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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들이 비상고등군법회의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장면. 심판관(재판관)은 현역 장성이며, 당시 재판장은 이세호 육군대장(가운데). 오른편 가운데 줄, 왼편을 향해 서 있는 사람은 한승헌 변호인(전 감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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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소위 ‘인혁당 재건위 사건’과 ‘민청학련 사건’ 40주년입니다. 박정희 정권의 대표적인 용공조작사건으로 불리는 두 사건으로 8명의 혁신계 인사들이 대법원 판결(75.4.8) 18시간만인 이튿날 새벽 서대문형무소 사형장에서 억울하게 숨졌습니다. 8인에 대한 사형이 집행되던 날,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둔 국제사법자협회에서는 사형이 최종 확정된 4월 8일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규정하였습니다.
진달래꽃 붉게 피는 4월은 이승만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4월 혁명’의 달이자, 박정희 독재정권에 맞서던 혁신세력들이 ‘인혁당 사건’으로 몰려 떼죽음을 당한 비극의 달이기도 합니다. 8인의 희생자 유가족들은 한 세대가 지나도록 빨갱이 가족으로 몰려 숨 한번 제대로 쉬지 못했습니다. 2007년 법원의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으면서 명예는 회복됐지만 그 상처는 여태 아물지 않고 있습니다.
‘인혁당 사형수’ 8명 가운데 막내인 여정남은 소위 ‘민청학련 사건’과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연결고리로 지목돼 불과 서른 한 살의 나이로 사형대에 섰습니다. 명문 경북고를 나와 경북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하여 총학생회장을 지낸 여정남. 그는 당시 대구-경북지역 학생운동의 구심점이었으며, 서울과 대구를 오가며 대학가 유신독재 반대 투쟁의 선봉장 역할을 한 인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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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정남 |
여정남(呂正男).
살아 있다면 올해 71세.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는 이름처럼 ‘바르게 살다간 남자’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해방 1년 전인 1944년 대구에서 태어난 그는 경북지역의 명문 경북중·고를 졸업한 후 1962년 경북대 정외과에 진학했습니다. 중류가정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집안형편이 그리 어렵지는 않았지만 고교 시절부터 여름방학을 이용해 막노동판을 찾았습니다. 돈벌이보다는 어려운 이웃들의 사정을 몸으로 느껴보고자 함이었습니다.
그가 세상과 처음 맞닥뜨린 것은 고교 2학년 시절인 1960년이었습니다. 당시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에 항의해 일어난 ‘마산 3.15의거’와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대구 2.28 학생의거’에 참여한 것이 계기가 됐습니다. 그는 집에다가는 산에 토끼 잡으러 간다고 말하고는 대구고, 대구상고 학생들과 함께 학생시위에 참가해 이승만 독재정권 타도에 나섰습니다. 불의한 시대가 모범학생을 투쟁가로 이끈 셈입니다.
대학 3학년 때인 1964년, 박정희 정권이 굴욕적인 한일 국교정상화를 추진하자 당시 대학가에서는 한일회담 반대 투쟁이 이어졌습니다. 그는 경북대에서 이 투쟁을 선두에서 주도하였는데 이 일로 세 차례 제적과 복학을 되풀이하다가 결국 이듬해 6월 군에 입대했습니다. 1969년 복학한 그는 경북대 비공개 서클인 ‘정진회(正進會)’ 가입을 시작으로 학생운동을 재개했습니다.
당시 총학생회를 중심으로 전태일 추도식 투쟁, 등록금인상 반대 투쟁, 교련반대 투쟁 등을 주도하던 그는 1971년 4월 경북대에서 전국대학생 서클대항 학술토론회 개최를 계기로 학생운동의 전국화를 추진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날 토론회에서 발표된 ‘반독재국구 선언문’에서 월남전 파병을 ‘용병’이라고 표현한 것이 화근이 돼 이른바 ‘정진회 필화사건’으로 구속됐는데, 이것이 그로서는 첫 감옥살이였습니다.
1972년은 박정희 정권, 아니 한국 현대사에서 한 획을 긋는 해이기도 합니다. 그해 10월 17일 박정희는 초헌법적인 ‘유신헌법’ 공포와 계엄령 선포를 통해 영구집권의 길을 열었습니다. 그러자 야당과 재야, 대학가에서 유신헌법 반대투쟁이 이어졌으나 계엄령 때문에 활동에 제약이 많았습니다. 1973년 12월, 서울로 올라간 그는 이철, 유인태 등을 만나 전국 대학들의 반독재 연대투쟁을 논의하였습니다.
앞서 1973년 11월 3일, 경북대의 유신반대 투쟁은 2000여명이 참가해 공안당국을 긴장시켰는데 그는 이날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구속됐습니다. 이듬해 1월 8일 박정희 정권은 유신반대 세력을 탄압하기 위해 ‘긴급조치 1호’를 발표하자 그는 다시 서울대, 경북대, 전남대와 연계투쟁을 벌이기도 계획하였습니다. 4월 3일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명의의 유인물 배포와 함께 서울시내 각 대학서 반유신 시위가 전개됐는데 이것이 바로 소위 ‘민청학련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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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정남의 ‘상고이유서’ |
공안당국은 ‘민청학련 사건’의 배후로 1964년 인혁당의 후신 격이라는 ‘인혁당 재건위’를 지목됐습니다. 물론 이 모두는 중앙정보부가 조작한 사건이며, 50여 일간의 수사과정에서는 그는 4~5차례 혹독한 고문을 당했습니다. 당시는 계엄령 하여서 민간인 신분임에도 그는 군사재판에 회부돼 재판을 받았는데, 1심, 2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1975년 4월 8일 대법원은 사형을 최종 확정했고, 그는 이튿날 오전 다른 7명과 함께 교수형으로 최후를 맞았습니다.
일설에 따르면, 그는 모 대학 총장의 추천으로 박정희 대통령의 맏사윗감, 즉 박근혜 대통령의 신랑감으로 지목된 적도 있습니다. 실지로 청와대에서 비밀리에 자격여부를 심사한 적도 있다고 합니다.
180cm의 키에 기골이 장대한 호남형 외모에다 명석한 두뇌, 출중한 리더십 등으로 그는 주변의 기대를 한 몸에 모은 청년 지도자였습니다. 경북대 정외과 후배(67학번)이자 그와 함께 반독재 투쟁을 벌이다 징역15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른 정화영(66)은 그를 이렇게 추억했습니다.
“그는 경북대 투쟁의 선봉이자 대부였다. 후리후리한 키, 빛나는 부리부리한 눈, 활기찬 발걸음, 힘 있는 목소리, 불굴의 열정, 그가 가는 곳엔 늘 후배들이 함께 했다. 투쟁이 벌어지면 끊임없이 돌진해나가는, 그리고 차곡차곡 챙겨가는 투쟁의 선봉장이었다… 운동자금이 모자라면 자기 집 절에 있는 초를 내다 팔아서 보태주곤 했다. 내 인생에서 여정남은 절대 잊을 수 없다. 나는 여정남이 그립다.”
(지난 2~3월 두 달간, 밤잠을 설쳐가며 ‘민청학련 사건’과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 수사/재판 자료, 관련 기록 등을 점검했습니다. 이제 4월부터는 생존한 두 사건 관련자에 대한 인터뷰를 시작하여 5월에는 집필을 마칠 예정입니다. 소정의 기한 내에 집필을 완료할 수 있도록 성원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