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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스러기 은혜라도
(막 7:24-30) “24. ○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방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더라 25.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에 엎드리니 26.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27.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28.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30.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 [수로보니게 여자의 믿음]
우리가 좋아하는 찬송가 가운데 Amazing Grace라는 찬양이 있지요?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 와 …' 이 찬송가를 작사하신 분은 영국의 죤 뉴톤이라는 아주 유명한 목사님이십니다. 이 분이 남긴 얘기 가운데 전 세계적으로 회자되는 유명 한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내가 천국에 가면 나는 세 가지 사실 때문에 놀랄 것이다. 첫째는 내가 천국에 가서 꼭 볼 것으로 기대했던 사람들 이 천국에 없는 것을 보고 나는 놀랠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내가 천국에서 볼 것으로 기대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거기에 와 있는 것을 보고 또 한 번 두 번째로 놀랠 것이 다. 그리고 세 번째로는 내가 거기에 있는 것을 보고 내가 놀랠 것이다. 그런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저는 이 말이 하나님 자신의 말씀의 교리를 부정하는 어떤 의외성에 대한 증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안 믿은 사람이 천국 갈 수 있다든지 혹은 믿은 사람 이 천국에 올 수 없다는 그런 의외성에 대한 증언은 결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외견상 어떤 사람이 믿는 것 같았어요. 그러나 사실은 믿지 않았던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아마도 이런 사람들 때문에 우리는 천국에서 놀라게 될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너무 너무 잘 믿어서 천국에서 굉장한 상을 받을 줄 알았는데 주님이 `너는 열심히 믿은 것 같았으나 내가 보기에는 별로였다.' 이렇게 아마 책망받을 사람이 없지 않아 있을 것 같구요. 또 어떤 사람들은 굉장히 조용한 그런 무명의 성도처럼 보였지만 천국에서 주님이 너무너무 그의 믿음을 칭찬해 주시는 분들도 없지 않아 천국에 가면 틀림없이 있게 될 것입니다.
저는 이런 신앙의 의외성에 대한 모습들은 천국에서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도 얼마든지 발견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서 이 땅에서 가장 신앙이 좋아야 할 분, 신앙이 좋을 것으로 기대되는 사람 가운데서 대표적인 분들은 어떤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목사님, 장로님.. 아마 이런 사람들을 생각 할 거예요. 그런데 기독교 역사에 보시면, 교회사에 보시면 가끔 핍박의 시기, 박해의 시기가 있었는데 어떤 분들은 순교도 했지만 어떤 목사님들은 의외로 장로님들도 예수님을 부인하고 떠나간 사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참 우리를 실망시켜주는 그런 의외성에 대한 하나의 모습이라고 할 수가 있겠지요. 그런가하면 저는 이 목회를 하면서 이따금씩 우리 성도들의 가정을 심방할 때 또 어떤 분들과 자연스럽게 얘기를 나누다가 제가 깜짝 놀라는 순간들이 좀 있습니다. 그 분이 특별히 평범한 성도라고 생각했을 때 제가 저 분이 참 좋은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분들, 그러나 의외로 앉아서 얘기를 하다 보면 제가 놀래요. 아! 아주 순진하고 순수하고 아름다운 믿음이 있었구나! 제가 놀라는 경우들이 적지 않게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저는 그런 현상들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 주변에서 가장 예수님을 향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대표적인 사람들로 나타나야 하는 사람들, 어떤 사람들이었겠습니까? 제자들이겠지요. 제자들 가운데서도 베드로, 야고보, 요한, 이런 사람들이 대표적으로 좋은 믿음을 가져야 하는 사람들이지요. 왜냐하면 가까이서 예수님을 모시고 또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으까요.
그런데 복음서를 읽다가 우리가 놀라는 장면들은 예수님이 이 대표적인 제자들에게 자주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어찌하여 너희들은 믿음이 없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혹은 너희들의 믿음이 어디 있단 말이냐? 너희들의 믿음이 어디 있느냐? 이렇게 제자들을 책망하시고 나무라시고 꾸중하는 장면들이 적지 않게 복음서에 나옵니다. 그런가하면 의외성의 모습들이 나와요. 아마도 복음서에서 예수님 앞에 좋은 믿음, 큰 믿음을 가진 사람으로 대표적으로 칭찬 을 받은 사람이 있다면 어떤 사람이 생각나십니까? 마리아? 글쎄요. 마리아가 좋은 편을 선택했다. 이런 말은 들었지만은 그러나 `네 믿음이 크도다' 이런 칭찬받은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오늘 본문하고 관계가 있다고 생각해보면 되지 않겠어요? 본문에 나타난 여인이 칭찬을 받았구. 또 한 사람 어떤 사람입니까? 백부장 생각나십니까?
로마의 백부장, 로마에서 파견 나온 군대 장교였어요. 자기 아들이 아팠단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 찾아와서 예수님 고쳐 주세요. 그런데 이렇게 말했어요. 예수님 말씀만 해주세요. 그러면 내 아들이 나을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에 대한 치유를 부탁할 때, 치유의 은혜를 받고자 할 때 일상적인 부탁의 형식은 아마도 이런 모습일 겁니다. 예수님, 우리 아들이 아픈데요, 죄송스럽지만 우리 아들 아픈데 까지 와주세요. 내 아들에게 손을 얹어 주세요. 안수해 주세요. 그리고 기도해 주세요. 그러면 내 아들이 나을 것 같아요. 이것이 아마 의례적으로 치유의 기도를 부탁하는 한 틀, 한 형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이 백부장은 이렇게 말했거든요. 예수님 오실 필요도 없어요. 예수님 말씀만 하시면 나을 것입니다. 이것은 이 백부장의 마음속에 예수님께 대한 어떤 절대적 신뢰가 있었음을 알 수가 있죠?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이렇게 말하겠어요. 말씀만 해주세요. 그러면 내 아들이 나을 것입니다. 그랬더니 이런 백부장을 보시면서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도 이만한 믿음을 가진 사람을 내가 보지를 못했다. 자, 이 사람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닙니다. 이방인입니다. 로마에서 온 사람, 신앙적인 백그라운드가 하나도 없었던 사람이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앞에 이런 칭찬을 받았습니다. 내가 소위 선민이라고 자랑하던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도 이만한 믿음을 가진 사람을 내가 만나지 못했다.
그리고 또 칭찬받은 사람이 본문에 나타난 여자, 본문의 기사가 마태복음에도 나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15장에 보면 28절- 예수께서 본문에 나온 여자를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 리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 공통점이 뭐냐하면 자식 때문에 예수님 앞에 나왔어요. 여러분, 사람들이 예수믿게 되는, 교회에 나오게 되는 동기는 사람마다 다르지요. 그런데 아마도 조사를 하게 되면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자식 때문에 예수 믿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자식이 어려운 일을 당할 때 노력을 해봤지만 쉽게 해결이 안돼요. 자, 자식에 대한 안타까운 심정, 고통하고 있는 자식들의 문제, 인간의 한계를 느끼면서 하나님 우리 아들 고쳐주세요. 우리 자녀에게 좀 도와주세요. 그런 안타까운 심정으로 예수님 만나는 사람들 많습니다.
이 두 사람은 그런 의미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어요. 그들은 자식들의 문제를 끌어안고 예수님의 도우심을 빌면서 접근하는 과정에서 예수님을 향한 믿음을 나타낼 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이 커다란 믿음, 아주 존귀한 믿음이라고 칭찬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을 객관적으로 비교하면 저는 백부장보다도 이 여인의 믿음이 더 귀한 것 같아요. 왜냐하면 이 여인의 경우에는 무슨 커다란 기적을 기대한 것도 아닙니다. 커다란 대우, 커다란 은혜를 받을려고 기대한 것도 아니구요, 본문의 한 절정 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여인의 유명한 고백가운데 보면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만 상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주님 저는 부스러기라도 좋아요. 부스러기라도! 따라서 해보십시오. 부스러기라도. 부스러기 은혜라도. 이것 참 절박한 심정이지요?
우리 한국말 표현 가운데도 너무 절박한 상황과 환경 속에 빠지게 되면 지푸라기라도 붙들고 싶은 이런 심정이 있잖아요? 그런데 부스러기라도.. 그래서 내 딸이 고침받을 수 있다면, 내 딸이 새 인생을 살 수가 있다면 부스러기 은혜라도 베풀어 주세요. 그러나 부스러기 은혜를 구하며 예수님 앞에 나왔던 이 여인은 부스러기 은혜가 아니라 큰 은혜를 경험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여인이 가졌던 믿음이야말로 큰 믿음이라고 칭찬해 주십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오늘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답답한 환경, 그리고 이 답답한 현실 속에서 오늘 우리도 주 앞에 나와서 기도할 때, 구할 때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기 위해서 우리는 이 여인에게서 배워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여인이 가졌던 믿음 그 큰 믿음, 그 큰 믿음은 어떤 믿음이었을까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기를 소망하는 사람마다 그리고 내가 가진 절실한 문제에 대한 응답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마다 이 여인에게서 배워야 할 믿음이 있습니다. 큰 믿음, 이 여인이 가졌던 믿음, 그 믿음의 특성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첫째로 이 여인의 믿음은 불리한 상황의 조건을 극복한 믿음이었습니다.
불리한 환경의 조건을 극복할 수 있었던 믿음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믿을만한, 하나님 믿을만한 좋은 조건이 없었어요. 그런데도 믿었어요. 자, 우선 이 여인에 대한 소개를 본문은 어떻게 시작하고 있습니까? 본문의 26절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자, 우선 이 여자가 어디 여자였습니까? 헬라 여자 - 그리이스 여자예요. 희랍여자. 정말 헬라 여자 였을까? 우리가 같은 기사를 마태복음에서 보면 마태복음에서는 이 여자를 가나안 여자라고 그랬습니다. 똑같은 사건인데 왜 헬라여자, 가나안 여자 이런 표현이 나왔을까요? 우리가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 아닌 비 이스라엘 백성, 비유대인, 자기들 빼놓고 모든 사람들을 가리켜 흔히 쉽게 통상적으로 헬라사람 이렇게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세계문화는 문자 그대로 헬라문화, 헬레니즘의 문화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이 헬라문화의 영향을 안 받을 수는 없었겠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독특한 자기 문화를 지키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자기 빼놓고 모든 사람들을 가리켜 통상적으로 헬라사람, 이렇게 말을 많이 했구요. 또는 그렇지 않으면 팔레스타인 지경 안에서 자기 족속 아닌 사람을 만났을 때 그 사람들은 본래 거기 와있던 원주민, 가나안 족속이던가 주변으로 밀려난 사람들을 향해서 가나안 사람, 헬라 사람 이렇게 두 가지로 많이 통칭했습니다. 그러니까 똑같은 사건이예요. 헬라사람, 가나안 사람.
그런데 본문에 보시면 그가 수로보니게의 족속이라고 씌여 있습니다. 이것은 두 가지 단어의 합성입니다. ‘수리'라는 말은 시리아라는 말입니다. 수리아지방, `보니게'는 페니키아라는 말 들었지요? 시리아의 베니게 사람이었다. 그 중에 한 사람, 한 여인이었다는 말입니다. 자, 이 사건이 발생한 지역은 두로라는 지역이었습니다. 자, 본문이 시작되는 24절에 보시면 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경으로 가서... 그랬습니다. 이 두로가 어디냐 하면 이스라엘의 갈릴리 바다에서 강을 따라, 해안선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면 얼마 올라가지 않아서 두로가 나옵니다. 그러나 두로는 이스라엘 지경 바깥입니다. 지금 나라로 말하자면 이 두로는 레바논에 속한 도시 입니다. 두로와 시돈은 같이 있습니다. 일종의 쌍둥이 도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레바논 지역이예요. 이스라엘 지경 바깥에 아주 가까운 이웃 마을 도시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하고는 아주 사이가 안좋았어요. 반 유대적인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 거기에 살고 있었고 유대인들은 이웃에 연한 도시였지만 그러나 이 지경 사람들을 박대했습니다.
그들을 철저한 이방인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땅을 이방인의 땅, 어두움의 땅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특별히 이방인에 대한 편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방인에게 붙일 수 있는 최대의 모욕적인 표현이 있다 면 `개'라고 불렀어요. 그런데 그것은 이스라엘 사람들만의 표현이 아니예요. 우리도 맘에 안 드는 사람을 보면 `개 같은 분' 이러잖아요? 예수님이 왜 두로 지방에 갔을까? 생각해 보면 오늘 본문의 사건에 도달하기까지 일련의 과정들을 추적해 보면 예수님이 팔레스타인 땅에서 바리새인들과 논쟁을 벌였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싸웠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율법을 파괴하는 자로 규정했습니다.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자, 바리새인들과 논쟁을 벌이고 그들에게 핍박을 받으신 예수님은 잠시동안 아마 휴식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땅 안에서는 그런 휴식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던 예수님은 바깥을 벗어나서 두로 지방으로 가신 것입니다. 이방인의 땅으로 가셨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이 이방인의 땅에서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신뢰했던 아름다운 믿음의 사람을 만난 것은 예수님에게 있어서도 문자 그대로 하나의 감격이었을 것입니다. 어째서 이방인 가운데서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이 있었을 수가 있었겠는가? 자, 이방인 신앙적인 백그라운드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신앙을 가질 수 없다는 이유나 핑계가 될 수가 없습니다. 나는 예수 믿는 집안에서 태어나지 않았어요. 우리 집안에는 믿을만한 그런 조건이 없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그러기에 그의 믿음은 더욱 순수할 수가 있어요. 사실 모태신앙인 사람을 가만히 보면 이 모태신앙에 문제가 많아요. 모태신앙이 `못해요' 신앙이예요 오히려 전혀 배경이 없는 사람들, 주변에 전혀 배경이 없는 사람들이 더 순수한 믿음을 가지게 될 가능성 많은 사례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또 하나 이 여자가 가지고 있던 불리한 조건은 이 여자는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습니다. 왜냐하면 여자는 그 당시에 이류 인간으로 취급되고 있었어요. 요즈음 여기 사시는, 이 시대에 태어나서 살고 있는 여성들은 여성으로 태어난 것을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옛날 유태인 남자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세 가지의 감사 기도를 드려요. 첫 번 째는 하나님, 내가 이방인이 아니라 유태인으로 태어난 것을 감사합니다. 두 번째 감사는 하나님, 내가 여자가 아니라 남자로 태어난 것을 감사합니다. 세 번째는 내가 노예가 아니라 자유인으로 태어난 것을 감사합니다.
이 짤막한 에피소드를 통해서도 얼마나 그 당시에 사회적으로 인권이 박탈당하고 천시당하고 있는가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예수를 못 믿을까요? 가끔 전도를 해 보면 `제가 워낙 상황이 어려워서 저는 못 믿겠습니다.'하는 그런 사람들이 있어요. 사랑하시는 여러분! 그러나 내가 가지고 있는 삶의 열등한 조건, 나의 무력함, 그러나 내가 무력하기 때문에 전능하신 하나님이 필요하지 않아요? 나의 무지를 알기 때문에 모든 것을 아시는 전지하신 하나님의 지혜가 필요하지는 않으신가요? 통상적으로 사람들이 말하는 인생의 불리한 조건이 반드시 신앙의 불리한 조건이 아니에요. 내가 연약하기 때문에 주님 앞에 올 수가 있다면, 그렇습니다. 내 육체의 질병 때문에 하나님의 치유를 바라고 주 앞에 나오는 과정이 있어서 예수믿게 되었다면 내 인생의 불리한 조건이 오히려 은혜의 통로인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이 여인은 그런 의미에서 불리한 조건을 극복하고 믿음에 도달했던 사람입니다. 삶의 불리한 조건을 극복한 믿음, 여기 이 여인에게서 배워야 할 믿음의 한 모습이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이 여인의 믿음은 냉소적 거절을 극복한 믿음이었습니다. 26절 그 여인은 헬라인이요, 스로보니아 족속이라 자기 딸에 게서 귀신쫓아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예수님의 응답이십니다.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27절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이것이 허락입니까? 거절입니까? 거절이죠. 거절도 그냥 거절이 아니라 거의 모욕에 가까운 거절처럼 느껴지지 않으시나요?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 짐이 마땅치 아니하다. 어떤 사람은 흥분하는 사람도 있어요. 예수님도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인간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흥분할 만 합니다. 적어도 피상적으로 관찰하면 그렇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것이 예수님의 편견을 말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여러분. 편견의 특성은요, 편견은 오래갑니다. 편견은 쉽게 수정되지 않아요. 그렇다면 이 땅에 편견이 없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요. 우리 한국 땅에 뿌리박힌 끈끈한 지방색의 편견. 그거 쉽게 없어져요? 한평생 붙들고 있더라구요. 편견은 쉽게 깨지는 것이 아니예요. 만약 예수님이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면 이 여자에 대한 편견. 이방인에 대한 편견. 예수님도 별 수 없이 그런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면 조금 후에 대화의 격을 완전히 바꿔서 이 여인에 대해 칭찬하시면서 야..당신의 믿음은 정말 위대하오 이렇게 말할 수 있겠어요? 아닙니다. 이것은 편견이 아니라 테스트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이 여인을 테스트하고 있는 거예요. 어떻게 반응하나? 바로 이 테스트의 창에서 이 여인의 순수한 믿음을 예수님은 확인하고 싶어하신 것입니다. 삶은 테스트입니다. 믿습니까? 인생이 테스트예요. 여러분이 믿거나 말거나 그렇게 인지하거나 말거나 내가 의식하던 의식하지 않던 우리의 삶은 테스트입니다. 살아가는 모습. 하나님 이 지켜보고 있어요. 테스트당하고 있는 것이예요. 요즘 한국 사회에서 이 도청문제, 감청문제가 사회적인 이슈가 되고 있습니다만은 생각해 보면 끔찍한 일이 아니예요? 몰래카메라를 백화점 화장실에도 설치해 놨다고 하는데 얼마나 놀랬어요? 내 행동 하나하나가 낱낱이 감시되고 있다. 나는 테스트 당하고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사람들이 모든 것을 피할 수가 있지만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가 있겠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 그분은 우리의 삶의 장을 지켜보고 계십니다. 낱낱의 사건. 우리가 경험하는 일체의 사건. 우리의 인간관계. 이 관계 앞에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는가?
어떻게 반응하는가 주님이 보고 있어요. 삶 전체가 사실은 테스트예요. 그러나 특별히 오늘 이 사건을 통해서 주님은 이 여인의 믿음이 드러날 수 있는 하나의 창을 오히려 제공하시고 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 이 여인은 합격했습니다. 사실 마태복음하고 비교해 보면 마태복음의 기사에서는 예수님이 처음에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셨다 그랬습니다. 침묵하셨습니다.
여러분, 때때로 우리가 주님 앞에 기도할 때 주님. 도와 주세요 그랬을때 우리가 종종 경험하는 기도, 바로 다음의 사건은 뭡니까? 대답이 없어요. 응답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 응답을 거절로 해석합니다. 주님이 내 기도를 거절하셨다. 때로는 그러면 그렇지. 주님이 내 기도 응답하실리가 없어 우리는 스스로를 자조하면서 신앙의 자리에서 쉽게 후퇴해 버립니다. 그것은 우리가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구체적인 증거라고 할 수가 있어요.
믿음은 믿음의 속성상 그것은 지속적입니다. 우리가 한번 기도해서 딱 응답이 왔다. 그러면 믿고 응답 안 오면 안 믿는다. 그러면 신앙은 신앙이 아니예요. 그것은 흥정입니다. 바겐입니다. 마치 우리가 일회용 자동기계에다가 동전을 집어넣고 거기서 내가 필요한 콕이나 소다를 끄집어내는 것처럼 우리는 기도를 그런 차원에서 생각할 거예요. 기도는 인격적인 관계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 그럼 계속 믿어야 되요.
좋으신 하나님. 하나님은 하나님의 어떤 계획이 있어서 지금 당장 내가 구하는 그대로를 응답하지 않으실 지 모르지만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여러분, 하나님은 나를 아시죠? 내 과거도 아시고 현재도 아시고 미래도 아시고 무엇이 최선인가를 아시는 하나님. 우리는 성경의 말씀 그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줄을 믿습니다. 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가 당장 응답이 안 나타나도 계속 믿고 있어야 되요. 계속 구해야 되요. 여기 우리의 기도에 대한 테스트. 신앙에 대한 테스트가 있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8장인가요? 소위 불의한 재판관에게 나와서 요청을 했던 과부의 이야기. 생각나시죠. 자, 이 말씀은 이런 구절로 시작됩니다.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하여 가라사대 자, 여기 과부 한사람이 억울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재판관에게 나와서 호소합니다. 그런데 재판관이 불의한 재판관이예요. 좋은 재판관이 아니고 악질 재판관입니다. 그러나 이 과부가 계속 도와달라고 호소합니다. 호소하고 또 호소하고 또다시 와서 졸라댑니다. 자, 뭐 뇌물도 안 갖다주는데 이 악질 재판관이 응답하겠습니까? 그렇지만 이 여인이 또 오고 다시 오고 또 와서 괴롭히니까 야.. 이러다가 한평생 이 여인의 나를 향한 괴롭힘의 강청에서 내가 벗어나 지 못하겠다. 하도 귀찮아가지고 나중에 들어줬어요. 자, 예수님이 그 얘기를 하시면서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이 불의한 재판관이 말한 것을 들어보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여러분 그렇다고 해서 꼭 하나님이 이 악질 재판관과 비슷하다 이렇게 비약을 해버리시면 안돼요. 그 말을 잘 들으셔야 합니다. 자,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어보라. 하물며.. 이 하물며라는 얘기가 하나님이 불의한 재판관 같다는 얘기예요. 같지 않다는 얘기예요? 안 같다는 얘기죠. 불의한 재판관도 들어줬는데 하물며 좋으신 하나님. 전능 하신 하나님. 모든 것을 아시는 하 님. 은혜로우신 하나님. 나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께서 밤낮 부르짖는 자들의 기도를 들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이 말이예요. 그러면서 이 말씀에 한마디를 덧붙였습니다. 덧붙여진 말이 뭐냐면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거기 믿음이라는 단어가 나와요. 다시 말하면 주님이 역사하실 때 드디어 주님이 응답하실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 주님은 믿음을 매개체로 하여 응답하시거든요. 거기서 믿음이 어떤 믿음입니까?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 지속적인 신뢰. 지속적인 인격적 신뢰. 하나님을 믿는다면 계속해서 그 분을 신뢰하고 있어야 합니다. 하늘이 어두워도 응답의 싸인이 없어도 하늘이 침묵할 때 우리가 구했습니다. 부르짖었습니다. 그러나 하늘은 침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버린 것 같고 하나님조차도 나를 내버리신 것 같은 그런 황량한 들판에 내가 홀로 버림 당할 때 중요한 것은 그때에도 하나님을 신뢰하시겠습니까? 그때에 하나님을 신뢰하시겠습니까?
그래서 정말 하나님 앞에 나오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 믿음이예요. 지속적인 신뢰. 그렇습니다. 그래서 기도의 풍성한 응답을 경험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야 할 요소 가운데 하나는 지속적인 신뢰. 이 지속적인 나아감. 이것이 필요해요. 이 끈기있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제가 사오정 얘기 듣다가 아.. 때때로 신앙인들도 사오정처럼 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해봤어요. 사오정 시리즈에 보니까 이런 얘기가 있더라구요. 어느 날 사오정이 식당에 갔습니다. 그래서 자기 먹을 것을 주문합니다. 돈까스와 우유 주세요 그랬더니 뭐라고 대답을 하냐면요 주인이 돈까스는 없습니다. 그래요. 사오정이 그래요? 그러면 돈까스와 커피주세요 그랬어요. 아니 그러니까 주인이 화가 나서 돈까스는 없단 말입니다 그랬더니 아..알았습니다. 그러면 돈까스만 주세요 그랬답니다. 이 말을 아예 알아듣지 못하신 분들도 있어요. 그게 바로 사오정입니다. 알아듣지 못하시는 분들이 바로. 상대방이 뭐라 그러던 집요하게 계속해서 자기의 메뉴를 고집하는 이 우직함. 이 사오정의 우직함이 신앙인에게도 좀 필요해요.
나. 포기할 수 없어요. 하나님 꼭 주셔야 되요. 하나님. 이것이 제가 단순한 욕심을 위해서 그럽니까? 나의 생존과 관련된 것입니다. 하나님. 그래야 우리 가정 더 잘 하나님 섬길 것 아닙니까? 하나님 주세요. 돈까스 주세요. 계속해서 주 앞에 나와서 구하세요.
전 앞으로 두 주 간 새벽기도회 여러분이 끈질김. 이런 집요함을 가지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나와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응답하실 것입니다. 하늘이 침묵할 때도 나와서 구하시기 바랍니다. 거절하시는 것 같은 주님. 그러나 거절하는 거 아니예요. 거절 뒤에 미소를 지으시면서 한없는 연민으로 나를 바라다보고 계시는 주님의 진정한 의도를 파악하고 이 시련의 장에 주 앞에 엎드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냉소적 거절을 극복할 수 있었던 믿음, 이것이 여인의 믿음이예요.
세 번째로, 주님의 은혜에 매달리는 믿음. 자, 주님의 은혜에 매달리는 믿음. 자, 이 주님의 거절같은 음성을 듣고 이 여인이 어떻게 말합니까? 다시한번 본문의 클라이막스라 할 수 있는 이 여인의 유명한 요청입니다. 28절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얼마나 윗트 있는 말이예요. 어떤 사람은 자존심도 없나? 그럴지 몰라요. 그러나 은혜 받으려면 이 자존심을 극복해야 해요. 이 자존심 때문에 은혜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저는 이 여인의 자세가 참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 은혜에 매달리는 믿음, 저는 이 여인에게 주님에 대한 분명한 신뢰가 그 마음의 바탕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증거를 여기서 발견합니다. 잘 보시면, 28절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뭐라고 불렀습니까? 예수님을 향해서. "주여" 이것이 중요한 것이예요. 희랍어로 '퀴리에' '주여 '.
한 유명한 성서 신학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마가복음 전체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서 처음 나와서 예수님을 향해서 주여라고 부른 사람은 이 여인 밖에는 없었다. 저는 이미 주님 앞에 나오기 전에 그래서 예수가 주님이라는 어떤 믿음이 이 여인 속에 이미 있었던 것 같아요. 이 주여라는 것은 단순한 그 예수님을 그저 병 고치는 분 정도로 인식한 것이 아니라 자기 메시아, 자기 삶의 주인, 내 인생을 구원하시고 내 인생을 새롭게 하시고 내 인생을 하나님의 기대처럼 빚어 만들 수 있는 나의 구원자 , 나의 주님 메시아, 주여, 주여. 똑 같은 기사를 마태복음에서 보시면,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고 하니,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렇게 여자가 말합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이것은 매우 중요한 주목할 만한 표현입니다. 다윗의 자손. 이것은 메시아라는 말이예요. 왜냐하면 메시아는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도록 약속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여인이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시다. 이 믿음이 있었던 것이예요. 메시아시다. 그리고 저는 이 여인이 상당히 성경을 알고 미리 사랑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구약을 알았던 것 같아요. 구약의 메시아의 약속을 보면, 그 메시아의 약속 가운데는 이스라엘 백성들만이 아니라 이방인들도 포함 되어 있었습니다. 좀 더 자세히 연구하고 싶으신 분들을 이사야 60장, 61장, 62장 이사야의 마지막 장들을 읽어 보세요. 메시아로 오시는 그분, 그분은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하시고 마음이 상한 자들을 싸매주시고 그리고 만민들에게, 열방들에게 구원으로 오실 구세주. 그 분은 이스라엘만을 위한 구세주 가 아니라 이방인들을 위한 구세주로 묘사되어 있는 구약의 약속을 이 여인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붙든 거예요. 그렇다면 주님. 나에게도 은혜를 주실 수가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27절을 자세히 읽어 보시면, 아주 중요한 한 단어가 있습니다. 27절을 다시 한 번 읽어보세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이것은 외견상 표면상으로는 거절처럼 들리는 예수님의 말이지만 저는 이 여자의 경우에는 이 말씀을 거절로 듣지 아니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이 여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자세히 들었을 것입니다. 은혜 받으려면 말씀을 자세히 들어야 되요. 피상적으로 들어서는 안돼요. 자세히 읽어 보면, 자세히 들어보면 여기서 주목할 만한 중요한 단어 하나가 있습니다. '먼저'라는 단어예요. 자, 27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여기서 자녀는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주님은 메시아로 오셨을 때 팔레스타인 땅에, 이스라엘 땅에 오셨습니다. 주님의 구원사의 섭리는 먼저 이슬라엘 땅에 오셔서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구속의 복음을 증거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약속이 이방 사람들을 제외할 것이 아니예요. 그것은 하나님의 구속사의 섭리의 순서일 따름입니다. 먼저 이스라엘에 복음을 전하십니다. 그러나 먼저 다음에는 복음이 어디로 가요? 이방인에게로 가는 것이예요. 먼저 이스라엘에게 은혜를 주시고 그 다음에 이방인들에게 은혜를 주시고 아마도 자세히 주의 말씀을 들었을 이 여인은 이 말씀을 붙잡았을 것입니다. 이 약속을 붙잡았어요. 그래요. 먼저는 이스라엘이 예요. 나는 그것을 반대하지 않아요. 그러나 그 다음은 나도 포함되지 않아요? 그 다음에는 이방인인 나도 포함되지 않아요? 이 여인은 그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엎드렸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생활 가만히 하는 사람들을 보면, 은혜 받는 사람들에게 증거가 있습니다. 은혜받는 사람들은 말씀을 붙들어요. 그리고 은혜 받은 증거도 말씀에 대한 애정, 그 말씀에 대한 사랑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저는 늘 말씀과 나의 거리 . 내가 이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내 가슴 속에 다가 오는가 , 말씀이 소중하게 느껴지는가, 말씀을 들으면 감동이 있고 감격이 있습니다. 말씀과 나의 거리는 하나님과 나 사이의 거리이다 이렇게 생각해요. 은혜 받는 사람들을 보면 말씀이 너무 너무 좋은 거예요.
어제 밤 10시 쯤, 미국에 있는 큰 아들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전화 딱 오면 애들이 전화 오면 뻔한 것 아니예요. 뭐 요청하기 위해서. 뭐야? 뭐 필요해? 그러니까 아니예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아요. 나, 아빠하고 말하고 싶어요. 아빠하고 너무너무 말하고 싶어요. 뭔데? 그 전화가 한 시간 이상 계속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야기예요. 계속 말씀에 대한 이야기예요. 그 표현을 할 수가 없어요. 자다가 갑자기 성경을 열었다가 그 말씀 속에서 그가 받은 은혜. 우리 부부는 그것을 위해서 얼마나 기도해왔는지 몰라요. 목사의 아들이기 때문에, 혹은 제직의 아들들 이런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말씀을 대하기 때문에 그 말씀이 내게 그렇게 부딪쳐 오지 않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말씀이 자기의 생명이 되고 이 말씀이 자기의 능력이 되기를 위해서 얼마나 기도해왔는지 '아빠, 말씀이 너무너무 좋아, 아빠가 말한 모든 것이 한 순간 이해가 되기 시작해. 이 말씀이 내 말씀이야. 나 이 말씀을 놓을 수가 없어. 성경 보다가 엄마가, 아빠가 성경에 줄 쳐놓은 구절이 내 마음 속에 막 들어오는 거야. 나 처음으로 realize 하기 시작했어. 이 말씀의 뜻을 깨닫기 시작했어. 아빠.' 전화는 한 시간 이상 계속되었어요. 엄마 좀 바꿔 줘. 엄마한테 얘기하고...
이 은혜를 받고 있는 사람의 증거는 분명한 사실이예요. 그 말씀이 내 말씀으로 다가 오는 거예요. 나를 향해서 다가오는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이 나를 붙들고, 나를 지배하고, 나를 바꾸고 있다는 사실. 그렇습니다. 그리고 은혜를 받아야 할 사람에게도 분명한 것이 있어요. 말씀을 붙드는 사람, 그들은 반드시 은혜를 받고야 말 것입니다. 믿음은 어디에서 나며,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말씀이 우리에게 생명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여인은 지금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듭니다. 붙들고 주 앞에 엎드립니다. 성경의 약속처럼 하나님의 구원의 첫 번째 약속은 이스라엘에게, 그러나 그 다음은 이방인에게도 먼저는 유태인에게요. 다음에는 로마 사람인 우리에게도 다음에는 한국사람인 우리에게도, 하나님 맞아요. 나는 하나님의 역사와 그 주권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먼저는 이스라엘에게 구원의 역사를 나타내신 주님, 그러나 그 다음에는 나도 포함시켜 주세요.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에서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지 않습니까? 라고 엎드리는 이 여인의 심정, 주님, 부스러기라도 나에게 주세요. 왜 부스러기를 주겠어요. 이방인에게 유대인과 동일하게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을 포함시킨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 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이방인을 똑같이 자녀로 삼아 주시고, 부스러기 아닌 가장 놀라운 은혜를 준비하신 이 주님은 이 여인을 테스트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이 테스트에 합격한 이 여인, 마침내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겸손히 주 앞에 엎드려 주여, 부스러기라도 , 부스러기 은혜 도 내게 주옵소서라고 구했던 이 여인에게 주님은 마침내 커다란 은혜를 주셨습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의 은혜가 이 여인에게 임했습니다. 이 여인의 딸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 여인은 드디어 귀 신에게서 자유를 얻습니다. 가정의 샬롬, 하나님의 평안이 임하기 시작합니다. 기도하는 자마다 이런 은혜를 받을 것입니다. 물러가지 아니하면 이런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계속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주 앞에 엎드리시기 바랍니다. 주의 은혜가 임할 것입니다. 이 은혜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주 앞에 엎드려서 이렇게 구하시겠습니까? '주여, 부스러기라도 주세요.'
기도하십시다. 어제 밤에 우리 아들이 전화로 그러더라구요.
'아빠, 이렇게 말씀이 좋은데, 좋은 걸 깨닫는데 왜 22년이나 걸렸을까? 그렇지만 아빠, 내가 안 믿고 있었던 것은 아니야. 내가 항상 믿었어. 그런데 깨달아 진거야. 아빠.'
그렇습니다. 이 깨달음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들은 들려 올 것입니다. 거절처럼 보이는 침묵처럼 보이는 그 배후에서 우리는 주의 그 변함없는 사랑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그 사랑을 바라보는 사람, 주를 바라보는 사람. 그들은 어두운 하늘 아래서 찬양을 부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향해서 변함없이 다가오시는 그 분의 손길을 잡을 것이고, 그의 은혜를 경험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 그 사랑의 눈으로 나를 어느 때 나 바라보시고, 하나님 인자한 귀로 언제나 나에게 기울이시니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지라.
엎드립니다. 주님. 은혜를 주시옵소서. 엎드립니다. 주를 바라봅니다. 주님, 부스러기 은혜라도 주시옵소서. 그러면 부스러기 안주세요. 가장 좋은 것으로 주세요. 그 나 그 심정이 부스러기라도 주님, 제가 자격이 없잖아요? 제가 자격이 없어요. 그러나 은혜라는 것은 자격 없는 사람에게 주시는 것이 은혜예요. 그렇습니다. 주님, 제가 주 앞에 많이 잘못했고, 부끄럽고 그래서 나는 은혜받을 자격이 없는 것 같아서 이렇게 구할 수밖에 없습 니다. 부스러기라도. 그러나 부스러기 은혜를 구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오늘 이 은혜를 발견하시기를 바랍니다. 주여, 엎드립니다. 나에게 은혜를 주시옵소서.
[이동원 목사 마가복음 강해]
출처: http://cafe.daum.net/qt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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