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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유은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노희태
성경봉독: 욥기 38장 1-15절 ; 디모데전서 1장 12-17절
설교본문: 이사야 45장 1-10절; 18-19절
설교제목: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는 다른 신이 없느니라.”
설교대지
1. 배경: 이방인 고레스에게 기름을 부으시는 하나님
2. 백성들의 반응: 하나님 당신이 무엇이관데?
3. 하나님의 대답: 나는 빛과 어두움, 평안과 환난을 창조하는 자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날 때부터 ‘자기 한계 극복의 욕망’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죠. 갓난아기는 태어난 초기에는 말도 못하고 걷지도 못하지만, 옹알이를 하고 걸음마를 떼면서 조금씩 말과 걷기를 익혀갑니다. 굳이 부모가 가르쳐주려고 하지 않더라도 아기들은 스스로 말하려고 하고 걷고자 노력하기 마련입니다. 이처럼 사람은 누구든지 태어날 때부터 ‘자기 한계 극복의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전거를 탈 줄 모르는 아이는 자전거를 타고 싶다는 욕망을 가지고 자전거 페달을 밟습니다. 운전을 못하는 어른은 운전면허를 따려고 운전면허 학원을 들락날락합니다. 해외에 가보지 못한 사람들은 언어와 문화가 아무리 달라도 한번쯤에 다른 나라에 가보려고 합니다. ‘인생은 배움의 연속이다’라고 하는 말이 있듯이, 공부하는 행위 자체도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하지만 인류 역사 전체를 통틀어서 인간은 ‘인간이기에’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한계들에 직면해 왔습니다. 가령 인간은 새처럼 하늘을 날지 못합니다. 물고기처럼 헤엄을 잘 치지 못합니다. 또한 인간은 박쥐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초음파를 발산하여 물체를 포착할 수 없습니다. 육지에서 가장 빠른 치타처럼 시속 112km의 속력으로 달릴 수도 없습니다. 아무리 빨라봐야 우사인 볼트처럼 시속 44.7km를 달리는 게 전부입니다. 이처럼 인간에게는 다른 생물체들에게는 없는 극복할 수 없는 한계들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인류 역사 전체는 오히려 이러한 극복할 수 없는 한계들을 끝내 극복해 온 역사라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하늘을 날지 못하는 인간은 비행기를 만들어 하늘을 날 수 있게 되었고, 바다 속에서 살 수 없는 인간은 배나 잠수함을 만들어 바다를 이리저리 드나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과학 기술의 발전을 통해 박쥐가 발산하는 초음파 보다 더욱 많은 빛의 기능을 활용할 수 있게 되었고, 시속 350km를 달리는 기차를 타고 먼 지역을 쉽게 다닐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인류 역사 전체는 인간이 ‘인간이기에’ 결단코 극복할 수 없었던 한계들을 극복해 온 역사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이런 사실 때문에 인류는 지구상의 어떤 생명체들보다도 인류에 대한 자부심이 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이런 자기 한계 극복의 욕망은 이제 도저히 끝을 알 수 없는 경지에까지 이르려고 합니다. 고대로부터 신들의 영역에 해당한다고 보았던 ‘질병이 없는 삶’, ‘영원히 죽지 않고 사는 삶’, ‘미래를 예측하고 통제할 수 있는 능력’ 등을 획득하려 하고 있습니다. 특히 현대 과학 문명은 이를 이미 마치 거머쥔 듯이 여기고 있습니다. 가령 곧 있으면 힘들게 공부를 하지 않아도 알약 하나만 먹으면 두뇌를 초인적으로 각성시켜서 모두가 초인이 되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말합니다.
전 세계 사람들에게 각광 받고 있는 유발 하라리의 『호모 데우스』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여기서 ‘호모 데우스’(Homo Deus)라는 말은 번역하면 ‘신이 된 인간’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말이 함의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인류가 시작된 이래로 인간은 소위 ‘신이 되고자 하는 욕망’으로 점철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원초로부터 인간은 자신이 신이 되고자 하는 욕망 속에서 인류의 문명을 지금까지 이룩해 왔다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창세기 3:5에서 뱀이 여자를 유혹할 때 했던 속삭임을 연상시킵니다.
“너희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
이처럼 인류는 지금까지 자신이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욕망’ 가운데서 살아오고 있습니다. 인간은 언젠가는 모든 질병이 없어지고, 나아가 죽음도 없어지며, 미래에 대한 모든 두려움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이러한 욕망이 얼마나 어리석고 무지한지를 일깨워줍니다. 바벨탑 사건에서도 보았듯이,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신이 되고자 하였던 인간 도시를 엄히 심판하셨습니다. 시편 2:4에서도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가진 ‘신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 얼마나 어리석고 무지한지를 말씀을 통하여 계속하여 일깨워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이 욕망을 이루기를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이 종말을 맞이하기까지 이 욕망은 계속될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바로 이러한 욕망으로 하나님께 항거하고 그분을 대적하였던 사람들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특별히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부름 받은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을 창조하시고, 자신들을 그분의 자녀로 부르신 하나님께 항거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을 멀리하고, 여호와 경외하기를 잊어버린 이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하여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는 다른 신이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혹여나 우리도 여호와의 살아계심을 잊고 살지는 않는지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길 바랍니다. 무엇보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다시금 여호와 경외함을 배워서 우리의 전 인생의 참 주인 되시는 삼위 하나님을 경배하게 되길 바랍니다.
1. 배경: 이방인 고레스에게 기름을 부으시는 하나님
먼저 이사야 45장 말씀의 전반적인 배경을 살펴봅시다.
이사야 45장에는 크게 세 파트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우선 여기서 말씀하고 계시는 화자를 생각해 봅시다.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화자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물론 직접적인 화자는 선지자 이사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이사야의 입을 통해서’ 당신의 말씀을 선포하고 계십니다. 이처럼 구약에서 선지자의 역할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의 도구로서 맡은 바 말씀을 백성들에게 가감없이 전해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본문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청중들은 누구일까요? 아마도 본문에서 가장 헷갈리는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일 것입니다. 본 장을 자세히 살펴보면 청중이 마치 한 사람만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 인물은 바로 1절에서 등장하는 고레스라는 인물입니다. 많은 분들이 알다시피 고레스라는 인물은 페르시아 제국의 제1대 왕입니다. 즉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라 이방인인 페르시아의 왕인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굉장히 뜬금없게도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청자처럼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사야 45장의 전후 문맥을 잘 살펴보면 실제로 이 말씀을 듣었던 청중은 고레스가 아니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사야 44:21을 보면 실제로 하나님을 말씀을 들었던 그 당시의 청중들이 등장합니다. 곧 “야곱아 이스라엘아”라고 불리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입니다. 사실 고레스는 이사야 44:28부터 등장해서 이후 쭉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청자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 본문의 말씀을 현장에서 들었던 청중은 그 당시에 살았던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성경 역사에 대해서 익숙한 분이라면 더욱 이 사실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기원전 약 700년경에 활동했던 선지자였습니다. 이때는 아직 남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기 전 히스기야 왕이 치리했던 시기입니다. 그런데 고레스는 약 160년 뒤인 536년경에 세워질 페르시아 제국의 제1대 왕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사야서가 기록될 당시만 해도 고레스는 아직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태어나지도 않은, 이름뿐인 가상의 인물에 불과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사야 45장의 말씀이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던 고레스를 1차 청중으로 두고 있다는 말은 어리석은 주장입니다. 오히려 이사야 전체와 동일하게 이 말씀도 역시 선지자 이사야가 활동했던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 곧 왕조시대의 구약 교회에게 전해졌던 말씀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제가 이토록 본문의 청중에 대해서 집착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청중은 선지자 이사야 당시, 기원전 약 700년경에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그럼 우리는 이제 이런 질문들을 해보아야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하필 이 시기에, 이 사람들에게, 이 말씀을 주셨을까? 왜 하나님께서 하필 160년 뒤에 등장할 고레스에 대해서 이때 이 사람들에게 말씀하셔야 했을까? 과연 이사야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또 그들은 말씀을 듣고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이런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서 먼저 우리는 선지자 이사야 당시에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이 어떠했는지, 그들은 어떤 상황 속에 살고 있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때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은 한마디로 말해서 창세기 19장에 나오는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의 삶’과도 같았습니다. 이사야 1:4, 10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찌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찌어다.(10절)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4절)”
이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멀리 떠나 마치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처럼 행악에 얼룩진 삶을 살았습니다. 길거리에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가 즐비했고, 불의하게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피비린내가 곳곳에 진동했습니다. 기근, 전쟁, 전염병이 끊임없이 일어났습니다. 부자들과 가난한 자들의 빈부격차는 날로 극심했고,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압제와 착취는 도를 넘어서고 있었습니다. 법정에서는 악이 도리어 칭송을 받았고, 의로운 사람들, 정의를 외치는 사람들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여호와를 예배하는 성전 예배는 장사꾼들의 상거래장이 되었고, 물질적 복을 약속하는 이방신들이 더욱 인기를 얻었습니다. 실로 그 당시 이스라엘 사회는 오늘날 현대의 세계 사회와 비견될 만큼 악과 무지가 득세하였고, 자본에 대한 인간의 욕망이 극에 달하였던 시기였습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이사야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케 하셨습니다. 이사야 1:2를 보면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이라는 ‘언약의 두 증인’을 세우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두 하나님의 법정에 고소하십니다. 흔히 이사야 1-39장은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법정 고소문’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바로 이런 이사야 1-39장에서 하나님께서는 그때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상을 낱낱이 고발하십니다. 그리고 만일 그들이 주님께로 돌아오지 않고, 그들이 계속하여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한다면, 반드시 그들 위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하나님의 심판 말씀을 들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도대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우리는 그 당시 백성들의 반응을 유추해 볼 수 있는 그들의 모습을 이사야 42:18-20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너희 귀머거리들아 들으라. 너희 소경들아 밝히 보라. 소경이 누구냐? 내 종이 아니냐? 누가 나의 보내는 나의 사자 같이 귀머거리겠느냐! 누가 나와 친한 자 같이 소경이겠느냐! 누가 여호와의 종 같이 소경이겠느냐! 네가 많은 것을 볼찌라도 유의치 아니하며 귀는 밝을찌라도 듣지 아니하는도다.”
이 말씀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귀머리거리들, 소경들로 불러지고 있습니다. 듣지 못하고 앞을 볼 수 없는 자들로 묘사된 것입니다. 이 모습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전하여졌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이를 듣지도 않으려 하고, 깨달으려 하지도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특히 19절을 보면 “소경이 누구냐? 내 종이 아니냐?”라는 매우 역설적인 말을 하십니다. 그리고 나의 사자, 나와 친한 자, 여호와의 종이 모두 귀머거리고 소경이 아니냐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태도를 비꼬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일컬어 ‘나는 하나님의 사자다, 하나님과 친구다, 여호와의 종이다’라고 운운했던 사람들입니다. 이처럼 이사야 당시 구약 백성들은 모두 자신의 신앙이 매우 우수하다고 착각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신은 언제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고, 언제든지 하나님과 친구처럼 대화할 수 있고, 언제든지 여호와의 종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착각 말이죠.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일컬어 귀머거리요 소경이라고 말씀하실 뿐이었습니다.
결국 선지자 이사야 당시 구약 백성들은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떠나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실 인간적으로 보자면 이들을 조금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매번 선지자라는 작자가 나타나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너희는 죄인이라. 너희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기분 좋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안 그대로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런 저주와 같은 말씀은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이라도 그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적으로 보자면 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싫어하는 데는 충분히 합당한 이유가 있어 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제 이사야 45장에서 이런 백성들의 불편한 심기를 더욱 불편케 하십니다. 오히려 이제 이전보다 더욱 본격적으로 이들의 불쾌감을 자극하시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이사야 45:1의 말씀은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대단히 심각한 적대감을 유발시키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한 왕을 세우겠다고 말씀하시는데, 이 왕에 대한 말씀을 들어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겁할 내용들이 많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이방인 고레스’를 당신의 ‘기름부음 받은 왕’으로 세우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두 가지로 불쾌감을 자아냈습니다. 첫째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반드시 자기 민족들만의 하나님이어야 했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유대인들에게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택함 받은 백성이라는 선민사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서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을 택하여 당신이 지명하여 부른 왕으로 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던 자존심(선민사상)을 제대로 타격하는 발언이었습니다. 둘째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기름부음 받은 자’는 구약의 왕, 제사장, 선지자에게 붙여진 이름이었습니다. 히브리어로 ‘메시아’, 헬라어로 ‘그리스도’라는 말을 가진 ‘기름부음 받은 자’는 오직 이스라엘의 구원자, 통치자, 중보자에게만 해당하는 이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서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인 고레스를 가리켜 “나의 기름 (부음) 받은 고레스”라고 칭하셨습니다. 이는 마치 다윗과 같은 왕, 모세와 같은 선지자, 아론과 같은 제사장으로 이방인 고레스가 세우시겠다는 말입니다. 이 발언은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충격적이고 역겨운 반응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말씀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결국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듣기 싫어하는 말씀만 골라 하셨습니다. 앞선 선지자의 예언을 통해서 심판에 대한 말씀을 하셨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이방인 중에서 백성들을 다스릴 왕을 세우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상 너희는 멸망한 이후의 이방인에 의해 지배를 받을 것이라는 말처럼 들릴 수 있었습니다.
극단적인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누군가가 대한민국은 일본의 침략을 받아 일본의 속국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이 일이 반드시 일어날 것이라고 하면 누가 믿겠습니까? 그런데 이 일이 정말 일어났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더하여 이제 일본의 수상이 우리나라의 대통령의 자리에 앉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상상만 해도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 들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유사한 상황을 지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셨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백성들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야말로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일어나서는 안 될 일들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물론 이사야 45:4 말씀에서 하나님께서는 이 일이 “나의 택한 이스라엘을 위한 일”이라고 말씀하셨어도, 백성들은 이 말씀을 기쁨으로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이 말씀을 하신 하나님, 자신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하나님을 향해 반기를 들었을 뿐입니다.
2. 백성들의 반응: 하나님 당신이 무엇이관데?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은 실로 뜨거웠습니다. 오늘날 sns에서 소신 발언을 하면 사람들이 벌떼처럼 몰려와서 악성댓글을 다는 것처럼, 백성들은 하나님께 득달같이 달려들었습니다. 그때 당시 백성들의 하나님을 향한 비난의 수위가 어떠했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본문이 있습니다. 이사야 45:9-10입니다.
“질그릇 조각 중 한 조각 같은 자가 자기를 지으신 자로 더불어 다툴찐대 화 있을찐저 진흙이 토기장이를 대하여 ‘너는 무엇을 만드느뇨’ 할 수 있겠으며, 너의 만든 것이 너를 가리켜 ‘그는 손이 없다’ 할 수 있겠느뇨. 아비에게 묻기를 ‘네가 무엇을 났느냐’ 어미에게 묻기를 ‘네가 무엇을 낳으려고 구로하느냐’하는 자에게 화 있을찐저‘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비유를 통해서 자신과 백성들과의 관계를 나타내십니다. 9절에서는 토기장이와 질그릇의 관계, 10절에서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과 백성들과의 관계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주목해 보아야 할 부분은 백성들이 하나님께 하고 있는 말입니다. 이것은 9, 10절에서 각각 두 문장씩 진술되고 있습니다. 개역 한글에서는 정확하게 백성들이 어떤 말투와 내용으로 말을 하고 있는지 그리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표준새번역에서는 보다 백성들의 말투와 내용을 실감나게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너는 무엇을 만드느뇨?” → “하나님 당신은 대체 무엇을 만들고 있습니까?”
“그는 손이 없다” → “그에게는 손이 있으나마나다!”
“네가 무엇을 났느냐?” → “나를 자식이라고 낳았습니까?”
“네가 무엇을 낳으려고 구로하느냐?” → “하나님 당신은 나를 낳으려고 무슨 해산의 고통을 받았다는 겁니까?
이렇게 들으면, 지금 백성들이 하나님께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더 실감할 수 있습니다. 백성들은 자신을 지은 하나님께 “당신은 대체 뭘 만들었느냐? 당신은 손이 있으나마나다”라고 그분을 비난했습니다. 이것은 실로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작품들을 부정하는 말과 같습니다. 창조세계가 하나님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죠. 사실상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창조주로서 자격이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의 생각으로 창조주라면 마땅히 자신이 지은 작품들에게 좋은 것만을 제공해 주어야지, ‘심판이 웬 말이냐’는 것입니다. 또한 백성들은 하나님께 “당신의 그 잘난 손으로 머든지 해보라”고 말하였습니다. 왜 자신을 창조주 하나님이라고 말을 하고서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왜 세상이 이토록 불공평하고 나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 당신은 그 잘난 능력으로 아무것도 행하지 못하느냐고 항거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10절에서는 백성들이 자녀로서 하나님께 해서는 안 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 백성들의 말을 여러분의 자녀들이 어느 날 말한다고 생각하고 들어 보십시오. “당신은 나를 당신의 자식이라고 낳았습니까? 왜 나를 낳았습니까? 당신이 낳았다고 하면서 왜 나를 이 모양 이 꼴로 낳았습니까? 당신이 나를 위해 무슨 해산의 고통을 받았다는 겁니까? 당신이 당한 고통에 배를 내가 겪고 있는 게 아닙니까? 그러니 그냥 이제 나를 내버려 두세요. 나는 내 방식대로 내 마음대로 살겠습니다.” 만일 여러분의 자녀가 이렇게 말한다면 여러분들의 마음은 어떨 것 같습니까? 당연히 억장이 무너지고, 마음은 산산조각 찢겨 나가는 것만 같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비난과 항거를 백성들로부터 받으셨습니다. 다른 이들도 아니고 자기 백성들이요, 자기 자녀들에게 이러한 비난과 항거를 받으셔야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창조주로서 자신이 지은 피조물에게 들을 수 있는 최대의 비난을 들으셨습니다. 또한 부모로서 자신이 낳은 자녀들에게 들을 수 있는 최대의 항거를 받으셔야 했습니다. 도저히 해서는 안 될 비난과 항거를 백성들은 하나님께 쏟아 부었고, 하나님께서는 이런 백성들의 비난과 항거를 들으면서까지 당신의 말씀을 이루시고자 끝까지 인내하셔야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실 이러한 백성들의 비난과 항거는 우리에게 결코 낮선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러한 비난과 항거를 하나님께 쏟아 붇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인생의 주인은 나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더 이상 누군가의 노예처럼 살지 맙시다, 더 이상 종교의 힘을 빌려 미련하게 살지 맙시다”라고 말하는 인문학 강사가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실로 ‘죽은 하나님’입니다. 실로 하나님은 있으나 마나 한 존재처럼 고대 문서들 속에서만 살아계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비난과 항거가 쏟아지는 현실 속에서도 잊지 않아야 할 중요한 한 가지 진리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백성들의 비난과 항거에 대하여서 진노를 발하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이사야 그 당시 시대에서는 그들의 비난과 항거에 대하여 침묵하셨습니다. 아니 오히려 지속적으로 그들의 비난과 항거를 받으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약 700년이 지난 뒤 한 사람이 죽음을 맞이하기까지 하나님께서는 백성들로부터 조롱을 받으셔야 했습니다. 곧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던 그 날이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의 비난과 항거를 계속 받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문에 나오는 백성들의 비난과 항거는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러 골고다 언덕을 오르던 그 날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하나님을 향해 쏟아졌던 백성들의 비난과 항거는 동일하게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도 쏟아졌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향한 비난과 항거는 동일한 이사야 말씀에서 이미 예언된 말씀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 고레스’는 본문 이후에 자연히 다른 인물로 대체됩니다. 고레스는 단지 이 인물을 예표하는 역할을 수행했다고 보아야합니다. 이사야 후반부에 등장하는 이 인물은 ‘여호와의 고난 받는 종’이라고 불리는 인물입니다. 이 인물은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받으셨던 비난과 항거를 모두 홀로 받으시는 인물로 등장합니다. 이사야 53:4-6입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여기서 ‘고난 받는 종’은 백성들의 모든 비난과 항거를 홀로 담당하셨습니다. 또한 이제 이 종은 하나님께 쏟아졌던 백성들의 모든 증오를 홀로 짊어지고서,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진노도 역시 홀로 담당하셨습니다. 마땅히 하나님께 항거했던 백성들에게 쏟아져야 할 하나님의 진노를 ‘고난 받는 종’이 홀로 담당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로 이런 ‘고난 받는 종’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못 박히심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든 비난과 항거를 홀로 담당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하나님을 향하여 쏟아지는 모든 비난과 항거도 모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담당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분명 2,000년 전에 십자가에 단번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실로 지금까지도 어리석고 무지한 우리 인간들의 비난과 항거를 홀로 담당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신은 죽었다’, ‘너는 나의 신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외치는 사람들이 여전히 생명을 유지하며 잘 살고 있는 이유는 바로 예수님께서 이 수모를 홀로 담당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비난과 항거에 대해서 반드시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심판의 날에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들었던 모든 비난과 항거를 사람들에게 되뇌실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귀를 여시고 하나님을 향한 조롱과 모욕을 들으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반드시 그 날에는 이들이 외쳤던 말들에 대해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사실을 기억하면서, 주님께서 실로 자비를 베풀어 주시는 이때에 여호와 경외함을 배워 주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선한 목자 되심을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날마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설 수 없는 자입니다”라는 고백으로 주님을 경배하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대답: 나는 빛과 어두움, 평안과 환난을 창조하는 자이다.
이처럼 백성들의 비난을 받으신 하나님께서는 이제 백성들의 항거에 대답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침묵하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다시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이토록 하나님을 거역하는 백성들에게 어떤 대답을 주셨을까요? 백성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대답은 7-8절 말씀입니다.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7절)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간단한 대답을 백성들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정말 간단한 대답인 “나는 창조주 하나님이다”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자신을 창조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언급하신 네 가지의 피조물을 눈 여겨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용된 ‘짓다’, ‘창조하다’라는 말은 모두 과거형이 아닙니다. 히브리어로 보면 분사로 사용되었는데, 사실상 현재진행의 의미를 담고 있는 말들입니다. 그러니 다시 말하면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창조 사역은 과거 창세기 1장의 사역이 아니라 현재도 계속하여 진행 중이시며 앞으로도 계속될 창조 사역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 만물을 볼 때, 바로 이런 시각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태양에서 빛이 발산됨을 보면서 과학적 원리로 대답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태양빛을 비춰주시는구나”라는 신앙적인 시각을 가질 필요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평안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평안’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샬롬’이라는 말입니다. ‘샬롬’은 ‘평화’, ‘평안’이라고 번역되지만, 기본적으로 ‘전쟁 중에 임하는 평화’를 뜻하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폭풍우가 몰아치는 숲길 한 복판에서 비상대피소에 들어가 있을 때 우리가 평안을 얻게 되듯이, ‘샬롬’이란 ‘전쟁과 같은 상황에서도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얻는 평화’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일상 속에서도 이런 평화가 자연히 찾아온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오히려 이러한 평화도 역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은혜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조금 난해한 두 가지 피조물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바로 어두움과 환난입니다. 어두움이나 환난은 모두 공통점이 있습니다. 둘 다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일으킵니다. 어두운 곳에 갇히면 우리가 두려움을 느끼듯이, 어두움이란 우리의 마음에 담력을 앗아갈 수 있는 극도의 흑암도 포함하는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환난도 우리에게 두려움을 유발합니다. 전쟁이나 기근, 질병이나 폭력 등은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유발합니다.
여기에 나오는 ‘환난’은 히브리어로 ‘라’입니다. ‘라’는 본래 ‘악’이라는 뜻을 가진 말이지만, 여러 가지 의미를 함의하고 있는 말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도덕적으로 누군가를 평가했을 때 “저 사람은 악한 사람이야 // 히틀러는 악한 사람이야”라고 하는 것과 같이 도덕규범에 따라 정의된 악의 개념을 뜻할 수 있습니다. 또한 “가난한 인간은 불행해. 오늘 나는 너무 우울해. 어제의 나는 정말 운이 없었어”라고 말하듯이, 인간이 스스로 불행하거나 불운하다고 느끼는 모든 정서 역시 악의 개념에 포함될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왠지 오늘 운전을 하며 사고를 당할 것 같아. 왠지 오늘 너를 만나면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아”라고 말하듯이, 사람이 예측할 수 없는 두려움 때문에 가질 수 있는 모든 악에 대한 경향성까지도 이 말이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본문에 나오는 ‘환난’은 여러 차원의 악의 개념을 포함하는 말입니다. 어두움이나 환난 모두 이와 같이 사람들에게는 부정적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는 내용을 함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빛과 평안만을 창조하지 않으시고, 어두움과 환난도 창조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당연히 사람들은 창조주 하나님을 생각하면 빛과 평안과 같이 우리에게 좋은 것만을 창조하신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부정적인 어떤 것을 창조하셨다고 하면 금방 반발하는 것이 사람들의 일반적인 반응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서 하나님께서는 빛과 평안뿐만 아니라 어두움과 환난까지도 창조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대개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착각하기 쉽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하나님에 대해서라면 박사학위 몇 개를 가진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나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무엇을 하고자 하시는지 속속들이 알고 있듯이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인간이 당하는 고난, 슬픔, 불행, 어두움의 경험 등에 대해서는 잘 설명하지 못합니다. 단지 행복한 일, 행복한 섭리, 행복한 하나님에 대해서만 말할 뿐입니다.
그렇지만 사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에 대해서 잘 아노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뿐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멈춰 서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스스로 어떻게 계시하셨는지 귀를 기울일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이 계시된 말씀을 넘어서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도 우리의 인생을 인도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이해로서는 하나님께서 어두움과 환난을 창조하신다는 말이 납득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어두움과 환난을 통하여서도 당신이 기뻐하시는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결코 어두움과 환난을 일으키는 악의 조성자가 아니십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본문 말씀을 보면서 이런 오해를 합니다. 하지만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어두움과 환난을 창조하신다는 말씀은 그분께서 악의 원인이 되시거나 환난을 일으키는 주범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에서 말하는 악의 원인과 환난을 일으키는 주범은 죄인인 인간들이죠.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어두움과 환난의 창조 사역은 이러한 부정적인 요소들마저도 하나님의 주관하심 아래에서 그분의 선한 목적을 위한 도구로서 사용된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우둔한 눈으로는 단편적으로 하나님이 지금 우리에게 어두움과 환난을 준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를 통하여서 당신의 의와 구원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이사야 45:8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 하늘이여 위에서부터 의로움을 비 같이 듣게 할찌어다. 궁창이여 의를 부어 내릴찌어다. 땅이여 열려서 구원을 내고 의도 함께 움돋게 할찌어다. 나 여호와가 이 일을 창조하였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빛과 어두움, 평안과 환난을 창조하심으로써, 결국에는 의와 구원의 열매들이 이 땅 가운데 맺히도록 하십니다. 우리는 장래의 일에 대해서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장래의 일들을 모두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가 걸아가야 할 길의 맞은편에서부터 당신의 의와 구원을 가지고 오고 계십니다. 비록 우리의 눈에는 한시 앞도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창조하심을 믿고 의뢰하는 모든 자들에게 반드시 의와 구원의 열매를 맺어주실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세계는 헛되이 창조되지 않았습니다. 이사야 45:18에서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의 모든 만물을 결코 헛되이 창조하지 않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기에 모인 한 사람 한 사람의 성도님들도 결코 헛되이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빛과 어둠도 평안과 환난도 헛되이 창조치 않으셨는데, 하물며 당신이 사랑하시는 당신의 자녀들을 함부로 여기겠습니까? 그러니 우리는 오늘 말씀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하나님을 비난하고 그분의 뜻에 항거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하신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길이 선명하게 보이지 않더라도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를 주관하신다는 분명한 믿음을 가지고 이 땅 가운데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오는 일주일의 삶 속에서도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와 은혜를 따라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주님께 ‘아멘’하는 순종의 삶으로 나아가시는 모든 성도님들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