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비단이 아니라 걸레의 삶을 살겠다.
안락과 부귀를 누리는 ‘비단’의 삶을 버리고
고난과 희생을 자처한 삶으로
‘걸레성자’ 또는 작은 그리스도라 불린
해석(海石) 손정도 목사.
어둔 하늘에 별빛 같았던 그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KBS가 소개하는 [성탄특집 임시정부 100년 기획]
<걸레성자 손정도>의 기획의도 속으로 들어가 보자.
그런 사람이 있었다.
빛이 다시 돌아오는 광복(光復)의 날을
확신할 수 없었던 암흑의 시대,
가장 낮고 그늘진 자리에서
오욕의 어둠을 닦고 또 닦았던 사람.
그리하여 기어이
독립이라는 희망을 별처럼 걸어놓았던 사람.
상해 임시정부를 탄생시키고 이끌었던 주역이었고,
만주 길림 한인사회의 아버지였던
독립운동가 손정도 목사
1905년
갓 쓴 도포 차림으로 관리시험을 보러 가던
스물 세살의 청년이 어느날 쉬려고 들리게 된
어느 기독교인의 집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본 순간에
온몸으로 전율을 느끼며 전해오는 성령의 계시를 받고
기독교로 전향을 결심 하는데
유교를 숭배해 오던 아버지의 심한 반대로
결국엔 집에서 쫒겨나
숱한 고통, 고난의 길을 걸으면서도
복음과 민족 운동의 밀알이 되어
이국의 망명지에서 눈을 감기까지.
슬프도록 아름답고 치열했던
그 삶의 발걸음들은 100년 뒤
오늘의 세상에도 별빛 같은 길잡이가 된다.
KBS의 성탄특집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기획된
이 프로그램은
‘비단’이 아니라 ‘걸레’의 삶을 선택했던 독립운동가,
해석(海石) 손정도 목사(1882~1931)의
삶을 통해 갈등과 분열을 넘어
평화와 사랑의 세상으로 나아가는 길을 찾아보고자 한다.
“이 세상아, 네가 얼마나 어두운가?
무슨 까닭에 무엇을 얻고자 서로 다투느냐.
집이 집을 다투며
지방이 지방을 다투며
나라가 나라를 다투며
민족의 분간,
황색 흑색 백색의 분간과
동편 서편의 분간으로
야단스럽게 서로 눈을 부릅뜨고
서로 칼을 겨루며 대포를 겨루는가.
우리는 이와 같이 악하고
어두운 세계를 부스터트리고
평화의 세계,
사랑의 세계를 짓고자 한다.
”(손정도, ‘조선의 변천을 논함’ ≪신학세계≫ 창간호 (1916.2.)
디아코노스, 걸레성자 손정도”
성경에 등장하는 ‘디아코노스(διάκονος)’라는 단어는
주로 ‘집사, 종, 섬기는 자’로 해석된다.
그런데 이 디아코노스의 어원을 따라가면
‘먼지를 무릅쓴 채 일하고 청소하여
그곳을 빛으로 밝히는 사람’이라는 뜻이 나온다.
그런 의미에서 평생의 신념으로 걸레 철학을 주창했던
손정도 목사의 삶은 진정한 ‘디아코노스’,
걸레성자의 모습이었다.
그는 목회 현장은 물론
독립운동의 현장에서도 가장 낮은 자리에서
남들이 마다하는 궂은일을 하는 것을
자신의 소명으로 삼았다.
그것은 역사의 어둠을 걸레처럼
닦고 닦아서 마침내
광복이라는 빛이 돌아오게 하는 일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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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회 임시의정원 개원 기념사진 (1919.9) (가운데 안창호의 오른쪽이 의장 손정도) <사진=KBS> |
“상해 임시정부 탄생의 주역,
그러나 가려진 이름의 독립운동가”
손정도 목사님은
상해 임시정부 출범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며
임시의정원 의장과 국무위원을 두루 역임했다.
상해 활동 이전부터 안창호와 호형호제하는 동지였으며,
임정 활동 외에도
김구와는 무장단체 의용단과 한국노병회를,
안창호와는 흥사단을,
박은식과는 대한교육회를 조직하는 등
여러 독립운동 단체를 이끌며 활동했지만
업적에 비해 가려진 이름이었다.
그것은
그가 언제나 다른 사람의 공로를 앞세우고
자신은 궂은일을 하며
스스로를 낮추는
삶의 철학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 자신이
독립운동 계파 간의 갈등을 조정하고
화합하는 역할을 주로 하면서
어떤 특정 노선을
대표하는 인물로 지목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기에 길림 시절
열다섯 살의 소년 김성주(훗날의 김일성)을
돌봐준 인연 때문에
독립 운동가 중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목사님이 조명과 연구에서
소외된 요인도 작용했을 것이다.
“가쓰라 암살음모 사건과 고종의 밀명”
1910년 감리교단의
중국 선교사로 파견돼 활동했던 손정도 목사는
1912년 ‘가쓰라 암살음모사건’의
주모자로 하얼빈에서 체포돼
참혹한 고문과 악형을 받는다.
아무런 증거도,
자백도 없었기에 마땅히 풀려나야 했지만
일본인은 기어이 손정도 목사를
다시 거주제한 1년형으로 옭아매 진도에 유배시켰다.
그리고 1년의 유배를 마치고 풀려난
손정도는 서울의 동대문교회와
정동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해
민족혼을 일깨우는 설교로 큰 부흥을 이끌었다.
하지만 이 무렵 한 사람과의 만남이
그를 다시 한 번 선택의 기로에 서게 한다.
그는 헤이그 밀사 파견으로 강제폐위 된 채
덕수궁에 유폐되다시피 지내던 고종이었다.
고종은 정세를 전환할 새로운 밀사 파견을 계획하고,
자신의 아들 의친왕 이강을
파리 평화회의에 보내 일본의 만행을 고발하고자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비밀리에 의친왕의
특사행을 추진할 믿을 만한 인물이 필요했는데,
바로 그 조력자로 손정도에게 도움을 청한 것이다.
이에 손정도는 갑작스레 정동교회를 사임하고
평양으로 이주하는데.
“호조(互助)의 이상촌 건설, 못다 이룬 미완의 꿈”
상해 임정을 떠나 길림으로 향한
손정도 목사가 생애 마지막으로 혼신의 힘을 기울였던 건
‘호조(互助)’운동이었다.
‘호조(互助)’란, 말 그대로
‘서로 돕는’ 자급자족의 이상촌을 건설하는 것으로
최종 목적은 무력투쟁을 위한
독립운동 기지로 삼는데 있었다.
안창호와 함께 오래 전부터 구상해온
이 꿈을 위해 손정도는 동지들과 함께
주식회사 형태의 ‘농민호조사’를 설립하고,
만주 액목현 일대에 대규모의 땅까지 매입해
이상촌 건설에 열정을 쏟았다.
하지만 100여 호가 입주했던
농민호조 이상촌은 일제의 방해공작과
만주 침략으로 어려움을 겪으며 실패하고 만다.
그리고 얼마 후,
고문후유증의 재발로 병마에 시달리던 손정도 목사는
결국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망명지에서 눈을 감는다.
1931년 2월19일 밤 12시,
그가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간 시간이다.
“걸레성자 손정도 목사가
시대의 어둠을 닦으며 기도했던
사랑과 평화의 봄날을”
손정도가 죽고 14년 만에 일제의 어둠은 물러갔다.
하지만 조국은 분단되었고,
이산의 상처는 깊어갔다.
분단 이후 손정도의
큰아들인 손원일은
해군을 창설하며 해병대를 만들어
‘대한민국 해군의 아버지’로 불리는 해군제독이 되었고,
작은아들 손원태는 미국 유학 후
재미교포로 의사의 길을 걸었다.
그리고 손정도가
양자처럼 돌봐주고 후원했던
소년 김성주는 북한의 지도자가 되었다.
김성주 그가 바로 공산당 지도자가 된
김일성이였기 때문에
손정도 목사의 독립운동은 그늘에 가려져 있었는데
KBS에서 재 조명하며 빛을 보게 된 것이다.
현재 손정도 목사의
큰아들 손원일 해군 제독의 무덤은 서울의 현충원에 있다.
그리고 작은아들 손원태 박사의 무덤은 평양의 열사릉에 있다.
분단된 조국의 남쪽과 북쪽.
서로 다른 자리에서
같은 하늘의 햇살을 받고 있는 형제의 무덤.
어쩌면 이 무덤들은
손정도 목사가 못다 이룬 꿈을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걸레성자 손정도 목사가
시대의 어둠을 닦고 또 닦으며
간절히 기도했던 호조(互助) 세상,
사랑과 평화의 봄날이
조국에 찾아오기를 바라는 꿈을 말해 주는것 같다.
첫댓글 고귀한 자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