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상한 바람
태풍 하이선이 동해안을 따라 북상해 긴장 속에 보낸 어제가 백로였다. 백로는 처서와 추분 사이 초가을 절기다. 밤에 기온이 내려가고 대기 중 수증기가 엉켜서 풀잎에 이슬이 맺혀 가을 기운이 완연히 나타나는 때다. 세찬 바람에 많은 비를 뿌린 태풍이 할퀴고 지나 일상이 흐트러졌다. 이슬이 내리려면 낮아지는 기온과 대기 중 수증기 외에도 맑은 하늘에 바람이 잔잔해야 한다.
태풍이 내습한 관계로 월요일은 휴업으로 근무를 쉬게 되었고 이튿날은 구월 둘째 화요일이다. 태풍이 경과할 때 한동안 거가대교 통행이 제한되어 거제 복귀가 걱정되었는데 어제 오후 통행이 가능했다. 창원 팔룡동 시외버스터미널에서 고현행 버스를 타고 거제로 건너왔다. 새벽녘 잠을 깨 셔츠를 다림질해 놓고 아침밥을 해결했다. 다섯 시 반에 와실을 나서 연사 들판으로 나갔다.
어제 통과한 태풍의 여운이 그대로 남은 날씨였다. 하늘은 소나기라도 내릴 듯 짙은 먹구름이 뭉실뭉실 엉켜 있었다. 구름도 구름이지만 바람이 세차게 일었다. 열기를 품은 바람이 아닌 시원한 바람이었다. 가을로 바뀐 계절의 삽상한 바람이라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들판 가장자리 자라는 부들이 드러눕다시피 바람에 일렁거렸다. 이삭이 패어 고물이 차 가는 벼들도 마찬가지였다.
농로로 들어 들녘 한복판을 걸었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벼이삭이나 풀잎에 이슬이 맺힐 때인데 그럴 여건이 못 되었다. 기온이 낮아지고 대기 중 수증기만으로는 이슬을 맺을 수 없었다. 태풍은 소멸되었으나 아직 바람이 세차게 불고 간밤 구름이 끼었으니 이슬이 맺히는 필요 요건을 충족하지 못했다. 제법 너른 연사 들판 농지는 이번 태풍에 잠기지 않았고 쓰러진 벼들은 적었다.
들판에서 연초천 둑으로 올랐다. 천변 둑길에는 이른 아침 산책을 나온 이들이 가끔 지나쳤다. 대금산 꼭뒤에서 발원한 연초천이다. 이목에 연초 담수호로 물을 가두고 넘치는 물이 내려왔다. 태풍으로 강수량이 많아 연초천 냇물은 평소보다 불어나 너울너울 흘렀다. 연초교를 지나면 기수역이 되어 민물을 마중 나온 바닷물과 섞여 고현만으로 들었다. 진동만에서 검푸른 해수가 된다.
둑길을 걸으니 일렁이는 바람으로 상쾌함이 더 느껴졌다. 이제 장맛비와 연이어 찾아온 태풍이 지겹다. 철이 철인만큼 장맛비야 더 오겠느냐마는 태풍은 알 수가 없다. 지금이 구월 초순이니 시월 중순까지 한 달이 더 남아 있지 않은가. 올해는 고수온 해역에서 발생하는 태풍이 유독 우리나라로 곧장 달려오고 있다. 가을이면 C자로 틀어 일본 열도를 따라 가더라만 특이 현상이다.
산책로 길섶에는 당국에서 가꾼 코스모스가 피어났다. 늦은 봄 노란 금계국이 화사했던 둑길이었다. 금계국이 시든 줄기를 제거하고 코스모스 씨앗을 뿌렸다. 금계국은 여러해살이고 코스모스는 한해살이다. 장마철에 코스모스 씨앗을 뿌려 잎줄기가 자랄 겨를이 있을까 싶었는데 잎줄기가 낮게 자라는 개량종 코스모스였다. 코스모스는 파종 후 한 달여 만에 알록달록한 꽃을 피웠다.
연효교를 지나 연사마을을 바라보며 둑길을 걸었다. 연초삼거리를 앞두고 횡단보도를 건너 학교로 향했다. 주말 사이 연사마을 진입로 산기슭 나주 정씨 선산은 자손들이 벌초를 깔끔하게 마쳐 놓았다. 태풍으로 많은 비가 내려 산언덕에서 쏟아진 자갈돌이 보도를 덮쳐 차도까지 깔려 있었다. 행정 당국에선 다른 곳이 더 급한 데가 있는지 태풍을 수습하는 인력이 미치지 않은 듯했다.
교정으로 드니 당직 노인은 운동장에서 맨발걷기로 건강을 다졌다. 지난번 마이삭 태풍 때 교정 운동장 스탠드 캐노피가 폭격을 맞은 듯 폭삭 망가져 부서졌다. 국기 게양대도 무너졌다. 하이산 태풍에 2차 피해를 막으려고 지붕 덮개는 서둘러 철거했으나 골조는 치울 겨를은 없었다. 본관을 둘러 뒤뜰로 가보았다. 내가 심어 가꾼 봉숭아는 태풍에 기울어져도 꽃송이를 달고 있었다. 20.09.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