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보작 1] 애채들이 우는 지문의 기억/고형렬
허공의 그대가 살며시, 땅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 눈록들은 전율한다
신이 툭, 히말라야에 던져놓은 재규어
돌이 발에 닿는 순간, 눈이 열리고
그 눈을 찢은 영혼은 갑자기 태어났다
모래를 심장에 전하던 백만분의 찰나
짧은 정강이 아래 봉합된 발바닥
지평선과 대칭한 복부의 곡선과 음부
그 안에 걸려 있는 복잡한 장기들
왜 그것들이 꼭 있어야만 했는가
꽉 다문 입처럼 강인한 항문의 괄약근
그 위를 뛰어가는 한주먹의 흰 돌들
만약 스스로 존재한다 할지라도
누가 저 재규어를 상상할 수 있을까
등골을 타고 성기를 가린 긴 꼬리
호랑가시나무 잎사귀가 뒤덮인 혓바닥
사쁜, 검은 바람의 호명이 되던
헤아릴 수 없는 그 세월, 몰록 흐른 뒤
지구 밖의 허공 속 벼락을 쥐고
공전궤도를 우두커니 서 있는 그림자
마지막 재규어는 지금 어디 있는가
살며시 지구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
아 한 묶음 꽃의 울음이 터져나왔다
[후보작 2] 흑앵/김경미
크고 위대한 일을 해낼듯한 하루이므로
화분에 물 준 것을 오늘의 운동이라친다
저 먼 사바나 초원에서 온 비와 알래
스카를 닮은
흰 구름떼를
오늘의 관광이라 친다
뿌리 질긴 성격을 머리카락처럼 아주 조금 다듬었음을
오늘의 건축이라 친다
젖은 우산 냄새를 청춘이라고 치고
떠나왔음을
해마다 한겹씩 흑백의 필름통을 감는 나무들은 다 사진 찍어두었을 거다
신록답지 못했던 그 사진들 없애려
나뭇잎마다
한 장 한 장 치마처럼 들춰본 추억을
오늘의 범죄라 친다
없애고도 산뜻해지지 않은 이 나날의 해와 달을
오늘의 감옥이라 친다
노란무늬 붓꽃을 노랑 붓꽃이라 칠수는 없어도
천남성을 별이라 칠 수는 없어도
오래 울고난 눈을 검정버찌라 칠 수는 없어도
나뭇잎 속의 사진을 당신으로 쳐주고 싶지는 않아도
종일 사로잡힌 오늘 하루의 그리움을
위대함이라 친다
[후보작 3] 침대가 말한다 /김행숙
나는 침대로서의 면모를 잃지 않았다. 작은 삐걱거림도 모두 나의 본성에서 연유하는 것. 그러나 도마 위에 누웠다고 느끼는 건 오직 너의 문제, 파 뿌리처럼 발이 잘렸다고 소리치는 건 나를 떠날 마음이 없기 때문이 아닌가, 진실로진실로 이 순간만큼은 네가 대파의 아픔에도 공감한다는 것인가.
너는 왜 모든 문제를 네게 끌고 들어오는가. 오늘 너는 식칼처럼 누워있다. 침대는 어느 연인을 눕히듯이 너의 어린아이를 붑히듯이 식칼도 눕힐 수있다. 너는 내 위에서 무엇을 저미고 다지고 마침내 팔을 높이 쳐들어 내리치고 있는가. 언제나 너의 침대는 모든것을 부드럽게 이어주고 싶다. 나는 너의 팔이 펜과 이어지고 노트와 이어지고 긴 이야기와 끝없이 이어지던 밤을 기억한다. 아침에 스르륵 잠이 들었고 가장 밝은 한낮까지 이어지던 꿈을 나는 이어가고 싶다.
그러나 거울 위에 누웠다고 느끼는 건 오직 너의 문제. 너는 침대를 독차지했다고 생각한다. 너는 침대의 기억을 무시한다. 내 위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너는 상상하지 못한다. 너는 한 장의 시트를 갈면 모든 게 지워지는 줄 안다. 죽어가는 사람이 죽는 순간에 남긴 무의미한 음절을 나는 기억한다. 그가 이루지 못한 것은 결국 하나의 단어인가. 죽음의 입술로부터 가능성을 이어받은 음절과 다음에 올 음절은 빛처럼 갈라져서 먼 곳으로 떠났다. 그것은 무한한 문장이 되고 우주처럼 무한한 편지가 된다. 나는 그의 똥오줌도 기억하고 그의 말년의 사랑도 기억한다. 나는 사랑하는 한 쌍의 몸들을 솜털까지 기억한다. 잠을 청하는 인류는 최종적으로 제 몸을 누일 땅을 파듯이, 오오 죽음을 핥듯이 다른 몸을 탐하고 미워하고 곡해하고 그리고 가장 외로워한다. 잠의 사전에 중단은 없다. 잠은 불꽃과 같아서 너희의 엉덩이는 앗, 뜨거워지는 것이다. 내게 오랫동안 머물렀던 정든 육체가 동굴처럼 깊어지던 순간들을 시시각각 변하는 저녁 하늘을 바라보듯 나는 그릴 수 있다. 작은 몸을 괴롭힌 욕창이 그가 잠든 사이에 더욱 장엄해지듯이 너희는 어디라도 더 빠져들고 마는 것이다. 왜 너는 외면하는가.
너는 참을 수 없는 것을 보았다는 듯이 돌아 눕는가. 혼자서 너는 연극을 하는 것 같다. 누가 너의 대사를 썼는가. 나는 무대인가. 어둠 속 팔짱을 낀 관객인가. 그러나 어느쪽으로 돌아눕든 그것은 오직 너의 문제, 그것이 오늘의 고독이다
침대는 인간적인 변덕과 무관하다. 나는 언제라도 어디라도 너와 함께할 것이다. 연약한 너는 하루도 지치지 않는 날이 없다. 네가 진정으로 원하는 바는 잠에게 순순히 끌려가는 것, 그곳이 어디라도 눈을 감고 따라가는 것, 잠의 염료에서 너의 전부를 물들이는 것, 나는 밤새도록 잠들기 위해 애쓰는 너를 돕고 있다. 도마 위에서라도 거울 위에서라도 뾰족한 시곗바늘 위에서라도 너에게로 잠은 꼭 찾아올 것이다.
[후보작 4] 아카시아 꽃 /마종기
1. 1950년
아, 저 먹이!
저 맛있는 꽃!
굶주림에 지친 나를 살려준 꽃,
헛구역질의 꽃향기도 기억난다.
아, 저 황홀한 먹이!
한국 전쟁의 마르고 긴 낮은
몇 달씩 지치고 배가 고팠다.
시야가 노랗던 초등학교 6학년,
뙤약볕이 어지럽고 무섭게 더워
방공호 땅굴 속의 흙벽을 긁으며
작은 진흙덩어리 몇 개씩 삼키고
흙 묻은 입에 아카시아 꽃송이들
몇 송이채 씹어 먹고 또 먹던
그 여름, 저 흰 향기의 밥.
2. 2009년
5월 말에 만난 무더기의 황홀은
진한 몸 냄새 흔들며 눈 감는 꽃,
충청북도 제천, 진천, 옥천을 돌며
밤낮으로 어지럽게 달리면서 핀다.
온 몸에 감기는 탄성의 감촉으로
나도 오랜만에 깊은 잠을 잤다.
요염하고 화사한 저 지천의 먹이!
아직도 어디쯤에 남아있는 내 허기여,
미안하다, 가지고 싶었다.
내 소원은 이 계절만이라도 함께 있는 것,
웃으면서 배고픈 나를 숨겨주는 꽃.
[후보작 5] 국경/박주택
이웃집은 그래서 가까운데
벽을 맞대고 체온으로 덥혀온 것인데
어릴 적 보고 그제 보니 여고생이란다
눈 둘 곳 없는 엘리베이터만큼 인사 없는 곳
701호, 702호, 703호 사이 국경
벽은 자라 공중에 이르고 가끔 들리는 소리만이
이웃이라는 것을 알리는데
벽은 무엇으로 굳었는가?
왜 모든 것은 문 하나에 갇히는가?
문을 닮은 얼굴들 엘리베이터에 서 있다
열리지 않으려고 안쪽 손잡이를 꽉 붙잡고는 굳게 서 있다
서로를 기억하는 것이 큰일이나 되는 듯
더디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를 쏘아 본다
엘리베이터 배가 열리자마자
국경에 사는 사람들
확 거리로 퍼진다
[후보작 6] 빗소리/ 박형준
내가 잠든 사이 울면서
창문을 두드리다 돌아간
여자처럼
어느 술집
한 구석진 자리에 앉아서
거의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은 채
술잔을 손으로 만지기만 하던
그 여자처럼
투명한 소주잔에 비친 지문처럼
창문에 반짝이는
저 밤 빗소리
[후보작 7] 구름葬 /송재학
낮달이 구름 속에서 머리 내밀 때마다 궁금한 배후, 씻긴 뼈 같은, 해서체 뼈침 같은, 벼린 낫의 날 같은, 탁본 흉터 같은 것이 새털 구름을 징검징검 따라가고 싶었다 너무 시리거나 너무 어리거나 하여 바람벽에 못질하여 걸 수 없으니 내 속에 뛰어 눈을 후비고 들어왔을 때, 낮달과 내 눈동자의 뒤쪽까지 궁금하다 풍장이 신열 앓는 구름 속 잡사이거니 했기에 아주 맑은 정강이뼈 한 줌이 자꾸 풍화되는 것이라 믿었다 그래도 낮달과 내 눈동자의 뒤를 하염없이 비집고 들어온 낮달이다 봄부터 시름시름 앓는 내 백내장의 侵蝕을 돕던 낮달 조각은 다시 구름 걷힌 서쪽 하늘 전체를 차지해 해말간 몸을 또 씯어내고 있다 저게 맑은 눈물의 일이거니 했다
[후보작 8] 위험한 서지 /신용묵
소에게 풀을 먹이고 그것이 뿔이 될 때까지 기다린다
구름의 행군이 오래 계속되었다
집들은 양말처럼 현관을 가졌고
어제가 벗어놓고 간 날씨 같았다
그 집에 사는 동안 아는 것은 비밀밖에 없었고 모르는 건 소문밖에 없었다-그러므로 침묵!
거울에서 가면을 꺼내 쓰고 기다린다 거울이 피부가 될 때까지
가위표 마스크를 쓰고 달력은 날마다 어제 속으로 연행되었다, 가면은 그림자를 오려 만든 것
가위는 혐의를 입증하는 증거이므로
가위는 여러 장의 페이지로 넘어간다
그 집은 너무 많은 그림자로 더러워졌다 구름의 왼발과 오른발 혹은 오리다 만 눈과-그럼에도 침묵!
열릴 때마다 현관은 안과 밖을 뒤집었으며
거울에는 흰 소가 검은 소로 비쳤다.
풀에 받친 바람이 풀 아래 쓰러지듯
소에게 풀을 먹이고 뿔에서 꽃이 필 때까지 기다린다
첫댓글 음 요즘 시쓰는 사람들 최고의 상이 '미당문학상' 인 것 같이 생각되고 있는데,,,,글쎄요 상금 때문인가^^,,,,저는 개인적으로 김수영문학상을 좋은 문학상으로 알고 있는데, 그 상을 받는 시인들의 작품을 보면 대부분 좋아요 김수영의 이름에도 걸맞는 작품도 있고,,, 올해 미당상은 누가 가져갈까요,,,전 김행숙이나 신용묵 시인이 받았으면 좋것는디^^
지난 해는 워낙 예상밖의 파격으로 수상자자가 결정된 걸 보면 올해는 아마 어느정도 예상되고 납득할만한 분이 되지 않을까 짐작됩니다..송재학 시인도 몇 년 째 계속 후보로만 올라 있어서...
그러고보니 송재학 시인이 받을 분위기 같기도 하네요,,,그 넘치는 수사라니~~~
창문에 반짝이는 저 밤 빗소리... 이런 투명한 싯구가 좋아요. 복잡한것 보다는 간결한게 좋구요. 제 개인적인 취향이 그러네요.ㅎㅎ
이 사건 때문에 오랫만에 송시인과 통화해 봤네요. 잘 살고 계시더군요. 함 만나자며 반가워 하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