 두루두루 편안해 진다.
서로에게 고마움을 표현하고, 감사를 전할 줄 아는 친구들로 인해 우리의 '커뮤니티'는 늘 웃음꽃이 핀다.
'이기'보다는 '이타'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몸에 밴 친구들이다.
그래서 스무살 때 '봉사 동아리'에 들어왔는 지도 모르겠다.
사랑하는 친구들 모두 늘 건강하고 가내 두루두루 평안하기를 기도한다.
향기로운 우정에 다시 한번 깊은 감사를 전한다.
두 장의 사진도 곁들여 본다.
브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