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한국병원에 김대중 새 병원장이 취임한 뒤, 갑작스럽게 응급환자가 들어왔다. 새 병원장은 외부에서 급히 의사들(IMF)을 불러 환자의 배를 갈랐다. 환부가 너무 깊고 컸다. 이를 도려내다가는 환자가 죽을 수도 있다는 판단이 들자 병원장은 응급처치만 한 채 가른 배를 닫았다. 그리고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진통제 주사(공적자금)를 놓았다. 환자는 살았다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진통제 약효가 떨어지면 환자는 도려내지 않은 환부 때문에 속이 뒤틀렸다. 병원장은 이럴 때마다 진통제를 한대씩 놓았다.”
서울 부암동 대한발전전략연구원에서 만난 김종인(63) 전 청와대 경제수석(현 건국대 석좌교수)은 ‘국민의 정부’ 5년 동안의 경제정책은 이른바 ‘모르핀(진통제) 경제’였다고 비판했다. 한국 경제가 IMF 사태를 맞게 된 원인을 분석하고 그에 합당한 대책을 내놓기보다는 그때그때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미봉책으로 넘겨왔던 것이다. 노무현 정부가 이 모르핀 경제를 이어받아 진단도 없이 DJ 정권의 실책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데서 경제가 꼬이고 있다는 얘기였다.
노태우 정권 시절, 실세 경제수석으로 재벌의 비업무용 토지를 매각케 해 당시 부동산 거품 해소와 재벌개혁의 초석을 마련한 것으로 평가받는 김 전 수석은 새 정권이 출범할 때면 으레 입각 물망에 올랐다. 노무현 정부의 초기 출범 때도 그랬다. 현재 노무현 정부의 국민경제자문회의 원로경제인분과 위원으로서 새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해 조언을 아끼지 않는 그가 진단하는 노무현 정권의 경제정책은 한마디로 ‘실패’다. 그는 왜 지난 7개월 동안의 노무현 정부 경제성적에 가차없이 낙제점을 주고 있을까.
지금 노무현 대통령이 가장 원하는 건 경제회복일 텐데요.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민심을 잡을 수 없는 상황 아닙니까.
이 정부는 시작부터 불행한 것이 지난 정부로부터 부채를 물려받았는데, 그 부채가 무엇인지 진단도 하지 않는 겁니다. (노대통령이) 취임 초기에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국민에게 설명했으면 부담을 떠안을 필요가 없었죠. 이젠 핑계를 댈 수도 없어요. 나는 노무현 정부가 경제정책에 대한 청사진을 보여주지 못하고 김대중 정부의 경제운용을 답습하는 것으로 봅니다. 초기에는 개혁적인 모습을 보이더니 결국 말로만 그치고 말았어요. 경제운용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없어요. 새 정부가 출범할 때는 색깔을 분명하게 띠고, 그것에 대한 검증이 완료된 뒤에 확신이 있으면 밀고 나가야죠. 여론에 따라 움직이며 7개월을 보낸 거요.
‘국민의 정부’로부터 받은 부채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국민의 정부가 지난 5년 동안 IMF를 극복하는 등 경제정책에 성공했다고 하는데 왜 올해 들어 경제가 갑자기 나빠졌습니까. 갑자기 이렇게 된 게 아니에요. 신용없는 사람들에게 카드를 나눠주고, 20∼30대를 신용불량자로 만들어놓고, 잘했는지 잘못했는지 판단도 하지 않은 나라가 이 나라요. 게다가 DJ 정권은 2001년 9•11 사태 이후 경기부양 한답시고 부동산 투기를 조장했어요. 주택경기 활성화니, 건설경기 활성화니 하는 게 결국 투기의 활성화죠. 지금 와서 투기를 잡는다고 하면 당장 되나요. 국민의 정부 시절 공적자금 1백59조원과 공공자금•산업은행 자금, 그리고 재정적자 1백20조원까지 포함하면 3백조원을 공짜로 넣었지요. 이것으로 약효가 떨어지면 위기에 빠졌다가, 돈 집어넣으면 좋았다가, 이런 것의 반복이 국민의 정부로부터 받은 부채예요.
방안이 없습니까.
방안은 경제정책을 짜는 사람들의 몫이지 내가 말할 것이 안됩니다.
지난 6월 국민경제자문회의에서 대통령께 단안을 내리라고 주문하셨는데.
그랬지요. 현재 한국 경제의 문제점은 전문가들 사이에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어요. 수요가 부족하고, 공급 측면에서 애로사항도 있고, 국제 경제의 환경도 급변하고 있어요. 이런 ‘경제병’을 고치는 것이 경제정책이에요. 노대통령이 인위적인 경기부양을 하지 않겠다고 얘기했는데, 나는 이 말이 이해가 안돼요. 과거처럼 공적자금 넣고 신용카드 남발하고 그런 것을 안 하겠다는 얘기로 해석되지만, 적절한 경제정책으로 대처해나가지 않겠다는 의미로 들릴 수도 있어요. (대통령은) 말을 가려서 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단안을 내리라고 얘기했지요.
"노대통령이 인위적인 경기부양을 하지 않겠다고 얘기했는데, 나는 이 말이 이해가 안돼요. 과거처럼 공적자금 넣고 신용카드 남발하고 그런 것을 안 하겠다는 얘기로 해석되지만, 적절한 경제정책으로 대처해나가지 않겠다는 의미로 들릴 수도 있어요"
지금 노대통령이 제대로 된 경제팀을 운용하고 있다고 보십니까.
공적인 자리에 가려는 사람은 사전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준비가 철저해야 합니다. 노태우 정부 당시 대통령이 날 보고 경제수석을 하라고 할 때, “지금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렇습니다. 받아들일 수 없으면 쓰지 마십시오”라고 했어요. 인사와 관련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자리를 준다면 모든 사람이 황공하게 받겠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내가 아무리 좋은 생각이 있더라도 여건상 실현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지 않으면 절대로 가서는 안돼요. 그러니까 대통령은 제대로 된 사람을 찾기가 어려운 거지요. 우선 사람을 찾아야지. 실무자의 선택은 인사권자인 대통령의 몫이에요. 경제가 잘못되면 실무자 탓이라고 여긴다면 경제가 잘 될 수 없어요. 대통령은 항상 경제정책의 최고 책임자지요.
노정부 들어 가장 큰 재계 뉴스는 최태원 SK 회장 구속사건과 결과적으로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을 자살로 몰아넣은 특검이었습니다. 이 두 사건을 어떻게 보십니까.
나는 그런 것은 지엽적인 사건으로 봅니다. 최회장이 분식회계했으면 처벌받아야죠. 그 자체가 경제를 위축시킨 것은 아니에요. 특검? 노대통령의 특검 수용은 옳다고 봐요. 햇볕정책은 남북간의 긴장완화로 필요했지요. 햇볕은 돈이에요. 북한 정권은 돈이 아니고서는 남한과 화해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정권이라고요. 문제는 김대중 정권이 당당하게 국회에 가서 북한 지원을 위한 자금을 예산에서 쓰도록 동의해달라고 하지 않았다는 점이에요. 그랬으면 반대할 사람 없었을 거예요. 민간기업을 동원해서 북한에 돈을 보내고 결국 (현대아산을) 부실화시킨 것 아닙니까. 설사 기업인이 엉뚱한 생각을 갖고 북한과 사업한다고 해도 자제시켜야 했지.
노정부가 초기에는 노조 편향인 것으로 보이던 것과는 달리 재계 입장으로 선회한 조짐인데요.
그렇게 보기에도 모호해요. (노정부의 경제관료들도) 재계 입장으로 선회했다고 보지 않는데요. 그러다 보니 어느 한 경제 주체도 확고하게 정부를 믿지 않아요.
경제가 움직이려면 재계가 원활하게 윤활유 역할을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재계의 윤활유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잘못됐어요. 나는 지금 재계에 어떤 특혜를 더 주어야 움직일지 잘 모르겠어요. 노동조합이 극렬해졌다고 하지만 한국 경제를 망칠 정도로 심각한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노조의 극렬한 행동 때문에 경제가 안 된다고 하면 두 자릿수의 수출증가율을 보일 수 없어요. 경제는 양쪽을 다 봐야 해요. 기업은 공급 측면만 보고 투자여건을 좋게 해야 한다, 노동시장 문제도 해결해 달라, 정부의 정책은 일관성을 유지해야 하고, 규제도 완화해 달라고 요구합니다. 이것은 기업의 요구사항에 불과해요. 결국 수요가 없으면 기업은 투자 안 합니다. 소비수요가 뚝 떨어져 미래에 대한 이윤이 불확실한데 누가 투자하겠어요. 지금까지 한국 경제가 기우뚱거리기만 한 것은 일면만 보고 한 문제에만 집착해서 그래요. 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다른 측면에서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봐야 합니다.
재벌은 개혁 대상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없으십니까.
재벌이 개혁 대상이라는 이분법으로 말하지 말고, 재벌도 글로벌 시스템에서 살아남으려면 오늘날과 같은 방식으로는 생존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이 맞습니다. 예를 들면 근로자들이 임금투쟁해서 문제라고 하는데, 근로자들은 기업에 이윤이 나면 임금을 더 올려 달라고 할 수밖에 없어요. 임금을 올려주지 못하면 근로자들도 알게 해줘야지. 기업의 투명성 확보하자고 하면 죽어도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재벌들이에요. SK글로벌(현 SK네트웍스)은 지난해 2천억원대의 흑자가 난 회사예요. 그런데 지금 와서는 적자가 됐지. 근로자들이 내막을 어떻게 알겠어요. 흑자가 났다고 하면 당연히 임금을 올려 달라고 하겠지. 투명하지 않아서 그래요.
이 정권은 부동산 가격과 전쟁을 하고 있지만, 부동산 가격이 잡히지 않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세금으로는 투기를 잡을 수 없어요. 관습대로 경제정책을 봐온 사람들은 10년 전에 내놓은 정책이니 모르겠지 하면서 내놓고 있지만 세금으로 부동산 가격을 잡는다는 것은 10년 전에 나왔던 것이에요. 당시 토지공개념이란 말이 나왔는데, 이것이 세금으로 부동산을 잡는다는 발상이었어요. 당시 부동산재산종합과세, 택지상한지세, 택지초과이득세 등 세가지 세금을 도입했죠. 세계에서 세금으로 부동산 가격을 안정시킨 나라가 없어요. 조세이론에도 이런 것은 없어요. 누군가 아이디어를 낸 것이지. 내가 이 세금은 헌법 위반이라는 얘기까지 했지만, 그냥 국회에서 의논도 없이 통과됐어요. 결국 헌법불일치 판단을 받아 없어진 세금이에요. 세금은 일정 기간이 지나면 전가돼요. 가격만 올라가지. 부가가치세 올리면 물건값 올라가는 것과 같은 이치예요.
원화 강세로 나라 경제에 걱정이 많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과거엔 한 국가의 국제수지에 따라 환율의 평가절상과 절하가 됐지만, 지금 환율은 그렇게만 움직이지 않아요. 90년대 들어와 가장 세계화된 시장이 금융시장입니다. 예전엔 돈이 교역의 결제 수단으로 활용됐지만, 지금은 돈 자체가 상품이에요.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한국엔 별로 없어요. 우린 지난 5년간 국제수지 흑자를 유지하고 증권시장에 해외자본이 유입되며 직접투자도 이뤄져 1천3백억달러의 외환보유고를 갖고 있어요. 원화가 평가절상될 수밖에 없죠. 반면 올해 미국의 국제수지 적자는 5천억달러가 넘어요. 이 적자를 메우려면 미국은 매일 20억달러의 자금을 외국으로부터 수입해야 해요. 이러다 보니 달러 약세가 된 거죠. 한 나라의 수출경쟁력은 아무리 생산성을 향상하고 임금을 줄인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에요. 원화가 절상되면 저절로 수출경쟁력이 떨어집니다. 이런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즉흥적인 방안을 만들면 안돼요.
이라크 파병을 두고 미국과의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한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미국은 한국의 전통적인 동맹국이에요. 우리 역사를 부정해서는 안됩니다. 신의와 의리가 없으면 국제사회에서 살아남기가 힘들어요. 더 중요한 것은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보여줄 역할이에요. 1천3백억달러의 외환보유고가 있고, 세계 13위 경제대국이고, 교역규모 세계 12위이면 그 수준에 합당하게 국제사회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아야 해요. 그래서 지금은 외교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글로벌 시대에선 국제관계를 종합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경제도 안됩니다. 동북아에서 한국의 위치를 생각해 봅시다. 한국은 무섭게 성장하고 있는 중국과 세계 2위의 경제대국 일본 사이에 끼여 있는 조그마한 나라인데 또 반토막으로 나눠져 있어요.
게다가 어느 날 한반도는 통일이 될 겁니다. 북한이 갑자기 붕괴되면 2천2백만 인구를 누가 맡게 될까요. 우리밖에 없어요. 지난 6월 피치사(영국 신용평가사)에서 북한이 붕괴되면 3천5백억∼5천억달러가 소요되는데, 한국의 재경부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물었다고 합디다. 나는 96∼97년 독일에 4개월 있으면서 독일 통일과정을 연구했는데, 이때 한국 통일을 전제로 계산해 보니 연간 3백억달러(35조원)를 북한에 넣어야 해요. 우리 예산의 4분의 1이에요. 소련과 독일이 와해되는 과정을 보면 북한은 어느 날 갑자기 붕괴될 것이라고 생각해요. 싫든 좋든 우리 책임이에요. 한국 혼자 맡을 수 있을까요. 결국 국제사회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런 측면에서도 미국과의 협력을 생각해야 해요.
역대 대통령 중 누가 경제정책을 가장 잘 했다고 평가하십니까.
글쎄요. 한국 경제에 고비가 많았지만 우리의 힘으로 넘겨온 것이 없다고 봅니다. 일례로 75년(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1차 오일 쇼크 때는 중동건설이 터져서 살았고, 85년(전두환 전 대통령 시절) 외채망국론이 나올 때는 플라자 협정이 맺어져 경쟁국들의 화폐가치는 크게 높아졌으나 한국만 원화 약세여서 수출이 잘됐어요. 한국은 지금까지 ‘운’으로 잘 지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하지만 지금부터는 제대로 된 경제정책이 나오지 않는다면 커다란 문제가 발생할 겁니다. 벌써 시작되고 있는지도 모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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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위크 2003년 10월 08일 599호 / 2003.10.06 10:25 입력 / 2003.10.06 18:45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