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포동 콜롬보 최 건 차
칼바람이 부는 한겨울, 검은색 중절모에 진회색 코트를 받쳐입고 집을 나선다. 거울에 비추어지는 노쇠해진 모습 저편으로 바바리코트를 걸치고 부산 시내와 특히 남포동을 의기차게 활보했던 모습이 살포시 그려진다. 십여 년간의 군 생활을 마치고 30대 초반 사회생활을 막 시작했을 때였다. 사복 차림으로 취업한 회사에 첫 출근을 하려는데, 군복에 길이 들여진 몸에 양복이 겉도는 듯 어색한 느낌이다.
사관士官 시절 정복에 외투를 걸치고 다니는 내 모습을 멋있다고들 했다. 정모에 은빛 다이아몬드가 견장에 달린 외투 차림이 잘 어울렸던 것 같다. 체격보다 외모가 눈길을 끌듯이 좋은 양복이라도 걸쳐 입은 코트가 더 돋보이는 법이다. 민간 복장에도 겉에 외투를 입었으면 하는 생각에 서울 명동에 버금가는 부산 남포동으로 달려갔다. 영도에서 살았던 중학생 시절부터 안마당처럼 드나들던 곳이라 이곳저곳을 뒤집고 살펴보다가 색깔이 마음에 든 카키색 바바리코트를 사 입었다.
봄가을에는 회색 바지에 가지색 콤비를 자주 입었고, 겨울에는 노상 바바리코트 차림이었다. 바바리코트가 몸에 익숙해질 무렵부터 <남포동 신사>라는 별명이 생겼었다. 그 시절 남포동에서는 정의와 의리로 주먹을 제대로 쓰는 사나이를 의미하는 대명사여서 나의 격에 맞다 싶었다. 때마침 미국의 수사물 시리즈 <형사 콜롬보>가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었다. 콜롬보 역으로 나온 피터포크의 바바리코트 차림과 그의 행동이 나와 비슷하다고 해서 <남포동 콜롬보>라는 호칭으로 바뀌어지게 되었다. 영화에서의 콜롬보는 난해한 미제 사건을 잘 풀어내는 해결사였다. 나 역시 현역에 있을 때부터 부대에서나 주변에서 발생한 웬만한 사건은 처벌하지 않는 방법으로 수습하는데 일가견이 있었고, 전역 후에도 한동안 그런 해결사로 통했다.
베트남 전선에 참전했을 때였다. 미8군 카투사 경력이 붙어다녀 우리 육군에 필요한 선박중대를 창설할 준비를 해오라는 국방부 명령을 받았다. 캄란에 있는 미 육군의 전투선박부대에 파견되어, 베트콩들과 접전을 벌이면서 수륙양용 선박의 조타 기술과 부대 운영방법을 실전으로 수료하고 귀국했다. 1970년 8월 인천항으로 달려가, 철수를 준비하는 미군 당국자들로부터 넘겨받을 선박들과 제반 물품을 꼼꼼히 인수하여 부산 항만사에서 육군 선박중대를 창설해냈다. 이는 내 생애에 우리 육군을 위한 기념비적인 업적으로 콜롬보의 기지를 백분 발휘한 결과였다.
나에게 주어진 해결사의 지혜와 능력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은총이었다. 이에 좀 더 나은 신앙생활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싶어, 아이들 셋이 대연동에서 태어나 유아세례를 받은 ‘대연교회’를 생각하면서 전역을 결심하게 되었다. 그 무렵 무장간첩이 자주 출몰하고 육영수 여사가 시해를 당한 시점이라 박정희 대통령께서 예비군에 관심이 컸다. 지역은 물론 기업들도 자체로 예비군을 편성 운영하면서 훈련사항을 수시로 검열받고 불량한 경우에는 회사경영에도 영향을 끼쳤다.
1970년대 초반 수출 100억불을 달성하게 될 때, 합판 수출이 큰 몫을 했다. 해운대 초입 수영에서 합판을 제조하여 수출을 크게 하는 태창목재가 직장예비군 운영에 어려움을 겪는 중이었다. 때마침 항만사에서 동원예비군 훈련을 잘 시킨다는 내가 전역한다는 것을 전해 들은 군 선배의 주선으로, 예비군 중대장직을 맡아달라는 청이 들어와 받아드리게 되었다. 태창목재는 전국에서 두 번째로 큰 합판제조회사로 수출이 잘되어 경영은 일취월장인데, 직장예비군 운영은 그렇지 못했다.
일단 예비군 대상자는 보직과 직위에 예외를 두지 않고 훈련 시 복장과 장발을 단속하기 시작했다. 간부들의 우려와 수군댐에도 개의치 않고 언제든 사표를 낼 각오로 정신교육과 훈련을 철저히 하면서 필요한 장비와 교육장 시설을 보강했다. 그렇게 한 일년 후, 만년 불량부대의 딱지를 떼고 더 나가 최우수 직장부대가 되었다. 나는 부산 대표 겸 대통령상 수상자로 선정되어 서종철 국방부 장관을 뵙고 청와대에 들어가 박정희 대통령을 알현했다. 대통령 표창의 기장과 대통령 문장이 새겨진 손목시계 그리고 금방 발행된 1만원권 지폐로 금일봉을 받고, 박 대통령과 마주 앉았다. 박 대통령께서 차를 마시라면서 ‘임자 베트남전에 참전했지’라며 국방안보와 예비군 훈련에 관해 물으셔서 내 소견을 말씀드렸더니 고개를 끄덕이셨다.
박 대통령과 대담 후 예비군 창설 7주년을 기념하는 연사로 지명받았다. KBS 텔레비전 생방송을 20분 동안 하게 되었고 결과가 대박이었다. 우리 가족과 친지들은 물론 태창목재는 예비군 자체 훈련 회수와 동원 인력을 어느 정도 줄여서 할 수 있게 되었다. 회사는 제2공장을 증설하고 경영이 최고조에 달해 내게도 큰 혜택을 주었다. 국경일 행사 때면 라디오와 TV 방송국의 초청을 받고 우리나라는 국방과 안보태세가 잘되어야 경제가 더 발전할 수 있다라는 논조를 소신껏 전했다.
헐리우드 피터포크는 말년에 치매로 고생하다가 83세에 아쉽게 세상을 떠났다. 나는 <남포동 콜롬보>로 지내며 잘나가던 직장을 접고 상경, 40대에 목사가 되었다. 북수원 ‘샘내마을’에서 전원목회를 하는 중에 경기노회장과 수원 중부서 경목위원장을 역임하고 칠순에 은퇴하고서 지금은 기도하는 등반가로 활동한다. 2025.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