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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지와 겨자씨와 누룩 비유(3)
마 13:24-35
24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25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26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27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28 주인이 이르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29 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30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31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32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33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34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35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 설 교 >
신앙생활의 나비효과
마 13:31-33 / 임덕순 목사
요즘 카오스 이론이라는 것이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아마 어느 회사에서 만든 세탁기에도 카오스 세탁기라는 이름을 붙였을 것입니다. 카오스라는 말은 혼돈이라는 뜻인데, 자연계의 현상이 혼란스럽고 예측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카오스, 즉 '혼돈 이론' 이란 것은, 그렇게 혼돈 스러운 것 같은 세계에도 아주 복잡한 구조의 질서가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이론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결정된 혼돈'(deterministic chaos)이라고 표현합니다. '결정된 혼돈' 이란, 겉으로 보기에는 혼란스러워 보이는 현상 속에는 기존의 설명체계로는 포착되지 않는 복잡한 구조의 질서가 숨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을 설명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나비 효과' 라는 것이 있습니다. '나비 효과'란 "북경 하늘에서 나비 한 마리가 날개를 퍼덕였는데, 그것 때문에 지구의 반대쪽인 저 뉴욕의 날씨가 맑음에서 폭풍우로 바뀔 수 있다" 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상학적으로는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만, 실제로 이런 일들은 이 세상에서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요즈음 해외뉴스를 보면, 어디는 몇 십 년만에 대 홍수를 겪고 있고, 어떤 나라는 유례가 없는 엄청난 눈이 쌓였으며, 어디에서는 너무 오랫동안 비가 오지 않아서 기근이 심각하다는 뉴스를 듣습니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지 아십니까? 오늘의 이런 기상이변들은 우리가 무심하게 배출한 이산화탄소 때문에 지구가 온실처럼 만들어진 온실효과 때문이랍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이 나비효과 이론은 대단히 근거있는 이론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학설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닙니다. 첫째는, 자연계에 일어나는 모든 변화에는 무엇이든지 그 시발점에 있다는 것이며, 둘째는, 아주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거대한 결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몇 해전에 겪은 한국경제파탄의 원인도, 아주 작은 데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국민들이 생각 없이 낭비한 몇 푼의 돈, 공무원들이 정리해야할 기업들을 정리하지 못하고 질질 끌어간 일, 대통령이 개인적 감정에 매여 내린 작은 결정 하나, 담당 장관이 외환보유고에 대해서 한 거짓말 등, 아주 작은 나비의 날갯짓 같은 일들이 결국은 나라의 경제몰락을 가져왔던 것입니다.
1. 성경에 나타난 '나비 효과'
성경에도 이런 '나비 효과'를 보여주는 사건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삼상 12: 7-15에 보면, 다윗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벌이 나단 선지자에 의해 전달되고 있습니다. 다윗이 어느 날 왕궁 지붕 위를 거닐다가 건너편 한 집에서 여인이 목욕을 하는 것을 보았는데 몹시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그 여인이 누구인지를 알아보니 전쟁터에 나가 싸우고 있는 우리아 라는 장수의 아내였습니다. 다윗은 그 여인을 데려다가 동침하였고, 그 여인이 임신된 것을 알자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불러다가 집에서 쉬게 하였으나 우리아는 충신인지라 동료들은 전쟁터에서 피를흘리며 싸우는데 나만 편히 쉴수가 없다고 집에 가서 쉬는 것을 거절하자 결국 그를 전쟁터에 다시 보내어 죽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일은 모두 비밀리에 진행되었기 때문에 그냥 지나갈 줄 알았는데, 나단 선지자가 나타나 그 죄를 지적하고 다음과 같이 무서운 벌을 선고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네 집에 재화를 일으키고 내가 네 처들을 가져 네 눈앞에서 다른 사람에게 주리니, 그 사람이 네 처들로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이스라엘 무리 앞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삼하 12:11-12)
나단의 예언대로 다윗의 왕국에는 무서운 재난이 닥쳐왔습니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켜 다윗은 왕궁을 빼앗기고 도망을 다녀야 했고, 압살롬은 자기 아버지의 후궁들을 백주에 욕보였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전세가 역전되어 압살롬이 요압의 창에 찔려 죽음으로 난리가 멈춥니다. 그야말로 한바탕의 큰 폭풍이 지나간 것처럼, 다윗의 집안과 그가 다스리는 나라가 큰 난리를 치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엄청난 사건의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다윗이 눈길 한 번 잘못 돌렸기 때문에 시작된 일입니다. 한 번의 잘못된 눈길이 엄청난 폭풍이 될 줄을 누가 짐작이나 했겠습니까? 이것이 나비효과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시조인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눈길 한 번 잘못 돌려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었기 때문에 온갖 비극이 인류 만대에 덮쳤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가는 길을 직행하지 못하고 광야에서 40년이나 고생한 것도 가나안을 정탐한 사람들의 잘못된 판단 때문이었습니다. 열 두 명의 정탐꾼 중 열 명이, 그 성은 너무 크고 사람들은 모두 거인이어서 도저히 저들을 정복할 수 없다고 보고하자 백성들은 하나님을 원망하며 하나님의 능력과 약속과 인도를 불신했고, 그 결과로 그들은 40년 동안 광야를 헤매며 다시 훈련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무심히 행하는 작은 행동 하나가 나비효과가 되어 우리 사회의 큰 폭풍우를 몰아오고 있음을 우리가 인식해야 하는 것입니다.
2. 우주 전체와 연계된 나의 삶
우리는 그동안 너무 우물안 개구리처럼 살았습니다. 자기 눈에 보이는 좁은 테두리 안에서만 살아오면서 전체를 보지 못한 채, 나의 이익과 나의 편의만을 위주로 행동하였던 것입니다. 내 생각 내 행동 하나 하나가 결코 나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에 미치고, 더 나아가서 우주 전체에 미친다는 의식이 우리에게는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세계 전체가 서로 연관을 가지고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며 살고 있는 시대입니다. 아르헨티나의 경제파탄이 남미 전체 경제를 망가뜨리고 있고, 일본의 경제침체와 산업붕괴가 한국의 산업침체를 만들어내고 아시아의 경제를 망가뜨릴 것이라고 예고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세계의 시민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지음 받은 자연과 인간은 서로 연결되어 있는 존재입니다. 성경은 피조물 중에서 특히 인간의 잘못된 판단과 행동은 피조세계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경고하면서 신중하게 행동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요 세상의 관리자인 사람이 하나님을 바로 공경하며 세상을 지혜와 사랑으로 다르시면 우주 전체가 바르게 운영되지만, 인간이 그런 지시를 따르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하게 될 때에 그 죄 값이 자신들을 고통스럽게 하고 우주 전체가 고통과 혼돈에 빠질 것을 경고하셨습니다. 롬8: 21-22에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라고, 피조물들도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자기들이 피해를 당하는 것을 괴로워하며, 하나님의 참된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한다고 하였습니다. 나의 몸짓 하나는 그대로 하나님의 전체 세계에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의 작은 몸짓 하나도 소홀히 하지말고 매우 신중해야 합니다.
3. 신앙생활의 '나비 효과'
작은 시작이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는 나비효과는 하나님의 나라의 원리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3:31-35 에 나온 예수님의 겨자씨 비유나 누룩 비유를 보면, 아주 보잘것없는 작은 것으로부터 천국은 시작된다는 사실을 말씀합니다. 씨 중에 가장 작은 씨인 겨자씨가 밭에 심겨지면, 자라서 새들이 와서 깃들일 만큼 큰 나무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도 겨자씨 같이 작게 시작된다는 교훈입니다. 누룩 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한줌의 누룩이 서 말이나 되는 가루의 반죽을 부풀리는 것처럼, 우리 속에 깃들인 적은 믿음이 그 사람과 가정과 사회를 변화시키는 놀라운 일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마태복음 25장에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이것은 더욱 뚜렷하게 교훈 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마지막 심판대에 이를 때에 사람을 양과 염소를 나누듯이 좌 우편으로 나누어 서게 하고, 임금이 오른쪽에 있는 양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사람들아, 와서,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주렸을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 주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왜 이 엄청난 상을 받게 되는지 몰랐지만, 주님은 그들에게 설명하시기를, 너희가 땅에 살면서 지극히 작은 사람 하나에게 밥 한 그릇, 물 한 그릇을 대접한 일, 그리고 나그네를 영접하고 헐벗은 자에게 헌 옷이라도 입을 것을 주며, 병들어 외롭게 쓰러진 사람에게 문안을 하고 돌봐준 작은 일 때문에 너희는 천국을 상속한다고 말씀 하셨다는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이곳에서의 작은 나비의 날갯짓이 저기서 천국을 얻는 결과를 낳는다는 말씀입니다.
그 반대로 물 한 대접, 밥 한 그릇 얼마든지 줄 수 있는데도 그것이 필요한 사람에게 주는 그 작은 일을 소홀히 한 사람은, 결국 "마귀와 그 부하들을 가두려고 준비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 가는 무서운 결과를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물 한 대접이 그렇게 대단한 것이며, 밥 한 그릇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겠느냐' 라고 가볍게 여기고 무심히 지나치지만, 그것이 바로 영원한 천국의 삶과 영원한 불로 갈라지게 만드는 분수령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결코 대단히 크고 엄청난 일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일, 작은 날갯짓을 바르게 하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나, 한 사람의 바른 신앙생활, 나 한사람의 바른 생각과 행동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데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될 때, 대단히 중요한 존재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생각과 말과 행동을 신중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 우리의 말, 행동에 따라서 폭풍이 몰아칠 수도 있고, 풍성한 열매를 거두는 풍요로운 계절을 맞이할 수도 있습니다.
남미 아르헨티나는 경제 파산선언을 하고 한해에 수천 퍼센트 물가가 상승했던 그 전철을 다시 밟기 시작했다고 하는 뉴스가 들려옵니다.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났는지 아십니까? 50년전에 페론이라는 대통령이 나라의 앞날은 생각하지 않고 자기 인기만을 생각해서 인심쓰는 정치를 했기 때문에 만들어진 결과입니다. 그래서 한번 경제가 파탄나고 빚더미 위에 올라앉자 수 십 년이 지나도 그것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향이 남미 전체를 경제적인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사회에도 폭풍우에 싸여 있습니다. 아침마다 배달되는 신문에는 권력의 핵심이 부패해 있다는 소식으로 채워지고 있습니다. 오늘 닥쳐온 우리사회의 먹구름은, 어디선가 퍼덕인 나비의 잘못된 날갯짓 때문에 일어난 것입니다. 그 잘못된 날갯짓 속에는 우리의 날갯짓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폭풍을 잠재우기 위해서 정치인과 기업인들이 거듭나는 것은 물론이고, 우리 모두가 새로운 결심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나 하나의 부정이 결국은 우리 사회의 부정으로 발전하였고, 내가 만든 불신은 우리 사회 전체의 불신을 가져옵니다. 나 하나가 뭘 할 수 있느냐 하지만, 작은 나비의 날갯짓 하나가 저 반대쪽 세상을 폭풍우로 변하게 하는 게 세상의 이치이고 하나님의 이치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삶 속에서 거짓과 부정을 몰아내고 진실한 삶을 이룩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기 시작합니다.
오늘날에는 정치 따로, 경제 따로, 신앙 따로 일 수 없습니다. 오늘날의 부정부패와 사회 혼란은 자기의 유익만을 추구하는 욕심에서 비롯되었고 그것은 바로 도덕성의 문제요 도덕성은 바로 신앙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사회의 문제는 결코 정치나 경제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신자들이 사회에 나가서 사는 생활을 하나님 명령 하신대로 똑바로 행동했더라면, 우리가 이 사회에 커다란 충격이 되었을 것입니다. 나비의 날갯짓도 기상을 바꾸는 역할을 할 수 있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형상이요 세상의 양심이 되어야 할 성도의 올바른 삶이 어찌 영향력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신자가 포함된 단체에서는 거짓말을 못하게 되고, 뇌물을 주려다가 찔끔하게 되고, 뇌물을 받으려다가 양심에 가책을 받게되고, 정책적인 비밀을 빼돌려 치부하려다가 믿는 사람을 생각하니 하나님이 두려워서 그 짓을 멈추었을 것이고, 그렇게 신앙이 바로 서면 양심이 바로 서고, 도덕이 바로 서며, 도덕이 바로 서면 정치와 경제가 바로 서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되는 것이 교회를 이 세상 속에 두고 세상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되라고 하신 이유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작은 겨자씨에서 거대한 하나님의 나라가 싹트는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생각과 말과 행동 하나 하나가 그대로 하나님 나라에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신중하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여야 할 것입니다. 신중하게 행한다는 것은 내 기분대로, 내 생각대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그 뜻을 따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뜻합니다. 지나치게 자신에게만 몰두하였던 사고 방식을 벗어나, 이웃을 생각하고 우리 사회를 생각하며 민족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전체 역사를 통찰할 수 있는 역사 의식을 지니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전체 역사와 나의 삶을 연결시킬 때 나의 모든 삶은 그 뜻을 따라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물안 개구리 의식을 버리고 끝없는 하늘을 바라보면서 독수리처럼 날아올라 멀리보고 크게 생각하기를 힘써야 하겠습니다. 변화된 나 한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크게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사회를 변화시키고, 민족을 새롭게 하는 일에도 기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새해에는 나의 삶의 아주 작은 일에서부터 바른 삶, 절제하며 절약하는 삶, 정직한 삶을 실천하므로 주님이 기대하시는 참된 신자가 되고, 우리사회가 당면한 부패와 부정직, 불신의 위기를 극복하며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는 생활이 되기를 바랍니다.
눅 16:10에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라고 하셨습니다. 한해를 살면서, 우리는 작은 일을 바르게 합시다. 예수님을 닮아 가는 생활을 합시다. 길을 걸어가도, 물건을 사고 물건을 파는 일에도, 누구와 말을 하고 누구에 관한 말을 하는 것도, 직장에서 일을 하고 사업을 경영하는 것도, 늘 하던 그 일이지만 그 일을 예수님이라면 이 일을 어떻게 하실까? 하는 생각으로, 예수님처럼 해 봅시다. 당연히 퍼덕여야 하는 날갯짓이지만 그 날갯짓이 바로 되면, 세상이 변화됩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후손들이 살아갈 이 세상이 하나님이 기뻐하실 아름다운 봄날처럼 되어질 것입니다. 그런 열매 맺기를 바라고 우리에게 그런 삶을 요구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한 걸음을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겨자씨와 누룩비유
마 13:31-33 / 안병호 목사
페르시아의 유명한 대왕이요 장군이던 다리오스 황제가 구라파 침략을 하면서 첫번째 치렀던 전쟁이 알렉산더 대제가 거느리는 군대와의 대전이었습니다. 그때 다리오스는 알렉산더 대제에게 병사 하나를 시켜 선물 하나를 보냈습니다. 선전포고를 하면서 보낸 그것은 참깨가 잔뜩 들어 있는 부대였습니다. 이 자루에 깨들이 얼마나 엄청나게 들어 있었겠습니까?
그것은 다리오스가 "우리의 군대는 이렇게 많다. 그러니 손들고 항복하라. 너희들은 승산이 없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였습니다. 깨가 가득 들어 있는 부대를 받은 다음에 알렉산더 대제는 담장으로 작은 봉투에다 씨 하나를 넣어서 다리오스에게 보냈습니다. 그것이 바로 겨자씨였습니다. 그것은 이런 뜻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우리가 작다고 무시하지 말라. 우리는 무섭다. 우리는 놀라운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거칠다. 우리는 너희들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리고 알렉산더는 승리했습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외형적인 것에 현혹되기 쉽다. 우리는 아무리 적을 지라도 거기에 생명이 있고, 미래가 있다면 그것이 귀한 것이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아무리 적을지라도 거기에 생명이 있다면 큰 성공이 보장된다는 것을 말씀해 준다. 그 첫째의 비유가 겨자씨 비유요, 둘째 비유가 누룩의 비유이다.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는 한 짝이다. 이두 비유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겨자씨 비유는 하늘 나라의 외적인 성장을 그려주고 누룩의 비유는 하늘나라의 내적인 성장을 말해 준다.
Ⅰ. 겨자씨 비유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13:31-32)
예수님은 일상생활로부터 예를 사용한다. 깡통과 병과 음식 봉지 등을 사용하는 시대에 밭에 대한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생소하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는 집집마다 각자 텃밭이 있었다. 그 당시에는 목사들까지도 박하와 외향과 근체의 십일조를 드렸다. 모든 밭에는 겨자씨를 심었다. 겨자씨는 아주 적은 것을 비유할 때 당시 자주 사용되었다. 예수님은 만일 네가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으면 이 산을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옮길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마태와 마가는 공히 겨자씨는 모든 씨 중에 가장 작은 씨라고 하였다. 아주 보잘 것 없는 것이 큰 나무가 되었다. 이것은 기적이다. 예수님은 에스겔의 말씀을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17:23 이스라엘 높은 산에 심으리니 그 가지가 무성하고 열매를 맺어서 아름다운 백향목을 이룰 것이요 각양 새가 그 아래 깃들이며 그 가지 그늘에 거할지라
겨자씨는 아주 작은 씨인데 그 씨가 자라면 아주 큰 나무가 된다. 분명히 예수님은 아주 작은 씨와 큰 나무의 차이를 강조하고 있다. 그는 그 씨의 질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겨자씨의 다른 면이 많이 있다. 음식으로 사용된다거나 의약으로 사용된다거나 그의 맛 그의 색깔 등, 많은 것을 말할 수 있겠지만 그는 이런 것들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비유라는 수단을 통해서 예수님은 가르친다. 특별히 서기 28년경에 있어서 갈릴리에서는 천국은 무의미하고 가난하게 보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목수생활을 했던 설교자에 의해서 선포된 천국 복음은 세상에 놀랄만한 영향을 주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부르심을 받은 소수의 교육 받지 않는 어부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렇게 따르는 사람들은 구원의 메시지로 세상에 불을 질렀다. 오늘날은 온 세계의 알려진 언어로 선포 되었다. 기독교의 새로운 세대의 벽두에 갈릴리에 뿌려진 조그마한 씨앗은 오늘날 모든 사람들에게 안식처와 쉼을 제공한다. 그리고 아직 그날은 이르지 못했다.
나무는 아직 성숙한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 아직 계속 자라고 있다. 우리는 자라나는 나무의 형상을 본다. 하나님이 그 왕국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일하고 있는 것을 본다. 아직도 지구상에 셀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용서의 기쁜 소식을 듣지 못했다. 전 나라들은 사실상 하나님의 나라에 의하여 연장된 안식처를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나무 가지 들은 계속 자라야 한다. 그리고 군중들이 피난처와 휴식처를 찾기 위하여 아직 복음이 필요한 지역에 까지 확장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세상의 모든 나라들에 전파 될 때 끝이 올 것이다(마24:14). 그리고 나무는 완전히 자랄 것이다.
이 땅에 복음이 들어 올 때도 겨자씨와 같이 아주 미미한 가운데 시작이 되었다. 그러나 이제일천만이 넘은 그리스도인으로 교회는 자라왔다. 겨자씨와 같은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를 통해서도 지금 자라고 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속에 천국의 씨는 뿌려 졌고 그 씨는 계속 자라고 있다. 오늘도 주일학교 어린이들이 얼마나 많이 교회에 몰려들었는지 모른다. 11월 초에는 한양 대학에서 전도 집회가 있는 데 700명을 목표로 준비하고 있다. 우리는 왕십리 성시 화 민족의 복음화 학원 복음화 세계선교를 위하여 피 땀나게 일하고 있다. 반드시 겨자씨와 같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온 세계에 전파 될 것을 믿기 때문이다.
아주 적은 겨자씨가 심겨서 싹이 나고 자라서 큰 나무가 되어 많은 새들이 깃들인다는 것을 상상만 해도 얼마나 신이 나는 일인가? 우리의 모임이 지금은 비록 보잘 것 없지만 얼마 안가서 왕십리 전영에서 사람이 몰려들고 전국에서 많은 영혼들이 몰려들고 전국의 캠퍼스에서 수많은 대학생들이 몰려든다면 얼마나 신이 나겠는가? 우리가 분양 받은 600평의 레몬 프라자의 건물에 항상 세계각지에서 구원 받고 은혜 받은 사람들이 쉴 세 없이 모여든다면 얼마나 즐거운 일이겠는가? 각 지방에서 각 캠퍼스에서 구원 받고 은혜 받은 성도들이 함께 은혜를 받기 위하여 모여 든다면 얼마나 신 나는 일인가? 우리가 진정으로 생명이 있는 겨자씨와 같은 천국의 복음의 씨를 뿌리면 반드시 이와 같은 역사가 일어날 것을 믿는다.
나는 우리 성도들의 가정이 항상 겨자 나무와 같은 큰 나무가 되어 많은 영혼들이 항상 모여 들어 깃들일 수 있기를 빈다. 우리의 가정에 겨자씨와 같은 하늘나라의 씨를 심는다면 반드시 큰 나무를 이루어 많은 영혼들이 깃들이는 기쁨이 있으리라 믿는다. 이렇게 될 대 하나님은 많은 축복을 주실 것을 자녀들에게 축복을 줄 것이다. 어려서부터 손님이 많은 가정을 보면 반드시 그 자녀들은 성공하게 되었다. 많은 사람이 드나들면 항상 거룩한 삶을 살게 된다. 그리고 많은 정보를 얻어 항상 많은 기회를 얻게 된다.
Ⅱ. 누룩의 비유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13:33)
예수님은 어려서 나사렛에서 자랄 때 그는 그의 어머니가 빵을 굽는 것을 보았다. 빵을 구울 때 그 어머니가 반죽 속에 누룩을 넣었을 때 반죽이 크게 부풀어 오른 것을 보았다. 여기서 가루 서 말이라고 했는데 한말이 약13.13리터가 된다고 한다. 그래서 그 여인은 약 39리터의 가루를 취하여 빵을 굽고자 한 것이다. 물론 이것은 적은 가족의 경우에는 하루의 식량으로는 너무 많은 양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세 사람의 손님이 왔을 때 그 정도로 빵을 구웠다(창 8:6).
비유의 요점은 누룩은 가루에 첨가된 후에는 세세한 부분에까지 영향을 미칠 때가지 전 덩어리에 확산 된다는 것이다. 누룩은 이제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 효과는 모든 사람에게 보인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그 능력을 나타내며 이 세상에 드러나는 가를 말해 준 것이다. 겨자씨 비유에서는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외적인 확장을 말해 준다. 누룩의 비유에서는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치는 하나님 나라의 내적인 능력에 역점을 둔다. 겨자씨 비유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에게 주어진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말씀에 순종함으로서 교회의 세계적인 전도 프로그램을 예증한다.
누룩의 비유는 그리스도에게 순종한 결과 삶의 모든 분야를 기독교화 하는 결과를 낳게 한다는 것을 설명한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은 그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게 한다(마 5:16). 그는 가난과 핍박으로 고난당한 자들을 일으켜 세우며, 의를 위하여 핍박당한 자를 옹호한다. 그는 나라를 다스리기 위하여 지명되고 선출 된 자들에게 정직을 요구한다. 그는 도덕적인 수준을 높인다. 그는 삶의 거룩함을 변호하며, 그 땅의 율법을 들어 올린다. “그리스도안에서 모든 보화와 지혜와 지식의 보물이 감추어져 있다.”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는 성경의 가르침을 모든 곳에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이 그리스도의 규칙의 누룩은 살아 있고, 모든 영역은 수천가지의 방법으로 이미 영향을 미쳐왔다. 이 영향은 지금도 계속하고 있으며 이것은 보는 눈이 있는 모든 사람에게 분명하다.
“하늘나라”라는 표현은 예수님에게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교회와 동의어인가? 하나님의 백성은 개인적으로 혹은 공동체 적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한다. 그들은 함께 교회를 구성한다. 그 교회 안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기쁘게 지킬 수 있도록 해 주는 은사와 능력을 받았다. 그리고 우주적으로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규칙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은사와 능력을 받았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삶의 모든 영역에서 적용하는 사람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렇게 함으로서 그들은 그리스도의 규칙이 알려진 하나님나라를 증진 시킨다. 간단히 말해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은 삶의 모든 영역은 그 나라에 속해 있다.
또한 교회는 내면적인 변화의 성장이 있어야 한다. 나는 많은 목사들이 성도들의 변화가 없다는 것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을 많이 듣는다. 특히 장로들의 성장은 참으로 거의 퇴보된 상태라고 말한다. 그런데 나는 누구에게나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교회 장로님들은 해가 갈수록 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번 12명의 중직을 세우게 되었는데 그들과 함께 훈련을 하면서 나는 너무나 감사한다. 그들의 성장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지난 마지막 훈련시 전원이 소감을 다 썼다. 얼마나 은혜스럽게 썼는지 모른다. 소감 쓰는 일처럼 어려운 일이 없다. 초신자 때는 소감을 잘 슬 수 있지만 신앙이 성장한 후에는 말씀 적용이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분들의 소감은 너무나 은혜스러웠다.
나는 우리교회가 얼마나 내적으로 성장하고 있는가를 지난 주간에 일어난 사실을 통해서 절감 했다. 지난주일 처음으로 당회에서 36억짜리 레몬프라자 한 층을 사자고 건의를 했다. 당일에 결정을 했다. 그리고 월요일에 계약을 했다. 그리고 목요일 까지 5억이라는 돈을 마련했다. 주로 청년 학생들만 모이는 이 교회에서 이정도 일이 일어난 것을 보면 대단한 교회 아닌가? 우리 성도들을 보라. 직장이 없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버젓한 아파트 한 체 가지고 있는 사람 손으로 꼽을 수 있다. 모두가 셋집에 산다. 그것도 지하 셋방, 혹은 월세방을 살고 있는 성도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이 큰 일을 아무런 소문이 없이 척척 해 나갈 수 있다. 이것을 볼 때 우리 교회가 얼마나 내실이 있는 교회인가를 알 수 있다.
교회는 외적으로 내적으로 성장해야 한다. 아니 외적으로 내적으로 성장하게 되어 있다. 외적인 성장은 내적인 성장을 가져오고 내적인 성장은 외적인 성장을 가져온다. 우리가 질적인 성장만 추구하고 외적인 성장이 멈춘다면 바리새인이 되기 쉽다. 동생이 있어야 형이 자란 것처럼 교회는 끊임없이 새로운 사람이 들어와야 한다. 외적인 성장만 있고 내적인 성장이 없으면 아무리 많은 수고 모여도 금방 무너지고 만다.
교회는 외적으로 내적으로 성장해야한다.
만약에 우리교회 영동 4거리에 있을 때처럼 상가 안에서만 계속 있었다고 생각해 보자. 여기 이 자리에 남아 있을 사람 얼마 없을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교회가 여기 예배당을 짓고 처음처럼 이 지하 예배당과 1층만 사용하고 있다고 생각해 보자. 아마 이 자리에 계속 남아 있을 분들이 이 정도는 아닐 것이다. 2,3층을 우리가 사용하게 되었을 때 교회는 더욱 활기찬 성장이 있었다. 4층을 교육관으로 쓰고 또 5층을 교육관으로 사용하게 될 때 교회는 더욱 활발하게 성장하게 되었다.
청년들의 안식처가 있음으로 청년들이 지난 주일에는 70명이 모였다. 이정도 사이즈의 교회에서 대학생이 70명이 모인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것이다. 교회는 외형적으로도 성장해야한다. 아니 교회는 우리가 바르게 믿기만 하면 성장하게 되었다. 외형적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채미자 간사가 꽤 오래 전에 논문을 쓰면서 우리교회 성장 추이를 조사해 본 일이 있었다. 그 때만 해도 교회는 성장하지 않아 참 답답한 때였다. 그런데 채간사는 온마음 교회는 더딘 것 같아도 계속 성장하고 있다고 나에게 일러 주었다. 그 때 얼마나 위로가 되었는지 모른다. 교회가 계속 성장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겨자씨와 누룩같은 생명운동
마 13:31-33 / 김영대 목사
고대 수리학자인 피타고라스는 일찍이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앞으로 오는 시대의 지배적인 신은 '숫자의 신'이 될 것이다." 정말 그의 예언대로 나라마다 사람마다 더 많은 숫자의 군대, 더 많은 숫자의 무기, 더 많은 양의 돈을 확보하는 나라와 개인이 되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21세기는 그야말로 "숫자"의 시대입니다. GNP나 주식 시황을 알리는 숫자가 올라가면 좋아하고 숫자가 내려가면 실망하는, 숫자에 울고 웃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숫자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는 사실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드온 300용사의 이야기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숫자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돈의 양에 있지 않고, 믿음의 위력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건물의 크기에 있지 않고, 품고 있는 비전의 크기에 달려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예수님께서 들려주시는 겨자씨비유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우리 나라에서 작다는 의미의 대명사는 좁쌀입니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에서 가장 작다는 의미의 대명사는 바로 겨자씨였습니다. 겨자씨는 그 크기가 꼭 들깨만 합니다. 그러나 자라나면 그 키가 3-4m나 되는 큰 나무가 됩니다. 그래서 겨자씨는 한 마디로 작은 것의 무한한 가능성을 강조하는 희망의 메시지며, 꿈과 비전의 메시지입니다.
이 비유에서 겨자씨는 하나님의 말씀, 복음을 뜻합니다. 즉 복음에는 생명의 능력이 잠재되어 있어 크고 놀라운 일을 이루게 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믿고 거듭나서 이 부활의 생명을 소유케 되면 이제 그는 세상의 그 어떤 존재보다 힘있고 위대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속에 생명이 있기 때문에 그 때부터 자라게 되고, 생명의 운동과 역사, 영향력이 나타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죽은 것은 아무리 커도 운동력이 없습니다. 영향력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속에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첫째, 하나님이 하시는 생명운동은 겨자씨 운동입니다. 작게 시작하나 생명을 통해 크게 이루어 가시는 운동입니다. 하나님은 대개 미약하게 출발시키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 8:5)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생명 있는 믿음을 갖게 되면, 비록 지금은 미약하지만 나중은 크게 된다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우리 가족 중에 지금은 나 한 사람만이 예수를 믿지만, 이 믿음 속에는 생명이 있기에, 나의 이 작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집과 가문이 위대하게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 교회가 예수의 생명으로 충만하면 이 부천뿐만 아니라, 대한민국과 북한, 나아가서는 온 세상을 향해 복음을 전파하는 영향력 있는 교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온갖 가능성의 미래를 약속해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17장 20절에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산'과 '겨자씨'는 아주 대조적인 단어입니다. 크고 작음의 대비이며, 죽은 것과 그 속에 생명이 있는 것의 대비입니다. 작으나 생명이 있는 것의 위대성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는 사람, 예수의 생명을 가진 사람은 산더미 같은 인생의 문제가 밀려와 사람과의 관계가 가로막히고, 앞길이 가로막히는 일이 있을지라도 그 태산 같은 문제를 넉넉히 뛰어넘어 해결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겨자씨 속에 들어있는 생명력으로 땅을 뚫고 새순이 올라오듯이 믿음 속에 있는 생명력 때문에 문제를 뚫고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삶을 주장할 때, 내 삶에 놀라운 축복의 역사(役事)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태산을 움직이는 믿음, 못할 것이 없는 믿음, 난관을 뚫고 일어서는 믿음의 위력으로 승리하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저는 우리 꿈마을엘림교회가 겨자씨 같은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복음의 신비한 능력을 나타내는 교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위탁하신 믿음의 능력으로 나라와 민족과 세계 선교를 주도해나가는 위력 있는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이 역사의 대열에 여러분들이 바로 주인공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본문 13장 3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겨자씨가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여기 '공중의 새들'은 세상 사람들 중에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을 가르치는 말입니다. 또한 '깃들인다'는 말은 '장막을 세운다', '진을 친다'라는 말인데 이는 안전한 거처를 마련한다는 뜻입니다. 즉, 겨자 나뭇가지에 깃들이는 새들이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고, 예수 안에 삶의 보금자리를 정하고, 구원받은 자의 안전과 행복을 만끽하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은 구속의 은총 아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새 인생의 축복과 평안과 행복을 누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 한 사람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가정이 다 인가귀도 되어 온 가족이 복음 안에 삶의 둥지를 틀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이웃과 친구들이 복음 안에서 인생의 참 행복과 안식을 누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생명 나누기 운동"은 바로 생명 없는 가족들에게, 믿지 않는 이웃과 친구들에게 예수의 생명을 전하는 운동입니다. 앞으로 두 주 후인 10월 13일은 생명 없는 이들에게 예수의 생명을 접붙이는 날입니다. 그들로 하여금 생명을 가진 겨자씨가 되게 하는 날입니다. 그들의 운명을 바꾸게 하는 날입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는 날입니다. 이 생명을 나누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0월 둘째 주일 / 이웃초청주일)
폭탄을 터뜨리는 것은 폭탄 전체에 불을 붙이는 것이 아닙니다. 작은 뇌관에만 불을 붙이면 됩니다. 뇌관에 불이 붙어 터지면 나머지는 다 터져 버립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 자신들이 가정을 복음으로 변화시키는 뇌관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불신 친구들에게 뇌관과 같이 전도하는 한 사람이 필요합니다. 불신 이웃들을 위해 뇌관과 같이 기도하는 한 사람이 필요합니다. 불붙은 뇌관과 같이 전도의 불이 붙은 한 사람이 필요합니다. 남 선교회와 여 선교회의 활성화를 위해 열심히 전화하며 모이는 일에 헌신하는 한 사람이 필요합니다. 교회와 선교를 위해 헌신하는 한 사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생명, 영혼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이 여러분 속에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으로 인해 생명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두 번째, 하나님의 생명운동은 누룩 같이 역사합니다. 요즘은 집에서 빵을 쪄먹는 일이 별로 없지만 제가 어렸을 적만 해도 대부분의 집에서 빵을 쪄먹었습니다. 빵을 찌려면 먼저 넓은 대야그릇(양푼)에다가 밀가루 한 바가지를 쏟아 붓습니다. 그리고 물을 조금씩 넣어가며 반죽을 합니다. 소금도 조금 뿌린 후에 계속 반죽을 합니다. 그 다음에 어머니는 조그만 병에서 무언가를 한 숟가락 떠서 밀가루 반죽 속에 넣고 한 참을 이긴 후에 삼베 천으로 반죽 그릇을 덮어놓고 아랫목이나 가마솥 뒷전에 놓아둡니다. 그리고는 한 나절 후에 보면 그 한 바가지의 밀가루 반죽은 한 대야로 부풀어 있습니다. 그러면 그 부풀은 반죽에 흑설탕이나 팥 앙꼬를 넣어서 빵을 찌면 그게 얼마나 맛있었는지 아마 연세 드신 분들은 다 아실 것입니다.
병 속에서 꺼내 한 숫가락 밀가루에 넣은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이스트, 효모, 오늘 말씀에서는 누룩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 누룩에는 밀가루를 변화시키고 부풀리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여자가 가루 속에 넣은 누룩은 바로 '복음', 곧 예수의 말씀, 영생의 복음, 구원의 복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의 초점은 세상 사람들로 비유되는 밀가루 속에 이 누룩을 넣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불신자의 삶 속에 변화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누룩의 발효력! 누룩의 팽창력! 누룩의 변화력! 누룩의 운동력! 이것은 하나님의 '생명 역사'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적은 양(量)의 누룩이 가루 서말 전체를 부풀게 했듯이, 바로 복음 속에 있는 생명의 힘은 사람의 마음속에서 역사하여 그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 팽창력과 변화력, 영향력과 정복력이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은 지 한 3년 된 사람에게 믿지 않는 한 친구가 찾아왔습니다. 그 친구는 말하기를 "그래 자네가 크리스챤이 됐다지?" "그렇다네." "그럼 성경에 대해서 꽤 알겠군. 어디 좀 들어보세. 성경은 몇 권이나 되며 그 제목들을 다 외울 수 있나? "몇 권은 알지만 다는 모르겠네." "그럼 설교는 몇 번이나 들었나? 자네가 들은 설교 중에 내가 들을 만한 설교가 있다면 한번 말해 보게" "매번 은혜 받기는 했지만, 사실 자네에게 딱히 뭐라고 할 말은 없네." "아니 자네는 크리스챤이 되었다면서 정작 뭐 아는 게 없잖나?" "자네 말이 맞네. 아닌게 아니라 나는 아직까지 예수님과 그의 가르침에 대해서 아는 게 너무 적네. 자네보기에 부끄럽구먼. 하지만 내가 확실히 알고 있는 사실이 있지. 3년 전에 나는 술주정뱅이였고, 많은 빚을 지고 있었지. 내 가정은 산산조각 나기 일보직전이었고 말이야. 저녁마다 내 처자식들은 내가 돌아오는걸 무서워했지. 나는 무서운 폭군처럼 행세했으니 말일세! 그러나 자네가 보다 시피 난 이제 술주정뱅이가 아니야. 빚도 다 갚았다네. 이제 우리 집은 화목한 가정이 됐네. 저녁마다 아내와 아이들은 내가 돌아오기를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지! 이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걸세. 이것만큼은 내가 분명히 알고 있네."
이 고백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신과 자신의 가정에 일어난 생명의 변화, 축복의 변화, 행복의 변화를 체험하면서 고백하는 말입니다. 복음이라고 하는 누룩 속에는 참으로 대단한 능력이 있습니다. 그 속에는 사죄의 능력이 있습니다. 죄를 사하는 힘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만이, 복음만이 가진 생명의 매력입니다. 예수님에게는 전 인류를 멸망시키는 무서운 죄와, 죄의 삯인 사망의 문제를 해결하는 용서의 능력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자신이 세상에 오신 근본 목적입니다. 그는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오셨습니다(막 10:45). 예수님에게만 사람의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습니다(막 2:10). 그래서 그는 만민에게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복음이라고 하는 누룩 속에는 사랑이라고 하는 효소가 들어있습니다. 겸손이라고 하는 효소가 들어있습니다. 소망이라고 하는 효소가 들어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사람의 마음속에서 들어가 감화와 감동, 재기와 용기의 역사(役事)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실패에서 성공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좌절에서 용기에로의 변화를 일으킵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복음은 개인 그 자체의 인격과 생활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킵니다. 시몬이 베드로로, 사울이 바울로, 우뢰의 아들이 사랑의 사도 요한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잃어버린 인생 그 자체를 되찾아주는 능력이 있습니다.
① 누룩은 가만히 있지 않고, 변화시키는 운동을 합니다. 밀가루 자체에는 아무런 변화의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누룩이 들어가면 발효되기 시작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스스로 변화시킬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내 속에 복음이 들어오면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누룩은 일단 밀가루 속에 들어가면 변화작용을 시작합니다. 밀가루를 부풀게 합니다. 누룩이 들어가야 밀가루가 부풀어 양도 늘고, 또 빵의 맛을 냅니다. 맨 밀가루 빵은 맛이 없습니다. 이것이 곧 복음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 가슴에 들어가면 변화가 일어납니다. 맛이 달라지듯이 삶의 질이 달라집니다. 그 사람이 모르는 사이에 조용한 변화운동을 일으키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의 생명력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음은 누룩과 같습니다. 사람 속에 들어가면 밀가루를 부풀리듯 생명의 역사를 일으킵니다. 질적인 변화를 일으킵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그 가슴에 풍성하면 인생의 혁명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생명의 활동을 합니다. 분명한 것은 내 가슴에 생명의 복음이 들어와 있다면 반드시 변화의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분명히 예수 믿는 신자라면 어디 가서든지 영향을 주고 조용히 생명의 변화를 일으키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나로 말미암아 온 가족이 구원받게 하는 생명운동을 일으키는 누룩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할렐루야!
누룩은 가만히 있지 않고, 변화시키는 운동을 합니다. 우리 모두 가정과 직장과 학교에서 변화를 일으키는 누룩 신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② 누룩은 적은 양으로도 큰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겨자씨 비유에서도 강조하는 것이지만, 누룩 비유의 핵심은 적은 양으로도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한 줌의 누룩이 밀가루 서 말을 다 부풀리는 것입니다. 굉장한 영향력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신비로운 영향력입니다. 복음의 힘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작게 시작합니다. 조용히 진행됩니다. 그러나 나타나는 결과는 놀랍습니다. 예수 믿는 몇 사람, 기도하는 몇 사람, 전도하는 몇 사람, 복음을 위해 헌신하는 몇 사람이 한 지역과 한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데 많은 숫자로 시작하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12명의 제자로 출발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금새 "천하를 어지럽히는 사람들"이가 되었습니다(사도행전 17:6). 기독교가 데살로니가에 들어갔을 때,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에도 이르렀다고 소동했습니다. 기독교 복음이 역사 하는 곳에는 막을래야 막을 수 없는 위대한 예수의 생명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누룩은 눈에 띄지 않게 활동하면서도, 눈에 띄게 바꾸어 놓는 활동을 합니다. 특히 여기 사용하고 있는 "부풀게 한다"는 단어는 "뒤엎는다"(upside down)는 뜻입니다. 굉장한 단어입니다. 혁명적인 용어입니다. 나 한 사람만 제대로 예수 믿어도 우리 가문이 upside down 되는 것입니다. 나의 내면 속에서 변화의 운동을 일으키신 성령님은 나를 만나는 자들도 넉넉히 바꾸시는 역사를 일으키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모두가 복음의 혁명가(Evangelical Revolutionary)가 되어야 합니다. 이 말은 어디 가서 요란하고 시끄럽게 소란을 피우자는 뜻이 아닙니다. 한 여인이 한 줌의 누룩으로 밀가루 서 말을 전부 부풀게 하는 것처럼 조용한 혁명을 일으키자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당신도 얼마든지 복음의 혁명가가 될 수 있습니다. 조용하면서도 크게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콘스탄틴의 어머니 헬레나가 조용히 신앙적인 영향을 주다보니, 아들 콘스탄틴 황제가 로마를 기독교 국가로 만들었습니다. 한 여인의 복음적 영향력이 인류 역사의 혁명을 일으킨 것입니다. 저 마케도니아 빌립보 성의 옷감장사 루디아가 바울에게 힘을 주므로 유럽 선교와 로마 선교를 가능케 하였습니다. 또 뵈뵈라는 한 여인의 묵묵하고 조용한 뒷바라지가 사도 바울을 평생 지치지 않고 뛰어 다니는 선교사가 되게 하였습니다.
누룩은 밀가루 속에 살며시 들어가서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생명의 활동을 합니다. 그리고 결국 밀가루 전체를 다 부풀게 합니다. 조용하면서도 힘찬 생명의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특히 이 시대는 좋은 영향을 주는 자가 필요합니다. 영적 영향을 주는 성도가 필요합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이러한 복음의 영향력, 영적 영향력이 있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가정을 변화 시키는 조용한 혁명가, 이웃과 친구들의 삶을 근원적으로 바꿀 수 있는 생명의 누룩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겨자씨와 누룩
마 13:31-33 / 이필재 목사
교회들은 일 년 내내 단기 선교팀이 오고갑니다. 이것은 한국 교회에 주어진 하나의 영적 분위기입니다. 세계 청년들이 하지 않는 일들을 많이 해서 여름철이 되면 비행기가 거의 선교팀으로 가득가득 차는 그런 아름다운 현상이 지금의 한국 실정입니다. 이번샘물교회 아프가니스탄 단기선교팀의 불행한 사건이 앞으로의 선교 열정에 지장을 초래할까봐 많이 걱정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 갈보리교회도 수없이 오고 갑니다. 금년 여름에도 우리 청년들이 인도 등 여러 군데 예정되어 있습니다. 선교지에 가는 것, 이번 일은 특수한 일이지만 똑같은 이유가 아니더라도 위험요소가 있습니다. 저도 선교 다니다가 아찔한 순간을 몇 번이나 경험했습니다. 새벽에 모임을 갖기 위해 나가는데 교회 문밖에 총을 가진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한국 선교팀을 털면 돈이 나온다고 그렇게 인식되어 있기 때문에, 한국인들이 많이 다니면 이런 위험들을 항상 가지게 됩니다. 그런 거 저런 거 다 무서워하면 선교가 이루어지겠습니까? 그래서 이번에 매우 불행한 일이 일어나 대한민국 교회 전체가 기도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이번 일로 인해서 오히려 한국 교회 사명이 새로워지는 어떤 역사가 일어나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바입니다.
마태복음 13장에 나타난 예수님의 일곱 가지 비유의 주제는 하나입니다. 바로 천국입니다. 하늘나라의 특징을 천국 비유로 초점 맞추어 설교하셨는데 오늘 말씀은 겨자씨와 누룩의 원리로 천국을 설명하셨습니다. 7, 8월에 있는 교회의 많은 어린이 신앙 수련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으로 전하고자 합니다. 천국은 두 가지 설명이 가능합니다. 하나는 영생의 장소, 우리 인간 육신 이후에 주워지는 하나님의 나라를 말하고, 또 하나는 현실의 천국입니다. 하늘나라 그림자로서 지금 이 땅 위에 이루어져있는 구원의 현장, 예를 들면 우리 개인에게도 이미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우리 영혼 가운데 이미 천국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또, 가정이라든가 교회라든가 이런 공동체가 하늘나라 그림자로서 이미 천국이 이루어진 현실적 하나님의 나라로 이렇게 두 가지 설명이 가능합니다. 우리들은 지금 이 땅에 살지만 생각과 마음은 항상 하늘나라에 두고 있습니다. 한국이 아닌 외국에서 살고 있는 약 7백만 명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도 오랫동안 경험하고 살았지만 이 사람들의 마음은 한국에 항상 있기 때문에 외국에 살아도 거의 겉으로만 사는 것이지 정말 사는 것은 한국입니다. 남의 나라 호주에 이민을 왔으면 호주 시민으로 살도록 노력해야 되는데 노력을 잘 안 합니다. 신문도 호주신문을 안 보고 한국 신문을 받아보고 한국 방송을 다 들어야 되고, 항상 마음은 한국에 두고 있습니다. 워싱턴에 큰 불이 났다 해도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타거나 말거나….’ 하지만 서울에 불이 났다고 하면 그 멀리 타국에서도 서울에 왜 불이 났느냐고 묻고, 캐나다 대통령이 누가 되던지 아무 상관이 없지만 한국에서 선거철이 되면 외국에서도 한국 대통령이 누가 되어야 한다고 구역 예배 때마다 싸움들 하고…. 몸은 외국에 있지만 실제로는 한국에서 사는 겁니다. 천국의 시민이 그렇다는 겁니다. 몸은 땅에 있지만 마음은 벌써 하늘나라에 가있는 것이 우리 이 땅에 있는 천국 시민의 삶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천국을 초점으로 해서 설교를 일곱 가지나 하셨습니다. “그 나라 소유가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너희가 노력을 하라.” 이런 뜻으로 설교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겨자씨와 누룩의 성격과 천국은 어떤 유사점을 가지고 있기에 예수님이 이렇게 설교를 하셨는가? 이것을 우리가 한번 조명해 보고자 하는 겁니다. 하늘나라는 시작이 작다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겨자씨를 보신 분은 한번 손들어 보세요. 얼마 안 되지 않습니까? 보신 분들은 다 눈이 좋으신 겁니다. 돋보기 써야 보일까 말까 할 먼지 같은 작은 씨입니다. 하늘나라는 그렇게 작은 데서부터 출발한다는 것을 예수님이 말씀하시려고 하는 겁니다. 기독교의 시작을 보세요. 베들레헴! 어느 마구간 농가에서 예수님이 탄생하심으로 시작이 되었는데 당시 베들레헴은 유목민의 머물러가는 하나의 정착지였습니다. 양떼를 몰고 한 바퀴 돌아 베들레헴에 와서 다시 정비하고 병들은 양들을 이렇게 저렇게 처리하고 그러다 다시 데리고 떠나는 집시 생활을 하는 유목민들의 정착지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도 예수님께서 탄생하시던 밤의 베들레헴 현장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지경의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 보잘 곳 없는 빈촌 마을 동네의 마구간 하나라고 하는 존재는 이 우주에서 보이지도 않는 먼지 같은 그런 존재인데 바로 그곳이 구원 진리의 시작이었다는 이것이 하늘나라의 성격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대부분 갈릴리 호수의 어부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예수님과 그들이 처음 만날 때의 장면을 아주 그림과 같이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물을 깁고 있는지라.” 갈릴리 바다라야 커다란 호수에 불과합니다. 거기서 나오는 고기를 잡기 위해서 궁상맞게 앉아 찢어진 그물을 깁고 있는 어느 한 구석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만나 “나를 따라오라. 내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이 보이지도 않는 시작!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 요한 이 사람들을 만나 한쪽 구석에서 한마디씩 주고받은 것이 마침내는 커져서 온 세상을 다 정복하게 되는, 하늘나라의 성격은 이런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한국 기독교 역사를 보세요. 최초의 한국 개신교회를 보면 황해도 선천교회라고 쓰러져가는 싸리처럼 오막살이집, 사람이 들어가기조차 힘든 그곳이 대한민국 최초의 교회였다고 합니다. 메킨타이어 목사와 로스 목사가 중국 심양에 와서 선교 활동을 할 때 조선인으로서 그 사람들에게 조선말을 가르치다가 성령의 감화를 받은 이응천 씨와 조선말 성경 제작을 도와주던 서상민, 이성학, 김진기 이런 사람들이 최초의 세례 받은 사람들입니다. 겨자씨 같이 보이지도 않게 거기서부터 우리나라 기독교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한석진, 서경조, 양전대, 길선주, 방기천, 이기풍, 송인서 일곱 사람이 그 당시에 공부도 제대로 못하고 최초의 대한민국 목사로 겨자씨 같이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날과 같이 작게 시작이 기독교다. 언제나 작은 시작한다. 보이지도 않는다.” 여러분도 경험이 있을 겁니다. 처음으로 교회가 생겨질 때를 생각해보면 어느 교회든지 사랑방부터였습니다. 아니면 상가 하나를 세를 얻어, 잔디밭에 모여서 시작하기도 했습니다. 저도 개척교회를 할 때마다 그렇게 시작했습니다. 겨자씨로 시작하는 겁니다. 기독교는 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의 신앙 역사를 한번 생각해 보세요. ‘내가 어떻게 이렇게 신앙인이 되었는가?’ 우리 중에는 지금 순교자적 신앙을 가지고 ‘주님을 위해서 내가 피 흘리라면 흘리죠.’ 이러는 사람도 많습니다.
저는 한 가지 기억이 있습니다. 제가 제일 처음 교회에 가서 배운 찬송이 “예수 사랑하심은”으로 기억납니다. 그때가 5~6살 때라고 기억납니다. 시골 동네 조그만 오막살이 교회당에 누군가 아이들을 데리고 노래를 할 준비를 시작하는데, 정말 그곳으로 나가 열심히 따라서 불렀던 기억이 납니다. 5~6살 된 어린 아이가 기독교가 무엇인지, 영생이 무엇인지, 진리가 무엇인지,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 알겠습니까? 그러나 그때 벌써 내 영혼에 겨자씨 같은 복음의 씨앗이 떨어진 것입니다. 그것이 점점 자라서 이렇게 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친구가 하도 가자고 졸라대서 가기 싫은걸 한번 온 것이 동기가 되어서 순교자적인 신앙인이 되었고, 어떤 사람은 길가다 짓궂게 달라붙는 전도하는 사람이 건네준 전도지 한 장이 동기가 되어서 예수 잘 믿는 사람이 되고…. 어떤 목사님이 자꾸만 전화를 해서 “내가 교회에서 꼭 한번 간증을 했으면 좋겠다.”하셔서, 사실 제가 간증 집회는 잘 안하는 목회자입니다. 왜냐하면 거짓말들을 많이 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하도 졸라서 “그러면 한번 오세요.”하고 시간을 마련해 줬습니다. 그런데 이 분의 간증은 골자가 이렇습니다. “여러분, 나는 직업이 도둑놈이었습니다.” 이렇게 시작하는 겁니다. 그런데 어느 날 도둑질을 하러 큰 예배당 본당에 무엇이 좀 있을 것 같아서 처음으로 교회당에 도둑질하러 들어갔는데 아무 것도 없는 겁니다. 가보니까 강대상을 들고 갈 수도 없고 피아노를 들고 갈 수도 없고 아무리 돌아봐도 들고 갈 것이 하나도 없는데 그래도 들어왔으니 뭐 한 가지는 가지고 가야 되는데 뭘 가지고 갔느냐 하면 저기 십자가 앞에 있는 큰 성경책이었습니다. ‘저것이라도 내가 들고 가야겠다. 이게 그래도 꽤 가격이 나가겠다.’ 그래서 그 성경책을 들고 나갔답니다. 나갔으니 팔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그 시절에는 청계천 주변에 헌 책방이 많았습니다. 저도 그곳에 책 사러 참 많이 돌아다녔습니다. 그 헌 책방에 도둑놈이 그것을 팔려고 내어 놓으니까 금칠하고 번쩍번쩍 하고 큰데도 안사는 겁니다. “아니, 당신은 누군데 성경을 다 팔러 오셨나요?” 이 성경책은 헌책방에서 살 수 없는 책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책 사러 헌책방에 오는 사람이 없습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누가 성경을 사러 헌책방에 갑니까? 그래서 못 팔고 화가 났는데 그렇다고 버릴 수도 없어서 집 방구석에다 집어 던졌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어떤 물건도 도둑질해서 갖다 놓으면 아무렇지 않았는데 성경책 갖다 놓고는 신경이 써지는 겁니다. 저기 있는 것이 뭐라고 그러는 것 같기도 하고 그것을 보면 이상하게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하고…. 그래서 이 성경책을 쓰레기통에 갖다가 버렸답니다. 그랬더니 더 죽겠는 겁니다. 쓰레기통에서 귀신이 나오는 것 같기도 하고 도저히 못 견디겠어서 쓰레기통에서 다시 건져다가 방에다 놨는데 도저히 신경이 쓰여 견딜 수가 없어서 할 수 없이 제자리에 도로 갖다 놨답니다. 그러고 났는데 더 이상한 일이 생긴 겁니다. 그 교회에 그렇게 가고 싶은 겁니다. 도둑의 심리는 도둑질한 현장을 꼭 가보고 싶은 심리가 있답니다. 그래서 그 교회에 나가 결국 자기가 예수님을 믿고 그 길로 자기가 목사까지 되었는데 그렇게 간증하면서도 그럽니다. “어느 교회인 것은 묻지 말아 주세요.” 그 사람은 성전에 들어와서 그 성경책에 손을 대는 순간 이미 복음의 씨앗이 겨자씨처럼 떨어진 겁니다. 그래서 그것이 견딜 수 없이 자란 겁니다.
그 다음에 주님이 우리에게 부탁하신 일이 있습니다. “작은 일에 충성하라.” 역사하는 것은 하나님께 맡기고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일을 끝내면 되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오래 목회하면서 수없이 많은 교인들을 만났는데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바보 같은 교인은 한명도 없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다 똑똑하고 자기주장이 강하고 자존심이 강하고 저마다 많이 배웠고 남보다 뒤떨어지는 게 하나도 없고 바보 같은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 똑똑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똑똑한 사람들을 무슨 힘으로 설득해서 예수를 믿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사람이 하는 게 아닙니다. 성령님께서 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겨자씨 같은 작은 일을 주님의 말씀대로 그냥 순종하기만 하면 나머지는 하나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바울도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작은 일이 없습니다. 내가 볼 때 아무리 작아도 그 작음을 통해 하나님이 크게 역사하시기 때문에 “작은 일에 충성하라.” 예수님은 이런 진리로 우리들에게 사역을 맡기셨습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그 작은 사람이 어느 한 영혼을 붙들고 눈물겨운 목회를 했을 때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큰 역사를 일으키는 것 아닙니까? 사실 이 세상의 역사도 문명과 문화 이런 것이 작은 것이 동기가 되어 크게 되는 겁니다. 지금 전 세계 사람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문명의 기구가 핸드폰이라는 기사를 봤습니다.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전화를 뭐라고 합니까? 벨이라고 합니다. 왜 벨이라고 합니까? 벨이 발명해서 벨입니다.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Alexander Graham Bell)이라고 하는 사람이 심각한 고민에 빠졌습니다. 아내가 청각 장애인입니다. 듣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자기의 아내와 어떤 통화를 할 수 있을 것인가를 열심히 연구하다가 귀에 갖다 대고 말할 수 있는 그것이 전화가 된 겁니다. 그래서 지금은 겨자씨 같이 보이지도 않는 어떤 한 사람이 자기 아내와의 대화를 위해 연구한 그 겨자씨 같은 작은 일이 온 세상 사람들이 가장 즐겨 사용하는 문명의 도구가 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작다고 하지 마십시오.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면 하나님이 그 뒤에 큰 열매 축복을 하시도록 되어 있습니다. 겨자씨 같다고 무시하지도 마십시오. 그런 하나님의 관계성이 일이 인간에게 낀 나에게 주어진 그것만으로 감격하고 아무리 작아도 보이지 않아도 성의를 다해서 그 일에 내가 동참할 때 하나님의 역사는 그것을 통해서 이 땅에 조명되는 겁니다.
시카고 대학교 한국인 교수 한 분이 미국에 살고 있는 각 종족들의 직업관에 대해 연구 발표했습니다. 무엇을 발표했느냐 하면 “어느 종족이 어떤 직업을 얼마큼 어떻게 하고 있느냐?”였습니다. 일본, 미국, 아프리카, 한국, 중국사람 할 것 없이 종족별로 다 연구를 했는데 참 재미있습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에게 나타난 특징을 보면, 어쨌든 직업을 가장 많이 바꾸는 사람들이 한국 사람들입니다. 오늘 하다가 마음에 안 들면 일주일을 해도 집어치우고 한 달 일하다 집어치우고 또 다른 직장을 찾습니다. 보다 나은 것을 찾아 항상 가는 것이 한국 사람들의 직업관이라 합니다. 이것은 틀림없습니다. 자기가 하는 직업을 가장 바꾸지 않고 오랫동안 하는 민족이 일본과 미국인으로 나타났습니다. 천직 개념으로 그 자리에서 그 일만 평생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정말 많습니다. 제가 애틀랜타에서 세미나를 마치고 LA로 올 때 원로 목사님과 자리가 달라서 카운터에 “우리 둘이 동행인인데 LA까지 가는데 자리를 같이 안게 해주세요. 이야기하면서 가고 싶습니다.” 자리가 다른 곳으로 예약이 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더니 “그러면 해드리겠습니다. 표 주세요.” 하시는 분이 할아버지인데 우물대고 잘 못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할아버지가 이런 데서 일하시는 것도 참 용하시다.’ 그래서 제가 물어봤습니다. “할아버지 여기서 오래 일하셨나요?” “알고 싶나요?” 그때부터 우리 일은 안 해주시고 자기 관심사만 이야기합니다. “이 공항이 생기는 날 내가 처음으로 입사한 사람입니다. 이 자리에서만 30년을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미 은퇴하셔야 되는데도 공항의 보배라고 그렇게 일하시는 겁니다. 평생을 거기서 보낸 겁니다. 이렇게 미국 사람들의 직업관이 나타나는데, 사람이 직업을 필요에 따라서 바꾸어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내 인생에 도움이 될 만하게 하면 괜찮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향한 은사는 오래할수록 좋습니다. 그래서 내가 가르치는 은사를 가지고 있다면 평생 주일학교 선생을 하십시오. 괜찮습니다. 주일학교에서 한 영혼 구하는 게 천하보다도 귀합니다. 내가 성가대 봉사를 한다면 마찬가지입니다. 외국 가서 보세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성가대에 가득하게 앉아있습니다. 평생을 그 자리에서 한 것입니다. 오래 할수록 좋습니다. 안창호 선생이 애국정신으로 한국인들에게 많은 존경을 받고 계십니다. 그가 로스앤젤레스 오렌지 카운트에서 오렌지 밭일을 했습니다. 그가 우리에게 전해준 철학이 무엇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작은 일을 성실하게, 그리고 부지런히!” 한 국가 지도자가 시작한 노동의 땀이, 그의 정신을 오랫동안 기리자고 동상을 세우게 되었고. 저도 미국에서 참여해서 열심히 모금을 했었습니다.
작은 일을 못하는 사람은 큰일도 못합니다. 작은 일에 충성하는 교회에 큰일을 맡기시겠다고 주님은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작은 일은 없습니다. 다 큰일입니다. 왜? 커져가기 때문입니다. 돋보기안경을 써야만 보일만한 작은 일지라도 하나님의 일을 다 크게 생각하고 우리가 충성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알아주지 아니할수록 더 좋습니다. 사람들의 칭찬과 존경을 받지 아니할수록 하나님의 상급은 큽니다. 이것을 패러독스 진리라고 합니다. 그렇게 하십시오. 어린이를 돌보는 일, 본 교회가 주일학교에 많은 투자를 하고 온갖 정열을 기울이는데 우리 어린이들이 금방 자라 한국 교회의 주인이 됩니다. 이번 여름에 2200명 이상의 우리 어린이들이 올 것으로 계산하고 지금 준비를 다 했는데, 관계자들이 열심히 준비하고 있습니다. 유아부 2~3살 어린이부터 여름 성경학교를 열어 우리가 씨앗을 뿌리고 있는 것 아닙니까?
그 다음에 반드시 거둔다는 진리! 이스라엘에 가서 겨자씨 나무를 보니까 한 4미터 정도의 크기에 그리고 이게 이렇게 자라서 둥근 원형을 그립니다. 새들이 그 안에 둥지를 짓기 좋아하기 때문에 자라서 “새들이 깃들이니라.”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기독교는 작은 것은 반드시 커져가는 진리입니다. 쓰러져가는 오막살이 교회 하나가 생기더니 대한민국에 지금 5만개의 교회가 생겼습니다. 지금은 교회들이 얼마나 웅장하고 화려하게 짓는지 사회에서 비판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유럽 교회의 대부분은 교회당에서 예배를 드리지 않고 건축물을 구경하는 관광지가 되었습니다. 갈릴리 바닷가에서,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보이지 않게 시작한 기독교 진리는 이렇게 커져갑니다. 일곱 명의 목사가 처음 안수를 받았는데 지금은 수십만 명이 넘습니다. 제 체험 가운데는 일곱 명이 시작한 교회가 7천명이 넘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개신교 역사를 보면 제물포 항구의 언더우드, 아펜젤러 두 사람이 성경 들고 내리더니 100년이 지나니까 오늘날의 한국 교회가 되었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나라일지라도 선교사 한 사람만 제대로 들어가면 그 나라는 언젠가는 기독교 국가가 되어 버리고 맙니다. 이것이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진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누룩 같습니다. 누룩의 의미는 뭐죠? 변화입니다. 밀가루 서 말이면 얼마나 분량이 됩니까? 그런데 거기 누룩 한 덩어리만 집어넣으면 큰 변화가 일어납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사람도 변화하고, 가정도, 사회도, 국가도 다 변화합니다. 확실한 증거가 2000년 동안에 나타났습니다. 기독교 복음이 들어간 나라는 절대 변화가 왔습니다. 우리나라도 언제부터 변화되었습니까? 복음이 이 땅에 들어오면서부터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8세기 말에서 11세기 300년 동안은 유럽 역사에 바이킹이라는 해적의 세상이었습니다. 이 바이킹들은 한 나라에 국한 된 것이 아니고 유럽 여러 나라에서 이런 문화가 생기는데 지금 유럽에는 바이킹 축제라고 해마다 합니다. 여러분, 다른 나라 사람들이 핀잔을 줄 것 아닙니까? “바이킹은 해적 도둑놈들인데 너희 조상들이라고 그게 뭘 잘했다고 축제를 벌이고 이런 기념식을 하냐?” “모르는 소리 말아라!” 바이킹은 해적 노릇을 했지만 세상에 공헌을 많이 했다는 겁니다. 민족 이동을 통한 문화를 바이킹들이 만들어놨다는 겁니다. “저쪽 사람들이 이쪽으로 내려오고, 이쪽 사람들 저쪽으로 내려가서 세계 교류하는 문화를 바이킹이 만들었고, 배를 타고 탐험하는 문화를 바이킹이 만든 것이다. 그 이후에 세계가 발견되었다. 이런 문화의 공헌이 매우 크다.” 무역 기지를 스웨덴 바이킹들이 건설했다고 하는데 사실입니다. 그 다음에 흑해를 연결한 무역통상로의 개척은 바이킹 아니면 절대 못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세계가 무역으로 한 나라가 된 것입니다. 노르웨이가 덴마크 계통 바이킹들의 기독교와 절대 관계가 있다고 하는데 맞습니다. 보세요. 해적이 되어서 바다에 나가면 한 달, 두 달, 6개월, 1년씩 집에 못 들어오게 되니까 가족들은 어떻게 삽니까? 그래서 해적 부인들이 방탕한 생활을 했습니다. 남편이 돌아오지 않는데 더 엉망진창입니다. 그래서 바이킹들이 화가 나서 자기들도 방탕한 생활을 했다고 했는데 이 바이킹들이 다른 사람들 보다 한 가지 가지고 있는 이점이 있었습니다. 바다에서 오래 생활하게 되니까 조용히 생각하고 사색하는 시간을 많이 가졌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와 우리 후손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래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냈는데 “우리는 이런 일을 할지라도 우리 후손들만은 이런 일을 안 하는 후손을 가져야 될 거 아니냐?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생활 철학을 가지고 있는 여자들을 우리가 도둑질 해다 살자.” 그래서 기독교 여인들이 그 시대에 바이킹의 표적이 된 겁니다. 그래서 사람 도둑질을 했습니다. 강자로 기독교 여인들을 잡아다가 아기를 낳게 했습니다. 여러분, 스페인이 세계를 점령할 때 어떻게 했는지 아십니까? 남자들은 모조리 죽이고 여자들은 모두 강간해서 아기를 낳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중남미 일대 23개국이 한 언어로 쓰고 있지 않습니까? 잡혀온 기독교 여성들은 강제 결혼으로 자녀를 낳을 수밖에 없었는데 남편들은 해적 생활에 집을 비우니까 이 여인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녀들을 위해 사회에서 가장 훌륭한 교육을 우리가 시키자.” 신앙으로 열심히 키웠습니다. 그래서 바이킹의 후손들은 아이들이 아주 엄격한 신앙 훈련을 받으면서 살았고 철저한 기독교인의 삶을 살았습니다. 결국 그들이 자라서 그 유명한 청교도의 조상들이 된 겁니다. 이런 역사의 변화! 나약한 여인들이 해적들의 무자비한 손에 강제 납치되어 해적 소굴에 들어갔지만 그들은 남편들을 변화시켜 청교도로 연결하는 누룩의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복음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어간 곳은 어느 나라나 다 변화됩니다. 우리가 지금 그 역사로 살고 있습니다.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내쫓은 나라는 나쁜 영향의 절대 변화!
여러분, 북한을 보세요. 복음을 내쫓고 어떻게 되었는지 우리가 다 보지 않았습니까? 기독교 복음이 들어가는 곳은 변화가 이루어져서 잘 살게 되고 교인이 향상되고 민주국가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겨자씨와 누룩처럼 하늘나라는 이런 곳이다.” 그래서 우리가 어린이들을 여름 방학에 많이 초대해 뱃속에 있는 아기만 빼고 2~3살짜리부터 다 교육하려 합니다. 하나님 나라 확장은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교육 부분만 놓치지 아니하면 한국교회의 장래는 밝다고 봅니다. 그래서 이렇게 열심히 하는 겁니다. 이번 여름에도 이러한 놀라운 하나님의 변화 역사가 갈보리교회를 통해서 나타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로 이렇게 어린 심령들에게 겨자씨 같은 복음의 역사를 가르칠 수 있는 기회를 또다시 허락해 주셨는데 이 일을 성의 있게 잘 감당함으로 아버지가 기대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이 땅에 훌륭하게 정착되고, 또 하나님의 나라가 훌륭하게 확장되어 나가는 기쁨과 은혜의 역사가 나타나게 해 주시옵소서. 지금 대한민국 교인들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억류되어 있는 청년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의 기도를 들어 주사 건강하고 무사한 귀환이 잘 이루어질 수 있도록 이 일에 우리 주님이 함께 해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천국의 생명력
마 13:31-32 / 김영규 목사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
주님은 천국을 겨자씨와 누룩에 비유하셨습니다. 두 가지 비유는 다 같이 천국의 생명력, 혹은 세상에서 천국이 성장하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두 비유는 약간 다른 점이 있습니다. 겨자씨 비유가 교회의 외형적 성장을 암시한다면, 누룩 비유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내적인 능력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천국은 작게 시작 됩니다
이 비유의 첫 번째 강조점은 천국이 매우 미미하게 시작된다는 점입니다. 겨자씨를 보셨습니까? 제가 처음 예루살렘에 갔을 때, 우리 교우들에게 무슨 기념 될 만한 게 없을까 생각하다가 겨자씨를 얻기로 했습니다. 마침 예루살렘에 주재하시던 동기 목사님의 안내로 겨자나무를 찾아 갔습니다. 해질 녘에 흰놈의 골짜기 근처, 회교도 지구로 내려가서 자동차 전조등을 켜 놓고 겨자씨를 땄습니다. 카메라 필름 통에 얼마쯤 담아 가지고 왔습니다. 잘못 다루면 재채기 한 번에 다 날아가 버릴까봐 조심조심 했습니다. 우리 장로님께서 친히 작업을 하셔서 책갈피를 만들었는데, 전 교인들에게 나눠주고 남았습니다. 아직도 남은 것을 가지고 매년 수험생들에게 나눠주고 있습니다. 천국은 이렇게 작게 시작됩니다. 너무 미미합니다. 감정적인 느낌이 전혀 없을 수도 있습니다. 당장 성격이 변하거나, 생각이 변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무슨 삶의 변화나 징조가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일단 시작된 것이 중요합니다.
천국의 주인이신 예수께서 베들레헴에 처음 오셨을 때에 누가 알았습니까? 왕의 신분을 나타낼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마구간에 비천한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왕이 오셨다고 무슨 행사를 하지도 않았습니다. 경축 사절도 없었습니다. 하늘에서 천사들이 찬양을 부른 것이 전부입니다. 지상에서는 극소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초대를 받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지체 높은 사람들은 아닙니다. 들에서 양 치던 목동들, 동방에서 별을 관측하던 사람들이 전부입니다. 주님께서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병자들을 고쳐주셨을 때에도 사람들은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천국이 시작된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어요. 주님이 빌라도에게 붙잡혀 고문을 당하고 십자가에 죽으실 때에도 그것이 천국을 위한 것인 줄은 아무도 알지 못했습니다. 천국은 이렇게 미미하게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처음 시작한 교회를 보세요.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던 사람들은 120여 명의 적은 무리였습니다. 그들의 지도자인 사도들은 갈릴리의 초라한 어부들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하루에 3천 명, 5천 명이 회개할 때에도 사람들은 그저 유대교의 작은 분파 쯤으로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이 마음에 이루어지는 심령 천국도 마찬가집니다. 처음부터 대단한 믿음으로 시작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언제 믿었는지, 얼마나 믿었는지 모르게 미미한 신앙으로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과연 계신지 안 계신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과연 내게 무슨 상관이 있는지? 성령께서 내 마음에 과연 임하시고, 내 마음을 주장하시는지? 내게는 별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좋습니다. 교회천국, 심령 천국, 지상에서 천국은 이렇게 작게 시작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러면 천국은 왜 작게 시작될까요? 그것이 역사를 진행하시는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인간의 錯視 내지는 착각 때문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눈은 원근에 따라 멀리 있는 것은 작게 보이고, 가까이 있는 것은 크게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밤 하늘의 별들을 보세요. 모든 별들이 점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 별들 중에 지구보다 작은 별은 거의 없습니다. 다만 우리의 눈이 착시를 일으킨 것 뿐입니다. 천국도 그렇습니다. 내세는 멀고 현세는 가깝기 때문에 크게 보이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육신의 눈에 의존하다보니 영적 눈이 어둡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눈은 물질 세계를 보는 눈은 밝으나 영적 세계를 보는 눈은 어둡습니다. 물질 세계는 크게 보이고, 영적 세계는 작게 보입니다. 천국이란 존재가 태양계 가운데 떠도는 지구보다 작을까요? 절대로 그렇지는 않습니다. 다만 육신의 눈에 그렇게 보이는 것 뿐입니다. 육안으로는 하나님이 작게 보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작게 보입니다.
천국은 성장 합니다
이 비유의 두 번째 강조점은 천국의 성장입니다. 천국은 자라납니다. 창세 때에 하나님은 아담에게 이런 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1:28)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셨습니다. 문자적인 의미는 열매 맺고 많아지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에는 인간의 발전과 진보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발전하고 성장합니다.
선민 이스라엘이 어떻게 성장했는지 보세요. 처음 아브라함이 부름을 받았을 때에 그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75세가 되도록 대를 이을 자식이 없어서 친척에게 재산을 물려주려고 했습니다. 이런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자손의 부흥과 성장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얻은 아들이 이삭입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이 100 세에 얻은 아들입니다. 이 아들 하나로 무슨 창대한 자손이 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이삭으로 하여금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많은 사람의 조상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삭은 40세에 결혼하여 無子하게 지내다가, 겨우 60 세에 야곱과 에서를 낳았습니다. 야곱은 12 아들을 낳았고, 애굽으로 이주할 때에 70여 명의 가족이 되었습니다. 이 70여 명이 약 400년 후에 장정만 60 만 명이나 되는 민족으로 성장했습니다. 가문의 부흥이 하나님 손에 있습니다. 민족의 부흥이 하나님 손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어떻게 성장했는지 보세요. 처음 시작될 때에 겨우 120 명이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한 세기가 지날 무렵에는 팔레스틴 땅을 벗어나, 아시아와 유럽에까지 전파되었습니다. 또 한 세기가 지날 때에는 로마 제국이 기독교 국가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는 전 세계 수 십 억의 마음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교회는 사람의 손으로 부흥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성장되는 것입니다.
심령 천국도 그렇습니다. 처음 주님을 영접했을 때는 별 느낌이나 변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內面 세계가 변합니다. 가치관이 변화됩니다. 인격이 변화됩니다. 생활이 변화됩니다. 제가 가장 큰 보람을 느끼는 것은 사람들이 말씀을 듣고 변화되는 모습을 볼 때입니다. 가끔 어떤 사람들은 걱정을 합니다. 내 남편이 너무 변한 것 같아요! 뭐가 잘못 된 것 아닙니까? 전에는 돈만 알던 사람이‘돈이면 다냐? 사랑이 있어야지!’합니다. 전에는 가족에게 관심도 없던 사람이 가족을 사랑하게 됩니다. 전에는 남의 일에 상관 없이 살던 사람이 남을 위해서 봉사하는 사람이 됩니다. 오늘 여러분의 마음이 이렇게 천국의 마음으로 변화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면 천국은 어디까지 발전해 갈까요? 겨자씨 비유를 보세요. 겨자씨가 자라서 큰 나무가 된다고 했습니다. 성지의 겨자나무는 보통 키가 3미터 정도까지 자라는데, 큰 것은 5미터 까지도 자란다고 합니다. 이런 나무가 되면 새들이 둥지를 틀고 살 정도의 나무가 됩니다. 남에게 유익을 주게 됩니다. 우리 속에 시작된 천국도 그리스도의 모습이 될 때까지 자나납니다. 즉, 인격이 완성될 때까지 자랍니다. 남에게 도움을 주고 유익을 주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때까지 성장합니다. 결코 어중간 하게 만들어지다가 마는 천국은 없습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4:13,15) 우리의 목표는 완전한 천국입니다. 약간 이루어지다 마는 천국이 아닙니다. 마음이 약간 편안해지는 정도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한두 가지 생활의 문제가 해결됐다고 천국이 다 이루어진 게 아닙니다. 완전한 변화가 이루어질 때까지 발전합니다. 부분적이 아니라, 총체적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지금 내 속에서 놀라운 변화가 진행되고 있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세상 속에서 기독교의 역할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완전한 승리와 완전한 천국의 실현입니다. 세상 속에 적당히 파묻히는 종교가 아닙니다. 세상을 변화시키고 개조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밀가루 서 말에 누룩을 뿌린 이유는 약간만 변하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밀가루 서 말 전체를 변화시키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목표는 온 세상의 변화입니다. 궁국적으로 이 목표는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가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세상을 변하게 하실 것입니다.
천국은 생명력이 있습니다
세 번째 강조점은 천국의 생명력입니다. 겨자씨나 한 줌의 누룩! 양적으로는 작습니다. 그러나 생명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놀랍게 성장합니다. 세상 물질들을 보세요. 생명이 있는 것은 자라납니다. 생명이 없는 것은 자라지 않습니다. 식물을 보면 생장점이 있습니다. 뿌리나 줄기의 끝 부분에 生長점이 있습니다. 여기서는 생장 호르몬을 만들어 냄으로써 계속 세포분열이 일어나게 만듭니다. 사람도 뼈의 관절 부근에 성장판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인이 될 때까지 계속 자라게 만듭니다.
천국에서 중요한 것은 분량이 아니라 품질입니다. 주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7:13-14) 천국은 다수결이 좌우하지 않습니다. 그 안에 주님이 계신가? 성령이 거하시는가? 생명이 있는가? 그 속에 진리와 정의가 있는가? 거룩함이 있는가? 이런 것들이 중요합니다.
겨자씨나 누룩은 분량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 안에 지니고 있는 생명력입니다. 생명이 있으면 자라고 변합니다. 그러나 생명이 없으면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호주에 가면 에어즈 록이란 큰 바위가 있습니다. 돌 덩어리 하나가 벌판 위에 놓여 있는데, 그 둘레가 무려 이십 리나 되고, 높이는 330미터나 됩니다. 이 바위는 수 백 만 년이 지나도록 별로 변한 게 없습니다. 왜냐하면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겨자씨는 작습니다. 그래도 생명력이 있기 때문에 자라고, 퍼져서 숲을 만들 수 있습니다. 천국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소속되었는지를 따지지 않습니다. 작은 무리라 할지라도 진정한 복음을 갖고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여론을 가장 무서워합니다. 다수가 떠들면 뭐든지 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천국은 그런 일이 없습니다. 오직 참 성도들만이 인정받고 축복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소수라고 낙심하지 마세요. 세상은 온통 불신자로 채워져 있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무서워하지 않아요. 불의와 범죄로 가득합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천국은 절대로 세상 악에게 점령당하지 않습니다. 단단한 땅을 뚫고 새 싹이 나오듯이 천국은 세상을 뚫고 나옵니다. 우리 속에 그런 능력이 있습니다. 죄악을 이기는 능력, 불의와 싸우는 능력이 있습니다.
엘리야는 혼자서 850 명의 거짓 종교인들과 싸워서 이겼습니다. 그들의 배후에는 막강한 아합왕이 있었습니다. 정치적인 세력을 등에 업고 일시적으로 興旺 한다고 참 종교는 아닙니다. 천국은 가짜 신앙을 격멸시킵니다. 오늘날에도 정치 세력을 등에 업고 행세하려는 종교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됩니다. 그 어떤 세력도 하나님의 나라를 이길 수 없습니다. 페르시아 왕을 등에 업고 행세하던 하만은 모르드개와 에스더에게 패배했습니다. 페르시아에서 다니엘이나, 애굽에서의 요셉은 극소수의 하나님 자녀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이 속한 나라에서 참 신앙으로 대적들을 제압했습니다. 열 두 제자들이 유대와 사마리아를 변화시켰습니다. 바울 한 사람이 소아시아와 유럽을 복음화시켰습니다. 세상은 물량적인 것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생명력이 없기 때문에 오래 가지 못합니다. 천국은 다릅니다.
다수에 흔들리지 마세요. 내가 주님을 모시고 있는 한 나는 세상에서 절대로 패배자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흉용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지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셀라)(시46:1-3)
결론입니다
천국은 겨자씨나 누룩처럼 작고 미미하게 시작됩니다. 천국이 시작된 것을 다른 사람들이 눈치 채지 못하는 것은 물론 내 자신도 별로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나 천국은 놀랍게 성장합니다. 교회가 자라고, 심령 속의 천국이 자라납니다. 영혼이 변하고 인격이 변합니다. 이 세상 끝 날까지 천국은 자랄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장애물도 천국의 성장을 막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분량에 이를 때까지, 주님의 통치가 완성될 때까지 천국은 자라납니다. 교회 천국이 자라납니다. 심령 천국이 자라납니다.
천국은 생명력이 있습니다. 능력이 있습니다. 모든 불의를 이깁니다. 죄를 이깁니다. 세상 권세들을 이깁니다. 마귀를 이깁니다. 귀신들을 이깁니다. 천국은 지금도 우리 속에서 힘차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천국의 시작과 나중
마 13:31-35 / 이정선 목사
제가 집에서 무를 심은 적이 있습니다. 무씨를 얻어다가 텃밭에 뿌렸는데, 물론 통통한 뿌리를 기대했지요. 그런데 종자가 문제인지 땅이 문제인지 아니면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해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무 뿌리는 생기지 않고 위로만 길게 자라서 아무 짝에도 쓸모없게 되었습니다. 그대로 내버려 두었더니 씨가 떨어져가지고 온 텃밭과 주변이 무 밭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귀찮기도 하고 꽃이 하얗게 피어 보기도 좋아서 그냥 놔두었는데, 부동산에서 인스펙션 나와서 집을 잡초밭 만들었다고 지적을 했습니다. 나중에 그것들 다 뽑아내고 청소하느라 고생 좀 했습니다.
저는 겨자를 본 적이 없는데, 인터넷에서 찾아보니까 이렇게 생겼더군요. 유채하고 비슷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제가 잘못 재배한 무하고도 비슷하게 생겼습니다. 그래서 더 찾아봤더니 유채와 겨자는 갓, 무 등과 같이 겨자과에 속하는 식물이라고 합니다. 이런 종류의 채소는 꽃잎이 네 개인 꽃이 피고 약 1m 정도까지 자라는 1년생 또는 2년생 식물입니다. 그리고 꼬투리 속에 1-2mm 정도의 씨앗들을 맺습니다. 그러니까 겨자가 어떻게 생겼는지 쉽게 이해하려면, 제가 무 농사 지으려다가 실패해서 잡초밭 만들었던 그 무를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천국에 대해 말씀하시던 예수님은 천국이 마치 겨자씨 한 알 같다고 하셨습니다. 무 씨앗이 아주 작지 않습니까? 겨자씨도 지름이 1-2mm라고 하니까 무씨와 비슷하겠습니다. 그런 씨앗이 한 바가지나 있다면 존재감을 느낄 수 있겠지만, 한 알이 있다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복숭아 씨가 하나 있으면 누구나 알아볼 수 있지만, 겨자씨 한 알의 존재를 눈치 채거나 신경 쓰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천국은 마치 밭에 심긴 겨자씨 한 알 같다고 했습니다. 밭에 겨자씨 한 알 떨어진 것은 아무런 표시도 나지 않습니다. 밭에서 그 씨앗을 다시 찾으려고 한다면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천국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공식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천국을 가져오시는 분이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을 통해서 천국이 이 땅에 임했습니다. 또 예수님의 몸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역사적 사건을 통해서 천국은 우리 인간의 삶에서 구체적인 현실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천국이 그렇게 시작되는 것은 매우 뜻밖의 일이었습니다. 메시야가 그렇게 조용히 오시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기대하던 메시야는 다윗의 왕국을 회복할 정치적 메시야였습니다. 그러자면 세계제국 로마와 싸워 그 군대를 몰아내야 할 것입니다. 대대적인 민중봉기나 강력한 군사력의 지원이 필연적으로 동반되어야 할 것입니다. 천지를 울리고 온 세상이 떠들썩하게 되는 사건 속에 메시야가 오실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저 갈릴리 시골 나사렛에서 목수 일을 하던 젊은이의 모습으로 메시야가 오셨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고,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습니다. 마치 겨자씨 한 알이 밭에 떨어진 것처럼, 아무런 표시도 나지 않았고 아무런 특별한 사건도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정확하게 예언한 선지자는 이사야입니다. 그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사 53:2).
나사렛의 목수 청년에게는 아무런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었습니다. 큰 권력을 승계할 왕자도 아니었고,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내려온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천국을 선포하고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처럼 천국은 연약한 모습으로 조용히 시작되었습니다. 아주 작은 겨자씨 한 알이 땅에 떨어지면서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고, 땅을 울리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겨자씨가 싹이 나고 자라더니 모든 채소보다 커서 나무가 되었습니다. 보통 겨자는 무처럼 1m 정도밖에 자라지 않아서 나무라고 할 만하지 못하지만, 팔레스타인에서는 3m 이상 자라는 겨자의 종류도 있다고 합니다. 그런 나무에는 새가 날아와 둥지를 틀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작은 씨가 어떻게 그토록 큰 나무가 되었는지 신기하고 놀라울 뿐입니다. 그런데 천국이 바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작은 겨자씨 속에 큰 나무로 자랄 수 있도록 하는 DNA가 들어 있는 것처럼, 예수께서 가져오신 천국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들어 있습니다. 이처럼 천국은 위대한 것입니다. 비록 작고 보잘것없이 시작되었을지라도, 천국은 심히 창대해져서 모든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고 무릎 꿇게 합니다. 아무리 큰 힘과 권세라도 굴복하고 복종하게 합니다. 우리는 지금 교회의 권력이 세속 권력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 중세시대에는 그렇게 잘못 이해해서 교회 권력과 세속 권력 간에 충돌이 많이 있었습니다. 모든 무릎이 꿇게 되는 것은 지상에 있는 조직으로서의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이 왕 되시고 다스리시는 천국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 세계보다 크신 분이고, 천국은 세상 나라 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커진 겨자나무는 공중의 새들이 와서 가지에 깃들이게 되었습니다. 새들은 하늘을 날아다니지만, 그래도 반드시 날개를 접고 내려와 쉬어야 할 집이 필요합니다. 겨자나무는 하늘을 날아다니느라 피곤한 새들에게 안식처를 제공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천국이 지치고 상한 영혼들에게 영원한 안식처를 제공한다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기껏해야 걷고 뛸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하늘을 난다는 것은 엄청난 능력으로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능력을 가진 새들도 결국에는 지치고 힘에 겨워 겨자나무 가지에 찾아와 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에서 뛰어나고 능력 있다는 사람들도 예수께서 가져다주시는 천국에서 궁극적인 안식과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또 천국은 밀가루 서 말을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빵을 만들 때 밀가루 한 바가지에 베이킹파우더 한 바가지를 넣지 않습니다. 밀가루의 양에 비하면 베이킹파우더의 양은 매우 적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적은 양의 베이킹파우더가 서 말이나 되는 밀가루를 전부 부풀게 만듭니다.
누룩은 아주 작은 것이지만 큰 것을 움직이고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전파하시고 시작하신 천국 운동은 아주 작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복음이 들어가는 곳마다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사람들이 죄를 회개하고 새사람으로 변합니다. 악한 풍습이 근절되고 새로운 문화가 태어납니다. 복음의 능력은 죄로 오염된 인간을 변화시키고 씻어서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갈릴리 작은 동네에서 시작된 그 천국은 온 세상을 부풀게 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 인구의 숫자나 그 규모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천국은 하나님의 창조세계 전체에 미치는 우주적인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 천국을 살고 있으며, 또한 그 천국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과 존재는 천국을 반영하는 것이고, 또 천국의 모양과 실체를 체험적으로 살아내야 합니다.
우리 각 그리스도인이 천국을 소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우리 자신이 매우 미약하고 무기력하게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거대하고 강력한 악의 세력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해야 하는 우리의 사명을 생각하면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은데, 내가 너무나 작고 무능합니다. 우리 교회도 언젠가는 예배당도 마련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더 큰 많은 일들을 해야 할 것인데, 우리에게 있는 능력과 자원은 턱도 없이 모자랍니다. 그래서 마치 넓은 밭에 혼자 떨어진 작은 겨자씨처럼, 아무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작은 겨자씨에는 커다란 나무로 자랄 수 있는 능력이 들어 있는 것처럼, 우리에게는 위대하고 놀라운 일들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나고 똑똑해서가 아니라, 우리 속에 천국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 천국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할 때, 천국이 우리를 통해 크고 놀랍게 역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각자 겨자씨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담대하게 그 믿음을 실천하며 사는 것이 요청됩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 1:6). 비전을 가지고 내일을 꿈꾸어야 합니다. 근대 선교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윌리엄 케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고,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시도하라(Expect great things from God. Attempt great things for God.)”고 말했습니다.
또 천국을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은 누룩과 같아야 합니다. 밀가루에 누룩을 넣었는데, 며칠이 지나도 아무런 변화가 없으면 곤란하겠지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속하여 살고 있는 곳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요란하지 않고 억지로 하지 않아도, 조용히 자기가 있는 곳을 변화시켜나가는 것이 천국을 반영하고 실천하며 사는 모습입니다.
우리가 천국의 능력으로 세상을 변화시켜야 하는데, 그 반대로 세상이 우리를 변화시키도록 내맡기고 사는 일은 없어야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롬 12:2). 세상 풍습 따라서 세상이 하는 것을 좋다고 따라가지 마세요. 끌려가지 마세요. 오히려 세상이 가는 방향의 반대방향으로 가면서 조금씩 그 흐름을 바꾸는 것이 천국을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사명입니다. 내가 누룩과 같은 천국의 믿음을 가지고 있을 때, 내 가족이 변화되고, 내 친구들이 변화되고, 우리 사회 전체가 변화되는 위대한 일을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각 개인의 삶과 우리 교회 위에 역사하셔서, 우리 가운데 시작된 작은 천국운동이 큰 능력을 행할 만큼 성장하고, 여러분 모두의 삶이 우리 주변과 사회를 변화시킬 만큼 성숙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겨자씨 한 알
마 13:31-35 / 조재호 목사
예전에 [런던 타임스]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을 조사한 적이 있습니다. 그 조사에서 1위는 [모래성을 막 완성한 어린아이]였고 2위는 [아기의 목욕을 다 시키고 난 어머니], 그리고 3위는 [세밀한 공예품을 만족스럽게 완성하고 휘파람을 부는 목공]이 차지했습니다. 마지막으로 4위는 [어려운 수술을 성공하고 막 한 생명을 구한 의사]로 조사되었습니다. 이처럼 행복의 조건은 멀리 있지 않고 가까이에 있습니다.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일은 우리 가까이 있고,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을 향하여 40년 동안 광야 길을 걸어온 모세가 가나안 땅이 보이는 언덕에 서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너의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신 33:29)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 하늘 백성이 된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험난한 광야 길에서도 하나님이 방패가 되어주시고 영광의 칼이 되어주신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장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마음에 천국을 소유한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마음에 하나님을 모시고 예수님을 소유한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1. 예수님은 행복한 사람, 행복한 인생을 만드시기 위해서 세 번째 천국 비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31)
유대인들은 작고 보잘 것 없어 보이고, 시시해 보이는 것을 말할 때 고 표현하곤 했습니다. 여러 종류의 씨앗들이 있습니다. 복숭아 씨앗, 사과 씨앗, 포도 씨앗, 볍씨... 큰 씨앗도 있고 작은 씨앗도 있습니다. 그러나 겨자 씨앗은 작은 씨앗 중에서도 작은 씨앗입니다. 저울에 달수도 없고 자로 잴 수도 없는 미세한 씨앗이고, 작은 깨보다도 훨씬 작은 씨앗이 바로 겨자씨입니다.
천국은 겨자씨와 같이 작은 것에서 시작합니다.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작은 것이라고 반드시 보잘것 없고 시시한 것이 아닙니다. 작은 것이 중요한 시대입니다. 앞으로 점점 각광받는 최고 과학기술 중의 하나는 나노기술입니다. 나노기술은 나노미터에서 온 말입니다. 센티미터는 100분의 1미터, 미리미터는 1000분의 1미터를 가리키고 나노미터는 10억 분의 1미터를 가리킵니다. 쉽게 말하면 머리카락 굵기의 1000분의 1 크기가 1나노미터입니다. 앞으로는 원자나 분자 단위의 극미세 물질로 로봇과 같은 장치를 만들어서 혈관 속을 자유자재로 타고 다니면서 병원균도 잡고 수술도 하는 로봇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작은 것이라고 우습게 보면 안됩니다. 작은 고추가 맵습니다. 예수님은 작은 것을 소중하게 여기십니다. 예수님은 작아서 보잘것없어 보여도 소중하게 여기십니다.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마 25:40)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마 10:42)
주님은 한 사람 한 사람을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거지로 살았던 나사로, 간음한 한 여인, 문둥병 걸린 한 사람, 어린 아이 하나. 실패하고 좌절한 한 인생 이 모두를 주님은 귀하게 여기십니다. 예수님은 여러분 한 사람의 죄 사함과 구원을 위해 오셨습니다. 여러분 한 사람의 인생 회복과 삶의 행복을 위해 오셨습니다. 남의 눈에는 보잘것없어 보일지라도, 작아 보일지라도 그 한 사람이 주님에게는 크고 중요합니다. 여러분들이 수 십억 중의 한 사람으로 작아 보일지라도 주님에게는 소중한 존재가 됨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 천국은 작은 겨자씨 한 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오늘의 겨자씨 한 알은 오다가다 우연히 떨어진 씨앗이 아니라 주인이 갖다 심은 씨앗입니다. 주인이 갖다 심었다는 것은 주인의 목적과 계획과 의도가 들어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려 공민왕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 당시 고려는 솜이 없어서 겨울이면 옷도 춥고 이불도 얇아서 춥게 떨며 살았습니다. 당시 중국 원나라는 목화 씨로 옷과 이불 등을 해 입고 살았는데 외국에 목화씨가 밀반출되지 않도록 국경의 검문검색을 심하게 했습니다. 문익점 선생이 목화씨를 몰래 가지고 들어오려고 결심하고 처음에는 갓 속에 숨겨오다가 발각이 됐습니다. 그 다음에는 짚신에 숨겨서 들여오다가 발각돼서 옥살이를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선생의 친구가 붓을 선물해 주었습니다. 그 후 선생은 붓 뚜껑 속에 목화 씨앗 3개를 숨겨서 검문 검색을 통과해서 고향인 경남 산청으로 내려가 장인과 함께 씨앗을 정성껏 심었습니다. 3개 중 하나는 죽은 씨앗이라 싹이 나질 않았고, 1개는 얼마 후 죽었습니다. 나머지 1개가 열매를 맺고 종자를 퍼뜨리기 시작해서 10년도 못되어 나라 안에 목화꽃이 만발하게 되었고 겨울이면 헐벗고 추위에 떨던 백성들이 따뜻하게 보낼 수 있었습니다. 목화 씨가 우연히 중국에서 불어오는 황사 바람에 날려와 경상도에 떨어진 것이 아니라. 추운 겨울에 백성들이 따뜻하게 살도록 해야겠다는 목적이 있어서 갖다 심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의 씨앗이 자라 큰 숲을 이루듯이 천국을 이룰 목적을 가지고 씨앗을 심으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인생 밭에 예수 그리스도 생명의 복음 씨앗을 심으십니다. 비록 사람의 눈에는 작아서 보잘것없이 보일지 모르지만 나중에 숲을 이루겠다는 목적을 가지고 심으십니다. 황무지가 될 수도 있고 푸른 풀밭이 될 수도 있는 여러분의 심령과 가정, 거친 광야와 같이 될 수도 있고 아름다운 꽃밭과 같이 될 수도 있는 여러분의 인생, 하나님은 여러분 인생의 주인으로써 여러분 심령과 가정에 천국을 이루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가정과 여러분 자신이 천국을 경험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아주 좋은 마음의 밭을 만드십시오. 예배 중에 주시는 말씀의 씨앗, 축복의 씨앗을 다 품으십시오.
3. 천국은 작은 씨앗으로부터 시작해서 새들이 찾아와 깃드는 큰 수풀을 이루는 것입니다.
"(겨자씨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져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32)
겨자씨는 싹이 나고 커지기 시작하면 보통 1미터 이상 되고 더 큰 것은 3-5미터가 되기도 합니다. 봄에 꽃이 피고 잎이 무성해지며 새들이 날아 들어와 둥지를 틉니다. 나무 가지마다 열매를 맺어 기름도 얻게 되고 음식 향료로도 쓰입니다. 어떻게 손에도 잘 잡히지도 않는 작은 씨앗에서 3-4미터 짜리 큰 나무 수풀을 이룰 수 있습니까? 씨앗이 죽은 씨앗이 아니라 생명이 들어있는 산 씨앗이기 때문입니다. 문익점의 3개 씨앗 중 한 개는 땅 속에서 죽어 버렸습니다. 이미 생명이 없는 죽은 씨앗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생명력이 있는 씨앗은 비록 한 개이지만 전국에 목화 꽃을 피울 수 있게 됩니다.
크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숫자가 많으냐 적으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생명이 들어 있는 작은 씨앗이 덩치는 크지만 죽어버린 고목보다 위대합니다.
겨자씨 안에 생명력이 있고 목화 씨 안에 생명력이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 생명력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심령과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울창하게 자라 꽃을 피우고 숲을 이루게 됩니다. 새들이 몰려들어 그 가지에 깃들이게 됩니다. 깃들인다는 것은 둥지를 짓고 노래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천국을 이룬다는 것은 그와 같은 것입니다. 천국은 자라나고 번성하고 창대하고 풍성한 것입니다. 노래가 있고 감사가 있고 안식(쉼)이 있고 평안이 있는 것입니다.
신앙은 앉은뱅이가 아니라 자라나야 합니다. 좋은 마음 밭에 주님께서 오셔서 좋은 열매를 맺게 해 주십니다. 예수로 천국을 이루며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이 시대의 누룩
마 13:33 / 홍문수 목사
여러분, 이런 이야기 들어보셨죠. 개구리를 뜨거운 물에다 집어넣으면 “앗, 뜨거워!” 하면서 금세 뛰쳐나옵니다. 그런데 미지근한 물에 넣고 서서히 가열하면 뜨거워지는 줄도 모르고 있다가 죽게 됩니다. 이런 현상을 가리켜 ‘불감증’이라 지칭합니다. 우리도 이런 우를 범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점점 악해져 감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느낌없이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물론 사소한 것에도 과민반응을 보이는 것도 병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위기를 위기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더 큰 병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요즘 우리 사회를 보면 정말 불안합니다. 사람마다 보는 시각이 다르고 느끼는 감이 다르지만 비정상인 것만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기의식을 느끼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혹시 개구리처럼 불감증에 걸린 것은 아닌지 ... ? 지난 번 미국에 방문했을 때 가는 곳마다 교포들로부터 단골 메뉴처럼 받았던 질문이 있습니다. “어때요? 지금 한국 괜찮아요?” 단순한 질문이 아니죠? 몹시 걱정된다는 뜻입니다. 저는 그때마다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괜찮습니다. 다 잘 될 겁니다.” 대답을 해놓고 돌아서서 가만히 생각해봤습니다. 과연 그 그렇게 대답한 이유가 무엇인가 ... ? 그분들이 지나친 기우를 하고 있다는 건지, 아니면 내가 한국에 살고 있다는 자존심 때문인지, 혹은 막연한 내 희망 사항인지, 아니면 나 자신이 개구리 같은 불감증에 걸려서 그런지, ... 어쨌든 분명한 것은 누가 봐도 우리 사회가 지금 걱정스러운 상황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걱정스러운 게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새 정부 들어선 지 수 개월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정국이 불안합니다. 경제는 IMF 직후보다 더 어렵다는 말조차 들려옵니다. 그런 가운데 줄줄이 파업입니다. 북한 핵 문제는 아직 오리무중입니다. 설상가상으로 사람들의 심성이 점점 거칠어져 갑니다. 어른도 아이들도 ... 여러분, 지난 주간에 있었던 사건 아시죠? 지하철 플랫폼에 서서 기다리던 여인을 어떤 남자가 아무 이유도 없이 떼밀어서 즉사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또 초등학생이 게임 중독 때문에 어머니가 야단친다고 자기 방에 들어가고서 자살한 사건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사회가 뒤숭숭한데도 별로 심각해하지 않고 나 몰라는 식으로 육신적이고 향락적이 되어 간다면 정말 큰 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 제가 너무 부정적인 것만 들춰냈나요? 물론 긍정적인 면도 많지만 이런 것들을 말씀드리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사명감을 재인식하자는 뜻입니다. 우리가 의식하든 않든 하나님이 보실 때는 우리 그리스도인들과 교회에 책임이 있습니다. 어느 누구보다도 사회 돌아가는 모습을 잘 파고 그 아픔을 치유하는 데 앞장 서야 합니다. 특별히 나라를 생각하는 6월을 보내면서 다시 한번 우리 그리스도인의 사명을 재인식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1] 개인과 국가 사회의 관계 : 공동운명체
사람은 누구라도 혼자 살 수 없습니다. 사회적 존재(Social Being)입니다. 그래서 가정을 이루고 국가와 사회를 이루고 삽니다. 더 크게는 세계 인류를 이루고 살아갑니다. 이런 사실을 간과해서 그렇지 다같이 공동운명체입니다. 가정만 그런 게 아닙니다. 국가 사회가 건전하게 발전하지 않으면 각 개인도 망하고 맙니다. 심지어는 인류도 공존공영하지 않으면 공멸합니다. 특히 요즘 같은 시대는 정말 그렇습니다. 문자 그대로 지구촌이잖아요. 한두 나라가 말썽을 부려도 온 세계 인류가 한꺼번에 골머리를 앓게 됩니다. 비근한 예로 핵 문제가 그런 것 아닙니까? 환경 문제나 질병 문제도 그렇죠. 싸스(SARS)가 곧 소멸된다는 발표를 듣습니다만 그동안 온 세계가 얼마나 공포에 떨었습니까?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공동체 의식을 갖고 살아갑니다. 자기 개인만 잘 되려고 하는 사람은 멍청이입니다. 그럴 수는 없는 겁니다. 자기 가정만 잘 되기를 바라는 사람도, 자기 나라만 잘 되기를 바라는 사람도 멍청이입니다.
[2] 이 시대의 문제와 나 자신의 관계 : 공동의 문제
서두에서도 밝혔듯이 오늘 이 시대는 정상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재림이 가까운 시대요 말세입니다. 성경의 예언 그대로 여러 가지 현상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4장에서 보는 대로 곳곳에 난리, 전쟁, 기근, 지진이 있습니다. 이단이 극성을 부리고 기독교 신자가 박해를 당합니다. 불법이 성행하고 사랑이 식어지고 있습니다. 더 실감나는 것은 딤후3:1~4의 예언입니다.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 ” 인간성의 파괴입니다. 금수 같은 인간의 모습이 만연된다는 겁니다. 오늘의 현실 그대로잖아요!
[3] 이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는 길 : 복음의 누룩으로 하나님 나라 확장하기
이런 문제들 앞에서 과연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나는 평범한 사람이니까 책임있는 다른 사람들이 감당하겠지 .... 그런 겁니까? 아닙니다. 역사의 주관자 하나님이 보시기에 이 시대에 대한 책임은 하나님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이 시대의 온갖 골치 아픈 문제들은 인간의 방법으로 해결할 길이 없습니다. 물론 약간의 유익은 있겠죠. 그러나 인간적인 방법들은 한계가 있습니다. 불완전합니다.
혹자는 양심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양심은 부패한 양심입니다. 렘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게다가 그 기준마저 자꾸 낮아집니다. 그러다 보면 양심의 거리낌도 없이 무슨 짓이든 다 저지릅니다.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된다는 말이 바로 그런 것 아닙니까? 맨 처음에는 바늘 하나 훔쳐도 가슴이 두근두근 하지만 양심이 무디어지면 자꾸 기준이 낮아지다 보면 양심에 화인 맞은 금수 같은 인간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인간의 학문이나 지식으로 변화가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지식은 어디까지나 도구에 불과합니다. 그 지식을 사용하는 인간이 악하면 악한 도구로 전락하고 맙니다. 핵 과학을 갖고 전력을 생산할 수도 있지만 살상무기도 만들어냅니다. 그러므로 인간 자신이 선하게 변화되기 전에는 지식은 오히려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대학가의 컨닝 풍토가 위험수위라고 합니다. 어느 대학에서 명예선언서에 학생들이 서명하는 운동이 있었다고 합니다. 신선한 것 같은 데 거꾸로 생가해보면 그만큼 커닝이 만연되었다는 겁니다. 취직이 어려워도 그렇지 ... 학점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자기 양심을 팔아버립니다. 그런 사람들이 나중에 사회에 나가면 그 지식을 가지고 선용할까요? 어림없습니다.
그러면 법과 제도 장치만 잘하면 세상을 바꿀 수 있나요? 법과 제도는 어느 정도는 사회의 질서와 정의를 유지해 줍니다. 다행은 다행이죠. 그러나 근본적인 해결책은 안됩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법망(=법의 그물)은 희한하게도 작은 고기는 다 걸리고 큰 고기는 다 빠져 나갑니다. 어느 분이 이런 말을 하더라구요. 우리 나라에는 헌법보다 높은 상위법이 있다고 말입니다. 그게 ‘떼법’이래요. 불법이라도 머리에 띠를 두르고 큰 소리를 치면 다 된다는 겁니다. 씁쓸한 이야기만 일리가 었습니다. 이런데도 법으로 됩니까? 먼저 인간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정치를 잘하면 된다구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대통령도 국회의원도 다 필요하지만 그들의 힘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들의 힘으로 된다면 벌써 됐겠죠. 날고 긴다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거쳐갔는데요? 그들은 최선을 다하고 우리는 위하여 기도해야 되지만 정치로 다 되는 게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한 마디로 인간이 달라져야 됩니다. 외모나 조건이 아니라 인간의 심령 자체가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새로운 질서가 수립되고 분위기가 쇄신됩니다.
오늘 본문이 그런 사실을 증거합니다. 마13:33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예수님의 비유 말씀입니다.
여기서 ‘천국’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장차 우리가 들어갈 천국이 따로 존재하지만, 그보다는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통치를 가리킵니다. 즉 하나님이 사람들의 마음을 다스리셔서 세상에 천국을 닮은 사랑과 평화, 정의와 축복이 충만해지는 겁니다. 그것이 현재적인 하나님 나라 확장입니다. ‘가루 서말’은 세상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각계 각층의 세상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누룩’은
이스트(효모)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됩니다. 즉 복음 혹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전부 부풀게 된다’는 말은 복음의 영향력을 의미합니다. 누룩이 반죽에 들어가면 겉으로 보이지 않지만, 당장 변화가 나타나지 않지만 점진적으로, 그러나 근본적으로 확실하게 변화를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과거 2천년 기독교 역사가 이를 증명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어린 아이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갈릴리 촌에서 12명 데리고 다니다가 마지막 십자가 죽음, 부활 승천 하셨지만 그 제자들이 온 세상을 변화시켰습니다. 그들이 유능해서가 아니죠. 그들 중 번듯한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들이 전한 복음에 능력이 있었던 겁니다. 복음이 들어가는 나라마다 민족마다 놀라운 변화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17세기 영국에 산업화가 급속도로 이뤄졌습니다. 그와 더불어 도시화가 이루어지고 물질주의와 도덕성의 타락이 만연되었습니다. 그 시대의 문제를 아파하던 젊은이들이 복음을 들고 일어섰습니다. 존 웨슬리 등 옥스포드 대학생들이 Holy Club 기도 모임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캠브리지 세븐이라 불리우는 캠브리지 대학생 7명이 영적 도적적 부흥 운동을 일으킵니다. 그후 그들을 통해 복음이 올마나 놀랍게 영국 사회를 변화시켰는지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영혼이 변화되지 않으면 도덕성이 변화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사람이 안 보면, 안 들키면 무슨 짓이든 다 할 수 있는 겁니다. 영혼을 변화시키고 근본적으로 사람의 인격을 변화시키는 것은 오직 하나님 말씀밖에 없습니다. 히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죄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딤후3:15~17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말씀과 더룹어 역사하시는 성령의 능력이 또한 인간을 변화시킵니다. 겔36: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그러므로 변화의 소망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 안에 있습니다!
[4] 복음의 누룩 퍼뜨리기 : 증인의 삶
그러므로 복음을 힘써 전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그래서 그들이 변화되는 게 곧 내가 잘 되는 겁니다. 우리 자손들이 잘 되는 길입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나 자신과 내 가정에 얼마나 중요한지 롯의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본래 신앙인이었지만 하나님을 등지고 세상 욕심을 따라 소돔성으로 갔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함으로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했을 때 거꾸로 세상의 죄악이 롯과 그 가족들을 변질시켰습니다. 결국 소돔성은 멸망을 당했고 롯 자신은 겨우 몸만 빠져 나옵니다. 그 아내는 세상 욕심에 물들어 살다가 그 미련을 못버려 경고를 무시하고 뒤를 돌아보다 소금 기둥이 되고 맙니다. 소돔의 음란함에 믈들은 두 딸은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우고 자손을 퍼뜨린다는 미명 하에 몹쓸 짓을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내가 복음으로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하면 세상이 나를 변질시키려 듭니다. 내가 자손들을 변화시키지 못하면 세상이 내 자손들을 죄로 물들입니다. 그 결과 생긴 모든 악한 일을 다 당하게 됩니다. 영적인 싸움입니다. 바로 우리에게 복음으로 세상을 변화시킬 사명이 맡겨져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마13:33 보시면 ... “ ... 여자가 ... (누룩을) 갖다 넣어 ... ” 그랬습니다. ‘여자’는 누구를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킵니다. 누룩(=복음)에 능력이 있지만, 그것을 가루 서말(=세상 사람들, 각계각층)에 넣는 것(=전파하는 것)은 여자(=교회와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면 될까요?
① 복음을 사람들에게 전파해야 됩니다. 우리는 부족해도 말씀 자체에 능력이 있으므로 전하기만 하면 됩니다. 딤후4: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복음의 장애물이 많은 시대이지만 그래도 전하라고 말씀합니다. 이 외에 세상을 변화시킬 대안이 없기 때문에! 여러분, 문익점을 기억하시죠. 고려 공민왕 때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목화 씨 몇 개를 붓 뚜껑에 숨겨서 들여온 분입니다. 목숨이 왔다 갔다 했지만 겨울에 추위에 떨다 얼어죽는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 감행한 쾌거였습니다. 그 목화 씨 몇 개가 온 땅을 뒤덮었습니다. 복음의 능력이 이와 같습니다.
② 더불어 우리는 복음에 합당한 삶과 인격을 보이며 살아야 합니다. 말씀을 실천함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 사람들에 나태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거룩한 삶입니다. 신약 헬라어로 거룩하다는 말은 ‘하기오스’인데, 차별성이 있다, 구별된다 등의 뜻을 갖고 있습니다. 세상은 죄로 부패해지고 어두워지지만 그리스도인을 차별성을 가져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더러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5:13~16) 마5:16 말씀을 보면 우리가 세사엥 비출 빛은 ‘착한 행실이라고 했습니다. 즉 우리의 삶과 인격이 복음의 진리 됨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주 됨을 증명해야 된다는 겁니다.
어떤 경우라도 우리의 삶이 복음이 훼방거리가 되면 안됩니다. 한번은 마하트마 간디에게 선교사들이 질문을 했답니다. “인도 기독교에 방해거리가 뭡니까?” 그랬더니 이렇데 대답했답니다. “기독교인들 자신이요!” 분명히 예수는 좋은 분이건만, 성경은 진리이건만 당시 기독교인들을 보면 헷갈린다는 겁니다. 혹시 우리를 보면서, 오늘의 교회들을 보면서 세상 사람들이 헷갈린다고 하지 않을까요? 무서운 말입니다.
우리는 입술을 열어 말하기 전에 삶과 인격으로 세상 들에게 감화를 줌으로써 에수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됩니다. 유명한 선교사 리빙스턴의 이야기입니다. 아프리카 선교 초기에 그에 대한 이상한 소문이 있었습니다. 한변에서는 그를 성자로 알고 있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그를 선교비를 착복한 사기꾼으로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스탠리라는 젊은 기자가 그 루머의 진위를 파헤치려고 도전합니다. 4개월을 밀착 취재합니다. 그후 본국에 돌아와서 크리스천이 되었음을 고백합니다. 주위에서 리빙스턴이 어떻게 전도했나 묻습니다. 그때 그가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그분은 예수님의 이름조차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해와 고난 가운데 감사하며 묵묵히 사명을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분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했습니다. 나는 그분의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믿고 싶습니다.”
여러분! 이 시대의 누룩은 오직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복음 전도는 애국입니다! 선교는 세계 인류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이 민족 가운데, 온 세계 가운데 복음이 편만하게 전파되어 사람들의 심령이 변화되고, 온 세상이 변화되는 비전을 가집시다! 물론 그렇다고 이 세상에 완전한 하나님 나라가 이뤄지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장차 영원한 천국에 따로 들어가겠지만, 적어도 이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나은 모습으로 변화될 겁니다. 이것이 나라와 민족이 살 길이요, 인류가 살 길이요, 나와 내 자손이 살 길이요, 우리가 꿈꾸는 미래입니다. 아무쪼록 이런 확신을 가지고 누룩을 퍼뜨리는 귀한 사명 감당함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누룩의 비유
마 13:33 / 박덕기 목사
최근에 우리 교회는 여러 해 동안 아이를 갖지 못했던 두 가정이 쌍둥이를 출산하는 경사가 있었습니다. 쌍둥이 형제는 대부분 얼굴 모습이 비슷합니다. 그래서 분간하기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한 집에 남자 쌍둥이가 있었습니다. 두 아이는 크기도 같고 생기기도 같을뿐더러, 의복도 같이 해 입고 공부도 같이 하러 다녔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형을 보고 동생으로 알기도 하고, 동생을 형으로 알기도 했습니다. 쌍둥이 형제가 자라서 우리나라 풍속대로 한날에 정혼을 하고 또 한날에 결혼식을 하였습니다. 색시들은 새로 들어왔지만 얼굴도 다르고 입은 의복도 다르기 때문에 즉시 분간이 되는데, 새신랑 둘은 의복이 같기 때문에 색시들이 새신랑을 분간하기 어려워 두 색시에게 큰 고민이었습니다. 하루는 작은 색시가 방 안에서 머리를 빗고 화장을 한 후에 문밖에 나갔습니다. 그 때 마침 큰 새서방이 대문을 열고 뜰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작은 색시가 마주 나가면서 ‘나 곱지요?’라고 했더니, 큰 새서방은 ‘나는 큰 사람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작은 색시는 대단히 부끄러워서 얼굴이 새빨갛게 되어가지고 부엌으로 들어가 뒷문을 열고 나갔습니다. 큰 새서방은 제수가 부끄러워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여 굴뚝 모퉁이를 돌아 뒤 울 안으로 물러갔습니다. 작은 색시가 부끄러워서 부엌 뒷문을 열고 나서는데 굴뚝 모퉁이에서 자기 새서방이 돌아옵니다. 반가운 얼굴로 “여보, 내가 머리를 곱게 빗고 분을 바르고 뜰 안에 나서자마자 시아주버니가 대문으로 들어오시는 것을 나는 꼭 당신으로 알고 ‘나 곱지요?’라고 해서 망신을 당했지 뭐예요?”라고 했더니, 큰 새서방이 ‘이 사람 아직도 큰 사람입니다’라고 하는 것이어서 작은 색시는 얼굴이 새빨개지며 부엌으로 다시 뛰어 들어갔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웬 쌍둥이 이야기입니까?
지난주일에 말씀드린 ‘겨자씨 비유’ 비유와, 오늘의 본문인 ‘누룩 비유’는 제가 이름을 붙이자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쌍둥이 비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쌍둥이의 얼굴 모습은 비슷할지라도 성격은 크게 다를 수가 있듯이, 겨자씨 비유와 누룩 비유는 비슷하면서도 그 성격이 조금 다른 데가 있습니다. 즉 겨자씨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성에 대한 비유라고 했습니다.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천국을 작은 겨자씨에 비유한 것은, 겨자씨와 같이 작은 씨앗이 자란 후에는 공중의 새들이 깃들일 만큼 큰 나무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천국 운동도 비록 작고 미미한 모습으로 시작하지만, 장차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얻게 될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었다고 했습니다. 천국 운동은 무명의 목수인 예수 그리스도 한 분으로부터 시작해서 12제자로, 70문도로, 120문도로, 3000명으로, 5000명으로, 큰 무리로, 끊임없이 성장하고 발전하여서, 오늘날 기독교는 세계 제일의 종교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심으신 천국 복음 운동의 힘이 지닌 위대함이라고 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송정 중앙교회도 앞으로 끊임없이 더욱 성장하여 큰 나무처럼 자라서, 큰 나무에 많은 새들이 깃들이듯이, 우리 교회를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얻고, 안식을 얻고, 축복을 받는 교회가 되도록 열심히 전도하지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해를 거듭할수록 구원받은 백성의 수가 더 크게 많아지는 부흥하는 교회가 되어서, 어려운 이웃과 교회도 더 많이 돕고, 더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고, 우리 총회뿐만 아니라 한국 교계에도 큰 감화와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교회가 되도록 힘써 기도하고 전도하자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사 60:22에 “그 작은 자가 천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고 한 말씀처럼,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바로 겨자씨 한 알 같은 미미한 존재일지라도, 성령의 능력을 받아서 열심히 전도하여 자란 후에는 새들이 깃들일 만큼 큰 나무가 되는 겨자씨와 같은 성도들이 되시기 바라고, 그리하여 작은 자가 천을 이루고,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루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다시 한번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늘은 우리 주님의 ‘누룩 비유’를 상고해 보면서 함께 은혜를 사모하고자 합니다.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누룩은 빵이나 술을 발효시키는 발효제 즉 이스트를 가리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나 중근동 사람들은 우리처럼 쌀을 먹지 않습니다. 밀이나 보리떡을 먹습니다. 그런데 밀과 보리떡은 반드시 발효시켜야 맛도 있고 먹기도 편하다고 합니다. 만일 발효시키지 않고 그냥 구우면 다 부스러지거나 딱딱하게 되고 맛도 없어서 먹기가 힘듭니다. 그러기에 유대인들은 누룩 없는 빵을 먹는 무교절을 제외하고는 반드시 누룩을 넣은 빵을 먹는다고 합니다.
오늘 주님께서 교훈하신 누룩 비유의 핵심은 변화입니다. 곧 겨자씨 비유가 교회의 양적인 발전과 확장성에 대한 교훈이라면, 누룩 비유는 교회의 질적인 발전과 성장에 대한 가르치심인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성장이 질적인 것이어야 하느냐? 아니면 양적인 것이어야 하느냐? 이 같은 질문은 어리석고 무지한 질문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추구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누룩의 비유가 우리에게 주는 더 깊은 뜻은 무엇일까요?
1. 복음은 한 사람의 인격 전체를 변화시킨다는 것입니다.
적은 누룩이 많은 반죽을 부풀리어 변화를 일으킨 것처럼, 복음은 한 사람의 인격 전체를 변화시킵니다. 고후 5:17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 가운데 특별하게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바로 삭개오입니다. 삭개오는 세금을 받는 세리였습니다. 세리는 가난한 백성들의 세금을 받아 로마에 상납하고 그 가운데 더러는 착복하는 일을 했기 때문에 증오의 대상이었고, 더 나아가서는 민족의 반역자로 취급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삭개오가 세리장이요 부자인 것을 볼 때 많은 사람들의 재산을 갈취한 불의한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느 날 삭개오는 예수님이 여리고로 지나간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예수님을 만나러 달려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기 위해 구름 떼처럼 몰려와 예수님을 에워쌌습니다. 삭개오는 키가 작아서 도무지 예수님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얼른 길가에 있는 뽕나무로 올라갔습니다. 당시에 부자요, 세리장이었던 그가 아이처럼 뽕나무에 올라갔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습니다. 마침 예수님이 뽕나무 밑을 지나가다가 뽕나무 위에 있는 삭개오를 보았습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네 집에 유하여야겠다." 삭개오는 너무 기뻐서 속히 내려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영접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 그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난 후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토색한 것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다고 했습니다. 삭개오는 예수 믿고 복 받은 사람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고 복 받았다는 소리를 쉽게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누가 무엇이 좀 잘 되면 '복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을 예수님의 복 받았다는 데 붙이기에는 너무 빈약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려는 최고의 복은 변화입니다. 예수 믿고 변화되었으면 정말로 복 받은 사람이고, 변화되지 않은 사람은 복을 못 받은 사람입니다.
사람이 변화된 증거 가운데 하나는 그가 물질을 어떻게 쓰는가를 보아서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선한 일을 하려는 사람은 변화된 사람이고 복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와서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질문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네가 계명을 알지 못하느냐. 율법에 뭐라고 쓰였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청년은 율법을 다 말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청년을 사랑하사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고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청년이 부자인고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주님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이 청년과 반대였습니다. 기쁘게 주님을 맞이했고 기쁘게 내놓았습니다. 돈을 버는 복도 큰 복이지만 선한 일에 쓰는 복은 더 큰 복입니다. 세계 역사상 최고의 부자였던 록펠러는 세 가지 기적을 낳은 사람으로 불려지고 있습니다. 첫째, 가장 가난했던 사람이 최고의 부자가 되었습니다. 둘째, 이웃을 가장 많이 도와주었습니다. 셋째, 98세까지 장수했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 어머니로부터 세 가지 유언을 받았습니다. 첫째 ‘너는 가장 앞자리에 앉아서 예배를 드려라’ 둘째 ‘십일조는 절대로 손대지 말아라. 그래야 복을 받는다.’ 셋째 ‘너는 언제나 목사님 말씀에 순종해라. 그래야 네 인격이 성숙한다.’ 그는 이 세 가지 유언을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목사님이 심방을 오셨는데 마 6:33 말씀을 하셨습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 록펠러는 이 말씀을 듣고 '그렇다, 나는 십일조만 바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주님을 위해서 더 바쳐야 한다.' 하고는 그때부터 재단을 세우고 많은 사람들에게 물질을 나누어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백만 평이 넘는 12개의 대학을 건립하였고, 일평생 4928곳의 교회당을 지어 하나님께 봉헌했다고 합니다. 이렇듯 복음을 통해서 참으로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반드시 변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수가성의 여인을 보십시오. 그녀는 남편을 다섯 번씩이나 바꿔가며 살았던 부끄러운 과거를 가진 여인이었지만, 그러나 주님을 만난 이후 수치심도 두려움도 다 떨쳐버리고 열심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고전 6:9-11에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처럼 복음을 듣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방탕한 길에서 돌이켜 새사람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미국 시카고에 있는 어느 한 교회에서 세살짜리 여자아이의 장례식이 있었습니다. 먹지 못해 굶어 죽은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이 불쌍한 여자아이의 장례식에 남루한 옷을 입고 충혈 된 눈으로 찾아온 한 알코올 중독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기도하는 틈을 타 죽은 아이의 신발을 벗겼습니다. 그걸 팔아 술을 마신 그 사람은 바로 죽은 아이의 아버지였습니다.
20년 후, 시카고 제일장로교회에서는 수천 명의 성도들 앞에서 한 사람이 외치고 있었습니다. ‘죽은 딸의 장례식에서 신발을 훔쳤던 파렴치범은 바로 저였습니다. 만물의 찌꺼기 같은 나를 다시 살려주시고, 하나님의 일꾼으로 삼아주신 분은 위대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가 바로 시카고의 부흥사 멜 트라더 목사였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 폐품 같고 불량품 같은 인생일지라도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이렇듯 새사람으로 변화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예수 믿은 후로 얼마나 변화가 되었는지요? 아내가 남편을 향해서 ‘당신은 옛날 사람이 아니야, 예수 믿고 어쩌면 그렇게 달라졌는지 몰라’ 그런 말을 하는지요? 남편이 아내를 향해서 ‘당신이 예수 믿고 변화된 것을 보니 너무 감사하오.’ 이런 말을 듣습니까? 부모가 자녀들을 보면서 ‘참 내 아들은 이 세상에 보기 드문 아들이야’ 이런 말을 합니까?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보면서 ‘우리 시어머니는 하늘이 보낸 천사 같아.’ 그런 말을 합니까?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보면서 ‘우리 며느리는 보기도 아까운 며느리야’ 그런 말을 하는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만나셨다면 반드시 변화되시기 바랍니다.
2. 복음은 인간 사회를 변화시킨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한 사람의 인격뿐만 아니라, 다이너마이트와 같은 위력으로 인간 사회를 변화시켜 왔습니다. 복음의 감화력은 한 국민의 변화를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영국인의 원래 조상은 해적인 ‘바이킹’족이었습니다. 그 같은 해적의 후손인 나라가 복음의 감화력으로 말미암아 세계적인 신사의 나라로 변했습니다. 그런가하면 일본사람들을 경제동물이라 부르는데, 영국인과 일본인의 차이는 곧 기독교 복음의 차이인 것입니다.
고대 로마의 비인간적인 검투 시합을 중단케 한 사람들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기독교인들입니다. 흑인 노예 제도를 폐지시킨 원인을 제공한 사람도 영국의 ‘윌리암 윌버포스’라는 기독교인입니다. 기독교는 그 외에도 민주주의의 기틀을 제공했고 여성들의 위상을 높였으며, 아동보호법을 제정토록 했습니다. 일제 시대 때 삼일 독립 운동을 주도한 이들도 기독교인들입니다. 기독교가 세워진 곳에는 이처럼 사회 곳곳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사회 개혁, 종교 개혁 운동을 일으켰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주님께서 바로 누룩 같은 삶을 살다가 가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가는 곳마다 교회가 세워지는 곳마다 선하고 아름다운 변화 운동이 일어나야 정상입니다.
주님은 우리 성도와 교회를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비유하셨습니다. 선한 행실의 모범을 모여 불신자들을 전도하고 그들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만드는 것이 성도와 교회의 중요 의무임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성도와 교회는 이 사회의 빛과 소금으로서 사람들을 진리로 인도하고 죄로 부패하는 일을 막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치면 합당치 않습니다. 밀가루 속의 누룩처럼 이 사회를 바르게 변화시켜야 합니다. 우리 기독교는 사회에 뛰어들어 사회를 변혁시키는 종교입니다. 산 속이나 들판에서 수도만 하는 다른 종교와는 다릅니다. 누룩처럼 곳곳에 그 영향력을 행사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각자가 작은 누룩들이 됩시다. 우리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사회 곳곳에서도 복음의 누룩과 같은 사명을 감당하도록 합시다. 한국은 이미 오래 전에 교인 수가 천만 명을 넘었습니다. 인구의 약 1/4이 기독교인이라는 말입니다. 선교학에서는 인구의 20% 이상이 기독교인인 국가를 ‘기독교 국가’로 인정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가 과연 기독교 국가답습니까? 왜 그리 불법이 성행하고 부정부패가 성행하고 있습니까? 우리 성도들과 교회가 누룩 역할을 올바로 하지 못했다는 증거가 아닙니까? 지금부터라도 나부터, 교회부터 변화하고, 그리고 내가 속한 곳을 변화시키는 복음의 누룩이 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흉악범만 수감하는 어느 교도소에 새로운 교도소장이 부임했습니다. 그 교도소에는 교도관이외에 그 누구도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비심이 많은 교도소장의 아내는 교도소에 운동회와 같은 특별한 일이 있을 때에는 반드시 자기 자녀들을 데리고 재소자들 틈에 끼어서 함께 응원도 하고 친교를 갖기도 했습니다. 그는 앞을 못 보는 맹인 재소자들에게는 점자를 가르쳐 주고, 그리고 듣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수화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알게 모르게 그 교도소에는 점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교도소장 부인이 교통사고로 숨졌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의 장례식을 위해 교도소장은 간수장에게 책임을 맡기고 교도소에 출근을 하지 않았습니다. 장례식 날 교도소 안에 있는 모든 재소자들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교도소 정문에 모여 있었습니다. 간수장이 놀라서 그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와 보니 재소자들의 눈은 모두 붉게 충혈되어 있었습니다. 간수장은 즉시 규정을 어기고 문 앞에 모인 재소자들 모두가 장례식에 참석할 수 있도록 교도소 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재소자들 전원이 장례식에 참석하여 깊이 슬퍼했습니다. 장례식이 끝나고 거기에 참석하였던 재소자들 가운데 단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다시 교도소로 다 돌아왔다고 합니다.
요즘 우리 사회의 화두는 '변화'입니다. 모두 변화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고 아우성입니다. 그러나 변화의 방향과 목적을 명쾌하게 제시해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기독교는 변화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왔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귀하고 아름답게 쓰임받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을 끊임없이 변화시켜야 합니다. 변화를 거절할 때에 주님은 우리에게 고난과 시련을 주심으로써 자신의 뜻을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변화의 맨 첫 번째 대상은 우리 자신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 다음 내 주변에 있는 사람을 전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함으로 그를 통해 온 세상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이 세상을 바꾸는 대안입니다. 이것이 이 사회를 하나님의 나라로 바꾸어 놓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우리는 복음의 능력을 믿습니다. 주님의 능력을 믿습니다. 성령의 역사를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날 변화의 역사를 믿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을 보고 낙심만 하지 하십시오. 불평만 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바로 되면 세상이 바뀝니다. 우리를 통해 주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면 세상은 바뀝니다. 진짜 예수를 만난 변화를 우리가 세상에 보여 줄 수만 있다면 세상은 바뀝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두가 이런 꿈을 가지고 이 봄에도 열심히 전도하여, 복음의 누룩과 같은 사명을 다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누룩의 비유
마 13:33 / 박세갑 목사
본문의 비유는 두 가지로 해석되어 왔습니다. 첫 번째 해석은 문자 그대로 누룩을 천국의 상징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본문대로 읽는 것입니다. 본문 비유에서 나오는 모든 사실 즉 가루, 여인, 누룩, 갖다 넣음, 그리고 그 결과 등이 주께서 천국을 가르치시는데 모두 필요한 것으로 인정하고 본문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 비유의 해석이 처음 것이 옳다면 우리는 누룩이 선을 상징하는 것이고, 누룩의 활동으로 서 말의 가루가 모두 부푼 것같이, 끝내는 만물이 그리스도께 복종하게 되리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견해는 누룩이 선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서 출발합니다. 더구나 성경은 여러 곳에서 누룩을 악의 상징으로 말합니다. 성경의 예를 봅시다.
출12;15, “너희는 이래 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그 첫 날에 누룩을 너희 집에서 제하라. 무릇 첫날부터 일곱째 날까지 유교병을 먹는 자는 이스라엘에서 끊어지리라.”
레2;11, “너희가 여호와께 드리는 모든 소제물에는 누룩을 넣지 말지니. 너희가 누룩이나 꿀을 여호와께 화제로 드려 사르지 못할지니라.”
고전5;6~8 “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악하고 악의에 찬 누룩으로도 말고, 누룩이 없이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으로 하자.”
갈5;9,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신구약을 통하여 언급된 누룩은 선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악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누룩은 현 세대의 천국의 증거에 악영향을 끼치는 원리들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묘사된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모습은 천국의 원리들에 의한 시대의 정복이 아니라 오히려 천국의 증거와 그것을 약하게 만드는 세력들과의 혼합입니다. 실제로 누룩은 언제나 분열과 부패를 일으킵니다.
또 하나 누룩이 선을 상징하지 않는다는 증거는 계시의 점진성이란 면에서 확인하게 됩니다. 처음 씨 뿌리는 비유에서 뿌려진 씨의 사분의 삼은 수확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본문처럼 전체의 큰 수확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두 번째 비유에서도 밭에는 가라지가 덧뿌려지고 주인이 추수 때까지 갈라놓지 않도록 명령합니다. 겨자씨의 비유에서는 성장이 좋은 것이기는 하지만 한계를 넘어서는 과도한 성장이 악을 혼합하게 됨을 나타냈습니다. 결국 앞에 나오는 세 가지 비유는 모두 완전한 승리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룩이 완전한 승리를 비유로 가르친다면 모순이 됩니다.
우리는 어떤 시대나 지역을 막론하고 심지어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도 선이 완전히 악에게 승리하여 지배한 적이 없습니다. 선과 악은 언제나 혼합되어 있는 것이 도처에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문에서 예수께서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말씀하신 것으로 ‘누룩이 천국을 상징한다.’고 주장하는 주장을 무리라고 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앞에 나오는 가라지의 비유에서 “(24)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하신 말씀에서 천국과 사람이 동일한 것으로 설명하고 계시지 않음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뒤에 나오는 비유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45절을 보면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하셨기에 천국이 장사와 같다고 설명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본문의 비유에서 천국을 “누룩”이라는 말로 해석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그 상황은 가루 서 말과 가루에 누룩을 의도적으로 가져다 넣은 여인, 가루 전체를 부풀게 한 누룩의 활동이 묘사하는 상황을 주목해야 합니다. 저는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여인과 누룩보다 가루 서 말과 누룩이 넣어진 결과 그것이 모두 부푼 때까지 발생한 일이 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가루 서 말은 성경에서 (창18;6)에 처음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급히 장막으로 가서 사라에게 이르되 속히 고운 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가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 하고” 이 부분은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대접하는 기사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자신의 모습을 천사의 모습으로 나타내셨습니다. 아브라함이 그 방문자가 누구인지 알았는지는 모르지만, 아브라함은 그 초자연적인 존재들을 서둘러 대접합니다. 사라는 그들을 대접하기 위하여 가루 서 말(세 스아)을 가져다가 준비합니다. 성경을 계속하여 읽어 가면 이 모습은 다시 소제와 연결됩니다. 소제의 양은 언제나 가루 서 말입니다. 소제는 번제를 따라 드립니다. 번제는 생명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반면에 소제는 경작이나 생산의 결과를 하나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제는 사람이 그 노동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소제물의 일부는 제사장의 몫으로 제사장이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소제는 예배를 기초로 하여 예배하는 자와 하나님 사이의 완전한 친교의 상징인 것입니다.
다섯 가지 제사 중 소제에는 누룩이 조금도 섞여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과의 교제에 부정한 것이나 부패한 것이 틈타서는 안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누룩이 있다는 것은 예배의 친교 속에 부패한 것이 들어온 것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공부하고 있는 비유에서 가루에 누룩을 섞고 있는 여자는 하나님과의 친교인 예배를 부패시키고 하나님을 대항하는 권위와 지배력을 가진 세력의 대표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누룩에 손을 대는 것에 대하여 그것 자체를 부정한 일로 가르칩니다. 오늘날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빵을 만들며 누룩을 사용합니다. 그것이 누룩을 사용하는 것을 합리화하는 반론이 될지 모릅니다. 그러나 누룩을 사용하는 것이 식량을 섭취하는 최상의 방법은 아닙니다. 우리는 인체에 알코올이 심각한 위험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곡식으로부터 알코올을 만드는 누룩이 유해하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습니다. 누룩이 현대에 많은 부문에서 사용 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누룩이 부패하고 파괴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바꾸지 못합니다.
누룩은 그 자체가 부패한 것이므로 언제나 부패의 요인이 됩니다. 사라가 천사들을 위하여 음식을 준비할 때 그것에 누룩을 섞지 않았습니다. 소제에서 누룩은 명백하게 금지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누룩을 언제나 악한 것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고전5;6~8)을 봅시다. “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악하고 악의에 찬 누룩으로도 말고 누룩이 없이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으로 하자.” 우리는 오늘 본문의 비유 속에서 붕괴와 부패의 상징인 누룩을 봉사와 교제의 상징인 가루 속에 넣고 있는 한 여인을 봅니다. 이것이 우리가 공부하는 본문의 비유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본 비유를 해석할 때 그 의미는 무엇입니까? 첫째로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무런 부패함이 없이 하나님과 나누는 교제에 근거한다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교회와 성도 개인은 하나님의 나라의 유익을 증거 하기 위하여, 누룩으로 상징되는 세상의 모든 악으로부터 스스로 완전하게 구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무레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천사들을 대접한 아브라함은 계속해서 소돔을 위하여 간구합니다. 그가 그렇게 하나님을 대면하여 호소하고 주장하는 권리의 근거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데려다 놓은 그 고장에서 그곳의 모든 부패와 불의함의 영향으로부터 구별된 삶을 살았다는 증거입니다. 사라가 준비한 누룩 없는 그 떡은 바로 그것을 증거 하는 것 이였습니다. 반면에 우리는 심판의 자리인 소돔에 살았던 롯을 봅니다. 그는 그 자신이 의인 이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도시의 선을 증식시키는데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그는 개인적으로는 선한 사람이기에 하나님의 천사들을 영접하지만, 소돔의 영향력이 자신과 자신의 가정에 들어오도록 허락함으로 자기의 증거를 망치고 그 증거의 영향력을 잃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아내와 사위들조차 그의 말을 무시한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살고 있는 주변의 영향력을 이기고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삶을 살았던 아브라함은 능히 소돔을 위하여 기도하고 구원할 능력을 보유했던 것입니다.
본 비유의 가르침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효과적인 증거는 구별된 삶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오늘날 한국의 교회들이 이렇게 많고 신자는 넘치는데 점점 영향력을 잃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문제에서 비롯되고 있습니다. 교회가 교회의 일들을 경영함에 있어서 세상의 동기와 방법이 침입함으로 약해지는 정도만큼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교회의 증거의 영향력도 약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16;6)에서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을 주의하라.”하셨습니다. 마가는 같은 말씀을 (막8;15)에서 “예수께서 경고하여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조심하라.” 했습니다. 바리새인의 누룩은 외식이고, 사두개인의 누룩은 합리주의이며, 헤롯의 누룩은 물질주의 혹은 세속주의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외식도 누룩이고, 유물주의적인 생각도 누룩이요, 교회 안에 악을 용납하는 것도 누룩이고, 형식주의도 누룩이라고 가르칩니다. 이것들은 모두 교회의 생명을 붕괴시키는 일을 하며, 증거를 약화시키며, 소란스러움과 혼란과 분열을 가져옵니다. 그런 악들의 영향 하에 있는 교회에서는 언제나 부패가 전체로 퍼져 나가며, 그 부패는 타락한 생활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연약한 증거로 나타납니다.
주님께서는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셨습니다. 신학의 대답은 “그렇다”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대답은 “볼 수 없다”였습니다. 이렇게 바라 볼 때, 우리의 행할 바는 분명합니다. 세상과 구별된 깨끗한 삶과 섬김을 통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분명하게 하는 것입니다. 부주의한 낭비와, 과시적인 겉치레에 빠지는 헛된 발전, 예배를 부패한 것으로 타락시키는 부정한 누룩의 침입을 막아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회복이고 신앙의 확인과 성장을 주는 원동력입니다.
누룩의 비유
마 13:33 / 박상훈 목사
오늘은 우리가 마태복음 13장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여러 비유 가운데 네번째 해당되는 누룩의 비유를 함께 살펴 보면서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는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누룩의 비유는 대단히 짧습니다. 단 한 절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오늘 말씀을 짧게 전해야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누룩이 가루 서말 속에 들어가서 전부를 부풀게 한 것처럼, 오늘 말씀이 우리 마음 속에 누룩처럼 깊이 스며드는 가운데 은혜로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충분하게 부풀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시골에 어떤 농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밭에 수박을 잔뜩 심었습니다. 땀흘리면서 열심히 정성을 다해서 잘 가꾸었습니다. 그 덕분에 풍성한 결실을 맺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고민이 한 가지 생겼습니다. 아무리 수박밭을 잘 지키려고 해도 언제 도적이 들어오는지 아침이 되면 꼭 몇 통씩 밤사이에 없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너무나 속이 상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도적을 물리칠 수 있을까?"
이 궁리 저 궁리를 하다가 멋진 묘안이 하나 떠올랐습니다. 주사기에 농약을 넣어서 수박 한 통 속에 집어넣었습니다. 그리고는 경고문을 붙였습니다.
"이 수박밭의 수박 한 통에는 농약이 들어 있음. 먹다가 죽어도 책임 안질 것임. 주인백."
그로부터 한 주일 정도 지났을 때입니다. 주인이 써놓은 경고문 옆에 또 다른 경고문이 붙었습니다. 도적이 써놓은 것이었습니다. 내용인즉 이러합니다.
"이 수박밭에 있는 수박들 가운데 두 통에 농약이 들었음. 그 가운데 한 통은 주인이 알고, 또 한 통은 도적이 앎. 도적백."
악으로는 악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악을 이기는 방법은 선입니다. 예컨대 내가 고함을 지르면 다른 사람도 고함을 지르게 되어 있습니다. 스스로를 낮추어야 됩니다. 그것이 이기는 방법입니다.
아동문학가로 잘 알려진 소파 방정환 선생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밤 이 분 댁에 강도가 들었습니다. 잠자던 식구들을 모두 깨웠습니다. 강도는 칼을 들이대면서 돈을 내놓으라고 위협했습니다. 그래서 방정환 선생은 있는 돈을 찾아 강도에게 주었습니다. 강도는 돈을 챙겨 들더니 주머니에 집어넣고서 밖으로 나가려고 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소파 선생이 점잖게 한 마디 나무랐습니다.
"이 사람아, 돈을 받았으면 고맙다는 말 한 마디라도 하고 가야지, 그냥 가면 어떻게 하나?"
강도는 별 싱거운 사람을 다 보겠다는 듯이 "고맙네"라고 한 마디 던지고서는 나가버렸습니다. 그런데 강도가 얼마 안가서 순찰을 도는 경찰에게 붙들렸습니다. 경찰이 강도의 몸을 수색해 보니까 주머니에서 칼과 꽤 많은 돈이 나왔습니다. 경찰은 틀림없이 그가 어디에선가 강도 짓을 했을 것이라 판단했습니다. 경찰은 강도를 추궁한 끝에 그를 끌고서 소파 선생의 집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방정환 선생이 경찰과 함께 온 그를 보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저 사람은 강도가 아닙니다. 사정이 딱한 것 같아서 내가 돈을 그에게 주었습니다. 그는 내가 준 돈을 받고서 고맙다는 말까지 하고 갔는데, 그 사람이 어떻게 강도입니까?"
경찰은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갸우뚱 하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강도를 풀어주고 갔습니다. 그제야 강도는 무릎을 꿇고서 소파 선생 앞에 백배 사죄했습니다.
"제가 정말 잘못했습니다. 이제 다시는 나쁜 짓 하지 않고 바르게 살겠습니다."
오갈 데 없는 강도를 소파 선생은 한 동안 자신의 집에 머물게 했습니다. 그를 완전히 바꾸어서 새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이와 같이 선으로 감동시켜야 악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누룩의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바가 바로 그것입니다. 누룩이 가루 서말 속에 들어가서 가루 전체를 부풀게 합니다. 우리도 이 시대의 누룩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웃에게 믿음의 감화력을 끼치며, 좋은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오늘 누룩의 비유를 통해서 천국의 시민된 우리가 이 시대에 해야될 일이 무엇인지, 함께 생각하면서 은혜 받기를 원합니다. 33절 말씀을 다시 보십시다.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어디에 누룩을 갖다 넣었습니까? "가루 서말 속에."
누룩을 어떻게 했다고 했습니까? "갖다 넣어."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전부 부풀게 한."
편의상 오늘 말씀을 이렇게 세 대지로 나누어서 잠시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가루의 양이 서말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서말은 가루의 양이 많다는 뜻입니까? 적다는 뜻입니까? 많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떡을 충분히 많이 한다고 할 때, 그 양을 가루 서말이라고 합니다.
창세기 18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루는 아브라함이 자기 장막 문밖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 때 여호와께서 그를 찾아오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서 보니까 맞은 편에 세 사람이 서 있었습니다. 그는 뛰어가서 그 분들을 영접했습니다. 그리고 장막에 들어가서 자기 아내 사라에게 이렇게 당부했습니다. 창18:6의 말씀입니다.
"속히 고운 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가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 하고."
여기서 "세 스아"라는 말은 서말을 뜻합니다. 귀한 손님들이 오셨습니다. 충분한 떡이 필요합니다. 먹다가 모자라서는 안될 것입니다. 하여튼 여인이 최대한도로 빚을 수 있는 반죽의 양이 가루 서말입니다. 옛날 우리 나라 사람들은 떡이 많다는 표현으로 "한 다라이"나 된다고 했습니다. "한 다라이"와 "가루 서말"은 똑같은 용법입니다.
아무튼 많은 양의 가루 서말 속에 적은 양의 누룩을 집어넣었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가루는 많고 누룩은 적으니까, 누룩이 가루에 짓눌려서 가루처럼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결과는 정반대였습니다. 적은 양의 누룩이 많은 양의 가루 속에 들어가서 가루 전부를 부풀게 했습니다. 말하자면 누룩이 가루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고, 누룩이 가루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누룩이 가루화가 된 것이 아닙니다. 가루가 누룩화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천국의 특성입니다. 복음의 능력입니다. 믿음의 감화력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천국은 작게 시작했습니다. 온갖 핍박이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국은 점점 확대되어 나갔습니다.
3·1 운동 82주년을 맞이했습니다. 3·1 운동 당시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때 우리 나라의 인구수가 약 2000만명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기독교인들의 수는 고작 30만명이었습니다. 퍼센트로 따지면 불과 1.5%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적은 누룩과 같았습니다. 이와 같은 기독교인들이 앞장서서 민족 전체를 움직여 3·1 운동을 성공적으로 주도했습니다.
지도를 펴놓고 우리 나라에서 3·1 운동이 일어난 곳을 점찍어 보시기 바랍니다. 거기에는 틀림없이 교회가 중심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독립선언문에 서명을 한 민족지도자 33명 가운데 절반에 이르는 16명이 기독교의 목사님들이고 장로님들이었습니다. 육당 최남선 선생은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읽는 가운데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거기에 나오는 예수님의 정신인 무저항주의에 입각해서 독립선언문을 기초했습니다. 너무나도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이처럼 우리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되어서 3·1 운동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것입니다. 적은 누룩이 가루 서말 전체를 부풀게 한 것입니다.
누룩이 가루 서말 전부를 부풀게 한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이 문자 그대로 성취된 시대에 살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천국은 2000년 전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작게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누룩인 복음이 가루 서말인 이 세상 전체를 거의 부풀게 했습니다. 여러분, 세계에서 최대의 종교가 무엇입니까? 기독교입니다. 기독교인의 수가 11억이 넘고 있습니다. 두번째로 큰 종교가 무엇입니까? 이슬람교입니다. 7억 5천만명입니다. 물론 지금도 세계 곳곳에는 기독교에 대한 핍박과 탄압이 계속 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은 계속해서 확장되어 나가고 있습니다. 머지 않아 가루 서말 전부를 부풀게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신실합니다. 땅에 떨어지는 법이 없습니다.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그 때가 되면 예수님은 약속하신 대로 구름 타고 우리를 영접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입니다. 가라지들은 추숫군을 시켜서 다 모아 풀무불에 집어던지실 것입니다.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곡식된 우리는 다 모아서 아버지의 곳간인 하늘 나라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거기서 의인들은 해와 같이 영원토록 빛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시대의 누룩이 되어야 합니다. 영원한 그 나라를 바라보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이 귀한 사명을 충성스럽게 잘 감당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가루 서말 속에 누룩을 갖다 넣었다고 했습니다.
누룩은 넣어야 합니다. 그래야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누룩의 영향력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선반 위에 그대로 두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누룩은 가루 속에 집어넣어야 합니다. 아마도 본문에 등장하는 여자는 가루 서말 속에 누룩을 깊숙이 집어넣었을 것입니다. 누룩이 가루 속에 속속들이 잘 스며들어 반죽이 잘 부풀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높고 높은 보좌에 가만히 앉으셔서 우리를 쳐다보기만 하시면서 사랑하셨습니까? 아닙니다. 낮고 낮은 이 땅에 예수님은 직접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누룩이 되셔서 가루 서말 속으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여자가 가루 서말 속에 누룩을 갖다 넣은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누룩으로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누룩의 사명을 완수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사명을 누가 감당해야겠습니까? 그 나라의 백성들인 우리가 이 사명을 이어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17:18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예수님은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셨습니다. 가루 서말 속에 들어가서 그것을 부풀게 하라는 것입니다.
밀림의 성자였던 알버트 슈바이처 박사를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훌륭한 오르간 연주자였습니다. 철학 박사였습니다. 신학 박사였습니다. 의학 박사였습니다. 박사 학위를 세 개나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루는 말씀 가운데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자기 스스로에게 자문해 보았습니다.
"이 시대의 부자는 누구인가? 이 시대의 거지 나사로는 누구인가?"
부자는 바로 자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 거지 나사로는 누구인가를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에게 깨달음이 왔습니다.
"아프리카 밀림 속에서 병들어 죽어가고 있는 불쌍한 흑인들이다. 만일 내가 그들을 도와주지 않고 내버려 둔다면, 예수님의 말씀 속에 나오는 부자처럼 이것은 나 스스로를 죽이는 길이요, 내 가족을 죽이는 길이라."
그는 즉시 결단했습니다. 모든 것을 정리하고 아프리카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밀림 속에 있는 불쌍한 흑인들을 돌보면서 자기의 여생을 다 바쳤습니다. 하루는 흑인 여인 한 사람을 치료하고 있는데 그 여인이 궁금하다는 듯 슈바이처 박사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은 박사 학위를 세 개나 가지고 있는 위대한 학자이자 천재적인 음악가이십니다. 그런 선생님이 어떻게 이 오지에 오셔서 고생하며 사십니까?"
그 때 슈바이처 박사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예, 제게는 말로 남을 감동시킬 수 있는 재주가 없답니다. 내가 예수님의 사랑을 글로서, 말로서 표현하려고 해 보았지만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별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자신의 삶으로 그 사랑을 내게 보여주신 것처럼 나도 그 본을 따라서 내 행동으로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할 뿐입니다. 그런데 비록 작은 사랑이지만 이 사랑을 실천하는 동안에 하나님은 오히려 내게 큰 축복을 주셨습니다. 나에게 이와 같이 건강을 주셨고, 마음의 행복까지 선물로 주셨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이 누룩으로서 가루 서말인 이 세상 속으로 자신을 던지신 것처럼, 슈바이처 박사도 한 줌의 누룩이 되어서 아프리카 밀림 속으로 자신을 던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세상으로 우리를 보내셨습니다. 우리가 해야될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가루 서말인 이 세상 속, 내가 처해있는 그 자리에서 누룩처럼 좋은 영향력을 줄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가루 서말 속에 누룩을 갖다 넣은 결과 가루 전체가 부풀었다고 했습니다.
누룩은 좋은 영향력을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누룩이 가루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고, 오히려 가루 전체를 부풀게 했습니다. 이따금씩 성경에 보면 누룩이 좋지 않은 영향을 주는 뜻으로 쓰일 때도 있습니다. 예컨대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인새인들의 외식, 위선 등이 나쁜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누룩은 좋은 영향을 나타내는 말로 쓰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도 유월절이 되면 한 주간 동안 무교병을 먹습니다. 누룩이 전혀 들어가지 않은 떡입니다. 맛이 없습니다. 돌멩이처럼 딱딱해서 먹기가 힘듭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조상들의 고생을 몸소 체험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6·25가 가까워지면 개떡을 먹습니다. 옛날 우리 선조들이 고생한 것을 생각하면서 먹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유월절 한 주간의 기간이 지나고 나면 다시금 누룩이 들어간 떡을 먹습니다. 부드럽습니다. 맛도 좋습니다. 한결 먹기가 좋습니다.
누룩이 가루 서말 속에 들어가 전부 부풀게 해서 맛좋은 떡을 만들 듯이 우리도 있는 처소에서 누룩처럼 살맛 나는 분위기로 만들라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약 150년 전이었습니다. 미국 필라델피아에 잔이라는 어린 소년이 살았습니다. 그 때 그의 나이가 13살이었습니다. 그의 집은 무척 가난했습니다. 그래서 학교에 계속 다닐 형편이 되지 못했습니다. 잔은 어쩔 수 없이 벽돌공장에 취직했습니다. 자기 밥벌이를 자기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린 잔에게는 남다른 믿음이 있었습니다. 시간이 나는 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읽었습니다. 기도 생활도 열심히 하고 일하면서도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런데 어린 잔에게 가슴 아픈 일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다니는 교회의 입구가 포장이 되어 있지 않아서 비가 오는 날이면 바닥이 질퍽질퍽 거리기 일쑤였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약한 성도들 가운데는 비가 오면 아예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물론 교회에는 어른들이 많았습니다. 부자도 있었습니다. 좋은 집에 살고 좋은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또 멋있는 마차를 끌고 다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교회 입구가 포장이 되어 있지 않아서 비만 오면 질퍽거리는데도 아무런 대책을 간구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어린 잔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어린 잔은 기도하는 가운데 결심했습니다.
"좋다! 나라도 내 교회 입구를 벽돌로 한 번 멋있게 포장해 보리라!"
그 당시 잔이 벽돌공장에서 받는 일당은 7센트였습니다. 그 돈을 가지고 식대를 제하고 또 생활비 일부를 제하고 나면, 꼭 하루에 벽돌을 한 장 살 수 있는 돈이 남았습니다. 잔은 그 돈으로 벽돌을 매일 한 장씩 샀습니다. 그리고 퇴근 후에 집으로 돌아오면서 교회에 들러 그것을 가지고 교회 입구를 깔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잔이 벽돌로 교회 입구를 포장하는 데는 약 2년의 세월이 걸릴 예정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잔은 그 세월이 전혀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기뻤습니다. 오히려 그것 때문에 살맛이 났습니다. 그의 발걸음은 하늘을 나는 것처럼 몹시도 가벼웠습니다.
일주일이 지났습니다. 열흘이 지났습니다. 한 달이 지났습니다. 매일 저녁 벽돌을 가져와서 교회 입구를 포장하는 잔의 모습을 교회 어른들이 보게 되었습니다. 어찌 그 모습에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드디어 무디었던 어른들의 마음이 움직여졌습니다. 얼마 가지 않아 어른들의 손으로 교회 입구는 깨끗하게 포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덕분에 교회 안까지도 새롭게 단장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어린 잔의 삶을 무한히 더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는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나중에는 큰 사업가가 되었습니다. 미국의 체신장관까지 역임했습니다. 여러분, 이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미국의 백화점 왕으로 불리어지는 잔 와나메이커(John Maker, 1838∼1922)입니다.
우리도 그의 삶처럼 내가 있는 처소에서 누룩과 같이 좋은 영향력을 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나로 인해서 내 가정이, 내 이웃이, 내 일터가, 우리 교회가 살맛 나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바뀌어지는 축복된 역사가 우리 모두를 통해서 날마다 있기를 바랍니다.
누룩과 같은 천국의 능력
마 13:33 / 김영규 목사
누룩과 그 역할
본문은 누룩의 비유입니다. 천국은 누룩과 같습니다. 어떤 누룩인가요?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입니다. 적은 양으로 전체를 변화시켰다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이점에서 누룩의 비유는 겨자씨 비유와 같은 맥락입니다. 그러나 누룩 비유는 겨자씨 비유와 다른 점이 있습니다. 겨자씨 비유가 천국의 성장 능력에 초점을 맞췄다면, 누룩 비유는 천국 성장의 은밀성과 확실성에 초점이 있습니다. 천국은 누룩처럼 은밀하게 작용하여 전체를 확실하게 변화시킵니다.
누룩이 뭘까요? 누룩은 밀이나, 조, 녹두 같은 곡물로 만듭니다. 누룩을 만드는 과정을 보면 전분질이 든 곡류를 갈아서 수분을 가하고 상온에서 보온해주면 됩니다. 그러면 젖산균의 도움으로 잡균이나 세균의 증식이 억제되고, 상대적으로 젖산에 강한 누룩곰팡이와 효모의 활동이 활발해지고, 일정 시간이 경과되면 누룩 반죽이 식으면서 딱딱해지고 누룩곰팡이가 많이 자라고 발효가 종료됩니다.
누룩은 발효 작용을 합니다. 발효란 미생물이 갖고 있는 효소를 이용하여 유기물을 분해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분해 작용은 크게 두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는 부패 반응이고, 둘째는 발효 반응입니다. 부패 반응은 유기물을 썩게 만드는 작용입니다. 악취가 나고 음식물로는 해롭습니다. 반면에 발효 반응은 사람 몸에 유용한 물질을 생성시킵니다. 이렇게 발효반응을 일으키는 유용한 미생물에는 젖산(유산)균, 효모, 누룩곰팡이 등이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누룩”이란 말은 헬라어로 “zuvmh”(주메) 입니다. 이 단어는 같은 문장에 있는 “부풀게 하다”(zumovw, 주모오)란 말과 어원이 같습니다. 누룩은 부풀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누룩이란 말을 영문 성경은 두 단어로 번역합니다. 어떤 성경은 “leaven”(KJV, NASB, RSV)이라고 번역합니다. 어떤 성경은 yeast(NIV, NLT, NRSV)라고 번역합니다. 누룩을 영어로 yeast(NIV, NLT, NRSV)라고 하는데 그 어원 역시 “끓는다”는 뜻입니다. 효모(酵母)가 발효 작용을 하면서 탄산가스를 발생시키는 것이 마치 끓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효모는 토양에 살지 않고 꽃의 꿀샘이나 과일 표면처럼 당 농도가 높은 곳에서 생육합니다.
누룩은 전통적으로 술을 만드는 데 사용됩니다. 포도당을 그릇에 담고 효모를 넣고 뚜껑을 닫아두면 미생물인 효모가 유기물인 포도당을 분해합니다. 뚜껑이 닫혀 있으므로 무산소호흡이 이루어지면서 효모가 포도당을 완전히 분해시키지 못하고 에탄올을 생성합니다. 이 에탄올이 바로 알코올 성분의 술입니다. 이와 같이 곡물에 효모를 넣어 술을 만드는 것을 알코올 발효라고 합니다.
젖산균은 동서양의 대표적인 식품을 만드는데 사용되어 왔습니다. 포도당을 무산소 상태에서 젖산균과 반응시키면 젖산을 만듭니다. 이것을 젖산 발효라고 합니다. 젖산 발효로 만든 서양의 대표 식품은 요구르트와 치즈입니다. 한국의 대표 식품인 김치도 젖산 발효로 만든 식품입니다.
누룩의 대표적인 속성은 은밀한 화학 반응입니다. 누룩의 작용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원자와 분자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화학 반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작용의 효력은 확실합니다. 왜냐하면 누룩의 작용은 물질의 성질까지 변화시키는 화학 작용이기 때문입니다. 은밀하지만 확실한 작용과 효력! 그것이 주님이 이루시는 천국의 성격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천국의 누룩과 같은 작용을 심령 천국과 교회 천국에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요? 저는 이러한 천국의 모습을 심령 천국과 교회 천국에 적용해 보면서 말씀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심령에 작용하는 누룩
누룩의 작용을 첫 번째로 적용할 곳은 심령 천국입니다. 심령에 속에 이루어지는 천국은 누룩과 같이 작용합니다. 심령 천국에 작용하는 누룩의 작용은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누룩 작용의 은밀성입니다. 심령 천국은 누룩처럼 보이지 않게 작용합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거듭남과 성화 작용입니다. 주님은 니고데모에게 거듭남을 설명하면서 바람의 예를 들어 설명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마음에 예수님을 영접하여 거듭났는지 겉으로는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거듭나는 것은 성령께서 마음에 작용하시는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사람의 마음 속에 무엇을 깨닫게 하시고, 무엇을 믿게 하시고, 무슨 생각을 품게 하셨는지? 어떤 결심과 변화를 일으키셨는지? 그 과정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를 알 수 있는 표식이 겉으로 나타납니다. 말과 행동의 변화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마치 바람과 같습니다.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혹은 얼마나 힘이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것을 보면 바람의 존재, 바람의 세기를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내 심령을 보세요. 내 마음에서 어떤 변화가 어떻게 일어났는지 나도 모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자신을 보면 외적인 증표가 나타납니다. 가치관이 변하고, 사고방식이 변하고, 생각이 달라져 있습니다. 삶의 목표가 달라져 있습니다. 근심이 사라지고 평안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신뢰가 커집니다. 하나님 말씀에 어긋나는 것은 겁이 나고 싫어집니다. 미워하던 사람이 불쌍히 보입니다. 누룩과 같은 천국의 능력이 내 마음 속에 은밀하게 작용한 결과입니다.
둘째는 누룩 작용의 확실한 효력입니다. 누룩은 식물을 발효시킵니다. 발효는 화학 반응입니다. 이전의 상태로 돌이킬 수 없는 확실한 변화입니다. 성령께서 내 마음을 변화시킬 때, 이전의 마음으로 되돌아가도록 어정쩡하게 변화시키지 않습니다. 거꾸로 갈 수 없도록 확실한 변화를 주십니다. 즉, 어떤 경우에도 내가 불신자로 다시 돌아가도록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내가 하나님 자녀임을 확실히 인식하게 만듭니다. 십자가를 끝까지 붙들게 만듭니다. 말씀을 따르게 합니다.
발효 작용은 보존의 역할도 합니다. 서양의 저장 음식 중에 요구르트와 치즈가 있습니다. 발효된 치즈는 오랫동안 변질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의 김치도 마찬가집니다. 전 세계적으로 김치처럼 뛰어난 저장 음식이 없습니다. 일반적인 야채를 상온에 놔두면 며칠 내로 썩어버립니다. 그러나 김치처럼 발효시켜 놔두면 오래 보관됩니다. 젖산균이 다른 미생물이 작용하지 못하게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쩌다 속초에 가면 아바이 마을에 들려서 가자미 식혜를 사옵니다. 가자미는 생선입니다. 그냥 놔두면 하루 이들이면 변질됩니다. 그런데 곡물과 무 같은 야채와 함께 발효시키면 오래 두고 먹을 수 있습니다. 누룩은 그리스도인들의 성향이 변질되지 않도록 보전하는 역할을 합니다.
성도들의 마음에서 이루어지는 심령 천국도 누룩과 같습니다. 심령 천국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수시로 변질되던 마음입니다. 낙심하고 좌절하고 포기하던 마음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받아 변화된 후로는 쉽사리 변하지 않습니다. 아니 절대로 변질되지 않습니다. 썩지 않습니다. 거꾸로 가지 않습니다. 누룩과 같이 확실한 천국의 능력 때문입니다.
공동체에 작용하는 누룩
누룩의 작용을 두 번째로 적용할 곳은 교회 천국입니다. 교회 공동체가 형성되고 성장해 가는 것을 보면 누룩의 작용과 같습니다. 교회에 작용하는 누룩의 역할 역시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교회원들의 마음이 연결되어 공동체를 이루는 은밀한 과정입니다. 낯선 사람들이 모여서 평생지기 공동체를 만드는 것은 굉장한 기적입니다. 동물의 세계에서 보면 낮선 개체가 나타나면 바짝 긴장하고 경계합니다. 포유류 같이 고등한 동물일수록 그 긴장감이 커집니다. 곰이나 사자 같은 맹수들을 보면 낮선 존재가 나타나면 경계하고 공격합니다. 인간도 그렇습니다. 낯선 사람들이 모여서 공동체로 살아가는 것은 매우 힘든 일입니다. 가장 가까운 가족관계를 보세요. 친밀감도 있지만 긴장과 갈등도 항상 있습니다. 신혼부부 가운데 절반이 가족 해체의 아픔을 경험합니다. 이런 가운데 수많은 사람이 모여서 교회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요? 저는 교회를 시작할 때에 어떤 사람을 어떻게 모아서 어떻게 공동체를 이루겠다는 그림이 없었습니다. 그 방법도 알지 못했습니다. 사실상 다수의 사람이 모여서 공동체를 이루는 인간적인 방법은 없습니다. 어떻게 각 사람의 마음과 마음을 연결시킬 수 있을까요? 어떻게 교회에 헌신하려는 마음을 가지게 할까요? 어떻게 교회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려는 마음을 품게 할 수 있을까요? 인간적인 방법은 없습니다.
오직 성령께서 누룩과 같은 작용을 하셔서 교회 공동체를 만드실 뿐입니다. 각 사람 속에 천국 복음이 뿌려지면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고 거듭납니다. 그리고 교회생활을 시작합니다. 어떤 교회에 속할까? 어떻게 헌신 봉사할까? 어떻게 공동체를 지켜갈까? 누가 지시하거나 가르쳐서 될 일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께서 각 사람의 마음을 연결하십니다. 공동체를 섬기게 하십니다. 거기에 몸담고 가족 의식을 갖게 하십니다. 저는 얼마 전까지도 내가 우리 정윤교회를 가장 많이 사랑하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기도하다가 깨달았습니다. 주님께서 이런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너보다 정윤교회를 사랑하는 성도들이 훨씬 더 많아! 너보다 더 헌신하고, 너보다 더 봉사하고, 너보다 더 섬기는 사람들을 좀 봐라! 정윤교회는 네 교회가 아니야. 내 교회야! 내 피로 샀어! 내가 정윤교회를 얼마나 아끼는지 알지? 마음 푹 놓고 섬겨라!” 자세히 생각해 보니, 우리 교회 모든 분들이 다 그래요. 충분히 감동적인 신앙 자서전을 쓸 수 있는 분들입니다. 제가 목회 마지막에 남기고 싶은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우리 교인들이 얼마나 진지한 마음으로 교회를 섬겼는지 책으로 엮어서 출판하고 싶습니다. 도대체 누가 이런 공동체를 만들었을까요? 사람이 아닙니다. 누룩과 같은 천국의 은밀한 능력입니다.
둘째는 누룩처럼 교회 공동체를 확실히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우리는 다 주님의 부름을 받을 때에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마귀의 지배 아래 있었습니다. 마귀의 생각과 사고방식, 가치관을 갖고 살았습니다. 돈을 사랑했습니다. 죄를 죄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권력 좋아하고, 유명한 것 좋아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천국 공동체인 교회를 이루었습니다. 그냥 놔두면 세상적인 인간 집단입니다. 그런데 언제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모르지만 천국 시민다운 공동체로 변화되어가고 있습니다. 매주 예배를 드립니다. 말씀과 기도로 살아갑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교제합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헌신합니다. 더 좋은 교회를 만들려고 애씁니다. 천국 시민의 맛, 천국 시민의 성향을 보존하고 있습니다. 세상 불신앙과 싸웁니다. 교회 공동체가 무너지지 않도록 강하게 붙들어 줍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교회의 거룩성입니다. 교회는 거룩한 공동체입니다. 이 거룩성을 지켜가는 것은 인간적인 노력이 아닙니다. 인간의 힘이 아닙니다. 오직 천국이 갖고 있는 누룩과 같은 능력입니다. 천국은 자신을 변화시키고 지켜가는 능력이 있습니다.
감사절에 나는 두 가지를 감사합니다. 첫째로, 내 마음에 심령 천국이 이루어진 것에 감사드립니다. 누룩처럼 나도 모르게 내 심령이 변했습니다. 주님의 성품, 주님의 생각, 주님의 목표를 공유한 것에 감사드립니다. 결코 다시는 불신자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확실하게 변화시켜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둘째로, 내가 교회 공동체 속에서 살게 된 것에 감사드립니다. 교회는 지상에서 시작된 천국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미약하게 시작되었지만, 누룩처럼 확실하게 변화시키고, 확실하게 보존합니다. 교회는 거룩한 공동체입니다. 그 속한 자녀들을 천국 가족이 되게 하고, 천국 가족으로 살아가도록 지도하고 보존합니다. 이와 같은 천국 공동체에 속한 것을 감사드립니다.
누룩과 소금
마 13:33, 5:13 / 이윤재 목사(한신교회)
오늘은 광복 71주년 주일이고 또한 우리 교회가 이 자리에 세워진 지 18년된 주일입니다. 18년이면 사춘기를 막 넘어 성인으로 가는 때입니다. 어떻게 하면 나이에 걸맞게 성숙한 교회가 되고 역사와 하나님의 나라에 기여하는 교회가 될 때 생각할 때입니다. 이때 생각하는 것이 영향력입니다. 사람의 일생은 누군가로부터 영향을 받고 누군가에게 영향을 주는 일생입니다. 내가 지금 살아있는 것은 누군가로부터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요 내가 앞으로 살아가야 할 이유는 누군가에게 영향을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누구에게 가장 큰 영향을 받았습니까? 어머니? 아버지? 형제? 자매? 친구? 선생님? 목사님? 역사의 인물? “영향력”이란 말을 영어로 "influence"라 고 합니다. 이 말의 중심은 ”flu"는 flow, “흘러간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in flu” 하니까 “안으로 흘러가는 것”입니다. 먼저 밖에 있는 것이 안으로 흘러 가는 것이 그것이 영향력입니다. 안으로 들어가면 또 밖으로 나옵니다. 이것이 “영향력”입니다.
영향력은 우리 삶의 모든 부분에 존재합니다. 개인과 개인간에도 있고 개인과 공동체, 공동체와 공동체 사이에도 있습니다. 최근 한국교회 영향력이 줄었다고 해서 염려가 됩니다. 2009년 조사에서는 약 36%의 국민이 “우리 사회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종교”로 기독교를 꼽았답니다. 그 보다 더 옛날로 가면 교회는 훨씬 영향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보다 훨씬 못합니다. 불신자들에게 종교를 선택한다면 어떤 종교를 선택하겠느냐 했다니 천주교 1위, 불교 2위, 기독교 3위였답니다. 왜 이렇게 교회의 영향력이 감소되었을까? 우리는 어떻게 그 영향력을 회복할 수 있을까? 많은 진단이 있고 해법이 있지만 오늘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두 가지 영향력을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누룩, 나쁜 영향력
먼저 누룩의 영향력입니다. 누룩이란 빵을 만들기 위해 가장 필요한 이스트입니다. 누룩, 이스트가 없으면 빵을 만들 수 없습니다. 빵을 주식으로 하는 나라에는 마치 생명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소중한 것이 부정적으로 쓰인다면 이해하시겠습니까? 먼저 예수님이 말씀합니다. 막8:15,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예수님이 바리새인의 누룩을 조심하라, 헤롯의 누룩을 조심하라 할 때 그들이 먹는 실제 “누룩”을 말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의지해서 삽니다. 아예 율법을 이마에 손목에 새기고 다닙니다. 집문설주에도 문패처럼 율법을 써 붙였습니다. 그들은 율법없이는 못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율법이 짐이 되고 법이 됩니다. 그것 안 지키면 구원도 못 받고 하나님의 백성도 아닙니다. 헤롯의 누룩은 헤롯의 나쁜 정치입니다. 백성을 억눌러 고통을 주는 군사통치, 폭력정치같은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누룩은 율법주의의 누룩이요, 헤롯의 누룩은 폭력정치의 누룩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은 자기만 망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망칩니다. 그것은 작게 시작해도 자꾸 커지고 남을 변질시킵니다. 누룩의 특징은 “전염성”과 “확산성”입니다. 작은 것이 나중에 눈덩이처럼 커집니다. 사도 바울도 갈5:9에서 “누룩”에 대하여 말합니다.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바울이 말한 누룩은 할레주의의 누룩이었습니다. 당시 갈라디아교회는 이방 땅에 막 태어난 어린 교회였는 데 유대주의자들이 나타나 “할례받으라. 할례받아야 구원받는다”는 식으로 어린 교회를 미혹하여 그들로 하여금 다른 복음을 좇게 하자 바울이 그들을 경계하면서 “누룩을 조심하라”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이나 바울이 “누룩”을 이렇게 부정적으로 언급할 때 청중들은 아마 이해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누룩”이 얼마나 빨리 전염되고 확장되는 것을 그들이 생활을 통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도 그렇습니다. 눅13:13,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여기 “가루 서 말”은 이스라엘 무게로 “세 스아”, 요즘 무게로 대략 35리터 된답니다. 그런데 그 정도에 적은 누룩을 넣으면 50파운드(227kg)의 빵이 나옵니다. 그러면 이 빵으로 약 150-200명 정도가 먹는다고 합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빵도 지극히 작은 누룩으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서 예수님이 하려고 하신 말씀은 누룩의 빠른 전염성과 팽창성입니다.
이스라엘의 최대 명절은 유월절입니다. 매년 4월, 우리 부활절 어간에 시작되는 이 유월절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해방한 것을 기념한 절기로 8일간 지킵니다. 아이들도 한 3주 방학하고 집에 있으면서 온 식구들이 일주일동안 누룩찾기를 합니다. 찾는 것은 집안에 모든 발효식품입니다. 물에 들어가면 부풀려지는 곡식은 모두 찾아냅니다. 대표적인 것이 빵입니다. 빵만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발효된 밀, 호밀, 보리, 귀리등이 그 대상입니다. 아침마다 먹는 대용식 시리얼도 찾아냅니다. 소파, 장롱등 구석구석을 후래쉬를 비취며 찾아냅니다. 요즘은 직장 때문에 바쁘기 때문에 누룩을 찾아주는 대행사도 생겼습니다. 부모들은 자녀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빵을 여기 저기 숨기 까지 합니다. 온 식구가 한 주간동안 누룩을 찾습니다. 왜 이렇게 누룩을 찾는 것일까요? 그것이 갖는 영적 메시지 때문입니다. “하나님앞에 악은 어떤 모양이든지 있게 하지 말라. 하나님을 만나려면 먼저 그 앞에 흠과 티가 없어야 한다. 누룩은 우리의 부패성을 상징한다. 하나님앞에 나아가려는 자는 반드시 자신의 부패를 제거해야 한다”. 이런 메시지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고전5:6-7, “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너희는 누룩없는 자인데”, 여기서 누룩은 빵에 넣는 이스트가 아닙니다. 우리속에 있는 죄의 누룩입니다.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오신 것은 우리 속에 있는 누룩을 제거하기 위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파급성과 팽창성이라는 점에서 누룩을 넣어 발효된 것을 부패한 것을 보았으므로 누룩은 매우 부정적인 이미지로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상당한 속도로 침체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한국교회가 열심히 없었거나 사회에 기여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열심히 기도했고 부지런히 봉사했습니다. 그동안 한국교회가 보였던 열심과 봉사는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기도원마다 꽉꽉 찾습니다. 제가 신학생때 가끔 삼각산에 있는 기도원을 갔는데 저녁에는 산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의 소리 때문에 잠에서 깨곤 했습니다. 부흥회를 하면 월요일부터 토요일 아침까지 했습니다. 봉사는 또 얼마나 했습니까? 2001년부터 대북 지원금으로 낸 지원의 51%가 기독교입니다. 1996년부터 수재의연금의 69%, 2003년 발생한 대구지하철 화재사고에는 의연금 70%, 1996년부터 해외 인도 지원금으로 65%를 교회가 감당한 것입니다.
우리 나라 유명 봉사단체 5개는 모두 기독교 계통입니다. 우리 나라 최초의 구호단체인 어린이 재단은 1948년에, 월드비전은 1950년 6.25전쟁이후 한경직 목사에 의해, 컴패션 역시 6.25전쟁이후 스완슨목사가, 국제기아대책기구는 1989년 윤남중 목사가, 굿네이버스는 1991년에는 이일하 목사가 각각 설립했습니다. 한국교회가 침체하고 한국교회가 영향력을 상실한 것은 흔히 말하듯이 기도가 부족하고 교회가 세상을 섬기지 않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교회가 밖으로 향한 활동은 항상 넘쳤습니다. 봉사, 구제, 선교, 최고였습니다. 문제는 우리 안에 있는 누룩입니다. 우리가 침체한 것은 우리안에 있는 누룩 때문입니다. 어떤 기독교 신문에서 한국교회 문제가 무엇이냐하고 물었습니다. 크게 다섯 가지가 나왔는 데 첫째 기독교인들의 배타성, 24%. 우리와 다른 것, 그리고 타종교는 우리가 잘 인정하지 않습니다. 배타적입니다. 두 번째 교회 재정의 투명성, 23%. 교회 재정이 어떻게 쓰이는지 불투명하다. 셋째 교회지도자들의 문제, 21%. 특히 대형교회 지도자의 실수, 넷째 교회 성장주의, 15%, 교회는 성장하게 되어 있지만 성장이 목적은 아닙니다. 그런데 성장에 목매다는 교회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이 교인들의 언행불일치, 비기독교인의 93%가 “교인들의 언행이 일치하지 않아서” 기독교를 신뢰하지 않는다고 응답했습니다. 이런 것이 우리안에 있는 누룩인지 모릅니다.
아무도 우리를 부패케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우리가 너무 빨리 가려다가 올바로 가는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너무 바쁘게 가려다가 지름길로 들어서서 본질을 잃어버리고 비본질을 따라갔습니다. 우리안에 있는 누룩이 문제입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빨리 가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로 가야 합니다. 한국교회는 성공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성화되어야 합니다. 한국교회는 커야 하는 것이 아니라 깨끗해야 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우리안에 누룩이 있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이 이것입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 내가 아닌 한국교회의 누룩을 비판하는 것으로 누룩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비본질을 지적하는 것만으로 본질이 회복되지 않습니다. 신학자 한스 큉이 쓴 “교회란 무엇인가”에서 말했습니다. “교회의 참 본질은 비본질 안에서 나타난다. 교회안에 비본질을 찾아냈다고 해서 그것이 교회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교회는 신적 기구일 뿐 아니라 인간적 제도이기 때문에 교회안에 비본질이 있다고 해서 놀랄 일은 아니다. 내가 먼저 본질적이 되려고 노력해야 한다. 비본질적인 것을 비판했다고 해서 본질이 회복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본질적이 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이 경우의 시금석은 예수 그리스도의 눈이다. 먼저 자신을 그리스도의 믿음의 빛으로 엄격하게 비춰라. 그리고 남을 사랑의 빛으로 따뜻하게 비춰라”. 내 안에 있는 누룩이 더 중요합니다. “주여, 내 안에 많은 누룩이 있사오니, 주여, 긍휼히 여기소서. 날마다 내 안에 있는 누룩찾기에 집중하게 하소서. 한국교회를 회복시키시되 나부터 회복시키소서. 빨리 가려고 하지 말고 올바로 가게 하옵소서. 대형교회가 되려고 하지 말고 정결한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성공한 교인이 되려고 하지 말고 거룩한 교인이 되게 하옵소서”.
소금, 좋은 영향력
누룩이 나쁜 영향력의 대표라면 소금은 좋은 영향력을 대표합니다. 13절입니다. 마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14절, 마5:14, “너희는 세상의 빗이라. 산위에 잇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주님께서 우리가 세상에서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살도록 주신 두 개의 비유가 소금과 빛입니다. 많은 사람이 습관적으로 “빛과 소금”이라고 말하는 데 순서를 보면 소금과 빛입니다. 소금이 먼저 나오고 빛이 나중에 나옵니다. 왜 이 사실이 중요합니까? 우소금은 녹는 것입니다. 빛은 드러내는 것입니다. 세상의 어둠을 드러내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세상속에서 죽고 희생하는 것이 먼저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소금을 말할 때 이스라엘 사해바다를 염두에 두셨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나 지금이나 이스라엘 소금은 사해에서 나기 때문입니다. 사해는 성경에서 “염해”, “소금 바다”라고 부르는 데 그 이유는 바다 전체가 소금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해 물은 매우 짭니다. 얼마나 짠가하면 보통 바다물의 농도가 3%라면 사해바다는 30%입니다. 보통 바다보다 열배이상 짭니다. 물을 손에 떠 혀 끝에 대보면 짠 것이 아니라 씁니다. 오랜 세월 물이 흘러 들어오기만 하고 밖으로 나가지는 않은 데다 40도 이상의 햇빛이 내려쬐어 수분이 증발하기 때문에 소금이 생깁니다. 이 소금이 돈 덩어리입니다. 이 소금은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 온갖 화학물질이 포함된 보화입니다. 각종 의약품, 화장품, 광물질이 이 소금에서 나옵니다. 염화 나트륨, 염화 칼슘, 염화 칼륨, 칼슘, 포타시움, 마그네슘, 유황, 브로마인등이 소금에서 나옵니다. 이것들을 정제해서 필요한 화학제품을 만듭니다. 그리고 나면 소금이 더 이상 필요없습니다. 그래서 밖에 버립니다. 그러면 마치 밀가루같이 하얗게 되어 사람들이 밟고 갑니다.
이스라엘 사해 근처에 가면 이 하얀 소금들이 지천으로 버려져 있습니다. 멀리서 보면 소금같습니다. 그런데 가까이 가서 보면 짠 맛이 없습니다. 화학물질을 이미 다 채취했기 때문에 소금의 맛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이 지금 그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말씀대로입니다. 맛을 잃으면 더 이상 소금이 아닙니다. 모양이 하얗다고 소금이 아닙니다. 짠맛이 소금입니다.
성경에도 소금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가장 먼저 나온 이야기가 레2:13입니다.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 옛날 성전에서 제사드릴 때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제물은 소금을 쳤습니다. 곡식으로 드릴 때 곡식에도 뿌리고 동물로 드릴 때 동물에 뿌렸습니다. 제사한 후에 먹을 때 맛을 내기 위함이었지만 더 중요한 뜻이 있었습니다. 썩지 않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제물을 받을 때 상한 제물은 받지 않습니다. 음식이 상하지 않으려면 소금을 뿌려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제물마다 소금을 요구하셨습니다. 이것을 “언약의 소금”이라 불렀습니다.
중요한 것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할 때 “세상”이란 말이 중요합니다. “세상의 소금”을 대개 “the salt of the world”로 번역합니다. 그러나 “the salt of the earth(진흙)”로 번역해야 맞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세상”은 추상적인 우주 공간, “코스모스”가 아닙니다. 원문은 “게스”입니다. 이 말은 “진흙”이란 뜻입니다. 조금 더 나아가면 “불완전한 장소로서의 땅”, “죄의 장소”, “죽음의 공간”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소금이 되어야 할 장소는 진흙같아서 늘 죄와 죽음이 있는 불완전한 곳을 말합니다.
여러분, 영향력이란 잘하고 있는 사회에서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다 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진흙처럼 죄와 죽음과 문제가 항상 일어나는 곳, 그 곳에서 그나마 자기를 죽임으로 영향력이 나타납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몸담고 있는 교회는 완전한 곳입니까?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이 모인 곳이지만 완전한 곳도 이상적 존재도 아닙니다. 교회는 현실적으로 역사적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교회는 인간의 존재를 초월하여 존재할 수 없습니다. 신학자들은 이것을 “도상의 교회”, 천국이 완성된 교회가 아니라 천국으로 나아가는 교회, Chuch on the way, 길에 서 있는 교회라 부릅니다. 교회는 지금 여행중이고 순례중입니다. 아직 가나안에 도착한 것이 아니라 가나안을 향해 행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이런 문제가 있다. 저런 문제가 있다. 목회자가 썩었다. 이것도 잘못이고 저것도 잘못되었다고 교회를 비판하면서 그런 교회를 다닐 바에야 안 다니겠다. 그런 교회는 필요없다 했다면 번지수를 잘못 짚은 것입니다. 죄악도 오류도 없는 완전한 존재란 홀로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완전하고 이상적인 교회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만 그곳을 향해 가고 있고 있을 뿐입니다. chuch on the way, 길에 서 있을 뿐입니다.
“You are the salt of the earth”, “너희는 진흙속에서 소금이다. 진흙이 변화되겠느냐? 진흙을 변화시키려면 방법은 하나 밖에 없다. 네가 그 속에 들어가 죽어라. 네가 죽고 네가 희생하는 방법밖에 없다. 누구나 말하기는 쉽다. 이제 말을 그치고 네가 죽어라. 다른 사람을 죽이지 말고 네가 죽어라. 그것이 네가 내 영향력을 드러내는 방법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정채봉 시인이 “생선”이란 시를 아십니까?썻습니다. "생선이 소금에 절임을 당하고/얼음에 냉장을 당하는 /고통이 없다면/ 썩는 길 밖에/ 썩어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길 밖에“. 맛있는 생선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죽어야 맛을 냅니다. 소금의 영성은 자기 죽음의 영성입니다.
성경과 역사에서 선한 영향력을 나타낸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냥 된 사람이 있는가. 자기를 죽인만큼 영향력을 나타냈습니다. 2001년 9월 11일, 테러로 미국 뉴욕 월드 트레이드 센터 트윈 빌딩에 무너질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다 살려고 나오는 데 수백 명의 소방관들과 경찰관들이 빌딩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로부터 1시간, 빌딩이 무너지면서 그들도 다 죽었습니다. “아, 저 빌딩 위험하다”. 말할 수 있습니다. “왜 거기 있느냐”고 나무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목숨걸고 뚜어들지 않으면 감동과 영향력을 나타낼 수는 없습니다. 1991년, 미국 샌프란시스코 대지진때도 그랬습니다. 갑자기 일어난 지진으로 고가도로가 1마일 정도에 걸쳐 통째로 내려앉아 수많은 사람들이 자동차 안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그때 언제 붕괴될지 모르는 극한 상황속에서 수십 명의 시민들이 목숨을 걸고 그들속을 들어갔습니다. 어떤 외과 의사는 아예 유서를 써 놓고 들어가 백여 명의 사람들을 그 자리에서 절단 수술을 해서 구출해 냈습니다. Youare the salt of the earth, 너는 진흙속에 있는 소금이다. 네가 죽어라. 네가 죽어야 남이 산다. 그것이 influence, 영향력이다. 우리나라 장기려 박사도 그랬고 유일한 사장도 그랬고, 손양원, 주기철, 문중경전도사가 그랬고, 무엇보다 예수님이 그랬습니다.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주심으로 인류 최대의 영향력을 남기신 예수 그리스도, 그가 보여준 영향력처럼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 진흙같은 세상에서, 자신안에 있는 누룩과 싸우면서 거룩한 영향력을 나타내고 창립 18주년을 맞은 우리 교회도 그런 영향력을 나타내기를 바랍니다.
비유로 말씀하신 천국
마 13:33 / 송영태 목사
어느 가정주부가 시장에서 고등어 두 마리를 사서 집에 가wl고 갖습니다. “내일 아침은 이것으로 반찬을 하리라”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 냉장고를 열어보니 고등어는 온데간데없고 그 자리에 자기 구두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놀래서 신발장을 들여다보니 거기에 고등어가 놓여 있는 것입니다.
이 주부가 정신이 있는 것입니까? 없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행동은 있는데 생각이 없던 것입니다. 그 생각은 어디로 갔습니까? 반복되는 행위 속에서 어느 사이에 행동만 남고 생각은 빠져나갔던 것입니다.
우리는 생각 없이 하는 것을 행위라 하지 않습니다. 행동이 먼저 가고 때로는 욕망이 먼저 가고 생각이 뒤따르면 그 일에는 계속 후회가 있을 뿐입니다. 끝없는 후회 속에 살아가야 합니다. 생각이 먼저 가고 그리고 행동이 가서 생각한 바를 사건 속에서, 행동 속에서 확증해 나갈 때, 그래서 때로는 더 높은 의미의 생각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생각과 행동이 따로 따로 간다고 하면 그 사람은 정신병자입니다.
인간을 학술적 용어로 호모사피엔스라 합니다. 이 말은 생각하는 인간이다 라는 뜻입니다. 혹은 호모 에렉투스 이것은 직립보행 하는 사람이다. 두발로 서서 걸어 다니는 사람이란 뜻이고, 호모 파베르 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도구를 사용할 줄 아는 존재다 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사람의 사람된 높은 가치는 어디 있느냐 하면 그것은 호모 사피엔스에 있는 것입니다.
즉 생각하는 인간이라는데 있다는 말씀입니다. 생각이 없는 인간이라면 그건 동물일 뿐입니다. 생각하는 능력, 기능, 하나님께서 주신 소중한 선물이요, 하나님의 형상으로 된 인간에게 있는 가장 귀중한 본질입니다. 생각하는 것,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생각을 저버릴 때 “인간 됨을 저버렸다”라고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입을 것과 먹을 것과 살아야할 거처인 집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의식주는 세상에서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요, 날마다 필요한 것이며, 때마다 있어야할 것들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중요하다고 해서 의식주만 해결되면 인간이 완전하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이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해서 성공한 것으로 착각한다면 동물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은 이것보다 더 가치 있는 중요한 것을 찾고 바라보게 되어 있습니다. 진리를 찾고, 정의를 구하고, 사랑을 말하며, 희망을 노래합니다. 뿐만 아니라 언젠가는 이 세상을 떠날 것을 알고 영원을 준비하는 지혜가 인간에게 있다는 말입니다. 죽을 날을 생각하며 오늘 하루, 하루의 삶과 생을 보다 잘 살려고 애쓰는 것이 인간인 것입니다.
죽음 후에 들어갈 세계를 바라보며 영원을 사모하는 것이 인간의 고뇌이며 진정으로 깊이 생각해야할 부분인 것입니다. 인간이 세상을 마지막 떠날 때 심각한 것은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가 아니라 천국으로 가느냐 지옥으로 가느냐의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마지막 숨이 꺼져 가는 사람에게는 돈도 화려한 집도, 세상 떵떵거리고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던 명예나 권세도 아무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더구나 마지막 숨져가는 사람에게 사상이니 예술이니 철학이니 업적이니 공로니 하는 것들도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나는 이제 어디로 가고 있단 말인가? 지옥인가? 천국인가? 하는 영원의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결론이 중요한 것이라면, 오늘 정말 중요한 문제는 내세의 문제요, 영생의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제일 먼저 선포하신 말씀이 천국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4:17)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은 천국을 직접 설명하시거나 구경시켜 주신 적은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께서 천국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는 모두 다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구경하는 곳이 아니라 직접 가야할 곳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 성도들을 천국의 구경꾼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천국의 주인공으로 만드시는 것이 주님의 근본적인 목적이기 때문에 미리 구경시켜 주신 적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천국에 들어가서 하늘나라의 주인공이 되기 위한 과정을 말씀하시고 교훈 하시는데 초점을 두셨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어 천국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라고 간단하게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 속에 담겨있는 천국의 모형을 찾아봄으로써 함께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먼저 “여자”라는 단어에 주의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여자”란 말은 “교회”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신랑으로 말할 때 교회는 그의 신부입니다. 교회는 오늘 우리 한사람 한사람 부르심을 받는 자들이 교회이기 때문에 교회인 우리 성도들은 신부이며 예수님은 신랑이며 교회는 또한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으면, 교회는 어머니로 섬겨야합니다. 때문에 여자를 교회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자”가 뜻하고 있는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여자는 우선 생산능력이 있습니다. 생명을 잉태하고 생산해서 키우는 생명의 밭이요, 생명을 성장시키는 능력이 있음을 보아야할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통하여 선택된 백성들을 부르시고 교회인 성도를 통하여 복음을 듣지 못한 자들에게 복음을 듣게 하시며 또한 교회를 통하여 그들의 믿음이 성장하게 하십니다.
때문에 이 지상에 존재하고 있는 교회는 어머니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어머니처럼 교회 안에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주님의 자녀를 양육하고 보호하고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어머니 품이요, 어머니 젖가슴이요, 하나님의 희생적인 사랑으로 주님의 자녀들이 성장하는 곳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러기에 교회인 성도 한사람 한사람이 중요한 것이며, 또한 지상의 교회가 매우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말로 교회에 대한 부정적 견해나 모임에 대한 불평은 사탄의 전략인 것입니다.
또 본문 말씀을 보면 “여자는 누룩을 가루 서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여기서 여자의 역할을 말씀하고 있는데, 여자는 누룩을 가루 서말 속에 넣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운반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복음을 운반하는 일을 하는 곳입니다. 교회는 누룩인 말씀과 교훈을 증거하는 일을 하는 곳입니다. 교회된 성도들이 나가서 말씀과 삶을 통해서 세상을 부풀게 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은 바로 이런 교회를 통해서 변화되고 확장되는 것입니다. 천국은 교회를 통해서 선포되고 있는 복음으로 변화되는 곳이란 말씀입니다.
오늘 이 시대는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서 천국 확장을 이루어가고 계심을 깊이 깨달아야합니다. 여자가 가루 서말 속에 누룩을 넣어 전부 부풀게 한 것처럼 교회가 세상 속에 말씀을 선포하여 새로운 변화의 역사를 일으켜가야 하며, 부풀게 하여 천국을 더욱 크게 만들어가야 하는 사명이 있음을 알아야합니다.
다음으로 본문 말씀 속에서 “가루 서말”이란 의미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곡식 알맹이가 그대로 있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교회 안에는 여러 가지 알맹이가 모여 있습니다. 밀알도 있고 통보리도 있고, 콩 알도 있습니다. 알맹이 그대로 있으면 절대로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각기 제 나름대로의 특색과 성질을 나타내고 버티고 있기 때문에 화합이 될 수가 없고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맷돌에 넣어 각기 다른 곡식 알맹이들을 함께 갈아버려야 합니다. 맷돌에 넣어 함께 갈아 버리면 각기 가지고 있었던 모양과 형체는 없어지고 온전히 가루가 되어 화합이 되고 반죽이 됩니다.
알맹이들은 맷돌 속에 들어가 완전히 가루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밀알도 없어지고, 보리도 없어지고, 콩의 모양도 없어져 버리고, 오직 가루가 되어 하나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주님이 원하는 대로 반죽이 되어 천국을 위해서 쓰임 받게 만들어지게 되는 것을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교회란 어떤 곳입니까? 교회는 맷돌질하는 곳입니다. 교만과 죄로 이루어진 알맹이를 말씀과 성령의 맷돌로 갈아버려야 합니다. 진리라는 맷돌에 넣어 고운 가루로 만들어 주님의 손길에 의해 주님의 형상대로 다시 빚어져야 합니다.
진정한 교회는 주님의 형상대로 다시 빚어진 성도들이 뜨겁게 모여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어느 성공한 목사님에게 교회 성장비결을 물으니 “교회의 부흥을 위해서는 목사가 무당이 되어야 한다. 목사가 무당이 되지 않고는 교회가 성장하지 않는다”고 하신 분이 계십니다.
정말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말씀입니다. 말하자면 “꿩 잡는게 매가 아니냐”하는 식의 큰소리요, 오만입니다. 그러면 교회는 양과 목자는 어디 가고 꿩과 매만 남아 있다는 말이 아닌가?
우리 주님은 말씀하시길 분명 “나는 선한 목자라”하셨습니다. 결국 이 말씀은 성도들은 양이 라는 말씀입니다. 교회 성장을 위해서라면 사람들의 기호에 맞는 사업을 벌이고 프로그램을 많이 개발해서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려고 합니다.
물론 신앙교육이나 선교를 위한 프로그램이야 당연히 해야하겠지만 어느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인지 사회기관인지 구별하기 어려운 모양을 봅니다. 신앙윤리도, 선한 양심도 없고 오직 교회만 확장되면 된다는 식은 버려야합니다.
선지자 호세아가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다고(호4:1) 하였으며 계속해서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 도다(호4:6)라고 탄식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외치기를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호6:3)라고 호소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수천번의 제사보다 수만 가지의 재물보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신학자 폴 틸리히는 “성경의 하나님은 어떤 모양으로도 우리가 신앙하는 하나님이요, 미신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성도들이 모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영원한 생명을 얻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이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딱딱해서 안 갈아지는 것은 절구통에 넣어 힘껏 빻아서 다시 맷돌 속에 넣어 갈아 고운 가루로 만들어야 합니다. 한번만 가는 것이 아니라 제 모양, 제 형체가 없어지고 온전히 가루가 될 때까지 갈고 또 갈고 반복해서 완전히 부셔져야합니다.
그러나 가루가 되지 않는 알맹이는 한바퀴 돌아서 고운 가루를 묻혀 가지고 맷돌에서 튀어 나갑니다. 절구통에서 튀어 나갑니다. 튀어나간 알맹이는 다시 주워 담지 않으면 닭이 와서 찍어 먹어버리고 맙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어떤 경우라도 성도들은 교회를 뛰쳐나가면 안됩니다. 말씀의 방망이를 맞아도 교회 안에서 맞아야합니다. 교회 안에서 진리의 맷돌이나 말씀의 방망이에 의해 고운 가루가 되지 않고 뛰쳐나가면 마귀가 와서 삼켜 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말씀과 성령으로 부서지고 갈려서 고운 가루가 되어 주님의 손길에 붙들려 주님의 소원대로 다시 만들어져야 합니다. 여자가 가루 서말 속에 갖다 넣었다고 한 것은 부서지고 갈려서 고운 가루가 되어야 믿음의 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야 소망의 사람이 되며 사랑의 사람이 되며, 헌신의 사람이 되며, 은혜의 사람이요, 충성의 사람이요, 화해의 사람이 됩니다.
오늘 예배를 드리면서 말씀을 듣는 여러 성도들은 부서지고 갈리되 완전히 갈려서 고운 가루가 되어 믿음, 소망, 사랑, 충성, 헌신, 온유, 오래 참음의 온전한 인격과 삶의 모습으로 빚어지기를 축원합니다.
천국이란 이렇게 옛 것이 완전히 사라지고 새것으로 창조되는 역사가 일어나는 곳입니다. 천국이란 믿음, 소망, 사랑, 충성, 온유, 은혜의 인격과 새 생명으로 새로이 지음 받는 역사가 이루어지는 곳임을 본문은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국은 누룩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누룩”이란 말은 “교훈”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가루 서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누룩이 들어가면 가루가 부풀어오르기 시작합니다. 누룩이 들어가면 가루가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맛도 변화되고, 질도 변화되고, 향기도 변화되고, 모양도 변화됩니다. 색깔도 변화되고 용도도 변화됩니다. 부서져서 가루가 되지 않은 알맹이가 그대로 있는 곳에는 누룩을 넣어도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부서지지 않으면 누룩의 덕을 보지 못합니다. 고운 가루로 갈리지 않으면 누룩을 넣어도 효과가 없습니다. 갈리고 부서진 고운 가루에 누룩이 들어가면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반드시 역사가 일어납니다.
누룩은 말씀이요, 교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교훈은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 말씀은 세상을 창조하신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이 진정으로 임하면 어떤 것도 변화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나 부서져서 고운 가루가 되지 않는 사람은 교훈이 와도 말씀이 와도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죄악과 교만과 불순종으로 굳어진 심령은 완전히 성령의 불 방망이로 부서지고 갈라져서 고운 가루가 되어야합니다. 여자가 가루 서말 속에 누룩을 넣었다는 것은 교회가 말씀을 받아 온전히 회개하여 새로운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새로운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는 곳이 곧 천국임을 주님께서 증언하고 계십니다.
성도여러분!
주님께서는 교회와 종들을 통하여 말씀하시고 교훈 하십니다. 사람은 교훈을 받는 대로 변화되는 것임을 알아야합니다. 누룩은 가루에 비해서 적고 작은 것이지만 가루 속에 들어가기만 하면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변화가 일어나기를 간절히 사모해야합니다. 기도해야합니다. 노력해야합니다. 두 주먹을 불끈 쥐기보다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자가 더 강하다. 주먹은 상대방을 상처 주고 자신도 아픔을 겪지만 기도는 모든 사람을 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천국은 하나님의 말씀과 교훈을 통하여 변화의 운동이 일어나는 곳입니다. 어둠을 빛으로 변화시킵니다. 절망을 희망으로 변화시킵니다. 죄인을 의인으로 변화시킵니다. 소극적인 사람을 적극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변화시킵니다. 죽음을 생명으로 변화시킵니다. 변화가 일어나되 30배, 60배, 100배로 변화와 확장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할렐루야”
땅의 사람이 하늘의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지옥에 갈 자가 천국의 주인공이 되어 생명과 신분이 바뀌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말씀으로 부서져야합니다. 진리의 맷돌에 곱게 갈려서 고운 가루 서말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과 교훈이 내 안에 들어오기만 하면 믿음만이 역사하는 인격, 그리고 소망을 따라 인내하는 삶, 그리고 사랑의 겸손과 수고로 빚어진 천국백성이 되어 충성과 헌신과 온유와 전도의 열매가 맺어지는 천국백성의 삶이 이루어진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놀라운 천국의 역사가 우리 모두의 가정과 직장과 사업 위에 그리고 이 나라 이 민족 위에 은혜와 축복으로 넘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