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19-23)
시리아의 라오디케아(Laodicea)의 이냐시오(Ignatius)가
1968년 스웨덴 웁살라(Uppsala)에서 열린
세계교회협의회(WCC; the World Council of Churches, 1948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조직되었으며
세계 110개국의 349개 개신교회 교단과 정교회, 성공회가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의 세 번째 모임에서 말했습니다.
“성령을 받지 못하면, 하느님은 멀리 계시게 되고,
그리스도는 단지 역사적 인물이 되고, 복음은 죽은 문서에 지나지 않으며,
교회는 한 조직에 지나지 않으며, 권위로만 지배하게 되고,
선교는 선전에 불과하게 되고, 전례는 향수(鄕愁)에 지나지 않게 되고,
그리스도인들이 하는 일들은 노예의 노동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어 현존해 계시게 되고,
복음은 살아 힘차게 움직이게 되고, 교회는 삼위일체 생활의 공동체가 되며,
권위는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는 데 쓰이게 되며, 선교는 결실을 맺게 되고,
전례를 기억하고 기다리게 되며, 그리스도인들의 사역(使役)은 신성하게 됩니다.”
성령은 교회의 영혼입니다.
성령강림 대축일은 교회를 되돌아 보고 그 영혼을 발견하기 위하여 매년 벌이는 축제입니다.
교회도 우리들처럼 성령을 떠나려고 하는 유혹을 많이 받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내면을 잊어버리고 일에만 전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자신의 심장이나 간을 지나치게 걱정을 하면 아무 일도 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건강한 사람은 일에만 전념합니다.
성령은 교회의 영혼으로, 눈에 보이지 않게 묵묵히 일한다는 의미도 갖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하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마태 7,21)
우리들은 말씀을 따른다고는 말하지만
하늘나라에 들어가려면 성령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만이 하늘나라에 들어 갈 수 있습니다.
성령을 받으면 깨어 있게 됩니다. 그리고 항상 기쁘고 평화를 느낍니다.
성령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동양의 한 주교가 그 많은 문서들 중에
성령에 관한 언급이 거의 없다고 불만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성령에 관하여 말하는 것은
성령에 따라 사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우리들이 어떤 영에 의하여 이끌리고 있는가를 알기 위하여
우리 내면을 들여다 보아야 합니다.
건강에 대하여 걱정을 하지 않는다면
당연히 자신이 지금 겪고 있는 고난에 대하여 궁금해 할 것입니다.
오늘 성령강림 대축일을 맞아 이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외에도 많은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전통적으로 성령의 이미지로 불, 바람, 물, 비둘기를 말해왔습니다.
왜 이와 같이 이상한 이미지를 내세웠을까요?
비둘기를 제외하고 이들에는 경계가 없고 끝을 알 수가 없습니다.
성령의 역사(役事)를 우리들이 알 수 있는 몇 가지 일에만
국한시키지 말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 비둘기시여! 불꽃이시여! 물이시여! 바람이시여! 구름이시여!
우리를 하느님께 데려가시는 사랑이시여!
성령은 우리 안에 살아 계시지만 우리 안에만 머물러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은 하느님이십니다. 미국의 시인이자 가르멜 수녀였던
제시카 파워스(Jesica Powers)가 말한 대로
성령은 우리 안에서 사라지시지 않고 우리를 하느님께로 인도하십니다.
영혼은 확장되지 수축되지는 않습니다.
막대기와 돌처럼 영혼이 없는 것은 스스로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동물은 말할 것도 없이 식물도 영양을 섭취하기 위하여
또 종족을 번식시키기 위하여 움직입니다.
사람은 더욱더 폭넓게 움직이고 더 깊은 곳을 헤아려 봅니다.
더구나 성령을 입으면 이러한 능력이 무한히 커져서 하느님의 깊은 비밀까지도 알게 됩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했습니다.
“‘어떠한 눈도 본 적이 없고 어떠한 귀도 들은 적이 없으며
사람의 마음에도 떠오른 적이 없는 것들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마련해 두셨다.’
하느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그것들을 바로 우리에게 계시해 주셨습니다.
성령께서는 모든 것을, 그리고 하느님의 깊은 비밀까지도 통찰하십니다.”(1코린 2,9-10)
제시카 파워스는 침묵해야만 성령을 모실 수 있다고 노래했습니다.
사냥꾼이 땅 위에 플라스틱이나 나무로 된 가짜 새를 놓아두고
날아가는 새를 유인하듯 하느님의 성령을 침묵 중에 모셔올 수 있는 것입니다.
침묵이 미끼인 셈입니다.
<Decoys>
Make decoys he told me,
set them on the blue;
then observe the wild ducks
flying down to you.
Wild ducks do not charm me
save for beauty’s sake.
But decoys of the spirit
these I strain to make.
The decoy of silence,
hope’s unuttered sigh,
that the Ultimate Silence
drift down from the sky.
The chaste dovelike virtue,
whiteness to allure
One Who is a Spirit,
infinitely pure,
Love’s decoy, the fire bird
that, when God shall se
the Winged Flame of heaven
may come down to me.
Let him have his wild ducks,
green and blue and brown.
My decoys are fashioned
to bring heaven dow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