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로테르담 최 건 차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 히틀러의 섬찟한 말이 뇌리를 스치는 2019년 4월의 어느 날 아침이다. 서수원신협 일반산악회원들이 2대의 버스로 진달래가 만발하였을 경남 창녕 화왕산으로 가는 중의 상황이다. TV 화면이 켜지고 뉴스가 방영되다가 긴급 생중계라며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고풍스러운 파리 로테르담 대성당이 불타고 있다. 소방관들이 물대포를 쏘아대며 산소통을 매고 불길을 잡으려는 주변에 서성이는 시민들이 경악하며 울부짖는다. 마치 시가전이 벌어지는 것 같은 광경이라 뭔가 익숙하게 느껴지는 게 남의 나라 일 같지 않아 보여 가슴이 싸늘해진다.
미국과 중국의 힘겨루기 무역 전쟁이 강도를 더해가고, 북한이 이란에 전수한 핵 폐기 문제가 유엔의 결의대로 되지 않아 전운이 감도는 분위기다. 이런 판국에 폭격을 당한 듯한 화염에 휩싸여 연기를 화통처럼 뿜고 있는 장면이 긴급뉴스를 타고 화면을 덮고 있다. 근래 노랑 조끼의 시위가 심해져 파리 중심가에서 격전이 벌어진 듯 개선문이 불길에 싸이기도 했는데, 이번에는 로테르담 대성당이다. 우리가 찾는 화왕산에서도 연전에 억새 풀 태우기 이벤트가 있었다. 구경하던 사람들이 불길을 피하다가 죽고 다친 사고가 발생하여 이후 그런 행사를 하지 않고 있다.
프랑스인들에게서 로테르담(Notre Dame) 대성당은 ‘우리의 귀부인’이라는 뜻으로 성모 마리아에게 헌당 된 거룩한 성전聖殿이다. 인류구원의 메시아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낳은 유일한 분, 인류 최고의 귀부인 성모 마리아를 경모하는 곳이다. 이렇게 성스러운 곳이지만, 예루살렘이 여러 번 수난을 당하면서 이교도에게 짓밟혔듯이 로테르담 대성당의 역사도 다르지 않았다. 건축된 지 50년 만인 1194년 대형화재를 당해 30여 년에 걸쳐 재건축되었다. 혁명 때는 포도주 창고로까지 쓰이면서 심하게 파손된 채로 방치되었었다. 나폴레옹 1세(Napoleon1)가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시행하여 다시 성전으로 복구되었고, 자신의 황제대관식을 그곳에서 거행했다. 이후 왕들과 황제의 대관식 장소로 쓰이면서 왕족들이 세례를 받고, 마녀사냥으로 화형을 당한 잔 다르크(Jeanne d' Arc)가 1455년 성녀聖女로 다시 추앙된 곳이다.
나는 오래전 로테르담 대성당을 무대로 한 영화를 감명 깊게 보고서 그 현장을 한 번쯤 찾아보고 싶었다. 드디어 1995년 유럽을 여행하면서 파리에 잠깐 들려 그곳에 가 보게 되었다. 그다음에는 2006년 헤이그에서 치러진 딸의 혼례식 때 부산 대연교회 시절에 각별한 사이로 지냈던 파리장로교회의 이극범 목사님께서 예식에 참석해 주었다. 식을 마친 후에 헤이그를 떠나 나와 아내, 작은아들과 같이 3박 4일간 파리에 머물게 해주었다. 주일을 맞아 청탁받은 설교를 하고 예배에 참석한 주프랑스 주철기 대사와 오찬을 하면서 파리 투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예배를 마치고 이극범 목사님의 안내로 파리 구경을 나섰다. 그다음 날은 아침부터 개선문을 지나, 상제리제를 둘러보고 몽마르트와 루브르 박물관을 관람하고 웅장하고 경건해 보이는 로테르담 대성당에 들어갔다. 초행인 아내에게 영화 <로테르담의 꼽추>에 관한 이야기를 곁들어주었다. 대성당 내부를 둘러 보면서 소원의 촛불을 켰던 게 이제는 아련한 추억이 돼버렸다. 천사처럼 왔다가 슬그머니 가 버린 그 사람이 생전에 했던 말이 귓전에 울린다. “여보 다음에는 아이슬란드 경은이 집에 갔다. 오면서 파리에 또 들려봅시다. 저번처럼 센강 유람선을 타보고 그림 한 점을 샀던 몽마르트와 에펠탑에도 오르고, 로테르담에 들려 촛불을 켜보고 싶어요.”라고 했는데. 이렇게 될 줄을 알고서나 그랬는지라는 생각에 가슴이 먹먹하다.
늦은 밤 C/D를 꺼내 즐겨봤던 <로테르담의 꼽추>를 또 감상한다. 아내와 파리를 구경하며 즐거웠던 때의 모습이 사이를 비집고 떠올려진다. 파리 뒷골목의 축제 때 흉한 모습을 드러낸 대성당의 종지기 콰지모도 역을 맡은 멕시코 출신의 안소니 퀸도 옛사람이 되어버렸다. 노래하며 춤을 추는 집시 여인 에스메랄다로 나온 이탈리아 출신의 미녀 지나 롤로부리지다의 매혹적인 자태도 많이 노쇠해 졌겠다.
성당 안벽에 손으로 쓴 라틴어 ‘Anaykh(운명)’는 누가 왜? 언제 써는지 모른다. 성당 문 앞에서 죽움을 당한 에스메랄다를 찾아 그 옆에 누워버린 콰지모도의 순결한 사랑, 시신을 끌어 앉은 채로 된 백골, 사제의 손이 닿으려는 순간 먼지가 되어 사라져버린다. 성역을 모독하는 궤계와 술수를 행하는 자들에 대한 고발인가, 성직자의 정체성에 대한 경고인가…! 픽션으로 만들어진 영화지만, 나는 애절한 사연을 품고 있는 파리 로테르담을 다시 찾아가 아내를 그리는 촛불을 켜고 싶다. 2025.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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