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봄에 버리고 얻은 것 최 건 차
요즘에는 가방을 손에 드는 것은 일상적이고 등에 메고 다니는 것도 어색하지 않아 보인다. 산행시에는 당연하고 넥타이를 맨 정장에도 배낭을 메고 다니는 것을 어디서나 쉽게 볼 수가 있다. 더욱이 그냥 나들이에도 등산복을 입거나 거기다 배낭까지 메고 거리를 활보하고 있어 이제는 간편한 게 유행의 패턴인 것 같다. 이런 현상을 대하자니 어린 시절 옆으로 메고 등에 메는 가방 때문에 고통받았던 아련한 추억이 생각난다. 이제는 시달림도 흉보일 일이 없어 등산에는 물론 일반 나들이에도 가방을 멘다. 더욱이 정장에 코트를 걸치고서도 배낭이 편리해서 메게 된다.
반세기가 넘도록 세월이 많이 흘러간 1948년 4월 초 나는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장흥군 일대의 유지셨던 외할아버지의 강권으로 아버지가 오지였던 유치면 호적담당 서기가 되어 그 곳에 가 살게 되었다. 나는 일본에서 입고 나온 양복에 검은 운동화를 신고 가방을 옆으로 메고 학교에 다녔다. 일본 교토에서 비단공장을 경영하면서 괜찮게 사시던 작은외할아버지께서 선물로 주신 고급 수재 가죽가방이었다. 그게 아이들 눈에 거슬리게 보여 얻어맞고 따돌림을 심하게 당할 줄은 몰랐다.
면 소재지의 우리 마을을 조금만 벗어나면 넓은 분지로 된 첩첩의 깊은 산골짜기가 많았다. 깊은 산속이나 골짜기의 산자락에는 화전민들이 살고 있었는데, 호랑이와 곰 늑대가 살고 있다고 했다. 밝은 낮에도 멧돼지들이 돌아다니고 노루가 산마루를 뛰어다녔고 힐끔거리며 어슬렁거리는 여우가 얄밉게 보였다. 산골 아이들은 짚신이나 일본식 게다를 신고 책보자기를 허리에다 질끈 둘러메고서는 맨발에 무명옷을 대강 걸치고 다니는 게 보통이었다. 먼지가 푸석푸석 나고 돌자갈이 많은 길에서는 짚신이 괜찮은데 게다는 불편해서 벗어들고 그냥 뛰어다닌다.
어느 날 집으로 가는 길에 흙먼지를 일으키며 놀이에 한창인 애들이 보였다. 그들 틈에 끼어들고 싶었지만 여럿이 쏘아보는 통에 해코지를 당할까 봐 얼른 피해갔다. 왜 나를 받아주지 않을까 고민에 빠져들었다. 아마도 일본에서 가져온 가방을 메고 다니는 것이 그들에게 안 좋게 보였고, 신발과 의복도 문제였던 것 같다. 그래서 애들과 똑같은 옷과 신발에 책보자기를 메야겠다는 생각에 골똘했다. 그애들과 어울리며 자치기를 하고 딱지와 구술 따먹기를 하면서 뛰어다니고 싶었다.
그런 분위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그 날도 공부를 마치고 혼자서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물레방앗간이 있는 으슥한 길모퉁이에 들어섰을 때 한 패거리의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길을 막아섰다. 아이들은 벌써 주먹다짐을 하려는 자세로 시비를 걸며 한 명이 다짜고짜로 가방끈을 끌어당기고 나머지 애들은 내 가방에 돌멩이와 흙을 집어넣었다. 나는 두려움에 질려 소리를 지르며 가방을 벗어던지고 헐떡거리며 집으로 달려갔다. 빈 몸인 것을 본 어머니가 “얘야 네 책가방을 어떻게 했어?”라고 물으셨다. 나는 “애들이 가방을 메고 다닌다고 놀려대고 괴롭히기에 길에다 던져버리고 왔어요”라고 했다. 이에 어머니는 내 손을 잡고 가방을 버렸다는 지점에 가봤으나 벌써 없어진 후였다. 그 가방에는 우리나라에서 처음 나온 국어와 산수 교과서 외 두 권의 공책이며 새 필통에는 연필과 지우개도 들어있었다.
내가 입학을 하던 해에 여섯 살 위의 형이 졸업했고, 누나가 4학년이 되었다. 형과 누나는 나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았다. 그 날 저녁 면사무소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온 아버지가 어머니와 나를 앉혀놓고 꾸짖었다. 그 가방은 작은외할아버지가 사준 특별한 물건인데 귀한 교과서까지 몽땅 잃어버렸으니 공부를 어떻게 할 것이냐고 걱정을 하셨다. 하지만 나는 놀림거리가 되는 가방이 없어졌으니 책보자기를 멜 것이라는 기대감에 들떴는데 상황은 그게 아니었다. 어머니는 형이 메고 다녔던 가죽가방을 내주시면서 절대로 잃어버리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셨다.
그럭저럭 학교는 그냥 다니고 있었다. 외가로 친척이신 담임선생님이 어머니의 부탁으로 각별하게 살피는 것이 감시를 당하는 것 같아 더 싫었다. 어쨌든 가방이 귀찮아 어디다 버릴 구실이 생겼으면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또 심상치 않은 애들을 호젓한 길에서 만나게 되었다. 애들은 나더러 야 일본놈 우체부 새끼야 우리의 편지 좀 내놔 보라며 가방을 잡아당기고 돌과 흙을 집어넣으려 했다. 나는 이때다 싶어 가방을 벗어던지고 집으로 뛰었다. 어머니의 성화로 또 버렸던 곳에 가봤지만 역시 찾을 수가 없었다. 나는 맘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러나 그날 밤 처음으로 화가 나신 아버지한테 회초리로 종아리에 피멍이 들도록 매를 맞았다.
드디어 가방을 면하게 되었다. 옷과 신발은 아직 그대로였지만 우선 책보자기를 메게 되어 너무 좋았다. 그 책보자기는 외할머니가 주신 어머니의 치마를 그 밤에 삭둑 잘라서 만들어주신 것이었다. 어머니는 오죽하면 그랬겠느냐며 피멍이 든 종아리를 어루만져 주셨다. 나는 다음 날부터 날개를 단 듯이 뛰어다니면서 아이들 속으로 들어가 딱지를 꺼내 치고 구슬 따먹기를 하면서 학교에 잘 다녔다.
2025.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