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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가지 비유와 새것과 옛것(3)
마 13:44-58
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45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46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
47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48 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 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버리느니라
49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 내어
50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리라
51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 하시니 대답하되 그러하오이다
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
53 예수께서 이 모든 비유를 마치신 후에 그 곳을 떠나서
54 고향으로 돌아가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그들이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냐
55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56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런즉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냐 하고
57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고
58 그들이 믿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아니하시니라
마 13:44-58 / [보물, 진주, 그물 비유] 하늘나라는 밭에 묻혀 있는 보물과 같다.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흥분하여 그 밭을 사기 위해 있는 것을 모두 팔아 돈을 마련한다. 그래서 밭을 살뿐만 아니라 보물까지도 얻는다! 45) 또 하늘나라는 값진 진주를 구하기 위해 찾아 다니는 장사꾼과 같다. 46) 그는 값진 진주를 발견하면 있는 것을 다 팔아 그것을 산다. 47) 또 하늘나라는 바다에 친 그물에 비길 수 있다. 어부는 바다에 그물을 던져 모든 종류의 물고기를 다 모은다. 48) 그물이 가득 차면 그는 해변에 끌어올려 놓고 먹을 수 있는 고기만 추려 그릇에 담고 다른 것은 던져 버린다. 49) 세상 끝 날에도 이와 같은 일이 있을 것이다. 천사들이 와서 믿음이 깊은 사람들 사이에 끼여 있는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50) 악한 자들은 불구덩이에 던져 넣을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서 통곡하며 몸부림 칠 것이다.' 51)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내 말을 알아 들었느냐?' 하고 묻자 제자들은 `예, 알아들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52) 예수께서 덧붙여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하늘나라에 대한 가르침을 받은 율법학자들은 자기 곳간에서 옛 것도 꺼내고 새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 53) [고향 사람들의 배척;막6:1-6,눅4:16-30] 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다 말씀하시고 나서 그곳을 떠나 54) 고향인 갈릴리 나사렛으로 가서 회당에서 가르치셨다. 사람들은 예수의 가르침에 놀라 `어디서 저런 지혜와 능력을 얻었을까? 55) 그는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며, 그의 형제들인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도 우리는 다 알고 있다. 56) 그의 누이들도 다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어떻게 저런 큰사람이 되었을까?' 57) 하면서 반감을 갖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예수께서 그들에게 `어디서나 존경을 받는 예언자도 자기 고향과 집안 사람들에게서만은 존경을 받지 못한다' 고 말씀하시고 58)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별로 이적을 베푸시지 않았다.
< 설 교 >
불신앙의 결과
마 13:53-58 / 박지온 목사
오늘 본문에서 제목을 "불신앙의 결과"라 그렇게 했습니다. 사실은 신앙의 기적과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데도, 불신앙 함으로 하나님께서 또 주님께서 이루실 축복의 능력을 제한 받았던, 예수님의 고향에서의 있었던 일들을 배경으로 오늘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어저께 잠깐 우리 청년들이 주최한 송현의 밤에 참여를 했습니다. 참여하면서 잠깐 제가 옛날 사진을 보고, 뭔가 한번 지나간 세월에 대해서 조금 생각을 해 봤어요. 저녁을 제가 먹고 난 후에 뭔가 이 사진을 쭉 붙여놓아서, 또 그리고 방명록도 있고 그래서 한번 가 보았습니다. 가 보았는데, 우리 청년들이 1회는 '목화 예식장' 인가 여기서 한 것 같고, 2회는 이제 '글로리아 웨딩' 에서 그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마침 제가 이 사진을 보고 있으니까, 옆에 우리 청년들이, 여 청년들이 둘, 셋이 같이 보고 있었는데, 이렇게 보니까, 뭐 '박지온 목사!' 그러고 써 놓았는 난이 있어서 제가 보니까, 옛날에 해군시절에 찍었던 사진하고, 또 그리고 제가 이 신학교 졸업할 때의 사각모자를 쓰고 졸업했던 그 사진하고, 또 그 위에 하나 보니까 뭐냐하면 졸업 때 이제 찍었는데, 왠 여자가 하나 옆에 있어요. 둘이 같이 찍었습니다. 찍었는데, 우리 그 여 청년들이 '목사님, 누구입니까?' 그래요. 그래서 '내 애인이다!' 그랬어요. 그러니까 이제 제 얼굴을 한참 쳐다봐요. '왜, 목사님이 이런 애인을 두고 있었는가?' 싶었던가 봐요. 나도 가만히 쳐다보고, '지금도 가까이 있잖아 그러니까!' 이해가 안 되는가 봐요. 왜? 옛날에는 날씬했거든요. 지금은 완전히 뚱보거든요... 워낙 비교가 되니까, 지금 현재 나와 함께 살고 있는 애인이라는 말이 이해가 안 되는가 봐요. 따로 '옛날에 목사님 애인인가보다!' 그렇게 생각되었는가 봐요.
그래서 제가 그러고는 자리에 앉아 가지고 좀 생각을 해 봤습니다. 보니까 결혼한지가 30년이 넘어요. 31년 정도 되었고, 그리고 저는 그 사진을 찍을 그때만 해도 결혼전입니다. 약혼을 해 놓고, 졸업한다고 와 가지고 사진을 찍었는데, 그때만 해도 제가 마음에, 참 시골에 한 청년이 그냥 그것도 중학교를 억지로 졸업하고, 뭔가 이 어머니의 꿈을 따라서 목회자가 되라는 그런 어떤 배경에서 집을 나오게 되고, 그러다가 이제 신학교에 들어가고 그러면서 이제 결혼직전에, 졸업직전에 같이 만났고, 여기도 저 진주 골짜기에서, 또 그렇게 가정도 부유하고 그런 것도 아니고, 또 어려운 중에서 만났고, 그러면서 30년 간을 이름 없이 아무것도 없는데서...
사실은 아마 제가 이런 이야기를 많이 했기 때문에 별로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만은, 2만원 들고 결혼했거든요. 그러니까 저희 장인 어른이 '도적놈 아니냐...' 이러더라 구요. 요즘도 2만원 들고 가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때에 돈을 안 준 것 아닙니다. 돈을 줬지만 신학교 학자금을 대야 되니까, 거기 다 돈을 넣어야 되고 하니까, 그렇게 할 수도 없었고, 그랬었는데 다만 생명으로,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시다!' 이걸로 제 인생을 시작을 했었습니다. 그전에도 인생을 시작했지만 제가 모험을 하면서 시작한 것은 그 배경이거든요.
그랬던 후에 30년이 지나면서, 제가 그 자리에 이제 먹고 마시면서 오늘에 이른 이런 삶을 제가 이렇게 보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얼마나 컸느냐! 죽을 뻔한 적도 있었고, 또 큰 수술도 하고, 그러면서 또 살아 가지고... 아직도 뭔가 할 일이 남았는지,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 있구나! 상당히 좀 감회가 있더라 구요. 그러면서 제가 청년들을 보면서, 하나님이 저들에게 무슨 계획을 세우실지 모른다! 무한한 가능성, 무한한 하나님의 축복의 계획을 더욱 가슴에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격려사를 하면서, 잠깐 이 말하면서 '시작은 미약하지만 여러분의 인생을 고백할 때는 엄청난 모임이 될 것이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들이 믿음으로 생을 시작하고, 믿음으로 나가게 되면, 하나님이 생활 삶 자체를 기적으로 인도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이제 믿음으로 시작하지 않고, 믿음으로 나가지 않으면 그런 모든 기적과 역사를 하나님은 제한시켜 버립니다. 움츠려지게 되는 거죠.
그래서 오늘 본문에 내용이, 이 불신앙 때문에 예수님의 고향에서 기적을 전혀 행하지를 못했습니다. 능력을 행치 못했습니다. 왜? 믿음의 배경이 안되니까! 기적은 믿음의 배경이 되어야 나오게 되는 것을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가장 좋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좋은 줄 모르는 만큼 불쌍한 일이 없거든요. 뭐 예를 들어서 쌀이 없어서 굶어죽는 쥐는 뭐 그건 현실인 거죠. 그러나 쌀 창고 속에서 굶어죽었다! 그러면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거든요. 나는 그 성도들의 삶이란 것이 바로 이런 부분입니다. 엄청난 양식과, 풍성한 축복과, 기적의 역사 속에 있으면서도 말라죽는다! 굶어죽는다! 그게 바로 오늘날 불신앙을 가진 신앙생활의 결론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보면 볼수록 엄청난 축복과 역사를 담아놓았다는 것보다도, 부어 놓았다고 할 만큼, 이런 어떤 배경들을 우리가 가지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3장 58절에 보면,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인하여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치 아니하시니라" 믿지 않기 때문에 능력이 나갈 수 없었다! 그랬습니다. 믿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축복의 역사가 실현될 수 없었다! 그렇게 말씀을 해 주시고 있습니다. 능력의 예수님이 능력을 행하지 못한 것이 불신앙 입니다. 바로 교회 속에 엄청난 축복과 역사, 개인 속에 그 이름가지고 믿음으로 나갈 때는 얼마든지 하나님이 축복하시고, 역사 하실 가정과 가문에 믿음이 없기에 이 모든 축복과 역사 갇혀있다! 그러면, 이것만큼 불행한 일이 없다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19장 26절에 보면,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그랬습니다. 우리 힘으로, 우리 능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은 어차피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고, 하나님의 역사로 인도 받고 살아야 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9장 23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거의 우리 삶이 불신앙 배경으로 삽니다. 거의 우리 삶이...
로마서 1장 16절에 보면,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그랬습니다. 복음을 부끄러워 할 이유도 없고, 부끄러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왜?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엄청난 이 축복과 역사가 여러분과 제게 약속 정도가 아니라 이 축복과 은혜를 쏟아 부어 놓았다는 것을 말씀을 해 주시고 있습니다. 이같이 능력의 주님이 얼마든지 기적을 이루실수 있는데 우리에게 행해지지 아니한다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능력이나 은혜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뭐냐?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이 결론이 성경입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에 보면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다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능력이나, 또 그리스도 안에 그 권능과 그 역사가 은혜로 이루어지는데, 그 은혜로 이루어지는 그 축복된 능력의 역사, 은혜의 역사가 믿음이라는 방편을 통해서, 믿음이라는 방편에서, 배경을 통해서 개인과 가정과 교회에 성취되고 이루어진다라는 말씀을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나온 배경을 가지고, 왜 , 그러면 불신앙에 빠졌느냐? 이 문제를 좀 살펴보아야 되겠습니다. 성경은 그 문제를 다음과 같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뭐냐하면 학문적인 결핍 때문이다! 그렇게 말씀을 해 주시고 있습니다. 13장 54절에 보면, "고향으로 돌아가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저희가 놀라 가로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뇨" 그랬습니다. 예수 자신이 지혜이시오, 예수님 자신이 지혜의 근본이신데도 그게 이해가 안되니까! 뭐냐하면, 예수님을 보면서 공부도 안 했는데, 랍비도 아닌데, '이 지혜와 이 능력이 어디서 났느뇨?' 예수님 것이 아니고 다른 어디서 빌려온 것처럼, 잠시 마술을 행해서 가져온 것처럼, 이렇게 이해를 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인간적인 예수님의 학문의 결핍, 그런 어떤 배경으로 예수님을 전혀 이해를 못했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13장 55절에 보면,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모친은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마 13:56)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런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뇨" 그랬습니다. 그 다음에 또 말씀한 것이 또 뭐냐하면, 그들이 그의 친척 예수님의 친척들을 보고 불신앙에 빠졌다! 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부모와 예수님의 형제들이 고향에 남아 있습니다. 그들과 같이 생활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아버지가 목수 아닙니까! '목수' 그럴 때에 유대사회에서 그렇게 뭔가 추앙 받는 그런 어떤 직장이나 배경이 아닌 것으로 그렇게 보여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형제들의 삶이 그렇게 부자로 추앙 받는 그런 삶이 아니다, 그렇게 평범한 그런 어떤 삶이라! 이렇게 보여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의 부모와 그의 형제를 보고 그를 비난하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불신앙 하게 되었다고 성경은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가 보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육신적인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불 신앙에 빠졌다!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뭐 쉽게 말해서 우리가 지금 다락방 한다! 전도한다! 특별히 완벽한 복음이다! 그리고 율법주의와 신비주의와 근본적으로 이것은 복음의 차이를 말하고 있다! 그러면 다른 문제가 아닙니다. 영적 문제에 해결할 수 있는 능력과 힘이 복음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 속에는 이게 안됩니다. 신비는 영적 문제를 더해줍니다. 다시 말해서, 여러분 복음이라 그럴 때에, 예수 그리스도라 그럴 때에, 영적인 눈으로 바로 보지 못하고, 영적인 실체를 깨닫지 못하면 예수님의 육체는 이사야에서 말씀한 것처럼, '보잘것없다!' 그랬습니다. '누가 그를 믿으며 누가 그럴 추앙할 수 있겠느냐! 우리가 신뢰할 수 없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 그리스도, 인간적으로는 저 구유에 나셨고, 나심부터 시작해서 그의 죽으심은 십자가에서 비참하고 처참하게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눈으로 바라볼 때에 그렇게 해야 만이, 또 그렇게 하는 과정이 영원한 멸망과 죽음에서 해방시키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 영적인 눈이 열리지 아니하면 예수그리스도의 그 엄청난 축복과 역사와 그 능력이 구체적으로 우리의 삶에, 개인에게 적용될 수가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것은, 보이는 것 보다 보이지 않는 것!
그래서 신앙생활에 가장 하나님의 축복과 역사를 그르치게 만드는 것이 뭐냐하면, 기복신앙이라! 그러지 않습니까! 뭔가 우리가 육신적인 것을 보고 판단하는 것, 유대인들이 지금까지도 예수 그리스도를 그리스도로, 메시아로 보지 못하는 배경이 뭐냐하면? 기복입니다. 그들은 '예수 잘 믿는다! 하나님을 잘 믿는다!' 그러면 바로 물질이 풍성하다! 이것과 직결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어느 새인가 모르게 이런 어떤 배경으로 끌려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꼭 가난한 것이 잘 믿는 것이다! 그런 말과 다른 이야기입니다. 우리 자신도 모르게 신앙생활 하다보면, 오랫동안 신앙생활 하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여기에 빠져 있습니다. 육신적인 것에 빠져 있다! 그 말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큰 능력과 역사가 우리 개인과 가정에 역사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막아버리는 것을 성경은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진짜 기적은 육신적인 것으로서는 볼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마태복음 8장이나, 또 마가복음 5장이나 여기에 보면, 불치병으로 나았던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 기적들을 봤던 그들이 예수님이 진짜 구원을 이루시는, 진짜 영원한 해방을 주시는, 복음의 진짜 축복이 십자가 아닙니까! 십자가 지실 때에 다 도망갔습니다. 베드로! 우리 예수님의 수제자입니다. 너무 잘 알죠. 예수님의 신뢰도 받았습니다. 실수도 많았지만은 그는 중심으로 '이 사람들 보다 더 사랑합니다!' 라고 고백할 정도로, 작심 모든 사람들보다도 내가 제일 예수님을 사랑하고, 제일 따른다고 했던 베드로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진짜 복음을 말했을 때에, '주여 그리마옵소서!' 말렸습니다.
거기 보면, '간하여 가로되' 그랬습니다. '간하여' 라는 말은 옛날에 제가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질책하며 나무랐더라! 그랬습니다. '예수께서 하신 일이 그렇게 유치하냐? 무슨 그런 일 하시느냐고...' 참 축복과 참 예수 그리스도, 메시아 역사와 사실을 이루시는 진짜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럴 때에 예수께서 돌이켜서 뭐라고 말씀했습니까? '사단아, 네 뒤로 물러가라!' 그랬습니다.
여기에서 예수께서 참으로 이루시는 축복된 본질과 사실을 보지 못했을 때에, 베드로도 진짜 하나님의 축복과 역사를 보지 못했을 때에,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가 그 속에 일어난 사실을 보지 못했을 때에, 실패한 사실들을 우리가 보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진짜 완전한 것으로 보게 되고, 진짜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문제 해결된다는 사실부터 믿음이 시작이 되어진다! 그럴 때에, 여러분의 일생과 우리 교회와 이 땅에 장래는 달라져 버립니다. 오늘까지 '믿고 있다!' 그러면서도 이 축복된, 완벽한 해결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모든 문제 여기에서 완전히 끝났구나! 하는 사실들이 진짜 복음에서부터 출발이 안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뭔가 다 나변의 것으로...
그래서 성경에서 우리에게 보여 준대로 사도행전 5장이라든가, 또 사도행전 13장이라던가, 어떤 면에서 보면 마음은 다른데 가 있어요. 입으로는 예수 그리스도 말하지만, 마음은 다른데 가 있습니다. 많은 교인들이 진짜 복음에서부터 시작하고, 진짜 복음 위해서 답을 갖고 시작한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 부를 때마다, 우리가 알게 모르게 엄청난 축복과 역사와 능력의 역사가 계속되어지고, 그 계속은 우리 생애와 나가서 이 땅과 세계를 완벽하게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는 사실을 성경이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중요한 지점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 교회로서도 그리고 시대적으로도 중요한 지점에 놓여 있습니다. 평생을 예수 믿었고, 또 우리 교회 적으로도 역사가 벌써 10단위가 넘어갑니다. 우리 교회가 시작한지도 한 25년, 그런 시간이 벌써 지나왔습니다. 지금 이런 시점에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그리고 진짜 완벽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어느 정도 믿고, 또 믿음으로 앞으로 나갈 것인가! 이것이 앞으로 일어날 하나님의 역사와 축복을 좌우하는 배경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도 우리도 알지 못하게 지금까지, 우리가 믿는다 하면서도 우리 자신도 모르게 율법으로 빠져 있습니다. 이 말은 전부 육신 적으로 빠졌다는 배경이 됩니다. 그 다음에 인본주의로 빠져 있습니다. 신비주의로 빠져 있습니다. 혹은 우리도 알지 못하게 예수 믿고 시간이 가면서 뭐냐? 지식주의로 빠져 버렸습니다. 또 더 나아가서 철학 배경으로 빠져버렸습니다. 그리스도를 주장한다! 그러면서도 자꾸 다른 것으로 빠져 버렸습니다.
저는 그 조는 사람들을 이렇게 분석해 보면요, 참 재미있는 모습을 봐요. 처음 믿는 사람들은 졸아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졸아요. 표나게 좁니다. 그런데 오래 믿는 사람들은 절대로 표 안 납니다. 딱 턱을 고우고 눈을 딱 뜨고 좁니다. '야, 예수 오래 믿으면 저렇게 변화가 되는가 보다!' 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데, 다른 짓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정말 예수 그리스도 진짜 복음으로 바로 시작한다 그러면 역사가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진짜 복음으로 시작하고, 예수 그리스도로 완벽하게 시작했다! 그러면 시간 시간마다 말씀은 여러분 속에서, 삶과 생활의 현실 속에서 변화의 역사를 가져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말씀이 실제로 기다려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이상하게도 다른 것으로 빠져버렸습니다. 시간가면 갈수록...
그래서 제가 요즘은 그런 말씀을 많이 안 씁니다. 묵은 디이라는 말을 제가 많이 안 썼습니까! 진짜 묵은 디이 문제! 우리는 묵은 디이가 될 수 없어요. 날마다 새것입니다. '보라, 새로운 피조물이라!' 날마다! 그래서 복음과 삶과 생활에 날마다 새것으로, 날마다 새로운 것으로 하나님의 인도와 역사가 되어야 될 것을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이 일이 지금 우리에게, 아마 지금 이 시점에서 시급한 그런 부분이다! 전도와 선교 다 아닙니까! 그렇지만 말로 다하지, 진짜 우리 마음, 본 마음은 다른데 가 있어요. 그리고 다락방, 심지어는 말해서 내 개인에게 지금 하나님의 말씀으로 응답 받는 사실이 다입니다.
그런데 개인은 죽었다가 깨어도 응답이 없는데, 그러면서도 응답 받는 것처럼 간증하고 살아가야 되니, 이게 사람 죽을 노릇입니다. 그러다가 보니 자꾸 육신 적으로 빠집니다. 그러니까 완전한 것은 해답을 얻어야 되는데, 사실적인 답을 가져야 되는데, 완전한 것에 완전한 사실에 체험이 없으니까, 뭐냐? 자꾸 같다가 붙이는 겁니다. 방법도 갔다가 붙이고, 노력도 갔다가 붙이고, 여러분과 저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부족하지 않습니다. 여러분과 제게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은 내가 뭘 붙여야 되고, 붙여야 이루어 주실 연약한 분이 아니십니다. 완벽한 분이십니다. 오늘도 그 이름을 부르면, 누구든지 그 이름 부르면 구원 얻을 것이라! 그랬습니다. 그 이름 안에 모든 것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사실을 구체적으로 '왕, 제사장, 선지자!' 지난번에 메시지 듣는 동안에, '이것을 굳이 설명할 필요가 뭐 있느냐? 설명해도 잘 모를 것인데...' 그러더라 구요. 이 잘 모를 겁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 운명 속에서 완전히 해방 받아버렸습니다. 영원한 멸망 속으로 끌고 갈 여러분의 운명 속에서 완전히 해방 받았습니다. 왜, 해방 받았느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자녀가 되는 순간에 모든 축복을 다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시간표 따라서 누리면 된다! 그랬습니다. 이 사실을 믿어야 됩니다. 여러분과 저는 누리면 됩니다. 믿어야 됩니다!
로마서 8장 2절입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눌리는 것 같고, 힘드는 것 같고, 괴로운 것 같고, 아닙니다. 착각하지 마세요.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으로 완전히 해방 받았습니다. 여러분과 제게 흑암과 사단의 세력이 가정과 가문으로 오는 것 같지만 이미 끝나버렸습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 완벽하게 해결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잘못이 없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잘못하는 것까지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다 해결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가기만 하면 됩니다. 누구의 이름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가면 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놀라운 은혜와 역사로 약속했습니다.
요한 일서 3장 8절에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 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뭐라 그랬어요?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여러분 여기서 모든 답이 안 나옵니까! 여러분이 실패하고 여러분이 망하게 되는 배경이, 능력이 증거 되지 못하는 배경이, 지금도 불 신앙 때문에 흑암에 세력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흑암에 세력이 쫓겨났습니다. 꺾였습니다. 해결될 것입니다. 시간표에 따르는 겁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이 사실과 역사를 구체적으로 이루어 나가실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뭐냐하면, 지금 완벽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 체험한 필요가 있다! 그 이야기입니다. 체험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번만 맛보면 해결됩니다. 그런데 이것을 맛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내가 계속해서 믿지를 못해요. 아니 믿고 싶어도 믿지 못하는 배경이 뭐냐? 한번만 경험해 버리면, '아, 맞아! 예수 참 내게 그리스도야!'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흑암과 사단의 세력이 해결된다는 사실이 한번만 와져버리면, 그 다음에는 문제나 사건 당할 때마다 믿어지는데, 신앙으로 받아들여지는데, 이게 안되니까! 자꾸 불 신앙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그렇게 한번 말하고 싶어요. 여러분 정말 '예수 그리스도! 정말 복음이 다구나! 이렇게 복음이 위대할 수 있느냐!' 한번쯤은 체험하고 미쳐볼 필요가 있습니다. 미친다는 것이 이상해진다는 말이 아니라, 미친다는 것은 바울의 용어로 뭡니까? 집중한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한번쯤은 '주 예수 그리스도!'하고 밤마다 돌아다녀 볼 수 있는 이런 일이 필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름 너무 귀중하고 너무나 위대하구나' 그래서 그렇게 될 때에는 앉으나 서나 예수 그리스도 이름 자랑하고 싶고, 영광돌리고 싶고, 그렇게 되게 되어 있습니다.
이 사실이 어떻게 누려지느냐? 기도한다는 말을 늘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는 되어 진다, 되어 진다! 문제는 앞에 누려지는 것이 되면 기도는 되어지게 되는데, 이게 안 된다 그럴 때는 기도를 해야죠. 여러분들이 시간과 날짜를 정해놓고, 아니면 장소를 정해놓고 기도를 하면, 그래서 한번만이라도 기도가 응답되는구나! 사실이 딱 부닥치게 되면, 그 다음에는 뭡니까? 기도할 때마다 믿음이 생기는 것 아닙니까! 이게 안되면 암만해도 안 되더라는 불 신앙이 먼저 배경이 됩니다. 그건 하나님의 능력이 나올 수가 없는 거죠. 기도하면서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또 안될걸...' 이러고 있습니다. 한번만이라도 그대로 성취되는 것이 와져버리면,'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맞아 된다!' 지금 안 된다! 이 말이 이것이 별로 보이지 않습니다. 됩니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들일수록 고백하는 것을 듣습니다. 기도는 절대로 공짜가 없다고 그러더라 구요. 오늘 아침에 우리 집사람이, 아무 게 집사가 그러더라 그래요. '기도는 공짜가 없다!' 고 그러더라 그래요. '무슨 공짜가 없다가 뭐냐? 공이 없다는 말이지, 헛일하는 게 없다는 그 말이지 무슨 공짜가 없다! 기도도 무슨 공로가 들어가야 되고 힘이 들어가야 되고 뭐 그래야 되는 건가? 기도는 다 공짜이지만 헛일이 없다!' 여러분 나도 고백할 수 있습니다. 어머니의 기도가 공짜가 없어요. 자식의 기도가 공짜가 없어요. 부모의 기도가 공짜가 없습니다. 헛일이 없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오늘 여러분과 저의 기도가 공짜가 없습니다.
새삼스럽게 말씀합니다. 저 시골에 집을 떠나기 직전에, 그 날밤에 나는 가출하면서도 기도하고 가출했거든요. 그 날 밤에 기도하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했던 그 기도가 오늘 다 이루어졌습니다! 누가 그때에 이런 자리에, 이 자리에 목사로 설 수 있다고 누가 알았겠습니까! 옛날 그때 중학교 졸업하고, 그리고 집을 가출하면서 기도했던 그 기도 다 이루어 졌습니다. 하나님이 이루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기도하는 사람들마다 고백하는 것은, '기도는 헛일이 없다!' 그랬습니다. 이 사실이 한번만 이루어졌다! 그러면 여러분 삶에서 예수는 그리스도시다! 누린다는 말이 저절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혹시 오늘 이 말씀을 들으면서 '안 돼!' 하는 사람들은 한번 해보시고 안 되라고 그러세요. 해 보도 안하고 안 되라고 그러는 것은, 그건 진짜 악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기도응답 없는 사람은 진짜 악한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 마음에 다시 한번 이 시점에서 확인 가지시고, 정말 하나님께서 새로운 교회를 건축해 나가고, 그 다음에 이 대구와 전 세계를 복음화 하기 직전에, 하나님의 교회와 여러분들을 세우신 이 시점에서 우리의 신앙이 과연 그 축복 받은 그 은혜의 역사 속에 우리가 설 수 있는 자리가 되어 있느냐? 설 수 있는 믿음이 되어있는가?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능력 없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능력이 없어서 하나님의 능력을 보지 못할 뿐입니다. 이 역사 속에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중요한 메시지로, 이 사실을 다시 한번 붙잡아야 되겠습니다. 이 사실을 맛보기만 하면, 맛보기만 하면 순간 순간마다 무슨 생각이 듭니까? 지금도 이루어 가십니다! '지금도 성취해 가는구나!' 하는 사실이 이해하고 깨달아 지게 됩니다.
그러면 이제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세 가지 우리가 너무 찌들려 있던 것을 고쳐야 됩니다. 불 신앙의 체질! 그게 뭐냐하면 율법체질입니다. 뭐든지 '안 된다, 된다!'로 보는 것! 여러분과 저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로 세우셨습니다. 뭐든지 '된다!' 이게 좀 자꾸 뭔가, 이 육신 적으로 이 말을 흘러가기가 될 것 같아서 염려스러워요. 여러분과 저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백 번 죽었다가 깨도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지옥 갈 수 없습니다. 영원한 축복의 역사 속에 세워놓았습니다. 됩니다. 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받아합시다. "나는 되도록 되어 있다!" 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진짜 믿습니까! 되도록 되어 있어요. 다만 지금현재 시간표가 아니다! 그런 문제죠. 되어 가는 과정일 따름인데, 불 신앙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다음에 여러분과 제가 되도록 되어 있을 때에 중요한 것은, 살아있는 인간은 누구든지 가지고 올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동기입니다. 자기 욕심! 신앙생활하면서 쓸 때 없는 자기 욕심으로 생활할 때가 많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따를 때에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죽이고,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혀 죽어 버렸습니다. 이 문제가 조금만 해결되어도, 그 다음에 문제는 풀려진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모든 것이 그게 따라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때부터 중요하게 나오는 것이 뭡니까? 내 수단과 방법은 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얘를 써도 인간의 수단 방법은 안됩니다. 여러분과 저를 통해서 성령으로 역사 하실 것입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서" '네 삶에 증거주리라!' 여기에 참된 증거거리로 이 증거를 통해서 세계를 일으켜 나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 세계를 일으키기 전에 누구부터 먼저 일으켜야 됩니까? 참 복음 붙잡고 완전한 그리스도 붙잡게 되면 제일 먼저 일어나는 것이 자신입니다. 제일 먼저 일어나는 것이 가정입니다. 제일 먼지 일어나는 것이 여러분과 제가 몸담고 있는 교회입니다. 승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능력도 없다
마 13:53-58 / 안효관 목사
누구에게나 고향은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장소입니다. 로마의 철학자인 세네카(Lucius Annaeus Seneca)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의 고향을 사랑하는 것은 그 고향이 아름답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자신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구나 고향을 사랑합니다. 때론 삶이 힘들고 지칠 때에는 고향을 찾아가 옛 생각에 사로잡혀 보기도 하고, 고향에서 함께 나뒹굴던 옛 친구들을 만나 마음에 위로를 얻기도 합니다. 아마도 이 세상에서 고향을 싫어하는 사람은 별반 없을 것입니다. 간혹 고향에 있는 어떤 사람들이 싫어서 고향에 가기 싫다고 말하는 사람은 있을지 모르지만, 고향 그 자체는 항상 마음에 여유와 그리움을 주는 아름답고 정겨운 곳입니다.
예수님에게도 고향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곳은 베들레헴이었지만, 베들레헴이 고향은 아닙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고향은 나사렛이었습니다.(눅 4:16) 그래서 흔히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 혹은 '나사렛 사람 예수'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신 이후 첫 번째로 고향을 방문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당신의 고향에서 환영을 받지 못하셨습니다. 왜 예수님은 고향에서 환영을 받지 못하셨을까? 물론 오늘 본문 57절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가운데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이 말을 반대로 이해하기 쉽게 표현하면 '자기 고향과 자기 집에서 환영을 받고 존경을 받는 선지자는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우리는 종종 이런 현수막이 걸려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축! ○○학교 제 ○회 졸업생 사법시험에 합격." "서울대 합격." 심지어 박사학위 취득을 축하하는 현수막도 걸려 있는 것을 종종 보게 됩니다. 이런 것들은 자기 고향에서 훌륭한 인물이 나왔다는 것을 축하하는 현수막들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우리 후포 출신이셨고,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그 예수님이 고향인 우리 후포를 방문하신다면 우리는 이런 현수막이라도 내 걸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 고향 방문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것이 아니라, 배척을 받으셨습니다. 같은 사건을 기록해 주고 있는 누가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고향을 찾아가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시는데, 그 가르치심을 받은 고향 사람들이 마음에 분이 가득해서 예수님을 동네 밖으로 쫓아냈고, 쫓아낼 뿐만 아니라 낭떠러지에서 밀쳐서 죽이려고까지 했습니다. 왜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토록 미워하셨을까? 이게 우리에게는 궁금증을 일으킵니다.
우리는 그 해답을 오늘 본문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3장에서 예수님께서는 7가지 비유를 들어서 천국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가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 제자들이 대답합니다. "예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천국의 비밀들을 깨달았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 것과 옛 것을 그 곳간에서 내어오는 집 주인과 같으니라."
이 말씀은 천국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많은 보화가 쌓여 있다는 것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천국에 쌓여 있는 보화를 꺼내어 쓰는 사람은 지혜롭고 복된 사람이지만, 천국에 감추어져 있는 그 보화를 알지 못하고 여전히 영적인 거지로 살아가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게 오늘 본문 바로 앞인 51-52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마치시고 예수님께서 고향으로 가셨습니다. 물론 제자들도 함께 갔을 것입니다. 어쩌면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수많은 사람들도 그 뒤를 따라갔을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의 무리를 보면 그야말로 금의환향(錦衣還鄕)하는 행열이였습니다. 갈릴리 지역에서도 가장 낙후된 지역인 나사렛에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한 사람을 따라서 찾아온다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아마도 나사렛 사람들은 그 광경을 보면서 놀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고향을 찾아오시더니 가장 먼저 방문한 곳이 회당이었습니다. 당시 회당은 유대인들의 예배와 교육의 중심자리였습니다. 유대인의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교육기관이 회당이었습니다. 그러기에 '회당' 그러면 가장 먼저 예배가 생각나고, 그 다음이 교육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향을 방문하시자마자 가장 먼저 유대인들이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던 교육의 장소 회당에 찾아가신 것입니다. 아마도 사람들은 처음에는 예수님께서 단순히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혹은 나이 많은 랍비들로부터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 회당에 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회당에서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향하여 가르치셨습니다.
오늘 본문 54절에서 말씀합니다.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저희가 놀라 가로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뇨."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데, 그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왜 놀랐겠습니까? 아마도 두 가지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첫 번째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놀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가르치실 때마다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당시 랍비나 서기관들이 가르친 것과는 사뭇 달랐기 때문입니다. 산상설교를 마친 다음에 그 말씀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해 주었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마 7:28-29) 그 말씀에 권세가 있었습니다. 뭔가 신비한 복음의 비밀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런 복음의 비밀을 가르쳐주신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놀랐습니다. 고향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도 그랬을 것입니다. 말씀을 가르치시는데, 그 가르치심이 지금까지 그들이 회당장이나 랍비 또는 서기관을 통해서 들었던 것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권세가 있고 힘이 있었습니다.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의 권세에 대한 놀라움이 인간적인 감정을 가지고 생각하니까 다른 놀라움으로 바뀌었습니다. 그건 예수님을 인간적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지혜와 능력으로 가르치신 그 말씀에 감동받기 보다는 인간적인 생각을 하게 됩니다. 55절에서 말씀합니다.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다시 말하면 '네가 깨벽쟁이로 동네 거리를 뛰어다니며 개구쟁이 노릇을 할 때부터 우리는 너를 알고 있었다' 그런 의미입니다. '나는 네 아비 요셉도 잘 안다. 요셉은 내 친구였어. 네가 그 놈의 아들 아니더냐? 참 많이 컸구나! 그런데 그런 네가 어찌 아비 같은 우리를 가르치려 하느냐?' 그런 책망과 불쾌한 감정을 드러낸 말입니다.
그냥 유명할 때에는 환영할 수 있습니다. 큰 권세를 가졌고,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아져서 성공했을 때에는 환영할 수 있습니다. 그를 통해서 뭔가 고향에 유익이 될거라는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조금 유명해졌고, 조금 잘 나가는 사람이 되었다고, 조금 권세를 가졌다고 자기들 앞에서 가르치려고 하는 모습은 용납해주지 못합니다. 그게 인간의 자존심입니다. 성공했을 때에는 환영했다가도, 성공한 사람이 자기들보다 우월한 것처럼 행동하거나 말을 하면 금새 팩- 돌아섭니다. '그래 네 놈 참 많이 컸다. 잘 나간다고 이제는 아예 우리를 가르치려고 해!' 그런 마음이 듭니다.
그 알랑한 인간의 자존심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하고 배척하게 만드는 이유였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그들의 말을 통해서 우리가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모친은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런즉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뇨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이 다른 랍비나 서기관들과 같이 많이 배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핑계삼아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그런즉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뇨?" 평생 목수 노릇을 하느라 제대로 학교에 다니지도 못했는데, 그걸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는데, 그런 예수님이 그들 앞에서 가르친다고 하니까 자존심이 그걸 받아들이지 못한 것입니다.
만일 알랑한 자존심을 버릴 수만 있었다면 그들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제대로 랍비 교육도 받지 않은 예수님이 그렇게 놀랍고 능력 있는 말씀을 가르치시는 것을 보니 이건 분명 하나님의 특별한 역사가 아니면 안 된다. 저 예수님의 배후에는 하나님께서 역사하고 계시는구나'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많이 배운 사람이라면 학문적인 지식과 지혜로 그렇게 가르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자기들도 알다시피 예수님은 정식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배우지도 못한 예수님께서 권세와 능력이 있는 말씀을 가르치신다면 뭔가 신적인 능력이 그 배후에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걸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존심 때문입니다. 배우지 못한 것은 니나 내나 똑같은데, 예수님께서 그렇게 능력 있는 말씀을 하시니까 질투도 생기고 시기심도 생긴 것입니다. 자존심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하는데 있어서 가장 큰 장애물을 하나 꼽으라 그런다면 우리 인간의 자존심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존심 때문에 교회 나오고 싶어도 나오지 못한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자존심 때문에 성도의 교제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서로 섞이려 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본받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자존심 때문에 섬기지 못합니다. 먼저 손 내밀지 못합니다. 먼저 베풀지 못합니다. 화해하고 싶어도 자존심 때문에 먼저 화해의 손을 내밀지 못합니다. 누군가가 내 자존심을 건드리면, 눈에 보이는 것이 없이 '해 보자'고 달려듭니다.
우리는 그 인간의 알랑한 자존심을 포기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란 자존심을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것도 가장 낮고 천한 자리에 오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 신적인 자존심까지 버리신 것입니다. 죄가 없으신 분인데도 불구하고 죄인들에게 채찍으로 맞으시고 조롱을 당하셨습니다. 하나님이신데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심판을 받으셔야 했습니다. 당신의 자존심이라곤 찾아볼 수도 없을 만큼 우리 예수님은 자신을 포기하고 사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는 어떻습니까?
유명한 깡패출신 김익두 목사님의 일화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분은 예수 믿기 전에는 모든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대상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시장에 가면서 성황당에다 "제발 오늘은 평양 깡패 김익두라는 놈을 안 만나게 해 주십시오"라고 빌고 갈 정도였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김익두라는 깡패가 시장 길목에서 다리를 벌리고 서서는 사람들에게 그 다리 사이로 기어서 지나가라고 행패를 부리기도 했고, 장사해서 번 돈을 몽땅 빼앗아가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평양 깡패 김익두가 예수님 믿고는 변화되었습니다. 한번은 변화된 김익두가 고개를 넘어가다가 바위에 걸터앉아 쉬고 있는데, 한 술주정뱅이가 오더니 "너 왜 내 자리 앉았느냐?" 그면서 김익두를 때리더랍니다. 그런데도 아무소리 안하고 때린 대로 다 맞고만 있었습니다. 술주정뱅이가 한참을 때리다가 번뜩 정신이 들어 가만히 쳐다보니까, 자기가 때린 사람이 그 유명한 깡패 김익두란 것을 알았습니다. '이제는 꼼짝없이 죽었구나' 생각하고는 벌벌 떨고 있는데, 김익두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예수는 내가 믿고 복은 네가 먼저 받는구나."
여러분, 우리의 자존심이 우리에게 얼마나 유익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의 자존심이 무너지면 우리의 인생 전부가 무너지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내 자존심이 무너진 바로 그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이 싹트기 시작합니다. 내 자존심을 버리는 바로 그 자리에서 하늘의 영광이 덧입혀지는 축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고향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시고는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인하여 고향에서는 많은 능력을 행치 않으시고 고향을 떠나오셨습니다.
여러분, 제자들을 이끌고 쓸쓸한 모습으로 고향을 떠나 동구 밖으로 나가시는 예수님의 뒷모습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떠나가시는 예수님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안타까운 가슴을 쓸어안고 있는 사람들도 꽤 있었을 것입니다. 분명 고향 사람들도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어느 정도 들었을 것입니다. 그분이 병자들을 고치고 귀신을 내어쫓고, 심지어 죽은 자를 살리시기까지 했다는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사렛이 살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병자들은 언젠가 그 예수님께서 고향에 한 번 오시지 않을까 하고 기대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고향에 오시자마자 가장 먼저 회당을 찾아가셨고,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시다가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받고 쓸쓸하게 고향 땅을 떠나가야 했습니다. 병자들을 만나볼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도 없었습니다. 누가복음 4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은 사람들에 의해서 강제로 동구 밖으로 쫓겨난 신세가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고향 나사렛에서 능력을 베푸실 시간적인 여유도 없었습니다. 강제로 추방당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걸 이렇게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인하여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치 아니하시니라."
여러분, 예수님께서 왜 고향인 나사렛에서는 능력을 행치 않습니까?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실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능력을 베풀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능력을 행치 않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에게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우리 예수님에게도 불가능이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믿음이 있느냐 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이사야 7:9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믿지 아니하면 정녕히 굳게 서지 못하리라." 누가복음 8:5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절망하고 있는 회당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믿으면 하나님의 구원과 은총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믿으면 죽음에서도 건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우리를 절망으로 무너지게 만드는 상황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하더라도 믿기만 하면 우리에게 희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통해서 주어진 새로운 희망이 우리 앞에 열릴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로막힌 홍해를 갈라 희망의 길을 열으셨던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를 위해서도 희망의 길을 열어주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들 가운데는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님을 믿음이 없어서 되돌려보내는 어리석은 모습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나사렛은 예수님께서 찾아오심으로 축복의 기회를 맞았습니다. 그런데 믿음이 없어서 그 축복의 기회를 놓쳐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에게도 축복의 기회가 옵니다.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우리 주님의 발걸음과 함께 축복과 은혜의 기회가 반드시 올 것입니다. 그 축복의 기회를 우리의 믿음 없음 때문에 놓쳐버리는 어리석은 우리가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 13:8)고 말씀하셨습니다. 능력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의 인생길 앞에서 우리를 가로막고 서 있는 그 홍해를 가르실 수 있는 분입니다.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던 38년된 병을 고치셨던 그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의 모든 질병과 절망도 고쳐주실 것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셨던 그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의 죽을 인생도 다시 살리십니다.
그건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안이라고 해서 반드시 믿음이 가득한 것만은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 살아가면서도 우리는 얼마나 많은 불신앙에 얽매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 교회에 하나님께서 놀라운 축복과 능력을 주시길 원하시는데, 우리에게 믿음이 없기 때문에 그 축복과 능력을 받아 누리지 못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믿음을 앞세우지 못하고 인간적인 계산으로만 생각하고, 인간적인 자존심으로만 생각한다면 교회의 일에서도 믿음은 설 자리를 상실하고 맙니다. 믿음이 설 자리가 없어지고 맙니다.
여러분, 우리의 어리석음 때문에 예수님의 능력을 제한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가난하다고 하나님도 가난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연약하다고 우리가 믿는 하나님도 연약한 분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우리에게 능력이 없다고 하나님에게도 능력이 없다고 판단해버리면 안됩니다.
벙어리 귀신들린 아들을 고치고 싶어 주님 앞에 나왔던 사람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을 내게로 끌어오는 통로입니다. 우리의 문제가 아직도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내 문제를 풀어줄 능력이 하나님께 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 문제를 풀어주신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라는 믿음이 우리에게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막 9:24)
안 된다는 부정적인 생각을 버리고 믿음으로 할 수 있다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믿음을 갖고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에게는 능력이 있습니다. 능력의 주님을 의지하고 그분을 굳게 믿는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믿음의 능력
마 13:53-58 / 김동호 목사
광야에서 40일을 금식하시면 기도하시고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신 후 예수님은 본격적으로 공생애를 시작하십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산상수훈 설교를 그 시점으로 하여 시작이 됩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주로 말씀 사역이셨습니다. 물론 가는 곳마다 병자도 고치시고 귀신도 쫓아내시고 죽은 자도 살리시는 등 능력을 행하셨지만 예수님의 주 사역은 말씀의 사역이셨습니다.
산상수훈으로부터 시작된 예수님의 설교는 참으로 기가 막힌 설교였습니다. 우리들이 알아듣고 이해하기 쉽게 적절한 비유를 들어가시면서 천국의 비밀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의 지혜와 능력에 대하여 감탄을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예수님이 고향 회당에서 말씀하실 때 사람들이 '이 지혜와 능력이 도대체 어디서 왔느냐?'고 할 정도로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감탄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과 능력에 감탄하는 것과 예수님을 믿는 것과는 별개의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불행한 일은 그와 같은 말씀과 능력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아니하고 배척했다는 것입니다.
저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이유는 예수님이 마리아의 아들이고 야고보와 시몬과 유다의 형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와 같은 이유 때문에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까지 믿고 인식한다는 것은 좀 무리일 수 있었지만 최소한 선지자로서는 받아들여졌어야 옳은 것인데 예수님이 고향사람들은 예수님을 선지자로서도 영접하지 아니하고 배척하였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읽으면서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이 불신과 배척의 꼬투리를 잡기 위하여 안달이 난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어떤 이유와 꼬투리를 잡아서라도 '믿지 않겠다' '영접하지 않겠다'라고 단단히 벼루고 있는 사람들 같이 느껴졌습니다.
저들은 예수님이 마리아와 요셉의 아들이고 야고보와 시몬과 유다의 형임에도 불구하고 하시는 말씀과 행하신 능력을 보아 저가 선지자임에 틀림이 없다라고 최소한 생각했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능력에 감탄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이고 야고보와 유다와 시몬의 형이라는 사실 때문에 진리와 능력도 별로 의미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우리들에게는 불신과 배척의 은사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그것이 우리의 원죄 때문이라고 늘 생각합니다. 어떻게 하든지 꼬투리를 잡아 하나님을 배척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하려고 하는 원죄적인 본능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마치 같은 극의 자석이 서로를 밀어내듯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밀어내고 배척하려고 하는 본능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바로 그 본능이 저에게도 있고 여러분들에게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 옳지 못한 본능과 싸워야 합니다. 하나님을 배척하려고 하는 본능을 배척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믿음의 은사를 달라고 기도해야만 합니다. 저는 은사 중에 가장 크고 중요한 은사가 바로 믿음의 은사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믿어지는 것, 하나님의 말씀이 믿어지는 것, 세상에 그 보다 더 크고 귀한 은사가 어디 있겠습니까?
저는 말씀드리기가 조심스럽습니다만 비판의 은사를 받은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저에게 어느 정도의 논리를 은사로 주신 것 같습니다. 신대원을 졸업할 때 제가 쓴 논문은 '칼빈주의 예정론 비판'이었습니다. 저는 그 논문으로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학교에서 공부하는 것으로 상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저에게 비판의 능력과 은사를 주셨습니다. 저는 비판의 은사가 목회를 하는데 있어서 아주 유익하고 요긴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와 같은 은사와 능력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말씀드리기가 좀 더 조심스럽습니다만 그러나 제가 받은 정말 최고의 은사는(제게 있어서) 비판의 은사가 아닙니다. 그것은 믿음의 은사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믿음의 은사를 받은 것 같습니다. 저는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려고 별로 노력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이 저에게는 별로 어렵지 않게 믿어지고 이해되어졌습니다.
어려서부터 설교를 잘 들었습니다. 은혜를 받을 줄 알았습니다. 감동을 받을 줄 알았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노래를 잘 했었습니다. 예배 중에 특송을 할 때가 있었는데, 찬양을 할 때 소리가 잘 나는 때가 있고 좀 그렇지 못하는 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개인마다 다를 것입니다만 저는 배가 부를 때 보다 배가 조금 고플 때 노래하기가 좋았습니다. 그러나 최고의 소리를 낼 때는 배가 고플 때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설교에 은혜를 받았을 때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찬양을 꼭 설교 후에 하려고 하였었습니다. 제가 노래를 잘 했던 것은 변성기 이전이었습니다. 변성기 이후로 저는 제 목소리를 잃어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노래를 잘 불렀던 때는 초등학교 때였습니다. 그런데 그 때 이미 저는 설교에 은혜를 받았을 때 가장 좋은 소리를 낸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초등학교 때 저는 소리에 영향을 끼칠 만큼 설교에 은혜를 받을 줄 알았다는 말씀입니다. 뜨거운 것이 목에서 넘어오는 것만 같은 은혜를 받을 때가 그 때 이미 있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비판의 은사뿐만 아니라 믿음의 은사를 함께 주신 것에 대하여 얼마나 감사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도 그와 같은 은사를 주시기를 소원합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그와 같은 은사를 사모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겨자씨만 한 믿음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저 바다에 빠지라 하여도 그대로 될 것이라고 하신 말씀을 믿습니다. 너무 과장 된 말씀이 아닌가 느껴질 만큼의 말씀이지만 저는 그 말씀이 조금도 과장이 되지 않은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믿음은 정말 겨자 씨 보다도 작았는데 그 믿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은 상상을 초월하여 제 삶을 이렇듯 놀랍고 복되게 하셨습니다.
제 삶에 나타난 그리고 지금도 나타나고 있는 모든 일들은 정말 산이 바다에 빠지는 것 이상의 기적들입니다. 저보다 더 큰복을 받은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저와 비교할 수 없는 큰 능력을 받은 분들이 많이 있지만, 솔직히 그와 같이 복을 받고 능력을 받은 분들이 부럽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압니다. 제가 받은 복과 능력도 제가 겨자씨보다도 더 작은 사람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정말 산이 바다에 빠지는 것과 같은 기적이라는 것을 저는 압니다.
모든 것은 믿음의 문제입니다. 제 짧은 삶을 돌이켜 볼 때 믿어 진 것은 다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믿어질 때 그 말씀대로 행하면 반드시 실상과 증거가 나타났습니다.
동안교회에 부임하였을 때 교인은 많고 건물을 비좁아 많이 불편하였습니다. 예배당을 새로 건축하기 위하여 당시 일년 예산에 해당할만한 돈도 모아 놓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새벽기도 후 성경을 읽으면서 묵상할 때 그 때 하나님이 제게 주신 말씀은 마태복음 6장 33절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주시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저는 그 말씀을 묵상하면서 저를 비롯한 사람들이 먼저 자신과 자신의 이익에 관한 것을 언제나 먼저 구하면서 산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꼭 나쁜 것은 아니지만 밤낮 그렇게만 살면 더 큰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놓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저에게 너희 예배당 지을 돈으로 먼저 개척교회를 짓는 것이 어떻겠냐는 생각을 저에게 주셨습니다. 물론 '우리 예배당을 짓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고 개척교회를 짓는 것은 옳은 일이다'라고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당시 읽은 마태복음 6장 32절 말씀의 실험을 그렇게 해 보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말씀대로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예배당을 더 잘 지어 주실 것이라는 마음이 믿음처럼 생겼습니다. 그 믿음은 그 때 저에게 확신이었습니다. 저는 그 말씀을 실험해 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설교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당회에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예배당을 짓기 위하여 모아 놓았던 6억 원을 들여 일산에 동안교회를 개척하였습니다. 그 일은 제게 정말 만루홈런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제 평생에 그렇게 통쾌하고 근사한 일이 없다하리만큼 결과가 좋았습니다.
일산 동안교회는 8년이 지난 지금 아주 모범적이고 건강한 교회로 성장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동안교회에 기도하고 바라던 예배당 보다 곱절이나 크고 훌륭한 예배당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저는 솔직히 요즘 또 그와 같은 생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지금 우리 교회는 그 무엇보다도 먼저 교육관이 필요합니다. 저는 우리 아이들과 청년들이 예배실로는 턱없이 허술하고 부족한 학교 교실에서 옹색하게 예배를 드리고 교육을 받는 것이 너무나 마음이 아픕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좋은 예배실과 교육시설을 마련해 주고 싶은 것이 제 진심입니다. 정말 빚을 내서라도 그 일을 하고 싶습니다. 그 빚을 평생 갚으면서 살라고 해도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 아이들과 청년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좋은 예배실과 교육관을 마련해 주기 위하여 그것을 하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무리 급하고 중요하다고 하여도 밤낮 자기 밥그릇만 먼저 생각하고 사는 것은 하나님의 식과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우리 교육관만 생각하고 일을 한다면 우리는 그 동안도 꽤 많은 돈을 모았을 것입니다. 내년도에도 엄청난 돈을 모을 수 있어서 웬만한 건물은 무리 없이 살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선교와 구제를 뒤로 미루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사랑하는 우리 교회 교인들이 그와 같은 일에 동의해 주신 것에 대하여 감사하고 있고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의 적은 믿음이지만 이 믿음 위에 축복해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저 마음속에는 상식적으로 좀처럼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너무 무리해 보이는 믿음의 욕심이 있습니다. 그것은 교육관을 마련하기 전에 먼저 개척교회를 건축하는 것과 같은 일을 하였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하여 우리가 고생하고 불편을 격고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앞에 서셔서 우리의 일을 감당해 주시지 않을까요?
말씀이 조금 곁으로 나간 것 같습니다. 믿음에는 능력이 따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믿지 못하고 영접하지 못한 당신의 고향에서 능력을 행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 말씀은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하지 아니하고 영접하였다면, 예수님의 지혜와 능력에 감탄만 하지 말고 그 지혜와 능력을 통하여 예수님을 믿을 수 있었다면 그 곳에 하늘의 능력이 역사 하였을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여러분의 마음과 삶을 한번 돌아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에게는 믿음의 은사가 있으십니까? 여러분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이 잘 이해되고 믿어지시는 편이십니까? 아니면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이 잘 이해가 안되고 잘 믿어지지가 않으시는 편이십니까?
때때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은 이 세상의 상식을 벗어나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그와 같은 때에도 세상의 상식보다는 엉뚱해 보이고 비상식적인 것처럼 보이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믿지 못하고 따르지 못하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이 믿어지십니까?
여러분들에게는 그와 같은 믿음에 반드시 나타나게 되어 있는 믿음의 실상과 증거가 있으십니까? 그 믿음에 반드시 따라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능력의 증거가 있으십니까? 축복의 간증이 있으십니까?
어느 특정한 교단을 예로 들어서 매우 조심스럽습니다. 제가 오늘 예로 들려고 하는 교단은 순복음 교단입니다. 저는 순복음 교단과 저들의 신학과 신앙 생활에 대하여 좀 비판적입니다. 가장 비판하고 싶은 것 중에 하나는 저들이 비판의 은사를 받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저는 비판의 은사가 매우 중요한 은사 중에 하나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 은사를 받지 못하면 사람과 교회가 한 쪽으로 지나치게 치우치게 됩니다. 그래서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저는 순복음 교회와 교단이 그와 같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순복음 교회와 교단에 대하여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있습니다. 저들의 장점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것은 저들이 믿음의 은사를 받았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처음에 순복음 교회에 초청을 받아 설교를 하러 갔을 때 저는 저들의 뜨거운 열기에 얼마나 당황하고 놀랐는지 모릅니다. 주여 삼창을 소리질러 하는 것을 보고 속으로 '하나님 경끼 하시겠네'라고 중얼거릴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막상 저들 앞에서 설교를 하였을 때 그 어느 교회 어느 교단 사람들 보다 더 은혜를 사모하고 말씀을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방언을 하고 병 낫는 일이 그렇게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은 아닙니다. 분명 그것이 하나님의 역사와 능력 중에 하나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하나님의 역사와 능력은 분명 우리 교단 보다 순복음 교단에 많이 나타나는 것이 사실입니다. 저는 그것이 믿음의 은사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비판 없는 믿음에 대하여 지금도 비판적입니다. 그러나 더 문제는 믿음 없는 비판입니다. 순복음 교단의 문제가 혹 비판 없는 믿음이라면 우리 교회나 교단의 문제는 혹 믿음 없는 비판이 아닐까요?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저는 사랑하는 여러분들이 믿음의 은사를 사모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모두가 다 믿음의 은사를 받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들으실 때마다 그 말씀이 믿어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말씀을 주시는 하나님이 믿어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배 때마다 감동하고 감격하며 뿐만 아니라 회개의 뼈아픈 눈물도 흘리며 은혜 충만한 예배를 드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찬송도 열심히 부르시고, 기도도 열심히 하시고, 설교도 열심히 들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의 지혜와 능력에 감탄은 하면서도 그 말씀과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하여 축복을 받지 못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이 말씀을 읽게 하신 까닭이 무엇일까요? 이 말씀을 통하여 말씀하시려는 것이 무엇일까요? '너희들은 그렇게 하지 말고 믿음의 은사를 사모하고 받아서 그 믿음 위에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축복으로 받는 사람이 되거라' 하시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 잘 믿어서 '예수 예수 믿는 것은 받은 증거 많도다. 예수 예수 귀한 예수 믿음 더욱 줍소서'라고 간증하고 찬송하며 사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고향에서 배척
마 13:53-58 / 박세갑 목사
주님은 모든 비유의 말씀을 가르치신 이후에도 사역을 계속하셨습니다. 그 사역 중에 주님께서 고향인 나사렛에 가셨습니다. 주님은 그곳에서 소년 시절과 청년 시절을 그곳에서 보내셨고 그러므로 나사렛은 주님께 지극히 정겨운 곳입니다. 주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에 몇 차례 고향으로 가셨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복음서에는 본문과 함께 (막6;1~6, 눅4;16~30) 이렇게 세 번 기록됩니다. 학자에 따라서는 누가 복음 4장에 나오는 것을 초기 사역 중에 방문하신 것으로 간주하고 본문의 기록과 마가복음의 기록은 공생애 사역의 후기에 일어난 같은 사건으로 주장합니다. 우리는 그런 구분보다 주님께서 여러 해의 격렬한 공생애를 지내시고 고향 마을로 돌아가셨다는 사실만을 생각합시다. 앞으로 행할 본격적인 봉사를 준비하시며 어린 시절과 청년시절을 보냈던 고향에 돌아가시며 가지신 생각이 어땠을까요? 어쩌면 이런 생각은 주님께는 전혀 적용될 수 없는 것일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전 생애는 언제나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 주님께서 어디에 계시든지 기뻐하시는 단 한가지였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주님께서 젊은 시절을 보내신 그 산하에 돌아 오셨습니다. 그곳에는 모친 마리아가 어린 주님을 데리고 들어갔던 그 회당이 있습니다. 그곳은 주님께서 율법 낭독을 들으시고 때로는 그 내용을 설명하는 것들을 듣기도 하셨던 곳입니다. 안식일이면 찾아가던 오래되고 낯익은 회당, 어린 시절과 그렇게 친밀하던 그 회당에 들어가시는 주님을 상상해 봅시다.
주님은 공생애의 여러 해 동안 격렬한 전투를 치르고 앞으로 행하실 공적인 봉사를 계획하시며 낯익은 정경 가운데로 들어오셨습니다. 그 회당 안에는 주께서 어린 시절 함께 하셨던, 그러나 이제는 주님과 더불어 성인이 된 정다웠던 사람들의 얼굴이 그곳에 보이고 있습니다. 주님은 그곳에서 가르치셨습니다. 율법을 읽고 그것을 해석하시면서 그 심오한 의미를 그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그들의 반응을 살펴봅시다. 그들은 이미 주님께 대한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이 사실은 다음 단락인 14장의 시작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 때에 분봉 왕 헤롯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14;1)입니다. 왕궁은 소문이 전해지기 가장 어려운 곳입니다. 그럼에도 왕인 헤롯이 예수의 소문을 들었답니다. 소문이 왕에게까지 들려졌다면, 이미 모든 사람이 주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고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나사렛으로 돌아오시고 회당에서 가르치시기 시작하셨을 때에 그들은 주님을 향한 친근감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말합니다.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주님을 회당에서 처음 보았을 때 그들에게는 자연스럽게 자기들이 주님을 잘 알고 그의 모든 것과 그 가족 모두를 잘 알고 주님을 마치 자기들 중의 한 사람처럼 생각했던 것입니다. 물론 이런 생각은 매우 위험한 생각입니다. 그러나 아주 자연스러운 생각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그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들이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 그들은 그 말씀이 이제까지 그들이 들어본 적이 없는 말씀인 것을 점차 깨달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들이 받은 충격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익숙하게 알고 있는 그 말씀을 말씀하시자, 자연스럽게 주님의 말씀을 경청합니다. 주님은 이제까지 가버나움에서 가르치시던 대로 그것을 다시 말씀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이 말씀은 충격이었습니다. 주님은 자신들이 잘 모르는 새롭고 특별한 어떤 지식을 가지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나사렛에는 학교가 없고 주님께서 어떤 학문의 연구 과정을 거치셨다고 믿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가 그의 갓난아기에서부터 성장과정과 살아온 모두를 알고 그 부모 형제를 모두 알지만 그들이 모두 평범한 사람들인데, 지금 그가 보이는 이 지혜와 지식과 능력은 어찌 된 것인가?’ 그들은 놀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기분이 상했습니다.” 이 말은 우리 성경에 “예수를 배척한지라.”라고 번역되었습니다. 원어 성경의 에스칸달리존토는 영어에서 they were scandalized로 번역되는 말입니다. 헬라어 스캔들리조에서 나온 scandalon은 걸림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분개했다, 혹은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와 같은 의미입니다. 그들에게 주님이 걸림돌이 된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계시에 당황했고 그 당황이 계시의 신비에 당면하여 주님께 오히려 분노하는 잘못된 태도를 취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을 당황하게 하고 놀라게 한 것이 무엇인지 성경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문제가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시야와 이해력을 넘어서는 초자연적인 실제입니다. 우리가 앞에서 주님을 배척한 유대인들의 관점인 메시야에 대한 오해도 그 중의 중요한 한문제입니다.
유대인이 기대한 메시야는 자기들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고 아브라함의 자손이기에 의인이고 메시야가 오심으로 자기들이 현실에서 격은 고난과 수고를 보상하실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죄인을 부르러 오셨고 주님 앞에 있는 인간은 모두 죄인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자신들을 죄인이라고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을 수없는 것이었습니다. 그 점이 주님께 분노하는 큰 이유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주님의 가르치시는 말씀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그것들은 분명히 하나의 신비였지만 그들 앞에 드러내 보이신 사실입니다. 그들은 이것을 이해하고 따르지 못하고 걸려 넘어졌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58절 “그들이 믿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아니하시니라.”입니다. 이것이 나사렛 거민의 태도이고 문제입니다.
이제 우리 주님을 살펴봅시다. 앞에서 우리는 자기들이 주님을 잘 안다는 사람들을 살펴보았는데, 주님의 편에서는 어떻습니까? 주님도 역시 그들을 잘 알고 계십니다. 주님은 그들 가운데 함께 사시면서 그들을 지켜보셨습니다. 주님은 다른 어떤 사람보다 그들을 잘 아셨습니다. 주님은 인생의 모든 비밀을 알고 계심으로 그들의 은밀한 생활까지 모두 알고 계셨습니다. 요한은 (요2;25)에서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 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그들에게 가셨고, 그들을 가르치시고, 그들 가운데서 행하셨습니다. 그들에게 자신을 새롭게 나타내 보이신 것입니다. 그러나 나사렛 사람들이 기대하는 이적 즉 능력 있는 일과는 다른 것들이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그들이 믿지 않고 있을 때가 이적을 행하실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점에 대해서는 우리가 먼저 명심해야할 부분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믿음을 만들기 위하여 이적을 행하신 적이 없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신앙을 만드시기 위하여 이적을 행하신 것은 복음서 어디에도 발견되지 않습니다. 이적은 언제나 주님의 자비하심 때문이었습니다. 불신앙은 주님께서 이적을 행하실 수 없는 분위기입니다.
믿음은 지적인 확신이 아닙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지적인 확신은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지혜와 능력을 보았고 알았습니다. 만약 우리가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한 주간 내내 안 믿는 사람처럼 산다면 그 사람은 지적으로 확신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지만 그 사람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을 지적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의 지적 확신에 자기를 맡기지는 않았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발전과 진보를 가로막았습니다.
회당에서의 모습을 생각해 봅시다. 주님의 말씀은 힘이 있었고 그 행동에도 힘이 있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지혜의 말씀이었고, 그 행하시는 일은 능력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믿고 믿음으로 나아갔다면 주님도 그들을 위하여 이적을 행하시고 다른 말씀을 주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주님의 일을 억지로 설명하려고 함으로 주님의 능력을 차단해 버렸습니다. 우리도 이런 실패를 반복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지혜와 능력의 빛을 처음 대할 때에 거기에 응답하고 지적으로만 아닐라 의식적으로 그 사실에 순복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그 동일한 지혜가 더 많은 빛을 우리에게 비쳐주며 바로 그 동일한 능력이 더욱 힘 있게 역사함을 보게 될 것입니다.
나사렛은 많은 사람들의 개인적인 삶과 신앙의 상징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한 사람의 삶 가운데 오셔서 지혜와 능력을 번득이는 전율을 주십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기이히 여기고 의아해 하다가 그 빛을 거부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가 그 처음의 빛의 번득임에 순종하고 응답하여 최초의 능력의 전율에 자신을 포기하기까지 주님 자신을 그에게 알리지 아니하십니다. 그것의 결론이 바로 58절 “그들이 믿지 않음으로 인하여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아니하시니라.”입니다.
우리는 지금 전기불을 키고 있고 전기를 많이 사용합니다. 그런데 얼마나 전기를 알고 계십니까? 전기의 어떤 부분을 알고 그 법칙을 이용함으로 건물을 비추고 음향을 사용하고 기계를 돌립니다. 우리가 빛을 이용합니다. 그러나 그 빛을 이해한 것은 아닙니다. 본문의 나사렛 사람들은 실제의 사실을 접하고 기이한 일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그것에 놀라고 오히려 불필요한 의문에 빠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멸망으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현대의 우리들의 상황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성육신이나 대속의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며 아마 영원히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처럼 가르치신 선생이 없고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 속에 의문이 남아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먼저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순종해야 합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이것을 실패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일상적인 인간의 지혜로 설명하려고 하지 마십시요. 믿으십시요. 그리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한히 신비한 것들과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것들에 직면하여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고 의지할 때에 주님은 우리에게 이해와 확신을 더하여 주실 것입니다.
이장과 군수
마 13:53-58 / 이정선 목사
우리가 고향을 떠나 이역만리 낯선 땅에 정 붙이며 살다 보니까 늘 그리운 것이 고향입니다. 아무리 뉴질랜드가 아름답고 살기 좋아도 우리가 고향을 잊을 수는 없습니다. 세네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구나 고향을 사랑한다. 그곳이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자신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Every one loves his country, not because it is beautiful, but because it is his own.) 그래서 몇 년에 한 번이라도 꼭 한국에 다녀와야 우리가 별 탈 없이 여기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한국에 가본 지가 5년이 넘었다고 하면 우리는 놀람과 의문의 눈으로 바라보게 되겠지요?
고향을 떠난 모든 사람의 마음은 늘 고향을 향합니다. 그러나 초라한 모습으로 고향에 돌아가고 싶은 사람은 없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성공한 모습으로, 즉 금의환향을 하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성공해서 돌아온 사람을 고향은 자랑스러워합니다. 그러나 금의환향이 항상 환대받기만 하는 것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인간의 심리라는 것이 복잡하거든요.
‘이장과 군수’라는 영화 보셨나요? 충청도의 한 산골마을에서 이장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새 이장을 뽑아야 하는데, 이번에는 젊은 사람을 이장 시키라는 마을 최고어른의 말씀에 따라서 노총각 춘삼이가 최연소 이장으로 선출됩니다. 춘삼이는 어렸을 때 반장을 도맡아 하면서 인기도 많았던 얼짱이었습니다. 동네에서도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모시고 살면서 성실하게 고향을 지키는 젊은이로 인정과 칭찬을 받고 있습니다. 거기까지는 다 괜찮았는데, 옛날 춘삼이가 반장 할 때 늘 부반장을 하면서 춘삼이 꼬봉 노릇을 하던 대규가 군수에 출마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대규가 아슬아슬한 표 차이로 현직 군수를 물리치고 최연소 군수로 당선됩니다. 이때부터 춘삼이의 인생이 꼬이기 시작합니다. 사실 춘삼이의 인생이 꼬이는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이 꽈배기처럼 꼬이는 것이지요. 군수가 마을에 시찰 나오면 이장이 안내를 해야 하는데, 옛날 자기 꼬봉이었던 친구를 상전으로 모시고 다니는 것이 보통 괴로운 일이 아닙니다. 동창회가 모이면, 옛날에는 자기에게 비추던 스포트라이트가 이제는 군수에게만 집중됩니다. 그러니 이 군수가 하는 일이라면 사사건건 훼방을 놓고 반대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고향에 가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고향에 가신 것은 고향이 그리워서가 아니라,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거기서도 천국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이라고 고향에 대한 감회가 없었겠어요? 다른 지역에서 천국 복음을 전하고 가르쳐서 사람들을 구원받게 하셨다면, 고향 사람들에게는 더 그렇게 하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고향에는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죽마고우들도 있을 것이고, 아들처럼 사랑해주시던 옆집 할머니도 계실 것입니다. 그렇게 사랑하고 사랑 받던 고향 사람들에게 천국 복음을 전하러 가는 예수님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그러나 그렇게 기대를 안고 찾아간 고향에서 예수님은 천국 복음을 전하는 일에 크게 실패하셨습니다. 선거에서도 고향 사람에게 투표하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팔은 안으로 굽게 마련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고향 사람이기 때문에 오히려 인정을 받지 못하고 배척당하는 일을 겪으셔야 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예수님의 고향은 나사렛입니다.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거기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서른 살이 될 때까지 사셨습니다. 작은 시골 동네에서 30년을 살았다면, 누구네 집에 숟가락이 몇 개인지, 동네에 돌아다니는 저 병아리가 누구네 병아리인지 다 알 것입니다. 특별히 예수님이 은둔생활을 하신 것이 아니라면 말이지요. 고대사회에서는 아버지의 직업을 아들이 물려받게 됩니다. 특히 큰아들의 경우는 더욱 그렇습니다. 예수께서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 요셉을 도와 목수 일을 하셨을 것이고, 그렇다면 나사렛에서는 집집마다 예수님이 직접 만드신 의자나 문짝이 하나쯤은 있었을 것입니다. 과년한 딸이 있는 집에서는 이 청년 목수를 사윗감으로 점찍어 놓고 있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셨는데, 그분이 만들어준 의자에 앉아 점심을 먹는 동네사람들이라면 어떤 면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운이 좋은 사람들 아닙니까? 하나님의 아들과 아침인사를 나누면서 농담도 하고, 때로는 가격 흥정이나 애프터서비스 때문에 다투기도 하는 사람들, 정말 복 받은 사람들입니다. 무엇보다도 그가 가져오신 천국을 가장 먼저 접하고 소유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있는 것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그것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날씬한 몸매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거울을 볼 때마다 너무 뚱뚱하다고 생각하면서 괴로워하고 밥을 굶어 죽어가는 불쌍한 사람과 같습니다. 자기들에게 이웃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알아보지 못한 그들은 그가 가져오신 천국을 선물로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돌아온 이래 회당은 유대인들의 종교적, 사회적 센터가 되었습니다. 바벨론에서는 성전을 가질 수가 없어서 회당이 생겨나게 되었는데, 이 회당은 유대인들이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떠나서 어디를 가더라도 거기서 그들의 종교적, 민족적 아이덴티티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기관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포로에서 돌아온 후에도 마을마다 회당을 중심으로 그들의 공동체가 운영되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기능은 제사입니다. 의식(ritual) 중심이지요. 그리고 중앙 집중적입니다. 성전은 오직 예루살렘 한 곳에만 있습니다. 반면에 회당은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실제적인 기능을 담당합니다. 그리고 각 지역마다 존재하는 지방 자치적 성격을 가집니다.
회당에서는 특별히 랍비들이 주민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일이 주요 업무가 되어 있었습니다. 바울 역시 전도 여행을 다니면서, 유대인들이 모인 회당에 가서 예수를 전파했습니다. 회당은 쉽게 많은 사람을 만나 가르칠 수 있는 좋은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고향을 떠나 가버나움에 가서 사셨습니다. 가버나움을 베이스캠프로 삼고 주변의 마을들을 다니면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다가, 고향 나사렛에도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회당에 가서 가르치셨습니다. 사람들은 오랜만에 찾아온 이 젊은이가 무슨 말을 할 것인지 귀를 기울였습니다. 여기저기 다니면서 경험한 여행담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했다는 내용이라면 감동적일 것입니다. 다른 곳에 가서 유명한 랍비에게 중요한 것을 배워 왔다면, 고향 사람들과 나누는 것도 큰 유익이겠지요.
예수께서 가르치시는 것을 들은 나사렛 사람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 내용이 그저 그런 평범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천국에 대해 하시는 말씀은 지금까지 어떤 랍비에게서도 들어보지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모두들 놀라면서 궁금하게 여겼습니다. 도대체 이 목수가 어떻게 된 거야? 어디 갔다 왔기에 이렇게 변한 거지? 도대체 누구를 만난 것일까? 우리가 알던 그 목수 총각이 맞아?
만약 그들이 모르는 어떤 랍비가 와서 똑같은 천국 복음을 전했더라면, 나사렛 사람들은 그 말씀을 믿고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박사학위가 두 개쯤 되고 하버드의 교수라는 분이 와서 같은 내용으로 강연을 했다면, 그들은 열광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청년 예수가 전하는 메시지의 내용이 놀라운 것이라는 데 모두 동의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메시지의 내용이 아니라, 어떻게 이 별 볼일 없는 목수가 이런 놀라운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를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이 큰 장애물이 되어 그들은 그 천국 복음에 다가갈 수가 없었습니다.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목수의 아들 주제에 문짝이나 만들지 않고 왜 그런 위대한 말을 하는가? 목수라면 우리와 같은 수준으로 놀아야지 왜 저 높으신 랍비들처럼 행동하는가? “그 모친은 마리아 아니냐?” 그 어머니도 우리가 잘 알지. 마리아라는 이름이 가장 흔한 이름인 것처럼, 그의 어머니는 보통 동네 아줌마에 불과한 여자란 말이지. 이웃 나라에서 시집온 공주도 아니고 무슨 귀부인도 아니거든.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그 집안 내력이라면 빤하지 뭐. 개천에서 용 나올 집안도 아니고 동생들도 다 고만고만한 친구들인데 그 형이라고 특별하겠어?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하나는 박서방네 며느리고 막내는 작년에 방앗간집 아들하고 결혼했잖은가? 특별하거나 대단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집안이란 말일세. 그런데 저 친구가 어디 가서 뭘 듣고 왔는지 모르지만, 갑자기 유식한 체하는 것 정말 못 봐 주겠다니까.
이 이야기의 포인트는 아닙니다만, 이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의 가족 구성을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어린 시절 외에는 요셉의 이름이 성경에 언급되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나사렛 사람들의 말 속에서도 요셉이라는 이름은 나오지 않고 그 목수라고 지칭됩니다. 예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지만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해야 할 성경의 저자들로서는 인간 예수의 아버지로 오해될 수 있는 요셉을 등장시키는 것이 불필요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그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요. 이것은 인간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계획의 측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메시야를 이 땅에 보내시는 데 있어서 요셉의 역할은 인간으로 태어나신 하나님의 아들을 양육하고 보호하는 것이었는데, 그의 존재감이나 비중이 불필요하게 커서 메시야의 신적 기원을 오해하게 할 필요는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요셉이 그의 역할을 다 한 후에 하나님께서 일찍 데려가셨을 수도 있습니다. 성경의 기록에서 요셉이 나오지 않는 것에 대해 그가 일찍 죽은 것이라는 견해에 대부분 동의를 하고 있습니다. 여기 나사렛 사람들의 말 속에서 요셉이라는 이름 대신 그 목수라고 언급되는 것도 그가 죽은 사람이라는 의미일 수 있습니다. 그 죽은 목수라는 뜻이지요.
또 예수님에게는 네 명의 남동생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처음에 예수님의 사역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믿지도 않다가, 나중에 부활하신 후에야 믿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야고보는 초창기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로서 유대인들의 큰 존경을 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야고보서의 저자이기도 합니다. 다른 동생들의 삶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다만 유다가 유다서를 기록했다는 것을 보아 역시 교회의 지도자로 활동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의 여동생들도 있었네요. 이름도 모르고 또 몇 명이었는지도 모르지만, 최소한 두 명 이상입니다. 나사렛 사람들이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다고 말한 것은 모두 결혼을 했다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예수께서 어머니를 모시고 온 가족과 함께 나사렛에서 가버나움으로 이사를 하셨는데, 여동생들은 나사렛에 남아 있습니다.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 가장 타당한 이유는 그들이 결혼했다는 것이지요.
가톨릭 교회에서는 여기 언급된 예수님의 형제 자매들을 예수님의 이복 형제 자매들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하시고 낳으신 성모께서 또 요셉과의 사이에서 자녀들을 낳았다고 하는 것은 성모의 동정녀성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른 형제들은 요셉의 전처 소생일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예수님의 동생들이 아니라 형님들이 되겠군요. 그러나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께서 어머니와 형제들과 제자들을 모두 데리고 가버나움으로 이사를 하셨다고 했거든요(요 2:12). 전처의 소생들이고 또 나이도 많은 형님들이라면, 예수님과 어머니가 그들을 데리고 다닐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마리아의 동정녀성은 성령으로 메시야를 잉태하는 데 필요한 특징이지, 그 후에도 동정녀였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구 동정녀성은 성경의 근거가 전혀 없는 주장입니다. 그런 근거 없는 주장에 맞추기 위해서 성경을 억지로 해석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다시 우리의 본래 주제로 돌아가 봅시다. 고향 사람들로부터 그렇게 배척을 당하시자 예수님은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에서 존경을 받지 못한다고 하시면서, 믿지 않는 그들에게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굴러온 복을 발로 차버린 것입니다. 예수께서 자기 고향에서 배척을 당하신 사건은 상징적 의미가 있지 않습니까? 요한은 예수님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요 1:11). 이것은 결국 예수께서 유대인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되는 십자가 사건까지 포괄하는 상징입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에 의해 거부된 천국 복음이 이방인들을 향하게 되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복선이기도 합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유대인들의 훼방을 받자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행 13:46).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사람들에게 천국을 가져다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마리아의 몸을 빌려 인간으로 태어나셔야 했고, 나사렛이라는 동네를 고향 삼아 사셨습니다. 그렇다면 나사렛 사람들은 가장 먼저 천국 복음을 들을 수 있는 특권을 가졌는데, 오히려 끝내 천국을 배척하는 선택을 하고 말았습니다. 잘 믿는 가정에서 자랐지만 기어이 복음을 등진 자식의 꼴입니다. 교회 바로 앞에 살면서 교회 오는 사람들이 자기 집 앞에 주차한다고 늘 교회와 싸우는 사람도 그런 부류에 속할 수 있겠습니다.
제가 만나본 사람들 중에서 대하기 어려운 분들은 동생이 목사인 집사나 장로입니다. 이분들은 목사를 만나서 먼저 하는 말이 이렇습니다. ‘제 막내 동생이 목사입니다.’ 그렇게 선방을 날려서 목사를 막내 동생 급으로 격하시키겠다는 것이지만, 결국은 목사가 전하는 말씀으로 은혜 받기를 거부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우주에서 별이 날아오는 것처럼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 아닙니다. 시원찮게 생각했던 사람의 입술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우리가 그 말씀에 순종하기를 거부하기 쉽습니다. 오늘 우리 동네에 하나님의 아들이 목수처럼 별 볼일 없는 모습으로 오셔서 말씀하신다면, 그분을 알아보고 그 말씀에 귀 기울일 수 있는 지혜와 믿음이 여러분에게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새 것과 옛 것
마 13:52 / 이동휘 목사
1. 예수께서 세상에 오셔서 첫 번째로 외치신 말씀은 “(마 4:17)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였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것 대부분이 천국과 지옥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먼저 좋은 씨와 가라지 비유입니다.
(마13:24-30) (24)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25)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26)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27)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28) 주인이 이르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29) 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30)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여기 “좋은 씨”는 알곡들이 되어 나중에 하늘 곳간, 즉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들을 말하는데, 좋은 씨가 되는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가라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고 하나님 말씀과는 상관없이 사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가 있습니다.
(마13:31-33) (31)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32)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33)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이 비유에서 겨자씨와 누룩은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확장되어가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작은 겨자씨가 큰 나무로 성장해 나가는 모습은, 외적으로 확장되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상징하고 있고, 작은 누룩이, 빵에 퍼져나가는 모습은, 내적으로 확장되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겨자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그 씨가 매우 작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작냐 하면, 비록 손바닥에 놓아준다 할지라도 일반인들이 육안으로는 겨자씨 한 알을 쉽게 찾기 어려울 정도로 작습니다. 아주 가르다란 볼펜으로 콕 찍어놓은 점보다 더 작은 것이 겨자씨입니다. 무게 1g은 물 1cc인데, 눈물 두 세 방울이면 1g, 1cc입니다. 그런데 겨자씨가 얼마나 작냐 하면, 겨자씨 몇 개를 모아야 1g이 될 것 같은가? 겨자씨 725-760개의 씨앗이 겨우 1g 정도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이 겨자씨가 얼마나 생장력이 좋은지 다 자라면 높이 3-4m(최고 7m)까지 자라서 마치 나무처럼 무성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러면 그 나무와 그늘에 새들이 깃들이게 됩니다. ‘겨자씨’같이 하나님의 나라는 한 나라의 권력을 장악하여 단번에 통치의 형태를 바꾸는 것으로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서 가장 보잘 것 없고 가장 비천한 사람들 개개인을 구원하는 방식으로 실현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 겨자씨의 성장과 같다는 것은, 그 나라의 시작이 매우 작다는 것, 그래서 사람들이 눈여겨 보지도 않고 관심도 갖지 않는 극히 작은 자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성취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신 그 날, 예수님의 탄생을 환영하는 환영식이 열린 적이 있습니까? 세상의 구주가 나셨는데, 만왕의 왕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셨는데, 그분의 탄생을 축하하는 행사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또 그분은 마굿간의 구유에 태어나셔서,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보잘 것 없는 인생을 시작하셨습니다.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은 적을 무찌르고 백성들을 높이 세워줄 수 있는 강력한 왕을 원했지만, 하나님은 작은 아기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이것은 얼마나 작고 초라한 시작이었습니까? 이사야 선지자는 예언하기를(사53:2)“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겨자씨같이 작고 초라한 예수님의 시작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예수님을 보잘것없는 사람, 하찮은 사람으로 대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히려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믿고 경배하고, 찬양합니다. 예수님 뿐만 아니라 그분의 열 두 제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모두 보잘 것이 없는 시골출신, 어촌출신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 전 세계의 복음화라는 사명을 맡기셨고, 마침내 그들을 통해서 전 세계 곳곳에 복음이 들어가고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또한 감추인 보화의 비유를 통해 천국을 말씀하셨습니다.
(마13:44-46) (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45)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46)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
<감추인 보화>, <지극히 값비싼 진주>가 되는 천국의 보화를 얻으려고 구하고 찾으며 두드리는 사람마다 그것을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천국은 전 재산을 다 팔아서라도 살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천국은 어떠한 희생을 치루고서라도 손에 넣을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인간의 가치와 삶의 행복이 천국을 소유하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지 않고서는 천국에 들어갈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천하를 얻는다 해도 예수를 믿지 않고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보화로 비유한 것은 하나님 나라가 최상의 가치를 지녔다는 뜻입니다.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는 것은 그 보화가 인류에게 최고, 최상의 가치를 지닌 것이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소유하고 있는 실제 금은보화, 그 어떠한 보석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그리고 사람들이 그 어떠한 값을 치루고서도 얻을 수 없는 그러한 보화라는 것입니다. 스스로 지혜롭고 의롭다고 생각하여 보물을 찾아 나서지 않는 사람에게는 보물이 결코 발견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 믿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지옥에 들어가게 된다고 해도 이를 무시하거나 그러한 것에 대해 감각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천국이 감추인 보화인 것입니다. 이들은 영원한 삶과 부활에 대해 완전히 무감각하기 때문에, 밭에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고 아무리 열심히 권고해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방식대로 삶을 살아가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천국은 감추인 보화와 같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2. 예수께서는 이렇게 천국에 대해 비유를 말씀하시고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 고 물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밀을 온전히 깨달았느냐는 것입니다. 이에 제자들이 “그러하오이다.”, 즉 ‘예. 이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확실히 깨닫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고 대답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천국, 하나님 나라에 대한 바른 이해와 확신을 가진 제자들을 두고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은 예수 당시 바리새식 서기관, 즉 모세 율법의 제자된 유대 서기관이 아니라, 예수께서 가르치신 천국의 비밀을 성령으로 깨닫고 천국 시민으로 살아가는 예수의 참 제자들을 말합니다. 모세 율법의 제자된 유대 서기관은 율법을 지나치게 쪼개고 또 쪼개어 세분화하여 하나님을 잘 섬기게 한다는 것이 도리어 백성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주었을 뿐만 아니라, 정작 자신들은 율법과 동떨어진 생활로 백성들의 영혼을 감동시키지도 못했고 그들을 전혀 새롭게 하지 못했습니다. 결과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 속에 흐르는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은혜를 저버리고 말았습니다. “옛 것”은 바로 <모세의 율법>을 가리키는 것이며, “새 것”은 새 언약이시며 율법을 사랑으로 완성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말합니다. 이 “옛 것과 새 것”이 함께 공존하는 곳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인간의 죄를 대신 걸머지신 예수를 “옛 것” 즉 율법에 따라 처형한 곳이 십자가이며,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자신이 희생당하신 참 사랑, 즉 “새 것”을 보여주신 곳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새 것과 옛 것”에서 새 것은 단지 새로운 것, 옛 것은 낡아빠진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는 새 것이라 해서 옛 것보다 낫다거나, 옛 것이라 해서 새 것보다 낫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은 새로우면서 동시에 오래 된 것들을 뜻하는 것으로, 원리는 오래되고 그 적용은 새로운 것이라는 말입니다. 뿌리는 옛 것이지만 그 꽃과 열매는 새로운 것이듯이, 새 것과 옛 것은 모두 성장과 발전에 없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정원이나 과수원에서 오래된 뿌리는 뽑아 버린다면 봄에 피는 새로운 꽃도 없고 가을의 열매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거꾸로 만약 새로운 것이 없다면 옛 것의 생명 자체도 있을 수 없습니다. 만약 새 순도 없고 꽃도 없고 열매도 없다면 그 나무는 이미 죽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 것과 옛 것은 서로 모순된 것이 아니라 서로 필연적입니다. 새로운 생명이 없는 옛 것은 죽은 것이며, 따라서 그런 것들은 일찍 제거할수록 좋은 것입니다. 예수는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완성하러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 15: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요일 3:23)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요이 1:5) 부녀여, 내가 이제 네게 구하노니 서로 사랑하자 이는 새 계명 같이 네게 쓰는 것이 아니요 처음부터 우리가 가진 것이라
(벧전 4:8)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율법은 예수의 십자가의 희생을 요구했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너희들은 집주인되시는 예수님처럼 천국의 곳간에서 새로운 동시에 옛스러운 것들을 내어오는 일을 하라”는 뜻인데, 이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사랑이 지배하는 나라이지 율법이 지배하는 나라가 아닙니다. 법이 다스리는 것은 죄이며 법의 결과는 형벌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어주며 형벌이 아니라 끝없는 용서를 통한 새로운 삶인 것입니다. 분명히 예수는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러 세상에 오셨습니다. 다시 말해 “옛 것”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옛 것”을 “새 것”으로 완성하러 오신 것입니다. 이 “옛 것”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새 것”이 되게 하시는 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옛 것”에는 <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고 하였으나 그 미워할 수밖에 없는 원수를 사랑할 수 있도록 만들어 “새 것”, 새로운 관계를 이루게 만드는 것이 성령입니다. 여러분이 배워서 알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들이 살아있고 운동력이 생명의 말씀이 되기 위해서는 진리의 성령께서 함께 하실 때입니다. 성령은 바리새 서기관들이 죽인 율법에 생명력을 불어넣었습니다. 이를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일 4:12)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새 언약, 새 계명에 따라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거한다, 즉 성령이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에스겔서 37장은 유명한 해골 골짜기의 해골들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큰 군대를 이룩한 성령의 역사 이야기입니다.
(겔37:1-10) (1)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재하시고 그의 영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2)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가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3)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4)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5)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6)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또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 (7) 이에 내가 명령을 따라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며 이 뼈, 저 뼈가 들어 맞아 뼈들이 서로 연결되더라 (8) 내가 또 보니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나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 (9)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하셨다 하라 (10) 이에 내가 그 명령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나서 일어나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성령이 에스겔을 데리고 에스골 골짜기로 가서 성령이 행하시는 새로운 일을 보게 하신 것입니다. 넓은 골짜기에 마른 뼈들이 가득했습니다. 희망이 끊어진 절망의 골짜기였습니다. 에스겔이 성령께서 명령하시는대로 마른 뼈들을 향하여 하나님 말씀을 전했더니 그 마른 뼈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뼈 저 뼈가 들어 맞아서 뼈들이 서로 연합하여 골격을 이루더니 곧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게 되어 인간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 생기는 없었습니다. 다시 성령의 명령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생기야 저 사람들 속에 들어가서 그들을 살아나게 하라.” 그러자 생기가 그 속에 들어가 움직이기 시작하여 큰 군대를 이루었습니다. 이 에스겔의 성령 체험은 성령이 나와 함께 하실 때 일어나는 새로운 변화,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말하는 것입니다. 희망이 없던 자들이 새로운 꿈을 꾸게 되고 무력한 뼈들이 강한 군대가 될 수 있는 새 것을 만드는 성령의 역사를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새 일을 일으키는 혁명가이며 인간을 새롭게 개조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변화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 나라 백성 모두가 새롭게 변화되지 않으면 국제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 사회에 여기 저기에 에스골 골짜기처럼 마른 뼈들이 제멋대로 굴러다니고 있습니다. 에스겔처럼 나부터 성령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신 예수를 전하시기 바랍니다. 마른 뼈들이 살아날 것입니다. “옛 것”을 “새 것”으로 완성하시는 성령으로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누구든지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있으면 누구든지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여러분의 삶이 날마다 새 것이 되기 위해 십자가 사랑 가운데 살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증거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새 것과 옛 것으로
마 13:52 / 조상호 목사
이모 장로님이 천국에 가셨다고 합니다. 그가 천국 입구에서 입국 수속을 마치고 나니 예수님이 기다리셨다가 "잘 왔다. 여기까지 오느라고 수고했다. 배고프지. 우리 밥이나 먹고 가자“라고 하시면서 천국 중국집으로 데려 가더랍니다. 그래서 뭘 먹을까 하고 메뉴를 찾으려고 했지만, 메뉴판은 없고「주는 대로 먹는 곳」이라고 쓰여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런데 먼저 온 김집사가 탕수육을 먹고 있더랍니다. 이모 장로님은 "김집사가 탕수육이면 나는 더 좋은 것으로 주겠지 내가 세상에서 봉사도 잘하고 목사님께도 잘해서 좋은 장로로 일하다가 왔는데....... 저 사람이 탕수육이면 나는 더 좋은 것 주시겠지"하며 생각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짜장면을 주시더랍니다. 그래서 그냥 먹으려고 하다가 장로님이 이제 천국에 들어왔으니 쫓아 낼 리는 없을 것 같아서 예수님께 "예수님, 내가 세상에서 봉사도 잘해서 장로가 됐고, 목사님께도 잘했는데. 아니 저 김집사는 탕수육인데 나는 왜 짜장면입니까?"라며 항의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이 장로야, 불평하지 말고 그냥 주는 대로 먹기나 해라. 먼저 온 너희 박목사는 짜장면 배달 나갔다."
누가 웃으라고 만든 이야기지만, 이 유머를 통해서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먹는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살기 위해서 먹는데, 먹기 위해서 사는 사람들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장 주된 관심사는 먹는 것입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고, 아침을 먹고 나면 점심은 ‘어디 가서 해결해야 하나’ 고민하고, 점심을 먹고 나면 ‘어디 근사한데 없나, 저녁은 근사한데 가서 먹어야 하는데’고민하며 24시간 내내 먹는 것만 묵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지순례 하듯 소문난 음식점을 찾아다니기도 합니다. 그러나 먹는 것이 우리 인생에서 필요하기는 하지만, 가장 중요한 관심사항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먹는 문제로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매일매일 무엇을 먹어야 하나, 무엇을 먹지 않아야 하나로 고민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성경 레위기 11장에서 "짐승 중 무릇 굽이 갈라져 쪽발이 되고 새김질하는 것은 너희가 먹되 새김질하는 것이나 굽이 갈라진 짐승 중에도 너희가 먹지 못할 것은 이러하니 약대는 새김질은 하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므로 너희에게 부정하고...돼지는 굽이 갈라져 쪽발이로되 새김질을 못하므로 너희에게 부정하니 너희는 이 고기를 먹지 말고 그 주검도 만지지 말라 이것들은 너희에게 부정하니라...무릇 물에서 동하는 것과 무릇 물에서 사는 것 곧 무릇 강과 바다에 있는 것으로서 지느러미와 비늘 없는 것은 너희에게 가증한 것이라(레11:3-10)" 먹을 수 있는 음식과 먹지 말아야 할 음식의 종류를 언급했기 때문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정육점에 가서 삼겹살을 사와서 구워 먹으려고 돼지를 가만히 살펴보니까, 돼지는 굽이 갈라져 쪽발이지만 새김질을 못하므로 삼겹살을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번에는 추운 날씨에 Avon 강에서 힘들게 잡은 장어를 구워서 장어구이를 해서 먹으려고 했지만, 비늘 없는 것을 보고 차마 장어를 먹을 수 없었습니다. 이번에는 시장에 가서 오징어를 사왔지만, 지느러미가 없는 오징어를 먹을 수 없었습니다. 또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 하라고 한 말씀 때문에 어느 음식도 마음대로 먹을 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끼니때만 되면 무엇을 먹어야 하나 고민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시키러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목적에 따라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가 3일 만에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사랑은 "새 것"이 된 반면, 구약의 율법은 "옛 것"이 되었습니다. 이 "옛 것과 새 것"이 함께 공존하는 곳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참 사랑, 즉 "새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옛 것은 낡아빠져서 더 이상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또한 새 것이라고 해서 옛 것보다 낫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은 식물을 비유해서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뿌리는 ‘옛 것’이지만, 꽃은 매년 새롭게 생겨나는 ‘새 것’입니다. 새 것인 꽃과 옛 것인 뿌리는 식물을 성장시키는데 없어서는 안 됩니다. 만약 오래된 뿌리를 뽑아 버린다면 가을에 풍성한 열매를 거둘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 것인 꽃과 옛 것인 뿌리는 식물이 건강하게 자라는데 있어서 필수 요소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건강한 신앙생활을 하려면 우리에게 옛 것인 말씀과 새 것인 주님의 사랑, 두 가지가 다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말씀 없이 사랑만 추구해서도 안 되고, 사랑 없이 말씀만 추구해서도 안 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본문 52절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요구하고 계십니다. 52절을 다같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 것과 옛 것을 그 곳간에서 내어 오는 집 주인과 같으니라.” 우리는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잘 파악해야 합니다. 원래 서기관이란 에스라 시대 때부터 내려온 사회종교계급의 사람들로서, 하나님의 율법을 읽고 하나님의 말씀 해석하고 증거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서기관들은 하나님 말씀의 전문가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가면서 원래의 의미를 상실하고 위선적인 사람들로 변해갔습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잘 믿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하나님보다 돈과 권력을 더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화 있을진저’라고 하며 책망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그렇게 비판하셨던 서기관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기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은 예수님 당시 타락한 바리새인들이나, 원래의 목적을 상실한 채 종교적인 위선자가 되어버린 서기관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천국의 비밀을 깨달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깨닫고 천국 시민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주님의 제자가 된 저와 여러분들이 이 땅에서 살아가야 할 자세와 사명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새 것 뿐 아니라, 옛 것도 무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새 것을 중요시 할 뿐 아니라, 옛 것도 중요시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옛 것이 무엇을 가리킨다고 했습니까? 율법 즉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첫째로 오늘 본문은 우리들이 ‘옛 것’인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살아갈 것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기준으로 삼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에는 우리의 삶을 인도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우리의 앞길을 환하게 밝혀주기 때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되새김질을 할 때, 그 말씀이 우리의 삶을 인도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나침반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 나침반을 보면 항상 바늘이 북쪽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것은 나침반의 바늘이 항상 북쪽을 지향하는 자석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나침판을 자세히 보면 항상 바늘 끝이 떨고 있습니다. 바늘 끝이 떨고 있는 한, 자석은 자기에게 지어진 사명을 완수하려는 의사를 잊지 않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바늘이 떨리고 있다면 이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을 믿어도 좋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 바늘 끝이 어느 한 쪽에 고정될 때 그 나침반은 쓸모가 없습니다. 우리의 영혼도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 떨어야 합니다. 나침판의 바늘 끝이 항상 북쪽을 향해 있는 것처럼, 우리의 영혼도 언제나 주님의 말씀을 향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 인생의 방향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적인 것들로 인해 영혼이 무디어지지 않고,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 떨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언제나 인생의 방향을 하나님의 말씀을 맞추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한국의 유명한 국어학자인 양주동박사는 스스로를 가리켜 “대한민국의 국보”라고 말했습니다. 그 분은 와세다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기독교계통의 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는 한 여학생을 만나 열렬히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연애편지를 썼습니다. 그 분이 국문학자이기 때문에 얼마나 멋진 문장으로 연애편지를 썼겠습니까? 열심히 기가 막힌 표현을 써가면서 편지를 섰는데, 아무런 답장이 오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기숙사 사감이 편지를 검열하다가, 그가 보낸 편지가 연애편지인 것을 알고 그 여학생에게 전달해주지 않고 다 찢어버렸던 것입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양주동박사는 한 가지 꾀를 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기숙사 사감에게 들키지 않게 하기 위해서 연애편지에다가 성경말씀을 썼습니다. (요일4:7), (롬12:9), (요일4:18), (막10:7~9) 기숙사 사감은 편지지에 성경말씀만 써있으니까, 아무런 의심도하지 않고 그 여학생에게 전해주었습니다. 편지를 받은 그 여학생은 편지를 펼쳐 보았더니 4개의 성경말씀만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 여학생은 성경을 꺼내 말씀을 찾아 4 구절을 적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이러한 내용이었습니다. (요일4:7)에는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서로 사랑하자는 것입니다. 사랑을 고백한 것입니다. (롬12:9)에는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자기의 사랑에는 거짓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사랑은 진실하다는 것입니다. (요일4:18)에는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즉 사감 선생이든지 부보님이든지 누구든지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막10:7~9)을 찾아보니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안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준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무슨 말입니까? 결혼하자는 것입니다. 결국 양주동박사는 그 프로포즈가 성공을 해서 결혼을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무엇을 말하고 있는 이야기입니까? 믿지 않는 사람들도 이렇게까지 성경을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그저 성경은 책상 위에 고이고이 놓아두었다가 주일 하루 교회에 들고 나오지는 않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올해 2006년도에는 하나님 말씀을 가까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오늘 본문은 우리들이 ‘새 것’이 되시는 ‘주님’과 날마다 동행하며 살라고 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특별한 날, 특별한 장소에서만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주님과 동행하며 살아야 합니다. 영국을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만들었던 빅토리아 여왕 때의 일입니다. 빅토리아는 대외적인 무역으로 국가의 발전을 꾀한 반면, 국민 복지를 위해서도 여러 사회사업 기관을 설립하였는데, 이들 기관 중 하나인 양로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날, 이 양로원을 찾은 방문객이 할머니 한 분에게 물었습니다. “할머니, 빅토리아 여왕이 직접 이곳에 온 적이 있었나요?” 이에 할머니는 큰 영광을 자랑이라도 하듯이 대답했습니다. “물론이지, 내가 여기에 온지 지난 몇 해 동안 여러 차례 여왕의 심방을 받았다오.” 독실한 신자였던 방문객은 그 할머니에게 구원의 확신을 심어주려는 목적으로 또다시 질문했습니다. “그렇다면 할머니는 온 세상의 주인이시며, 왕 중의 왕이신 예수님의 심방을 받아본 경험이 있습니까?” 그러자 할머니는 야릇한 미소를 띠우며 말했습니다. “젊은이, 나는 예수님의 심방을 받지 않는다오. 그분과 늘 여기서 함께 지내는데, 따로이 심방받을 필요가 없지 않소? 예수님께서는 가끔씩 나를 찾아주시는 분이 아니라, 여기서 늘 나와 함께 사시는 분이라오.”
그 할머니는 항상 주님과 동행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이러한 모습이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성령으로 늘 우리 곁에 계시는 하나님을 느끼며 체험하며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2006년 한 해 동안 우리가 흔들리지 않고 전진할 수 있는 비결입니다. 지난 주 넬슨에서 한 요트가 강풍에 뒤집어지는 사고가 발생한 적이 있습니다. 강풍에 의해 요트 한 척이 옆으로 비스듬히 누워버린 것입니다. 나중에 그 요트는 구조선에 의해 간신히 구조되어 넬슨항구로 견인되기는 했지만, 신문과 방송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입니다. 요트는 어지간한 바람에도 넘어지지 않도록 설계가 되어 있는데, 바람이 강하기는 강했나 봅니다. 원래 요트의 맨 밑바닥에는 ‘자이로스코프’라는 것이 달려 있습니다. 파도가 심할 때 배가 평형을 유지하도록 도와주는 장치입니다. 산더미 같은 거대한 파도 속에서도 배가 안정되고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이 ‘자이로스코프’ 장치 덕분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의 인생에도 ‘자이로스코프’가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성령님께서 바로 이 자이로스코프 같은 역할을 하십니다. 우리의 삶이 폭풍 속으로 휘말린다 해도, 사탄의 공격이 제아무리 강하다 해도, 여러 가지 유혹과 시험이 밀려온다 할지라도, 성령께서 우리 안에 함께 하신다면 우리는 평형을 지킬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성령님과 동행할 때,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평강을 누릴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지금 여러분들은 성령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고 있습니까? 성령과 함께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세상을 따라 살아가고 있습니까? 지금 성령님의 음성에 순종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내 감정에 끌려가고 있습니까?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는 성령님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 들이고 의지하시기를 바랍니다. 항상 성령으로 충만하여 승리하는 2006년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셋째로, 오늘 본문은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인 우리가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새 것 뿐 아니라, 옛 것도 무시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새 것을 중요시 할 뿐 아니라, 옛 것도 중요시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위에 보면, 새 것인 예수님을 믿는다 해서 가정이나 직장을 팽개치고 기도원에 들어가서 하루 종일 찬송 부르고 기도하는 일에만 매달리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또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면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모든 직업과 일들을 모두 포기하고 소위 영적인 일에만 전념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이나 재능이나 학업은 물론, 자신의 현재 직업까지도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 믿는다고 자기에게 주어진 능력이나 재능이나 학업들을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으로서 살라는 것입니다. 직장인은 말씀에 어긋나지 않는 직장이라면 그 직장을 포기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직장에 유익을 끼쳐야 합니다. 운동선수는 운동선수로서 열심히 훈련을 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학생은 학생으로서 후에 세상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사람들이 되기 위해서는 열심히 노력하고 공부해야 합니다. 2,000년 전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망하게 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이 땅을 복되게 하기 위해 오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방 안에 틀어박혀 성경만 읽고 골방에 들어가 기도만 하라고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이 땅을 축복하기 위해 오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백성인 우리들에 재능과 능력과 은사를 주신 것은 그것들을 쓰레기통에 집어넣으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회 발전에 기여하도록 하기 위해 주신 줄로 믿습니다.
‘성주 인터내셔널’의 대표 김성주 사장은 여성입니다. 김성주 사장은 사업을 시작하면서 중대한 결심을 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사업을 할 때 없어서는 안 될 세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술입니다. 술을 먹지 않으면 우리나라에선 사업이 힘들다고 합니다. 둘째는 돈 봉투입니다. 즉 뇌물 없이는 절대 일으킬 수조차 없다고 합니다. 셋째는 정직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정직하게 사업을 해서는 사업경영이 안 되는 나라가 대한민국이기 때문에, 사업하는 사람들은 술자리를 2차, 3차, 4차를 가야 합니다. 돈 봉투가 왔다 갔다 해야 합니다. 세금 또한 정확하게 신고하지 않고 장부를 이중으로 갖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세상이 말하는 부축척의 유일한 방법이며, 재산을 모으는 가장 빠른 길이라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입니다. 김성주 사장은 ‘나는 이렇게는 사업하지 않겠다’고 선언을 하였습니다. 술자리며 접대도 안 할 것이고, 온갖 뇌물이나 봉투의 거래 또한 않고, 세금을 정직하게 신고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적 경영원칙이며, 하나님 나라의 법이라고 결정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녀에게 돌아온 것은 ‘왕따‘였습니다. 1년 동안 철저하게 경제계에서 외면을 당하였습니다. 여자가 사업을 하고 깨끗한 척은 혼자 다한다고 철저히 세상에서 무시당했습니다. 그러나 김성주 사장은 몇 년 뒤 사업을 완전히 역전시켜 버렸습니다. 극심한 고난과 역경의 세월이 있었지만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이 되어 믿음으로 나갔을 때, 하나님께서 김성주 사장을 축복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업적으로 성공을 거두었을 뿐 아니라, 1997년 스위스 다보스 포럼에서 전 세계 차세대 지도자 100인으로 지명되었으며, 2003년 CNN의 People's Choice of Asia to 새천년의 리더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대학생들이 가장 본받고 싶어 하는 기업가가 되었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에도 김성주 사장과 같이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이 많이 나오기를 소원합니다. 세상적인 기준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의 기준을 가지고 살아가는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이 많이 나오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지난 주 김범중선교사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여러분들 가운데 훌륭한 정치인이 나와 정치계에 하나님의 공의가 흘러갈 수 있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훌륭한 경제인이 나와 경제계에서 정직의 모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매스컴에도 들어가서 편중된 보도가 아닌 진실을 보도하는 훌륭한 인물들이 나오기를 바랍니다. 예술계에 하나님의 거룩함이 드러나게 하는 훌륭한 예술인들이 이곳에서 나올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영국의 캔터베리의 어떤 대주교가 이러한 농담을 했다고 합니다. "예수는 가는 곳마다 혁명을 일으켰는데 요즘 크리스챤은 가는 곳마다 커피를 마신다." 과거 2,000년 전에 오셨던 예수님은 가는 곳마다 새 일을 일으키고 세상을 변화시켰는데 현대 크리스챤들은 편히 앉아서 커피나 마시며 잡담이나 즐긴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이 자리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이 많이 나오기를 축원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세상에 거룩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천국에 감추어져 있는 보화
마 13:51-52 / 안효관 목사
예수님께서는 천국을 '밭에 감추인 보화'에 비유하신 적이 있습니다. 자기의 재산 전부를 팔아서라도 반드시 사야할 만큼 값지고 놓칠 수 없는 귀중한 것이 천국이라는 것을 강조한 말씀입니다. 천국을 소유한 사람은 세상에서 수많은 재물을 가진 것보다, 그리고 높은 학문의 상아탑을 쌓는 것보다 훨씬 더 소중한 것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그 천국에는 수없이 많은 것들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한 때 우리 신앙인들이 가장 많이 읽었던 책 가운데 하나인 "야베스의 기도"라는 책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존' 이라는 사람이 천국에 가게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그를 안내하기 위해 천국문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존은 베드로가 보여주는 황금 길과 아름다운 저택들을 구경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천사들이 부르는 노래 소리도 황홀하게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눈이 휘둥그레진 채 천국을 구경하던 존의 눈에 이상하게 생긴 건물이 하나 눈에 띄였습니다. 커다란 창고 같았습니다. 출입문이 오직 하나 뿐인 건물인데, 창문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상하게 생긴 건물이라 존은 그 건물 안으로 들어가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저 건물 안에 들어가 보고 싶다"고 말하자, 베드로는 꺼려하면서 "안 보는게 나을 꺼예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심리가 보지 말라고 하면 더 보고 싶지 않습니까? 존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천국에 무슨 비밀이 있어야 한단 말인가? 저 안에 도대체 얼마나 놀라운 것이 들어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들자 더 들어가 보고 싶어졌습니다.
천국에 대한 안내가 다 끝난 후에도 존은 조금 전에 보았던 그 건물 안에 꼭 들어가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베드로에게 '그 건물 안을 보여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존이 하도 졸라대는 바람에 베드로는 마음이 약해져서 그 건물의 문을 열어주었습니다.
그 거대한 건물에는 바닥에서 천장까지 선반들이 빼곡이 들어 차 있었습니다. 그리고 각 선박에는 빨간 리본이 묶여진 하얀 상자들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진열되어 있었습니다. 가까이 가서 보니까 각 상자들에 이름이 쓰여져 있었습니다. 존이 베드로에게 묻습니다. "제 것도 있습니까?" 베드로는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서 존을 자꾸만 밖으로 데리고 나가려고 합니다. 그러는 사이에 존은 자기의 이름이 적혀져 있는 상자를 발견하고는 뚜껑을 열었습니다. 뒤에서 베드로가 "내가 당신이라면 그 상자를 절대로 열어보지 않을꺼요"라고 외쳤지만, 존은 어느 새 그 상자의 뚜껑을 열고 말았습니다. 상자 안을 들어다 본 순간 존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 상자 안에는 그가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시기를 원하셨던 수많은 복들이 가득 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많은 복들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시기를 원하셨지만, 그가 세상에 살았을 때에 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천국에 그대로 보관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천국에는 수없이 많은 보물들이 쌓여져 있습니다. 그 보물은 이 세상에 쌓여져 있는 모든 것을 합한 것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길 원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에는 그 천국의 보화를 내 것으로 가져다 쓸 수 있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3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천국에 대해서 7개의 비유를 들어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 그러자 제자들은 주저하지 않고 "그러하오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천국에 대한 진리를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을 7개의 비유를 통해서 설명해 주셨다는 것에는 아주 세심한 예수님의 배려가 담겨져 있습니다. 비유로 설명하신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것도 사람들이 일상적인 삶에서 쉽게 보고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을 예를 들면서 천국을 설명해 주셨기 때문에, 제자들은 천국에 대해서 아주 실제적인 가르침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7가지의 다양한 삶의 경험들을 통해서 천국을 설명해 주심으로써 다양한 천국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 인간의 마음도 한 두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내 감정을 표현할 때에도 한 두 단어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하물며 이 세상보다 훨씬 크고 풍요로운 곳인 천국이 어찌 한두 마디 말로 설명되어질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언제나 한두 마디 말로 모든 것이 정의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천국을 한두 마디로 정의하지 않으시고 다양한 비유를 통해서 다양한 천국의 모습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이런 천국에 대한 비유의 말씀이 제자들의 가슴에 그대로 깨달아졌습니다. 물론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깊은 뜻은 모두 깨달았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천국에 대해서 그렇게 다양하게 비유로 설명하신 이유를 어느 정도는 알 수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천국에 대해서 어느 정도 깨달았다는 것을 아신 예수님께서는 좀더 깊은 진리에로 이끌어 가십니다. 그게 본문 52절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 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
이 말씀은 아주 깊은 의미를 담고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이 주는 의미를 깊이 있게 묵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가장 먼저 생각해 볼 것은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평소 서기관에 대해서 부정적인 말씀을 참 많이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3장에서는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라고 호되게 책망하신 말씀이 7번이나 나옵니다. 그렇게 저주를 선언하실 정도로 부정적으로 여기던 서기관을 오늘 본문에서는 '천국의 일꾼'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서기관이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 아십니까? 서기관이라는 하나의 종교 계급입니다. 원래는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읽고 옮겨 쓰고 해설하는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서기관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보존하고 해석하고, 그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달하는 귀한 직분을 맡은 사람입니다.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율법 해석의 전문가'입니다. 서기관의 대표적인 사람이 구약에 나오는 에스라입니다.
그런데 그런 서기관의 본래 역할이 왜곡되면서 종교적인 위선자요 사기꾼으로 변질되고 말았습니다. 가장 신앙적이어야 하고, 가장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이어야 하고, 또 하나님의 말씀에 늘 성실해야 했던 서기관들이 돈을 더 사랑하고, 권력을 잡는데 더 많은 노력을 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예수님 시대의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서, 직분과 권력을 팔아서 자기들의 욕심을 채웠기에, 예수님으로부터 "화 있을진저"라는 저주를 선언받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분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이라는 말은 그런 부정적이고 책망받는 서기관의 모습이 아니라, 자기의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하는 올바른 서기관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서기관은 본래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의 수종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말씀을 보존하고 그 뜻을 해석하고, 그것을 백성들에게 가르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그것보다 한 단계 더 깊은 의미를 가집니다. 본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 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은 곳간에서 새 것과 옛것을 내어오는 집주인과 같습니다. 이건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동양적인 생활풍습에서만이 이해될 수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나라 옛날 부자집에는 커다란 곳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곳간에는 농사를 짓고서 수확한 모든 농산물들이 가득 들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음식이나 옷, 각종 농기구 등 모든 생활용품들에서부터, 돈이나 값비싼 보석까지도 모두 창고에 보관했습니다. 그리고 그 곳간 열쇠는 반드시 주인이 가지고 있습니다. 주인의 허락이 없이는 아무도 그곳에서 물건을 꺼내올 수 없습니다. 그 곳간 열쇠를 가진 사람이 가정의 모든 권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이 누구인가? 바로 그 집주인입니다. 그러면 곳간은 어디를 말합니까? 그게 바로 천국입니다. 옛날 부자집에 있던 커다란 곳간에 온갖 생활용품과 값진 보석이 들어 있는 것처럼, 천국이라는 곳간에도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가득 가득 들어 있습니다.
문제는 모든 것이 가득 들어 있는 천국의 곳간에서 우리가 생활필수품과 값진 보석들을 꺼내오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천국에 대한 비유의 말씀을 제대로 깨달은 사람이라면 그 천국을 소유한 사람이고, 그 천국이라는 곳간에서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고자 하는 모든 것들을 마음껏 꺼내올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게 천국의 곳간에서 물건을 꺼내오는 서기관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천국이라는 곳간에 무언들 없겠습니까? 그곳에는 모든 것이 가득차 있습니다. "야베스의 기도"에서 비유로 설명해 준 '존'이 보았던 천국의 창고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천국에 있는 모든 값진 보화들을 우리에게 주시길 원하십니다. 그곳에는 엄청난 축복들이 빼곡이 쌓여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세상이 가지고 있는 모든 보화보다도 더 많은 것을 가지고 계신 분임을 믿습니까? 천국 창고에는 엄청난 보화와 값지고 아름다운 것들로 가득차 있음을 믿습니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학 2:8) 세상이 가지고 있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것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자녀된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시고 싶어하시는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아버지 하나님께 간구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넘치는 것들로 채워주실 분이십니다.
우리는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이 되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모든 것을 마음껏 꺼내 쓸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어렸을 때 우리 집 대청 옆이 '도장'이라고 하는 제법 커다란 공간이 있었습니다. 그 도장은 먹을 것을 보관해 놓는 곳이었습니다. 명절이나 잔치 때가 다가오면 몇 주일 전부터 잔치 음식을 준비해서 그 도장 안에다 보관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잔치가 끝나고 나면 남은 음식들을 그 도장에 보관해 놓고는 어머님께서 조금씩 조금씩 꺼내서 식구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런데 군것질 할 것이 거의 없던 시대에 그 도장에 들어가기면 하면 먹을 것이 참 많아서, 어머님이 안 계실 때에 몰래 캄캄한 도장 안에 들어가서 먹을 것을 훔쳐먹곤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어머님께서는 항상 조금씩 밖에 주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머님께서 꺼내 주신 것을 가지고는 배불리 먹을 수가 없어서 어머님 몰래 도장에 들어가서 훔쳐먹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늘 곳간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렇게 조금씩 주시는 인색한 분이 아니십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 8:32) 당신의 독생자를 우리를 위해 주신 우리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께서 어찌 우리를 위해서 무엇인들 아끼시겠느냐 그런 말씀입니다.
그러면 천국 곳간에 있는 것들 가운데 가장 값지고 좋은 것이 무엇인가?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반드시 배워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 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어오는 집주인과 같다."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이 곳간에서 가지고 오는 것이 무엇입니까? "새 것과 옛것"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서기관의 역할이 무어라고 했지요?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보존하고 해석하고 그것을 백성들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까지 서기관들은 지금의 구약성경을 보존하고 해석하고 가르쳤습니다. 이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옛것입니다. 당시의 서기관들은 구약의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쳤지만,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은 그 옛것만을 가져오는 사람이 아닙니다. '새 것'고 가지고 옵니다. 그 새 것이 바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이 하늘의 곳간에서 새 것과 옛것을 가져온다는 말씀은 구약성경과 예수님의 말씀에서 천국의 진리를 꺼내오는 것과 같다는 것을 뜻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창고, 하늘 나라의 곳간에는 풍성한 말씀이 있습니다. 엄청난 축복의 약속들이 가득 담긴 말씀들이 그 안에 들어 있습니다. 그걸 꺼내오는 사람이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입니다.
신명기 28장에 우리가 너무 좋아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 함께 찾아서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신명기 28:1-7절입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네 대적들이 일어나 너를 치려하면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패하게 하시리니 그들이 한 길로 너를 치러 들어왔으나 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하리라." 이것뿐만이 아니라, 계속해서 14절까지가 그런 축복을 약속하신 말씀들입니다.
여러분, 이런 축복이 언제 주어진다고 하셨습니까? 1절에 보면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지켜 행하면" 그랬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켜 행하는 사람에게 이런 축복이 주어집니다. 그러기에 모든 축복은 말씀에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이런 복을 주십니다. 그러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아무리 복을 달라고 기도해도 우리에게 복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하늘 곳간에는 엄청난 보화들이 가득 들어 있는데,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걸 모두 주시길 원하시는데, 우리는 왜 그런 복을 받지 못합니까?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하늘의 복을 달라고 얼마나 많이 기도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도 그런 복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원인은 다른 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입니다. 말씀을 따라 사느냐,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복을 달라고만 하느냐 하는 차이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사람에게는 약속하신 복이 반드시 주어집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약속하신 대로 주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약속을 따르지 않고 우리의 욕심을 따라 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을 누리를 못한 것뿐입니다.
말라기 3:10-12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황충을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멸하지 않게 하며 너희 밭에 포도나무의 과실로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너희 땅이 아름다와지므로 열방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모든 산업을 지켜주시고, 사람들이 그를 복되다고 불러줄 만큼 엄청난 복을 부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온전한 십일조는 드리지 않으면서 하나님께 복을 달라고 합니다. 말씀은 지키지 않으면서 복을 달라고 하니 하나님께서 "복을 쌓을 것이 없도록 부어주시고" 싶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시는 것입니다. 한 번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보세요. 온전한 십일조를 드린 후에 그래도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기 않으면 '왜 복을 주시지 않느냐'고 항의해 보세요.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하신 말씀대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보세요. 그리고 난 후에 하나님께 '왜 복을 주시지 않느냐'고 항의해 보세요. "부모님을 공경"하고 잘 모시면 산업에 복을 주시고 장수의 복을 주신다고 약속하셨기에, 부모님을 공경하고 잘 모신 후에 하나님께 '왜 약속하신 복을 주시지 않느냐'고 항의하세요. 말씀대로 하지는 않으면서 복을 달라고만 하니 하나님께서도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주시고 싶어도 주실 수 없으니 얼마나 답답하시겠어요.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1-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주님은 분명히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려 하지 않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를 염려하며 그것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러니 우리의 기도가 응답될 수 있겠습니까?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드려보고 그래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주시지 않으면 그 땐 하나님께 따질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하늘의 곳간인 천국에는 우리를 위해서 수없이 많은 복들이 예비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천국의 진리를 깨달았다면, 천국에 감추어져 있는 그 수없이 많은 보화(복)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내 것으로 가져올 수 있어야 합니다.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은 곳간에 있는 모든 좋은 것(새 것과 옛것)을 가져오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천국의 제자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늘 곳간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준비해 놓으신 모든 좋은 것들(복과 은혜)을 우리의 것으로 가져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인 우리가 그렇게 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천국에 풍성한 복과 은혜가 내 이름으로 된 상자 안에 가득 들어 있는데, 우리가 그것을 모르고 영육간에 초라하게 살아간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누군가가 내 이름으로 된 통장에 1억 원을 넣어서 나에게 주었는데, 그 많은 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통장을 한번도 이용하지 않고 쫄쫄 굶고 살아가는 사람은 정말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통장은 부자인데 삶은 거지와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혹 그런 사람은 아닌가 우리 자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혹 영적인 거지로 살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세상에서 가장 부자이신데, 그분의 자녀인 우리는 영적인 거지로 살아간다면 우리의 신앙의 삶이 얼마나 잘못된 것입니까? 세상에 있는 통장이나 세상에 있는 곳간에는 우리가 쓰고 나면 자꾸 내 것이 없어지지만, 하늘 곳간인 천국에 우리를 위해서 예비되어 있는 복과 은혜는 쓰면 쓸수록 풍성해지고 많아집니다. 우리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늘 그렇게 풍족하게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많은 복을 내 것으로 가져올 수 있는 비결이 바로 성경 말씀에 있습니다. 신약과 구약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 복의 창고인 성경 말씀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길 원하시는 풍성한 복을 받아 누리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집주인의 비유
마 13:51-52 / 박상훈 목사
그 동안 우리는 마태복음 13장에 기록되어 있는 천국에 관한 예수님의 여러 가지 비유들을 매주일마다 차례대로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마지막으로 여덟번째 해당되는 집주인의 비유를 우리가 함께 살펴보면서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집주인의 비유를 통해서 천국의 백성된 우리들이 해야 할 거룩한 사명이 있음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주셨습니다. 한 마디로 복음전파의 사명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집주인이 때를 따라서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양식을 나누어주듯이 우리에게는 생명의 양식인 천국의 복음을 우리 이웃들에게 나누어주어야 할 거룩한 사명이 있음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영혼구원의 간절함을 다시 한 번 우리의 마음 속에 가다듬고,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항상 말씀을 선포하며 또 복음을 전하는 일에 힘쓸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독일의 고백 교회를 창설했던 마틴 니묄러(Martin Niem ller, 1892∼1984)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이 분은 히틀러의 나치정권하에서 목사님들로 구성된 긴급동맹을 결성했습니다. 그리고 조직적으로 히틀러의 나치정권이 교회 일에 간섭하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또 나치가 무고한 유대인들을 학살하는 것도 항거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니묄러 목사님은 비밀경찰인 게쉬타포에 의해서 체포당했습니다. 감옥에 갇혔습니다. 8년 동안 감옥 속에서 옥고를 치렀습니다. 그러다 1945년 세계 제 2차 대전이 거의 끝나갈 무렵, 니묄러 목사님은 연합군에 의해서 가까스로 구출을 받으셨습니다. 8년 동안 옥고를 치렀으니까 목사님의 마음 속에 얼마나 울분이 쌓였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사님은 전쟁이 끝나고 난 뒤에 "전쟁책임 고백서"라는 한 권의 책을 썼습니다. 그 속에서 니묄러 목사님은 통곡하는 심정으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전쟁의 책임은 히틀러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목사인 나에게 있다!"
그 분이 글을 쓰게 된 동기는 이렇습니다. 밤에 잠을 자면서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 번만 꾼 것이 아니고, 똑같은 꿈을 무려 일곱 번이나 반복해서 꾸었습니다. 꿈의 내용은 이러합니다.
니묄러 목사님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 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줄을 서서 자기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니묄러 목사님도 끼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뒤에서 나지막하면서도 울부짖는 듯한 목소리로 탄식하고 있었습니다. 그 탄식의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아무도 나에게 복음을 전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서 니묄러 목사님은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어디에선가 귀에 익은 듯한 음성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요즘 세상에 복음을 전해 받지 못해서 믿지 못했다는 것이 이해가 잘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궁금해서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그 순간 니묄러 목사님은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습니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다름 아닌 아돌프 히틀러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아찔했습니다. 자기는 사실 지금까지 히틀러를 엄청 미워했습니다. 조직적으로 대항해서 항거했습니다. 심지어 히틀러를 암살하려고까지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돌이켜보니까 자기가 목사로서 히틀러를 생각하면서 진정 어린 마음으로 한 번도 제대로 기도해 준 적이 없었습니다. 또 목사로서 그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면서 복음을 전하려는 생각조차도 하지 않았습니다.
니묄러 목사님은 똑같은 꿈을 마지막으로 일곱번째 꾸던 날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니묄러야! 너는 목사로서 히틀러를 미워하고 손가락질하기만 했지, 한 번이라도 그를 위해서 기도하며 또 그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생각했었느냐? 너는 어찌 그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너의 형제라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했느냐? 왜 사랑으로 그에게 복음을 전해 주려고 생각하지 못했느냐?"
목사님을 향해 질책하는 음성이었습니다. 니묄러 목사님은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렇다. 전쟁의 책임은 히틀러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목사로서 그를 위해 진심어린 기도를 해 주지 못하고 그에게 복음을 전해 주지 못한 나에게 더 큰 책임이 있구나!"
그렇게 해서 목사님은 참회하는 심정으로 그 글을 써서 독일사회뿐만 아니고, 전 세계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이 다음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 때를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 사랑하는 가족들 가운데, 이웃 가운데 누군가가 이런 말을 하나님 앞에서 하게 될 때 우리의 심정이 어떠하겠습니까?
"아무도 내게 복음을 전해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나와 함께 가까이 지내던 그 사람조차도 내게 복음을 전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믿지 못했습니다."
오늘 집주인의 비유를 통해서 집주인이 때를 따라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양식을 나누어주듯이, 우리에게도 천국의 복음을 전해 주어야 할 거룩한 사명이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천국의 복음을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사랑과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전해 줄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편의상 오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간단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우리를 가리켜서 "천국의 제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52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된."
예수님은 우리를 가리켜서 "천국의 제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그 당시에 종교인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자부하고 있었습니다. 성경도 많이 안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들을 가리켜서 천국의 제자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 속에 있건만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천국을 만드신 분입니다. 천국의 주인이십니다. 그 나라의 왕되신 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아니하고 배척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니 어찌 그들이 천국의 제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천국의 제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주께서 가르쳐주신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된 자입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일곱 가지 비유로서 천국의 비밀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첫째로, 씨뿌리는 비유입니다. 천국은 복음의 씨앗을 뿌리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둘째로, 밭의 가라지의 비유입니다. 이 세상에는 천국의 확장을 반대하는 세력이 있습니다. 마귀입니다. 마귀는 밭에 가라지를 뿌렸습니다. 그래서 밭에는 곡식과 더불어서 가라지도 자라기 마련입니다.
셋째로, 겨자씨의 비유입니다. 천국은 방해하는 세력에도 불구하고 점차로 확장되어 나가고 있습니다. 천국백성의 수는 점차로 많아지기 마련입니다.
넷째로, 누룩의 비유입니다. 적은 누룩이 가루 속에 들어가서 가루 서말 전체를 부풀게 합니다. 마찬가지로 복음은 온 세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될 것입니다. 결국에 가서는 천국이 온 세상을 뒤덮게 될 것입니다.
다섯째로, 밭에 감추인 보화의 비유입니다. 천국은 너무나도 값진 보화이기에 우리의 모든 것을 팔아 사더라도 결코 아깝지 않습니다.
여섯째로, 진주의 비유입니다. 천국이라는 진주는 너무나 소중하기에 우리의 모든 소유를 팔아서라도 반드시 사야하는 것입니다.
일곱째로, 그물의 비유입니다. 어부들이 그물 속에 잡힌 고기들을 물가로 끌어냅니다. 그리고 잡힌 물고기를 분리합니다. 좋은 것은 그릇에 담습니다. 그러나 못된 것은 내어버립니다. 심판의 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의인 중에 악인은 갈라내어질 것입니다. 악인은 풀무불에 던지움을 당합니다.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천국의 비밀을 일곱 가지 비유로 말씀해 주시고 난 뒤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가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
제자들은 예수님의 질문에 대답했습니다.
"그러하오이다. 우리가 다 깨달았습니다."
"이제 너희가 천국의 제자니라."
천국의 제자들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불신자들에게는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비밀로 감추어져 있습니다.
어느 마을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을 몹시도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 날은 주일이었습니다. 그는 길을 걸어가다가 자기가 잘 아는 동네 꼬마아이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아이는 손에 성경과 찬송을 들고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아저씨, 안녕하세요?"
"그래, 너 어디 갔다오니?"
"예, 교회에 갔다오지요."
"교회에는 무엇하러 다니니?"
"예, 하나님께 예배 드리고 왔어요."
"하나님? 하나님이 어디 있어? 네가 내게 하나님이 어디 있는지 가르쳐주면 내가 너에게 사과 하나를 주마."
그 때 아이는 스스럼없이 불신자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저씨! 하나님이 안계신 곳을 제게 말씀해 주시면 제가 아저씨께 사과 두 개를 드릴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른이라고 해서 천국의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많은 학식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천국의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린 아이라도 좋습니다. 배우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된 자가 바로 천국의 제자입니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 가운데 우리를 택하여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천국의 비밀을 알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를 천국의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우리를 가리켜서 "천국의 서기관"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52절 말씀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예수님 당시의 종교인들 가운데 한 부류가 서기관이었습니다. 서기관이 하는 일은 성경을 베끼는 일이었습니다. 그 때는 인쇄술이 발명되기 전이었습니다. 그래서 서기관들이 성경을 손수 베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성경을 연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경을 남에게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한편으로 천국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천국의 비밀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우리가 천국의 서기관이 되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수해 주고, 가르쳐 주어야 할 거룩한 사명이 있습니다.
옛날 독일의 어느 신학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 학교는 설교학 시간이면 학생들이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설교를 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그것을 듣고 나서 학생들이 평가도 하고, 또 교수님이 마지막으로 평가해서 점수를 주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 신학교에는 아주 덩치가 큰 학생이 있었습니다. 그는 머리회전이 잘 되지 않고, 또 말도 어눌한 청년이었습니다. 다음 설교학 시간에는 바로 이 청년이 설교할 차례였습니다. 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전날 교수님실을 찾아갔습니다. 그는 설교학 교수님에게 이렇게 부탁을 했습니다.
"교수님, 아무래도 저는 설교에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니 차라리 제가 학교에서 장작을 팬다든지 물긷는 일을 대신하고, 설교하는 것을 면제해 주시면 안되겠습니까?"
교수님은 일언지하에 거절했습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다음날 강단에 올라섰습니다. 수많은 눈들이 반짝거리면서 자신을 쳐다봅니다. 그는 정신이 아찔했습니다. 앞이 캄캄했습니다. 입을 열어서 자기도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오늘 제가 이 자리에서 무슨 말을 할는지 아시겠습니까?"
학생들은 모두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니요, 모릅니다."
그러자 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이 모르시는 것을 저인들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러면서 강단을 내려가 버렸습니다. 교수님은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주 설교학 시간에도 그에게 설교하라고 벌을 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음주에는 준비 잘 해서 제대로 하게나!"
그 다음주 설교학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는 또 어쩔 수 없이 강단에 올라서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번에도 똑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여러분, 오늘은 제가 무슨 말을 할는지 아시겠습니까?"
학생들은 모두 한 마음으로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모른다고 대답하니까 자기도 모른다고 하면서 내려갔지. 그러니 이번에는 우리 모두가 안다고 대답을 하자."
학생들 모두가 하나가 되어서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습니다.
"예, 압니다."
그러자 뜻밖에도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이 다 아신다고 하는데 아는 것을 제가 구태여 다시 말할 필요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러면서 또 내려가 버렸습니다. 설교학 교수님은 단단히 화가 났습니다. 교수님은 그를 불러서 호통을 쳤습니다.
"마지막으로 단 한 번의 기회를 줄테니 다음 시간에는 똑바로 하도록 하게나! 만일 이번에도 설교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점수를 주지 않겠네!"
교수님은 그에게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그 다음시간에도 강단에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그가 강단에 올라가기 전에 같은 반의 학생들이 다 모여서 작전을 짰습니다.
"우리가 그에게 모른다고 하니까 자기도 모른다고 하고서 내려가지, 안다고 하면 아는 것을 다시 무엇하러 말하느냐고 하면서 내려가니까, 우리가 작전을 좀 짜자! 절반은 모른다고 대답하고, 절반은 안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그러면 자기도 어쩔 수 없이 설교하게 될 것이다."
이제 모두가 교실로 들어왔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학생들이 예상했던 대로 그는 입을 열어서 똑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여러분, 제가 오늘은 여러분에게 무슨 말을 할는지 아시겠습니까?"
학생들은 모두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작전을 짠 대로 절반은 고개를 흔들면서 모른다고 하고, 절반은 고개를 끄덕끄덕하면서 안다고 대답했습니다. 학생들은 생각했습니다.
"이제는 그도 별수 없이 설교를 하겠지!"
그러나 학생들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뜻밖에도 입을 열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여기에 보니까 모르는 사람도 있고 아는 사람도 있는데, 그러면 아는 사람이 모르는 사람에게 말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서 또 내려가 버렸습니다. 그 때였습니다. 설교학 교수님의 머리 속에 번개처럼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렇다! 바로 이것이구나. 정말 멋진 설교구나. 설교라는 것이 따지고 보면 아는 사람이 모르는 사람에게 말해 주는 것이 아닌가? 나는 지금까지 설교학 교수라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모르는 것도 아는 것처럼, 설교를 했는가? 또한 아는 것도 모르는 사람에게 말해 주지 않고서 입을 다물고 있을 때가 얼마나 많았던가?"
교수님은 자기 자신을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설교를 이렇게 정리해서 설교학 강의실 앞에 크게 써서 붙였습니다.
"설교는 아는 사람이 모르는 사람에게 말해 주는 것이다!"
이 말이 유명해 졌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그 신학교의 표어로까지 채택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한편으로는 천국의 제자입니다. 천국의 비밀을 배웠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천국의 서기관으로 세우셨습니다. 내가 깨닫고 내가 배운 천국의 비밀을 다른 사람에게 전수해 주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천국 복음을 전파해야 할 거룩한 사명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집주인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52절 하반부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마치 새 것과 옛 것을 그 곳간에서 내어 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
집주인은 곳간 속에 새 것도 또 옛 것도 함께 보관합니다. 그 해 곡식을 새롭게 수확해서 곳간 속에 보관합니다. 새 것입니다. 그러나 날씨가 더워집니다. 겨울철에 두툼하게 입었던 옷을 벗어 놓습니다. 그 당시는 옷이 매우 귀했습니다. 내어버릴 수가 없습니다. 집주인은 그것을 모아서 역시 곳간에 보관합니다. 옛 것입니다.
집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집주인의 통솔을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집주인은 가족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필요에 따라서 때로는 새 것을 내어서 주기도 합니다. 또 때로는 옛 것을 내어서 그들에게 주기도 합니다. 만일 집주인이 곳간을 닫아놓고 열어주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가족들은 굶주릴 수밖에 없습니다. 헐벗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친히 천국의 집주인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때로는 천국의 곳간을 여시고 우리에게 새 것을 공급해 주셨습니다. 천국의 비밀을 우리에게 새롭게 알려주신 것입니다. 때로는 천국의 곳간을 여시고 옛 것도 내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참된 뜻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삶을 통해서 율법의 완성이 되기도 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우리들이 천국의 집주인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천국의 집주인으로서 때를 따라 이웃들에게 생명의 양식을 나누어주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생명의 양식, 곧 천국의 복음을 우리의 이웃에게 나누어줄 수 있는 사랑과 긍휼의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로베레 장군"이라는 유명한 영화가 있습니다. 이미 오래 전에 우리 나라에서도 상영된 적이 있는 영화입니다. 거기에 보면 아주 인상적인 장면이 한 군데 나옵니다. 독일의 나치정권의 항거하는 레지스땅스들, 곧 저항운동가들의 삶을 그린 작품입니다.
불란서의 많은 레지스땅스들이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습니다. 끌려나가서는 무참하게 처형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속에 갇힌 사람들 가운데는 저항운동과는 아무런 관련 없이 체포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억울함을 소리 높여 하소연했습니다.
"나는 억울합니다. 나는 저항운동과는 관련이 없는 사람입니다. 나는 유대인을 죽인 일도 없습니다. 나는 그저 장사하면서 돈을 버는 사람에 불과할 뿐입니다. 나는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내가 왜 죽어야 합니까? 나는 정말 억울합니다."
그 때였습니다. 그와 함께 갇힌 레지스땅스 가운데 한 사람이 나직이 그에게 이렇게 일러주었습니다.
"당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말했습니까? 그 한 가지 이유만이라도 당신은 죽어 마땅할 것입니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5년 동안이나 계속 되었습니다. 이미 수백만의 사람이 피를 흘리면서 죽었습니다. 많은 도시가 파괴되었습니다. 조국과 민족은 멸망직전에 놓여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면 당신은 그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죽어 마땅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예수님은 우리를 천국의 제자로 삼아주셨습니다. 천국의 서기관이 되라고 하심입니다. 집주인의 심정을 가지고 생명의 양식, 천국의 복음을 우리가 간절한 마음으로 나누어주어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행여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죄는 없습니까? 나는 지금까지 무엇을 해 왔습니까?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오늘 마태복음 13장에 기록되어 있는 천국의 비유를 마감하면서 이 시간 한 번 스스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의 기도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나의 사랑과 나의 대화와 나의 위로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과연 누구일 것인가?"
천국의 제자로서, 천국의 서기관으로서, 집주인의 심정을 가지고 영혼구원을 위해서 간절한 마음으로 힘쓸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도 잠시 잠깐 뒤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수밖에 없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우리를 칭찬해 주시는 모습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무개야, 정말 잘했다! 네가 전하는 복음을 듣고서 그 사람도 여기에 왔구나. 죽어 마땅한 사망의 길을 걸어가던 그 사람도 네가 전하는 복음을 듣고서 이렇게 천국으로 오게 되었구나!"
예수님의 칭찬을 듣게 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천국의 제자입니다. 천국의 서기관입니다. 집주인의 심정으로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천국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모두가 힘써서, 우리를 통해 전도의 아름다운 열매가 맺혀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새 것과 옛 것의 비유(집주인 비유)
마 13:51-52 / 박세갑 목사
이 비유는 앞에 나오는 7비유를 완성하는 마지막 비유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일곱 비유를 통하여 현 시대에 있어서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역사 가운데 발전해 가고 어떤 가치를 갖는가에 관한 진리를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본 비유는 바로 그와 동일한 시대의 제자들의 책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앞서 천국 비유를 공부 하면서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비유들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깊고 심오한 진리를 다루고 있지 않고, 또한 그 나라의 생활 전반을 가르치는 비유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 했습니다. 더구나 이 비유들이 주님이 오시기 전에는 하나님 나라에 적용되는 것들이 아니고, 또 주님의 재림 후에 계속될 시대에도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비유들은 주님이 오신 이후부터 주님께서 재림하실 그 때까지 하나님 나라가 진행되고 발전할 역사에 관한 사실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하고 질문하셨습니다. 이에 제자들이 “그러하오이다” 하고 대답하자 주님은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두 마디 말씀 즉 질문과 설명으로 서로를 상호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신 것을 깨달았다는 것은 천국에 대한 가르침을 배웠다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해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고 그것을 이해한 것은 바로 천국에 관한 가르침을 받은 서기관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 하신 질문은 ‘너희가 내가 가르친 교훈의 중심 취지를 파악했느냐?’ 혹은 ‘너희가 나의 말을 종합하여 내가 가르치고자 하는 것을 이해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모든 것” 이라고 전체를 강조하셨습니다. 주님의 교훈에는 균형과 조화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비유로 교훈을 발전시켜 나아가시며 하나님 나라의 역사와 진행의 다른 국면을 하나씩 보여주셨습니다. 그런 후에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주님은 주님의 교훈의 전체와 그 체계를 알았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그들이 이 시대의 책임을 감당하려면 이 깨달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러하오이다” 대답 했습니다. 그러자 이제 주님은 그들의 위치와 책임을 알려 주십니다. 그것이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이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여기서 당시에 예수님 자신을 극심하게 거스르던 사람들의 대표격인 서기관이라는 사회 계급의 사람들로 제자들의 위치를 제시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역사 속에 서기관은 오랜 전통을 갖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율법을 읽고 해설하는 사람으로 인정된 것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학사 에스라에서부터입니다. 참된 서기관은 백성 가운데에서 율법을 일고 능숙한 웅변으로 율법을 주석, 해석, 해설하여 그 의미를 밝혀주는 것을 직무로 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이들이 있었고 여전히 자기들이 율법의 해석자로 자처했습니다. 이들은 구전되는 율법과 그 정확성을 근거로 율법의 문자를 해석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경색된 기준들이 율법을 풀어 설명한다기보다 오히려 더 모호하게 만드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의 율법 위에 장로들의 유전을 더하게 됩니다. 이 유전이 결국 자기들의 지식과 철학에 근거한 것들이기에 이로 인하여 오히려 율법의 의미를 가리는 울타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들은 그들의 유전들을 배격하시며 율법의 영역을 완성하시는 삶을 사시는 예수님을 적대하게된 것입니다. 그들은 지나친 문자적 해석에 빠져 율법의 의미를 완전히 바꾸어 놓고 있었습니다. 율법의 근본 정신은 이해하지 못하고, 문자적인 노예가 되고 만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직책을 가리키는 말을 사용하셔서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이라고 제자들을 부르심으로 제자들이 그 시대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의 해석자가 되어야함을 암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호칭의 의미는 이렇습니다. ‘너희는 새로운 서기관, 즉 하나님 나라의 온전한 해석자가 되어야 한다. 너희를 통하여 이시대의 사람들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알게 될 것이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제자 된 서기관들의 책임은 실로 막중합니다.
이 책임을 완수하기 위하여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주님의 교훈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주님은 이것을 앞서 비유로 제자들에게 가르치시고 해설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 질문하셔서 확인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비유로 가르치신 이 교훈은 과연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 시대가 시종 일관 갈등의 시대라는 사실에서 시작합니다. 주님께서 선한 열매를 위하여 천국의 아들들을 세상에 심지만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수 사탄 마귀가 이를 방해하여 가라지를 뿌립니다. 이것이 마지막 때까지 함께 있을 것입니다. 그 속에서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서는 지금이 은혜와 사랑의 계시 시대이며 이 시기에 승리함으로 하나님 나라를 소유할 백성을 모으는 시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먼저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위에 충성과 봉사와 열심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이제 서기관 된 자들의 책임을 확인해 봅시다. 주님은 본문에서 이 책임을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오는 집주인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동양적 사고 속에서 집주인은 언제나 절대적 권위를 집안에서 가지지만 사랑과 관용을 가지는 너그러운 아버지입니다. 이 주인이 자기의 곳간에서 새것과 헌것을 내옵니다. 여기의 곳간은 실제로 원어 성경에서는`“테사우로스”로 사람의 마음을 나타내는데 사용되는 말이며 여기서는 ‘보물 창고’, 혹은 ‘모아둔 보물’ 의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집 주인이 내오는 것은 그의 소유인 보물이며 그것은 그 나라에 관한 진리의 보물입니다.
그 집주인이 자기의 보물 가운데 “새 것과 옛 것”을 내어 옵니다. 이 “새 것”은 전에 없던 새로운 것이 아니고, “옛 것”은 낡아빠진 헌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최근의 것과 옛날부터 가지고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을 집주인은 자기의 보물 가운데에서 내오는 것입니다. 본문의 “내오다”에 해당하는 원어 성경의 표현은 “엑크발로-”인데 이 말은 직역하면 ‘흩뿌리다 ;cast out'입니다. 그러므로 이 뜻은 “착한 마음으로 아낌없이 내어 줌”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이제 그들이 아낌없이 내어줄 “새 것과 헌 것”을 생각해 봅시다. 이 말은 서로 대립되거나 적대하는 새것과 헌 것이 아닙니다. 새로우면서 동시에 오래된 것들을 의미합니다. 마치 가을에 피는 국화꽃이 그 뿌리는 여러 해를 지난 것이지만 그 줄기와 꽃은 새로운 것이듯이 양자가 모두 성장과 생육에 필수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정원에 뿌리를 모두 제거하면 꽃도 없고 열매도 없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새 것과 헌 것은 바로 이런 의미를 가진 말입니다. 인생에게 있어서 “옛 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 ‘하나님 나라’라는 표현은 더 이상 좋은 표현을 찾을 수 없는 표현입니다. 사람들이 성경과 말씀에서 너무 흔하게 이 말을 대함으로 그 원래의 훌륭한 내용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 나라’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왕권을 의미합니다. 그가 왕이시고 습격해오는 사탄 마귀의 도전에도 불구하고 그의 보좌는 전혀 요동이나 변함이 없는 나라가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것이 바로 “옛 것”입니다. “옛 것”은 바로 하나님의 왕권입니다.
그러면 “새 것”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영원한 진리로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 개인적 생활, 사회적 생활, 국가적 생활에 적용시켜야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가르침을 받은 제자인 우리가 삶 속에서 적용하고 감당할 것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것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알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 시대의 사람들이 오늘날의 교회도 성공하기 위하여 는 이 시대의 정신을 택하고 시대의 문화를 도입해야 한다고 유혹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의 처세술이나 세상의 방법을 배워 세상의 성공을 위하여 여기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여전히 그런 세상을 향한 목표를 버리지 못하면 2000년 전과 똑같이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으려 하는 것입니다.
2000년 전과 같이 지금도 여전히 주님을 믿고 따르는 길은 인기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교회는 언제나 왕이신 주님을 드러내며, 그분의 구속하신 나라를 나타내야 합니다. 그것을 본문에서 예수님은 교회와 그 구성원인 하나님나라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이 곳간에서 옛 것과 새것을 내어옴으로 개인과 사회와 국가를 구원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고 믿으십니까? 우리의 신앙이 적당히 세상을 사는 지혜의 하나라고 믿으십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시며 사랑과 인애가 많으신 분이심을 강조하여 그저 교회에 나오게 하기만하면 구원에 이르는 것으로 가르치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그래서 교회의 프로그램이 모두 재미있고 흥미로운 것으로 구성되어 성도의 길이나 마땅히 가야할 길을 가르치는 것에는 소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이제 주님의 가르치신 하나님나라 즉 천국을 가기위한 긴장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비록 과거 히브리인들이 가졌던 엄격함이나 청교도들의 준엄함에는 미치지 못할지라도 주님의 보좌 앞에 굴복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주님의 십자가에 의한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주님의 사랑과 공의가 동시에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므로 그 십자가에서는 구원의 보좌가 베풀어졌습니다. 이 영원한 진리를 바로 깨닫고 전파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내어올 새 것과 옛 것입니다.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
마 13:51-52 / 이상웅 목사
가끔 성경공부하다가 천국 이야기가 나오면 질문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천국에 가면 영원히 산다고 하는데 그 오랜 시간동안 뭐하면서 지내냐?’, ‘너무 지루하고 심심하지 않겠냐?’, 운동을 좋아하는 분은 ‘천국에도 스포츠 센타가 있냐?’고 하고, 드라마 좋아하시는 분은 ‘천국에도 TV가 있냐?’고 묻습니다. 사실 저도 궁금합니다.
지난주 설교한 본문에 제자들이 ‘왜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라고 질문했을 때 예수님이 뭐라고 대답했습니까?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이 본문을 읽으면서 좀 실망했습니다. 천국의 비밀을 알려주신다고 해서 큰 기대를 했는데, 그 비유를 다 듣고 나서도 여전히 천국에서 뭐하면서 지내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천국을 생각하면서 알고 싶은 것과 예수님이 우리에게 천국에 대해 알기 원하는 것과는 많은 차이가 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혹시 지난주 말씀에 있는 씨뿌리는 자의 비유말고, 그 이후에도 여러 비유가 이어지니까 남은 비유에 담긴 천국의 비밀은 우리의 호기심을 채워줄지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깨닫는 제자
지난번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말씀하고 났을 때 제자들이 예수님께 질문을 했었는데, 이번에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질문을 합니다. 51절입니다.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 하시니 대답하되 그러하오이다” ‘너희들, 내 가르침을 잘 따라오고 있지? 내가 한 비유를 통해 가르치려는 천국에 대하여 잘 이해했지?’ 물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이 자신의 가르침을 잘 따라오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하시는 사역의 핵심은 천국, 하나님의 나라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의 핵심은 천국이고, 그의 제자도의 핵심은 천국에 대한 이해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이 깨달은 천국의 비밀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하신 비유들에 담겨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고 질문하시기 전에 7개의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해변에서 무리들에게 하신 비유가 씨뿌리는 자의 비유,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 겨자씨의 비유, 누룩의 비유입니다. 이렇게 4개의 비유를 말씀하신 후에 무리를 떠나서 제자들과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36절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무리를 떠나사 집에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밭의 가라지의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소서” 이때까지 제자들은 예수님의 비유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설명을 요청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를 설명하신 후에 3개의 비유를 더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밭에 감추인 보화의 비유, 값진 진주의 비유, 그물의 비유입니다.
비유를 이해하려면 그 비유를 말씀하신 배경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가르치셨고, 여러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시험했습니다. 안식일에 손 마른 자를 데려와서 고치나 안고치나 테스트를 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안식일의 주인이라며,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다며 안식일의 참 뜻을 가르치셨으나 무지한 저들은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성령을 통해 귀신들린 자를 치유하시자 저들은 귀신의 왕 바알세블을 빙자하여 행하였다고 비방하고 죽이려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혼란스럽기 시작했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쫓았는데, 왜 종교지도자들이라는 저들은 예수님을 대적하고 죽이려 할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이적을 행하는 능력도 있으신데 왜 저 오만 방자한 대적들을 그대로 나두시는 것인가?’ ‘천국이 왔다고 하는데 여전히 어제와 똑같은 세상 같은데 어디에 왔다는 것인가?’ 이런 질문들을 가졌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혼란중에 있는 제자들에게 비유로 설명을 하신 것입니다. ‘똑같은 씨를 뿌렸지만 밭이 다르면 다른 결과를 얻을 수 있다. 길가처럼 바로 쪼아 먹히기도 하고, 돌밭이나 가시떨기처럼 중간에 실패하기도 하지만 너희 제자들은 좋은 땅이다. 너희들은 씨를 잘 품고 인내하면 백배, 육십배, 삼십배의 결실을 할 것이다. 그렇기에 포기해서는 안된다. 계속 씨는 뿌려져야 한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알곡이 심겨진 밭에 가라지도 뿌려져 함께 자라는 밭의 이야기를 통해 왜 예수님을 대적하는 저들을 그냥 두시는지 말씀하신 것입니다. 지금은 심각하고 필연적인 갈등의 시대를 보내고 있고, 아직은 우리에게 가라지를 뽑을 권리가 없지만 추수의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때가 되면 알곡과 가라지를 나눌 것이고, 가라지는 불태워 심판할 것이라 하셨습니다. 지금은 심판의 때가 아니지만 반드시 심판의 때가 올 것이라 하신 것입니다. 겨자씨의 비유는 아주 작은 씨가 심겨져 커다란 나무가 되는 내용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씨가 심겨졌는지, 그 씨가 자라고 있는지 아무도 느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나무가 되어 그 아래 쉬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라고 비유를 통해 천국이 이미 임하여 이 땅에서 자라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가루 서말 속에 넣은 누룩도 같은 의미를 나타내는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해변에서 집안으로 자리를 옮겨서 제자들에게만 밭의 가라지의 비유를 설명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밭에 감추인 보화의 비유와 값진 진주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이 두 비유는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와 유사한 점이 있습니다. 이미 보화는 이 땅에 있었습니다. 어느날 우연한 기회에 그것을 발견했을 때, 그 가치를 안다면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서 그 밭을 사야한다는 것입니다. 이미 천국은 시작되었고, 그 가치를 안 사람들에 의해 진행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물의 비유는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와 같이 심판과 관련된 비유입니다. 유대인들은 먹을 수 있는 물고기가 있고, 부정하여 먹을 수 없는 물고기가 있습니다. 물 안에 함께 지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물에 잡혀드는 심판의 때가 있고, 그때 부정한 물고기는 밖에 버려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깨닫기 원하셨던 천국의 비밀은 죽음 이후의 천국에 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땅에서의 천국,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들은 예수님 오시기 전에도 적용되지 않고, 다시 오신 후에도 적용되지 않는,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적용되는 천국의 비밀입니다.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시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제자들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습니다. 이와같은 깨달음이 매일 아침마다 새롭기를 축복합니다.
2. 서기관 같은 제자
예수님이 제자들이 깨달았는지를 확인하신 후 깨달음이 있는 제자들을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이라고 명명하셨습니다. 52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 원래 서기관은 율법 해석의 훈련을 받은 학자이자 교사였습니다. 이들은 율법을 지나치게 문자적으로 해석해서 하나님의 의도와는 다르게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해석할 수 있다는 권한은 당시 사회에서는 상당한 기득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을 대적하고, 결국은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처형하도록 백성들을 선동했던 자들이 서기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기에서 서기관을 당시의 서기관의 모습이 아니라 원래 서기관의 역할, 즉 말씀의 보존자이며 전파자로서의 이미지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즉, 천국의 비밀을 모두 깨달았으니 다른 사람을 가르칠 책임이 너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깨달은 그대로 천국의 의미가 변질되거나 왜곡되지 않게 전달하는 역할을 부여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이 이 땅에서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깨닫고 아는 것에서 멈추어서는 안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열심히 전파해야 합니다. 말로 전파해야 하고, 그 깨달음에 걸맞게 생활해야 합니다. 오늘날 이 세상은 기독교를 대적합니다. 알곡과 가라지가 한 밭에 있는 것처럼 긴장과 갈등의 세상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쑥쑥 눈에 띄게 자라지 않는다고 실망해서는 안됩니다. 박해와 갈등속에서도 하나님의 나라가 자라고 있음을 믿는 제자들은 그 일을 위하여 자신을 헌신합니다.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다고 했습니다. 밭에 감추인 보화, 낮고 천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보배로운 주님을 드러내는 일에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전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천국의 비밀을 통해 죽음이후의 천국에 대하여는 한 마디도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물론 사도 바울이 3층천을 환상중에 봤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본 것을 아무 것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사도 요한을 통해 계시록에서 예수님의 재림이후 완성될 천국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계시록에서도 황금과 보석으로 치장된 길이 있고, 놀라운 광채가 있고, 주님과 왕노릇하는 좋은 곳이라고 했지 세세한 것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천국에 가보았다고 하면서 천국은 이렇다 저렇다 말하는 것은 위험한 것입니다. 우리의 호기심이나 두려움을 자극하는 이런 가르침에 현혹되어서도 안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이 아니라 예수님 당시 유대의 서기관과 같이 되는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 앞에서 새롭게 깨닫는 제자들 되시길 축복합니다. 깨달은 것을 변질시키거나 왜곡시키지 않으면서 힘써 전하고, 그 말씀대로 사는 제자들 되시길 축복합니다.
3. 집주인 같은 제자
예수님은 천국의 비밀을 깨달은 제자들을 서기관으로 비유했습니다. 또한 집주인으로 비유를 했습니다. 52절을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 집주인은 자기의 관할하에 있는 집안의 사람들, 가족과 자녀들, 양떼들을 돌보는 책임을 맡은 사람을 의미합니다. 한 국가의 왕에게, 한 회사의 오너에게, 한 가정의 가장에게, 한 교회의 목사에게, 한 목장의 목자에게 주어질 수 있는 이름이 집주인입니다. 예수님이 말하는 집주인은 집사람들에게 갑질하는 집주인이 아니라 참된 왕, 참된 아버지, 참된 목자의 태도로 그 집에 속한 사람들을 돌보고 섬기는 집주인을 말한 것입니다.
집주인은 그 곳간에서 새것과 옛것을 내온다고 했습니다. 우리말 성경은 ‘그 곳간’이라고 번역을 했는데 원래 원문에는 ‘그의 보물’ 혹은 ‘그의 보물 창고’입니다. 집주인은 그동안 자신이 축적한 보물중에서 새것과 옛것을 가져다가 집사람들을 섬기는데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 보물은 천국의 비밀을 깨달은 진리의 보물입니다. 이스라엘 역사 전체를 통하여 축적된 천국의 귀중한 것들입니다. 이 보물의 창고에서 새것과 옛것을 가져온다고 했는데 새것이라는 것이 전혀 몰랐던 새로운 것을 말하지 않고, 옛것이라는 것이 낡아빠진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예부터 있었던 것인데 현재 새롭게 된 것입니다. 모세에게 주셨던 율법이지만 예수님에 의해 완성된 율법입니다. 옛언약이 새언약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약속과 성취이기도 합니다. 옛것과 새것이 이질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에게 약속된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전체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창조 – 타락 – 구속 – 완성의 흐름속에 옛것과 새것을 하나로 연결해주는 것은 역사의 주인되신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천국의 비밀을 깨달은 제자들을 예수님과 같은 집주인으로 임명한 것입니다. 네가 그 동안 깨닫고 축적된 모든 진리의 보화들을 마음껏 가져다가 요리를 해서 집사람들에게 먹이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4:45입니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우리를 집주인으로 임명하였다는 것은 우리에게 맡겨진 집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충성되고 지혜로운 종은 시절에 맞게 그 곳간에서 새것과 옛것을 가져다가 요리를 해서 먹을 양식을 제공한다는 것입니다. 무더위에 시원한 미역냉국을 하고, 지쳐서 힘들 때를 위해 삼계탕을 준비하는 것처럼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요리해야 내게 맡기신 집사람들이 맛있게 먹고 건강해질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말씀을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마중물 성도님들! 주님께서는 우리가 깨닫기 원하십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산다고 해서 주님은 우리가 이 땅에서만 잘 살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가 진행되고 있는지를 알기 원하십니다. 그리고 아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을 확대 재생산하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서기관처럼 가르치라고 하시고, 집주인처럼 어떻게 해야 집사람들이 건강하게 설 수 있을까 고민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모두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 같은 제자, 새것과 옛것을 마음껏 가져다 건강식을 제공하는 집주인되시길 축복합니다.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
마 13:47-52 / 이정선 목사
예수님의 주요 활동무대는 갈릴리 호수 주변이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 중 상당수가 그 갈릴리 호수에서 어부 생활을 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비유는 그러한 배경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배만 탔다 하면 멀미를 하고 정신 못 차리는 사람에게 배낚시 이야기를 하면 재미도 없고 귀에 들어오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평생 배를 타고 고기 잡던 사람들에게 고기 잡는 이야기를 비유로 들어 천국에 대해 설명을 한다면, 귀에 쏙 들어오면서 쉽게 이해가 될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천국은 마치 손님을 기다리는 모텔 주인과 같으니...” 이렇게 말씀하셨다면, 한 집사님 귀가 번쩍 뜨이시겠지요?
예수님께서 고기 잡는 이야기를 하셨으니 우리도 배낚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낚시를 하다 보면 뭐가 걸려서 힘들게 끌어 올렸는데, 웬 이상한 것이 올라오는 수도 있습니다. 생긴 것도 징그러워서 보기만 해도 기분이 나쁩니다. 그런 것은 만지기도 싫어서 아예 줄을 잘라야 할 때도 있습니다. 바다 속에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각종 물고기들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바다 속에 들어가 살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몰라서 그렇지, 바다 밑바닥에는 별의 별 희한한 것들이 다 있는 모양입니다. 낚시를 하는 목적은 좋은 고기를 잡기 위한 것이지, 그런 기분 나쁜 생물을 보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또 낚시를 하면서 잡히는 대로 다 가져올 수도 없습니다. 지난번에 몇몇 분들이 같이 배낚시 갔다가, 한 번 잡기도 어려운 킹피쉬를 얼마나 많이 낚아 올렸는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한 마리도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킹피쉬는 72cm 이상이 되는 것만 잡을 수 있는데, 우리가 잡았던 것들은 50cm 정도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깝지만 도로 놓아주어야 했습니다.
이처럼 정해진 기준에 따라서 가져올 수 있는 것과 버려야 할 것이 구별됩니다. 갈릴리의 호숫가에서는 어부들이 그물을 걷어와서 물고기 담는 장면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물을 호수에 쳐 놨다가 걷어들이는 시간은 파티 타임입니다. 농사로 치면 가을에 추수하는 것과 같겠군요. 어떤 날은 텅 빈 그물만 가지고 돌아오는 때도 있을 것이고, 운이 좋으면 그물이 무거워서 가지고 들어오기가 어려운 날도 있을 것입니다. 여기 예수님의 이야기에서는 그물에 고기들이 가득 들어 있는 날입니다. 그물을 호숫가로 끌어올려 놓으면 물고기들이 햇볕을 받아 금빛 은빛으로 반짝이면서 파닥거립니다. 어부들이 신나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그물 속에는 좋은 물고기들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생선들도 있지만, 먹을 수 없는 것들도 많이 있습니다. 만지기도 싫은 징그러운 것도 있고, 먹음직하게 생겼지만 독이 들어 있는 생선도 있습니다. 아무 쓸 데 없는 불가사리 같은 것도 그물에 걸려 있겠지요. 해삼 같은 것이라면 한국 사람들은 좋아하겠지만, 베드로 같으면 짜증을 내면서 물속으로 던져버렸을 것입니다. 그물을 끌어온 후에 어부들이 해야 할 일은 그물 주변에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먹을 수 없는 것이나 나쁜 생선은 골라서 버리는 것입니다. 구약의 율법에 의하면 먹을 수 없는 생선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징어나 메기 같은 것, 또 갈치도 먹을 수 없습니다. 장어도 먹으면 안 됩니다. 여기서의 포인트는 그물에 걸린 물고기들 중에서 먹을 수 있는 좋은 것과 먹을 수 없는 나쁜 것을 구별해내는 것인데, 천국이 바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어부들이 그물을 걷어와서 호숫가에 앉는 것은 종말의 순간을 상징합니다. 좋은 물고기와 나쁜 물고기가 가려지고 그릇에 담기거나 버림을 당하는 것으로 그 운명이 결정되는 것처럼, 종말이 다가왔을 때 천국에 들어갈 사람과 지옥에 갈 사람이 그와 같이 구별될 것입니다. 앞에 나온 가라지 비유에서 알곡과 가라지를 나누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즉 이 그물 비유는 알곡과 가라지 비유와 같은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같은 내용이지만, 알곡과 가라지 비유는 농사짓는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말씀하신 것이고, 그물 비유는 어부용 버전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또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가라지 비유는 군중에게 해 주신 이야기이고, 그물 비유는 집에 돌아와서 제자들만 모아놓고 하신 말씀입니다. 같은 내용의 비유를 또 말씀하신 이유는 제자들이 가라지 비유를 설명해 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부들이 주 구성원인 제자들에게 그물 비유를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제 이해가 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제자들은 다 깨달았다고 대답을 하지요. 한 번 들어서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두 번 듣고 이해가 되었습니다. 또 같은 내용이지만, 자신들에게 익숙한 언어로 설명될 때 쉽게 이해가 될 수 있었겠지요.
그런데 그 다음의 예수님 말씀은 정말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고 물으시는 데서 ‘이 모든 것’은 천국 또는 천국의 비밀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천국에 대해 가르쳐 주신 것을 다 이해했다는 제자들의 대답을 듣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 것과 옛 것을 그 곳간에서 내어오는 집 주인과 같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여러 가지 비유로 천국을 설명하셨는데, 제자들이 이제 그것을 다 깨달았다고 하니까 이 말씀을 하셨단 말이지요. 그러니까 이 말씀은 지금까지의 천국에 대한 가르침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또 그것을 깨달은 제자들에게 주시는 당부의 말씀일 수도 있겠네요.
먼저, 서기관이란 기록하는 직책입니다. 지금처럼 인쇄가 자유롭지 못한 고대 사회에서는 문서를 기록하고 필사하는 일이 매우 중대한 일이었습니다. 특히 원본을 필사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지금은 원본을 복사기에 넣고 복사하면 간단하지만, 그때는 손으로 베껴 쓰는 필사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아주 중요한 문서를 베껴 쓰다가 오류가 생기면 큰일이 나겠지요. 여기 나오는 서기관은 성경을 필사하는 사람입니다. 지금처럼 성경을 대량으로 인쇄해서 보급하는 것이 아니라 한 장 한 장 베껴 써서 보관하고 그렇게 수천 년을 전해 내려오는 중인데, 그런 일은 당연히 최고의 율법학자들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시의 서기관이라면 성경을 연구하고 백성들에게 가르치는 선생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천국에 대한 가르침을 다 깨달았다고 대답하는 제자들을 지칭하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사실 이 제자들은 대부분 노동자 계층 출신으로 학문이 많지 않은 사람들이지만, 천국에 대한 이해에 관해서라면 누구보다 앞선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천국 복음에 관해서라면 최고의 학자들인 셈이지요. 군중들은 가질 수 없었던 예수님의 특별과외 수업까지 받았으니까요.
그렇게 복음을 듣고 이해했다는 것은 동시에 중요한 임무와 책임을 동반하게 됩니다. 서기관들이 학문을 연구하고 최고의 권위자가 되었다면, 이제 그 율법을 모든 종류의 훼손으로부터 보호하고 안전하게 보호하는 책임을 지게 됩니다. 또 백성들에게 그 율법을 가르치는 임무를 갖게 되지요. 마찬가지로 천국 복음을 배우고 깨닫게 된 제자들에게는 중요한 역할과 책임이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천국에 대해서 모든 것을 배운 천국 복음의 서기관은 마치 새 것과 옛 것을 그 곳간에서 내어오는 집 주인과 같다고 하셨는데, 여기서 눈에 띄는 대비는 새 것과 옛 것입니다. 새 것과 옛 것이 대비되고, 그것이 서기관과 관련된 업무라면 그 새 것과 옛 것은 무엇이 되겠습니까? 간단히 말해서 구약과 신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의 유대 서기관들은 율법으로 대표되는 옛 언약의 대가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하신 일은 새 언약을 세우시는 것입니다. 새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다시 사심을 통하여 우리 죄인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계약입니다. 마지막 저녁식사를 하시면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포도주를 나누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눅 22:20). 예수님의 죽음을 대가로 치루시고 우리의 죄를 속량하심으로써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로운 존재로 서게 된다는 언약입니다.
반면에 옛 언약은 무엇입니까? 그 언약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에 있을 때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맺어진 것인데, 그 언약의 내용은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많은 민족들 가운데서 그들만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되었다는 선민사상이 이스라엘 민족의 자존심과 저력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그 언약의 매개는 율법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증표로서 지켜야 할 율법이 주어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신분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율법을 지킨다는 것은 의롭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구약의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는 그 율법을 지키는 데 완전히 실패한 역사였습니다.
사실, 율법을 지켜서 의인이 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 반대로 의인만이 율법을 지킬 수가 있겠지요. 타락한 인간으로서 죄 가운데서 태어나 사는 죄인들로서는 애초부터 율법의 요구를 온전히 이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옛 언약은 새 언약의 필요성을 강하게 부각시켰습니다. 옛 언약으로는 의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하고, 다른 길로 의에 이를 수 있도록 하는 새 언약을 간절히 사모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께서 메시야로 오셨고, 천국을 가져오셨습니다. 그런데 옛 언약에서 실패한 죄인들을 천국으로 들어가게 하시는 새 언약의 내용은 바로 그리스도 자신의 죽음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죽으심이 나의 죄를 속량하신 은혜라는 것을 믿는 자들에게 의롭다고 인정하심이 선포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새 언약이고, 그 결과는 천국을 상속받는 것입니다.
당시의 서기관들은 율법에 정통한 최고의 학자들이었지만, 그들이 아는 것은 옛 언약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 즉 천국 복음을 깨달은 제자들은 이제 새 언약까지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집 주인이 창고에 들어가서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골동품 보물을 꺼내올 수도 있고, 새로 개발된 최신형 신제품을 꺼내올 수도 있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골동품이 큰 가치를 가지고 있지만, 신제품과 같은 성능을 낼 수는 없는 것처럼, 옛 언약만 가진 서기관들의 가르침으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부분은, 집 주인이 옛 것과 새 것을 모두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새 것이 나왔다고 해서 옛 것을 내다버린 것이 아닙니다. 새 언약이 주어졌다고 해서 옛 언약이 폐기되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해 보십시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마 5:17). 옛 언약의 토대 위에서 새 언약이 맺어지는 것입니다. 옛 언약이 기초라면, 새 언약은 그 기초 위에 지은 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다 가지고 있는 것도 그 이유입니다.
옛 언약이 하나님께서 율법을 매개체로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계약이었다면, 새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을 부르시는 계약입니다. 그리고 그 두 언약은 별개로 상관없는 것이 아니라, 옛 언약은 새 언약의 통로가 되었고, 새 언약은 옛 언약의 그릇에 새로운 내용을 채운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옛 것과 새 것을 다 가지고 있는 천국 복음의 서기관이 사람들을 천국으로 인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3장은 천국의 비유 장입니다. 이렇게 해서 천국의 비유들이 모두 끝났는데, 이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질문을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 새 언약의 천국 복음을 다 깨닫고, 우리의 믿음이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잘 모르겠으면 제자들처럼 다시 설명해 달라고 부탁드리고, 이해가 되지 않으면 성경을 더 읽기도 해야겠고, 또 좋은 자료나 참고서적들을 통해서 우리가 얼마든지 더 깊은 이해와 지식에 이를 수 있습니다. 천국의 비유들을 다 살펴봤으니까, 이제 천국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확신이 깊어져서, 천국을 소유한 그리스도인들로서 날마다 천국을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물 비유
마 13:47-50 / 박세갑 목사
물고기를 잡는 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낚시와 그물을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본문에서는 그물을 사용합니다. 이 방법도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정치망이라는 것으로 보통 자기의 확보된 어장에 설치해 놓고 지난 하룻 동안 그물에 걸린 고기를 새벽마다 건져 옵니다. 다른 하나는 고기가 있는 곳을 크게 입을 벌린 그물로 감싸는 것으로 저인망이나 쌍끌이가 이런 방법이며 본문의 묘사는 이 방법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그물에 고기를 잡아 육지나 배 위로 끌어 올리고는 마무리 작업을 하게 됩니다. 잡은 고기를 고르는 과정입니다. 본문에 묘사된 이 과정이 대부분 갈릴리 어부 출신이었던 주님의 제자들에게 친숙한 과정입니다. 좋은 것은 그릇에 담아 보관하고 못된 것들은 내어 버립니다. 예를 들어 30여년전 우리 연안에서 고기가 많이 잡힐 때에는 아귀나 쥐치 같은 고기는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즈음은 그것들이 귀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고기를 고르는 과정으로 주님은 세상의 끝에 마지막으로 수행될 과정을 비유하고 계십니다.
좋은 것과 나뿐 것을 분리하는 과정은 의인과 악인을 갈라내는 과정을 상징하며 이것이 가장 크고도 중요한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본 비유의 중심은 고기를 잡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과정인 못된 것을 갈라내는 과정이 초점입니다.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이렇게 악인을 갈라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본문은 그들을 멸망시키기 위함이고 그들을 불 가운데로 던져 넣기 위함이라고 말 합니다. 이 주님의 말씀은 지극히 크고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천사들이 악인을 갈라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을 때, “거기서 울며 이를 갈리라.”입니다. 이 충격적인 말씀의 의미는 정말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들이 풀무 불에 던져져서 통곡하며 이를 가는 것은 고통과 분노 때문일 것입니다. 당장 당하는 벌의 고통도 심하지만 지난 시간 동안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의 욕심과 생각, 주장에 이끌려 살아온 인생을 후회하며 자기 자신과 또 자신을 벌하는 존재에 대한 분노들이 그들의 이를 갈게하지만 이제는 돌이킬 아무런 방법이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물의 의미와 그물을 끌어 올리는 것과 천사가 하는 일의 의미를 확인해야 합니다. 47절을 보면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하셨는데, 그렇다면 본문의 전체적인 상황은 결국 이 시대에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49절에서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하신 것은 이 비유를 강조하신 것입니다.
그물에는 한정된 고기가 들어갑니다. 이 그물은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로써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을 모으는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와 그 교회의 영향력을 비유로 나타냅니다. 이 그물은 인간이 살고 있는 넓은 바다에 영향력을 행사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부르고 모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악인들을 모두 모아 내어버리는 최후의 작업이 진행될 것입니다. 교회가 있는 곳, 복음이 전해진 곳에서는 어디서나 이런 작업이 있을 것이고 있어야 합니다. 복음이 하나의 증언으로써 전파되는 모든 곳에서는 어디서나 인간의 사고 가운데 하나의 의식처럼 모든 사람에게 임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통치하시고 우주를 섭리, 주장하신다는 사실에 직면하여 그 속에서 택하심을 입은 백성들이 그물에 들어가고 그들과 함께 가라지 같은 무리들도 함께하지만, 이 시대의 마지막 때에는 큰 분리 작업이 있을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주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천사들이 직접 인간사에 개입하는 때가 올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과거의 천사들은 섬기는 모습이었습니다. 오늘 날에는 이런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천사들은 언제나 섬기는 영으로 오늘 날에도 하나님께서 명하신 자기들의 일들을 감당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그물을 끌어 올리는 것 같은 일을 감당하고 계속하여 본문에 묘사된 선인과 악인을 분별하는 일을 감당할 것입니다.
본문의 비유는 우리에게 여기까지를 가르쳐 줍니다. 본문으로는 우리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언제나 성경이 가르치는 데까지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는 그 이후의 일을 가르치지 않지만 우리는 앞서 가라지의 비유를 공부하며 주님께서 주신 말씀을 참고할 수 있습니다.
(마13;39~43)을 봅시다.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이니,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 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천사들의 사역으로 “넘어지게 하는 것과 불법을 행하는 자들은 거두어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음”으로 그 나라는 깨끗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의인들은 해 같이 빛나리라.”입니다. 이때가 언제인지 우리는 모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언제 다시 오실지도 우리는 모릅니다. 그때는 곧 바로 임할 수도 있고 어쩌면 1000년이 넘는 긴 세월이 될지도 모릅니다. 어쨌던 우리는 그 때를 모르고 또 알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41~42절에서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신 것으로 미루어 보아, 주님의 뜻을 거스르는 모든 것들을 거두어 낸다는 사실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이 비유는 분명히 앞일을 내다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며 구원 백성인 우리는 이 비유와 별로 관계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의미에서 이 비유는 우리에게 심판의 진행을 알게 하고 확신하게 하며, 이런 확신 가운데 소망을 갖게 함으로 우리에게 힘과 은혜의 원천이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본문의 비유를 택하여 앞에 나오는 모든 비유에 비추어 살펴봅시다. 이 모든 비유들은 하나님의 구원과 천국을 향하신 섭리하심을 예표합니다. 13장의 처음부터 나오는 씨 뿌리는 비유와 가라지의 비유, 겨자씨 비유, 누룩 비유들이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와 그 성취를 나타낸다면 뒤에 나오는 감추인 보화 비유와 진주 비유, 그리고 오늘 본문인 그물 비유에 이르기 까지 하나님 나라와 그 백성의 완성과 종말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심판을 우리에게 가르치십니다.
우리는 현재의 우리의 모습과 형편을 바라보며 우리의 실패로 낙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비유들은 비록 인간은 실패할 지라도 하나님은 실패하시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상처 입고, 깨지고, 금이 가고, 슬픔에 지친 이 세상은 심판 속에서 발휘되는 하나님의 자비와 또 그 자비 안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공의에 의하여 치료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물
마 13:47-50 / 이성희 목사
플레시 몹’이란 것이 있습니다. 인터넷 세대 사이에서 이메일 연락을 통해 특정한 날과 시간과 정한 장소에 모여 10분이 채 안 되는 시간에 약속된 간단한 행동을 한 뒤 뿔뿔이 흩어지는 모임입니다. 함께 모여 소리를 치기도 하고, 특정한 행동을 하기도 하고, 음악에 맞춰 춤을 추기도 합니다. 마이클 잭슨이 죽었을 때 세계 각국에서는 마이클 잭슨 추모 ‘플레시 몹’이 있었습니다.
모임은 중요하고, 모으는 기술은 중요한 리더십입니다. 그런데 악한 영도, 이단도, 이념도 더 모으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가 볼 때는 어떻게 저런 제를 다 좇아가나 싶지만 사람들은 좇아가고 모입니다. 어떤 공동목표가 있으면 사람들의 군중심리는 모이고 집결하게 만듭니다. 2002년 월드컵 때 보세요. 누가 오라고 하지 않아도 자기 돈으로 빨간 티셔츠 사 입고 아기들까지 업고 안고 모이지 않습니까? 촛불 집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공동의 목표가 있으면 사람들은 쉽게 모일 수 있습니다.
일전에 텔레비전 뉴스에 보니 부산 해운대 해수욕장에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모였는지 바글바글했습니다. 흔히 ‘물 반, 고기 반’이라고 하는데 제가 보니 ‘물 반, 사람 반’이었습니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모여든 것입니다. 가끔은 이렇게 모인 사람들을 보면서 세상의 즐거움을 위해서는 저렇게 모여드는데 교회는 왜 안 모여들까 하는 의구심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교회는 더 재미있고, 더 생명력이 있는데 말입니다.
교회는 함께 모이는 곳입니다. 헬라어의 교회라는 말, ‘에클레시아’는 ‘에크’라는 단어와 ‘칼레오’라는 단어가 합성된 말입니다. 밖으로 불러내다는 뜻입니다. 교회는 밖으로 물러 함께 모이는 곳입니다. 옛날 로마의 원로원도 ‘에클레시아’(ecclesia)라 불렀습니다. 그리스어로 회중 또는 부름 받은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함께 모이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며 함께 모이는 곳이 교회입니다.
어느 교회 앞 게시판에 “당신은 교회에 들어오지 못할 만큼 악인이 아니죠? 그리고 당신은 밖에 있어도 될 정도로 선한 사람도 아니죠?”라고 써 놓았다고 합니다. 교회에 들어오지 못할 사람이 없으며 교회에 누구나 다 들어와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만큼 악인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않아도 될 만한 선인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누구나 다 들어가야 하지만 다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급에서 출애굽하여 광야에 왔습니다. 가나안까지의 여정에 절반은 왔건만 불평하고, 선동하고, 좌절하고, 하나님을 불신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결국 하나님이 주신 나라,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온갖 사람들이 다 모이는 곳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남녀노소, 선남선녀 그리고 죄인들까지 다 모이는 곳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하나님의 나라가 그물과 같다고 합니다. 그물에 각종 물고기를 모으듯 하나님의 나라는 모든 사람을 다 모읍니다. 하나님께서 그물을 얼마나 촘촘하게 짰는지 걸리지 않는 고기가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다 언젠가는 하나님 앞에 서야 하고 모든 사람이 다 그 앞에 모일 것입니다.
유태인은 그물 짜는 법을 자식들에게 가르치는 민족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물고기의 크기와 종류에 따라 그물코를 다르게 만들도록 가르치는 민족입니다. 고기를 잡으려면 그 고기에 맞는 그물코를 만들어야 합니다. 큰 고기를 잡는 그물로 새우를 잡을 수 없습니다. 새우잡이 그물로 참치나 고래를 잡을 수 없습니다. 새우 그물에 고래가 걸리면 어떻게 될까요? 그물은 찢어지고 고래는 잡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그물은 빠져 나갈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더운 여름에 시원한 바다로 나가서 하나님의 나라의 그물을 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하나님의 나라는 모든 사람을 다 모읍니다.
47절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바다에 그물을 치는 것은 고기를 모으고 잡으려고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실물 설교의 달인이십니다. ‘각종 물고기’라고 말씀하신 것은 갈릴리 주변 동네 사람들에게 가장 쉽게 하신 것입니다. 갈릴리에는 22종 이상의 어족이 생존하고 있습니다. 큰 고기, 작은 고기, 좋은 고기, 나쁜 고기 온갖 고기가 살고 있는 갈릴리를 보시면서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일전에 우연히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를 보고 있는데 시각장애인 어부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연평도에서 한밤 중 썰물 때 그물을 치고, 손으로 더듬어 고기 잡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까이 가 보니 그 분이 시각장애인이었습니다. 이 분은 손으로 고기를 잡습니다. 넙치, 광어, 농어 등 온갖 고기들이 함께 걸려 올라옵니다. 이 분은 손으로 만져보고 그 고기가 무슨 고기인지 다 압니다. 원래 어부였는데 후천적으로 시각장애가 되었습니다. 그 분의 아들이 한밤 중에 함께 나가서 고기를 잡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고기를 잘 잡아도 잡지 못하고 새어 나가는 고기가 더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 그물은 어떤 고기도 빠져나가지 못합니다.
‘그물’은 헬라어로 ‘사게네’입니다. 이 단어는 두 배 사이에 묶어서 끌고 다니거나 고기를 한꺼번에 끌어올리는 그물 또는 한 쪽 끝은 해안가에 고정시키고 다른 한 쪽 끝을 배에 달아매어 밖으로 끌고 나오는 그물인데 무거운 납이 달려서 바다 밑바닥까지 훑어 대량으로 고기를 잡는 큰 그물을 뜻합니다. 어쨌든 그물은 아주 크고 빠져 나가지 못하는 큰 것을 의미합니다. 이 그물에서 빠져 나갈 수 있는 고기가 전혀 없습니다. 모든 고기들이 다 걸리게 만든 그물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또 성경은 ‘물가로 끌어내고’라고 합니다. ‘물가’란 시간적 개념으로 마지막 종말의 심판과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 사이에 중간 시기의 의미입니다. 장소적 개념으로는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인한 심판의 현장을 의미합니다. 때가 되면 누구나 다 하나님 앞에 섭니다. 누구나 다 하나님 앞에 모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 자리를 피할 자도 오지 못할 자도 없습니다.
명성교회의 어느 화가가 얼마 전에 개인전을 했습니다. 김삼환목사님께서 다녀오셔서 화가로부터 이번 개인전의 주제 설명을 듣고 와서 전하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여러 작품들이 있지만 이번 개인전 모든 그림의 주제는 모든 사람이 끝은 다 죽는 것이고 모든 사람이 다 한 곳에 모인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의 인생의 끝은 죽음이고 그 후에 모두가 하나님 앞에 모이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제가 존경하는 어느 목사님께서 오래 전에 어느 교회를 섬기시면서 교인들과 어려움을 겪게 되셨습니다. 장로님들이 견디다 못해 목사님을 찾아 오셨습니다. 어느 날까지 목사님이 교회를 떠나주시면 좋겠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날이 되었지만 목사님은 꿈쩍도 안 하시더랍니다. 장로님 몇 분이 가서 목사님 댁의 짐을 싸기 시작합니다. 목사님께서 옆에서 아무 말 없이 구경을 하시더랍니다. 짐을 다 싼 다음에 어느 장로님이 “목사님 짐 다 싸놨습니다” 그랬습니다. 그 때 그 목사님은 구경만 하시다가 “장로님, 내가 갈 데가 어디 있습니까?” 그러시더랍니다. 목사님의 그 말을 듣고 장로님이 허허 하고 웃으시더니만 다시 짐을 다 풀어놓으시더랍니다.
여러분, 저도 갈 데가 없습니다. 우리가 갈 데가 어디 있습니까? 마지막 말에 가보면 다 거기고, 가보면 다 만나고, 가보면 우리를 기쁘게 기다리고 있는 천사와 믿음의 조상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곳에서 만나지만 함께 하지 못하고 울며 슬피 이를 가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열왕기상 2:2에는 다윗이 솔로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로 가게 되었노니”. 이 말은 다윗만의 고백이겠습니까? 모든 사람의 고백일 수밖에 없습니다. 창세기 49:29에는 야곱은 죽을 때에 “내가 내 조상에게로 돌아가리니”라고 합니다. 모든 사람이 한 결 같이 가야하고, 모여야 하는 곳이 있습니다. 누가 거절하고, 누가 가지 않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모든 사람을 다 모으고 모든 사람이 다 가야하는 곳입니다.
마태복음 23:37에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라고 한탄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왜 모읍니까? 안전하게 하고, 평안하게 하고, 축복하시려고 모으시는데 어리석은 사람들은 거절하고, 피하고, 결국 유리방황하게 됩니다.
영성신학자 헨리 나우웬의 ‘영성 수업’이란 책에 보면 예수님을 통하여 배우는 세 가지 훈련이 있습니다. 첫째는 고독인데 기도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공동체인데 함께 알아보고 모이는 것입니다. 셋째는 사역인데 세상에 긍휼을 베푸는 것입니다. 공동체는 모임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은 그 자체가 중요합니다. ‘모여서 뭐하나?’ 하는 것보다 모임 그 자체가 의미 있고 중요합니다. 우리교회의 제직회도 그렇습니다. 어떤 분은 제직회에 가보니 “예” 몇 번 하면 끝나는데 뭐하려 가냐고 합디다. 그런데 알고 보면 제직회는 ‘예’하러 가는 것입니다. 참여하여 교회 일을 이해하고 동의하는 것, 이게 일입니다. 모이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복음성가 중에 “여기에 모인 우리 주의 은총 받은 자여라, 주께서 이 자리에 함께 계심을 아노라”. 주님께서 계시는 이 자리, 여기에 잘 모여야 합니다. 그래야 저기에서도, 하늘에서도 잘 모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잘 모이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의 나라는 악인은 갈라내고 의인만 들어갑니다.
48절에는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 버리느니라”고 합니다. 49-50절에는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모은 다음에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가라내는 일입니다. 모은다고 다 알곡, 다 의인, 다 하나님의 나라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 모은 다음에 구별하여 갈라내실 것입니다.
‘갈라내어’라는 말은 헬라어로 ‘아포리우신’이란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완전한 격리를 암시하는 용어입니다. 마지막 심판 날에 실행될 의인과 악인에 대한 분리 작업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의인과 악인을 갈라내시는 작업이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아닙니다. 사람들은 의인과 악인을 선별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의인과 악인을 갈라내는 일이 일도 아닙니다.
‘생활의 달인’을 보세요. 불량품을 골라내는 작업을 하는 달인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게 빠르게 손이 움직이다가 불량품이 나오면 한 치의 틀림이 없이 골라냅니다. 어떤 때는 눈을 가리고 시험을 하지만 틀림없이 골라냅니다. 손끝으로 모든 것을 익숙하게 알아냅니다. 달인에게는 과제를 내어줍니다. 어려운 과제를 주시만 달인은 한 번도 실패하는 경우가 없습니다. 제 생각이 불순한지 모르지만 만약 실패하면 될 때까지 다시 녹화해서 “달인 성공”이라고 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의인과 악인을 갈라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잘 못 갈라내셔서 “아뿔사, 내가 실수했네!”하시면서 다시 녹화하는 이런 일은 절대 없을 것입니다.
노아의 방주에는 노아의 부인, 세 아들과 세 며느리, 여덟 사람 한 가족이 탔습니다. 방주에는 의인 가족만 들어가고 악인은 갈라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실수하셔서 의인을 태우지 않고 홍수 가운데 죽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당시에 사람들이 제법 많이 있었을 텐데 여덟 사람만 빼고 다 죽었다는 것은 악인이 너무 많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방주에 모든 사람이 다 타기를 기대하셨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의 ‘양과 염소의 비유’를 보세요. 하나님 앞에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다 모입니다. 모인 다음에 하나님이 직접 갈라내십니다. 하나님은 양과 염소를 갈라내듯이 갈라내셔서 양에게는 복이 있으라고 하시고, 염소에게는 저주가 있으라고 하십니다.
우리 눈으로는 구별이 안 되는 의인과 악인도 수두룩합니다.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 중의 하나인 두아디라 교회에 보낸 편지에는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이 있습니다. 의인 같지만 악인입니다. 진짜 같지만 가짜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모르는 것까지 보시고 의인 같은 악인을 갈라내십니다. 사데 교회에는 말씀합니다.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졌으나 죽은 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살았는지 죽었는지 금방 아십니다. 죽은 자를 갈라내십니다.
요한삼서에는 디오드레베라는 사람과 데매드리오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디오드레베는 으뜸 되기를 좋아하고 권력욕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사도요한의 사도권을 인정하지 않고 교회를 어지럽게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데메드리오는 대조적으로 선을 행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선을 반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사람의 속내를 잘 모르지만 하나님은 그 본성과 의도를 알고 구별하십니다. 하나님의 분별력은 사람을 의인과 악인으로 갈라내십니다.
사람이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는 두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그 사람의 본성 즉 성격과 그 사람의 목소리라고 합니다. 이 두 가지는 사람이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알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은 절대로 감출 수 없이 다 드러납니다. 아무리 악인이 의인인 체해도 하나님은 다 갈라내십니다. 의인이 의인이라고 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다 갈라내십니다.
마태복음 13장의 가라지 비유를 보세요. 13:38에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이요”라고 합니다. 40절에는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 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고 합니다. 한참 자랄 때 가라지를 뽑지 않는 이유를 아시지요? 곡식까지 뽑을까봐 가라지를 뽑지 않습니다. 가라지를 몰라서가 아닙니다.
‘성별’(consecration)이란 거룩하게 구별한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원래 ‘함께’(com)라는 말과 ‘거룩한’(sacer)이란 말이 합성된 말입니다. 하나님이 거룩하게 구별하시면 함께 거룩한 백성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왜 의인을 악인에게서 갈라내십니까? 함께 거룩하게 되게 하시려고 갈라내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함께 거룩하게 된 나라입니다.
병원 응급실에 가려면 면회 시간과 면회복이 필수입니다. 아무 때나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잘 맞춰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들어가려면 입구에서 면회복을 입어야 합니다. 그 것이 없이는 누구도 들어가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도 들어가는 시간이 있습니다. 그리고 준비할 예복이 있습니다. 이것이 없이는 들어가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고 심판하실 때에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다 모으는 시간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예복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예복을 보시고 갈라내어 우편에 앉게 하실 것입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좌편에 앉게 하실 것입니다.
결론
경북 문경에 ‘신망애육원’이란 보육원이 있습니다. 이 보육원은 우리 교회에 계시던 황영태목사님의 아버지 고 황용석장로님이 세우신 보육원입니다. “믿음으로 실천하고, 소망으로 인내하고, 사랑으로 봉사한다”는 표어를 가지고 신앙적으로 가족처럼 운영하는 모범적 보육원입니다. 장로님은 호가 ‘일립’(一粒)입니다. 한 알의 밀이라는 뜻입니다. 장로님은 원래 부자였습니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많은 고아들이 생겼고 장로님들은 전쟁고아들을 하나둘씩 모아들이기 시작하셨습니다. 고아들이 너무 많이 모여 와서 아예 지금의 보육원이 있는 당시에는 자갈밭인 벌판에 고아원을 세웠습니다. 보육원 땅에 맨 먼저 복숭아나무를 심고, 다음에 사과나무를 심었습니다. 지금은 ‘신망애육원 사과’라는 상표로 사과농사를 합니다. 장로님은 아들 딸 8남매를 다 고아들과 함께 고아들의 방에서 생활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그렇게 하지만 할머니는 손자들이 고아들과 함께 생활하는 것이 마땅치 않으셨습니다. 한번은 맏이인 황영일장로님께 할머니가 특별한 음식을 조금 주셨는데 그것을 다락에서 숨어 먹다가 아버지에게 걸려 이틀 동안 밥을 굶겼다고 합니다.
고아들이 많이 모여들어 자녀들과 함께 생활하게 하였습니다. 고아들과 자녀들을 구별하지 않았습니다. 자녀들도 함께 고아원 방에서 생활하지만 자녀들은 자녀이기에 안전하고, 평안했을 것입니다. 고아들과 함께 있지만 이미 자녀로 구별되었습니다. 원생들과 함께 있지만 외롭지도 배고프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왜요? 이미 구별되었고, 이미 자녀이고, 이미 선택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똑같이 함께 고통을 당합니다. 때로는 배고픔도 당합니다. 가끔은 아픔도 있습니다. 요즘같이 경제가 어려울 때는 똑같이 힘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미 구별되고 갈라낸 자녀입니다. 선택받은 백성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 하나님의 자녀에게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모이고, 의인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구별된 이 은혜를 날마다 감사하며 사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