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증언-탐진강 상류 최 건 차
내가 다섯 살 때인 1945년 우리 집은 일본에서 해방을 맞아 그 해 12월 귀국했다. 일본에서 가까운 부산에 정착하려는 중에 일단 전라남도 장흥의 외가를 찾아갔다. 이 때 해산이 임박해진 어머니가 눕게 되어 금방 떠나지 못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유치면에 비자나무 숲이 우거진 주변과 천년의 고찰을 구경하고 나서 몸져 누운 어머니를 위해 금성리 앞 길갓집을 사 머물면서 면 호적 서기를 맡으셨다.
유치면有治面은 주변의 면들보다 갑절은 더 넓은 곳이었다. 사방이 4개 군 6개 면(장흥군의 장평면, 장동면, 부산면과 영암군 금정면, 강진군 옴천면과 그리고 화순군 도화면)에 접하여 산으로 빙 둘러싸여 있는 탐진강 상류의 넓은 분지였다. 풍광이 수려하고 깊은 골짜기가 많아 온갖 조수鳥獸와 산나물이며 약초가 많은 천혜의 고장이었다. 더욱이 인도와 중국에만 있다는 보림寶林이었던 선종禪宗이 신라 때 처음 들어와 세워진 곳이다. 지금도 그곳 유치면 봉덕리 가지산 아래에는 세계 3대 보림이라는 천년이 넘는 보림사가 있어 인근 불자들은 물론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들고 있다.
탐진강은 영암군 금정면 궁성산 범바위골에서 발원하는데, 어머니는 강 상류의 물가 동네인 용문리에서 태어나셨다. 유치면 암천리와 조양리를 거치면서 면 전역을 적시고 이웃 부산면과 장흥 읍내를 거쳐 강진만으로 빠진다. 외갓집은 용문리 일대에서 농지를 많이 소유하고 있었는데, 동학도들이 들이닥쳐 장흥읍에서 가까운 부산면 구룡리로 옮겨 살게 되었다고 한다. 해방 후에는 유치면 일대가 지리산에 버금가는 빨치산들의 활동무대였고, 남한의 모스크바로 불릴 정도였다고 한다. 우리는 일본에서 금방 나왔기에 그런 상황을 잘 모르고 있었지만, 그곳에서는 해방을 맞으면서 밤손님(초기의 빨치산)들이 은밀하게 공산주의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1946년 이른 봄의 밤이었다. 우리 집에서 가까운 금성리에 한 무리의 밤손님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동네 구장을 마당으로 끌어내어 죽창으로 찔러 죽이고, 왜정 때부터 유치면 지서 경찰관으로 권세를 부리던 그의 큰아들은 도망을 치다가 붙잡혀 무참하게 살해당했다. 이 때부터 그들은 밤마다 여러 마을에 나타나 비번이 되어 집에 잠깐 들린 경찰관을 붙잡아 죽이고, 우익계 인사들과 유지들을 납치 상해를 해대고 있었다. 장흥재판소에 계셨던 큰외숙의 사촌이었던 분이 유치초등학교 교감이었는데, 밤손님들에게 강제로 납치 되어 간 바람에 외갓집 분위기가 심각해졌다.
우리 집은 금성리 앞을 떠나 면소재지에서 조금 떨어진 냇가 마을‘강동’에서 살았다. 외가에서 준 논밭도 있었고 아버지의 면서기 봉급으로 당분간은 무탈하게 생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념투쟁을 벌이고 있는 밤손님들에게는 큰 변수가 생겼다. 여수 14연대가 반란군이 되어 국군에 쫓기다 그 일부가 탐진강 상류로 숨어든 것이다. 그들은 상당한 병력에 최신 미제 M1소총과 기관총이며 박격포 등으로 무장을 했기에 밤손님들은 그들에게 흡수되어 반란군이 판치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1949년 초여름에 반란군들에게 경찰관이 또 한 명 살해됐다. 장례를 치루려고 유치면장, 지서장과 경찰관들이 4/3톤 차량에 탑승하여 장지로 향했다. 사망한 경찰관의 장지가 영암군 금정면이어서 유치면 조양리에서‘ 덤재’를 넘어가다가 백주에 반란군의 기습을 받아 전원이 살해되고, 차량과 함께 참혹하게 불태워진 사고가 발생했다. 이에 광주에 주둔하고 있던 국군 제20연대의 2개 중대가 급히 내려와 반란군 소탕 작전을 한 참 펼치는 중에 북한의 불법 남침으로 6·25전쟁이 발발했다.
이 무렵 대한민국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만들려고 했던 김일성의 남침 계획은 미군의 낙동강 방어와 인천 상륙전으로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한편 낙동강에서 후퇴하던 인민군들의 일부가 지리산과 순창 회문산, 탐진강 상류 암천리 등으로 유입되고 있었다. 그들이 기존 반란군과 합세하면서 병력과 무기가 더욱 막강해졌다. 이 때를 기점으로 지리산과 남한 일대에서 활동하는 반란군들을 일컬어 ‘빨치산’이라고 했다. 유치면 일대는 장흥군 기동대가 전위부대였으나 병력과 무기가 빈약했다. 전라남도 기동대가 배후에 있었고, 노령산부대와 송악산부대는 전라남도 빨치산 사령부가 있는 유치면 암천리를 경계하는 그들의 방패막이었다.
어느 날 낙동강 전선에서 싸웠던 인민군 최정예부대라는 00부대를 맞이할 준비를 하게 되었다. 그들은 1개 대대 정도의 규모로 1950년 11월 하순의 어느 날, 우리 마을에 나타났다. 저녁 무렵, 유명한 부대로 알려진 인민군들이 말을 탄 그들의 사단장을 호위하면서 마을 앞 빈 논에 집결하였다. 북으로 돌아가려는데 식량과 보급품이 떨어져 당장에 필요한 것을 충당하려는 것이었다. 어떻게 연락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십여 일 전부터 우리 마을과 인근의 주민들에게 어른들이 나들이 할 때에 신을 수 있는 짚신을 가구당 열 켤레씩 삼아놓으라는 지시가 있었다.
그리하여 00부대가 도착하기 한나절 전부터 우리 집에 진을 치고 있던 장흥군 당위원장과 그의 부하들이 동네 부녀자들을 총동원하여 식사 준비를 서둘렀다. 소 한 마리를 잡아 국을 끓이고 삼백여 명이 먹을 밥이 준비되어 있는 중에 신기루처럼 나타난 인민군들이 볕짚을 깐 빈 논바닥에 줄을 지어 앉아 쇠고기국에 밥을 먹었다. 주먹밥은 배낭에 넣고 준비해 낸 짚신으로 신발을 갈아 신고, 두세 켤레씩은 배낭에 달아매고 사단장이 말을 타자 어둠이 짙어가는 암천리 쪽으로 사라졌다. 후일 그들이 팔로군 출신의 인민군 6사단 ‘방호산부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 일부는 지리산으로 들어갔고 방호산과 나머지는 계속 올라가 38선을 넘어 북한으로 갔다고 했다. 그 때만 해도 탐진강 상류는 빨치산 세가 막강한 그들의 해방구였다.
해가 바뀌어 경찰로는 경계가 어려워 군인들이 빨치산 토벌대로 투입되었다. 주야로 판이 바뀌는 통에 지역 주민들의 피해는 낮과 밤으로 운명이 갈리었다. 낮에는 군경토벌대가 왔다 가고, 밤에는 빨치산이 지배하는 판국이었다. 주민들은 군경에게는 빨치산에 협조했다고 당하고, 빨치산들은 군경에 동조했다고 반동으로 몰아 죽이는 바람에 ‘밤새 별고 없으셨는지요’라는 위험한 삶이었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 6·25가 발발했고, 나는 빨치산 소년단이 되었다. 1950년 가을부터는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남한 일대의 빨치산을 소탕하는 작전이 전개되었다. 남원에는 ‘지리산 남부군 빨치산 토벌 작전사령부’가 설치되어 군경이 합동으로 소탕 작전에 돌입했다. 빨치산의 성지聖地로 알려진 지리산의 전초기지였던 순창의 회문산 전북도당 사령부가 토벌군에 함락되었다. 그곳에서 탈출한 빨치산들과 그들을 따르던 주민들 일부가 탐진강 상류까지 쫓겨왔다. 나는 미리 숨어있으면서 포위망에 든 그들과 따라온 양민들이 군경토벌대의 총격에 당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 당시 지리산 다음으로 빨치산들의 활동이 왕성했던 곳이 ‘탐진강 상류였다. 유치면 암천리에 막강하게 진을 치고 있던 전라남도 빨치산 사령부가 군경의 엄청난 병력과 총 포탄 세례를 받고 처참하게 괴멸되어 버렸다. 그 때 이후로 빨치산들이 공식적으로 소탕되었다는 판단에 남은 잔당들을 ‘공비共匪’라며 잔여 소탕 작전을 계속 펼쳤다. 우리 동네에는 인민군 포로 전향자들로 조직된 공비 소탕을 위한 특공대가 들어와 있었다. 그들 중에는 평양에서 중학교 선생이던 이도 있고, 다양한 경력자들이 있었는데, 우리 집에 두 사람이 배당되어 숙식을 같이하고 있었다.
1952년 봄이었다. 공비들이 식량을 구하러 이웃 마을에 나타났다는 정보가 입수됐다, 이 때는 군인들이 다 떠나고 경찰들에게 공비를 소탕하라는 상부의 명령이 내려져서 경찰들과 특공대가 매복에 들어갔다.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식량을 구하려고 마을로 접근하고 있는 공비 세 명을 발견, 즉시 집중사격으로 한 명을 현장에서 사살하고, 두 명은 놓쳐버렸다는 것이다.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아침에 경찰과 특공대원들이 짚으로 만든 들것에 키가 커 뵈는 공비의 시체를 담아다가 하필이면 우리 동네 앞 길가에 놔두었다. 나는 학교에 가는 길에 얼핏 보고 갔는데, 이웃 부산면에서 가족들이 찾아와 시신을 수습해 가면서 오열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아버지가 부산에 가셨던 1952년 초여름, 어머니와 우리 5남매는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고 있는 밤이었다. 누가 문을 밀치고 들어와 누워있는 우리를 깨웠다. 낡은 복장의 두 사람이‘ 우리는 빨치산’이라며 먹을 것을 내놓으라는 것이다. 어머니가 ‘ 우리도 양식이 없어 굶고 있어요. 뒤져보고 가져가시오’라는 말에 두리번거리며 찾아보다가 아무것도 챙기지 못하고 가버렸다. 그것이 내가 봐왔던 ‘밤손님-반란군-빨치산-공비-잔비殘匪’로 끝나버린 공산잔당들의 마지막 모습이었던 것 같다.
우리는 가진 것들을 다 잃고 목숨만 겨우 보전한 채 그곳을 떠났다. 애초에 정착하려 했던 부산으로 가 북에서 내려온 피난민들과 같이 영도에서 살았다. 2024. 8.
첫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