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보다 먼저
호들갑스런 태풍이 세 차례나 지나간 가을 들머리다. 그때마다 세찬 비바람으로 바깥 활동은 지장을 받았다. 앞서 바비와 마이삭은 주중이었고 하이선을 주말과 이어진 월요일 아침이 태풍 경과한 시간대였다. 근무지에서는 휴업이 내려져 출근하지 않아도 되어 창원에 머물다 그날 오후 거제로 복귀했다. 절기가 백로였는데 비바람에 이슬이 맺혀볼 겨를 없이 세찬 바람만 불었다.
구월 둘째 목요일 아침이었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이른 아침 와실을 나섰다. 골목을 지나 학교로 향하지 않고 거제대로 횡단보도를 건너 들판으로 나가 농로를 따라 걸었다. 태풍 이후 고물이 차지 않은 벼이삭들은 하얗게 되어 갔다. 벼들은 이삭이 나오면서 태풍에 시달려 백수 현상이 나타나 금년 농사는 수확량이 많이 줄어들 듯했다. 알곡이 무겁지 않으니 고개도 숙이지 않았다.
아침 해가 뜨지 않은 이른 시각이라 연초삼거리는 엷은 안개만 퍼져갔다. 효촌마을 뒤는 와야봉과 약수봉 산등선이 드러났다. 산등선과 이어진 하늘엔 낮은 구름이 덮여 있었다. 연초교를 지난 수월삼거리에는 높은 아파트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뒤로 고현 시가지가 보이고 계룡산이 병풍처럼 둘러쳤다. 계룡산 허리로는 안개가 걸쳐 정상부 산봉우리 능선을 가려 보이질 않았다.
연사 들판 벼농사는 작황이 좋지 않아도 임자들은 각기 제 논 물꼬를 터놓았다. 벼이삭이 나와 고개를 숙일 무렵이면 논에는 물을 빼 바닥을 굳혀 놓아야 한다. 논바닥이 단단해져야 벼를 수확하는 콤바인이 굴러가도 바퀴가 빠지지 않는다. 연사 들판은 하천바닥보다 낮은 곳이라 물 빠짐이 더뎠다. 농지가 저지대여서인지 벼농사만 짓고 비닐하우스나 뒷그루 작물은 가꾸지 않았다.
연초교를 앞둔 들녘 가장자리에서 연초천 둑으로 올라섰다. 천변은 산책로가 다듬어져 아침저녁 인근 주민들이 더러 지나쳤다. 고현 방면에서 올라오는 이들도 있고 연초삼거리 면소재지 사는 이들은 물길 따라 내려왔다. 나처럼 연사마을 사는 이가 연초천 둑으로 산책을 나오는 이는 드물었다. 연사 들판과 하천 건너편 효촌마을 앞에는 높이가 같은 천변 산책로가 잘 다듬어졌다,
연초천 산책로 길섶에는 계절에 맞추어 핀 코스모스가 눈길을 끌었다. 늦은 봄과 초여름에 금계국이 노란 꽃을 피었던 천변이었다. 여러해살이 금계국 꽃은 저물었다. 당국에선 지난 장마기간 시든 꽃대를 정리하고 한해살이 코스모스 씨앗을 뿌렸다. 파종이 좀 늦은 감이 들었는데 코스모스는 연방 싹을 틔워 잎줄기를 바삐 키웠다. 낮게 자란 코스모스가 알록달록한 꽃잎을 펼쳤다.
가던 길을 멈추고 허리를 낮추어 코스모스에 눈도장을 받았다. 아직 산천의 초목들은 엽록소를 잃지 녹색 천지다. 달포 뒤 서리가 내려야 식생은 성장을 멈추어 풀들은 갈색으로 시들고 잎들은 홍색을 물들 것이다. 코스모스 꽃에서 가을 기색을 느꼈다. 귀뚜라미소리를 통해 청각으로 가을을 먼저 느꼈다. 아침 산책길 청각에 이어 시각으로도 가을이 한창 진행 중임을 알게 되었다.
기온이 서늘해진 아침 / 연사리 와실을 나서 / 저기 산기슭 빤히 보이는 / 걸어 오 분이면 닿을 / 학교로 향하지 않고 / 산책 삼아 사오십 분 / 연사 들녘을 두르니 / 연이어 할퀸 태풍으로 / 고물이 차던 벼이삭은 / 쭉정이가 더러 생기는 듯 / 고개가 숙여지지 않는데 / 천변 둑길로 오르니 / 산책로 길섶 코스모르는 / 가을이 무르익는다고 / 가을이 이슥해진다고 / 단풍보다 먼저 일러준다.
바로 앞 단락은 둑길을 걷다가 떠올린 시상을 정리한 ‘단풍보다 먼저’다. 연효교를 지나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교정으로 들었다. 오전과 오후 정해진 일과를 마치고 교정을 나섰다. 지난 팔월 말 국토 남단까지 코로나 확진자 번져 행동반경을 움츠리고 있다. 퇴근 후 시내버스를 타고 해안가로 나서는 산책은 단념했다. 곧장 와실로 들어 저녁밥을 지어 곡차를 들면서 세탁기를 돌렸다. 20.0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