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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규 약초학교
50년 묵은 간장과 30년 묵은 고추장
망치 형님이 왔다. 형님은 나이가 일흔이 되었지만 스물 다섯살이나 어린 나한테 꼭 존댓말을 쓴다. 반드시 나한테 '최선생' 이거나 '최회장'이라고 하지 이름을 부르지도 않는다. 하지만 다른 사람한텐 나이가 많건 적건 이 자식, 저자식이거나 개새끼, 그 새끼, 뒈질 놈 소리가 입에 배어 있다. 나는 이 분을 한 번도 형님으로 부른 적이 없지만 달리 마땅한 호칭이 없으므로 여기선 형님으로 부르련다. 그는 아들뻘인 나를 늘 친구라고 그런다. 그만큼 나를 아끼고 존중하고 사랑한다는 뜻일 것이다. 망치는 형님의 별명이다. 본디 몸집이 커서 커서 덩치라고 부르던 것이 망치가 되었다고 한다.
그는 이 나라의 전설적인 도박황제였다. 한 때 '지존무상' 이니, '도신'이니 '정전자'니 하는 제목의 주윤발과 유덕화가 나오는 홍콩 도박영화가 유행한 적이 있는데, 그는 뻥이 심한 이들 도박영화의 주인공들보다도 더 극적이고 통이 큰 삶을 살아왔다. 도박의 천재였던 그는 한때 비밀 도박장을 운영하면서 엄청난 돈을 긁어모았다. 도박으로 하루에 10억이건 100억이건 원하는 대로 돈을 딸 수 있었다. 80년대 초반에 도박으로 천 억을 따서 아프리카에 가서 4년을 살다가 오기도 했고, 한 번은 도박으로 딴 돈 4백 억원을 하룻저녁에 다 써 뿌리기도 했다고 한다. 곧 거나하게 취한 채 수표다발을 뒷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남자건 여자건 맘에 드는 사람한테 5억이건 10억이건 손에 잡히는 대로 줘 버렸다는 것이다. 도박의 황제이면서 건달의 황제이도 하다. 아니 그는 건달이 아니라 협객이었다. 중국의 의협열전에 나오는 그런 협객 말이다. 형님에 대해서 말하려면 책이라도 한 권 써야 할 것이다.

형님과 나는 마음이 가장 잘 통한다. 그러므로 가장 좋은 친구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서로를 신뢰하고 도와 준다. 더러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올 때가 있다. 어제도 그랬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가방에서 흰 비닐봉지를 꺼내어 내 앞에 놓으며 말했다.
"고추장 30년 묵은 게 큰 항아리로 하나 가득 있다고 해서 가 봤는데 그게 진짠지 가짠지 알 수가 있어야지. 그래서 좀 갖고 왔어요. 오래 되니까 색깔이 까맣고 매운 맛도 안 나고 고추장인지 뭔지 알 수가 없어요. 누구한테 물으니 막장이라고도 하고. 최선생이 한 번 봐 줘요."
비닐 봉지 안에 골프공만한 덩어리가 하나 들어 있어 펼쳐 보니 그저 조그맣고 새까만 진흙 반죽 같다. 냄새를 맡아보니 고추장 냄새가 난다. 맛을 보니 고추장이 맞긴 맞다. 내가 말했다.
"이거 진짜 보물인데요. 30년이 됐는지는 알 수 없어도 아주 오래 된 것은 틀림없습니다. 몽땅 사야겠습니다."
"이게 말이오, 전라도 어느 시골에 오래 된 집 장독에 있던 것인데 집이 비어 있으니 아무도 안 먹고 잊어버렸던 거요. 당장 가서 몽땅 달라고 해야겠소."
이렇게 해서 나는 수십 년 묵은 고추장을 큰 항아리에 가득 갖게 되었다.

해월 선생을 만나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에 오래 묵은 간장이나 된장, 고추장이 좋다는 얘기를 했다. 30년 묵은 간장으로 간암을 고친 애기를 하니 매우 재미있어 했다.
해월 선생 역시 몇 백년에 한 번 나올까말까 한 기인이다. 그는 사람을 사귀는데 천재다. 그한테는 수천인지 수만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친구가 많다. 장관, 국회의원, 재벌총수, 중, 목사, 교수, 교주, 도사, 의사, 군인, 시골 농부, 건달, 거지, 학자, 장사꾼, 점장이, 학생... 지위고하 빈부귀천 남녀구별 없이 누구든지 그를 한 번이라도 만나기만 하면 5분 안에 홀딱 반해 버린다. 특히 도사, 교주, 대사 나부랭이들이 그의 제일 좋은 밥이다. 혹세무민에 도통한 시이비 교주과에 속한 인간들이 진짜 도사님의 한 마디에 완전히 넋을 잃고 마는 것이다. 짧은 5분 동안에 상대방의 외모, 직업, 관심사, 고향, 족보, 습관, 가족사항에 이르기까지 싹 머릿속에 외워 두고는 평생 잊지 않는다. 놀라운 기억력이다. 언젠가 33년 전에 한 번 잠깐 만났을 뿐인 사람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는 33년 전 몇 월, 몇 일, 몇 시에 어느 곳에서 어떤 사람을 만나서 무슨 얘기를 했는데 그 사람의 이름은 무엇이고 나이는 몇 살이며 고향은 어디고 아버지 이름은 무엇이며 본향은 어디이고 어떤 말을 어디까지 했는지를 완벽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해월 선생에 대해서도 얘기를 하려면 책을 몇 권 써야 될 판이니 그 애기는 나중에 하자.
해월선생이 말했다.
"오래 된 간장이 간에 좋다고? 나한테 50년 묵은 간장이 있어요. 6.25 전쟁 때 담근 것이라고 하니까 50년도 넘었을 거요. 내가 지난해 충청도 공주 부근에 살았는데, 그 마을이 참 묘한 데라. 뭔가 성인이 날만한 자리요. 옛 비결서에도 적혀 있고. 내가 살던 집에, 지금도 내 짐들이 거기 있어요. 집 뒤에 장독대가 있는데 큰 항아리에 간장이 한가득 있는데 그게 50년이 넘은 것이오. 6.25때 그 집에 살던 사람들이 간장을 담가 놓고 이사를 가 버린 거지. 그리고 그 집이 한 십 년 비어 있다가 다른 사람이 들어와서 살고, 또 그 사람들이 이사를 가고... 그리곤 비어 있던 집인데 다른 건 다 없어져도 간장은 그대로 남았던 거요."
"그래요? 놀랍군요. 그 간장을 갖고 옵시다."
며칠 뒤에 날을 잡아 간장을 가지러 갔다. 공주 유구 부근의 산 속이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골짜기에 시냇물이 졸졸 흘러내리고 골짜기는 안으로 들어갈수록 넓어지더니 막다른 안쪽에 빈집이 몇 채 있다. 과연 산도 아니고 평야도 아니며 햇볕이 잘 들고 비슷한 높이의 야트막한 산들에 둘러사여 있어서 숨어살기에 좋을만한 복지다. 이른바 십승지의 하나로 손꼽을만한 천혜의 명당터다.
간장독은 허물어져가는 외진 집 뒤 해묵은 신갈나무 그늘에 있었다. 열 개쯤 되는 항아리 뚜껑을 하나씩 열어 보았다. 오래 전에 말라붙은 된장, 썩어서 뭔지 알 수 없는 곡식, 소금.... 그리고 간장독이 두 개 있었다. 두 개 다 큰 항아리에 사분지 일쯤이 들어 있었다. 바가지로 휘저어 보니 바닥에 가득한 장석이 버걱거렸다. 한 모금 떠서 맛을 보았다. 빛깔은 검고 맛은 짜고 꿀처럼 진득거린다. 뒷맛은 달고 특유의 쉰 듯한 향기가 있다. 찾았다. 이건 진짜 천하의 보물이다.
'50년 묵은 간장이 지금가지 남아 있다는 것은 기적입니다. 이거 같으면 간암 환자 여럿 살릴 수 있겠는데요."
"그럼 이거 갖고 가서 한 홉에 한 천만원씩 받고 팔까요?"
"파는 건 나중에 하고 해월 선생님이 요즘 간이 나빠진 것 같으니 좀 드시지요."
"그래야겠소. 요즈음 술을 많이 마셨더니 몸이 좀 피로하고 가끔 설사를 해요. 간이 퉁퉁 부었다고 하는데 죽을 병 걸렸다고 할까봐서 병원에는 안 가봤소. 멀쩡한 사람이 병원에 가서 죽거나 병신돼서 나오니 병원이 병 고치는 데가 아니라 병 만드는 데요. 내 아는 사람들이 암에 걸려서 병원에 갈 때는 멀쩡하게 걸어서 들어가더니 나올 때는 전부 죽어서 나오더라. 근데 이걸 어떻게 먹지요?"
"조금씩 물에 타서 마시면 됩니다. 반 종지씩 그냥 마셔도 되구요."
나는 간장을 한 말 짜리 물통에 퍼담았다. 모두 두 말쯤 된다. 본래 항아리에 가득 차 있었던 것이 50년 세월 동안 마르고 졸아서 사분지 일쯤으로 줄어든 것이리라.
이렇게 해서 나는 50년 묵은 간장 두 말을 갖게 되었다.

그 일 뒤로 한 달쯤 뒤에 해월 선생을 만났다.
"그 간장 말이오. 무언가 묘하고 기이한 효력이 있는 것이 틀림 없어요. 집안 정리를 좀 열심히 했더니, 무거운 돌도 좀 나르고 장작도 좀 패고... 그랬더니 몹시 피곤해요. 그래서 방에 들어가 누워서 좀 잤어요. 한 두어 시간 달게 자고 나니까 배가 고파요. 나가서 밥을 차려 먹을까 하다가 마침 그 간장 생각이 나서 그래 이걸 마시면 좀 기운이 나겠지 하고는 맥주잔으로 한 잔을 따라서 마셔버렸어요."
"네에? 소줏잔이 아니고 맥주잔이요?"
"내 말을 마저 들어봐요. 한 잔을 마시고 나니까 열이 약간 오르면서 기운이 좀 나는 것 같아 밖으로 나와 일을 했어요. 그 때가 저녁 열시쯤 됐을 거요. 하늘에 달이 훤하더라구. 그런데 배도 고프지 않고 뭔가 술에 약간 취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틀림없이 그 간장을 마신 덕분인 것 같아서 이게 좋은 것이면 확실하게 체험을 해 보자 하고선 방에 들어가서 맥주잔으로 한 잔을 더 마셔버렸어요."
"그럴 수가! 그 짠 것을. 그래도 괜찮았나요?"
"괜찮다니! 죽을 뻔 했소. 열이 확 오르면서 독한 술을 한 항아리 퍼마신 것처럼 취하는데 정신을 차릴 수가 있어야지. 가슴이 답답해서 바람을 쐬려고 밖으로 나왔다가 마루 밑에 쓰러졌어요. 그리곤 의식을 잃었는데 참 묘한 꿈을 꾸었어요. 오색 구름이 나를 둘러싸고 있고 주변에 금빛 찬란한 옷을 입은 여러 사람이 보이는데 그 중엔 운림선생도 있었어요. 아무튼 상서로운 꿈이라. 기이한 꿈에서 깨어나니 마당에 있는 소나무 밑인데 지금이 아침인가 하고 시간을 보니 오후 여섯 시라. 거의 스무 시간을 간장에 취해서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잤던 게요. 근데 말이오. 사타구니 밑이 묵직해서 보니 세상에 똥이 바지안에 가득해요. 내가 시커먼 똥을 한 양동이나 쌌던 거요. 장 속에 있던 몇 십년 묵은 숙변이 한 번에 싹 빠져 나온 것이라. 마침 그 집에 나 혼자 있었기에 망정이지 큰 망신 당할 뻔 했어요."
"굉장하군요. 과연 묵은 간장이 좋긴 좋지요?"
"그런데 그 명현반응이랄까 어질어질한 취기가 한 사흘은 가더라구요. 몸은 가벼워지고 개운해진 것 같은데 약간 열이 올랐다가 오슬오슬 춥고 그러다가 어지럽고... 숙변이 확 빠지니까 보다시피 배가 홀쩍해졌고 몸무게가 8킬로그램이 줄어버렸어요. 사흘이 지나니까 정신이 말똥말똥해졌어요. 그 뒤론 밥맛이 꿀맛이고 전보다 일을 서너 배를 더 해도 전혀 피곤하지를 않아요. 전에 내가 산삼을 먹은 적이 있는데 이건 산삼보다 더 나은 것 같소."

묵은 간장 고추장이 언젠가는 세상을 구하리니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첫댓글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시간 되세요
묵은 간장 고추장이 언젠가는 세상을 구하리니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네 고창 지장수로 장 담가야 되는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