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저 나라는
법(法)에 의(依)해 번창(繁昌)하고
법(法)은 사람에 의해 존귀(尊貴)함이라.
나라가 망(亡)하고 사람이 멸(滅)하면
부처를 누가 숭상(崇尙)하며
법(法)을 누가 믿으오리까.
우선 국가(國家)를
기원(祈願)하고
모름지기 불법(佛法)을
세울 것이로다.
만약 재(災)를 소멸(消滅)하고
난(難)을 중지(中止)시킬
술책(術策)이 있다면 듣겠나이다.
주인(主人)이 가로되,
나는 본래 완우(頑愚)하여
결코 현명(賢明)하지는 않다.
다만 경문(經文)에 따라
약간(若干) 생각한 바를 말하리라.
대저 치술(治術)의 방도(方途)는 내외간(內外間)에
그 문(文)이 얼마나 많은가.
낱낱이 열거(列擧)하기는 어렵도다.
다만 불도(佛道)에 들어와
누차(累次) 우안(愚案)을
두루 해보건대
방법(謗法)의 사람을
엄금(嚴禁)하고
정도(正道)의 반려(伴侶)를
중(重)히 하면
국중(國中)이 안온(安穩)하고 천하태평(天下泰平)하리라.
입정안국론(立正安國論)
어서 26쪽~27쪽
젊은날의 일기
1951년 1월 7일 (일) 흐림 –23세-
온종일 선생님 댁.
선생님과 함께 근행을 하니 가슴이 뛴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각종 서류 정리.
선생님의 유연한 모습. 한없이 큰 경애.
미래, 평생, 그 어떤 고난이 계속 닥쳐와도 이 스승에게 배운 영예를 나는 최고, 최대의 행복으로 하련다.
하루 종일 추웠다.
귀가 11시. 어서를 펼쳤으나 전혀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다.
1시 취침.
#
1953년 1월 7일 (수) 맑은 뒤 흐림 –25세-
따스한 하루였다.
도다 선생님을 하루 종일 만나 뵙지 못해 외롭기 그지없다.
저녁, 직원들과 〈결투 ― 스카라무슈〉를 유라쿠좌에서 봤다.
늦게 I씨 댁 좌담회에 출석.
올해는 적어도 50권을 독파하리라 결의한다. 오늘부터 시작이다.
출발, 매우 좋다.
#
1955년 1월 7일 (금) 쾌청 – 27세-
저녁 6시. 연중행사인 어린이 모임. 장소. ― N원(園).
수많은 부부와 아이들이 모였다. 모두 즐거워 보인다. 어느 한 부부가 지각하여 선생님께서 엄하게 지도하셨다.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어린이 모임에 참석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워진다.
즐기고 있는 사람이 있는 반면, 반드시 쓸쓸해 하는 사람이 있다. 이를 생애 잊지 않는 사람이고 싶다.
학회가, 〈오장원(五丈原)〉, 〈대남공(大楠公)〉, 〈일본 남아의 노래〉를 계속 불렀다.
공평한 사람이 되고 싶다. 아니 그늘에 가려진 사람, 외로운 사람, 슬퍼하는 사람의 편이 되고 싶다.
이 부부, 이 아이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학회의 중핵이 되어야 할 책무가 있는 것이다.
#
1956년 1월 7일 (토) 비온 뒤 흐림 –28세-
아침부터 피곤하다. 괴롭다.
선생님의 건강이 좋지 않으시다고 한다. 저녁, 본부에 나오셨다.
허전하다. 이 얼마나 허전한가.
스승께서 편찮으시고 나 또한 몸이 힘들다.
숙습(宿習)인가, 불이(不二)인가.
내일 있을 ‘어린이모임’의 간사로서, 오후부터 물건을 사러 이세탄백화점에 갔다.
I씨, H씨, 나 이렇게 셋이서 저녁에 회장실에 들렀다.
객전에 대한 일 그리고 삼대비법(三大秘法)에 대한 말씀이 있으셨다.
또 한자와 그 원뜻에 대해 지도하셨다. 공부가 부족함을 한탄.
첫째도 둘째도, 근행을 정성껏 하는 것이 신심의 출발이다.
#
1957년 1월 7일 (월) 쾌청 –29세-
오전에 여러 가지 선생님의 지도가 있었다.
“타국칩핍난(他國侵逼難)이 있으면 반드시 불법이 흥륭한다.”는 말씀.
말법, 대성인의 때는 실로 몽고군의 침략이 있었다.
말법, 화의 광포 시대는 저 태평양전쟁이 있었다. 불법의 대사명은 고뇌하는 민중을 구제하는 것이다.
몹시 피곤해 보이시는 선생님. 마지막으로 “청년은 아첨꾼이 되지 마라.”라고.
밤에 지부장, A군과 셋이서 N씨 댁을 방문하였다.
1시간 가까이 여러 가지 간담. 종문의 심벌인 ‘학(鶴), 대어본존의 윤보(輪寶: 전륜왕 칠보의 하나, 수레바퀴처럼 생긴 인도 고유의 무기)’, 닛고 상인의 ‘귀(龜: 거북이)’ 문장, 니치모쿠 상인의 ‘송죽매(松竹梅)’ 문장 등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선생님을 뵌 날은 기쁘다. 뵙지 못한 날은 쓸쓸하다.
내 인생에 울려 퍼지는 생명의 메아리.
T군, 어서 돌아오라고 마음으로 기원한다.
#
1958년 1월 7일 (화) 연무(煙霧: 황사 등으로 시야가 10Km 이하가 될 때의 날씨) –30세-
저녁에 본부에 갔다. 선생님을 잠깐 뵈었는데 건강이 몹시 안 좋은 모양. 애절하기 그지없다.
시대는 변했다. 분하고 원통하다. 그러나 광포의 실현될 때까지 아직도 먼 인생이다.
선생님 지켜봐 주십시오. 성장하여, 청년부가 반드시 뒤를 잇겠습니다.
밤, 승려들이 초대 ··· N에서. 선생님의 모습, 전혀 기운이 없으시다.
승려 16명과 대간부 30명이 참석.
선생님이 댁으로 돌아가시고 난 후에는 참으로 허전했다. 모든 제자들에게 더욱 분발하자고 당부하고 싶을 정도였다.
일찌감치 잠자리에 든다. 피곤하면 투쟁할 수 없다. 법전만이 즐겁다.
#
1959년 1월 7일 (수) 쾌청 –31세-
오후 3시부터 ― 올해 첫 연합회의.
학회가 건설하는 사원을 ― 전부 총본산에 공양하기로 결정. 당연한 일이자 이것이 정도(正道)다.
집에 오는 길에 나이 지긋한 이사장, 이사들과 꼬치구이를 먹었다. 진보적인 화제는 전혀 없었다. 젊고 좋은 벗을 두고 싶다. 미래를 꿈꾸는 청신한 벗을 곁에 두고 싶다.
#
1960년 1월 7일 (목) 쾌청 –31세-
오전 8시, 집을 나섰다.
전차가 얼마나 혼잡한지, 할 말을 잃었다.
정초부터 용돈을 다 써 버려 택시비도 없다. 낭비는 오늘로 끝이다.
오늘부터 다시 본격적으로 내 일에 열중하자.
오후에 본부에서 이사장과 함께 변호사를 만나 N씨 등을 상대로 한 재판을 논의했다.
이 사건 만큼 은사를 괴롭히고 학회를 손상시킨 사건은 없었다.
학회의 청정함, 정의, 전통을 재판에서 훌륭하게 입증해야만 한다.
N씨 등의 천박한 출세주의와 더러운 행위를 진실한 학회의 자식들이 과연 용서할 성싶은가.
선배 이사 두세 명에게 학회의 본질과 돌아가신 선생님의 의중을 말씀드렸다. 사랑스러운 학회원을 위해, 에고이즘에 빠지지 않기를 바라는 심중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밤에 청년부 수뇌들이 집에 찾아왔다. 함께 회식. 7년 후, 14년 후의 구상을 이야기했다. 이해했을까, 이해하지 못했을까, 믿었을까, 믿지 못했을까.
첫댓글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노고많으셨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