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하여 바르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워라”
사도 12,24-13,5; 요한 12,44-50 / 부활 제4주간 수요일; 2026.4.29
오늘의 복음과 독서 말씀은 복음 선포 활동이 위기에 처했을 경우에, 활동의 목표와 초점을 그전보다 더욱 선명하게 하느님께 두면서도 활동의 방향과 방식에 있어서는 예전의 터전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돌파구를 여시는 성령의 이끄심을 보여줍니다.
그 돌파구의 시작은 예수님께서는 유다교의 전통적인 가르침을 훌쩍 뛰어넘어서 제자들에게 당신 가르침의 결론으로서 “서로 사랑하며 서로 섬기라.”는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성령께서 열어젖히신 돌파구는, 사도들에게는 박해가 일상화되어 버린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을 떠나 소아시아로 복음 선포의 방향을 돌려서 장차 당시 세상의 땅 끝으로 알려진– 또한 지중해 문화권의 중심이기도 했던 - 로마에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이 돌파구의 구체적인 지침으로서 예수님께서는 서로 섬김의 교훈을 새겨주기 위하여 몸소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서로 발을 씻어주라고 명하셨습니다. 또한 사도들을 이끌기 위하여 성령께서는 안티오키아 교회의 교우들에게 “내가 일을 맡기려고 바르나바와 사울을 불렀으니, 나를 위하여 그 일을 하게 그 사람들을 따로 세워라.”(사도 13,2) 하고 이르셨습니다. 평범한 사기지은을 넘어서서 이토록 명백하게 구체적으로 복음 선포의 부르심을 드러내신 경우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그만큼 상황이 엄중한 까닭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사도행전에서는 사도 바오로가 본격적으로 선교 활동에 나설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었음을 알려줍니다.
이때 안티오키아 교회의 교우들이 단식하며 기도하던 상황을 감안해 보면, 그 신자들까지도 복음 선포의 위기를 감지했다는 비상 상황의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공생활이 끝나갈 즈음 사두가이와 바리사이의 음모로 생애 최후가 다가오는 상황에서 교회를 세우기 위한 마지막 준비를 제자들과 함께 하시고, 또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체험한 초대교회의 사도들과 신자들 역시 유다인들에 의한 박해가 점점 더 거세어지는 위기 속에서 성령의 이끄심을 따르는 새로운 선교 시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방향으로가 아니라 소아시아 방향으로 복음화의 물꼬를 트는 선교 전략이 그것입니다.
먼저 복음 말씀과 그 상황을 살펴보겠습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요한 12,44-45). 오늘 복음에서 우리가 들은 이 말씀을 예수님께서 하신 이유는, 그분이 유다인들 앞에서 그토록 많은 기적을 일으키셨지만 그들은 그분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요한 12,37). 이 때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입성해 계셨는데, 그 바로 직전에 예루살렘 근처에 있는 베타니아에서 죽은 라자로를 살리시는 기적까지 베푸셨던 터였습니다. 그런데도 유다인들은 혁명당원들처럼 그분을 내세워 민중 봉기를 일으킬 음모를 꾸미거나, 사두가이들처럼 그렇게 위험한 그분을 죽여 없앨 음모를 꾸미는 등, 도무지 예수님께서 일으킨 기적들에서 하느님의 표징을 읽거나 보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보시기에는 유다인들을 통한 복음 선포의 가능성을 포기할 수 밖에 없게 만든 시대의 징표였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라자로를 소생시키신 기적 이전에도 공생활 3년 동안에 여섯 가지나 되는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요한 2,1-11. 카나의 혼인 잔치; 4,43-54. 왕실 관리의 아들을 살리심; 5,1-9벳자타 못가에서 앉은뱅이를 고치심; 6,1-15. 오천 명을 먹이시다; 6,16-24. 물 위를 걸으시다; 9,1-12. 태생소경의 눈을 뜨게 하심) 그분이 메시아심을 여지없이 드러낸 이 기적들은 모두 당신 뒤에 계신 하느님을 보게 하기 위한 표징이었습니다. 특히 라자로 소생 기적(요한 11,38-44)은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실 수 있는 하느님의 권능을 보여주심으로써, 부활 신앙을 선포하기 위한 특별한 뜻으로 죽을 각오까지 하셔야 했던 위험한 상황에서도 감행하신 마지막 표징이었던 바 예수님께도 제자들에게도 군중에게도 모두 중요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까지 유다인 군중에게 하신 후에는 더 이상 그 군중에게 나타나지 않으시고 오직 열두 제자들하고만 생애 마지막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이 때 제자들에게 남겨 주신 가르침이 요한복음 13장에서 17장까지 매우 긴 분량으로 증언되고 있습니다. "서로 발을 씻어주어라." 라고 하시며 상호 섬김이야말로 비록 현실적으로는 십자가 희생이지만 사실은 서로 사랑하는 부활의 행동이며, 이로써 보이는 사람이 아니라 그 뒤에 계신 하느님을 드러내는 일임을 명백하게 가르치셨습니다. 그래서 이 상호 섬김의 삶으로 당신을 계승하고자 하는 이들이 서로 하나가 되기를 간절히 원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이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요한 17,22)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부활 신앙과 아울러 이를 드러내는 방식이 서로 섬김으로써 하나가 되는 것임을 일깨워 주셨고, 이 두 가지가 하느님께서 새롭게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는 섭리이며 영원한 생명을 지금 여기에서 누리는 방식이라고 일러주시며, 이 가르침이야말로 진리임을 강조하시고자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요한 12,46)고 선언하셨습니다.
그 다음 독서의 상황을 살펴보자면 이렇습니다. 과연 예수님께서 사도로 양성하신 제자들에게 남겨 주신 가르침에 따라서 초대교회 신자들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자라면서 널리 퍼져 나갔습니다. 여기서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 주는 하느님의 말씀의 실체란 영적으로는 부활 신앙이요 사회적으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생생하게 체험한 이들이 서로를 섬기면서 가난한 이들에게 가진 것을 나누는 공동생활을 이룩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초대교회 신자들은 부활 신앙과 공동생활을 증언하던 스테파노를 유다인들의 최고 의회에서 죽인 터에(사도 7,54-60), 헤로데 영주가 야고보 사도를 죽이고 베드로를 감옥에 가두는(사도 12,1-5) 등 박해가 심해지자 비상한 위기 의식을 느끼고서는 성령의 이끄심에 기도와 단식으로써 귀를 기울였는데, 그 결과 이스라엘을 떠나 더 넓은 지역에서 세상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고자, 바르나바와 바오로를 선교사로 파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때 박해자 사울을 번개 빛과 천둥 소리로 발길을 돌려 세우신 예수님의 발현이 결정적이었습니다.
이후 전개된 선교 활동을 통해 바오로는 소아시아와 그리스 등 로마제국 영토에서 유다인은 물론 이방인들에게 부활 신앙과 공동생활의 복음을 전하여 많은 공동체를 세웠고, 이 공동체들은 로마제국의 박해 속에서도 널리 퍼져 나갔고, 끝내 로마제국으로부터 공인을 받고 국교로까지 인정받았습니다. 이것이 인류 역사를 그 이전과 이후로 나누는 기원이 될 정도로 중요한 메시아 강생이 초래한 역사적 위력이여, 이를 증거한 초대교회의 빛나는 역사입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신 빛이심을 드러내셨고, 그분의 하느님께서는 영광스럽게 인류 역사에 드러나시게 되셨습니다. 그런데 심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의 뜻은 아직 완성되지 못했습니다. 특히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에 위치한 동양 즉 아시아 대륙에서는 그렇습니다. 게다가 복음이 전해진 지 2백여 년이 넘는 우리 사회에서도 빛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어둠 속에 머물고 있는 이들이 아직도 많이 있습니다. 바로 불가지론(不可知論)과 무신론(無神論)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하고 세례를 받은 신앙인들 가운데에서도, 초대교회의 사도들과 신자들이 생생하게 증언했던 부활 신앙을 관념으로만 간직한 이들도 많고, 그들이 부활 신앙의 표징으로써 목숨 바쳐 이룩했던 공동생활을 막연한 이상으로만 바라보는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이 모든 현상은 우리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생생하지 못하고 자라나지 못하며 널리 퍼져 나가지 못하고 있음을 알려줍니다.
그런데 당신의 목숨이 위태로워질 것을 각오하고 라자로 소생 기적 사건을 통해 예수님께서 깨우쳐 주시려던 뜻은, 부활 신앙은 죽은 다음 내세에서가 아니라 살아 있는 지금 여기서 일어나는 하느님의 일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의 어둠을 비추는 빛으로서 신앙인들을 삼기 위해서는 신앙인들의 부활 신앙이 생생해야 하고, 또 세상을 구원하시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부활 신앙에 입각한 공동생활 양식이 더욱 자라고 널리 퍼져야 합니다.
부활 신앙이 생생하게 살아 있으면 세례 때에 우리가 받은 영적 탄생의 은총을 실감하게 되고 과연 우리가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남을 깨닫게 될 것이며, 공동생활 양식이 뿌리내리고 퍼져 나가게 되면 과연 이 세상이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세상으로 새로이 창조되어 나감을 실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새로운 인간과 새로운 사회, 이것이야말로 ‘새 하늘과 새 땅’(묵시 21,1)이요 영원한 생명의 가시적 실체입니다.
이제 복음과 독서의 말씀이 어떻게 우리네 현실에서 퍼져 나가야 할 지에 대해서 오늘날 우리에게 던져지고 있는 시대의 징표를 식별해 보겠습니다. 20세기 중반에 소집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2천년이 다 되어가는 전세계 가톨릭교회 역사에서 복음화 제2천년기를 마무리하고 제3천년기를 준비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런데 가톨릭교회의 본산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유럽 대륙에서는 복음화의 열기가 쇠락해 가고 있었습니다. 공의회를 연 지 한 세대가 흘렀어도 좀처럼 복음화 열기는 회복되지 못하고 있었던 무렵, 대희년을 앞두고 당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대륙별 주교 시노드를 열었고 아시아 주교 특별 시노드도 1998년에 로마에서 열었습니다. 이 시노드를 마친 뒤 아시아 주교들이 채택한 결의문을 바탕으로 요한 바오로 2세는 교황 권고 ‘아시아 교회’를 반포했는데, 여기에 현 시기 복음화 상황에 대한 종합적 성찰이 이렇게 표현되어 있었습니다.
전세계의 교회와 함께, 아시아 교회는 하느님께서 태초부터 지금까지 하신 모든 것에 경탄하면서, 그리고 제1천년기에는 십자가가 유럽 땅에 심어지고, 제2천년기에는 아메리카와 아프리카에 심어졌던 것처럼, 제3천년기에는 이처럼 광대하고 생동적인 이 대륙에서 신앙의 큰 수확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것을 확신하면서, 그리스도교 제3천년기의 문턱을 넘어갈 것입니다.(아시아 교회, 1항)
대희년을 앞두고 나온 이 선언은 바야흐로 성령께서 아시아에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자 교황과 아시아 주교들을 통하여 새로운 이끄심을 보여주시는 구체적인 표징이자 복음화를 위한 돌파구입니다. 한국 사회를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세상으로 변혁시켜야 하고, 또 북녘 동포들에게도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여 통일 코리아가 동북 아시아는 물론 아시아 대륙 전체의 복음화를 이룩하는 견인차가 되게 하시려는 원대한 계획을 성령께서 가지고 계심을 보편교회의 교도권, 즉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과 아시아 주교들이 구체적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삶이 바탕이 되어야 하되,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에게 우선적으로 그 사랑을 전할 수 있는 신앙의 기본 실력을 갖추고, 북녘 땅과 대륙을 향하여 선교 열정을 불태울 수 있는 오늘날의 바르나바와 사울들을 성령께서 세우실 날을 기다립니다. 그러자면 먼저 성령의 이끄심을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우리 교회를 복음적으로 쇄신시킬 수 있는 역량이 필요합니다. 이 역량을 갖추자면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들의 노력이 모두 필요하겠으나 보편교회의 역사를 살펴보거나 한국교회의 역사를 살펴보더라도, 각성된 평신도들의 노력이 특히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말씀과 성사적 실천과 사랑의 교우촌을 각자의 삶의 자리에 세우는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