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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병이어의 기적
마 14:13-21
13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 들에 가시니 무리가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따라간지라
1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자를 고쳐 주시니라
15 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이 곳은 빈 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
16 예수께서 이르시되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17 제자들이 이르되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니이다
18 이르시되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하시고
19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20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21 먹은 사람은 여자와 어린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
마 14:13-21 / [5천 명을 먹이신 이적;막6:30-44,눅9:10-17,요6:1-14] 예수께서는 이 소식을 들으시고 곧 그곳을 떠나 배를 타고 혼자서 광야로 가셨다. 그러나 군중이 이 소문을 듣고 여러 동네에서 나와 걸어서 예수를 따라왔다. 14) 예수께서 배에서 내렸을 때는 이미 엄청난 군중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를 보신 예수께서는 그들을 측은히 여겨 그 중에 있는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 15) 저녁이 되자 제자들이 와서 말하였다. `이미 저녁 시간이 지났는데 여기는 빈들이어서 아무 것도 먹을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군중을 헤쳐 제각기 마을에 들어가서 음식을 사먹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16)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하고 말씀하셨다. 17)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저희에게는 떡 다섯 덩어리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습니다' 하며 제자들이 의아해하자 18) 예수께서 `그것을 이리 가져 오너라' 하시고 19) 군중을 풀밭에 앉게 하였다. 그리고 떡 다섯 덩어리와 물고기 두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면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셨다. 20)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주워 모았더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21) 먹은 사람은 여자와 어린아이들을 빼고도 남자만 5천 명 가량이 되었다.
어린 아이의 헌신으로 예수님의 공동체는 오병이어의 이적을 함께 나누게 됩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13-14) 예수님의 사역은 치유의 사역과 말씀의 사역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고 치유의 사역을 많이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사역의 후반기에는 말씀의 사역에 더욱 집중하셨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한 예수님의 치유 사역은 그 권능으로 인하여서 안티파스가 예수님을 다시 살아난 세례 요한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가 두려워서가 아니라 제자들을 훈련시키기 위하여 빈들로 나아가셨습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계신 곳까지 따라오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열심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병든 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15-21) 오병이어의 이적은 말 그대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여자와 어린이 외에 오천 명이나 먹이고 열두 바구니가 남은 이적입니다. 이 이야기는 사복음서 모두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만큼 기독교 역사에서도 귀중한 사건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과 이적 그리고 치유의 은혜를 받고자 예수님을 따라 다닐 때 일어난 일입니다. 빈들까지 예수님을 따라온 사람들이 해가 저물도록 예수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공동체에게 있는 것은 오로지 한 작은 소년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었습니다. 그 소년은 자기의 것을 혼자 먹지 않고 예수님께 이 모든 것을 드립니다. 그때 기적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한 소년이 가지고 온 작은 도시락이 예수님께 드려질 때, 여자와 어린이들을 제외하고도 5,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먹고도 열두 바구니에 넘치도록 많은 양식이 된 것입니다. 원래 이것은 한 아이의 끼니를 때우는 정도의 양이었습니다. 하지만 한 아이가 자신의 것을 주님께 모두 드렸을 때, 수만 명의 사람이 함께 누리는 잔치 자리가 되었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얼마나 많이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향해 자신의 최선을 다하면 됩니다. 그러면 찬양의 가사처럼 주님이 일하십니다. 주님이 일하시게 만드시는 주님의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적용: “우리 모인 이곳에 주님 함께 계시네, 누리네 아버지 은혜, 적은 떡과 물고기 내 모든 걸 드릴 때 모두 고백해 여호와 이레 주가 일하시네”, “주가 일하시네”라는 찬양의 가사입니다. 당신이 아닌 주님이 일하시도록 우리의 자리를 주님께 내어드리는 성도가 되기 바랍니다.
성령충만은 단순히 그분이 우리 안에 계신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우리를 완전히 지배하는 것입니다. 성령충만은 성령님이 오셔서 우리의 몸과 마음과 목숨과 혼을 완전히 차지하여 지배하시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부드럽게 임하시지만 성령님의 지배는 단호하고 직접적입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자신의 소유로 만드십니다. 이렇게 될 때 하나님이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입니다.
< 설 교 >
감사하고 계십니까?
마 14:19-21 / 임현수 목사
감사를 표현하는 계절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이 죽은 믿음이라고 한 것 같이 표현이 없는 감사는 감사라고 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타락한 인간의 현저한 특징이 감사 할 줄 모르는 것이라 했습니다. 감사를 하나님께도 표현할 줄 알아야 하고 사람에게도 표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말로 표현하고, 글로 표현하고, 기도로 표현하고, 찬송으로 표현하고, 물질로 표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감사는 감사드려야 할 때 신속히 해야 합니다. 만사에 때가 있는것 입니다. 미루지 말아야 합니다.
열문둥이 가운데 사마리아 문둥이는 즉시 달려와 신속히 감사를 드렸습니다. 아마 다른 아홉명도 나중에 예수님 만나면 감사하지 뭐…했을 것 입니다.
사르밧 과부는 자기는 굶으면서도 하나님께 먼저 감사 할 줄 알았습니다.
우리들이 십일조를 먼저 떼어 놓고 감사헌금을 드리는 것도 바로 이런 훈련입니다. (빵 냄새 팔아 먹은 주인 이야기)
누리는 복을 받아야 합니다. 이건 조크입니다. ( 빵 냄새 값 100만원 )
어느 동네에 욕심 많은 사람이 빵집을 했습니다.
이 빵집 주인이 아주 잘 익은 빵을 가마에서 막 꺼내는데 이웃집 사람이 그 빵의 고소한 냄새를 맡으면서 하는 말이 "야! 빵 냄새 너무 좋다! 이 빵 냄새 맡으면 기운이 나고 너무 너무 좋다" 그랬습니다.
빵집 주인이 그 이야기를 듣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왜 내가 여태껏 이 생각을 못했지?` 저 사람 기분 좋게 한 것은 내 빵인데, 나는 빵 만드느라 열심히 고생하고 빵을 만들어 냈는데 냄새는 저 사람이 맡으니까, 이제는 빵 먹는 값뿐만 아니라 빵 냄새 맡는 값도 받아야 되겠다. 특히 이웃집 사람이 가장 많이 맡았으니까, 이 사람부터 받아야겠다. 이런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웃집 사람에게 `그 동안 이웃에 살면서 매일 상당한 양의 빵 냄새를 맡았으니 냄새 값 주시오` 그랬으니 그 사람이 주겠습니까? 안 주겠습니까?
여러분 같으면 줍니까? 안 줍니까? 난 절대 안 주겠다는 겁니다...그러니까,
빵집 주인은 정식으로 법원에 빵 냄새 대금 청구 소송을 제기하였습니다
이 소문이 나서 동네 사람들은 재판장에 다 몰려 왔습니다.
`야! 판사가 어떻게 재판할까?`
빵집 주인의 열띤 주장을 다 들은 재판장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일리 있다고 판결을 내리는데 "이웃집 사람은 빵냄새를 맡아서 기분이 좋았으니, 냄새값 100만원을 지금 지불하시오" 10만원도 아니고 100만을 하라니, 어떻합니까?이웃집 사람은 속상한 얼굴로 100만원을 주머니에서 꺼내어 주었습니다. 빵집 주인은 100만원을 가슴에 끌어 안고 얼굴에 함박 웃음을 띠고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즐거움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런데 재판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아직 판결이 안 끝났습니다."
"이제 다시 빵집 주인은 100만원을 이웃 사람에게 돌려주시오."
"이웃 사람은 빵 냄새만 맡았을 뿐 빵을 가져오지는 않았으니, 빵집 주인도 돈을 만지면서 기쁨을 누렸으면 이제 다시 돈을 돌려주시오."
순간 재판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우레와 같은 박수를 쳤습니다. 터무니 없는 욕심을 부린 빵집주인은 망신을 톡톡히 당했습니다.
이 욕심 많은 빵집 주인의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우리의 이야기가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우리도 이런 망신을 당하지 않을까 염려가 되는 것입니다. 복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받는 복이 있습니다. 소유의 복입니다.
둘째는 누리는 복이 있습니다.
그런데 빵집 주인은 받는 복은 받았으나 내 것으로 만드는 누리는 복은 받지 못했습니다. 솔로몬은 자기는 받은 복은 많은데, 누리는 복을 받지 못해서 인생이 헛되다 그랬습니다. 누리는 복을 받아야 된다 그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신앙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 앞에 얼마나 많은 것을 받았느냐,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누리는 복도 받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 많이 받기는 받았습니다, 누가 보아도 행복합니다. 그러나 그의 삶은 행복하지가 않습니다. 누리는 복을 받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이 모든 것은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내 생명의 주인 되시고, 하나님이 삶의 주관자가 되심을 믿으면서 하나님 앞에 심을 때 하나님은 심는 대로 거두는 은혜를 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제는 하나님 앞에 심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 감사를 드릴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누리는 복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감사 할 줄 모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교만해 질 수 있는 것 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감사 할 줄 모릅니다
신 8:12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13 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14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17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은혜를 잊어 버리고 감사함으로 깨어 있지 못하면 교만의 죄를 범하게 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도적질 하게 됩니다. 자기에게 영광을 돌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과 축복과 은혜가 중단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감사 하는 자에게 끊임없이 은헤를 베풀어 주시는 분 이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보리 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감사했습니다. 저는 예수님이 오병이어를 가지고 감사하시는 대목에서 언제나 은혜를 받습니다.
어떤 크리스챤 작가 한 사람의 고백입니다. 저는 ”너희는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성경말씀을 잘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말씀을 생각할 때마다 염려를 떨쳐버리지 못하는 제 자신이 더욱 염려가 됩니다. 저는 염려하지 않을 수 없는 제 자신을 염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이런 증세가 어떻게 내 관절을 아프게 하는지, 어떻게 내 침을 마르게 하는지, 어떻게 내 손바닥에 땀이 나게 하는지, 어떻게 호흡곤란을 일으키는지, 어떻게 소화불량과 위경련을 일으키는지, 어떻게 우울증을 유발시키는지 잘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와 나의 아내는 우리들의 문제에 대한 너무나 완벽하고 강력한 치료책을 찾아냈습니다. 이 치료제의 효율성은 거의 기적적인 것입니다. 저와 저의 아내를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이 이 치료제의 효율성을 임상적으로 경험했습니다. 이 치료제는 식전이나 식후에 복용하시면 됩니다. 호흡곤란을 느낄 때 가슴에 통증이 느껴질 때 수시로 복용하실 수도 있습니다. 물과 함께 드실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특별한 처방전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이 치료제는 절대로 부작용이 없고 안전합니다. 더욱이 이 치료제는 무료입니다. 이 치료책을 일컬어 저는 ‘땡큐 테라피’(Thank-you therapy)라고 부릅니다. 이 이야기는 단 베이커(Don Baker)라는 분이 자신의 책 ‘땡큐 테라피’를 소개하며 한 말입니다.
감사의 계절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이 감사와 찬양 으로 변합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지상생애에 나타난 일상의 자취를 살펴 보면서 예수님의 제자로서 언제 어떻게 감사하며 우리의 일생을 살 것인가를 학습하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감사하며 사셨을까요?
1. 작은 일에 감사하셔야 합니다.
어린 아이의 오병이어라는 것은 있으나 마나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작은 것 가지고도 하늘을 우러러 축복하며 감사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감사입니다. 부족하지만 감사했습니다. 그 작은 것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고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부족하다고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부족한 그대로 하나님앞에 나아가 감사했습니다.
부족했지만 감사할 때 어떠한 역사가 일어났습니까? 조금씩 나누어 준다해도
200 데니라온이 부족하다고 했는데,
11절에 원대로 나누어 주고
12절에 배불리 먹고
13절에 남은 것이 열 두 바구니에 가득 찼습니다.
이것이 감사의 기적입니다. 감사의 표적입니다. 감사할 때 부족한 것이 채워지는 것입니다. 지혜의 사람은 있는 것 가운데서 감사하지만 미련한 사람은 없는 것 가지고 불평하는 사람입니다.
지금 부족하다고 해도 있는 것 가지고 감사하세요. 거기서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렇다면 작은 것이라도 감사 할 수 있을 것 입니다. 기적은 언제나 작은 것에서 시작 되는 것 입니다.
오늘 이 오병이어의 기적에 앞서 그분은 먼저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셨다’고 했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분이 주님이시라면 그 일용할 양식을 받고 이 땅에 생존의 은혜를 누림을 인하여 우리가 그분에게 감사하는 것은 얼마나 당연한 일이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아직도 적지 않은 인류들이 생존의 문제로 씨름하고 있음을 생각 하면 먹을 수 있는 은혜가 적은 은혜이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오늘처럼 문명사의 기적을 이룬 21세기에도 유엔식량농업기구 (FAO, 2003년 통계)에 의하면 지상에서는 세계인구 가운데 8억 4천 2백만 이 기아인구라는 것을 아십니까? 이것은 적어도 이 땅에 살고 있는 전 세계 인구의 14%, 그러니까 7~8명 중 한 사람은 하루 한끼 양식을 해결하기 위해 전전긍긍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들 중 매년 약 2천만 명이 기아 로 죽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의 생존 현실이라 면 우리가 한 끼의 식량을 앞에 놓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기도는 얼마나 절실한 일상의 기도이겠습니까?
가정이든 직장이든 식사 전에 기도하심으로 나의 생존의 원천이 그분이신 것을 고백하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러나 동시에 나처럼 먹지 못하는 이웃들에게도 먹을 수 있는 은혜를 달라고 기도하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 말 성경번역에서 예수께서 식사 전에 ‘감사하셨다’를 많은 경우 축사 하시고 라고 번역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거의 신약성경에서는 ‘감사’와 ‘축복’이 동의어처럼 사용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무리 작은 식량이라도 먹을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인지하셨고, 그래서 그분의 식전 ‘감사의 기도’는 동시에 그 축복이 다시 나누어지기를 소원하신 ‘축복의 기도’이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축복의 기도는 다시 축복을 나누는 기적을 초래하였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병이어 기적의 본질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해도 그것이 축복임을 인지할 때 예수님처럼 즉각적으로 감사하십시오. 감사는 또 다른 축복과 기적을 가져올 것입니다.
(예수 믿는 나라 가운데 굶는 나라는 없습니다. 식기도, 감사기도는 언제나 풍성한 축복을 가져다 주기 때문 입니다)
여기 한 아이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이렇게 보잘 것 없는 것에도 감격해 하시는 분 이심을 아십니까? 그래서 주님은 어린아이의 오병이어도 기뻐하셨고, 과부의 렙톤 두 푼도 칭찬 하셨고, 사렙다 과부의 기름 한 방울 밀가루 한 웅큼의 헌신도 크게 축복 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작은 일과 큰 일의 차이가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사랑과 믿음과 정성이 중요 할 뿐 입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 분 이시고, 하나님은 동기를 보시는 분 이시며, 하나님은 작은 것 이라도 실천 하는 것을 기뻐하시는 분 이시기 때문 입니다.
작은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이 많습니다. 작은 혀가 온몸을 어거 합니다.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말도 있고, 티끌 뫃아 태산이라는 속담도 있습니다. 밝은 미소, 정다운 눈, 따뜻한 말 한마디가 지친 인간의 마음에 생기를 불어넣어주는 것 입니다.
주님도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 이 곧 내게 한 것 이라고 하셨고, 소자에게 건네 준 냉수 한잔의 대접도 마지막 날에 상을 잃지 않을 것 이라고 하셨고, 병들고 외로운 이를 찾았던 작은 발걸음도, 굶주린 자에게 건네 주었던 빵 한 조각의 사랑도 하나님께서 기억 하실 것 이라고 하셨습니다.
부정정인 의미에서 본다면 파수군 한 사람의 태만이 한 부대의 전멸을 가져 올 수도 있고, 작은 담뱃불 하나에 대한 부주의가 산불을 가져 올 수도 있고,전화 한 통화의 불친절이 상대방을 하루 종일 기분 나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인류에게 충격을 주었던 첼린지 호의 폭발사건도 지극히 작은 결함 하나가 문제의 원인이 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의 교통사고 원인의 90%가 운전자의 작은 부주의 라고 합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너무나 보잘 것이 없는 것 입니다. 너무나 작은 것입니다. 떡도 보리떡입니다. 물고기라 그랬지만 스멜치 같은 작은 생선입니다. 그것 가지고 어찌 10,000여명의 많은 사람을 먹일수가 있겠습니까? 꼬마가 먹어도 모자라는 조그만한 그것 가지고 무엇을 할 수가 있습니까? 200데니리온의 떡이 있어도 시원찮은데 겨우 보리떡 5개와 물고기 두 마리라니 너무나 낙심이 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보잘 것 없는 가지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을 가지고 손에 올려 놓고 하늘을 우러러 축복하고 감사했습니다.
보잘 것 없는 가지고도 감사할 때 어떠한 기적이 일어났습니까? 남자만 5,000명이 배불리 먹고도 12광주리가 남았습니다.
예수님 말씀에 "작은 일에 충성하는 자는 큰 일에도 충성할 수 있으며, "또 " 이 작은 소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작은 일에 충성하길 바랍니다.
다윗은 이새의 아들로서 8째 말째였습니다.
시골에서 양치는 목동 보잘 것 없는 소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골리앗을 무찌르고 마침내 왕이 되었습니다. 가난한 과부 두 렙돈의 보잘 것 없는 헌금이었지만 전부를 드릴 때 많은 것을 드렸다고 주님이 칭찬해주셨습니다.
바울은 작은 자였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주님게 드렸을 때 그는 기독교 역사에 가장 큰 별처럼 쓰임을 받았습니다.
(사 60:22) 그 작은 자가 천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
능력이 없고 보잘것없는 나의 모습이라고 꿈과 희망을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힘은 작은 힘처럼 보여도 결코 작은 힘이 아닙니다.
엘리자베스 노벨이란 사람이 쓴 '조금'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설탕을 조금 써도 음식의 맛을 낼 수 있습니다.
비누를 조금 써도 몸을 깨끗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햇볕이 조금 비춰도 새싹이 힘차게 자라날 수 있습니다.
연필이 조금 남아도 아름다운 글 한편을 쓸 수 있습니다.
양초가 조금 남아도 주위에 환한 빛을 밝힐 수 있습니다.
작고 별것 아닌 것 가지고도 감사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이 기적은 빌립, 안드레, 열두 제자들 때문에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한 무명의 어린아이 소년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빌립같이 부족하다고 계산 만 하고, 안드레같이 보잘 것 없다고 절망만 하고, 열 두제자같이 불가능하다고 불평하면 아무런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소년은 부족하지만, 보잘 것 없지만, 불가능 하다고 판단되었지만 자기의 가진 것 오병이어를 믿음의 제물로, 감사의 제물로 내어 놓았습니다. 여기에 예수님이 축사하셨습니다. 여기에 감사의 기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5병2어의 기적은 믿음으로 일으킨 기적 입니다.
5병2어의 기적은 적은 것을 소중히 여길 때 일어 났습니다.
5병2어의 기적은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에 하나님의 역사가 더하여 질 때 일어납니다.
5병2어의 기적은 보잘것없는 적은 것이라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을 향하여 감사하면 일어나는 기적입니다.
5병2어의 기적은 적은 것이라도 감사하며 나누어줄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5병2어의 기적은 낭비하지 않을 때 기적은 계속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보잘것없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만 5천명을 먹이셨습니다.
드릴 것이 없다고 낙심하지 마세요. 적은 것 이라고 부끄러워 마세요.
이 다음에 큰 것을 드리겠다고 미루지 마세요. 지금 있는 내 모습 그대로 하는 것이 중요 합니다. 사랑을 드리세요. 감사를 드리세요. 믿음을 드리세요. 정성을 드리고, 최선을 드리세요. 적은 것이라도 감사로 드리는 것은 기적을 가져 오는 것을 믿으시 기 바랍니다.
2. 삶의 위기 앞에서 감사하십시오.
예수님은 언제 감사하셨습니까? 요한복음 11장은 예수님의 사랑스런 친구가 직면한 위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친구가 병을 앓다가 갑자기 죽어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는 친구의 무덤 앞에서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물론 그는 친구의 죽음이 친구의 부활의 현장이 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죽음은 여전히 슬픈 것이고 아픈 것입니다. 예수께서도 친구의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러나 그의 슬픔은 이내 감사로 이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11:41을 읽어 보십시오.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이 죽음의 마당에서도 기도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기도 하면 그 기도를 들으실 아버지가 계시다는 사실을 인하여 감사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본문이 던지는 가장 큰 질문과 연결됩니다.
어떻게 그분이 자신의 죽음 앞에서 그리고 친구의 죽음 앞에서도 감사할 수 있으셨느냐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 질문을 해결할 수 있다면 우리는 문자 그대로 범사에 감사하며 살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대답은 난해하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그 성경적 대답은 하나님의 선하신 주권을 믿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 슬프고 아픈 상황에도
하나님의 선하신 주권이 다스리고 있음을 믿으시면 됩니다. 바울 사도의 고백처럼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을 믿으시면 됩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심을 믿으십니까?
저는 예수님께서 바로 그런 확신위에서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계셨다고 믿습니다.
만일 우리도 우리의 삶에서 부딪히는 모든 역경의 상황 배후에 존재하고 움직이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 오늘은 보이지도 않고 이해도 안되지만 내일에 보여지고 이루어질 그 선하신 뜻을 믿을 수만 있다면 바울 사도가 가르친 그대로 우리도 ‘범사에 감사하는 자’가 될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8의 말씀을 같이 보실까요?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그러므로 이 설교 서두에 언급한 소위 ‘땡큐 테라피’는 이런 하나님의 주권을 수용하고 살아가는 성도들만이 적용할 수 있는 인생의 처방인 것입니다.
그들은 언제나 어디에서나 감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이야말로 인생의 고난을 승리로, 죽음을 부활로 바꾸어 사는 기적의 사람들인 것입니다.
제이 데니스(Jay Dennis)라는 사람은 이런 아름다운 고백을 남겼습니다. “당신이 많은 세금을 내야한다면 감사하십시오. 당신에게 안정된 직장과 사업장이 있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몸무게가 늘어 옷이 맞지 않는다면 감사하십시오. 당신은 먹을 것이 넉넉한 인생을 살아오신 것입니다.
세탁할 옷이 집안 한 구석에 쌓여 있거든 감사하십시오. 당신에게는 적어도 갈아입을 옷의 여유가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집에 대청소가 필요하고 문고리를 갈아야 하고 창문을 갈아야 한다면 감사하십시오. 당신의 몸을 위탁할 집이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멀리라도 주차할 공간을 찾았다면 감사하십시오. 당신에게 잠시라도 걸어갈 운동의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당신에게 불평할 대통령이 있다면 감사하십시오. 당신은 언론의 자유가 보장된 나라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 뒷자리에 앉아 있는 교우의 찬송 음정이 억망으로 들려오고 있다면 감사하십시오. 당신의 청각은 정상이기 때문입니다.
아침에 울리는 자명종 소리가 고통스럽게 들리거든 감사하십시오.
당신에게 일어나 일해야 할 하루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루해가 저물어 온몸이 나른하고 피곤하거든 감사하십시오. 당신은 오늘 하루를 생산적으로 사신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의 목장 모임이 이렇게 감사를 나누는 목장이 되기를 기대 합니다.
물론 힘들고 어려운 문제들이 너무 많지만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하고, 기도를 올려드릴 하나님을 믿게 된 것이 감사하고, 하나님의 뜻 안에서 우리의 기도에 선하신 응답이 이루어 질 것을 믿기에 감사하는 목장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요?
옛날에 어느 임금이 병에 걸려서 죽게 되었습니다. 죽는다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일인데 백약이 무효였습니다. 병은 점점 더 악화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나라에서 유명하다는 사람이 찾아와서는 이 나라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의 속옷을 벗겨다가 입으면 병이 나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임금은 사람들을 전국에 파견하여 가장 행복한 사람을 찾아보았으나 잘사는 사람 못사는 사람 모두 행복의 기쁨이 안 보였습니다.
그래서 임금의 병만 더 커졌습니다. 나중에 왕자가 직접 찾아 나섰으나 허사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오두막집 앞을 지나가는데 그 집에서 기쁨에 넘치는 아름다운 노래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가만히 안을 드려다 보니 감사의 기도를 마치고 기쁨에 넘쳐 찬송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순간 왕자는 이 집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의 집이라 여겨 들어가서 사정을 얘기하고 속옷을 벗어 달라고 했으나 그들은 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아무리 얘기해도 통하지 않자 칼로 위협하고 겉옷을 벗겨보니 그들은 모두 속옷을 입고 있지 않았습니다. 너무 가난해서 속옷을 입지 못했던 것입니다. 행복은 속옷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은 감사에서 나옵니다. 감사가 곧 행복입니다.
우리에게 무엇이 있어서 감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환경과 조건이 맞아서 감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아이가 시험을 잘 쳐서 감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남편이 돈을 많이 벌어서 감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감사는 범사에 하는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면 범사에 감사하게 됩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면 항상 기뻐하게 됩니다.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면 쉬지 않고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진정한 기쁨, 진정한 기도, 진정한 감사는 조건을 초월합니다.
감사의 계절을 맞이하면서 한 해 동안 주신 하나님의 감사를 헤아려봅시다.
다음 주일 감사절을 맞으면서 진정한 감사의 예배를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감사로 새로운 기적을 보자
마 14:15-21 / 서화평 목사
큰 감사는 큰 기적을 가져옵니다. 감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복된 행위요,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입니다. 신앙의 복된 사람들은 감사와 순종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셨고, 더욱 큰복을 주셨습니다. 감사하는 자들로 하여금 기적을 보며 살게 하셨습니다. 사실 우리가 사는 삶은 기적의 연속입니다. 우리가 그저 호흡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녁에 잠자리에 들었다가 아침에 새로운 마음으로 일어나는 것도 그저 우연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인간이 할 수 없는 기적의 연속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감사뿐입니다.
어느덧 2002년도 반절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하나님이 베푸신 사랑과 은혜를 생각하면 크고 놀랍습니다. 우선 교회를 생각해 보십시오. 요즘 작은 교회들이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잘 모이지도 않고, 힘든 일들이 자주 발생합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우리 샘물교회는 분에 넘치는 복을 받았습니다. 은혜로운 분위기 속에서 날로 날로 더해지고 있고, 6년 반만에 교회의 첫 일군을 선택하여 충성을 다하려고 합니다. 또한 청소년 선교관을 허락하셔서, 몸이 지쳐 쓰러질 만큼 서로 봉사하고, 필요한 은혜와 기구들로 채워가고 있습니다. 교회의 생동감 있게 움직이는 모습들을 주변에서는 보고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다 감사할 일들입니다.
어떤 분은 말합니다. 사실 하나님께 감사하려 하지만 감사할 제목이 없다는 것입니다. 너무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가정에서 많이 일어나기 때문이랍니다. 그러나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무서운 암에 걸렸다가 은혜로 치료를 받았다고 봅시다. 이것은 기적이요, 감사의 제목일 것입니다. 그러나 엄밀히 보십시오. 암 병에 걸려 낳은 것도 기적이지만 이 무서운 암에 걸리지 않고 사는 것이 더 큰 기적입니다. 감사와 영광을 크게 돌려야 합니다. 우리가 감사의 안경만 바로 쓰면 감사할 일들이 많이 보입니다. 진정한 감사로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우리 샘물의 가족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감사로 새로운 기적을 보며 사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저는 어제 동기 목사님이 시무 하시는 교회의 새 성전 입당예배에 참석했습니다. 그렇게 많은 성도가 모이는 교회도 아닌데 아주 큰 예배당을 건축하였습니다. 연건평 766평이나 됩니다. 거의 30억 정도 소요되었다고 합니다. 저는 그 예배에 참석하면서 감동하였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순서 중에 위로와 축복의 시간이 있었는데 이는 그동안 수고하신 분들에 대한 격려와 감사패를 드리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참석한 온 교우들에게 일어서게 하더니 감사패 대신 축복의 기도를 드려 주었습니다.
축복한 내용을 보니 대충 이렇습니다. "등록금 내려고 준비했다가 한 학기 휴학하고 성전건축헌금을 드린 청년, 아기 돌 반지를 모아 드린 소중한 아이 엄마들, 병원 수술비를 앞당겨 건축헌금으로 드린 손길들, 집 전세금을 찾아 작은 집으로 옮기고 그것을 드린 성도..." 저는 이러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성전이 건축되어 하나님께 드려지기까지는 돈도, 사람도 필요하지만 눈물과 땀과 희생이 모아져 완성된다는 사실을 실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전이 그저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눈물, 기도, 땀, 희생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을 한마디로 얘기한다면 베푸신 주의 은혜에 대한 감사입니다.
우리 샘물교회도 복된 미래를 설계하면서 지금 감사 드리고, 지금 기도의 눈물을 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 결과는 복되고 아름다운 열매로 나타날 것입니다.
오늘 맥추감사절을 맞이하여 마음 중심에서 나오는 깊은 감사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아낌없이 주시는 분이십니다. 내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그저 형식적이고, 습관적인 감사는 주님을 감동시킬 수가 없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에 사탄이 지구상에 내려와 저 동구 유럽의 노르웨이에다가 창고를 하나 지었답니다. 사탄의 창고에는 각종 씨들, 곧 미움, 슬픔, 불평, 원망 등의 씨들을 저장해 놓았습니다. 이 씨들은 누구의 마음 속에 뿌려도 싹이 잘 나는데 한 동네 사람들한테만큼은 효력이 없었다고 합니다. 이 동네의 이름은 "기쁨"이었는데, 어떤 슬픈 상황과 절망적 처지에서도 그들은 언제나『감사』하는 자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하는 마음에는 사탄이 씨를 뿌릴 수 없다"는 노르웨이 속담이 나온 것입니다. 어떤 일을 당해도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사탄이 틈타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고전 13장에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데, 만일 자기더러 한 가지를 더 말하라고 한다면 "감사"를 덧붙이고 싶다고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라는 말은 언제 어디서 누가 들어도 좋은 말입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감사 불감증에 걸려 있는 듯 합니다. 감사할 줄 모릅니다. 감사가 인색합니다. 말세가 되면 이 세상은 감사가 식어집니다.(딤후3:2) 그러나 성경은 감사가 넘치는 삶을 살아야 함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골2:7) 우리 샘물의 가족들은 감사가 넘치는 생활이 되시기 바랍니다. 매사에 감사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러나 마음이 병들면 감사가 사라집니다. 불평과 불만과 원망과 짜증만 나옵니다. 사람이 감사한 마음이 사라지는 것은 순간적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감사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은 작은 도시락 하나를 가지고도 하늘을 우러러보며 감사하셨습니다. 우리가 너무 잘 아는 오병이어 사건입니다. 어린아이의 작은 도시락,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 장정만 오천 명을 먹이고도 남는 기적 이야기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풍성한 나라요, 능력의 나라입니다. 놀라운 것은 감사가 클수록, 기적도 크게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
1. 있는 것에 감사할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벳새다 언덕에서 하루종일 말씀을 증거 하셨습니다. 해가 지고 저녁때가 되어 모두 다 시장기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을 먹여서 보내자고 제안하셨습니다. 이때 제자들은 본문 17절을 보니 "여기 우리에게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입니다." 이것으로는 어림없다는 얘기입니다. 이 많은 수를 먹일 수 없다는 표현입니다.
요6장 7절에서는 "이 사람들을 조금씩만 먹이려 하기 위해, 200데나리온 어치를 산들, 역시 모자란다"고 볼멘소리로 대답합니다. 한결같이 퉁명스럽고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은 전혀 다릅니다. 제자들은 없다는 사실만을 힘주어 보고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지금 있는 그것을 가져 오라"(18절)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있는 것을 가지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 드리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없는 것만을 보면서 불평하고 안 된다는 생각을 갖지 말라는 것입니다. 있는 것으로 감사해야 합니다. 이때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보면 얼마든지 감사할 일이 생깁니다. 우리 성도들은 지금 나에게 있는 것부터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무조건 감사하며 사는 감사하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는 건강한 두 다리로 성전에 걸어와 앉을 수 있음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두 팔이 있음을 감사하며, 기쁨으로 예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없는 것만 생각하지 말고, 있는 것을 헤아리며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있는 것을 감사할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지금 내게 있는 것을 감사하며 드릴 때 새로운 기적을 보게 됩니다. 내 자녀를 통해서, 가정과 교회와 우리의 삶을 통해서 있는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감사하는 자는 새로운 기적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2. 작은 것에 감사할 때 큰 기적이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작은 도시락 하나로 큰 감사를 드렸습니다.『하늘을 우러러』감사하신 것입니다.(19절, 눅9:16) 얼마나 거룩하고 아름다운 장면입니까? 한 사람 분의 도시락 하나로 5000명이 앉은자리에서 두 팔 벌려 하나님께 감사 드렸습니다. 많이 있기 때문에 감사한 것 아닙니다. 풍성하게 먹고 남았기 때문에 감사 드린 것이 아닙니다. 5000명의 무리를 먹여야 하지만 가진 것은 작은 도시락 하나였지만 작은 것에 감사한 것입니다. 이렇게 작은 감사는 큰 기적을 일으킨 것입니다. 작은 일부터 감사하십시오. 새로운 기적의 기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큰 것만 보면 감사하기 어렵습니다. 작은 것부터 감사해야 행복합니다. 평범한 일에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별 일이 없음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아무 일 없음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앞서 말씀드렸지만 중병에 걸렸다가 고침 받은 것도 감사할 일이지만 중병에 걸리지 않은 것을 감사하십시오. 지금 이 순간에 예배드릴 수 있게 된 것을 감사하십시오. 감사는 작은 것부터, 감사는 실제적으로 일어나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병원에서 잘 치료받고 퇴원한 후에 감사 드립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병원에 가지 않고 건강하게 살고 있음을 감사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무슨 일이 꼭 해결되어야만 감사하지 말고, 이미 해결된 은혜로 살고 있는 것을 인식하며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평소의 감사요, 매일의 감사요, 진정한 감사입니다. 특히 우리 샘물의 가족들은 작은 것으로도 큰 감사를 드리며 사시기 바랍니다.
심방하다가 식탁 옆에 "기도하는 할아버지" 그림을 걸어놓은 가정을 보았습니다.그 사진을 곰곰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소박하게 행상 하여 먹고사는 어떤 할아버지의 감사기도 모습입니다. 식빵 한 덩어리와 수프 한 컵을 놓고도 얼마나 진지하게 감사하는 모습인지요.『가난한 식탁에, 풍성한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행복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작은 것으로도 감사하는 사람은 큰 행복을 맛보게 되며, 놀라운 기적의 은혜 속에 살게 됩니다.
작은 도시락 하나로 하늘을 우러러 감사하신 예수님은 작은 감사로 큰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한 사람 분의 도시락으로 장정만 오천 명이 다 배불리 먹고도 열두 광주리나 남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불평하는 자에게는 항상 모자랍니다. 늘 부족합니다. 그러나 감사하는 자에게는 풍성합니다. 넘칩니다. 남습니다. 기적이 일어납니다. 크게 아멘 하여 영광을 돌립시다. 우리 모두 최대의 감사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감사의 분량만큼 최대의 기적이 일어날 줄 믿습니다. 큰 감사는 큰 기적을 일으킵니다. 작은 것으로 드려진 감사는 최대의 행복을 누리게 하며, 새로운 기적을 보게 합니다.
오늘 맥추감사절로 영광돌리는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마음속에는 무엇으로 가득차 있습니까? 교회 오니까 "감사하라, 돈 내라" 한다고 부담을 느끼십니까? 불평, 불만, 짜증, 원망, 서운함으로 가득차 있습니까? 이제는 작은 것으로 만족하고 기뻐하시면서 여러분의 마음 중심에 감사와, 벅찬 감격, 흐뭇함, 고마움, 풍성한 은혜로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작은 도시락 하나로 하늘을 우러러 감사하신 것처럼 아직 내게 있는 것을 바라보며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작은 것으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감사는 큰 행복을 줄 것입니다. 새로운 기적의 은총을 맛보게 할 것입니다. 오늘도 작은 감사로 큰 기적을 맛보며 사는 샘물의 온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풍족케 되는 비결
마 14:15-21 / 문기태 목사
지금은 필요한 모든 것이 많이 부족한 시대입니다. 쓸 곳은 많은데 쓸 수 있는 돈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일을 하고 싶은 젊은 사람들에게 일할 직장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중요한 자리에 앉은 책임 있는 지도자들에게는 일처리를 완벽하게 해 낼 지혜가 부족합니다.
이처럼 부족함이 많은 시대를 우리가 살아가면서 풍족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예수님께서도 꼭 필요한 것이 절대 부족함을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뵙고자 수많은 군중이 몰려 왔습니다. 하루 종일 그 사람들은 예수님이 병자를 고치는 것도 구경하고 가르치시는 말씀도 들었습니다. 저녁때가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아뢰었습니다. "선생님! 여기는 빈들이고 날은 저물었습니다. 그러니 무리를 흩어 보내서 제각기 먹을 것을 마을에서 사 먹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런데 마을까지는 거리가 제법 많이 떨어졌습니다. 게다가 시골 마을에 수 천 수 만 명의 사람들이 몰려가면 먹을 것을 구할 수 없을 것이 뻔했습니다. 당시에는 그 많은 빵을 만들어 파는 가게도 없고 공장도 없으니 그 많은 사람이 돈을 주고도 사 먹기가 불가능했습니다. 상황이 그러니 그대로 보내면 사람들이 돌아가다가 기진하여 쓰러질 것이 불을 보듯 자명한 일이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이러한 부족함의 문제를 단번에 해결해 보이십니다. 주려 있는 수만의 군중들이 다 배불리 먹을 뿐 아니라 먹고 남은 부스러기를 열 두 광주리나 거두게 됩니다. 부족함이 오히려 풍족함으로 바뀌었습니다.
우리 인생에서도 부족하여 곤란한 상황을 자주 만납니다. 이런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해결하십니까? 그 부족함을 오히려 풍족하게 바꾸는 비결을 아십니까? 모든 이들이 부족하여 쩔쩔 맬 때에도 여러분은 풍족하여 다른 사람들에게도 맘껏 나누어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풍족한 삶의 비결을 부족을 풍족으로 바꾸시는 우리 예수님께 배워야만 합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부족함을 풍족함으로 바꾸는 놀라운 비결을 배워 직접 체험함으로 풍족한 인생을 사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1. 감사를 앞세우면 풍족해 집니다.(19)
예수님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드시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수 천 명이 배가 고파 먹을 것을 기대하며 주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손에는 겨우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개가 전부입니다. 사람들은 '에게, 저걸 가지고 무얼 하려고 저러나?'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버지여 주시려면 많이 좀 주시지 이걸 가지고 누구 코에 붙이라고 이걸 주십니까?" 하고 푸념적인 기도를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적은 것을 가지고도 전혀 불만스럽게 여기지 않으시며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아버지여,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음식을 주심을 감사하나이다." 그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의 손을 빌어 무리에게 나누어 주자 모두 배불리 먹고 열 두 광주리나 남는 역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사람들은 풍족하게 가지고도 감사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 이유는 손에 든 것이 나의 필요를 채우기에 부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충분하게 주어졌을 때에도 손에 들려 있는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손에 무언가를 들고서 감사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십니다. 하찮게 보이는 적은 것을 가지고도 진심으로 하나님께 감사 찬양 하는 것을 보실 때 주님은 비로소 풍족하게 살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십니다.
지금부터 380년 전 이맘 때 조그만 무리의 남녀들이 신대륙 아메리카에서 첫 추수감사절을 지켰습니다. 인디언 손님들을 초청해놓고 식탁에 둘러앉았습니다. 추수한 곡식들을 앞에 놓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식탁은 오늘 우리가 일상 먹는 만큼도 풍성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충분한 것을 추수하지 못했습니다. 몇 년 동안 흉년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들의 현실은 추위와 배고픔 그리고 질병이었습니다. 그것들이 그들의 삶을 위협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진심으로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들이 추수한 곡식은 보잘것없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이들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아름다운 전통을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지금은 온 세계에서 가장 먹을 것과 온갖 상품 그리고 각종 자원이 넘치는 부유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식탁에 앉아서 기도할 때 얼마나 감사한 마음으로 기도를 하십니까? 혹 형식적으로 기도하지는 않습니까? 감사는 없고 다른 내용만 중언부언하지는 않습니까? 진정으로 감사를 드려 보시기 바랍니다. 부족하게 느껴질지라도 그만큼 주신 것을 바라보며 감사를 드려 보시기 바랍니다. 내게는 왜 이렇게 없는 것이 많지 하는 생각이 들 때 실족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런 때라도 감사기도를 멈추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내게 주셔서 아직도 내게 있는 것이 더 많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행복해집니다. 그렇게 되면 풍성해집니다. 메마른 심령에 은혜가 솟아납니다.
지금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돈이나 먹을 것 그리고 일자리 같은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면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진심으로 감사 예배를 드려 보십시오. 다음 주일이 추수감사절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다음 주일에 교회 와서 설교 들으며 잠간 감사한 마음을 품는다고 큰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진정한 추수감사절을 경험하려면 오늘부터 감사로 여러분의 마음을 단장하십시오. 감사의 조건을 할 수 있는 대로 많이 찾아보십시오. 감사의 기도를 많이 드리십시오. 서로 감사의 말을 해 보십시오. 이번 주간과 다음 주간을 특별히 감사가 풍성한 주간으로 만들어 보십시오. 감사절다운 감사절이 되고 여러분의 심령과 가정이 그리고 교회와 일터까지 풍족해질 것입니다.
2. 드리기를 앞세우면 풍족해집니다.(17)
예수님께서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하시자 제자들이 "우리에게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습니다." 하였습니다. 그것은 어디서 나온 것인 줄 아십니까? 요6:9에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라고 안드레가 보고했습니다. 따라서 어린 아이의 손에 있던 도시락을 주님께 드렸을 때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만약 그 도시락도 드리지 않았다면 주님께서 무엇을 가지고 감사하실 수 있었겠습니까? 감사기도를 드리지 못하셨으면 그날 그 자리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자신이 식사하려고 준비하였던 것을 기꺼이 주님께 드리는 헌신이 있었기에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 자리에 있던 수 만 명이 다 배불리 먹고 남는 풍족한 역사가 임한 것입니다. 그 어린 아이라고 혼자만 그 도시락을 다 먹고 싶은 마음이 없었겠습니까? 어린 아이가 갈등이 왜 없었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내 놓을 생각을 하였을까요? 그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못 먹더라도 주님이 드시도록 드려야겠다.' 하는 착하고 아름다운 마음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왜 부족함을 경험하면 살아야 합니까? 인색하기 때문입니다. 움켜쥐려고 만 하지 주를 위해 드리는 것에는 움츠리기 때문입니다. 나와 가족을 위해서는 더 많이 쌓아 놓지만 주님과 이웃과 복음을 위해서는 될 수 있는 대로 적게 드리고 싶어 하면 결코 풍족해질 수 없습니다. 이것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신비한 원리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그 예를 수없이 들 수 있습니다.
사렙다의 과부는 흉년의 연속 속에 마지막 남은 밀가루로 어린 아들과 함께 빵을 만들어 먹고 굶어 죽기를 기다리려고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가 찾아 와 "먼저 나에게 그 빵을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가족이 먹으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그 집에 마지막 남은 양식임을 몰랐겠습니까? 어떻게 그렇게 잔인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복을 나누어주기 전에 그의 믿음을 보고자 한 것입니다. 사렙다 과부는 침을 삼키며 마지막 빵을 송두리 채 엘리야에게 가져갑니다. 그러나 그녀와 아들은 굶어 죽지 않습니다. 흉년이 다가도록 날마다 기적이 일어납니다. 밀가루 통에 밀가루가 솟아납니다. 기름통에 기름이 솟아납니다. 하루도 굶지 않고 맛있게 빵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녀 뿐 아니라 우리에게 하나님의 방법을 보여 준 것입니다.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를 읽어 보셨습니까? 저자 로버트 기요사끼씨가 뭐라고 하던가요? 부자가 되기를 원하면 먼저 베풀기를 결심하라. 무언가를 원한다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먼저 주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은 필요한 것을 움켜쥐고 내놓지 않지만 부자는 필요한 것이 있으면 먼저 내 놓는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부자 아빠는 십일조를 굳게 믿었다.'고 합니다. 그분은 돈이 부족할 때 오히려 교회나 자선단체에 돈을 기부했답니다. 그리고 부자 아빠에게 들은 이야기 중에 특이한 한 가지는 '가난한 사람이 부자보다 욕심이 더 많단다.'는 말입니다.
기요사끼씨는 부자가 되려는 이들에게 확신 있게 권합니다. 무언가가 부족하거나 필요한 것이 있다면 먼저 베풀자. 그러면 푸짐하게 되돌아 올 것이다. 어떤 사람이 어떤 추운 겨울 밤에 장작을 한 아름 안고 배불뚝이 난로에게 이렇게 소리친다. "네가 날 따뜻하게 해 주면 장작을 넣어 주겠다." 그것은 돈 행복, 사랑, 계약 같은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진리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먼저 주는 것이다 그러면 뭉텅이로 돌아 올 것이다. 자기 것을 먼저 내 놓지 않고는 부자가 될 수 없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창원의 어떤 교회에 나가는 어떤 새 신자에게 지난해에 직접 들은 이야기입니다. 목사님이 추수감사절에 그러더랍니다. "여러분 중에 먹고 살만한 사람은 추수감사헌금을 10만원이상하세요. 그리고 겨우 밥은 먹고 살 정도인 사람은 5만 원 이상 하세요. 밥도 못 먹고 사는 사람은 알아서 하세요." 그렇게 구체적으로 제시를 해주니까 참 좋더랍니다. 그러면서 당신은 10만원 헌금을 했답니다. 그분은 젊은 나이에 남편이 사고로 죽고 혼자서 세 아이를 양육하면서 사는 분인데 기가 죽더라구요. 우리 교회는 집 지니고 살만큼 사는 집사님들 중에도 추수감사헌금이 만 원, 이만 원 헌금하는 분들이 많은데 그것도 가정단위의 헌금이 그 정도인데, 내가 잘 못 가르쳐서 교인들을 인색한 사람 만들었구나! 이렇게 두면 물질 축복을 더 크게 받아 주의 일에 크게 쓰임 받는 사람이 많이 나오기는 어렵겠구나! 하는 자책이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조금 위로가 된 것은 우리 중에도 지난 해에 10만원, 20만원 추수감사헌금을 드린 분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추수감사절이 일 년에 몇 번입니까? 절기를 다 합쳐 일년에 몇 번이나 있습니까? 보통 때 하는 감사와는 달리 좀 수준을 높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의 오병이어는 어느 정도입니까? 주님께 무언가 드릴 기회가 오면 마지못해서 체면 때문에 드리지는 마세요. 인색함으로 드리지 마세요. 마지못해 억지로 드리지 마세요. 자원함으로 드리세요. 감사함으로 드리세요. 기쁜 마음으로 드리시기 바랍니다.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중심을 보시고 흡족하게 받으실만하게 드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풍족하게 채워주시고 싶어서 못 견딜 정도로 드리기 바랍니다.
[이러므로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의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케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노니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9:5-7)]
여러분 속지 마십시오. 사단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어려운 시대를 살아남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서도 인색해야 한다고 부추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 빼앗아 가셨으니 감사보다는 원망과 불평을 앞세우라고 부추길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부족한 때 일수록 감사하라고 말입니다. 가난한 때 일수록 풍성히 드리라고 말입니다. 여러분, 진정으로 풍족하게 사는 비결을 성경에서 배운 대로 실천하여 모두 영적으로 물질적으로 부요한 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마 14:15-21 / 인명진목사
지난 주일 9시 예배에 조희정집사가 기도를 하는 중에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지난 성탄절 전날 교회 예배당에 왔더니 쾌쾌한 냄새가 나서 무슨 냄새인가 했더니 노숙자 한 사람이 있어서 그 사람에게서 나는 냄새였다고 합니다. 아무튼 그 노숙자를 밖으로 내보내고 성탄절 축하행사 준비를 했는데 그때부터 그 노숙자가 예수님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늘 마음속에 자책감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 노숙자가 예수님이었다면 예수님이 나신 것을 축하하기 위해서 그 주인이신 예수님을 내쫓은 잘못을 저지른 것이 아닌가 하는 것 때문에 늘 마음에 걸리고 그 일로 인해서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그런 비슷한 이야기는 많이 있습니다. 어떤 아이가 예수님을 늘 만나고 싶어서 예수님께 한번만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예수님께서 이 아이에게 한번 만나러 가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아이가 그 말씀을 듣고 너무 기쁜 나머지 집안 청소도 하고 맛있는 것도 많이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기다리는 예수님은 오시지 않고 하필 거지가 세 번씩이나 찾아왔다고 합니다. 이 아이가 그 거지에게 지금 귀한 손님이 오니 어서 가라고 쫓아내고 하루 종일 예수님이 오시기를 기다렸는데 예수님은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날 밤 이 아이가 예수님에게 기도하면서 예수님에게 오신다고 하시더니 왜 안 오셨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오늘 너의 집에 세 번이나 찾아갔는데 네가 쫓아내지 않았느냐 하시더라는 것입니다. 그날 예수님은 거지의 모습으로 오셨던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여러분도 주일 학교 때 들었을 것입니다.
지난 23일 밤 우리 교회에 왔던 노숙자가 정말 예수님이었을지도 모입니다. 그리고 정말 그렇다면 웃기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축하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내쫓은 것입니다. 조희정집사의 기도를 들으면서 여러분도 그러셨겠지만 저도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기도를 들으시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조 집사 괜찮다. 나는 그래도 갈릴리교회 덕분에 지난 겨울 그렇게 추운 날씨에도 밖에서 떨지 않고 따뜻한 방에서 잘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늘 갈릴리교회에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가 하고 있는 여러 가지 선교 사역이 있습니다. 그중에 지난해부터는 영등포 시장 안에 있는 노숙자를 위한 쉼터 ‘햇살보금자리’의 월세 반을 내고 있습니다. 햇살 보금자리라는 쉼터에서 매일 150명의 노숙자가 숙식을 하고 있습니다. 그 쉼터의 월세가 한 달에 이백만원인데 우리 교회가 그 절반인 백만원씩을 내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노숙자 60명의 잠자리를 마련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노숙자 이야기가 나와도 그나마 부끄럽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만약 지난 주일에 조희정 집사가 그런 기도를 했는데 우리 교회가 노숙자를 위한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다면 목사인 저의 마음이 너무 괴롭고 부끄러웠을 것입니다.
우리들은 저녁마다 따뜻한 이브자리에 누워 잠이 듭니다. 여러분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주무시는지 알 수 없지만 저는 그때마다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이 추운 겨울 밤 지하철 역 통로에서 쪼그리고 새우잠을 자는 노숙자들이 있지만 그나마 우리 교회 때문에 많은 수는 아니지만 60여 명이 따뜻한 방에서 잘 수 있게 되었으니 다행스럽다는 생각을 합니다. 발을 쭉 뻗고 잠자리에 들 수는 없어도 반쯤은 뻗고 잠자리에 들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따뜻한 이브자리에 들어가면서 우리가 쉽게 목격할 수 있는 오갈 데가 없어서 지하 통로에서 박스를 깔고 자야 하는 노숙자들의 아픔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따뜻한 잠자리에 들어가면서 집이 없는 사람들의 아픔과 설움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낸 헌금 가운데 노숙자들을 위한 따뜻한 잠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쓰여 진다는 것을 하나님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때때로 이런 생각을 합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제대로 예수님을 믿으려면 잠자리에 들 때조차 편안할 수 없으며 하루 세끼 밥을 먹는 것도 편안한 것이 아닙니다. 자녀들을 돌보는 일도 내 자식이니까 한다고 편안할 수 없는 것이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삶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누가복음 18장 8절에서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즘 같은 말세에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보여주는 말씀이라 할 것입니다. 우선 황금만능주의의 자본주의 세상에서 사는 우리가 돈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산다는 것이 어려운 일입니다. 모든 세상이 돈이 제일이다, 돈만 가지면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돈이 없으면 살 수 없다는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 아니다, 돈보다 더 사랑해야 할 것이 하나님이며 돈은 없어도 살 수 있지만 하나님이 없이는 살 수 없다고 생각하는 신앙을 가지고 산다는 것이 정말 가능한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과 같은 핵가족제도 하에서 자식보다 하나님을 더 귀하게 여긴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다 경험합니다. 사실 어느 때보다 더 우상숭배의 죄를 범하고 사는 때가 오늘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면 그것이 우상입니다. 하나님보다 자식을 더 귀하게 여기고 자식에게 쓰는 시간은 아깝지 않고 하나님에게 쓰는 시간은 아깝다면 자식을 우상으로 섬기며 사는 것입니다. 우상숭배를 하지 않으려면 피눈물 나는 노력을 해야 하는 세상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까지를 포함해서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우상숭배라는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일마다 하나님 앞에 나와 사죄의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돈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자식을 하나님보다 더 귀하게 여긴 것을 우리가 다 절절한 마음으로 회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두 번째 우리가 오늘과 같은 세상에서 예수님을 믿기가 힘든 것은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두 가지 계명을 주셨는데 하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두 번째가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옛날 우리가 농촌에서 살 때는 한 동네에서 가난한 사람이 손에 꼽을 수 있는 눈에 보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때는 이웃사랑이 가능한 일이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말미암아 수많은 가난한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모습을 보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삽니다. 가난한 사람의 종류도 다양해졌습니다. 집이 없는 노숙자를 비롯해서 이 땅에 돈을 벌로 온 외국인 노동자, 누구도 돌보지 않는 혼자 사는 노인 뿐만 아니라 많은 고생을 하고 굶주림 가운데 있다고 하는 북한의 동포들, 최근에 보는 대로 많은 탈북자들이 있습니다. 장애인들도 있고 가난한 사람의 종류가 참으로 많아졌습니다. 지역적으로도 한 동네였지만 이제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베트남이나 미얀마, 캄보디아나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들 전 세계에 걸쳐서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이 있습니다. 범위도 광범위하고 종류도 다양해서 우리가 이웃사랑을 실천한다고 할 때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어떤 사람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는 것이 이웃사랑입니다.
또 이웃사랑을 하고 싶어도 혼자 힘으로는 감당이 안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가 많은 돈을 가진 부자도 아니고 재벌도 아닙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뻔 한 것인데 이것으로 어디서부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방법을 모르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노숙자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질적으로 생각할 때 우리 교회에 온 노숙자가 설사 예수님이었다고 해도 아니 정말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다면 그 사람에게 우리가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주어야 합니까? 그 사람이 예수님이었다 한들 우리 교회가 그 사람을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줄 수 있습니까? 우리 교회의 어떤 방을 내서 교회에서 살게 할 것입니까? 그리고 노숙자가 그 사람 한 명입니까? 그 사람을 우리 교회에서 살게 한다고 노숙자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습니까? 서울에만 해도 수십만 명의 노숙자가 있는데 이들을 어떻게 보살필 것입니다. 예수님이라고 생각하고 이들을 보살핀다고 하면 그 방법을 어떻게 할 것입니까? 노숙자를 돕는 일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계명을 실천하며 산다는 것이 만만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이들을 돌보지 않는 것은 예수님의 계명을 실천하지 않는 것일 뿐만 아니라 제대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하면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 살 수 없을 것입니다. 노숙자 문제를 생각하면서 우리가 어떻게 나 혼자 따뜻한 잠자리에서 다리를 뻗고 잘 수 있습니까? 이것은 양심을 가진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 땅의 배가 고픈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하루 세끼 아무 생각 없이 밥을 먹는다면 양심이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아무 양심의 가책 없이 나혼자 배부르게 밥을 먹는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 갈릴리교회가 이런 상황 속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하는 것을 깊이 생각해보겠습니다. 첫째로는 우리 혼자의 힘으로는 할 수 없고 여럿이 힘을 합쳐서 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해야 할 수많은 일을 다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 우리가 해야 할 수많은 일들 가운데 꼭 해야 할 일을 상징적으로 선택해서 우리 교회가 함께 힘을 합해서 집중적으로 이 일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몇 가지 선교 프로그램을 선택해서 실천하고 있습니다.
그중에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독거노인을 위한 사랑의 도시락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있는 구로동 주위에 아파트가 많이 있지만 아직도 구석구석에 끼니가 간 데 없는 많은 불쌍한 노인들이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혼자 외롭게 살아가는 노인들을 외면하고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토요일마다 사랑의 도시락을 준비해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있습니다.
우리 주부들은 우리 식구들에게 무슨 음식을 마련해서 식탁을 차릴까 늘 생각하는 것처럼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루 세끼 밥을 먹을 때마다 나와 내 식구들만 앉아서 밥을 먹는 식탁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식구수를 셀 때 거기에 한 명 더 예수님이 우리 식탁에 계시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자리를 비워두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식탁에는 예수님의 자리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자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몫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옛날에 우리 어머니들은 밥을 지을 때마다 예수님의 몫으로 성미를 떼어냈습니다. 이 신앙을 다시 회복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몫을 떼어내야 합니다. 예수님의 몫이 바로 우리 주위에 끼니를 거르는 사람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식탁이 진수성찬으로 차려졌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의 몫이 없으면 축복의 식탁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없는 식탁은 제대로 된 식탁이 아닙니다.
사랑의 도시락 헌금을 여러분이 하시는 지 안 하시는지 모르겠지만 돈이 없어서 못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사랑의 도시락 헌금을 하시는 분들은 정신을 차리고 제 말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덜 먹고 절약해서 헌금을 해야 합니다. 160명의 예수님의 식사를 우리가 맡은 것입니다. 우리가 정성을 다해서 절약하고 헌금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북한 어린이 500명을 위한 헌금을 하고 있습니다. 저의 어머니는 6남매를 낳아서 키우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하나나 둘을 낳아서 기르고 있습니다. 북녘에 자식이 하나 더 있다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자식을 뒤치다꺼리하기 위해서 돈을 아깝지 않게 씁니다. 한 달에 만원으로 자식 한 명을 더 키운다고 생각하면 왜 못하겠습니까? 자식을 위해서 비싼 등록금도 내고 명품 옷도 사주고 맛있는 음식도 사줄 때 북녘의 자식도 생각하면 만원을 왜 못 내겠습니까? 그래야 우리가 통일이 되어서 북녘의 동포를 만났을 때 부끄럽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도 부끄럽지 않을 것입니다. 자신이 낳은 자식만 자식으로 생각하고 아깝지 않게 돈을 사용하고 온갖 정성을 들이고 북녘의 자식을 위해서 한 달에 만원을 쓰는 것을 아깝게 생각한다면 어떻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하겠습니까? 제가 헌금 통계를 보면서 북한 어린이 돕기 헌금이 적자인 것을 보고 우리 교회의 부끄러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노숙자들을 위한 헌금을 해서 우리가 다리를 쭉 뻗고는 못 잘망정 반이라도 뻗고 잘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잠자리가 불편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힘든 것입니다. 세상 사람과 똑같이 살면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은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각오를 하고 나서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20년 동안 쉬지 않고 하고 있는 이주노동자를 돕는 일도 중요한 일입니다. 이 시대를 사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이 정도의 이웃사랑을 실천하고 살아야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양심에 꺼리지 않고 마음 편하게 살 수 있습니다. 제가 누누이 강조하는 대로 이런 모든 이웃사랑은 여러분의 날마다의 구체적인 삶과 연결되어야 합니다. 헌금은 돈이 남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절약하고 아껴서 내가 쓸 것을 쓰지 않고 헌금해야 합니다. 노숙자를 돕는 일, 사랑의 징검다리 헌금은 우리 잠자리가 편안하기 위해서 하는 헌금입니다. 사랑의 도시락 헌금, 북한 어린이 돕기 헌금은 하나님 앞에서 역사 앞에서 부끄럽지 않기 위한 헌금입니다.
돈이 없어서 헌금을 하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먹을 것 다 먹고 헌금할 수 없습니다. 먹을 것을 덜 먹고 절약해서 가난한 이웃과 함께 하는 양심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즐거운 일, 기쁜 일 슬픈 일이 있을 때, 특별한 일이 있을 때 하나님의 은혜로 생각하고 절약해서 베트남의 가난한 농부들에게 송아지 한 마리를 보내는 일을 해야 합니다. 베트남에서 우리나라가 저지른 많은 나쁜 짓을 속죄하는 마음으로 이 일을 해야 합니다. 성경에는 잔칫집에 가난한 사람이 와야 한다고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잔칫집에는 부자만 오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이 와야 진짜 잔치입니다. 가난한 사람을 우리의 잔치에 초대하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잔칫집에 가난한 사람의 몫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정도의 삶을 살아야 이 시대를 사는 예수를 믿는 사람으로서 부끄럽지 않은 것이고 하나님 앞에 설 때도 부끄럽지 않은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이 시대를 사는 양심을 가진 사람으로서 최소한도 이 정도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어떻게 우리가 주변의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에 대해서 그렇게 무관심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나라에 찾아온 이주노동자들을 보살피는 것은 예수를 믿는 사람이 아니라 할지라도 이 시대를 사는 양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또한 하나님 나라에 가서 예수님 앞에서 심판 받을 준비를 하는 것이 이주노동자를 섬기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우리 교인들이 이 세상을 떠나 장례를 지내는 장례식장에 갈 때마다 이분이 지금쯤 예수님 앞에서 심판을 받을 텐데 그 마음이 기쁜 마음일까 아니면 민망할까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배고팠을 때 먹을 것을 주었느냐 나그네 되었을 때 맞아주었느냐 하고 물으실 때 뭐라고 대답할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어떤 분은 예수님에게 큰 칭찬을 받을 것이라고 짐작되는 분도 있고, 고생 좀 할 것이란 생각이 드는 분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물어보실지 성경에 질문지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 대답을 잘 준비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 앞에 섰을 때 부끄럽지 않고 당황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두 군데를 읽었습니다. 구약성경 열왕기상 17절은 사렙다 과부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가난하기 짝이 없는 과부에게 보냈습니다. 엘리야가 이 과부에게 먹을 것을 달라고 하자 이 과부가 말하길 오늘 저녁에 아들과 먹을 한 끼의 양식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그것을 가져오라고 말합니다. 사실 과부가 가지고 있는 한 끼의 양식은 그냥 먹고 나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이것을 하나님 앞에 드리면 평생을 살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냥 가지고 있으면 한 끼의 양식이지만 하나님 앞에 드리면 평생의 양식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목숨보다 귀한 한 끼의 양식을 자신이 먹지 않고 자식에게 주지 않고 하나님 앞에 드렸더니 기름통에 기름이 떨어지지 않고 밀가루통에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았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가 가지고 있었으면 한 끼의 양식이지만 하나님 앞에 드렸더니 영원한 양식이 된 것입니다.
마태복음 14장에는 우리가 잘 아는 오병이어의 기적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린아이가 가지고 있는 한 끼의 양식을 예수님의 손에 들려드렸더니 오천 명이 넘고도 남는 엄청난 축복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가기고 있으면 그냥 만원이지만 그것을 하나님 앞에 드렸을 때 수많은 생명을 먹일 수 있는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을 돕고 예수님의 손에 가난한 사람을 먹일 양식을 들려드릴 때 만원이 만원이 아니고 오백명이 오백명이 아닌 기적이 일어나게 됩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것은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행복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살면서 혼자 벌어서 혼자 먹고 살면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살아서는 안됩니다. 거기에 기쁨이 있고 행복이 있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이불을 덮고 자더라도 다른 사람과 따뜻한 잠자리를 나누지 않는다면 불편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진수성찬이라도 가난한 사람과 함께 먹지 않는다면 축복의 식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은 우리들의 행복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자랑스러울 수 있도록 하나님 앞에 상급을 받기 위해서 해야 할 일입니다. 혼자 살기 위해서 돈을 벌겠다는 욕심을 내려놓고 내 자식과 식구들과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생각을 벗어버리고 주님의 말씀대로 가난한 사람의 아픔이 우리의 아픔이 되고 배고픈 사람과 나누어 먹고 따뜻한 잠자리를 다른 사람과 나눌 때 우리의 삶이 이 땅에서 행복할 수 있고 하나님 앞에 큰 상급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 갈릴리교회 모든 성도들이 이런 행복한 삶, 하나님 앞에 칭찬받고 큰 상급을 받을 수 있는 삶, 역사 앞에 당당하고 떳떳한 삶을 사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풍족케 되는 비결
마 14:15-21 / 문기태 목사
지금은 필요한 모든 것이 많이 부족한 시대입니다. 쓸 곳은 많은데 쓸 수 있는 돈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일을 하고 싶은 젊은 사람들에게 일할 직장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중요한 자리에 앉은 책임 있는 지도자들에게는 일처리를 완벽하게 해 낼 지혜가 부족합니다.
이처럼 부족함이 많은 시대를 우리가 살아가면서 풍족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예수님께서도 꼭 필요한 것이 절대 부족함을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뵙고자 수많은 군중이 몰려 왔습니다. 하루 종일 그 사람들은 예수님이 병자를 고치는 것도 구경하고 가르치시는 말씀도 들었습니다. 저녁때가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아뢰었습니다. "선생님! 여기는 빈들이고 날은 저물었습니다. 그러니 무리를 흩어 보내서 제각기 먹을 것을 마을에서 사 먹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런데 마을까지는 거리가 제법 많이 떨어졌습니다. 게다가 시골 마을에 수 천 수 만 명의 사람들이 몰려가면 먹을 것을 구할 수 없을 것이 뻔했습니다. 당시에는 그 많은 빵을 만들어 파는 가게도 없고 공장도 없으니 그 많은 사람이 돈을 주고도 사 먹기가 불가능했습니다. 상황이 그러니 그대로 보내면 사람들이 돌아가다가 기진하여 쓰러질 것이 불을 보듯 자명한 일이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이러한 부족함의 문제를 단번에 해결해 보이십니다. 주려 있는 수만의 군중들이 다 배불리 먹을 뿐 아니라 먹고 남은 부스러기를 열 두 광주리나 거두게 됩니다. 부족함이 오히려 풍족함으로 바뀌었습니다.
우리 인생에서도 부족하여 곤란한 상황을 자주 만납니다. 이런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해결하십니까? 그 부족함을 오히려 풍족하게 바꾸는 비결을 아십니까? 모든 이들이 부족하여 쩔쩔 맬 때에도 여러분은 풍족하여 다른 사람들에게도 맘껏 나누어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풍족한 삶의 비결을 부족을 풍족으로 바꾸시는 우리 예수님께 배워야만 합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부족함을 풍족함으로 바꾸는 놀라운 비결을 배워 직접 체험함으로 풍족한 인생을 사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1. 감사를 앞세우면 풍족해 집니다.(19)
예수님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드시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수 천 명이 배가 고파 먹을 것을 기대하며 주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손에는 겨우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개가 전부입니다. 사람들은 '에게, 저걸 가지고 무얼 하려고 저러나?'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버지여 주시려면 많이 좀 주시지 이걸 가지고 누구 코에 붙이라고 이걸 주십니까?" 하고 푸념적인 기도를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적은 것을 가지고도 전혀 불만스럽게 여기지 않으시며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아버지여,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음식을 주심을 감사하나이다." 그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의 손을 빌어 무리에게 나누어 주자 모두 배불리 먹고 열 두 광주리나 남는 역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사람들은 풍족하게 가지고도 감사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 이유는 손에 든 것이 나의 필요를 채우기에 부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충분하게 주어졌을 때에도 손에 들려 있는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손에 무언가를 들고서 감사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십니다. 하찮게 보이는 적은 것을 가지고도 진심으로 하나님께 감사 찬양 하는 것을 보실 때 주님은 비로소 풍족하게 살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십니다.
지금부터 380년 전 이맘 때 조그만 무리의 남녀들이 신대륙 아메리카에서 첫 추수감사절을 지켰습니다. 인디언 손님들을 초청해놓고 식탁에 둘러앉았습니다. 추수한 곡식들을 앞에 놓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식탁은 오늘 우리가 일상 먹는 만큼도 풍성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충분한 것을 추수하지 못했습니다. 몇 년 동안 흉년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들의 현실은 추위와 배고픔 그리고 질병이었습니다. 그것들이 그들의 삶을 위협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진심으로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들이 추수한 곡식은 보잘것없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이들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아름다운 전통을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지금은 온 세계에서 가장 먹을 것과 온갖 상품 그리고 각종 자원이 넘치는 부유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식탁에 앉아서 기도할 때 얼마나 감사한 마음으로 기도를 하십니까? 혹 형식적으로 기도하지는 않습니까? 감사는 없고 다른 내용만 중언부언하지는 않습니까? 진정으로 감사를 드려 보시기 바랍니다. 부족하게 느껴질지라도 그만큼 주신 것을 바라보며 감사를 드려 보시기 바랍니다. 내게는 왜 이렇게 없는 것이 많지 하는 생각이 들 때 실족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런 때라도 감사기도를 멈추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내게 주셔서 아직도 내게 있는 것이 더 많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행복해집니다. 그렇게 되면 풍성해집니다. 메마른 심령에 은혜가 솟아납니다.
지금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돈이나 먹을 것 그리고 일자리 같은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면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진심으로 감사 예배를 드려 보십시오. 다음 주일이 추수감사절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다음 주일에 교회 와서 설교 들으며 잠간 감사한 마음을 품는다고 큰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진정한 추수감사절을 경험하려면 오늘부터 감사로 여러분의 마음을 단장하십시오. 감사의 조건을 할 수 있는 대로 많이 찾아보십시오. 감사의 기도를 많이 드리십시오. 서로 감사의 말을 해 보십시오. 이번 주간과 다음 주간을 특별히 감사가 풍성한 주간으로 만들어 보십시오. 감사절다운 감사절이 되고 여러분의 심령과 가정이 그리고 교회와 일터까지 풍족해질 것입니다.
2. 드리기를 앞세우면 풍족해집니다.(17)
예수님께서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하시자 제자들이 "우리에게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습니다." 하였습니다. 그것은 어디서 나온 것인 줄 아십니까? 요6:9에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라고 안드레가 보고했습니다. 따라서 어린 아이의 손에 있던 도시락을 주님께 드렸을 때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만약 그 도시락도 드리지 않았다면 주님께서 무엇을 가지고 감사하실 수 있었겠습니까? 감사기도를 드리지 못하셨으면 그날 그 자리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자신이 식사하려고 준비하였던 것을 기꺼이 주님께 드리는 헌신이 있었기에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 자리에 있던 수 만 명이 다 배불리 먹고 남는 풍족한 역사가 임한 것입니다. 그 어린 아이라고 혼자만 그 도시락을 다 먹고 싶은 마음이 없었겠습니까? 어린 아이가 갈등이 왜 없었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내 놓을 생각을 하였을까요? 그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못 먹더라도 주님이 드시도록 드려야겠다.' 하는 착하고 아름다운 마음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왜 부족함을 경험하면 살아야 합니까? 인색하기 때문입니다. 움켜쥐려고 만 하지 주를 위해 드리는 것에는 움츠리기 때문입니다. 나와 가족을 위해서는 더 많이 쌓아 놓지만 주님과 이웃과 복음을 위해서는 될 수 있는 대로 적게 드리고 싶어 하면 결코 풍족해질 수 없습니다. 이것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신비한 원리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그 예를 수없이 들 수 있습니다.
사렙다의 과부는 흉년의 연속 속에 마지막 남은 밀가루로 어린 아들과 함께 빵을 만들어 먹고 굶어 죽기를 기다리려고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가 찾아 와 "먼저 나에게 그 빵을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가족이 먹으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그 집에 마지막 남은 양식임을 몰랐겠습니까? 어떻게 그렇게 잔인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복을 나누어주기 전에 그의 믿음을 보고자 한 것입니다. 사렙다 과부는 침을 삼키며 마지막 빵을 송두리 채 엘리야에게 가져갑니다. 그러나 그녀와 아들은 굶어 죽지 않습니다. 흉년이 다가도록 날마다 기적이 일어납니다. 밀가루 통에 밀가루가 솟아납니다. 기름통에 기름이 솟아납니다. 하루도 굶지 않고 맛있게 빵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녀 뿐 아니라 우리에게 하나님의 방법을 보여 준 것입니다.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를 읽어 보셨습니까? 저자 로버트 기요사끼씨가 뭐라고 하던가요? 부자가 되기를 원하면 먼저 베풀기를 결심하라. 무언가를 원한다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먼저 주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은 필요한 것을 움켜쥐고 내놓지 않지만 부자는 필요한 것이 있으면 먼저 내 놓는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부자 아빠는 십일조를 굳게 믿었다.'고 합니다. 그분은 돈이 부족할 때 오히려 교회나 자선단체에 돈을 기부했답니다. 그리고 부자 아빠에게 들은 이야기 중에 특이한 한 가지는 '가난한 사람이 부자보다 욕심이 더 많단다.'는 말입니다.
기요사끼씨는 부자가 되려는 이들에게 확신 있게 권합니다. 무언가가 부족하거나 필요한 것이 있다면 먼저 베풀자. 그러면 푸짐하게 되돌아 올 것이다. 어떤 사람이 어떤 추운 겨울 밤에 장작을 한 아름 안고 배불뚝이 난로에게 이렇게 소리친다. "네가 날 따뜻하게 해 주면 장작을 넣어 주겠다." 그것은 돈 행복, 사랑, 계약 같은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진리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먼저 주는 것이다 그러면 뭉텅이로 돌아 올 것이다. 자기 것을 먼저 내 놓지 않고는 부자가 될 수 없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창원의 어떤 교회에 나가는 어떤 새 신자에게 지난해에 직접 들은 이야기입니다. 목사님이 추수감사절에 그러더랍니다. "여러분 중에 먹고 살만한 사람은 추수감사헌금을 10만원이상하세요. 그리고 겨우 밥은 먹고 살 정도인 사람은 5만 원 이상 하세요. 밥도 못 먹고 사는 사람은 알아서 하세요." 그렇게 구체적으로 제시를 해주니까 참 좋더랍니다. 그러면서 당신은 10만원 헌금을 했답니다. 그분은 젊은 나이에 남편이 사고로 죽고 혼자서 세 아이를 양육하면서 사는 분인데 기가 죽더라구요. 우리 교회는 집 지니고 살만큼 사는 집사님들 중에도 추수감사헌금이 만 원, 이만 원 헌금하는 분들이 많은데 그것도 가정단위의 헌금이 그 정도인데, 내가 잘 못 가르쳐서 교인들을 인색한 사람 만들었구나! 이렇게 두면 물질 축복을 더 크게 받아 주의 일에 크게 쓰임 받는 사람이 많이 나오기는 어렵겠구나! 하는 자책이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조금 위로가 된 것은 우리 중에도 지난 해에 10만원, 20만원 추수감사헌금을 드린 분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추수감사절이 일 년에 몇 번입니까? 절기를 다 합쳐 일년에 몇 번이나 있습니까? 보통 때 하는 감사와는 달리 좀 수준을 높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의 오병이어는 어느 정도입니까? 주님께 무언가 드릴 기회가 오면 마지못해서 체면 때문에 드리지는 마세요. 인색함으로 드리지 마세요. 마지못해 억지로 드리지 마세요. 자원함으로 드리세요. 감사함으로 드리세요. 기쁜 마음으로 드리시기 바랍니다.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중심을 보시고 흡족하게 받으실만하게 드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풍족하게 채워주시고 싶어서 못 견딜 정도로 드리기 바랍니다.
[이러므로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의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케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노니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9:5-7)]
여러분 속지 마십시오. 사단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어려운 시대를 살아남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서도 인색해야 한다고 부추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 빼앗아 가셨으니 감사보다는 원망과 불평을 앞세우라고 부추길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부족한 때 일수록 감사하라고 말입니다. 가난한 때 일수록 풍성히 드리라고 말입니다. 여러분, 진정으로 풍족하게 사는 비결을 성경에서 배운 대로 실천하여 모두 영적으로 물질적으로 부요한 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큰 감사, 큰 기적
마 14:14-21/ 윤창용 목사
'선영아 사랑해'라는 표어로 유명해진 인터넷 사이트 '마이클럽'이라는 사이트에서 악녀가 되는 10가지 비법을 읽어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첫째는 '예'라고 대답하기 전에 5초만 참자.
둘째는, 동료들에게 사랑받겠다는 생각은 버려라,
셋째 싸움닭이 되라. 싸움을 두려워해서는 안되며 누군가와 언쟁을 하거나, 반대의견을 말하거나, 심하게는 자신의 적을 곤경에 빠뜨릴 줄 알아야 한다는 것.
네째 부탁을 하지말고 요구하라.
다섯째 자책을 하지말라.
힘들여 동료를 야단을 쳐놓고도 '괜히 야단쳤다든가'아니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었다든가라는 생각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섯째는 너무 진지할 필요 없다.
누군가와 싸우거나 명령을 할 때 너무 진지해져 자기의 인생, 가치를 모두 걸 필요가 없고 때론 '아님 말고~'라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
일곱째 때때로 술수를 부려라
몰라도 아는 척하고, 못해놓고도 잘한 것처럼 포장하는 '귀여운' 사기가 필요하고 때론 남의 공도 슬쩍 가로채고, 상대방이 열내면 "뭐 그런 걸 가지고 그러느냐"며 싱긋 웃는 의뭉스러움도 가끔은 써먹으라는 것.
여덟째 대가없이 허드렛일은 하지말라.
'묵묵히 일하면 언젠가 알아줄거야'라는 자세는 오히려 회사측에게 '허드렛일을 시켜도 되는 만만한 사람'으로 알아준다는 것.
아홉째 이기적으로 되려고 노력하라.
열번째 성공을 마음껏 누려라
승진기회가 왔을 때 주저하지 말고 받아들이며 성공을 맘껏 누리라는 것.
그런데 저는 이런 삶에 대한 생각들을 살펴 보면서 이런 삶이 철저히 자기만을 위하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노르웨이라는 북구의 살기 좋은 나라에 이런 속담이 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에는 사탄이 씨를 뿌릴 수 없다" 내용인즉슨 이렇습니다. 사탄이 노르웨이에 내려와 창고를 하나 지었답니다. 이 창고안에 사탄은 미움, 슬픔, 불평, 원망 등의 씨를 저장해 놓았습니다. 이 씨들은 누구에게라도 뿌리기만 하면 싹이 잘 나는데 한 동네 사람들에게만 효력이 나타나질 않았습니다. 그 동네 이름이 '기쁨'이라는 동네였는데 그 동네 사람들은 언제나 감사하는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또 성 어거스틴은 고린도전서 13장 13절의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가 항상 있어야 하지만 한 가지를 덧붙이라고 하면 "감사"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니까 어거스틴은 믿음, 소망, 사랑, 감사가 신앙인의 덕목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2002년 4월 7일을 사는 우리들은 감사가 없어졌습니다. 감사가 인색합니다.
세상이 어두워지고, 힘들어진 까닭은 바로 감사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칼 힐티의 '행복론'이라는 책에는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 첫 번째 조건은 '감사하는 마음'이라고 하면서 그는 "감사하라, 그러면 젊어진다. 감사하라, 그러면 발전이 있다. 감사하라, 그러면 기쁨이 있다"고 했습니다.
옆 사람처럼 행복했으면 하고 부러워하는 사람은 불행해지고, 그때처럼 행복했으면 하고 과거를 회상하는 사람도 역시 불행해진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마음이 병들면 감사가 사라집니다. 불평, 원망, 짜증이 나옵니다. 사람의 마음 속에 감사하는 마음이 사라지는 것은 순간입니다.
예수님도 언제나 감사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어린아이의 작은 도시락을 가지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하는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우리가 잘 아는 오늘의 본문은 어린아이의 작은 도시락, 즉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장정만 오천 명을 먹이고도 남는 기적을 일군 이야기입니다.
주님의 이적이 어떻게 일어났습니까?
그 해답은 바로 주님이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자 이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면 이 축사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알아야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문제가 해결이 됩니다. 축사라는 말은 요즘 나온 새 번역 성경에는 '감사기도'를 드린 후에 라고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NIV 성경에는 'He gave thanks'라고 되어 있습니다. 감사를 드린 후에 라고 번역하면 됩니다. 그러니까 새 번역 성경이 제대로 번역이 된 것입니다. 원어 성경에는 "유로게오"라고 되어 있는데 이 말 역시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이적은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구체적으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있는 것에 감사할 때 이적이 일어났습니다.
벳새다에서 예수님이 갈릴리 사역을 하시는 중 가장 활발하게 사역을 하시면서 오병이어의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이 이적을 일으킬 때 예수님의 사역을 제 3차 갈릴리 사역이라고 합니다만, 이때로 시작해서 유대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의 반감과 핍박이 고조되어 갑니다.
배경은 빈들입니다. 많은 무리들이 모여 있고 예수님은 열정적으로 하늘 나라에 대한 설교를 하신 것으로 보여집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사람들이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은혜를 받다가 그만 해가 지고 저녁때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모두 다 시장기를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이 상황에서 주님은 무리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이적을 행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적을 행하시기 전 예수님과 제자들, 그리고 무리에게는 먹을 것이 없는 위기가 닥쳐 왔습니다. 이런 위기에 제자들은 어떻게 대처를 하고, 예수님은 어떻게 대처하는지를 보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먼저 제자들의 대처방법입니다.
15절 말씀을 보면 제자들은 예수님께 이곳은 빈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라고 합니다. 이 말은 우리가 저 많은 사람들의 먹을 것을 책임질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방법은 무엇입니까? 16절입니다.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주님의 방법입니다. 주님의 방법에 대해 제자들은 지금 이곳이 빈들이라 돈을 주고도 사 먹을 음식점도 없고, 갑자기 우리보고 먹을 것을 이 많은 사람들에게 주라니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반응입니다. 그 반응이 17절에 나옵니다.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이니이다" 어쩌면 이 말을 제자들은 짜증을 섞어서 이야기했을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의 행동가운데에는 '반사회성 성격장애'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종류가 다양한데 그 가운데 하나가 항상 무책임하다는 것입니다. 그밖에도 참을성이 없고 공격적이고, 충동성과 계획을 세우지 못하는 것, 사회적 기준에 동조하지 못하는 것, 즉 법을 밥먹듯이 위반하는 것 등이 다 사회성이 결여되어서 나오는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행동은 반사회적인 행동입니다. 무책임합니다. 또 다른 사람들의 배고픔 따위는 전혀 안중에도 없습니다. 제자들과 예수님의 상반되는 태도에서 분명히 그런 모습이 여실히 드러납니다.
주님은 그 많은 무리들을 보시고 어떤 마음을 가지셨습니까? 14절은 우리 주님이 많은 무리들을 보시고 느끼신 감정이 나타나 있습니다. 한마디로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그 불쌍한 사람들 중에 있는 환자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긍휼히 여기시는 주님의 태도와 무책임하게 사람들을 대하는 제자들의 태도가 오늘 본문에 엿보이고 있습니다.
보통의 사람들은 많은 사람들이 모인 것을 보면 자기가 그 사람들을 통솔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우러러 본다는 착각을 합니다. 그리고 "내가 가 이만큼 영향력있는 사람이다"라든가, 아니면 "이 많은 사람들이 나를 보고있다"라는 생각에 영웅심에 들떠서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행동이 지나치게 되든가, 아니면 뽐내고 싶어하는 마음이 듭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보통 생각과는 완전히 다른 생각을 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사람들이 보통 느끼는 감정과는 완전히 다른 '불쌍한' 감정, '긍휼히 여기는 감정'을 지니고 계셨습니다. 그런 반면 제자들은 무책임하게 그들이 굶든지, 먹든지 상관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들의 대답은 퉁명스럽습니다. 예수님을 잘 알지도 못하시면서 현실은 잘 모른다고 끝까지 부정적입니다. 가진 것도 없고, 조금씩 먹이더라도 라는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생각들입니다. 돈도 없고 이 지역에는 이 사람들을 먹을 음식점도 식량도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없는 것만 골라서 불평만 한다면 결국 제자들의 태도와 같은 모습이 될 것입니다. 감사는 동일한 현실과 상황에서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원래 생각한다는 Think.라는 말과 감사한다는 Thank는 같은 어간을 가지고 있는 말입니다. 우리 모두 있는 것에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시인 T,S Eliot은 그의 책 「황무지」에서 "현대인은 텅 빈 사람이요, 동시에 가득 찬 사람이다, 있어야 할 믿음, 소망, 사랑, 감사는 없고 없어야 할 죄, 미움, 시기, 질투, 욕심만 가득하다고 지적합니다.
지금 나에게 있는 것을 헤아려 보시길 바랍니다.
무신론자로 알려져 있지만 버트란트 러셀이라는 분을 여러분 아실 것입니다. 그는 그의 행복론에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나의 힘과 존재를 겸허하게 평가할 줄 아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다"라고 말입니다. 자신을 낮추어서 평가하고 사는 사람은 늘 자기가 이루어 놓은 것에 놀라며 삽니다. '아 나는 이만한 일을 할 사람이 못되는데 어떻게 이런 복이 나에게 왔는지? 자기에게 되어진 일에 놀라면서 삽니다. 그런가 하면 반대로 자기를 스스로 높이면서 사는 사람은 자신의 실패에 대해서 놀라며 산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내 앞에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라면서 말입니다. 이것이 부부관계에도 적용됩니다. "어쩌다 저런 것이 걸렸나? 내가 실수를 했나, 아니면 하나님이 실수를 했나"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감사할 줄 모르고 사는 사람이 병신입니다. 다리가 절단되어서, 팔이 없어서 병신이 아니라 이렇게 감사를 모르면 병신이 되는 것입니다. 감사할 때 이적이 일어납니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정부로부터 신앙적인 핍박을 받았던 코리 텐 붐 여사의 간증이 있습니다. 코리는 동생 베시와 함께 그야말로 인간 이하의 수용소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어려운 고통에서도 독일군의 감시를 피해 비밀리에 성경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수용소 생활 가운데 가장 비참한 것은 바로 벼룩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동생 베시는 모든 환경 중에서도 감사하라고 말씀하니 감사하며, 살자고 언제나 밝은 표정으로 수용소 생활을 견디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독일군 감시병이 혼자서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 군인의 이야기가 "저 수용소 안에는 유독 벼룩이 많이 들어가기가 역겨워.." 그래서 코리는 자기 방에 벼룩을 많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게 되었답니다. 벼룩이 많으니 독일군이 자기들 방에 들어오질 않고 독일군이 자기들 방에 들어오지 않으니 마음껏 성경공부를 할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지금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2. 작은 것에 감사할 때 큰 기적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지금 형편은 마태복음 14장 1절부터 읽어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1절부터는 세례요한의 죽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예수님의 13절 말씀에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 들에 가시니"라고 하는 것을 볼 때 주님도 세례 요한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마음이 편치 않으신 모양입니다. 아마 우리 같으면 "괴로우니 나 혼자 두라고 하시고" 사람들이 따라 오면 만나지 않고 피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절망 중에 빠져있는 무리들은 고통 중에 번민하시는 예수님을 홀로 내버려 두지 않고 그 곳 까지 따라 갑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무리들을 귀찮게 여기시지 않고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리고 그들의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작은 소년의 도시락을 들고 감사기도를 드립니다. 지금 상황에서 주님도 얼마든지 불평할 수 있는 조건입니다.
"하나님! 어쩌자고 세례요한을 죽게 두셨습니까?"
"하나님! 제 마음이 괴로운데 어쩌자고 이 많은 사람들이 저를 쫓아옵니까?"
그런데도 하늘을 우러러 감사 기도를 드리시는 주님이십니다. 어린 아이의 작은 도시락 하나를 두 손을 높이 받쳐들고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주님을 모습을 상상해 보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큰 것만 보면 감사하기가 어렵습니다. 작은 것부터 감사해야 행복합니다. 평범한 일에 감사해야 합니다. 별 일이 없음에 감사해야 합니다.
병이 나서 고쳐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지만 병원에 가지 않게 해 주신 하나님께도 감사해야 합니다. 사고 중에 기적적으로 목숨을 부지한 것도 감사하지만 사고가 나지 않은 것에도 감사해야 합니다. 돈을 많이 벌어야 감사가 된다면 큰 돈이 쓸데없는 곳에 들어가지 않은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내가 정말 정말 부자인가를 체크해 보는 몇 가지 항목이 있습니다. 이 항목에 열 가지가 다 나의 경우라고 생각되시면 여러분은 부자입니다.
1. 친구의 사업이 성공적일 때 마음이 흐뭇하고 아름다운 친구의 용모에 대해 샘이 안 나면 그는 부자이다.
2. 남을 위해 돈을 쓸 때 주저되거나 아까운 생각이 안 나면 그는 부자이다.
3. 아들 딸이 보통 사람으로 성장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감사한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그는 부자이다.
4. 식사기도를 드릴 때 끼니마다 정말 마음 속으로 그 음식에 대하여 감사한 마음이 있다면 그는 부자이다.
5. 자연의 아름다음이 눈 속에 들어오고 새의 노래소리가 스피이커를 댄 것처럼 크게 들리면 그는 부자이다.
6. "모자라다, 더 있어야겠다"하는 생각보다 "이만한 것도 얼마나 감사한가" 하는 생각이 더 크면 그는 부자이다.
7. 남을 비판하는 마음의 횟수보다 축복하는 마음의 횟수가 더 많으면 그는 부자이다.
8. 현재나 과거를 후회하고 한탄하는 생각보다 그 마음이 내일이라는 집에 살고 있으면 그는 부자이다.
9. 가장 바쁠 때 하나님을 생각할 수 있으면 그는 부자이다.
10. 죽음에 대하여(곧 자기 생애의 청산에 대하여) 자신이 있으면 그는 부자이다.
결국 사소한 것에 감사하고 사는 것이 부자가 되는 지름길입니다.
말 못하는 병아리도 물 한 모금 마시고 하늘을 쳐다보고 감사하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얼마나 벅찬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까?
여러분! 최대의 감사를 하나님께 드리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감사를 통해서 큰 이적을 체험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감사는 기적을 일으키는 씨앗
마 14:14-21 / 김영대목사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가 어느 나라인지 아십니까? 방글라데시, 에디오피아, 부룬디, 잠비아, 라이베리아, 통가 … 이런 나라들입니다. 이들 나라는 1인당 GDP가 100달러, 200달러, 우리 돈으로 환산해 보면 한달 수입이 겨우 1∼2만원 정도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 나라 사람들은 하루 세끼는커녕 하루 한끼도 제대로 먹기 힘든 가운데 있습니다. 바로 이런 가난한 나라들에 우리나라 선교사님들이 많이 나가서 선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선교사님들이 이런 가난한 나라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공통점으로 발견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이들 나라말에 '감사'라는 말이 없거나, 아니면 있어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도무지 '감사'라는 말을 쓰지 않는 나라요, 사람들이어서 성경의 '감사'라는 말을 적절히 번역할 수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방글라데시에서 선교하다 그곳에 뼈를 묻은 정성균 선교사님은 그의 간증집에서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감사하지 못하는 사람은 저주받은 사람이요, 감사를 모르는 민족은 저주받은 민족이다." 예! 맞는 말입니다. 감사를 모르는 인생은 불쌍한 인생이요, 감사할 줄 모르는 백성은 우매한 백성인 것입니다. 가난하기 때문에, 혹은 없기 때문에 '감사'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감사를 모르기에 가난하고 처참한 나라, 불행한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외국을 여행하다 보면 유창한 영어를 하진 못해도 Thank you. Excuse me. 이 두 말만 잘하면 적어도 무식하다는 얘길 듣진 않습니다. 여행하는데 별로 지장을 받지도 않습니다. 사실 "감사합니다(Thank you)"라는 이 한마디만 잘해도 괜찮은 사람으로 대접받을 수 있습니다. '감사'라는 말은 사람의 마음을 열게 하고 하나님의 축복과 기적을 여는 복된 말입니다.
"감사합니다"라는 말은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들어도 기분 좋은 말입니다. 우리 모두 양옆에 계신 분들에게 "좋은 분과 함께 예배드리게 되어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해 보십시다. 기분이 어떻습니까? 좋으시죠! '감사'라는 말을 들으면 언제나 기분이 좋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감사 불감증에 걸려 있습니다. 감사할 줄을 모릅니다. 감사에 인색합니다. 성경 딤후3:2에 말세가 되면 이 세상이 더 살기가 힘들고 고통스럽게 되는데 그 이유 중의 하나가 곧 감사할 줄 모르는데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항상 감사가 넘치는 삶을 살라고 권고하십니다(골 2: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항상 감사가 넘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매사에 감사하는 사람은 행복한 삶을 살게 됩니다. 칼 힐티는 그의「행복론」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행복의 첫 번째 조건은 감사하는 마음이다. 감사하라, 그러면 젊어진다. 감사하라, 그러면 발전이 있다. 감사하라, 그러면 기쁨이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오늘의 성경본문에서 감사와 연관된 중요한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것은 "감사는 기적을 일으키는 씨앗이라는 사실"입니다. 또한 "감사가 크면 클수록 기적도 크게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감사가 얼마나 큰 기적을 일으켰는가를 살펴보십시다.
첫째, 있는 것을 감사할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는 벳새다 언덕에서 수많은 군중들이 모인 가운데 말씀을 전하시고 각색 병든 사람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말씀선포와 병 고치는 일을 하루 종일 계속 하셨습니다. 사람들도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은혜 받는 일에 심취하였습니다. 그런데 벌써 해가 기울고 저녁때가 되어 모두 다 시장기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영의 양식뿐만 아니라, 육체의 배고픔도 해결해주시려는 애정을 가지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그들을 먹여서 보내자고 제안하십니다.
이때 제자들은 예수님이 얼토당토않은 소릴 하신다고 불평스럽게 대답합니다. 본문 17절을 보십시오. "여기 우리에게는 떡 다섯 개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뿐입니다." 그들의 대답 속에는 가당치 않은 일을 시킨다는 퉁명함이 배어있는 것입니다. 이 오병이어의 기적 사건은 네 복음서 모두에 기록되어 있는데 제자들의 대답은 다 한결같이 부정적입니다. 누가복음 9장 13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니 이것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마가복음 6장 37절과 요한복음 6장 7절에서는 "이 사람들에게 조금씩만 먹이려 해도 200데나리온 어치의 음식을 사도 모자랄 것입니다"라고 볼멘소리로 대답합니다.
제자들의 대답은 하나같이 먹을 것도 없고, 돈도 부족하다는 사실만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은 설교는 잘하시지만, 현실은 너무도 모르고 있다는 것이 제자들의 생각입니다. 가진 것도 없고, 돈도 없고, 이 지역에는 이 많은 사람들을 먹일 만한 음식점이나 떡 방앗간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은 전혀 다릅니다. 제자들은 없다는 사실만을 힘주어 보고했지만 그러나 예수님은 "지금 있는 그것을 가져 오라"(18절)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있는 것을 가지고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어린아이가 드린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그것은 장정만 오천이 넘는 대 군중들을 위하여선 참으로 보잘것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있음에 대한 감사는 모든 군중을 배불리 먹이고도 남는 기적을 이루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감사는 삶에 더 큰 풍성을 가져오며, 불평은 빈곤만 가져오게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은 보잘것없는 것이지만 지금 있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놓고도 큰 감사를 드리심으로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있는 것에 대한 감사가 불러오는 기적의 신앙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길 원하시는 줄로 믿습니다.'감사'는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고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언어입니다. 그런데 아무나 감사를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마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입니다.
충북음성에 꽃동네를 일으켜 세운 오웅진 신부가 개인 비리 혐의로 문제가 되고 있음니다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얻어먹을 수 있을 만큼의 건강만 있어도 그 사람은 복 받은 사람이다.”가정에서 사회에서 버림받아 꽃동네에 모여 사는 사람들 중에는 깡통을 주어도 깡통을 손에 들 수 없는 불구의 사람들이 많고, 두 다리로 걸어가서 밥 한 술 얻어 올 수 없는 사람들이 많고, 밥을 비벼줘도 제 손으로 밥을 먹을 수 없는 사람들이 많고, 밥을 먹었는데 제 몸에 붙은 배설기관으로 배설할 수 없는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한 맹인 음악가의 노래입니다.
아내가 꿈에 나타날 때도 소리만 듣지 얼굴이 없습니다.
내게 있는 것은 소리뿐입니다.
사람들이 봄을 얘기하지만 내겐 봄이 없습니다.
느껴지는 봄이 있건만 나는 초록색을 모릅니다.
아내와 내 아이들의 얼굴이 보고 싶은데
아이들이 재롱부리며 웃는 얼굴을 나는 본 일이 없습니다.
태양과 푸른 바다와 푸른 하늘을 나는 모릅니다.
이 모든 것 한 번만 보고 다시 눈을 감는다 해도 나는 한이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눈이 없는 사람들에게 가서 물어보십시오. 그들은 "내 눈으로 볼 수만 있다면 나는 무엇이든지 감사하며 살 수 있습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손발이 없는 사람들에게 가서 물어보십시오. 그들은 "내 다리로 걸을 수 있고, 내 손으로 음식을 먹을 수 있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나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말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가서 물어 보십시오. 그러면 그들은 "내 입술로 내 혀로 말하며 살 수 있다면 어떤 고통도 나는 감사하며 살 수 있습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손발은 어떻습니까? 혀는 어떻습니까? 눈은 어떠하십니까? 그렇다면 이렇게 우리에게 있음을 생각한다면 왜 감사할 수 없겠습니까? 생각해 보면 모든 게 다 감사요, 은혜입니다. 어떤 사람은 병원에서 치료받고 퇴원한 후에야 감사 드리지만, 병원에 가지 않고 건강하게 살고 있음에 더욱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큰 사고 중에도 기적적으로 다치지 않음을 감사하지만, 평소에 작은 사고도 없이 지냄을 더욱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불평하고 원망하는 인생일랑 오늘 이 시간 십자가 밑에 다 묻어 버리십시다. 감사하며 살기로 결단하십시다. 감사는 마치 공을 벽에다 치는 것과 같아서 감사하면 반드시 그 감사는 자기에게로 다시 돌아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없는 것만을 골라서 불평할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을 찾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하는 자에게는 상상도 못할 큰 기적이 따라오게 됨을 믿으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작은 것에 감사할 때 큰 기적이 일어납니다
주님은 5000명의 사람을 앞에 두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셨습니다. 여기 '축사'라는 말은 헬라어로 '유카리스트(Eucarist)'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숙고해 보고 헤아려 본 후에 갖게 되는' '깊은 감사'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감사는 간단하게 스쳐 가는 감사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즉 예수님이 여기 축사했다는 말은 보잘것없는 것을 가지고도, 있으나 마나 한 것을 가지고도, 하나님 아버지께 깊은 감사를 드리며 찬양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작은 소년의 초라한 도시락,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얼마나 큰 감사를 드리고 계십니까?『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19절)』하찮은 어린아이의 작은 도시락 하나를 두 손으로 높이 받쳐들고 뜨거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큰 감사를 드리신 것입니다. 이 장면은 너무나 숭고하고 거룩한 광경인 것입니다. 그랬더니 어떤 결과가 나타났습니까? 엄청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장정만 오천 명이 다 배불리 먹고도 열두 광주리나 남게 되었습니다. 이 기적은 감사가 낳은 결과였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또한 우리가 여기서 주목 할 것은 예수님께서 5천명이 먹을 수 있는 많은 떡이 생겨났을 때 감사하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기적이 일어나기 전 먼저 보잘것없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놓고 감사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통하여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기도의 응답과 축복의 결과가 있을 때 그것을 놓고 감사할 것이 아니라, 지금은 비록 매우 작고 보잘것없는 것이지만 그것을 감사할 때 그 마음에 축복의 씨앗이 깃들이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행복해서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며 살기 때문에 행복해진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불평하는 사람은 아무리 많이 가졌어도 행복할 수 없습니다. 감사하는 사람만이 행복을 소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얼어붙은 강에는 배를 띄울 수가 없듯이, 마음이 얼어붙어 감사가 메말라 버린 인생에겐 결코 축복이 다가오지 않는 것입니다.
옛날 어린 시절에는 수도가 없었기 때문에 안마당에 심겨진 펌프로 물을 퍼 올렸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펌프질을 하고자 하면 물이 다 빠져버려서 물이 올라오질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먼저 물 한 바가지를 퍼서 펌프 대가리에다 부어넣고 펌프질을 하게되면 물이 펑펑 쏟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마중 물'이라고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심령 속에 먼저 감사의 물 한 바가지를 부어넣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에 감사가 계속 펑펑 쏟아지도록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내 입 속에 감사의 말 한마디를 먼저 넣으면 연속해서 감사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면에 불평의 쓴 물 한마디를 먼저 넣으면 연속해서 불평의 쓴말들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감사는 선택입니다. 감사를 택하든 불평을 택하든 자유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 역시 자신의 것입니다. 동일한 환경이지만 감사하기로 작정한 사람의 삶은 풍요로워지지만, 불평하기로 작정한 사람은 인생이 피곤해집니다. 감사는 행복해지는 연습이고, 불평은 불행해지는 연습입니다. 사소한 것, 평범한 것, 일상적인 것, 작은 것에도 큰 감사를 드릴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말 못하는 병아리도 물 한 모금 마시고 하늘을 쳐다보며 감사하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얼마나 벅찬 감사를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히 11:1)했습니다. 현재는 오병이어 밖에 없지만, 하나님께서 장차 오천 명을 먹이고도 넉넉하게 남도록 축복 베풀어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미리 바라보고 감사하십시오. 이러한 믿음이, 이러한 감사가 기적을 낳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 가운데 감사가 넘치는 행복한 인생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가진 것을 감사함으로 나눌 때 큰 기적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감사는 나누는 감사였습니다. 감사가 나만의 것으로 독점될 때, 나의 감사는 결국 상대적 불평과 원망의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감사는 모두의 감사가 될 때 참된 감사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감사는 나눔으로 모든 사람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나의 감사가 이웃에게 손해와 원망이 되고 있다면 이는 하나님의 은혜를 도적질하는 악한 행위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받은 은혜와 감사를 서로 나누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당신의 뜻을 행하시고자 했을 때, 곧 굶주린 모든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자 했을 때, 예수님을 도운 사람은 놀랍게도 한 작은 어린아이였습니다. 그 어린아이가 어떤 동기에서 자신의 도시락을 드렸는지는 성경에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질 않습니다. 그러나 그 어린아이도 자신의 허기진 배를 참고 자신의 도시락을 주님께 드렸음이 틀림없습니다.
이러한 어린아이의 나눔의 정성! 그것은 예수님과 허기진 군중들을 위한 가장 큰 섬김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5개가 5,000개, 50,000개가되는 1,000배 10,000배의 축복으로 나타났습니다. 5천명이 넘는 장정들이 '다 배불리 먹었습니다'(20절). 빌립이 말한 것처럼 조금씩 먹은 것이 아니라(요6:7), 다 배불리 먹고도 열두 광주리나 남았습니다.
내 쓸 것, 내 필요한 것 보다, 먼저 이웃을 생각하고, 주님을 생각하고, 교회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주 앞에 드린다면, 작은아이의 섬김이 놀라운 축복의 결과로 나타났던 것처럼 오늘날도 그와 똑같은 놀라운 축복의 역사가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샤머니즘에는 간절한 기도는 있으나 감사가 없고, 축복은 바라지만 희생과 고난은 회피합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감사의 종교이고, 또한 희생 속에서 기적을 이루어 내는 신앙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라가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어려움 가운데 있습니다. 돌봐야 할 곳, 베풂이 필요한 곳에 손길이 닿질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와 함께, 이웃과 함께 나누는 베풂의 감사가 함께 있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다음 주일은 추수 감사주일입니다. 우리 모두 최선의 감사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감사의 분량만큼 큰 기적이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오늘도 감사는 축복의 씨앗이 됩니다. 감사는 큰 기적의 원동력이 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감사하는 자를 사랑하시고, 크게 축복하시며, 훨씬 더 좋고, 큰 것으로 축복해 주시길 원하십니다. 다같이 따라서 하십시다. "감사는 기적을 일으키는 씨앗"이다. 여러분의 생애에도 감사를 통하여 깜짝 놀랄만한 축복을 경험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마 14:14-21 / 피종진 목사
오병이어의 기적은 예수님께서 베푸신 이적 가운데 4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는 유일한 것으로서, 인간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지극한 사랑을 깨닫게 해줍니다. 아울러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인간의 육신적 궁핍함과 영적 갈급함을 동시에 해결해주실 수 있는 생명의 양식이라는 사실 및 구속주로서 구속의 대상인 인간의 연약함과 필요를 알고 계시며 이를 채워주기를 원하고 계심을 깨닫게 해줍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첫째,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을 때 일어났습니다.
“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이 곳은 빈 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마 14:15) 저녁이 되자 제자들이 날도 저물고 빈 들에서는 먹을 것도 없으니, 무리를 마을로 보내 스스로 먹을 것을 사 먹도록 하자고 예수님께 청했습니다. 여기에 보면 ‘빈 들과 저물었다’는 표현은 절망된 상황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이 함께 하시면 기적이 일어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안에서는 절망이 없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 가난할 때 가난을 보지 말고 부유하신 주님을 바라보고, 병들었을 때 자신의 병을 보지 말고 치유의 주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반드시 기적이 일어납니다.
둘째, 주의 손에 드려졌을 때 일어났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마 14:16)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명하여 무리들을 보낼 필요없이 그들이 직접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에게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다고 보고했습니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어린아이의 작은 도시락 하나에 불과하지만 주의 손에 드려졌을 때 남자만 5천 명(여자와 아이를 포함하면 15,000명 이상)이 배불리 먹고 열두 광주리가 남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드릴 때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십니다. 세월을 아껴(엡 5:16) 주님을 위해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 주님의 축복이 임하셨을 때 일어났습니다.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마 14:19) 예수님은 무리들을 앉도록 하신 후, 오병이어를 가지고 감사기도를 드리셨습니다. 그리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고, 제자들은 다시 무리에게 나누어 주자 모두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만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찰 정도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떡을 먹은 사람은 여자와 아이를 제외하고도 오천 명이나 되었다고 했습니다(마 14:20,21). 히브리서 6장 14절에 보면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예수님 당시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주님의 축복이 임하시면 일어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병이어의 기적은 인간의 상식과 이성을 초월하여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을 때, 주의 손에 드려졌을 때, 주님의 축복이 임하셨을 때 일어났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을 때,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가지고 있는 것을 주님께 드리며, 감사기도를 드림으로 오병이어의 기적이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마 14:13-33 / 유영설 목사
1. 오늘 읽은 본문은 두 개의 본문을 읽었는데 오병이어의 기적이야기와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신 기적이야기입니다. 두 본문을 통해서 제자들의 모습을 관찰하면서 우리 자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여러 병자들을 고치시는 이적을 경험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고도 열 두 광주리가 남는 엄청난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이 광경을 경험한 제자들에게 무슨 믿음의 증거가 더 필요합니까? 더구나 마태복음에서는 무리에게 떡을 나누어 주는 역할을 제자들이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자 제자들이 무리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자신들의 손에서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생생히 경험했습니다. 이런 체험을 했다면 그 사람은 일생동안 충성되고 헌신된 믿음 생활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여러분들은 체험한 은혜가 귀해서 그 능력이 완전해서 일생을 변하지 않고 충성되게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원망과 불평, 미움과 시기질투 등 다양한 방법으로 은혜를 잊어버립니다. 사실 그 체험과 증거는 강력한 믿음의 행위를 보장하는 원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의 모습에서 우리의 모습을 봅니다. 그들이 체험한 기적이 믿음의 증거요, 제자 사명의 원인이라고 한다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라도 처형당해야 옳았을 것입니다.
2. 성경의 저자들의 편집 구조를 보면 출애굽기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망과 불평, 홍해를 건너고 나서 감사와 찬양, 그리고 다시 원망과 불평이 이어지도록 기록했습니다. 마태복음도 오병이어의 기적 다음에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의 기적이야기를 기록했습니다. 주님과 함께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했던 제자들에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그동안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무리와 떨어져 기도하고 계셨고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던 제자들은 바람이 불어 풍랑에 몹시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주님과 함께 있을 때는 기적을 체험하는 자들이었으나 주님과 떨어져 있는 상황에서는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의 육체와 정신이 급격한 위기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본문에서 “고난을 당한다”는 말의 본래 의미는 고문을 통해서 심문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고난은 예수님의 제자 됨을 알 수 있는 단서이기도 합니다. 제자들이 만난 풍랑 그리고 풍랑을 대처하지 못해 쩔쩔매는 모습은 은혜를 잃어버린 인간의 모습입니다. 은혜를 체험하고 능력을 체험해도 시험과 환란이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들의 고난이 얼마나 컸는지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성적으로 도저히 용납되지 않는 기이한 현상 앞에서 제자들은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이성의 마비되고 심령의 안정감을 잊어버린 제자들은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이 주님을 유령으로 보았으니 그들 마음에는 주님이 없었습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 은혜 충만한 사람들도 평정심을 잃으면 무엇이 믿음이고, 은혜인지 도무지 분간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3. 예수님은 제자들을 책망하거나 꾸짖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이렇게 위로하시며 제자들 곁으로 다가가셨습니다. 우리는 제자들의 모습을 통해서 인간의 무지함과 연약함 그리고 우둔함을 봅니다. 제자들의 두려움은 베드로의 두려움과 의심으로 바뀝니다. 28절에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를 걸어오라 하소서.” 여기서 ‘만일’이라는 단어는 조건을 제시하는 단어이며 그가 믿음이 없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주님은 그런 베드로에게 오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물 위를 걸어서 예수님에게로 가다가 바람을 보고 빠져갑니다.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베드로가 외쳤습니다. 31절에서 “예수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첫째, 주님은 신속한 구원의 행동을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붙잡으시는 주님의 사랑을 경험하도록 하는 주님의 의도입니다. 부족한 믿음을 가진 자에게 감각적인 터치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둘째, 베드로를 향해 믿음 없는 자라 하지 않으시고 “믿음이 적은 자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의 불완전하고 부족한 믿음을 보시고도 정죄하시지 않고 다만 자기 믿음의 경각심을 갖도록 하셨습니다. 셋째,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의심의 원인을 물으신 것이 아니라 “무슨 목적으로, 무엇을 위하여”(to what end) 의심했는지를 물으셨습니다.
4. 예수님의 제자를 비롯한 우리 인생들은 주님을 떠나면 문제가 생기고 방황합니다. 믿음도 잃어버리고 은혜도 쏟아버립니다. 이는 연약하고 무지한 인생들이 많이 경험하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탓하시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찾아오셔서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라고 위로하시고 용기를 주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 곁에서 믿음을 회복하도록 도우셨습니다. 비록 제자들은 의심을 해도 주님은 접촉하는 사랑으로 일으키시며 제자의 자리에 서게 하시고 성숙하게 하십니다. 주님은 넘어진 자가 일으켜 세워지는 과정을 통해 주님에 대한 믿음과 은혜를 새롭게 하시고 간증하게 하십니다.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께 절하며 이르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33절)라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끝까지 참으시고 찾아오시는 이 귀한 사랑과 배려를 통해서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다시 한 번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들도 어려움과 고통 가운데 있을 때 찾아오셔서 내 손을 잡으시는 주님의 접촉하는 사랑을 다시 경험하면서 주님을 향해서 큰 믿음의 고백을 하는 훌륭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너희가 주라
마 14:13-21 / 박조준 목사
예수님께서 그가 자라나신 고향에서 복음을 전하시다가 배척을 받으신 후 제자 12인을 불러서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과 귀신을 쫓아내는 초자연적인 능력까지 부여하여서 각지로 파송 하였습 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나가서 그들의 사명대로 복음을 전파하고 권능을 행사해서 많은 성과를 거 두고 일제히 돌아 왔습니다. 그들의 보고는 매우 좋았습니다. 승리에 찬 보고였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마음을 흐뭇하게 하는 보고가 있을 때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의 마음을 침울케 하 는 소식이 들려 왔습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선구자요, 그 당대의 의인이던 세 례 요한이 헤롯왕의 칼에 목이 잘리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비통한 소식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그 시대의 악함과 악한 세대에서 신음하는 백성들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시 대에 예수를 따르는 사람의 특수한 사명이 무엇인 것을 가르 치시기 위하여 제자들만을 다리시고 한적한 곳 벳새다로 가셨습니다. 그 동안 무리들은 예수님 과 그의 제자들이 벳세다로 가시는 줄 벌써 알고, 모든 고을로부터 걸어와서 예수님의 일행보다 먼저 벳세다로 갔습니다. 예수님은 이 큰 무리를 보시고 목자 없는 양처럼 여겨서 불쌍히 보셨 습니다. 그가 한적한 곳을 찾았는데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고 해서 무리를 향하여 노여워 하시거 나 귀찮게 생각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몰려온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셨습니다. 아마 이때 예수님의 얼굴을 자세히 바라 본 사람이 있었다면 분명히 그의 눈에 고인 눈물을 보았으리 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이 무리를 보시고 그 당대의 사회적인 형편을 생각하였을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정 치나 경제계는 그만 두고라도 민족의 양심이 되고 지표가 되어야 할 종교지도자들이 거의가 형 식주의자가 되어서 밖으로는 경건한 척 하면서도 속으로는 불의와 세속적인 권력과 짝하여 하등 의 책망도 충고도 항거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이와 같은 종교 지도자들에게 어떤 기대를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그때 한 사람이 있었는데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그는 당 대의 죄를 책망하고 그 비행을 충고했습니다. 그러나 권력자에 의해서 그는 무참히도 희생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정치 지도자를 신임하지 못하고 종교 지도자에게 기대할 수 없이 되니까 자 연히 민중은 문자 그대로 목자 없는 양처럼 이리 몰리고 저리로 몰렸습니다. 벳새다 들판에 모 여든 사람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물질에 대해서, 사람에 대해서 더구나 지도자에 대해서 실망하고 사상적인 지표가 없이, 신앙적인 희망과 방향이 없이, 생생한 삶의 의욕이 없이 방황하는 무리를 불쌍히 보셨습 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을 위하여 오신 예수님께서 자기의 쉬실 곳과 제자들과 조용히 이야기할 곳에 사람들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다고 해서 노하실 까닭이 없었습니다. 이 무리들은 정말 불쌍하였습니다. 본문 35-36절을 보세요. 때가 저물어 가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여짜오되 이곳은 빈 들이 요 때도 저물어 가니 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먹게 하옵소서 제자들이 이런 제의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마을로 가서 각각 자기의 문제를 가지고 해결할 수 있 는 형편도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은 미처 그것까지는 생각지 못했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제자 들을 향하여, 너희가 주라 말씀하셨습니다. 자, 그러니 제자들에게는 또 하나의 걱정이 생겼습 니다. 그때 돈 200데나리온 어치 빵을 사면 한 사람에게 한 개 씩이나 돌아갈까요? 제자들이 머 리는 계산이 빨랐습니다. 빌립은 수학적이며 사무적이었던 모양입니다. 이런 사람은 사무적으로는 실수가 적은 반면에 신앙적인 모험심은 빈약합니다. 때문에 이런 사람에겐 감격이란 거의 없습니다. 왜 그는 500 데 나리온의 떡이면 각 사람에게 만족하겠습니다 하지 못했을까? 이성에만 사는 사람은 언제나 부 족에 삽니다. 제자들은 경제적인 숫자의 계산 이상의 하나님의 축복과 능력을 미처 생각지 못했 습니다. 과연 제자들의 계산대로 200 데나리온의 빵을 사면 이 무리의 배고픈 것을 해결할 수 있었을까요? 요한복음에는 분명히 그것으로 부족하였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분명히 기억하세요. 문제의 해결은 경제만으로는 안됩니다. 아직 어떤 사람은 모든 문제의 해결이 경제에 있는 줄 착각하고 있습니다. 좀 심하게 말하면 경제 성장이 문제 해결의 열쇠로 믿는 것은 공산주의자들의 주장입니다. 그러나 모든 문제가 즉, 영혼을 소유한 인간에 관한 문제라면 그 어떤 것이던 간에 경제만으로 해결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잃어버린 인간의 머리와 경제 계획만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인간의 제한성과 인간의 무능 을 모르는 어리석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여러분! 금년 1년 동안 우리가 살아온 것이 여러분이 번 돈만 가지고 살아 왔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큰 오해입니다. 보이지 아니하는, 우리가 수로 계산할 수 없는 하나님의 축복이 얼마나 컸다고 하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벳새다 들에 모인 무리의 문제를 해결하였 습니까? 거기에 안드레가 있었습니다. 안드레는 빌립과 대조적입니다. 빌립은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고 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안드레는 비수학적이며, 안될 줄 알면서도 자 기가 할 수 있는 것 다 하고 그 다음은 주님에 맡긴 사람입니다. 한 소년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 문제를 해결하였습니다. 예수님께 헌신한 사람은 그의 자격 유무를 막론하고 큰 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누구인지 자세히는 모르나 기쁜 마음으로 남을 위하여 제공한 적은 정성 때문이었습 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어떤 소년이 자기가 먹으려고 집에서 가지고 왔던 보리떡 다섯 개와 생 선 두 마리를 주님께 온전히 드렸습니다. 많은 사람을 생각하면 아무 것도 아닌 비록 작지만 그 것을 기쁜 마음으로 드릴 때 그것으로 큰 이적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당면한 모든 문제의 해결은 언제나 많은 물질이나 힘센 권력이나, 높은 지식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적은 것이지마는 기쁨으로 사심 없이 온전히 바치는 그것이 언제나 문제 해결의 기초가 되는 것입니 다. 그러므로 문제의 해결은 요사이 흔히 하는 말대로 물량의 문제가 아니라 정성의 문제이고 신앙의 문제입니다. 한 나라 세계를 움직이고 옳게 개혁하고 바로 만드는 모든 운동도 결국 많은 사람이 아닌 한 사람이 먼저 깨닫고, 시작하고, 그를 따르고, 같이 움직일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미국이 그 렇게 이루어졌고, 영국이 그랬고, 2차 대전 후의 독일이 그랬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 예수님 께 인도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그를 통해 어떤 역사가 일어날지 모릅니다. 독일의 한 나이 많은 교장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침에 교실에 들어가면 언제나 모자를 벗고 예의를 갖추어 학생 들에게 절을 했습니다. 어떤 이가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 대답이 이 소년들 가운데 장차 어 떤 사람이 날지 알 수 있겠어요? 하고 오히려 반문했습니다.
그의 말대로 그들 가운데 하나가 마틴 루터였습니다. 우리는 흔히 이 사회가 큰 일 났다고 모두 걱정합니다. 부정과 부패, 그리고 불신의 풍조가 날로 더해간다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이것을 나 혼자서야 어떻게 하나? 우리 몇 사람이 어떻게 할꼬? 그래서 잘못된 것을 보긴 보면서도, 안된 줄 알긴 알면서도, 이러다가는 큰 일 나겠다고 장래를 염려하면서도 할 수 없다고 그날그날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5천 명을 먹인 것이 빵을 많이 사다가 나눠주어서가 아닙니다. 한 사람이 자기의 것을 주님께 드림으로 큰 이적이 생겼습니다. 오늘도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이 어려운 나라의 형편을 먼저 깨닫고, 자기부터 먼저 옳은 일을 하고 그가 있는 곳에서 악과 싸워 나간다면 이 위대한 이적이 오늘 20세기 우리 나라에도 나타날 줄을 믿습니다. 어떤 이의 말이 아무리 한 개인이라도 그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의를 위하여 싸울 때에는 온 우주가 그의 배후에서 그를 후원하고 있다 고 하였습니다. 아무리 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자기가 전적으로 진리를 위해서, 겨레를 중심해서, 의를 위해서 자기의 있는 것을 바치고 나선 다면 하나님께서도 그 사람을 축복해서 그를 통해 위대한 역사를 이루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바 알 선지나 우상 숭배자보다 수가 많아서 승리한 것이 아닙니다. 참 신 하나님 편에 서서 온전히 헌신할 때 450명의 바알 선지자를 이긴 것입니다. 둘째는,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을 드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슨 특별한 것을 우리에게 요구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우리에게 있는 것, 내가 할 수 있는 것으로 하기를 요구하십니다. 내 게 있는 시간, 지식, 물질, 재간, 지위, ... 무엇이든지 있는 그대로 바치기를 원하십니다. 내 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하시기를 바라십니다. 출애굽기를 읽어보면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고 있는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모세에게 애굽 땅에서 고생하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하여 약속의 땅에 가게 하라 고 위대한 사명을 맡겼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모세는 우수하고 유능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40살 나는 청년의 때 애굽 궁전에서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있으면서 자신은 육신적으로는 호화 스럽고 안일한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이스라엘의 피를 타고난 사람이란 것을 알고 자기 동족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종살이하고 있는 것을 보고 많은 고민을 하였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 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여 애굽의 보 좌를 초개같이 여기고 이스라엘 민족 해방을 위해 결단하고 나선 믿음의 사람이요 애국의 사람 이었습니다. 그러나 미디안에서 40년 지나는 동안에 나이도 나이려니와 자신의 무능함을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부르심에도 주저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사양하였습니다. 주 여 보낼만한 사람을 보내십시오. 하나님은 모세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지팡이, 양이나 몰고 다니는 지팡이였습니다. 이제 가라,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모 세의 손에는 지팡이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할 때 미디안에서 양 무리나 인도 하던 목자의 지팡이가 이스라엘 60만을 인도하는 지팡이가 되었고, 홍해를 향해 이 지팡이를 내 밀 때 홍해를 육지같이 건널 수 있었고, 반석을 칠 때 샘물이 솟은 능력의 지팡이가 된 것입니 다. 모세의 지팡이가 능력이 있어서 그랬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의 손에 맡길 때 능력의 지팡이가 된 것입니다. 내게 있는 것을 하나님은 요구하십니다. 내게 있는 것이 보잘것없지만 하나님께 드리기만 하면 이적이 나타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대로를 예수 그리스도의 봉 사의 제단에 바치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가지고 그리고 우리를 통해서 어떤 이적을 행하실는 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닙니다. 있는 그대로 드리면 주님 뜻대로 요긴하게 쓰십니다. 그리스도의 수중에는 적은 것도 많은 것이 됩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주님께서 하늘을 우러러 축복하시고 100명씩 혹은 50명씩 앉은 사람들에게 질서 있게 나눠주시니 부녀자 외에도 5천명이 배불리 먹었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더구나 모든 문제 해결의 마지막 열 쇠는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사람은 머리를 써야 하며, 물샐틈없는 계획 과 강력한 추진을 꾀해야 하며, 어떤 경우에라도 지혜의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모든 일 의 마지막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 합니다.사람들이 하는 일이 왜 잘못됩니까? 일을 계획할 때 에는 하나님의 축복을 예산에 넣지 않고, 성공했을 때에는 하나님의 축복을 기억하지 않기 때문 입니다. 여러분은 금년 계획에 하나님의 축복과 허락을 계산했었습니까? 잘 되었으면 하나님의 축복인 것을 기억하고 감사하십니까? 더구나 다 배불리 먹고 부스러기를 모으니 열 두 바구니에 찼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축복 으로 받은 은사를 나눠줄 수록 늘어나는 것을 가르칩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를 나 누지 않았으면 그대로 있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주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누어주므로 다 배불리 먹고 또 남은 것도 풍부하였습니다. 신령한 양식과 은사도 나눠줄수록 풍부해지는 것입 니다. 남을 위해 주는 사람은 다른 사람도 기쁘고 자신도 만족할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 새로운 신령한 양식과 은사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만 위해 사는 사람은 이해가 저무는 오늘 에도 마음에는 불평, 불만 그리고 곤궁을 느낄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안겨 주리라 ( 눅 6:38). 사랑하는 여러분! 이 해도 저물어 갑니다. 이 사회는 벳새다 들과 같고, 국민은 그때에 모여 든 무리와도 같이 굶주려 있습니다. 경제적인 궁핍만이 아닙니다. 사랑에 굶주려 있습니다. 희 망을 찾지 못해 허덕이고 있습니다.주님은 우리를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주라 굶주리는 사람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사랑에 메마른 사람들에게 너희가 사랑을 주라 절망의 심연에 서 허덕이는 겨레에게 너희가 소망을 주라 알렉산드리아 호 배를 타고 이탈리아로 가던 276명의 사람들이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나 다 죽게 되어 절망 상태에 있을 때 사도 바울이 죄수의 몸 으로 함께 가다가 이런 위기 앞에서 모든 사람에게 안심과 소망을 주었습니다. 내가 섬기는 하 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셨는데 나는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14일간이나 먹지 못한 사람 들이 안심하고 먹었고 바울의 말대로 모두가 구원을 받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굶주린 이 겨레에게 무엇을 줄 수 있습니까?
오천명을 먹이는 사람(1)
사람마다 은사와 성격이 다르듯 설교를 하는 설교자의 설교도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설교하고 또 어떤 사람은 저렇게 설교를 합니다. 때문에 사람마다 설교를 준비하고 하는 스타일이 다 다릅니다.
제 설교 스타일을 말씀드리자면 저는 그날 본문의 말씀을 읽고 그 말씀 속에 숨어 있는 메시지 하나를 찾아냅니다. 보통 말씀 속에는 여러 가지 메시지가 들어 있는 경우가 많지만 저는 대개 그 중에 하나만 찾아냅니다. 짧은 설교 시간에 여러 가지 주제를 동시에 다 다루는 것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저는 주로 설교를 통하여 한 가지 주제만 집중해서 다루려고 노력합니다.
그런데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오늘만큼은 그 스타일을 좀 바꾸고 싶었습니다.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말씀이며 이 본문의 말씀으로 설교도 참 여러 번 하였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어서 또 다시 설교를 위하여 말씀을 읽고 묵상 하니 새롭게 느껴지고 깨달아지는 것이 많았습니다.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저는 이 본문의 말씀을 가지고 여러 번 설교를 했었습니다. 그와 같은 제 본문의 설교 중 가장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는 설교는 오늘 제목으로 잡은 '오 천명을 먹이는 사람'이라는 제목의 설교였습니다. 오늘도 저는 그 주제를 다시 한번 다루려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은 본문 말씀 하나 하나를 읽으며 그 말씀 속에서 찾아 낼 수 있는 다양한 주제와 교훈을 다루어 보려고 합니다.
그 동안 제 설교는 설교 시간에 거의 성경을 보지 않았습니다. 설교 전에 성경을 읽고 설교 중에는 성경을 덮습니다. 그리고 설교만 듣습니다. 설교를 들은 후 다시 본문 성경을 읽으면 성경이 좀더 새롭게 이해됩니다. 언제나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고 그렇게 하려고 의도하고 노력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제 설교의 스타일입니다. 앞으로도 주로 제 설교는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은 성경을 덮지 마시고 성경을 펴놓고 한 절 한 절 강해식으로 설교를 해 보려고 합니다.
13절.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들에 가시니 무리가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따라 간지라.
1) 많은 사람들이 (여자와 어린아이를 빼고도 오 천명이나 되었던) 예수님을 따라 빈 들까지 따라왔습니다. 예수님은 인위적으로 저들을 불러모으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저들을 떠나 빈들로 가셨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빈들까지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예수님은 일부러 저들을 불러 모으시지도 않으셨지만 구태여 따라 오는 사람을 흩어 보내지도 않으셨습니다.
교회 중에는 꿩 잡는게 매라고 생각하는 교회가 더러 있는 것 같습니다. 무조건 교인들의 수를 늘리기 위하여 인위적으로, 의도적으로 노력하며 뿐만 아니라 그와 같이해서 모여진 교인들의 수를 자랑하고 그것으로 힘을 쓰려고 하는 교회가 있습니다. 예수님과는 전혀 다른 생각과 스타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이 성장 위주의 교회들에게 식상한 사람들 중에 무조건 교회의 부흥과 성장에 대하여 부정적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와 같은 사람들은 무조건 '작은 교회가 아름답다'고 주장하며 무조건 수적으로 부흥하고 성장하는 교회를 '수평이동' 운운하며 비판하고 부정적으로 봅니다. 그러나 그것도 역시 바른 생각과 자세는 아닙니다. 예수님은 인위적으로 사람을 끌어 모으려고 하지도 않으셨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욕심 없으심을 과시하기 위하여 저들을 흩어 보내지도 않으셨습니다.
저는 예수님에게서 배워지는 그와 같은 모습과 자세로 높은 뜻 숭의교회를 목회 하겠습니다. 교회와 자신의 목회적 능력을 과시하기 위하여 무조건 큰 교회를 만들려고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나름대로의 생각과 뜻이 있어서 남산까지 찾아오신 교인들을 무조건 흩어 보내지 않겠습니다.
2) 당시 예수님을 빈들까지 따라갔던 사람들은 대부분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진리의 말씀 때문이었다기 보다는 병자를 불쌍히 여기시고 기적적으로 고쳐주시는 예수님의 능력 때문에 예수님을 따랐던 것 같습니다. 저는 조금 억지 같고 역설적인 것 같지만 그런 면에서 볼 때 저들의 가난함과 병약함은 오히려 축복이었다고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가난과 약함 때문에 예수님을 빈들까지 좇아 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대개 좀 부해지고 강해지게 되면 하나님에 대하여 점점 무관심해 지게 됩니다. 빈들까지라도 예수님을 좇아가겠다는 열망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부와 강함은 오히려 화가 되는 수가 많습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좀 가난하고 병약하게 사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을 빈들까지 따르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일부러 가난하고 병약한 사람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부해지고 건강해져도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되는 것이 더 좋습니다. 가난하고 약할 때는 부하고 건강한 것이 제일 인 것 같지만 막상 건강해 지고 부해지게 되면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와 같은 세상적인 것으로는 자신의 삶을 채울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와 같은 한계를 깨닫게 되면 예수님을 따르는 이유와 목적이 달라지게 됩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기적적인 능력이 아니라 그보다 더 중요한 말씀입니다. 이익에 주리고 목마른 심정으로 예수님을 좇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의에 주리고 목마른 심정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되게 됩니다. 저는 사랑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의에 주리고 목말라서 예수님을 빈들까지 좇아가는 그런 건강한 사람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14절.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자를 고쳐 주시니라.
저는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그 어느 말씀보다도 이 14절의 말씀에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빈들까지 예수님을 따라온 사람들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예수님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심정이 아닌 그보다 낮은 수준의 욕심 때문에 예수님을 따라온 저들을 유치하게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떤 면에서 볼 때 저들은 유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저들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저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저들은 나중에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려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을 저들을 피하여 가버나움으로 가십니다. 저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려고 하는 의도가 너무나 유치하고 옳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복음서는 저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려고 하였던 이유가 말씀 때문이 아니라 보리떡을 먹고 배불렀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저들은 유치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저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저들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제가 요즈음 설교 중에 우리 교회 인터넷 게시판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하는 것 같습니다. 그만큼 제가 인터넷 게시판을 중요시 여기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제가 인터넷 게시판을 중히 여기는 것은 그것을 통하여 일방적인 모노로그가 아닌 다이어로그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방적인 모노고그가 아닌 다이어로그를 위하여 참으로 힘듦에도 불구하고 게시판에 익명을 보장해 놓았습니다. 그와 같은 노력 때문에 저는 게시판을 통하여 많은 것을 배웁니다. 그러나 그 배움의 대가는 참 큽니다. 많은 인내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게시판에 참 좋은 글들이 많이 올라옵니다. 그러나 모든 글이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전혀 제 주관적인 판단이지만, 제가 미숙하기 때문에 좋은 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도 많이 있지만 게시판의 글들 중에는 무례하고 폭력적이며 논리적으로 아주 미숙한 글들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제가 개인적으로 가장 싫어하고 힘들어하는 글은 빈정거리는 글입니다. 사람의 인격을 무시하고 함부로 쓰는 글입니다. 물론 저 자신과 제가 쓰는 글도 그와 같은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와 같은 글들을 읽을 때 참 힘들고 어렵지만, 그와 같은 글을 통하여 크게 배우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목회 해야만 하는 사람들이 겉으로 보는 것과 같이 다 예의 있고 반듯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얼굴을 대면하여 보고 이야기를 하면 점잖고 예의 있는 것 같아 보여도 얼굴만 가리어지면 무례하고 야비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사람을 게시판에서 익명으로 만나면 개인적으로 화가 납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일은 참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다이어로그를 위하여 최대한 게시판에 자유를 보장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가 지금 하고 있는 전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앞에 서면 저는 제가 야비하게 생각하는 사람보다 더 야비하고, 제가 유치하게 생각하는 사람보다 더 유치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을 통하여 새삼스럽게 만나는 예수님은 그와 같은 저를 유치하게 보시고 상대를 안 하시는 예수님이 아니라 불쌍히 여기시고 최선을 다하여 고쳐 주시려고 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이 불쌍히 여기신 것은 거지를 불쌍히 여기시는 것과 같으신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자녀를 불쌍히 여기시는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높은 뜻 숭의교회를 목회하는 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이 사랑에서 말미암는 불쌍히 여김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특히 교회를 개혁하고 건강한 교회 운동을 일으켜 보려고 하는 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이것이라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습니다. 옳고 그름을 떠나 제가 생각 할 때 삐뚤어지고 모나고 성숙하지 못하고 무례한 사람들까지도 함부로 포기하지 말고 예수님처럼 사랑하며 저들을 끝가지 고쳐주려고 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여러분 이것을 위하여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그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목회하는 목회자가 될 수 있기를 위하여 진심으로 기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기도는 저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에게도 필요합니다. 여러분들에게도 여러분들을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눈으로 볼 때 병들고 모나고 삐뚤어져서 매사에 여러분들을 공격하고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 있으실 것입니다. 유치하고 야비한 사람들이 있으실 것입니다.
우리에게서 있어서 가장 소중한 관계를 병들게 하는 사람들이 있으실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병들게 하는 부모가 있고 자식이 있으실 것입니다. 소중한 며느리와 시어머니의 관계를 병들게 하는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있으실 것입니다. 소중한 친구의 관계를 병들게 하는 친구가 있으실 것이며, 소중한 성도의 교제를 병들게 하는 성도들도 있으실 것입니다.
저들이 우리를 힘들게 할 때마다 우리도 그만큼 아니 이자를 붙여 저를 공격하는 우리가 아닙니다. 상처를 받으면 나도 저에게 상처를 주고, 공격을 받으면 나도 저를 공격하고 하면서 점점 더 깊은 상처를 주고받으며 살아가는 우리들이 아닙니까?
다행히 조금 인격적으로 성숙해지면 맞상대하지 아니하고 참고 인내하는 것이 고작 아니겠습니까? 참기는 하지만 속으로는 저들을 무시하며 한 걸음 더 나아가 경멸하며 사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이 아닙니까? 맞상대를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무식하게 상처를 주면서 상대를 하는 것보다 더 큰 상처를 상대방에게 주기도 하지 않습니까? 인격적인 모멸감을 주면서 말입니다. 쉽게 포기해 버리고, 쉽게 무시해 버리고 혼자 거룩한 척, 혼자 의로운 척, 혼자 대단한 척 사람을 깔보며 살아가는 우리들이 아닙니까?
오늘 예수님의 오병이어의 기적을 다시 읽으며 새삼스럽게 받은 은혜는 사람을 사랑으로 불쌍히 여기시고 고쳐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이었습니다. 사실 당시 예수님을 빈들까지 따라 간 사람들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심정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따라간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저들의 대부분은 병자들이었습니다. 건강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부유한 사람들도 아니었습니다. 고상한 사람들도 아니었습니다. 성숙한 사람들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과는 이런 저런 면에서 다 수준이 맞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저들을 우습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유치하게 보지 않으셨습니까? 함부로 무시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저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사랑하는 자녀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저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그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여러분 오늘 전심을 다하여 하나님께 그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오늘 이 설교를 정리하면서 여러분들과 함께 꼭 읽고 싶은 성경이 생각났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잘 아는 고린도전서 13장의 말씀입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함께 읽으십시다. 그리고 예수님처럼 사랑을 사랑하며 불쌍히 여길 줄 아는 사람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오천명을 먹이는 사람(1)
마 14:13-21 / 김동호목사
사람마다 은사와 성격이 다르듯 설교를 하는 설교자의 설교도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설교하고 또 어떤 사람은 저렇게 설교를 합니다. 때문에 사람마다 설교를 준비하고 하는 스타일이 다 다릅니다.
제 설교 스타일을 말씀드리자면 저는 그날 본문의 말씀을 읽고 그 말씀 속에 숨어 있는 메시지 하나를 찾아냅니다. 보통 말씀 속에는 여러 가지 메시지가 들어 있는 경우가 많지만 저는 대개 그 중에 하나만 찾아냅니다. 짧은 설교 시간에 여러 가지 주제를 동시에 다 다루는 것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저는 주로 설교를 통하여 한 가지 주제만 집중해서 다루려고 노력합니다.
그런데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오늘만큼은 그 스타일을 좀 바꾸고 싶었습니다.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말씀이며 이 본문의 말씀으로 설교도 참 여러 번 하였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어서 또 다시 설교를 위하여 말씀을 읽고 묵상 하니 새롭게 느껴지고 깨달아지는 것이 많았습니다.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저는 이 본문의 말씀을 가지고 여러 번 설교를 했었습니다. 그와 같은 제 본문의 설교 중 가장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는 설교는 오늘 제목으로 잡은 '오 천명을 먹이는 사람'이라는 제목의 설교였습니다. 오늘도 저는 그 주제를 다시 한번 다루려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은 본문 말씀 하나 하나를 읽으며 그 말씀 속에서 찾아 낼 수 있는 다양한 주제와 교훈을 다루어 보려고 합니다.
그 동안 제 설교는 설교 시간에 거의 성경을 보지 않았습니다. 설교 전에 성경을 읽고 설교 중에는 성경을 덮습니다. 그리고 설교만 듣습니다. 설교를 들은 후 다시 본문 성경을 읽으면 성경이 좀더 새롭게 이해됩니다. 언제나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고 그렇게 하려고 의도하고 노력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제 설교의 스타일입니다. 앞으로도 주로 제 설교는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은 성경을 덮지 마시고 성경을 펴놓고 한 절 한 절 강해식으로 설교를 해 보려고 합니다.
13절.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들에 가시니 무리가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따라 간지라.
1) 많은 사람들이 (여자와 어린아이를 빼고도 오 천명이나 되었던) 예수님을 따라 빈 들까지 따라왔습니다. 예수님은 인위적으로 저들을 불러모으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저들을 떠나 빈들로 가셨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빈들까지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예수님은 일부러 저들을 불러 모으시지도 않으셨지만 구태여 따라 오는 사람을 흩어 보내지도 않으셨습니다.
교회 중에는 꿩 잡는게 매라고 생각하는 교회가 더러 있는 것 같습니다. 무조건 교인들의 수를 늘리기 위하여 인위적으로, 의도적으로 노력하며 뿐만 아니라 그와 같이해서 모여진 교인들의 수를 자랑하고 그것으로 힘을 쓰려고 하는 교회가 있습니다. 예수님과는 전혀 다른 생각과 스타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이 성장 위주의 교회들에게 식상한 사람들 중에 무조건 교회의 부흥과 성장에 대하여 부정적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와 같은 사람들은 무조건 '작은 교회가 아름답다'고 주장하며 무조건 수적으로 부흥하고 성장하는 교회를 '수평이동' 운운하며 비판하고 부정적으로 봅니다. 그러나 그것도 역시 바른 생각과 자세는 아닙니다. 예수님은 인위적으로 사람을 끌어 모으려고 하지도 않으셨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욕심 없으심을 과시하기 위하여 저들을 흩어 보내지도 않으셨습니다.
저는 예수님에게서 배워지는 그와 같은 모습과 자세로 높은 뜻 숭의교회를 목회 하겠습니다. 교회와 자신의 목회적 능력을 과시하기 위하여 무조건 큰 교회를 만들려고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나름대로의 생각과 뜻이 있어서 남산까지 찾아오신 교인들을 무조건 흩어 보내지 않겠습니다.
2) 당시 예수님을 빈들까지 따라갔던 사람들은 대부분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진리의 말씀 때문이었다기 보다는 병자를 불쌍히 여기시고 기적적으로 고쳐주시는 예수님의 능력 때문에 예수님을 따랐던 것 같습니다. 저는 조금 억지 같고 역설적인 것 같지만 그런 면에서 볼 때 저들의 가난함과 병약함은 오히려 축복이었다고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가난과 약함 때문에 예수님을 빈들까지 좇아 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대개 좀 부해지고 강해지게 되면 하나님에 대하여 점점 무관심해 지게 됩니다. 빈들까지라도 예수님을 좇아가겠다는 열망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부와 강함은 오히려 화가 되는 수가 많습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좀 가난하고 병약하게 사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을 빈들까지 따르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일부러 가난하고 병약한 사람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부해지고 건강해져도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되는 것이 더 좋습니다. 가난하고 약할 때는 부하고 건강한 것이 제일 인 것 같지만 막상 건강해 지고 부해지게 되면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와 같은 세상적인 것으로는 자신의 삶을 채울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와 같은 한계를 깨닫게 되면 예수님을 따르는 이유와 목적이 달라지게 됩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기적적인 능력이 아니라 그보다 더 중요한 말씀입니다. 이익에 주리고 목마른 심정으로 예수님을 좇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의에 주리고 목마른 심정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되게 됩니다. 저는 사랑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의에 주리고 목말라서 예수님을 빈들까지 좇아가는 그런 건강한 사람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14절.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자를 고쳐 주시니라.
저는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그 어느 말씀보다도 이 14절의 말씀에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빈들까지 예수님을 따라온 사람들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예수님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심정이 아닌 그보다 낮은 수준의 욕심 때문에 예수님을 따라온 저들을 유치하게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떤 면에서 볼 때 저들은 유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저들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저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저들은 나중에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려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을 저들을 피하여 가버나움으로 가십니다. 저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려고 하는 의도가 너무나 유치하고 옳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복음서는 저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려고 하였던 이유가 말씀 때문이 아니라 보리떡을 먹고 배불렀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저들은 유치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저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저들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제가 요즈음 설교 중에 우리 교회 인터넷 게시판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하는 것 같습니다. 그만큼 제가 인터넷 게시판을 중요시 여기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제가 인터넷 게시판을 중히 여기는 것은 그것을 통하여 일방적인 모노로그가 아닌 다이어로그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방적인 모노고그가 아닌 다이어로그를 위하여 참으로 힘듦에도 불구하고 게시판에 익명을 보장해 놓았습니다. 그와 같은 노력 때문에 저는 게시판을 통하여 많은 것을 배웁니다. 그러나 그 배움의 대가는 참 큽니다. 많은 인내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게시판에 참 좋은 글들이 많이 올라옵니다. 그러나 모든 글이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전혀 제 주관적인 판단이지만, 제가 미숙하기 때문에 좋은 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도 많이 있지만 게시판의 글들 중에는 무례하고 폭력적이며 논리적으로 아주 미숙한 글들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제가 개인적으로 가장 싫어하고 힘들어하는 글은 빈정거리는 글입니다. 사람의 인격을 무시하고 함부로 쓰는 글입니다. 물론 저 자신과 제가 쓰는 글도 그와 같은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와 같은 글들을 읽을 때 참 힘들고 어렵지만, 그와 같은 글을 통하여 크게 배우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목회 해야만 하는 사람들이 겉으로 보는 것과 같이 다 예의 있고 반듯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얼굴을 대면하여 보고 이야기를 하면 점잖고 예의 있는 것 같아 보여도 얼굴만 가리어지면 무례하고 야비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사람을 게시판에서 익명으로 만나면 개인적으로 화가 납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일은 참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다이어로그를 위하여 최대한 게시판에 자유를 보장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가 지금 하고 있는 전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앞에 서면 저는 제가 야비하게 생각하는 사람보다 더 야비하고, 제가 유치하게 생각하는 사람보다 더 유치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을 통하여 새삼스럽게 만나는 예수님은 그와 같은 저를 유치하게 보시고 상대를 안 하시는 예수님이 아니라 불쌍히 여기시고 최선을 다하여 고쳐 주시려고 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이 불쌍히 여기신 것은 거지를 불쌍히 여기시는 것과 같으신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자녀를 불쌍히 여기시는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높은 뜻 숭의교회를 목회하는 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이 사랑에서 말미암는 불쌍히 여김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특히 교회를 개혁하고 건강한 교회 운동을 일으켜 보려고 하는 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이것이라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습니다. 옳고 그름을 떠나 제가 생각 할 때 삐뚤어지고 모나고 성숙하지 못하고 무례한 사람들까지도 함부로 포기하지 말고 예수님처럼 사랑하며 저들을 끝가지 고쳐주려고 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여러분 이것을 위하여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그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목회하는 목회자가 될 수 있기를 위하여 진심으로 기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기도는 저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에게도 필요합니다. 여러분들에게도 여러분들을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눈으로 볼 때 병들고 모나고 삐뚤어져서 매사에 여러분들을 공격하고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 있으실 것입니다. 유치하고 야비한 사람들이 있으실 것입니다.
우리에게서 있어서 가장 소중한 관계를 병들게 하는 사람들이 있으실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병들게 하는 부모가 있고 자식이 있으실 것입니다. 소중한 며느리와 시어머니의 관계를 병들게 하는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있으실 것입니다. 소중한 친구의 관계를 병들게 하는 친구가 있으실 것이며, 소중한 성도의 교제를 병들게 하는 성도들도 있으실 것입니다.
저들이 우리를 힘들게 할 때마다 우리도 그만큼 아니 이자를 붙여 저를 공격하는 우리가 아닙니다. 상처를 받으면 나도 저에게 상처를 주고, 공격을 받으면 나도 저를 공격하고 하면서 점점 더 깊은 상처를 주고받으며 살아가는 우리들이 아닙니까?
다행히 조금 인격적으로 성숙해지면 맞상대하지 아니하고 참고 인내하는 것이 고작 아니겠습니까? 참기는 하지만 속으로는 저들을 무시하며 한 걸음 더 나아가 경멸하며 사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이 아닙니까? 맞상대를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무식하게 상처를 주면서 상대를 하는 것보다 더 큰 상처를 상대방에게 주기도 하지 않습니까? 인격적인 모멸감을 주면서 말입니다. 쉽게 포기해 버리고, 쉽게 무시해 버리고 혼자 거룩한 척, 혼자 의로운 척, 혼자 대단한 척 사람을 깔보며 살아가는 우리들이 아닙니까?
오늘 예수님의 오병이어의 기적을 다시 읽으며 새삼스럽게 받은 은혜는 사람을 사랑으로 불쌍히 여기시고 고쳐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이었습니다. 사실 당시 예수님을 빈들까지 따라 간 사람들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심정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따라간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저들의 대부분은 병자들이었습니다. 건강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부유한 사람들도 아니었습니다. 고상한 사람들도 아니었습니다. 성숙한 사람들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과는 이런 저런 면에서 다 수준이 맞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저들을 우습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유치하게 보지 않으셨습니까? 함부로 무시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저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사랑하는 자녀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저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그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여러분 오늘 전심을 다하여 하나님께 그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오늘 이 설교를 정리하면서 여러분들과 함께 꼭 읽고 싶은 성경이 생각났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잘 아는 고린도전서 13장의 말씀입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함께 읽으십시다. 그리고 예수님처럼 사랑을 사랑하며 불쌍히 여길 줄 아는 사람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오천 명을 먹이는 사람(2)
마 14:13-21 / 김동호 목사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오병이어 기적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제가 개인적으로 너무나 좋아하고 사랑하는 말씀입니다. 저는 이 말씀 속에서 매우 중요한 삶의 철학과 교훈을 얻게 되었으면 제 삶의 분명한 목표를 설정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성경의 그 어느 말씀보다도 저는 이 말씀을 좋아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 중에 제가 가장 좋아하는 말씀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말씀입니다. 광야에서 아무것도 먹지 못한 사람들이 안타까워 이제 그만 저들을 마을로 돌려보내자고 말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두 명도 아니고 여자와 아이를 빼고도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소위 성공했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오천 명분을 혼자 먹는 사람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오천 명을 먹이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오천 명분을 혼자 먹는 사람을 잘 사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하지만 하나님은 오천 명을 먹이는 사람을 잘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잘 아는 오병이어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오천 명을 먹이는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말씀 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살다보면 오천 명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은 고사하고 남에게 도움을 받아야 할 만큼 가난하고 어려울 때를 당할 수 있습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생각해 보면 제 인생의 절반 가까운 때를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고사하고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살아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참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정신적인 도움만이 아닌 물질적인 도움도 참 많이 받으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많은 분들의 도움 중 특히 친척들의 도움이 컸습니다. 저희 친척 중에서 저희 집이 가장 가난하고 어려웠습니다. 저희 친척들은 대부분 부유했습니다. 그런데 저희 친척들은 가난한 저희 집을 깔보지 않았습니다. 물질적으로도 많은 도움을 주었을 뿐 아니라 더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은 저희 식구들을 정말 따뜻하게 가족으로 인정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죽을 때까지 그 은혜를 잊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제 아이들에게 유언으로 남겨 그 은혜를 잊지 않게 하려하고 혹시라도 어려운 일을 당하거든 부모의 빚을 갚는 심정으로 저들을 도우라고 할 것입니다.
부유한 친척들이 가난한 저희들에게 늘 따뜻한 정을 마음과 물질로 언제나 나누었기 때문에 참으로 감사하게도 저에게는 부한 사람들에 대한 시기와 원망과 불평이 없었습니다. 감사한 마음만 있었지 다른 마음은 전혀 없었습니다. 때문에 저는 가난했지만 불행하지 않았습니다. 조금 불편한 것들은 있었지만 저는 그것을 정말 불행이라고 느끼지도 생각지도 않았습니다.
물론 사람을 불행하게 하는 치명적인 가난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다행히도 그와 같은 가난에는 이르지 않았었습니다. 때문에 저는 모든 가난이 다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가난 때문에 불행하기 보다는 상대적인 박탈감 때문에 스스로를 괴롭히며 괜히 있는 자들을 미워하고 시기하는 마음 때문에 더 불행해 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와 같은 원망과 불평 그리고 시기가 없었기 때문에 가난했지만 행복했다고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저는 가난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가난을 무조건 두려워하지는 않지는 않습니다. 가난했기 때문에 불행했다는 기억이 저에게 없기 때문입니다.
부를 자랑할 것도 없고 가난을 부끄러워 할 것도 없습니다. 더욱이 다른 사람들의 부를 시기할 것도 없습니다. 그냥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살면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도바울이 ‘부하면 부 한대로 비천하면 비천 한대로 자족하며 살 수 있다’라고 고백한 삶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가난을 부끄러워 할 필요도 없지만 구태여 가난을 자랑할 것도 없습니다. 부함 자체가 훌륭함이 아니듯 가난 자체도 훌륭함이 아닙니다. 두 종류의 극단이 있습니다. 하나는 부함을 무조건 훌륭한 것으로, 성공으로 여기는 극단이고, 또 다른 극단은 가난함을 무조건 훌륭함과 거룩함으로 여기는 극단입니다. 저는 그 모두가 다 성경적인 생각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와 같은 두 극단은 우리 기독교 안에도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를 믿으면 부자가 되고, 건강해 질뿐만 아니라 세상 적으로도 성공하고 형통한다는 것을 내세우는 극단이고 또 다른 하나는 예수를 잘 믿으려면 가난하게 살아야 하고 특히 목회자들은 꼭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극단입니다. 저는 그 어느 쪽에도 동의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것이 다 성경적인 생각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부함을 자랑하는 것도 인간적이고 가난함을 자랑하는 것도 인간적입니다. 둘 다 다 건강치 못하고 성숙하지 못한 생각들입니다. 저는 훌륭한 삶을 살기 위해 부해지려고도 하지 않겠고 일부러 가난해 지려고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도 그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그것이 성경이 저희들에게 가르쳐 주시는 생각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잘 살기 위하여 부자가 될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돕고 섬기기 위하여, 다시 말해서 오 천 명분을 혼자서 먹기 위하여 부자가 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오천 명을 먹이기 위하여서는 부자가 되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부자를 무조건 죄악시하고 경원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오 천 명분을 혼자서 먹기 위한 부자’와 ‘오 천 명을 먹이기 위한 부자’를 구별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잘 구별하지 못합니다. 구별하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부별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라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는 부자 됨에 대한 소명이 들어 있습니다. 목적이 들어 있습니다. 그와 같은 소명감과 목적을 가졌다면 부자가 되어도 좋다는 인정이 들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공평하신 분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께서 사람과 세상을 공평하게 창조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과 다릅니다. 제가 보기에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이 아니라 불공평하신 분이십니다. 어떤 사람은 부하게 어떤 사람은 가난하게 창조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높게 어떤 사람은 낮게 창조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건강하게 어떤 사람은 약하게 만드셨습니다. 그것은 자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불공평하심에는 의도가 있으십니다. 그것은 ‘흐름’입니다. ‘흐름’은 생명입니다. 물도 흘러야 깨끗해지고, 공기도 흘러야만 깨끗해집니다. 그리고 돈도 사랑도 인정도 흘러야만 세상이 아름다워지고 건강해 집니다. 흐르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불공평입니다. 높고 낮음이 있어야 흐름이 발생하고 강하고 약한 것이 있어야 흐름이 발생합니다. 모든 것이 평평하고 공평하다면 흐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 흐름을 위하여 엄청난 값을 지불하시기도 합니다. 그것이 바로 홍수와 태풍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흐름에는 원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높은데서 낮은 데로, 강한 데서 약한 데로 흐르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생명의 흐름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이 타락하면서부터 그 흐름이 원칙이 깨지게 되었습니다. 타락한 인간의 세상에는 흐름의 역류가 일어납니다.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낮은 데서 높은 곳으로 흐릅니다. 강한 데서 약한 데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약한 데서 강한 데로 흐릅니다. 부한 데서 가난한 데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데서 부한 데로 흐릅니다. 저는 그것을 죽음의 흐름이라고 정의하겠습니다. 천민자본주의에서 그와 같은 죽음의 흐름이 많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을 사람들은 쉽게 ‘빈익빈 부익부’(貧益貧 富益富)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와 같은 흐름의 역류를 막기 위하여 사람들은 공평한 세상을 꿈꿉니다. 가난한 자도 없고 부한 자도 없는, 강한 자도 없고 약한 자도 없는 그런 세상을 꿈꿉니다. 저는 그것이 사회주의자들의 이상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곧 예수님의 가르침, 성경의 가르침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나 제가 아는 바에 의하면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설계하신 세상은 가난한 사람과 부한 사람의 차이가 없는 공평하고 평등한 세상이 아닙니다. 가난 한 사람도 있고 부한 사람도 있는 세상입니다. 불공평한 세상입니다. 다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세상은 ‘바른 흐름’ 다시 말해서 ‘생명의 흐름’이 있는 세상입니다.
저는 저희 친족 간에 바로 그와 같은 건강한 흐름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저희 친척들은 부했고 저희 집은 가난했습니다. 그런데 돈과 정이 부한 친척들 집에서 가난한 저희 집으로 흘렀습니다. 생명의 흐름이 있었습니다. 어떤 집은 부유했고 어떤 집은 가난했습니다. 그러나 그랬기 때문에 저희 집안은 더 좋았습니다. 지금도 저희 집안은 사이가 좋습니다. 저는 세상에서 시누이와 올케 사이가 저희 집 보다 더 좋은 집을 쉽게 보지 못했습니다. 올케인 저희 외숙모는 부자였고 시누이인 저희 어머니는 가난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정상적인 흐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시누이와 올케 사이인 저희 어머니와 외숙모는 80이 넘은 지금까지도 서로 사이가 좋습니다.
부함과 가난함이 없어서 남 줄 것도 없고 남에게 받을 것도 없는 세상은 좀 삭막한 세상이 아닐까요? 부한 사람도 있고 가난한 사람도 있으며, 건강한 사람도 있고 약한 사람도 있지만 부한 사람이 가난한 사람을 섬기고, 건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을 진심으로 섬긴다면 그것이 훨씬 더 살 맛 나는 세상이 아닐까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세상이 아닐까요? 그것이 바로 오늘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라고 말씀하신 말씀의 정신이 아닐까요?
오 천 명분을 혼자서 먹으려고 할 때 하나님의 역사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것을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누려고 할 때 하나님의 역사 즉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저는 그와 같은 기적의 역사가 오늘도 나타난다고 믿습니다.
88년 10월 영락교회에서 협동 목회를 하자고 하여 다시 갔었습니다. 많은 교인들이 제가 다시 영락교회로 돌아온 것을 축하해 주고 기뻐해 주었습니다. 연말연시가 되었을 때 정말 많은 분들이 과일이나 케잌 같은 것들을 선물로 보내주셨습니다. 광처럼 쓰는 방에 그와 같은 선물이 정말 가득하리만큼 많았습니다.
어느 날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내가 걱정을 하였습니다. 아내의 걱정은 아이들에게 귀한 것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권사님 한분이 아이들 주라고 케잌을 가져다 주셨는데 그것을 받는 아이들이 건성으로만 고마워 할 뿐 진심으로 고마워 할 줄을 모르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집에 그와 같은 케잌이 하나 둘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다음 날 하루 종일 그것에 대하여 생각했습니다. ‘귀한 것이 없다?’ ‘귀한 줄을 모른다?’ 그러다가 저는 그것이 가난함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귀한 것이 없어서 귀한 것이 없는 것도 가난이지만 귀한 것이 너무 많아 귀한 것이 없게 되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로 가난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귀한 것이 없어서 가난해 진 것보다 상태가 더 나쁜 가난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가난의 이름을 ‘악성가난’이라고 불렀습니다.
저녁에 돌아와 아이들과 그와 같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를 물었더니 아이들의 대답이 너무 많아서 가난해 지는 것이라면 그것을 없애면 부해지지 않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수학적인 대답이었습니다. 저는 아이들의 대답이 옳다고 생각하고 가게에 가서 은박지 도시락이랑 비닐 주머니를 사다가 집에 있는 모든 것들을 나누었습니다. 정확한 개수를 잊었지만 수십 개의 주머니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그것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다음 날 식사를 하고 아내에게 사과 한 알을 깍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아내가 사과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할 수 없이 가게에 가서 몇 알 사다가 먹었습니다. 그 때 아이가 우리도 이제 부자라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사과도 한 상자 없는데 왜 우리가 부자냐고 물었더니 이제는 우리 집도 사과가 귀해졌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제는 우리 집에도 귀한 것이 생겼으니 우리도 드디어 부자가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에는 악성가난뱅이로 살아가는 많은 부자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그와 같은 사람 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들이 가난을 자랑하거나 훌륭하게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것도 원치 않으십니다. 형편과 처지에 따라 얼마든지 가난하게 살 수도 있지만, 그것을 부끄러워하지도 않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와 축복에 따라 오천 명을 먹이는 삶을 사는 사람이 되는 것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소득을 하나님과 나눌 줄 아는 사람 되기를 원하십니다. 최소한 1/10은 하나님의 것인 줄 알고 자기가 쓰기 이전에 먼저 하나님께 내어 놓을 줄 아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저는 높은 뜻 숭의교회 교인 여러분들이 자신의 소득을 먼저 하나님께 떼어 놓을 줄 아는 사람 되시기를 원합니다. 십일조가 정확하지 못한 사람은 결국 큰일을 못합니다. 주를 위하여 쓸 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주님께 쓰임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주를 위하여 쓸 줄 아는 사람을 주께서 쓰신다고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소득을 가난한 이웃과 함께 나누어 쓸 줄 아는 사람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잘 아는 레위기 19장에 보면 추수 할 때에 네 귀퉁이를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남기고 추수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네 귀퉁이를 산술적을 계산해 보니 21.5% 였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제2의 십일조라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삼년에 한번씩 가난한자와 레위인들을 위하여 십분의 일을 더 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매년의 몫으로 계산하면 3.3%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몫과 가난한 이웃의 몫을 다 합하면 34.8%가 됩니다.
그 동안 제 나름대로의 목표는 그 34.8%를 떼는 것이었습니다. 말로 설교하는 것은 쉽지만 그것을 그냥 숫자로 듣는 것도 어렵지 않지만 그것을 목표로 하고 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저는 그것이 하도 어려워서 정말로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나머지 돈으로 벤츠를 타고 다닌다고 하여도 나는 그를 비난하지 않겠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생각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최소한의 기준이라고 생각하고 말하지만 그것을 목표로 하고 도전해보니 그것은 최소한의 기준이 아니라 최대한의 기준에 더 가깝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매달 장부를 기록합니다. 그리고 34.8%의 기준을 넘어섰나를 확인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조금 더 높은 목표를 설정하고 노력합니다. 저는 저의 그와 같은 삶의 목표와 자세를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유산으로 남겨주고 싶습니다.
저는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살지 못한다고 해서 부끄러워 할 것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 수 있기를 소망하고 사는 것도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들 중에는 이미 34.8% 이상을 하나님과 이웃과 나누면서 살아도 될 만큼의 부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와 같은 분들은 자신과 자신의 자녀들이 악성가난뱅이가 되지 않도록, 오천 명분들을 혼자서 깔고 앉아서 먹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 즉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오천 명을 먹이는 사람이 되거라>라는 말씀에 귀를 기우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저의 자녀들이 가난하게 되어 부한 자들의 도움을 받게 되면 감사함으로 그것을 받으라고 가르치겠습니다. 쓸데없는 박탈감 때문에 남을 시기하거나 미워하지 말라고 가르치겠습니다. 자기 아닌 다른 사람을 기어코 다 가난하게 만들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그런 사람이 되지 말라고 가르치겠습니다. 가난한 중에서도 자족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 늘 행복을 잃지 않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겠습니다. 그러나 할 수 있는 대로 강하고 부한 자가 되어 34.8% 이상을 하나님과 이웃들을 위해 내어 놓을 줄 아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겠습니다. 할 수 있다면 10의 9조를 하나님과 이웃 그리고 세상을 위하여 쓸 줄 아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겠습니다.
여자와 아이를 제하고도 오천 명이 넘는 무리를 먹이겠다고 제자들이 예수님께 들고 온 것은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마음을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그 마음과 보리 떡 다섯 개 그리고 물고기 두 마리를 들고 축복하셨습니다. 그랬더니 오천 명이 먹고도 12 광주리가 남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이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고 능력이 없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라고 말씀하실 때 예수님은 이미 제자들이나 누구나를 막론하고 저 먹을 것만 생각하지 아니하고 작은 것 하나라도 이웃과 함께 그것을 나누려고 하는 자에게는 정말로 오천 명을 먹이고도 12 광주리나 남을 만큼의 능력을 주시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저는 그와 같은 의도가 지금도 동일하게 하나님께 있으시다고 확신합니다. 저는 사랑하는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 교인들과 이 설교의 말씀을 들으시는 모든 분들에게 그와 같은 축복이 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천 명을 먹이는 사람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부터 그것을 당장 연습하실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
마 14:13-21 / 성흥모 목사
우리 교회는 창립 50주년을 보내면서 작년 2001년부터 3년 간 교회의 표어를 "모이는 교회는 보내심을 받은 교회"라고 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실천목표로 1) 감동적인 예배와 찬양의 교회(에배소서5:19-21) 2) 제자훈련으로 말씀 위에 굳게 서는 교회(골로새서2:6-7) 3) 형제애를 가진 교제하는 교회(사도행전 2:43-46) 4) 영혼구원에 총력을 기울이는 교회(마태복음28:19-20) 5) 지역사회를 구원하는 교회(예레미아29:7)라고 정해보았습니다.
2002년도 목회를 구상하면서 중점적으로 생각한 것은 교회는 교회의 존재 목적이 이끌어 가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이런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교회의 목적문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영주교회는 교회의 머리이시며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신 목적을 따라 구원받은 자녀로 하나님을 예배하며, 그리스도의 성숙한 인격을 목표로 양육하며, 형제애를 가지고 서로 교제하며, 영혼을 구원하려는 열정으로 복음을 전파하며, 지역 사회 봉사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확장한다"라고 하였습니다.
교회 성장을 말하던 많은 학자들이 있었지만, 그 중에 크리스티안 슈바르츠 박사의 자연적 교회성장(Natural Church Development)라는 성장이론이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이기에 하나님의 하시는 방법이 곧 자연적 성장, 생명체적 성장이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교회안에 생명체적인 잠재력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교회에 주신 생명체적인 잠재력을 풀어놓아 스스로 움직이고 활동하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 성장 부흥에 방해하는 요소들만 제거한다면 교회의 성장은 하나님의 역사이기에 저절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슈바르츠 박사는 자연적 교회 성장의 이론으로 8가지 질적인 특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8가지는 이것입니다.
1) 사역자를 세우는 지도력 : 이것은 성장하는 교회의 지도자는 사역을 위하여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기회와 권한을 부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2) 은사 중심적인 사역: 목회자는 우리 교인들이 어떤 은사를 가지고 있는지 잘 알아보고, 자신에게 맞는 은사를 따라 사역할 수 있도록 조정해주는 것입니다.
3) 열정적인 영성 : 교회는 성도들의 심령 속에 불이 붙어 있어야 합니다.
4) 기능적인 조직 : 조직은 사용할 수 있는 조직이어야 합니다. 오늘 많은 교회들이 전통주의에 사로잡혀 있다고 합니다. 질적으로도 낮으며, 양적으로도 감소하는 교회의 절반정도가 이 전통주의 때문에 열병을 앓고 있다는 것입니다.
5) 영감 있는 예배 : 성령의 임재가 아니라, 역사하는 예배여야 합니다.
6) 전인적인 소그룹 : 교인들은 개인의 문제를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교회 내의 소그룹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7) 필요 중심적 전도 : 교인의 10%만이 전도의 사명을 자각하고 영혼을 구원하려는 열정이 있다고 합니다. 전도하는데 불신자들의 당면한 문제와 필요를 충족시키는데 맞추라고 합니다.
8) 사랑의 관계 : 슈바르츠 박사는 질적이고 양적인 성장하는 교회는 웃음이 넘치는 교회라는 것입니다. 슈바르츠 박사는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지난 두 달 동안 식사나 차 대접을 위하여 교회의 성도를 몇 번이 초대했습니까?"라고 도전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야기하려는 아주 중요한 것은 이 8가지 특성 중에 어느 하나도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8가지 특성을 점수로 메겨보는데, 50점이 중간이라고 하면 질적으로 낮고 성장하지 않는 교회는 50점 이하라는 것입니다. 질적으로 높고 성장하려면 질적 지수가 65점 이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8가지 원리들이 어느 하나도 모자라지 않게 65점을 넘어가면 교회 성장은 99.4%라고 합니다. 슈바르츠 박사는 최소치의 영향이라는 말을 합니다.
8개의 널빤지를 사용하여 물통을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떤 널빤지는 길고, 어떤 것은 짧은 것이 있습니다. 어느 하나라도 65점, 다른 말로 하면 65cm 이하가 된다고 하면 물을 채우는데, 절반 정도만 담긴다는 것입니다. 최소치의 요소가 그만큼 악영향을 준다는 것입니다. 목사가 보는 관점, 평신도가 보는 관점에 모자라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무엇이 모자라는 부분인지 연구하고 토론하면서 집중하여 보완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은 간단하게 본문을 중심으로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오병이어의 이적입니다. 한 어린 아이가 가지고 있었던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가지고 우리 주님께서 축사하시고 제자들에게 나누어주라고 하셨는데, 여자와 아이를 제외하고 5천명이 다 배불리 먹었고, 부스러기를 남기지 말라고 하셔서 12제자들은 12광주리를 가득 차게 거두었습니다.
이 때는 유월절이 다가오고 있었고, 세례요한이 헤롯왕에게 목 베임을 받아 순교한 직후였습니다. 마가복음에 따르면 이 때 제자들이 나가서 전도하고 돌아와서 보고하였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너희는 한적한 곳에 다서 잠깐 쉬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에 오고가는 사람들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배를 타시고 따로 한적한 곳에 가셨는데 도착한 곳이 벳세다 들녘이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홀로 한적한 산에 가셔서 쉬면서 기도하시려고 하였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병을 고치기 위하여 모여들었고, 말씀에 굶주려 있었던 이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찾아온 백성들을 영접하였고,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말씀하셨고, 병 고칠 사람을 다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세례요한이 죽었다는 사실은 이제 이 민족의 희망은 예수님에게만 있다는 생각을 가졌는지, 수많은 사람들이 여러 고을에서부터 걸어서 몰려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려고 기적을 행하신 것이 아니라, 기적을 표적으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헬라어로 표적이라는 말은 세메이온(semeion)이라고 하는데 영어로는 사인-sign이라고 합니다. 우리말로는 표적, 표징이라고 하는데 자연법에 위배되는 놀라운 일이라는 기적이라는 말을 뛰어 넘어 무엇을 말하고 있는 상징적인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사건 그 자체가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을 통하여 주어지는 또 다른 메시지를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서에 나타나는 표적이라는 말은 예수님은 과연 누구시냐 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인간을 구원하러 오신 메시아이라는 것을 보여주시려는 뜻으로 표적, 사인으로 행하셨습니다.
이 오병이어의 이적을 행하신 날은 날이 저물어가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나아와 말씀드렸습니다. "이곳은 빈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먹게 하소서"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예수님의 생각과 제자들의 생각에는 근본적인 차이점을 보이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무리를 해산시켜야 한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각자 마을에 내려가서 알아서 사먹게 하자고 하였습니다. 이 때에 우리 주님은 "너희가 주라"고 했습니다. 마을에 사람들이 몰려 내려가 보아도 사먹을 수 없다는 것은 다 아는 일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일단 해산시키면 책임은 없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동안 예수님의 능력을 지켜보았는데 아마도 제자들의 믿음을 보시려고 하신 것 같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능력을 경험하였으면서도 여전히 세상적인 판단에 익숙하고 빠른 사람들이었습니다. 빌립 같은 제자는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 때 제자 중에 안드레라는 분이 나와서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를 두 마리뿐이니이다"라고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당신에게로 가져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그곳에는 마침 잔디가 많았는데 사람들로 하여금 그 잔치에 떼를 지어 한 오십 명씩 앉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시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었고 제자들은 받은 떡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예수님의 손에서, 제자들의 손에 계속하여 떡은 나누어지고 있었고, 분열하고 있었습니다. 남은 조각을 열 두 바구니에 가득 차게 거두었으니 먹은 사람이 여자와 아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습니다.
이 본문의 사건을 연구하는 몇 가지 유형에 대하여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첫째로 모세 유형론적인 해석이 있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만나로 먹이신 역사적인 사건과 유형적으로 닮았다는 것입니다. 사건의 무대가 바다를 건넌 후에 광야였습니다. 모세는 홍해를 건넜고, 예수님은 갈릴리 바다를 건넜으며 모세는 시내 광야요, 예수님은 벳세다 빈들이었습니다.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였는데, 예수님은 떡과 물고기를 가지고 먹였습니다. 백 명 혹은 50명씩 앉게 하였는데, 모세도 출애굽에서 천명, 백 명, 오십 명, 10명으로 사람들을 조직하였고, 나누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모자람 없이 다 배불리 먹었습니다. 예수님은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되신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었고, 예수님은 모세 이상의 선지자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성례전적인 해석입니다. 이 이적을 성만찬을 보여주는 사건이란 것입니다. 이 본문의 초점은 이적 이야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떡을 떼셨다는 예식적인 행위에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은 생명의 떡이 되셨고 당신의 손에 생명의 양식을 떼어 우리들에게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교회에서 행하는 성만찬을 역사화하는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이 네 가지의 행동을 통하여 유명한 예배신학자인 그레고리 딕스는 "유카리스트의 액션"이라고 했습니다. 성만찬의 행동이라는 말입니다. 여기 네 개의 중요한 단어는 성만찬의 본문에 나타나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떡을 들었다"(took), "축사하시고"(blessed) , "떼어"(broke), 제자들에게 "주셨다"(gave) 이 이적은 성만찬을 행하여야 하는 이유가 되었고, 성만찬을 거행할 때에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예수님의 그 귀하신 몸도 생각하지만, 하루의 먹을 양식도 나누어주신 주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찬송가 284장에서는 "주 예수 해변서 떡을 떼사 무리를 먹이어 주심 같이 영생의 양식을 나에게도 풍족히 나누어주옵소서"라고 찬송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의 해석은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대한 예고편이라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장차 하나님 나라에 올라가서 예수님과 더불어 영광스러운 잔치에 참여할 것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장차 하나님 나라에 이루어질 영광스럽고 충성한 잔치를 보여주시는 사건으로 해석하였습니다.
이상 세 가지 해석은 그런 대로 장점도 있고, 좋은 해석입니다. 그러나 좀 약한 해석으로는 열심당원적인 해석입니다. 광야에 모인 무리들은 당시 열심당원들이었다는 해석입니다. 주로 광야에 모이는 이들은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모이는 독립군 단체로 열심당원이었다는 것입니다. 광야는 당시 열심당원들의 은신처가 되고 있었습니다. 여자와 아이들을 제외하고 남자만 5천 명이 모인 것은 단지 종교적인 모임만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이들을 보신 예수님은 이들이 목자없는 양과 같이 보셨는데, 지휘관 없는 군대, 지도자 없는 회중으로 보셨다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배불리 먹일 때에 100명 50명씩 앉게 하였으니, 이것은 군사적인 구성단위라는 것입니다. 잔디가 있었다는 것은 유월절 기간이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데, 유대인들에게 메시아가 오시는 때는 바로 유월절 시기라고 했습니다. 그동안 자칭 메시아라고 하는 이들이 유월절 기간에 활동하면서 반란을 일으킨 적이 있었습니다. 이들에게 이적을 보이시니까 저들은 예수님을 억지로 붙들어 왕으로 모시려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그럴듯한 해석입니다. 열심당원적 해석은 성서적인 해석이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가 만나는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명령하시고 있습니까? 우리는 어떠하신 예수님을 만나야 하며 배워야 할 것입니까?
1.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는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사람만 많이 모였다 하면 기적을 행하셔서 인기를 얻으려고 하지 않았고, 다만 그들을 목자 없는 양 같이 여겼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불쌍히 여기시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떡 일곱 개를 가지고 4천명을 먹이실 때에도 사람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 지났으나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내가 그들을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하리라. 그 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들도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셨고,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유리 방황하는 무리로 보셨습니다. 예수님에게 나오는 무리들이 여간 많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자와 아이들 외에 남자만도 5천명이 되었습니다. 학자들은 대체적으로 2만 명이라고 추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을 사랑하셨습니다. 좋아할 사람이 따로 있고, 미워할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좋아하셨으며, 불쌍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셨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사람을 좋아하셨습니다.
2. 먹을 주라고 하시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가다가 쓰러질 사람이 있든지 상관할 것 없이 해산만 시키면 자기들의 책임만은 벗어나는 줄 알았습니다. 우리는 우리 주변에 먹을 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없는지 찾아보고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정부가 할 일이요, 사회 봉사 기관에서 할 일이라고 하면 무책임한 제자들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우리는 땅 끝까지 나가서 복음을 전해야 하지만, 복음 전하기 전에 먹을 것을 주라는 명령도 함께 받아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 예비하시고 준비하시는 하나님이시지만, 믿는 성도들을 통하여 역사하기를 원하십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이 먹는 문제에 걱정 없도록 많이 쌓아두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주님은 "너희가 먹을 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가진 것을 내어놓아야 하고, 나누고 베풀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주신 복을 가지고 나누고 섬기며 베푸는 사람에게 더욱 내려주신다고 하셨습니다.
3. 예수님은 떡을 가져오라고 하시고 축사하셨습니다.
벳세다의 예수님은 적은 것이지만 떡과 물고기를 가져오라고 하시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셨습니다. 축사하셨다는 것은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적은 것이라고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가치 없는 것이라고 하여도 예수님에게 바쳐질 때에 위대한 역사를 창조하는 일꾼이 될 것입니다. 옛날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 모세에게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셨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바로를 물리치시기도 하고 홍해를 가르기도 하였고, 반석을 쳐서 샘물이 흐르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함께 살아야 하고, 사랑해야 할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 때에 예수님은 사람들을 잔디밭에 앉게 하셨는데 100명 혹 50명씩 나누었습니다. 교회는 조직화되어야 하고, 적은 그룹으로 나눌 때 더욱 힘을 발휘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을 나누고 질서를 유지한 것은 순종과 협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우님들은 모두가 소속감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이상 봉사할 곳을 찾아야 합니다.
4. 남은 조각을 거두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이제 배불리 먹었다고 하여 남은 것을 땅에 버리거나 주머니에 넣어가지 못하게 하고 바구니에 가두었습니다. 예수님이 나누어주신 떡은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었습니다. 다음 날 제자들에게 있어 더 없는 양식이 되었을 것입니다. 부스러기라도 모으면 큰 양식이 되고, 많은 사람들을 또 다시 먹일 수 있습니다. 부스러기라도 사모하는 이방인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우리의 적은 것이라도 버리지 않고 모으고 힘을 합하여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지역 사회를 위한 여러 가지 프로그램 중에서 이제 정말 먹을 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없는지 찾아보아야 하고, 지역 사회를 불쌍한 마음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나눔의 은총은 더욱 커지는 법입니다. 예수님의 손에서 나뉘어진 떡은 제자들의 손에서 다시 나뉘어졌습니다. 우리들이 나의 것을 어렵고 힘들게 살아가는 이들에게 나누어주었는데, 주었으면 없어지는 것으로 알았는데 여전히 내 손에 남아 있는 은총을 체험하실 것입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주리라"(눅6:38)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먹을 양식을 풍족하게 주십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가정에 쌓을 곳이 없도록 베풀어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오늘 우리 주님은 너희가 먹을 주라고 하십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해야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의 손에 올려놓아야 하는 떡을 찾아야 합니다.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을 주님에게 드리오니 오병이어로 사용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면서 주님에게 바쳐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없는 것을 가지고 봉사하라고 하지 않고 지금 할 수 있는 것, 내가 일용할 양식으로 먹으려고 하는 정도, 손쉽게 할 수 있는 것으로 봉사하라고 합니다. 우리에게 부정적인 사고만 떨어버리면 예수님의 능력에 동참하는 은혜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저 해산만 시키면 된다는 식이라든지, 200 데나리온의 떡으로 못한다고 하는 계산에 밝은 것도 주님은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봉사하고 이웃을 섬기는 일에 더 이상 다른 사람의 책임인 양 떠넘기지 마시고 우리의 책임으로 받아들여야겠습니다.
예수님처럼 우리도 초라한 보리떡 몇 개를 들고 감사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기적을 구하는 기도가 아니라, 단순한 감사의 기도였습니다. 하찮은 것을 우습게 여기지 않고 뜨거운 감사로 봉사하고 헌신한다면 우리의 생애에 놀라운 기적을 체험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주님을 위하여 함께 나눌 수 있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정도는 다 있지 않습니까? "우리 우리에게 있는 것은 이것입니다."라고 주님에게 가지고 나와 헌신하여 주님이 행하시는 놀라우신 이적에 동참하시기를 바랍니다.
축복의 원리
마 14:13-21 / 김홍도 목사
오늘 본문 말씀의 내용을 보면 빈들에서 해가 저물고 굶주린 무리 가운데 우리 주님의 축복의 역사가 나타나시매 도무지 해결될 수 없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 모든 불가능한 일들이 놀랍게도 해결된 사실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의 사건을 생각하면서 이것은 하나의 과거사가 아니라 오늘날도 모든 불가능과 절망 속에서라도 우리 주님의 축복의 역사가 나타날 수 있고, 또 놀라운 기적의 역사가 나타날 수 있음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신자거나 불신자거나 누구를 막론하고 복받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우리 신자들은 주님의 축복을 받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생애 가운데는 주님의 축복이 꼭 필요하고 뿐만 아니라 주님의 축복만 있으면 모든 것이 문제가 되지 않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환경이 나쁜 것도, 재주가 좀 없어도, 학식이 부족해도, 또 물질이 부족한 것도, 그 어느 것도 우리 주님의 축복만 있어지면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도 보면 주님께서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니 돈도 없고 해질 무렵, 빈들에서 무려 5천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에게 있는 것이라고는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 아무리 생각하고 돌아봐도 불가능한 상황이었지만 모두가 축복으로 풍성하게 해결되었던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축복의 모든 근원이 되시는 사랑하는 우리 주님께서 계셨기 때문인 줄로 믿습니다. 할렐루야! 이러한 축복의 근원이 되시는 우리 주님은 지금도 살아 계셔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더욱이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모든 역사는 전적으로 축복에 근거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축복이 없으면 어떠한 열매도, 나아가서는 아무런 성과도 없다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어떤 이는 인물도 훌륭하고, 애써서 기도도 하는 것 같고, 노력도 하고, 수단과 방법을 비상하게 쓰는데도 별 다른 효과가 없는 것은 왜 그런지 아십니까? 그것은 그 가운데 주님의 축복이 같이 하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진정 주님의 축복만 나타나면 어려운 문제, 어떠한 난관도 문제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어려운 환경, 인간의 생각에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문제가 더 큰 이적을 나타내는 기회가 되고 발판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축복을 주실 때 반드시 고난의 보자기에 싸서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 쓰디쓴 고난의 보자기가 나에게 던져질 때 그것을 믿음으로 받으면 그 속에서 오묘한 하나님의 축복의 원리를 발견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오늘날도 불가능이 가능으로 변하여 놀라운 이적과 주님의 축복이 임하게 하는 몇 가지 원리를 찾아 보는 가운데 피차에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주님의 축복이 나타나는 데 있어서 제일 큰 방해는 인간의 생각과 계산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 1절 이하에도 보면 오늘 본문 말씀과 같은 기사가 나와 있는데 그때 제자 중에 빌립은 계산적인 생각으로 지혜로운 척하고 주님께 대답했을 때 주님은 그의 계산적이고 부정적인 사고(思考)를 무시하고 오히려 안드레가 가져 온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갖고서 놀라운 축복의 역사를 일으키셨던 것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은 인간의 능력이나 재능이나 유한한 지식으로 조성되는 것이 절대로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에 의해서만 조정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우리 인간의 활동에 근거하지 아니한 하나님의 활동이기 때문에 인간적 계산의 근거없이 내려 주신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역사의 열매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자원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주님의 축복에 비례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축복의 역사는 어디까지나 인간의 재능이나 능력이나 인품에 비례해서 있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생각과 나의 계산으로는 불가능하고 안 될 것 같은데도 하나님의 축복이 있어지기만 하면 놀라운 기적의 열매가 맺힌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모든 사건과 일에 있어서는 원인에서 결과를 생각할 수 있으나 하나님의 축복의 세계에서는 우리 인간의 이론과 계산이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하나님 자신이 곧 원인자(原因子)이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을 잃고 실의에 차서 바닷가로 가서 고기를 잡던 어부 베드로, 그는 밤새도록 고기 한 마리 못 잡고 피곤에 지쳐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깊은 곳에 그물을 던지라는 말씀에 그는 온 밤을 새워 가며 일했으나 얻은 것이 없었지만 순종할 때에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많은 고기를 잡았던 사실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곧 하나님의 축복을 방해하는 인간의 생각과 계산을 용감히 버리고 순종할 때 축복의 열매가 맺어진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는 내 생각과 제산으로 이것이 선(善)이다, 이것이 유익하다 옳다하는 것까지도 버려야 할 때는 버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나의 생각과 전능하신 하나님의 생각과는 차원이 다르기 때문인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자기 생각, 자기 양심의 기준만 세워 놓고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생각과 차원을 모르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의 활동 원리는 이것이 옳으냐 그릇된 것이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직 내 안에 거하시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뻐하시겠느냐가 문제되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나의 생각과 계산을 속히 초월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인도를 받고 성령의 감동에 순종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보리떡과 물고기를 바친 소년과 같은 절대적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비록 보잘 것 없고 먹어 볼 것조차 없는 보리떡이었으나 예수님의 손에 들리어질 때 주님이 축복하시므로 5천명이나 먹이고도 남은 역사가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내 생각에는 크던지 작던지, 잘 났던지 못 났던지, 많던지 적던지, 상관없이 얼마 만큼의 정성과 헌신이 담겨져 있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의 축복의 역사가 나타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불학 무식한 베드로나 다른 제자들도 그들이 예수님을 따르려 할 때, 생업인 배와 그물과 부모 형제까지라도 버릴 수 있는 헌신적 결단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위대한 전도자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생애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 헌신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축복이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보리떡을 바친 소년과도 같이, 또한 과부의 엽전 두푼과도 같은 정성, 사르밧 과부의 헌신과도 같은 전적인 희생과 헌신을 다하는 삶을 살려고 할 때, 마치 어린 나귀가 희생하면서 예수님을 등에 모시고 갈 때에 백성들이 깔아 놓은 옷을 밟고 또 예수님과 같이 칭송을 받게 된 것 같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또는 세상적으로도 칭송을 받는 축복된 삶이 되어진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축복의 비젼(Vision)이 있어야 합니다 즉 꿈을 가져야 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아마도 제자들이 보리떡 다섯개를 보고 5천명을 어떻게 먹이느냐고 부정하고 비웃고 자리 정돈도 하지 않고 나눠 주라고 하는데도 순종치 않았다고 하면 놀라운 기적의 역사는 나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믿음의 꿈을 갖고, 그것이 크면 클수록 하나님은 그의 믿음대로 이루어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너희 믿음대로 될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허영심이나 정욕으로 허망한 꿈을 가지면 안 되지만 진정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헌신하며 사는 사람에게는 그의 믿음과 꿈대로 이루어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디까지나 내 인간적 사고방식으로는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것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생각 밖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믿고 비젼을 갖고 걸어 나갈 때 주님은 그러한 자의 편이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무쪼록 우리 생애 가운데서 내 생각과 계산을 버리고 절대적 헌신과 축복에 대한 확실한 믿음과 비젼을 갖게 될 때 하나님의 무궁한 축복의 역사가 나타나신다는 그 원리를 믿고 나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멘-
4복음서에 나타난 기적
마 14:13-21 : 김장환 목사
『제자들이 가로되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이니이다』
인류 역사에 보면은 먹을 것 때문에 혁명을 일으키는 수가 있습니다. 먹을 것 때문에 전쟁을 일으키는 수도 있구요, 먹을 것 때문에 나라를 뺏고, 또한 나라를 뺏기는 수가 있습니다.
세계 기아 대책 본부에 의하면은 1년에 굶어죽는 어린아이들의 수가 2천만 명이 넘는다고 그랬습니다. 우리 나라 인구 절반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해마다 굶주림으로 목숨을 잃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 음식 먹다 남겨서 버리는 찌꺼기 음식물이 1년에 8조원이라고 하죠? 얼마 전에 어떤 뉴스를 보니까 15조라고 보도 하는 것을 봤습니다.
성경에 예수님께서는 '배고픈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셨나?'
5천명을 먹이는 기적을 통해서 저와 여러분이 함께 은혜 받는 귀한 시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한 200 데나리온은 있어야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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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 있는 오병이어(五餠二漁)의 기적은 예수님의 공생애에 있어서 대중적 인기가 가장 절정이었을 때에 행하신 기적입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기적을 베푸셨지만 그 중에 보리떡 다섯 덩어리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남자만 헤아려서 5천명을 먹인 기사는 마태·마가·누가·요한, 4복음에 모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다른 기적 베푸신 기사는 4복음에 모두 기록된 경우가 없는데, 이 5천명을 먹인 기적은 4복음에 공히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저녁 어둠이 깃들 무렵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그 많은 사람들의 먹을 것을 염려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걱정할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고 하시지만, 뭐 먹을 게 있어야 주지요?
제자들 생각에는 한 200데나리온은 있어야 그 많은 사람들을 먹일 수 있을 것 같은데, "너희들이 먹을 것을 주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 한국 교회를 향해서, 아니 우리 중앙교회를 향해서, 아니 여러분과 저를 향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물론 육의 양식에 기갈들린 사람들에게만 주라고 하는 말씀이 아니라 영의 양식을 먹지 못해서, 복음을 듣지 못해서, 지금 지옥으로 향하고 있는 그들에게,
"너희들이 먹을 것을 주어라!"
"영의 양식, 복음의 양식을 주어라!"
이 본문의 기적에 대해서 별별 구구한 논설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군중이 예수님의 설교에 감동되어 각각 가지고 있던 점심을 제공하여 대중이 같이 먹은 것이라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고요.
어떤 사람들은 바구니가 있는 것을 보면 유대인들의 규례에 유추하여 음식을 바구니에 담아 갖고 온 것을 나누어준 것이라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고,
「제롬」같은 고대 교부(敎父)도 오병이어는 모세의 5경2비를 비유한 것이라고 얘기했고,
「오리게네스」같은 석학도 100명 50명은 유대 풍속의 성수(聖數)를 표증하는 것이지 진짜 5천명이 되겠느냐고 하는 의문도 제기했습니다.
그러나 4 복음서에서 유일하게 똑같이 기록 해 놓은 이 기적을 예수님 영접한 우리들이 달리 해석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기에 무슨 교훈이 있느냐? 저는 4가지로 한번 생각해 봤습니다.
첫째로 사랑의 교훈을 배울 수가 있겠다 -
두 번째로 순종의 교훈도 여기서 배울 수가 있고,
세 번째로 절약의 교훈도 배울 수가 있고,
네 번째는 질서의 교훈을 배울 수가 있겠다 -
◇ 뒷걸음질 치다가 문둥병 환자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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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로 이 기적에서 사랑의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4장 14절을 한번 합독 하시겠습니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인을 고쳐 주시니라』
예수님께서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겼다고 우리는 그냥 번역해 놨는데, 원어에는 컴패션이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이는 깊은 연민을 느끼게 하는 단업니다. 예수님은 '깊은 사랑'으로 그 무리를 보셨다고 했습니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라는 것을 여러분과 저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요한 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했다고 했는데, '이처럼' 사랑한 것이 도대체 얼마나 사랑했단 말입니까?
독생자, 아들 예수를 우리들에게 주셔서 그가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려 돌아가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회중 "아멘")
요한1서 4장 10절에 보면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그만큼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신 것도 사랑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배고픈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신 것도 사랑 때문입니다.
불쌍히 여기신 것도 사랑 때문에!
이 세상에 오신 것도 사랑 때문에!
십자가를 지신 것도 사랑 때문에!
수고하신 것도 사랑 때문에!
기적을 행하신 것도 사랑 때문에!
그러기 때문에 오늘 여러분과 저에게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사랑도 실천이 없는 사랑은 가치가 없다고 했습니다.
「아시스」마을의 「프란체스코」수도사는 문둥병을 무척 무서워 했다고 합니다. 그가 어느날 좁은 골목길을 가다가 문둥병자 하고 딱! 마주쳤습니다. 그는 너무나 무서워 저절로 뒷걸음질을 치다가, 정신을 가다듬고, '이래선 안되지!'하고선 다시 그 문둥병 환자에게 다가가 포옹을 하고 입을 맞췄습니다.
그러고 자기 길을 가다가 다시 돌아다 보았는데 그 문둥병 환자는 간데 없고 그 자리에 햇빛만 비치고 있더랍니다. 그때 그는 자기가 포옹하고 입맞춘 그 문둥병자는 그리스도였다고 하는 확신을 갖게 되었답니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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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특징이라고 하는 것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처럼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다』고 했습니다.
사랑은 관심을 갖는 거라고 했습니다. 남을 존중히 여기는 거라고 했습니다. 남을 이해하는 거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꿈에 천당에 갔는데, 거기서 베드로의 안내를 받아 천국을 구경하고 나서, 지옥도 구경하고 싶어 그곳으로 안내해 달라고 하여, 베드로를 따라 지옥엘 갔답니다. 그 곳에 커~다란, 긴 테이블에 진수성찬, 음식이 많이 차려져 있는데,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보니까 삐쩍 말라가지고 금방 죽을 송장같이 보이더랍니다. 그래서 왜 저 사람들이 음식을 저렇게 많이 갖다 놓고도 저렇게 삐쩍 말랐느냐고 물어보니까, 이 지옥의 규칙은 길이가 넉자 되는 젓가락으로만 먹어야 되는데, 넉자가 되는 젓가락으로 그거를 도저히 자기 입에 집어넣을 수가 없어서 저렇게 말랐다고 그러더랍니다.
다시 천당에 올라와서 천당 한켠에 보니까 거기도 역시 테이블을 길게 늘어놓고 앉아 있는데 사람들을 보니까 얼굴에서는 윤이 나고, 몸은 아주 살이 쪄서 통통하기에, 저 사람들은 어째서 저러냐고 그래니까, 거기도 규칙이 마찬가지래요, 넉자가 되는 젓가락으로 먹어야 되는데, 자기가 집어 자기가 먹을려고 하지 않고, 자기가 집어서 맞은 편에 있는 사람한테 먹이고, 맞은 편에 있는 사람은 자기 젓가락으로 집어서 이쪽에 있는 사람을 먹이기 때문에 저렇게 잘 먹고 건강하다고 얘기를 하더랍니다. 그러면서 "천국에는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고 이야기 하더랍니다.
◇ "너희가 주어라!"하시지만, 내 수중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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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로 이 기적을 통해서 순종의 교훈을 배울 수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14장 1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해는 이미 서산에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 곁을 떠날줄 모르는 군중들의 모습을 보고, 제자들이 예수님께로 와서 "이곳은 빈들이요, 이미 날이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사 먹게 하소서!" 할 때에 예수님께서,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그러나 제자들에게 먹을 것이 있어야 주지요!
오늘날 기성 교회 현실이 바로 이렇지 않은가, 하고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교회만 컸지, 건물만 잘 지었지, 사람만 많이 모였지, 천국의 양식도, 복음의 소식도, 신유의 은사도, 다~ 메말라서 나누어 줄 것이 없는 교회가 되지 않았나, 그러한 성직자가 되지 않았나, 그러한 교인이 되지 않았나,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이 명령에 순종하는 성도, 순종하는 성직자, 순종하는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많은 교회들이 사소한 문제를 놓고 옥신각신 하기 때문에, 저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양식을 공급하지 못하고, 먹을 것을 주지 못하고, 그 사람들이 그냥 죽어서 지옥가게 내버려두는 것이 오늘 한국 교회의 현 주소가 아닌가 생각을 해 봤습니다.
우리는 뭐 가지고 걱정합니까?
찬양대 가운 색깔을 흰색으로 하자, 빨간색으로 하자, 또 예배 순서 가지고 설교 전에 헌금을 하느냐, 설교 후에 헌금을 하느냐? 광고를 담임 목사가 하느냐 수석 장로가 하느냐? 주일날 대 예배에 장로들만 기도 시키지, 왜 집사들이 기도하도록 하느냐? 왜 여자 권사들은 대 예배 때 기도 안 시키느냐?
이런 사소한 문제들로 "옥신각신 옥신각신 -"
이러한 시비에서 속히 벗어나서, 배고파 울고 있는 저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야 합니다. '어떻게 순종하느냐?'를 잘 생각하여 실천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믿음을 바탕으로 한 순종이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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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7절 18절에 『제자들이 가로되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이니이다 가라사대 그것을 내게 가져오너라』
똑같은 상황을 요한 복음 6장 9절에서는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여기서 저는 한 아이가 저녁때가 되도록 도시락을 까먹지 않고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 그 사실, 그 소년이 하루종일 예수님 강의를 들으면서 배가 고팠을텐데 어떻게 도시락을 안 까먹고, 해가 질 때까지 그대로 가지고 있었을까?
또 그거를 제자들이 달라고 했을 때, 저 같으면은 보리떡 하나만 주고, 생선도 한 마리 다 주기는 아까우니까 절반 "딱!" 잘라서 반만 주고, 나머지는 내가 먹었을텐데, 그냥 자기 도시락 전체를 예수님의 제자한테 내어 주는 그 '순종'이 참으로 기적입니다.
어른들은 참을 수가 있을는지 모르지만은 한참 자라나는 아이들이 어떻게 먹지 않고 있다가, 그걸 내놓으면 자기에게 다시 되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걸 다 내어주는 순종!
오늘 배우시기 바랍니다!
저도 도시락을 싸 가지고 학교에 다녀봤지만은 배가 고프면 점심 시간도 오기 전에 조금씩조금씩, 야금야금 다 먹어버린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지요, 또 내가 먹어야할 도시락을 고분고분 다른 사람에게 내 준다고 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순종하여 우리들의 물건이 바쳐질 때에 기적이 일어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가라사대 그것을 내게로 가지고 오너라!"
그 아이가 가지고 있으면 기적이 나타나지를 않습니다. 제자가 가지고 있어도 기적이 나타나질 않습니다. 하나님 손에 들어와야 기적이 나타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많은 물질이 선교사나 전도사나 목회자의 손에만 머문다고 할 것 같으면은 기적이 나타나질 않습니다. 주님의 손에 들어갔을 때에 오병이어의 기적도 나타날 수 있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완전한 믿음을 바탕으로 순종할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을 완전히 믿었던 아브라함이 아들을 희생물로 바치는 순종!
하나님의 명령을 완전히 믿었던 노아가 묵묵히 방주를 짓는 순종!
하나님을 완전히 믿었던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에굽에서 해방시킬 수 있었던 순종!
하나님을 완전히 믿었던 여호수와가 여리고 성을 일곱 바퀴나 도는 순종!
이방인 나아만도 하나님을 완전히 믿었던 터라 요단강에 일곱 번이나 들어갔다 나와서 문둥병이 완전히 낫게 된 그 순종!
◇ "이렇게 적은 것을 바쳐도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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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그것을 내게로 가져 오너라!"고 명하실 때, "이렇게 적은 것을 바쳐도 되나? 나는 재주도 없고, 교회 봉사도 할 줄 모르고, 나보다 훌륭한 사람들이 더 많은데....."
만약 이 어린아이나 제자들이 그러한 마음 때문에 주님 말씀을 순종치 않았다면은 5천명을 먹이는 기적은 없었을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기진맥진해서 죽거나 병에 걸렸을 것입니다.
순종은 만민에게 축복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깊이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너희가 진리에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벧전 1:22)
세 번째로 절약의 교훈이 여기에 있습니다.
마태복음 14장 20절에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 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사람들은 자기 배가 부르면, 먹고 남은 음식에는 관심이 없는 법입니다. 내 배부르고 난 다음에는 관심이 없어요,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절약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거둬들여라! -"
5천명이 먹고 남은 음식 열 두 광주리를 거둬 들였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먹다 남겨, 버리는 음식이 무려 8조원 또는 15조원이나 된다고 하는데, 그걸로 2억짜리 예배당을 짓는다면 4만 채를 지을 수가 있습니다. 만약 이북에 4만 교회만 짓는다면은 이북의 민주주의는 하지 말라고 해도 저절로 될 줄 믿습니다!
절약은 할 수 있을 때 해야지, 주머니가 가벼워진 다음에는 절약하고 싶어도 때는 이미 늦습니다.
'절약은 최대의 수입'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한국 사람들이 지금 절약할 땐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 기적의 역사 현장에서도 질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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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이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질서'의 교훈을 우리가 배워야 합니다.
마가복음 6장 40절에서 예수님께서 떡을 떼시어 나누어 주기 위해 어떻게 질서를 잡으셨는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때로 혹 백씩, 혹 오십씩 앉히라』고 했습니다.
100명씩 50명씩 질서 있게 앉혀서 그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나눠 줍니다. 만약 질서를 무시하면 음식 분배는 무산됐을지도 모릅니다. 5천명의 인원이 말이 5천명이지, 얼마나 많은 수의 사람입니까? 더구나 굶주린 군중들입니다. 이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눠주다 잘못되면 몇 사람이 깔려 죽을 수도 있을겁니다. 폭동이 일어났을 수도 있을겁니다. 왜?
배고픈 사람들에게 먹을것이 눈에 보이면 먼저 집어 먹을려고 어린애들이고 뭐고 막 짓밟았을지도 모르지요, 약자는 도움을 받지도 못하고. 주먹 센 사람이 제일 많이 갖다 먹었을 겁니다.
질서는 이래서 중요한 것입니다.
일본에 가면 부러운 것이 질서입니다. 뒷 골목에 불법 주차하는 것을 볼 수가 없어요, 그러나 우리 나라는 그냥 불법 주차, 얼마나 많은지 소방차가 들어가지 못하잖습니까?
차좀 빼달라고 그러면, 뭐라고 그러는 줄 알아요? 차 주인들이? '누가 이리 들어오라고 했냐?'고 하지요.자기 하나만 편하면 된다는 식이지요.
아침 출근 시간에 차가 많이 밀리지요? 사거리에 차가 가득 밀렸는데, 파란 불이 켜지더라도, 앞에 차가 밀렸으니까, 여기 그냥 뒤에 서서 기다렸다가 밀린 차가 어느 정도 빠져 나가면 가야 되는데, 파란 불이 켜졌다고 '딱!' 가서, 사거리 중간에다가 차를 갖다 세워 놓으니까, 이 쪽 저쪽에서 모두 소통이 안돼요!
이게 매일 아침 내가 목격하는 장면여!
미국이나 일본이나 선진국에 가면, 절대 그런게 없어! 여기서(손 동작 제스처) 딱 기다리고 있다가, 이게(다른 손 동작 제스처) 가면은 가고, 신호등이 바뀌면 여기서 그냥 기다려요, 파란 불이라도 안 가지요!
근데 아마 운전하시는 여러분도 마찬가질거요, 가서 그냥 사거리에 갖다 딱 세워놓지?(웃음)
웃는거 보니까 그런 사람 더러 있는거 같아요 -
"기다려어! -"
"한 2분만 기다리면 돼요!"
그거 못 참아서 그냥 딱 여기다 갖다 놓으니까 이쪽에서 크락숀 누르고 난리 때리지요?
그래 여기서 못 나가니까, 그 담에 이 사람들 심통이 나가지고 다음 신호때에 기다렸다는듯이 자기네가 가서 딱 갖다 세워놓으니, 여기도 못나가는거죠,
◇ "인심으로 승부를 걸어야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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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하고 한국하고 왜 같이 공동 월드컵 축구 시합을 하는지 난 모르겠어!"
"질서는 우리가 떨어집니다. 일본 사람들 질서 못 당해요!"
"우리 장점이 하나 있대면은 인심이여! 우리 나라 인정을 일본 사람들이 못 당해-"
내가 일본 그렇게 여러번 가서 부흥회 해 봐도, 일본 사람네 집에 가본 건 한번 밖에 없어!
큐슈 대학 교수네 집에 한번 가봤는데, 겨울게여!(겨울입니다) 코딱지만한 응접실여, 바닥이 얼마나 추운지, 「자부동」이라고 그래지 거기선 -, 전기 자부동 하나 주더라고-
그래서 일본 사람들은 자기 집에 초청을 대부분 안해요, 왜? 집이 너무 좁기 때문에 -
"하! 우리 나라 사람들은 인심이 얼마나 좋은지 몰라!"
"그냥 자기 집에 데려다가, 있는거 없는거 그냥 다 퍼먹여!"(웃음)
"그게 우리 나라 인심여, 그걸로 우리는 '쇼부'를 봐야 돼요!"(회중 폭소를 터뜨림) ('승부를 걸어야 돼요!' 할 것을 의도적으로 일본말 '쇼부'를 구사 함)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나라 질서에 대해 감명을 더 받겠어? 아니면 후한 인심에 더 좋은 인상을 받겠어요?"
"인심에~~ "
"질서야 그까짓거 뭐, 조금 저기 되더라도!" (웃음)
우리 인심에, 우리 인정에, 세계에서 축구 구경온 사람들이 대한민국을 다시 보고 갈 수 있도록 하십시다.
"오병이어의 기적!"
이스라엘의 계수법에 의하면 사람들의 수를 헤아릴 때 여자와 어린 아이는 제외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감안한다면 당시 군중이 1만5천명일 수도 있고, 2만명이 넘는 숫자였는지도 모르지요.
떡 다섯 덩어리, 생선 두 마리를 가지고 남자만 해도 5천명을 먹이시고, 남은 것을 열두 바구니에 가득 차도록 거두신 예수님!
그러한 예수님이시라면, 우리 민족에게 필요한 것을 채워 주실 줄 믿습니다.
"기도하십시다."
오천명 먹이는 기적을 통해서 우리들이 배울 것을 배우고,
앞으로 더욱 더 서로 사랑하고,
질서를 유지하고,
절제 하여, 복음을 심을 수 있는 민족으로 축복해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주님께 드려 나누게 하시면
마 14:13-21 / 이수영 목사
오늘 본문은 너무나도 유명한 사건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로부터 감옥에 갇혀있던 세례 요한이 헤롯의 명령에 따라 목 베임을 당하고 죽었다는 충격적이고 슬픈 소식을 전해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잠시 조용히 계시려고 배를 타시고 갈릴리 호수를 건너 어느 외딴 곳으로 가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으로부터 병 고침을 얻고 말씀을 듣기를 갈망하는 무리들은 여러 마을로부터 걸어서 예수님 계신 곳으로 몰려들었습니다. 그곳은 빈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찾아 몰려오는 큰 무리를 보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그들 가운데 있는 병자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저녁이 되는데도 예수님께서는 무리에게 말씀하시기를 그치지 않으시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곳은 빈들이고 날도 이미 저물었으니 이제는 사람들을 돌려보내셔야 그들이 마을을 찾아 들어가 먹을 것을 사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람들을 먹을 것 사러 마을로 가게 할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은 당황하며 말하기를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입니다"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하시고는 그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받아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신 후 떡과 물고기를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무리에게 나누어주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무리에게 나누어줄 때에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거기서 떡을 나누어먹은 사람이 여자와 어린이 말고, 즉 성인 남자만 오천 명이나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전체는 한 2만 명쯤 되지 않았을까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모두가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 기적은 그가 행하신 다른 많은 기적들 중에서 네 복음서가 모두 전하는 유일한 것입니다. 이 놀라운 사건은 모세를 따라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날 때 먹을 것이 떨어지자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만나를 내려 모두에게 부족함 없이 먹이셨던 역사적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사건입니다. 유대교 전통에서는 그래서 메시야가 오시면 모세 때보다 더 큰 규모로 백성들에게 양식을 풍족히 공급해주는 이적을 다시 행하게 될 것이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믿음을 갖고 있었던 사람들 앞에서 그런 기적이 일어났다면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메시야이심이 드러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요한복음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기를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며 예수님께 와서 그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 했다는 것입니다(요6:14-15).
그러나 사람들이 가졌던 메시야와 예수님에 대한 이해는 예수님의 자기이해와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셨던 것입니다(요6:15). 그뿐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어떤 의미에서 메시야이신지를 제자들에게 잘 설명하시며 가르쳐주셨습니다. 그 설명과 가르침을 우리는 요한복음 6장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누구이신지를 말씀하시기에 앞서 사람들이 가졌던 잘못된 생각을 지적하십니다. 요6:2에 보면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음이러라" 했습니다. 즉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나아왔지만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병을 잘 고치신다는 사실을 보았기에 병을 고치려 사람들이 그에게 나아왔다는 것입니다. 또 요6:26에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당신을 찾는 이유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서는 표적을 본다는 말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메시야이심이 확실한 표적을 보고 또 그의 메시야이심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하신 말씀의 뜻은 "너희가 내가 누구인 줄 바로 알아서가 아니라 단지 다시 떡이나 얻어먹기 위해서 온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하신 말씀이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요6:27) 하신 것입니다. 즉, "하루하루 먹고 사는 일만 생각하지 말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을 생각하라, 나는 바로 그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셔도 사람들은 그 말뜻도 알아듣지 못했고 따라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참 아들이심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 여쭈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도록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기록된 바 하늘에서 그들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요6:30-31). 즉, "모세는 우리 조상들이 광야에서 지낼 때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게 해서 백성들을 먹게 해주었는데 당신은 뭘 하시겠습니까? 모세가 행한 것과 비슷한 표적을 행하시면 우리가 믿지요"라는 말입니다. 바로 빈들에서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 이상의 무리를 배불리 먹이신 일을 잊고 있으며 그 일 속에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참 아들 메시야이심이 드러났음을 보지 못할 만큼 사람들이 영적으로 눈 멀어있음을 우리는 목격하는 것입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요6:32-33)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자 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모세는 사람일 뿐이다. 모세가 하늘에서 떡을 내리게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이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께서는 너희에게 육신의 떡도 베푸셨지만 참 떡, 즉 영원한 생명을 주는 떡을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나다. 그러니 나에게서 그저 한 끼 때울 떡만을 찾으려 하지 말고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예수님께 요청했습니다: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요6:34). 이들은 아직도 그들 눈 앞에 서계신 예수님께서 자신에 대해 말씀하고 계신 줄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 한다며 수군거리기를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자기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느냐" 했습니다(요6:41-42).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요6:47-51).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어떻게 사람들을 영원히 살게 하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생명의 떡이 될 것인지를 밝히셨습니다. 즉 십자가에서 살을 찢기심으로써 이루실 구원사역을 암시하신 것입니다: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이 말씀은 그러나 유대인들에게는 이해가 안 되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 사이에서는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하는 논쟁이 벌어졌습니다(요6:52). 그 때에 예수님께서 또 하신 말씀이 이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요6:53-58).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자신이 왕으로 군림하는 정치적 메시야가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 살을 찢기시고 피를 흘리심으로써 사람들을 구원하실 메시야이심을 분명히 하셨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신앙고백으로 예수님을 영접하는 이들이 영생을 누릴 것임을 천명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단순히 예수님께서 행하신 한 가지 놀라운 기적과 그의 능력을 소개하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오병이어의 이적은 그가 누구시며, 그를 통해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진리가 무엇이고, 그가 우리에게서 원하시는 믿음의 자세가 무엇인지에 관한 근본적인 가르침을 주는 사건입니다. 이 오병이어의 이적을 통해서 드러나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그는 약속된 메시야 곧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는 신적 능력을 지니신 참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러나 그 신적 능력을 언제나 우리를 살리시고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데에 사용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는 우리의 궁핍함을 알고 계시고 해결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는 모두에게 풍족함을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는 그의 구원사역에 우리의 작은 헌신을 사용하기를 원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는 작은 것을 취하셔서 큰일을 행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오병이어의 이적을 통해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진리는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늘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신 유일하신 구원자이시고 생명의 근원이시라는 것과 우리의 구원은 전적으로 그의 십자가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임을 믿는 이에게 하나님께서 구원과 영생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이적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서 원하시는 믿음의 자세는 무엇입니까? 세상적 관심 때문이 아니라 영적 관심에서 주님께 나아오는 것입니다. 일시적인 문제해결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갈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을, 비록 그것이 보잘것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주님께 드릴 줄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을 주님께서 주님의 뜻대로 사용해주시고 우리의 모든 문제해결의 주인이 되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복 주시기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 속에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 가운데 특별히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신 말씀과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하신 말씀에 우리는 귀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나라 경제가 무척 어려운 때입니다. 다 부족하고 궁핍한 때입니다. 이럴 때에는 사람들의 마음이 강퍅해지고 인색해지며 남을 염려하는 마음이 사라지고 너도 나도 내 것 챙기기에 급급해지기 쉬운 때입니다. 그러나 이 때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로 확실하게 만날 수 있는 때입니다. 우리의 부족함과 궁핍함을 차고 넘침으로 바꾸시는 주님, 우리 삶의 주인이시고 우리의 모든 문제의 놀라운 해결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발견할 수 있는 때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람이 궁핍해지면 나누기 싫어집니다. 나누려 해도 나눌 것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가진 것이 적다 하드라도 그것을 주님께로 가져가고 주님께서 나누시게 하면 다 풍족하게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지혜와 능력이 함께하고 하나님의 복 주시는 은혜가 함께하면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주님 우리가 가진 것 가지고는 어림도 없습니다" 했던 일이 주님의 의해 차고 넘치게 이루어졌던 것처럼 우리에게 "주님께 드려 주님께서 나누시게 하는" 믿음과 순종의 헌신만 있으면 오늘 우리에게도 오병이어의 기적은 일어날 것입니다. 그 진리를 깨닫고 실행하는 사람들에게는 복이 있습니다. 그 진리를 깨닫고 함께 실천하는 공동체는 복된 공공체가 될 것입니다. 우리 새문안교회가 그런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지금 겪고 있는 교회 안팎의 경제난도 넉넉히 극복해 가는 공동체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오천명을 먹이는 사람
마 14:13-21 / 김동호 목사
제가 열심히 잘 보던 텔레비전 프로그램 하나가 있었습니다. 'Rescue 911'이라고 하는 외국 방송 프로그램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아마 ‘911 긴급구조대’와 같은 이름으로 방영이 되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긴급구조대가 119이지만 미국이나 캐나다와 같은 곳에서는 긴급구조대가 911인데 그 긴급구조대의 실제 상황을 다큐멘터리처럼 만들어 방송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방송을 보면서 사람이 언제 가장 행복한지 그리고 언제 가장 아름다워지는지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모습도 훌륭하고 아름답지만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의 생명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정말 성스러우리만큼 훌륭하고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하여 살려낸 생명 때문에 서로를 부둥켜안고 울기도 하고 웃기도하며 펄쩍 펄쩍 뛰는 모습을 볼 때마다 그것이 부러웠습니다. 그래서 한번은 하나님께 그 방송을 보면서 나도 한번이라도 그렇게 살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도 했었습니다.
그와 같은 기도를 한 후 오늘 읽은 본문의 말씀 즉 오병이어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그 말씀을 읽은 후 소위 성공했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는 ‘오천 명분을 혼자 먹는 사람’ 또 다른 하나는 ‘오천 명을 먹이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무조건 오천 명분을 벌어들이는 능력 있는 사람을 잘 산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능력을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사는 사람을 잘 산다하지 않으시고 그 능력을 다른 사람을 위하여 쓸 줄 아는 사람을 잘 사는 사람이라고 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오천 명분을 혼자 먹는 사람이 아닌 오천 명을 먹이는 사람을 잘 산다 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 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깨달음 중에 하나였습니다.
사업을 하시는 집사님 한분이 제 방에 들어와 힘들다는 듯 털썩 소파에 앉으셨습니다. ‘왜 그러시느냐?’고 물었더니 ‘이번 달에 헛장사 했어요’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세금내고 직원들 월급 주고 났더니 한 푼도 안 남았다는 것이었습니다. 푸념하듯 하시는 그 집사님에게 ‘헛장사 아니네?’라며 말을 던졌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물었습니다. ‘집사님 재산 다 팔아서 은행에 집어넣으면 이자만 받아도 평생 골프치고 살 수 있지요?’ 당시는 은행 이자가 높은 때 이어서였는지는 몰라도 그럴 수 있을 것이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저는 그 집사님에게 누가 왜 사업을 하느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한번 대답해 보라고 말을 했습니다. ‘ 이 힘든 사업 걷어치우고 은행에 집어넣으면 평생 골프 치며 편하게 살 수 있어. 그런데 이 힘든 사업 왜 하는지 아냐? 돈 벌어서 나라 세금 내려고 그런다. 그리고 돈 벌어서 직원들 월급 주려고 그런다.’ 돈 벌어서 나라 세금 내려고 그런다는 말과 직원들 월급 주려고 사업한다는 평범한 말에 집사님은 충격을 받은 것 같았습니다. 한번도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일이 없었는데 듣고 보니 그럴 듯 했던 모양입니다.
노무현 대통령께서 현재 우리나라의 가장 심각한 문제를 양극화로 보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양극화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국정의 제일가는 목표로 삼으신 것 같습니다. 저는 대통령께서 매우 정확하게 보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양극화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우리나라에 있어서 가장 시급한 문제로 본 것에 대하여 동의합니다.
노 대통령께서는 그 양극화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으로 증세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논리적으로는 충분히 이해가 되는데 정치적으로는 좀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아무리 논리적으로 문제가 없고 옳은 이야기라고 하여도 그 말이 그리고 ‘그와 같은 정책을 국민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그리고 그와 같은 반응이 어떤 결과를 도출해 낼 것이냐?’까지 생각하고 말을 하고 정책을 결정하는 것이 정치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면에서 양극화의 문제를 너무 단순하게 생각하여 증세라는 방편으로만 풀어나가는 것에는 실제적으로 많은 문제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정치적인 면이 고려되지 않은 이상주의적인 정책이 도리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더 복잡하게 하는 면이 있는데 저는 개인적으로 지금 우리나라의 문제가 바로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와는 좀 다른 면에서 세금 내는 문제를 좀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우리나라만 그런 것은 물론 아니지만 사람들은 ‘세금 제대로 내면 바보’라는 생각을 대체로 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세금을 제대로 낼 수밖에 없는 직장인들은 자기들만 바보 취급을 받는 것 같아 그것에 대하여 억울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자기들 보다 수입이 많은 자영업자들이 수입을 속이고 신고하는 것에 대하여 속상해 하고 있습니다. 물론 자영업을 하시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또 나름대로 세금 내는 것에 대하여 억울해 하고 힘들어하는 면이 있다는 것을 알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월급쟁이든 자영업자이든 상관없이 할 수만 있다면 세금을 덜 내고 싶고, 숨기고 싶다는 것이 우리의 본능인 것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저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크리스천들은 본능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라 말씀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이어야만 합니다. 우리들이 본능대로 생각하지 아니하고 말씀대로 생각한다고 한다면 세금에 대하여 세상 사람들과 다른 생각과 행동을 하여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것은 두 말 할 것 없이 세금을 정직하게 제대로 내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나라 세금 떼어 먹으면 안 된다는 설교를 삼일절에 ‘신앙과 애국’이라는 제목으로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설교를 한지 얼마 되지 않아 어느 장로님 댁엘 심방 가게 되었습니다. 장로님 댁에 가보니 세무서장으로부터 받은 상패 하나가 있었습니다. 제가 유심히 그 상패를 보고 있으니 장로님께서 ‘목사님 말씀대로 했더니 하나 줍디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친구들이 자꾸 놀린다는 것입니다. ‘야 임마. 세상에 받을 패가 없어서 세무서장패를 받아 오냐?’ 저는 세상 친구들에게 바보 취급을 받아도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 집에 세무서장패 하나 정도씩은 있어야 우리나라가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 때문에 복을 받을 것이라는 아이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은 아직 교회와 목회자들에게 세금을 매기지 않고 있습니다. 저는 아직 합법적으로 면세특권자(?)입니다.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님은 아주 오래전부터 목사도 세금을 내야 한다고 생각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자진해서 세금을 내시곤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도 영락교회 부목사 시무를 할 때부터 세금을 내게 되었습니다. 영락교회를 사임하고 동안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면서 계속해서 세금을 내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저와 모든 교직원들이 다 세금을 내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사실을 청량리 세무서에 신고하였습니다. 그러자 청량리 세무서에서 동안교회에 사업자 등록증을 떼어 주었습니다. 그 등록증에는 제가 동안교회의 사장으로 되어있었습니다.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의 모든 교직원들은 다 세금을 내고 있습니다. 내야만 하는 세금을 내는 것이 아니라 합법적으로 내지 않아도 되는 세금을 내고 있습니다. 월급 명세서에 찍혀 나오는 갑근세 액을 보면서 가끔씩은 아깝다는 생각을 아직도 합니다. 돈이 좀 쪼들릴 때는 그와 같은 생각이 많이 납니다. 그래도 저는 목회자도 세금을 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제가 경제적으로 넉넉하기 때문에 하는 배부른 소리라고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목회자 중에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분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느냐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과 다릅니다. 세금은 본시 낼만한 사람들에게만 징수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요즘 목회자들 중에는 세금 내고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만큼 월급을 받는 목회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노대통령께서 양극화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필요한 자원을 증세를 통하여 마련하려고 하시는 모양인데, 그러기 위하여 세수 자원을 개발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해 보이는데 아마 한국의 목회자들에게 갑근세를 내게 한다면 적지 않은 세수입을 올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바램은 국가가 법으로 그것을 결정하기 이전에 우리 목회자들이 자진해서 갑근세 납부를 결정한다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세금 정직하게 납부하기 운동이라도 전개해서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양극화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자금을 마련해 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나라가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 국채보상운동을 일으켜 금 모으기 운동도 하였는데 요즘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나라를 위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하고 오직 자기 교회 하나 밖에는 생각할 줄 모르는 소심하고 이기적인 교회가 된 것이 아닌가를 스스로 반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큰 아이가 고3때 성적이 좀 떨어지는 것 같아 공부를 좀 열심히 하여야 하겠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아이에게 해 준 이야기가 ‘공부해서 남 주자’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때 아이에게 해 준 이야기가 오천 명분을 혼자 먹는 사람이 아닌 오천 명을 먹이는 사람이 되라는 이야기였습니다. 오천 명을 먹이기 위하여서는 능력이 필요한데 그 능력을 얻기 위해서 공부를 열심히 할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다음날 아이 책상 바람벽에 다음과 같이 써져 있었습니다. ‘공부해서 남 주자!’ ‘오천 명을 먹이는 사람이 되자!’ ‘하나님께 최상의 것을 드리자!’ 그날부터 아마 저희 큰 아이는 공부를 열심히 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시고 길을 열어 주셔야 하겠지만 공부하는 것만으로는 아마 그 목표를 어느 정도 달성한 것 같습니다.
저는 지지난 주일 기독교와 사회주의에 대한 설교를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를 사회주의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는데 제가 아는 한 기독교는 전혀 사회주의와 비슷하지 않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공동경작에 공동분배라는 개념이 나오지를 않습니다. 자기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스스로 내어 주는 일은 종종 있었으나 그와 같은 일을 공동경작과 공동분배라는 사회주의와 동일시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기독교는 언제나 가난하고 약한 자들에 대한 몫과 기회에 대하여 끊임없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십일조의 중요한 이유 중 하나도 구제였으며, 성경은 십일조 외에도 밭의 네 귀퉁이를 남기는 것과 떨어진 나락과 볏단을 줍지 말고 버려두어 가난한 사람들이 주워 가게 하는 것 등을 말씀함으로 구체적으로 가난하고 어려운 자들에 대한 배려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지난 주 설교에서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마는 가난한 자들과 약한 자들에게 대한 최고와 최대의 배려는 희년의 법이었습니다. 50년 마다 한 번 씩 모든 사람에게 동등한 기회를 주는 것에 대한 법 말 입니다.
기독교는 개인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개인적인 노력에 대한 정당한 대가와 보상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철저히 개인의 인격을 존중합니다. 인간을 ‘공동’이나 ‘단체’의 개념으로 묶지 않습니다. 철저히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격을 존중합니다.
개인의 승리와 개인의 성공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거기서 끝을 내지 않습니다. 정당한 승리와 성공을 인정하면서도 이유는 어쨌든 그와 같은 승리와 성공을 얻지 못한 사람들에게 대한 교만함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저들을 함부로 무시하거나 깔보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인간들은 승리와 성공의 목적을 누림에 둔다면, 하나님은 정당한 누림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으시지만 그것을 승리와 성공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가르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정당한 승리와 성공의 궁극적인 목적을 섬김에 둡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누림과 섬김의 균형에 대하여 민감합니다. 무조건 개인적인 누림을 죄악시하고 부정시하는 극단적인 청빈론자들과 영지주의자들 그리고 사회주의자들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깨끗한 부자라는 책을 써서 청부론과 청빈론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킨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저는 열심히 노력하여 성공한 사람이 좋은 집에서 살고 좋은 차를 타고 좋은 것을 누리며 사는 일을 무조건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보는 것은 건강한 사회를 위하여 좋지 않은 생각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청빈론자들에게 비판을 받을만한 삶의 여유를 누리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누림이 너무 지나칠까봐 조심합니다. 그 누림에 빠져 살게 될까봐 두려워합니다.
누림 자체를 무조건 죄악시 하거나 부정하지 않지만 누림에 너무 빠지지 않으려고 나름대로 룰을 세워 놓고 노력합니다. 성경을 읽으며 하나님이 제시하시는 가난한 자를 위한 몫을 계산해 보곤 합니다. 밭의 네 귀퉁이를 가난한 자를 위하여 남겨 두라는 말씀을 초등학교에서 배운 산수 실력으로 계산해 보았습니다. 21.5%였습니다.
가로와 세로가 10인 밭의 면적은 100이 됩니다. 그 밭의 네 귀퉁이를 계산하려면 그 밭에 내접한 원의 면적을 계산하면 됩니다. 밭의 내접한 원의 면적을 제하면 네 귀퉁이 몫이 나오게 됩니다. 가로와 세로가 10인 밭에 내접한 원의 면적은 5 제곱 파이입니다. 그것을 계산하면 78.5가 됩니다. 결국 가난한 자를 위하여 남겨야 하는 네 귀퉁이는 소득의 21.5%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도 자기 밭이 있어서 어느 정도 소출을 걷어 들이는 소위 부자라면 그 정도는 떼어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생각이십니다. 저는 그 정도 부자는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최소한 소득의 21.5%는 가난한 자를 위하여 떼어 보겠다고 결심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보다는 조금 높은 퍼센테이지를 실천하고 있습니다. 십일조와 교회에 하는 헌금까지 합하면 제가 절반을 쓰고 절반을 하나님과 어려운 이웃들의 몫으로 쓰는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밭의 네 귀퉁이가 기준이 되지 않고 삼년 마다 한 번 씩 더 했던 십일조가 기준이 되었습니다. 성경에 보니 삼년 마다 십일조를 더 내어서 특별히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들을 도왔습니다. 삼년에 한 번 더 하는 십일조를 매달의 몫으로 계산해 보니 한 달 수입의 하루 몫이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가난한 이웃을 위하여 떼는 몫의 기준을 한 달 수입의 하루 몫으로 생각하고 실천했습니다.
그것도 사실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익숙해지기 시작하였고 더 놀라운 일은 점점 힘이 더 생기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힘은 마음의 힘과 물질의 힘을 다 포함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은 네 귀퉁이를 떼는데 도전하게 되었고 지금은 네 귀퉁이 보다는 조금 더 뗄 수 있는데 까지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아이들이 공부 중에 있습니다. 유학을 준비하는 아이도 있는데 그렇게 된다면 아마 지금처럼 몫을 떼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도 최선을 다하여 십일조와 헌금 그리고 가난한 이웃을 위하여 네 귀퉁이를 떼는 일을 계속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지지난 주 희년에 대해서 설교하면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최소한 재산의 1/3은 희년 정신을 실천하는 마음으로 사회에 환원하고 싶습니다. 자꾸 제가 이와 같은 말씀을 설교 중에 하는 까닭은 첫째, 바보 같은 자랑(?)을 통하여 스스로를 묶기 위함입니다. 둘째, 여러분들과 함께 가고 싶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에는 많은 구제 헌금이 있습니다. 밑천 나눔 헌금, 이삭줍기 헌금, 쪽방 헌금등등. 그것을 희년 헌금이라는 이름으로 통일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지지난 주 설교 후 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희년 헌금을 모으고 그것을 사용하는 위원회 같은 것을 만들어서 희년의 정신을 실천해 나가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각자의 형편에 따라 하되 누구나 다 자기보다 어려운 이웃을 위하여 작은 몫이라도 약속하고 떼는 것을 생활화하고, 세상을 떠날 때 작은 재산이라도 자식들에게 유산으로 분배할 때 그 몫의 한 부분을 희년의 몫으로 떼고 죽는 것을 실천한다면, 그리고 그것을 교회가 정말 잘 활용하여 운영하여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들을 살리는 일에 사용한다면, 그리고 이와 같은 정신과 운동이 우리 한국 교회 전체에 퍼져 나갈 수 있다면, 그리고 그와 같은 우리의 작은 마음을 오늘 본문에 나오는 어린 아이의 오병이어처럼 예수님께서 받아 주시고 축사해 주신다면 굶주린 오천 명이 먹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는 기적이 오늘날에도 재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자꾸 듭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양극화의 문제는 우리 한국의 문제뿐만 아니라 세계의 문제입니다. 많은 정치가들과 경제인들과 NGO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지만 아직까지 저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아마 틀림없이 앞으로도 이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 문제는 정치가나 경제인 그리고 NGO들이 아닌 우리 크리스천들이 믿음으로 감당해야 할 일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오늘 본문의 아이가 아이와 여자를 뺀 오천 명이 굶주린 상황에 아무런 의미도 없는, 힘도 되지 않는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예수님께 가져다 드린 그 마음과 그 아름다운 마음에 대한 예수님의 축사로 말미암아 굶주린 군중 다시 말해서 백성을 먹인 것과 같은 일이 일어날 때 양극화의 문제를 해결될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저는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가 오병이어 기적을 다시 일으키는 일에 기폭제가 되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천 명을 먹일 수 있는 힘이 전혀 없는 우리들이지만 굶주린 오천 명에 대한 아픈 마음을 가지고 자기의 점심을 기꺼이 하나님께 내어 놓을 수 있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의 축복과 축사로 말미암아 결국 오천 명을 먹인 사람이 된 오늘 본문의 아이 같은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에 도전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먹고사니즘보다 귀한 것
마 14:13-21 / 이정선 목사
독재자들의 특징은 2인자를 용납하지 않는 것과 반대 세력을 참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권력을 나눌 줄 모르고, 비판을 견디지 못합니다. 헤롯 역시 자기에게 거스리는 사람을 참지 못하고 기어이 제거하는 스타일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이 희생되었습니다. 그렇게 요한을 없애버렸는데,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그 세례 요한이 다시 나타난 것 같았습니다. 이번에는 여러 가지 이적까지 행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하들에게 지시를 내렸습니다. 그렇게 다시 살아나 나타난 세례 요한에 대한 대책을 세우라는 것이지요.
누가복음(9:9)에 보면, 헤롯은 다시 살아난 것처럼 보이는 세례 요한을 만나보려고 했습니다. 여기저기 다니시면서 병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도 살리시는 예수를 헤롯이 세례 요한으로 오해하고 지목했다는 것은 예수의 신변을 대단히 위태롭게 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헤롯이 예수에 대한 지명수배를 내린 것과 같습니다.
13절에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셨다고 했는데, 뭘 들으셨는가 하면 헤롯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세례 요한으로 오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으셨다는 것입니다. 12절에 보면 요한의 제자들이 요한을 장사지내고 예수께 와서 고했다고 했기 때문에, 13절에서 예수님이 세례 요한의 죽음에 대해서 들으신 것으로 이해하기 쉬운데, 문맥을 잘 살펴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3절에서 12절까지의 내용은 요한이 어떻게 죽었는지 과거의 사건을 삽입해 놓은 것이고, 2절과 13절이 시간적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니까 헤롯이 신하들에게 말한 내용, 즉 자신을 지명수배 했다는 사실을 예수께서 들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배를 타고 빈들로 피하셨습니다. 사람들의 왕래가 없고 몸을 숨길 수 있는 곳으로 피신하셨다는 것이지요. 성경에 보면 예수께서 피하셨다는 기록이 몇 차례 나옵니다. 고향 나사렛에서도 성난 마을사람들이 예수를 낭떠러지로 끌고 가서 떨어뜨리려고 할 때, 예수께서 그 사람들 가운데로 지나가셨습니다(눅 4:29-30). 어떻게 지나가셨는지 모르겠지만, 그 위기를 피하셨습니다. 또 예수께서 나사로를 살리신 후 사람들이 나사로 때문에 예수를 믿게 되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본격적으로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를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잠적하십니다(요 11:53-54).
위험 앞에 맞서야 할 때가 있고, 도망가야 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으러 다메섹으로 가다가 오히려 예수를 믿게 된 바울을 유대인들이 죽이려고 했을 때, 바울은 줄에 매단 광주리에 몸을 싣고 밤중에 성벽을 내려가 탈출해야 했습니다(행 9:25). 하나님께서 피할 길을 내실 때 피하는 것은 잘못되거나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위험을 피해야 할 때 맞서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고, 맞서야 할 때 피하는 것은 비겁한 일이 되겠지요.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베드로는 로마에서 순교했는데, 핍박을 피해 도망을 치다가 로마로 들어오시는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묻지요. “주님, 어디로 가시나이까?” (쿠오바디스 도미네) 그러자 주님은 “네가 피하려는 십자가를 내가 다시 지러 로마로 간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에 베드로는 발걸음을 돌이켜 다시 로마로 들어가 순교를 당했다고 하지요.
위험에 맞서야 할 때와 피해야 할 때를 구별하고 판단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과도한 영웅심에 불필요한 희생을 자초하는 것은 현명하지 않은 일입니다. 또한 지나치게 몸을 사리다가 더 큰 것을 잃어버리는 것도 잘하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피하신 것은 아직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때가 되면 피하지 않으시고 붙잡히는 데 자신을 내주실 것입니다.하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붙잡히셨습니다.
헤롯의 지명수배를 받으신 예수께서는 배를 타고 빈들로 피하셨는데, 사람들이 그 소식을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예수님 계신 데까지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은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가셨는데, 사람들은 먼 길을 걸어서 예수님을 따라온 것입니다. 예수께서 보시니까 큰 무리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온 것은 세례 요한의 죽음과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요한을 선지자로 알고 따랐습니다. 그런데 그만 요한이 죽임을 당하자 큰 실의와 충격 속에 빠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던 차에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아났다는 소문이 들렸습니다. 물론 예수께서 세례 요한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어쨌든 세례 요한의 죽음으로 생긴 영적 공백을 채우기 위해 사람들은 예수님께 나아온 것입니다.
선지자의 죽음 앞에서 크게 낙심하고 마치 목자 없는 양떼처럼 방황하다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찾아온 사람들을 보시고 예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것은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엊그제 우리 에스더가 학교 끝나고 바로 아르바이트하러 갔다가 저녁에 돌아왔는데, 오자마자 침대에 엎어졌습니다. 밥 먹으라고 했더니 하는 말이 “아빠, 나 힘들어 죽겠어.” 그러는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보니 얼마나 측은합니까? 그렇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기는 이유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자신이 지으신 인간의 불행 앞에서 마음속 깊은 고통을 느끼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해 주시기로 작정하신 것 같습니다. 우선 병자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계시면서 하신 일들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이 병자들을 고쳐 주신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특별한 이적들을 행하셨지만, 그런 것은 몇 가지 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이적은 병자를 고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3대 사역 가운데 하나가 치유하시는 일입니다.
그날 모인 사람들의 수가 남자만 5천 명쯤 된다고 했으니까 여자와 아이들까지 하면 만 명 내지 2만 명쯤 되었을 것입니다. 만 명이라 치고, 그중에서 병을 가진 사람은 몇 명이나 되었을까요? 만약 지금 예수님이 이 자리에 오셔서 병든 사람을 고쳐주신다고 하면, ‘나 좀 고쳐 주세요.’ 하고 나올 분은 몇 명이나 될 것 같습니까? ‘나는 안 고쳐 주셔도 됩니다. 나는 병이 하나도 없고 건강합니다.’ 할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요?
물론 예수께서 병자들을 고쳐주신 사건들은 중풍병자이나 귀신 들린 자처럼 심각한 것들이었습니다. 저처럼 ‘골프 치다가 허리 다친 것 고쳐 주세요.’ 그런 부탁을 하기는 쉽지 않겠지요. 그러나 어쨌든 고침을 받기 위해 나오는 사람들의 줄은 끝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저녁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라고 안 피곤하셨겠습니까? 엊그제 어떤 분과 얘기를 하는 중에, 이분이 한국에 계실 때 침술을 배워가지고 봉사활동을 하신 적이 있었는데, 남들 도와주고 고쳐 주는 것이 좋아서 계속하다 보니까 본인이 지치고 골병이 들더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마음만 먹으면 하나도 피곤하지 않게 한꺼번에 모든 병자들을 고치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시간도 저녁이 될 때까지 오랫동안 고생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대형 집회에서 부흥사들이 하는 것처럼 ‘각자 자기 아픈 곳에 손을 얹으세요.’ 하고 한꺼번에 치유기도를 하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부흥사들이야 낫는 사람도 있고 낫지 않는 사람도 있겠지만, 예수님이 하시면 안 나을 병이 없겠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만져 주시고 고쳐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시고 대하시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집단 속의 하나로 대하시거나 다른 사람과 관련해서 우리를 아시는 것이 아닙니다. ‘네가 그 믿음 좋은 이 집사의 아들이구나, 너는 타우랑가 한인교회 교인이구나.’ 이렇게 우리를 아시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과 개별적으로 관계를 맺으시고 한 사람 한 사람을 직접 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각자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히 4:16). 목사나 신부가 성도를 하나님께 데려가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성도는 어떤 다른 중보자가 필요 없이 직접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중보자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께서 오셔서 하신 일입니다.
이것을 만인제사장설이라고 합니다. 종교개혁자들이 부르짖었던 기치입니다. 가톨릭교회에서는 지금도 신부를 사제라고 합니다. 사제란 제사장이라는 뜻입니다. 제사장의 역할은 하나님과 성도 사이에서 중보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오직 제사장을 통해서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성전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막아 놓았던 장벽이 없어졌습니다. 예수께서 자신을 제물로 삼아 하나님께 영원한 제사를 드리신 제사장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때 예수의 이름으로 합니다. 신부에게 죄를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직접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힘든 하루를 보내고 날이 저물어 가는데도 예수님이 계속해서 병자들을 고치고 계셨던가 봅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예수님께 말씀드립니다. “주님, 이제 사람들을 돌려보내야 할 것 같습니다. 이 들판에서 먹을 것을 구할 수도 없으니 빨리 보내야 집에 가서 저녁을 먹든지 동네에 가서 사먹든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병자들을 고쳐 주신 일이 한두 번 있던 일이 아니었지만, 그날은 특별한 날이었습니다.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 많은 사람들을 고쳐 주시려고 작정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먹을 것 때문에 예수님의 사역이 중단된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아직 자기 차례가 되지 않아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이 고침을 받지 못하고 돌아가야 한다면 얼마나 속상하겠습니까? 예수님 입장에서도 작정하고 사람들에게 구원과 사랑을 베푸시려고 하는데, 먹는 문제 때문에 떠나야 한다니까 얼마나 기가 막힙니까?
먹는 문제는 우리 인간의 영원한 숙제입니다. 지금 우리는 먹는 문제로 크게 고민하지 않고 있는 것 같지만, 현재 지구촌에서 절대 기아선상에 있는 인구가 8억에 달합니다. 사람들은 먹고 살기 위해서 일을 하고, 더 잘 먹고 살기 위해 도둑질도 하고, 더 큰 것을 먹기 위해 전쟁도 합니다. 먹고 사는 문제는 아담이 범죄한 결과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을 것”(창 3:19)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먹는 문제 때문에 예수님을 떠나야 한다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이 좋고 또 병도 나을 수 있는데, 먹을 것 때문에 마을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은 오늘 우리가 종종 접하게 되는 문제를 상징적으로 의미하는 것처럼 생각됩니다. 사실 우리도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신앙생활에 막대한 지장을 겪는 일이 많거든요.
그러나 아무리 먹고 사는 문제가 급하다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예수님을 떠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는 범죄의 결과이고,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러 오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만 명이 넘는 무리를 먹이신 것은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그들이 먹는 문제 때문에 예수님을 떠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임시방편으로 먹을 것을 주신 것에 불과합니다. 먹을 것 때문에 사람들을 돌려보내야 한다는 제자들, 더 있고 싶지만 먹을 것 때문에 돌아가겠다는 믿음이 연악한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관용과 자비를 베푸신 것입니다. 만약 그 사람들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와 같은 믿음의 사람들이었다면,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우리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으실지라도 우리는 주님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대답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하박국 선지자처럼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더라면,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을 즐거워하며 주님으로 인하여 감사하겠습니다.’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영국의 공리주의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은 배부른 돼지보다 굶주린 소크라테스가 낫다고 했습니다. 정신세계의 가치는 물질적 만족과 쾌락보다 더 우선한다는 것인데, 하물며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영적인 문제를 소홀히 해서야 될 일입니까? 먹고 사는 문제 중요합니다. 먹고 사는 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면 여러분의 인생이 몇 십 년 동안 편할 것입니다. 그러나 몇 십 년 편하자고 영원을 잃어버리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몇 십 년 주어진 우리의 인생은 영원을 준비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입니다. 몇 십 년을 투자해서 영원을 얻을 수 있다면 이것처럼 수익성이 높은 투자가 없습니다. 다시 한 번 부탁드리건대,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하나님께 소홀히 하고 믿음을 손상당하는 일이 없도록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빈들의 기적
마 14:13-21 / 이종철 목사
1. 따로, 빈들에서
예수님께서 빈 들로 가셨습니다. 빈 들은 광야입니다. 빈 들로 가신 이유는 그 앞에 있는 사건 때문입니다. 헤롯 왕이 예수님을 두려워합니다. 헤롯 왕이 두려워하는 이유는 세례 요한을 죽였기 때문입니다. 헤롯은 세례 요한처럼 예수님을 위험한 인물로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소식을 들으시고 따로 한적한 빈 들로 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헤롯을 두려워해서 피신하신 것일까요?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예수님을 비겁한 사람으로 평가하게 만듭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동안 항상 이런 위험을 안고 살았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위험을 피하시지 않고 항상 자기 길을 가셨습니다. 상황에 연연해하기 보다는 자기 때를 알고 자기 페이스를 조절하며 나아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빈 들로 가신 이유는 혼자 있기 위해서입니다. 이는 13절의 ‘따로’ 가셨다는 것과 14장 23절의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습니다. 광야의 오병이어의 기적 사건의 앞 뒤를 이 ‘따로’라는 말이 감싸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혼자 있으시면서 영적인 재충전이 필요했습니다. 사역이 많다 보면 우리는 영적으로 고갈됩니다. 예수님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수많은 무리들을 상대하시면서도 능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따로’ 있는 시간을 항상 가지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에서도 가끔은 이런 ‘따로’ 있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혼자 있는 시간은 실상은 하나님의 소리에 예민하게 귀를 기울이는 시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소리를 들어야 살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소리가 너무 많습니다. 이 세상의 소리를 듣다보면 우리 영혼이 고갈됩니다. 우리가 아침에 하는 QT라는 것도 이 ‘따로’ 있는 시간이나 ‘빈 들’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수련회를 온 것도 ‘따로’ 있는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이곳까지 와서도 몸만 ‘따로’고 마음은 도시나 사업에 두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도끼로 나무를 하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던 사람이 보니 도끼날이 무뎌서 나무가 잘 찍히질 않습니다. 그래서 “잠깐 쉬면서 도끼 날 좀 갈고 하시오”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러자 그 나무꾼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여보시오, 보면 모르오. 나는 너무 바빠서 도끼 날을 갈 시간이 없소”
여러분 이 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도끼날을 가는 시간이 낭비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도끼날을 잘 갈아야 더 많은 나무를 할 수 있지요. 우리가 ‘따로’ 바치는 시간은 우리 인생에서 너무 소중합니다. ‘따로’ ‘빈 들’에서의 시간이 우리 인생을 예리하게 만듭니다. 아마 우리 인생은 어리석은 나무꾼처럼 도끼날을 갈 시간도 없이 무딘 도끼날로 일을 하다 지쳐버렸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은 틈틈이 이 ‘따로’ 있는 시간을 가지셨기에 자기 페이스를 유지하며 인생을 효과적으로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무리들은 예수님을 가만히 놔두질 않습니다. 예수님이 빈 들로 가셨다는 말을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몰려들기 시작합니다. 순식간에 여자와 아이를 제외하고도 오천 명이나 되는 무리가 되었습니다. 빈 들이 삽시간에 꽉 찬 들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왜 이렇게 몰려들까요? 이유는 간단하죠. 먹을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게는 영적인 양식이 풍성하고 또 오늘 말씀을 보면 육적으로도 배불림을 받았습니다. 소문난 음식집은 어느 곳에 있든지 사람들이 달려갑니다. 허름한 곳이지만 사람들이 줄을 서 있습니다. 맛있기 때문이지요.
저희 교회도 이렇게 양식이 풍성한 곳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억지로 끌어오는 것이 아니라 먹을 것을 찾아 자연스럽게 몰려드는 곳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사랑이 풍성해야 하겠지요. 또 제가 말씀을 잘 전해야 되겠지요.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에 갈급해 합니다. 우리 안에 이 하나님 말씀으로 충만하다면 사람들이 이 말씀을 찾아 몰려들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사업이나 프로그램에 연연해하기보다는 하나님 말씀을 붙잡고 씨름하며 순종하려는 노력입니다. 승부를 여기에 걸어야 희망이 있고, 생명이 있고, 열매가 있습니다.
2.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주님은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말씀도 전하시고 병자들도 고쳐주십니다. 이 일을 하다보니 어느새 날이 저물어 갑니다. 제자들은 다급해졌습니다. 이곳은 빈 들이라서 먹을 것이 없습니다. 가까운 마을도 한참 떨어져 있어 많은 무리가 굶어야 할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요청합니다. 무리들을 이제는 집으로 돌려보내라고 합니다.
주님은 이 때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16절) 주님은 바로 기적을 행하실 수도 있지만 이 도전적인 이 말씀을 먼저 제자들에게 전합니다. 주님은 이 말씀을 통하여 제자들을 교육시키길 원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 지를 보여주십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헤롯 무리와는 다르기를 원하십니다. 다시 바로 이 앞에 있는 사건으로 되돌아갑시다. 헤롯은 백성을 먹이는 사람이기보다는 백성들의 등을 쳐서 백성들의 몫마저 빼앗는 존재입니다. 자기에게 싫은 소리를 한다고 하여 세례 요한을 가두고, 백성들의 세금으로 흥청망청 연회나 하며, 정의를 세우지 못하고 자기 기분 내키는 대로 합니다. 그러니 백성들이 의지할 곳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무리를 불쌍히 여기셨던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목자 없는 양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헤롯처럼 5천 명 분을 먹어치우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5천 명을 먹이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기 전에 먼저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을 나누었듯이 교회는 만물을 다스리는 위치에 있습니다. 그 순서가 이렇게 됩니다. 만물이 있고, 그 위에 교회가 있고, 그 머리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주님은 만물을 다스리되 교회를 통해서 다스리시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교회는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함이 있는 곳입니다.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르셨습니다. 왕이 왕 노릇을 잘해야 백성이 평안합니다. 한국사회가 어려운 이유는 한국교회가 왕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제 먹을 몫만 챙기면 그만인 존재들이 아닙니다. 어디를 가든지 책임자적 존재로 주님은 우리를 부르십니다. 사업장이나, 직장이나, 지역사회나 그 어떤 모임이든 주님은 우리가 그런 존재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 마음속에 큰 비전을 품으십시오. 짧은 인생 시시하게 살지 않기를 소원하십시오. 제 인생이 최소한 5천명을 먹이고 영향력을 미치는 그런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몇 년 전 ‘야베스의 기도’라는 것이 유행했습니다. 지금까지 계속해서 야베스의 기도를 드리고 있다면 여러분은 이미 성공한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야베스의 기도 내용은 이렇습니다.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 /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대하4:10)
야베스의 기도는 축복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영향력 있는 인생이 되기를 간구하는 기도입니다. 저는 우리 신앙인들이 실존이 이렇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세전부터 왕 같은 지도자들로 예정하셨습니다. 야베스의 기도는 우리 실존을 되찾기 위한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시고 이렇게 축복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1:27, 28)
이 게 우리의 본질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잃어버린 형상을 찾아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이런 비전을 품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자녀들도 이 말씀으로 축복해 주십시오.
3.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기적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런 도전적인 말씀을 하시자 제자들의 반응이 나옵니다.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니이다”(17절) 주님은 이 오병이어를 가져오라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 곧 감사 하시고 떡을 떼어 나누어 주십니다. 그러자 남자 장정만 오천 명에 여자와 아이까지 합치면 수만 명이 되는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었고, 남은 조각도 열두 바구니에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은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다른 성경에서는 어린 아이의 한 끼 식사분에 해당하는 작은 량이라고 증언합니다. 그러나 작은 것이 중요합니다. 비록 작은 것일망정 하나님께 바쳐질 때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통해 기적을 행하십니다. 0 이라는 숫자에는 아무리 큰 수를 곱해도 0이 됩니다. 그러나 1이나 2일망정 그 작은 수가 드려지고 그 위에 하나님의 능력이 임할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에게 기적을 베풀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엘리야가 먹을 것을 달라고 말하자 사르밧 과부가 이렇게 말합니다. “저가 가로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왕상17:12) 당시는 가뭄이 심해 이것도 마지막 비상식량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그것을 자기에게 바치라고 명령합니다. 사르밧 과부가 가루와 기름으로 떡을 만들어 엘리야에게 바치자 엘리야는 다음과 같은 기적을 행합니다.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는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왕상17:14)
하나님은 우리의 조그만 헌신을 받으셔서 기적을 행하십니다. 저는 그래서 이 원리가 마치 물펌프의 원리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수십 년 전에는 작두형 물펌프가 유행을 했습니다. 손잡이가 마치 작두 손잡이처럼 되어 있고, 마치 주전자와 같은 조그만 용기가 파이프로 해서 지하수까지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물 한바가지를 넣고 열심히 펌프질을 하면 그 속에서 시원한 지하수가 올라옵니다. 이 때 붓는 물 한바가지를 마중물이라고 합니다. 마중 나가는 물이라는 뜻인지 정확히 이해가 가지 않지만 이 마중물을 따라서 수많은 시원한 물들이 올라옵니다.
우리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조그마한 헌신이 마치 마중물과 같습니다. 이 마중물이 없이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마중물은 우리 속에서 영생 수가 솟구치도록 자극하고 이끄는 기적의 물입니다. 하나님께 헌신의 물 한 바가지 붓고 열심히 기도와 순종의 펌프질을 할 때 이런 놀라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저희가 지금 붓고 있는 헌신이 바로 이 마중물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시간을 붓습니다. 우리의 물질을 붓습니다. 우리의 젊음을 붓고, 우리의 미래를 붓습니다. 이 물은 결코 사라지는 물이 아닙니다. 마중물이 되어 우리 인생에 기적을 만들어냅니다. 오병이어의 작은 헌신이 기적을 만들어내었듯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신앙의 원리와 세상의 원리는 다른 것 같습니다. 세상은 모든 것이 갖추어진 연후에야 움직입니다. 정확한 계산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어떨 때 보면 무모한 것 같습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데 비전을 좇아 움직입니다. 사실 저희 교회 형편이 그렇습니다. 통장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단지 비전을 좇아 헌신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모한가? 세상 눈에는 그렇게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한 가지 결정적 변수가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입니다. 우리에게 지극히 크신 능력을 주시는 분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믿음의 눈으로 본다면 우리 계산이 그렇게 무모한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을 채워지기까지 기다리다가는 우리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면 자신을 던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채워주십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광야의 영성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광야의 영성과 가나안의 삶이 있습니다. 가나안의 삶은 창고에 곡식을 가득 쌓아두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광야의 영성은 매일 주시는 하나님의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는 삶입니다. 손에 쥔 것 없습니다. 그래서 굶어 죽을 것 같은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하나님이 채워주십니다. 가나안의 삶은 풍족하고 여유가 있지만 결정적으로 하나님을 잃어버리기 쉬운 삶입니다. 광야의 영성은 가진 것은 없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는 그 무엇보다도 친밀합니다. 매일 기적을 체험하니까요. 우리가 가진 것보다 하나님이 가진 것이 수백 배 많기에 기적을 만드는 것이 광야의 영성입니다.
우리는 아무 가진 것도 없이 출발했습니다. 메마른 세상에 오아시스와 같은 교회가 되기를 소망하고, 바닷물만 가득한 곳에 진정한 생수가 되기를 원하고, 저 북한 땅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생명을 전하는 비전을 가지고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진 오병이어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우리 손에 든 것은 물맷돌 다섯 개처럼 작은 것이지만 그 위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나아갈 때 주님께서는 골리앗과 같은 문제들을 넘어뜨릴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적을 행하시되 째째하게 행하시지 않습니다. 모두 배불리 먹고 열두 바구니가 남을 정도로 풍성하게 하실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믿음으로 살아 빈들에 기적을 일으키는 여러분 되시길 소망합니다.
오병이어
마 14:13-21 / 박세갑 목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본문의 기사는 4복음서에 모두 나옵니다. 그만큼 우리에게 익숙한 말씀으로 여러분들도 여러 차례 본문의 설교를 들으셨을 줄 압니다. 우리는 앞에서 헤롯이 주님의 소문을 듣고, 주님을 자신이 죽인 세례 요한의 부활로 오해하고 있음을 주님께서 들이시고 조용히 광야로 피하신 것을 보았습니다. 주님은 그 광야 도처에서도 주님을 찾고 기다리는 군중을 만나게 됩니다. 마태는 그들이 주님께서 가신 소문을 듣고 걸어서 주님을 따라갔다고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그 중의 병자를 고쳐주셨고 저녁이 되자 그들을 먹이셨습니다. 주님을 향한 박해가 날로 심화되는 가운데서도 주님은 사람들의 영육간의 궁핍을 채워주시는 일을 쉬지 아니하셨습니다. 그 곳에 이 기적의 이야기는 정말 아름다운 한편의 동화입니다. 오늘은 주님께서 그들을 먹이신 후에 다시 한적한 곳으로 물러나시는 것이 가르치는 의미를 살피고 은혜를 나누려합니다.
이 내용은 요한복음에 잘 나타납니다. (요6:14~15)을 봅시다. “그 사람들이 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은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우리는 여기서 왕이 될 절호의 기회를 버리시는 예수의 모습을 봅니다. 당시에 주님 곁에 있던 사람은 여자와 아이를 제외하고 오천 명이나 되었습니다. 주님은 이들이 주님을 강제로라도 그들의 왕으로 삼기를 원한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실로 그 순간은 한 사람이 군중들과 함께 어떤 일을 도모하기에 다시없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주님은 그들을 이용하셔서 왕이 되실 수도 있었고 오천 명을 거느리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진격할 수도 있었습니다. 오늘 날에도 오천명은 많은 병력입니다. 이들만을 이용하여 승리하지는 못해도 이스라엘을 봉기시키기에는 충분합니다. 주님께 모처럼 찾아온 호기입니다. 아마 주님의 제자들도 그렇게 말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군중들의 환호 뒤에 감추어짐 동기는 무엇이었을까요?.
요한복음은 이들의 동기를 주님께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은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을 양식은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자니라 (요5:26~27).”하셨습니다. 그들이 주님을 왕으로 세우려는 까닭은 주님께서 그들에게 물질적인 혜택을 베풀어 주실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이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개로 오천명을 먹인 것 같이 우리의 물질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왕으로 세우자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들의 동기는 물질적인 것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으로 하여금 자기들이 원하는 자기들의 나라를 세우기를 원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의 동기와 방법과 목적을 모두 거부하였습니다. 세상의 양식으로 백성들의 배고픔을 해결하여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나라를 세우는 것과,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이끌리어 왕이 되시는 것과, 그들이 생각하는 세상나라를 세워 로마를 쳐부수고 세상에 군림하는 국가를 만드는 일들을 거부하셨다는 말입니다. 이점은 오늘날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주님을 우리의 왕으로 모셔야 합니다. 주님의 뜻에 순종하여 주님의 나라를 이루기만 한다면 이에 소용되는 모두는 주님께서 해결하실 것입니다. 이점을 오늘날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주님을 우리의 왕으로 모셔야 합니다. 주님의 뜻에 순종하여 주님의 나라를 이루기만 한다면 이에 소용되는 모두는 주님께서 해결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일을 물리적이고 물질적인 것으로부터 시작하시지 않으십니다. 우리들이 주님을 우리 존재의 중심에 영적인 왕으로 모시지 않으십니다. 우리들이 주님을 우리 존재의 중심에 영적인 왕으로 모시지 않으십니다. 우리들이 주님을 우리 존재의 중심에 영적인 왕으로 모시지 않는 한, 우리는 폭력적 방법을 거부하십니다. 그래서 자신의 제자들을 먼저 떠나 보내심으로 그 무리를 해산시키셨습니다. 제자들도 무리들의 의견에 동조하고 있음을 아시고 그들을 재촉하셔서 먼저 떠나게 하심으로 무리들의 계획을 무산시키신 것은 정말 아름다운 광경입니다. 제자들은 언제나 은근한 압력을 주님께 가하고 있었습니다. 학자들 가운데 가롯 유다의 배반도 이런 시도로 해석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하고 물음으로 전과 똑 같은 질문을 합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도 주님의 일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본문으로 돌아갑시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호수 건너편으로 먼저 보내시고 무리를 흩어 집으로 돌아가게 하셨습니다. 그런 후에 주님은 기도하시려고 따로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예수께서 불의한 왕 헤롯에게서 멀리 떠나셨고, 또 자신을 왕으로 삼으려는 불의한 생각을 품은 무리들로부터 떠나셔서 자신을 이 땅에 보내신 분과 마주 대하셨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줍니다. 주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나라를 이 땅에 세우고, 지키며, 자기 백성을 부르심이 모두 주님의 권한입니다.
주님은 자기에게 나온 그 백성의 어리석음과 죄악을 모두 아셨지만 그들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그들은 단지 배고프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신분이나 지위, 아무것도 주님의 긍휼과 사랑의 대상에게 제외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사는 도시에 가장 흉악한 자라도 그가 배고픈 사람이라면 그를 먹일 책임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를 불쌍히 여기실 것이고 예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그런 물질을 베푸시는 능력으로 사람들의 지지를 얻고 그 위에 나라를 세우지도 아니하셨습니다. 그것들은 모두 부수적인 것들입니다. 주님의 나라는 반드시 우리의 영적인 지지와 영적인 삶이라는 든든한 바위 위에 세우십니다. 그것이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썩어질 양식을 구하는 물질적인 나라를 세우시려고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이고 그 나라는 언제나 우리의 영적인 명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나 주님은 영적인 면에만 머물지 않으시고 나아가 우리의 물질적인 삶과 정신적인 사람까지 주관하심으로 우리의 삶 전체를 통하여 그의 나라를 이루어가십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마음속 갚은 곳에 그리스도를 진실하게 왕으로 모신 사람은 영적인 삶뿐만 아니라 물질적이며 정신적인 삶까지 그리스도께서 보살피시고 인도하시고 필요를 채워주실 것을 확신함으로 편안히 쉴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때때로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섬기는 자를 물리적으로 부유하게 하시는 대신 오려 가난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물리적으로 가난한 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축복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영적으로 그리스도를 왕으로 삼고 그를 섬기는 것이 자기의 가진 것을 배설물로 여겨 버려야하는 것을 의미하기 도 합니다.
세상의 권세를 가진 왕 헤롯을 멀리 떠나시고 물질에 의지하여 자기를 왕으로 세우려 하는 무리를 떠나시는 주님을 바라봅시다. 주님 안에 본질적인 신성이 있습니다. 그분의 신성 앞에 무릎 꿇어 경배할 때, 주님은 우리의 영적인 삶을 기반으로 그 위에 자신의 왕국을 세우십니다. 왕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우리 마음으로 영접합시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들어오셔서 우리를 억누르던 어둠의 권세를 깨치시고 우리를 죄의 노예에서 해방시켜 자유케 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부족함 가운데서 행하시는 기적
마 14:13-21 / 김병삼 목사(만나교회)
요즈음 들어 사회적으로 나타나는 현상 가운데 하나가 ‘현실도피’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왜 현실에서 도피하려고 할까요? 아마도 현실의 문제를 타파할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동아대 인문과학대학 학장인 박은경 교수는 국제신문 칼럼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근래 '응답하라' 시리즈와 외딴 섬에서 하루 세끼를 해결하는 예능프로그램이 대중의 폭발적인 관심을 받았다. 두 프로그램이 공통으로 현실도피라는 코드와 맞물린다는 생각에 팍팍한 우리 사회의 현실을 반영한 듯해 애처롭다. …
희망마저 보이지 않을 때는 비현실적인 대안으로 과거로의 회귀를 꿈꾼다. … 그러나 응답할리 없는 과거에 대고 응답하라는 외침은 물질적 풍요는 없더라도 미래에 대한 희망이 지배했던 시대에 대한 동경으로 읽힌다.
희망을 잃었다는 것은 끊임없이 삶에서 느끼는 ‘부족감’ 그리고 ‘절망감’ 같은 것이죠.
오늘의 기적은 바로 빈들에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제자들을 통해 진정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채우시는 예수님의 기적이 나오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가진 것이 없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채워지지 못하는 것이 문제임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현실을 도피하는 방법을 알려주신 분이 아니라, 현실을 이기고 소망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오늘 말씀의 기적은 예수님의 사역 가운데 가장 많이 알려진 사건입니다. 우리가 흔히 ‘오병이어’의 기적이라 부르는,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를 가지고 오천 명을 먹이신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 기적의 배후에 참 아픈 예수님의 마음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간과하는 것 같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께서 들으시고’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바로 전에 마태복음 14장 1~12절에서 자신의 사촌이었고 자신의 길을 예비했던 선지자 세례 요한의 목이 잘렸다는 소식과 그의 제자들이 그의 몸을 장사지냈다는 소식을 예수님께 전한 것이죠. 그 소식을 들은 예수님은 13절에,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 들에 가시니”
“무리가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따라간지라”
‘빈들’이 영어로는 ‘solitary place’라고 되어 있습니다. 혼자 배를 타고 아무도 없는 곳으로 떠나신 것입니다. 여기서 ‘떠나다’는 말도 ‘withdrew’라는 말인데, 의도적으로 자신이 피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예수님이 그곳으로 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따라갑니다.
대중은 자신들의 필요를 따라갑니다. 종종 ‘공인’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감정에 충실할 권리를 잃어버리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목회하면서 아마도 이런 예수님의 상황이 더 이해가 되는 것 같습니다. 인생을 살면서 힘들고 어려운 일, 슬픈 일을 만나도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사람들을 대해야 하는 것, 혹은 기쁜 일이 있어도, 이 기쁨을 함께 나누지 못할 사람들 때문에 참아야 하는 일.
오늘 말씀에 보니까, 예수님이 한적한 곳으로 가신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사람들이 죽 걸어서 쫓아간 상황입니다. 그렇게 자신을 따라오는 사람들을 바라보시며 예수님의 마음에는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드셨습니다. 14절 말씀을 보세요.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자를 고쳐 주시니라”
여기에서 ‘불쌍히 여기다’라는 말은 ‘compassion’이란 단어를 쓰고 있는데, 예수님을 따라오는 군중의 아픔을 공감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을 보면 거기에 늘 ‘주님의 마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파하시는 마음 때문에 불쌍히 여기시고 기적을 행하시는 주님이 있습니다.
아주 중요한 것을 깨닫게 되는데,
“기적은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아파하는 마음과 사랑하는 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기적이 일어나는 곳에는 ‘하나님의 마음’이 있고, 그 마음으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만일 기적을 행하는 사람, 기적을 요구하는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거나 자랑하려는 마음이 있다면 ‘하나님의 기적’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사탄의 시험에서 ‘기적을 거부’하셨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돌을 들어서 빵을 만들라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요, 높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보라는 것은 하나님과 관계없는 능력을 자랑하는 것이요, 사탄에게 절하는 것은 하나님을 부인하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기적을 이야기하고 기적을 구할 때마다 우리가 새겨야 할 것입니다.
‘그곳에 하나님의 마음이 있는가?’
곤란한 상황
우리의 인생에서 곤란한 상황을 만나고, 그 상황을 우리의 힘으로 해결할 방법이 없고, 그 상황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안타까운 마음이 있다면 기적이 일어나는 최적의 조건이 형성된 것입니다. 본문 15절을 보세요.
“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이곳은 빈 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
예수님이 한적한 곳으로 사람들을 피해 왔던 그 장소로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들었고, 예수님의 능력으로 병 고침을 받았습니다. 문제는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은 아닌데, 떡이 필요한 존재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곳에서 현실적인 문제인 ‘떡’을 해결한 방법이 없습니다. 필요는 있는데 해결할 방법이 없는 것이 ‘곤란한 상황’이 아닐까요?
이러한 상황에서 해결할 수 있는 제일 좋은 방법은 ‘현실을 도피’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제자들이 제시한 방법은 ‘해결책’이 아니라 ‘도피책’입니다. 사람들을 다 보내어 마을에서 음식을 사 먹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곳에서의 예수님의 사역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에는 생략되어 있지만, 평행 본문인 요한복음 6장에는 예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이유가 명백하게 나와 있습니다. 이 기적 이후에 행하신 설교 때문이지요. 예수님이 이 기적을 행하신 후에 바다 건너편으로 가셨고, 그곳에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6장 26~27절입니다.
26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27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떡을 만들어주셨지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육신의 양식을 위해서가 아니라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 주시겠다는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참 중요한 신앙적 태도가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곤란한 상황을 만났을 때, 우리가 그 현실을 피해 가는 것이 아니라 해결해야 할 때, 그 상황을 바꾸시는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출처: [리 스트로벨의 불변의 소망], 리 스트로벨, 두란노, 2016. (P.112-113)
나는 초신자 시절 당시 교인들의 질문 카드에 답하는 일에 자원했다. 어느 주일, 열두 살짜리 여자애가 단순히 예수님에 관해 더 알고 싶다는 내용의 카드를 제출했다. 그리고 나중에 내게 전화를 걸어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사모님과 함께 와 주실 수 있으세요? 저희 아빠와 함께 얘기를 좀 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좋지!” 예수님을 전하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시간을 낼 수 있었다. 그런데 아내와 함께 그 가족의 집에 도착해서 거실 탁자 위에 수북이 쌓여 있는 책들을 보고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하나같이 기독교 비판자들이 쓴 책이었다. 알고 보니 그 여학생의 아버지는 오랫동안 기독교의 맹점을 연구해 온 학자였다.
여학생의 아버지는 피자와 음료수를 앞에 두고서 한밤중까지 질문을 퍼부었고, 나는 대부분 질문에 제대로 답변할 수가 없었다. 솔직히, 몇몇 질문은 내 믿음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마침내 나는 이렇게 말했다. “주신 질문에 제가 다 답변해 드릴 수는 없지만, 선생님이 아무리 애를 쓰셔도 기독교의 기초를 무너뜨릴 만큼 결정적인 흠을 찾아낼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께 말씀드릴 좋은 답이 있다고 자신합니다. 제가 좀 더 조사해서 오겠습니다.”
그날 적잖은 의심을 품고 집에 돌아온 나는 그때부터 새로운 영역들을 파헤치기 시작했고 곧 만족할 만한 답들을 발견했다. 덕분에 기독교에 대한 내 확신은 전보다 훨씬 더 강해졌다. … 지금 나는 이런 종류의 질문을 전보다 더 잘 다루게 되었다.
곤란한 상황이 우리를 성장하게 한다는 것, 그리고 우리를 사명의 자리로 인도하도록 살아간다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요?
도전적인 명령
오늘의 기적은 예수님의 도전적인 명령에서 시작하고 있습니다. 현실에서 도피하고자 하는 제자들에게 현실을 직시하고 문제를 해결하도록 도전하고 계십니다.
본문 16~18절에 보니까,
16. 예수께서 이르시되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17. 제자들이 이르되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이니이다
18. 이르시되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하시고
현실적으로 제자들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현실적으로 제자들이 가진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현실을 기적으로 만드는 중요한 공식이 존재하는데, 우리가 가진 현실을 보게 하시지만, 그것을 가지고 ‘오라’는 것입니다.
기적은 우연이 아니라 ‘의도적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무언가를 묻거나 명령하셨을 때는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한적한 곳에서 말씀을 마치고 사람들을 돌려보내도 될 일인데, 굳이 이곳에서 사람들을 먹이라고 명령하시는 불합리한 상황이 의도가 있다는 말입니다.
가만히 말씀을 묵상하다 보니,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들은 아주 불합리한 명령을 통해 드러나죠. 그래서 우리 삶에 불합리한 명령이 들어올 때는 ‘왜’라고 묻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라고 물어야 합니다. ‘왜’라는 물음은 ‘어떻게’를 통해 드러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런 단편적인 기적도 있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하시는 과정이 놀라운 기적이 아닐까요? 당시 애굽과 이스라엘이라는 구도 속에서 어떻게 가능한 일일까요?
그런데 기적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은 참 이해하기 힘든 거죠.
‘왜’ 광야에서 40년을 헤매도록 하셨을까요? 광야의 시간 동안 많은 기적이 일어났지만, 그런 기적이 없이 1주일 정도에 가나안으로 가게 하셨으면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광야에 들어서는 순간,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안내를 받아 광야 깊숙이 들어가는 순간 ‘왜’라는 물음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제 어떻게 그 과정을 통과하느냐, 하나님과 동행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을 앞에 두고, 요단강을 건너며, 모세가 느보 산을 앞에 두고 죽으며,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는 일들을 경험하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깨닫습니다. ‘왜’ 하나님이 40년을 광야에서 보내게 하셨는지, 왜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셨는지 말입니다. 사실 직선으로 인도해 주셨다면 ‘만나’의 기적이 없이도 가나안에 다다를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오늘의 기적이 그런 상황이 아닐까요?
사람들을 돌려보내면 될 일을 굳이 왜 이 광야에서 먹이라고 하시는지 말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너희들이 먹이라’고 명령을 하시는지 말입니다. 이제 필요한 것은 ‘왜’가 아니고 ‘어떻게’입니다. 이제 ‘어떻게’가 작용하기 시작합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개’뿐입니다.
‘내게로 가져와라’
‘왜’ 예수님께서 빈들에서 사람들을 먹이셨는지는 나중에 깨닫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기적을 행하시는 방법은 제자들이 가진 것을 가지고 예수님께 가져와 기도하셨다는 것이죠. 본문 19절을 보세요.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우리가 가장 많이 들었던 해석일 것입니다.
비록 작은 것이지만 주님께서 ‘축사’하셨다는 것, 그리고 그 떡을 제자들을 통해 나누셨다는 것. 하나님께서 만드시는 기적을 사람을 통해 보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말씀 가운데 하나가 ‘축사’라는 단어입니다. 두 가지 단어가 결합해 있습니다. ‘축복하고’ ‘감사하다’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눈에는 불쌍한 사람들이 보였고, 그들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문제는 날이 저물자 먹을 것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안타까운 마음에 이 상황을 어찌해야 할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해결이 아니라, 제자들을 근심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제자들이 근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들이 가진 것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가진 것이라고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었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가진 것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할 때, 주님은 우리가 가진 것으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참 좋아하는 말 가운데 하나가 ‘영광’입니다. 우리의 성공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신다는 그럴싸한 고백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통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는 말이, 그럴싸한 성공의 욕구를 포장하고 있을 때가 참 많은 것 같습니다.
지난해 저에게 참 커다란 울림이 되었던 책 중의 하나가 [내가 왕바리새인입니다]라는 허운석 선교사의 글이었습니다. 그분이 성공과는 정반대의 길에서 말기 암으로 인해 사람들에게 외면당할 때, 하나님의 축복을 간증한 설교 중에 일부를 소개합니다.
하나님은 내게 암이라는 시련을 주셔서 도살당할 양같이 여기게 하셨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저 선교사는 무슨 큰 죄를 지었기에 저런 병에 걸렸나’라는 소리를 듣게 하셨습니다.
어떤 교회는 건강할 때는 나를 그렇게 초청하더니, 병들자 교인들이 시험에 든다며 단에 세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나를 천대받게 하심으로 내 영혼을 보호하십니다.
내가 뭐라고 하나님이 이렇게 내 영혼을 간수하십니까?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비참하지만, 그분의 끔찍한 사랑을 알기 때문에 말로 다할 수 없는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그리고 내가 받는 이 고통과 괴로움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떡과 포도주가 됩니다. 그 사실이 감격스럽습니다.
“선교사님, 나도 그 사람을 맞고소할까 봐요!”
모함을 당해 억울하다고 호소하는 어떤 분에게 나는 이렇게 대답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못된 것은 사람들이 다 알지요? 당신이 꾹 참고 있다는 것도 사람들이 다 압니다.”
그러자 그분이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하더군요.
우리가 겪는 고난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떡과 포도주가 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 기적은 우리가 가진 것, 우리가 누리는 영광을 가지고 일어난 기적이 아닙니다. 가장 보잘것없는 것,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을 ‘축사’하심으로 행하신 것입니다. 때로 우리의 부끄러움이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 나누어 줄 수 있습니다. 때로 우리의 고통과 괴로움을 감내하는 모습이 떡과 포도주가 되어 전달됩니다. 작은 것에서 시작된 오병이어의 기적이 놀라운 이유입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이야기합니다.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
제자들처럼 우리는 늘 우리의 최선을 말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최선은 늘 우리의 가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해결책이란 늘 우리의 소유에 근거할 뿐입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신세를 한탄할 때가 많습니다.
제자들이 제시한 방법은 해결책이 아니라 신세 한탄이며 하소연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하소연을 듣고는 그것을 가져오라고 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찮은 제자들의 소유를 예수님께서 ‘축복’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축복하시자 제자들의 소유가 아닌, 하나님의 축복이 나타났습니다.
참으로 감사한 것은 예수님이 축복한 것을 다시 제자들에게 주시며 그것을 나누어 주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것을 깨닫게 되는데, 하찮은 우리 인생도 주님이 축복하시면 위대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이고, 주님은 우리를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놀라운 사실입니다.
제가 늘 생각하고 깨닫는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시는 것은 ‘자격’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시기 때문에 ‘자격’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종종 착각하는 위대한 기도들 역시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저를 드립니다. 저를 사용하세요!’라는 기도가 위대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자격이 충분하거나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가치 있게 여겨주셨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신기하죠.
예수님께서 빈들에서 굶주린 5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우리에게 먹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격이 없는 제자들에게 말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자들의 능력으로 될 수 있는 일이 아닌데, 참 작고 부족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오병이어’가 충분한 능력이 아니라, 그것을 보시고 감사하시고 축복하신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세가지 교훈
마 14:13-21 / 유민용 목사
본문의 오병이어 기적의 사건은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사건입니다. 야외에서 일어난 단체식사 사건이지요. 오병이어의 기적은 대략 여자와 아이들까지 2만명으로 추정하는데, 수련회를 인도해본 경험으로 보면 이 인원이면 배급을 위해 적어도 훈련된 100명은 필요해 보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름도 모르는 한아이의 5개의 떡과 2개의 물고기로 모인 모든 사람을 풍성하게 먹이십니다. 언뜻 상상해 보아도 이 사건은 물위를 걷는 기적 같은 사건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성경은 요한복음을 비롯해서 마태 마가 누가가 다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표적은 4복음서가 공통적으로 다 기록하고 있는 유일한 행적입니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시대에 이 말씀을 해석하기에는 이해할수 없는 사건이지요. 그러나 성경에서 기록한 기적에 대한 부분을 도려내고 성경을 보게 되면 현실에 눈에 가려져 그리스도의 신비가 감춰집니다.
이 시간에 보스턴 케임브리지 교회 공동체에 주시는 메세지는 무엇일까요?
1. 오병이어의 표적은 생명의 떡이 되시는 주님을 가리킵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이 소식을 들으시고’ 라고 시작합니다. 주님은 세례 요한의 순교 소식을 듣고 혼자 조용한 곳으로 가셨습니다. 요한은 제사장 가문의 아들로 태어나 한결같이 그리스도의 오심을 선언하며 그 길을 예비했던 사람입니다.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는 예수께 세례도 주었습니다. 그런 요한을 예수께서는 많이 아끼셨습니다. 그런 그가 순교를 했다는 소식을 들었을때, 예수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모든 사람은 깨어진 세상에서 저마다 힘겨운 씨름을 하며 살아갑니다. 때로는 경쟁 사회속에서 패배감에 짓눌려 주눅들기도 하고, 인생의 어둡고 슬픈 터널을 지나가기도 합니다. 홀로 빈들에 나가 외로운 시간을 보내야 하기도 하고 풍요속에서 빈곤의 마음을 마주해야 할때도 있지요. 세상에는 우리가 이해할수 없는 일들이 참 많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우리의 문제를 주님 앞에 갖고 나오시기 바랍니다. 주님 안에서는 내 삶의 문제보다 더 크신 주님의 선함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미국의 퓨리서치(Pew Research Center)가 경제 선진국 14개 국민들을 대상으로 코로나19가 종교와 가족 관계 등에 미친 영향을 조사했습니다.그 결과 코로나19로 인해 모든 국가가 종교적 신앙이 ‘강해졌다'는 응답이 높게 나타났습니다. 전 세계를 고통 속으로 밀어 넣은 코로나19가 인류에게 삶과 고난의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오병이어의 사건은 날이 저물고 어둠이 깊어지는 시간에 일어납니다. 빈들은 아무것도 없는 공허함이고 허무함이 가득한 공간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주님이 계셨고 머무르셨습니다. 텅 비어 있는 곳이야 말로 하나님의 영광이 채워질 수 있는 장소였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은 인간의 절대 한계상황으로부터 하나님의 구원이 시작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날이 저물어 가는 어둠의 시간이 주안에서는 밝아집니다. 하나님의 영이 가득해 지면 흑암이 가득하던 그곳에 운행하시던 하나님이 숨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들판에서 일어난 신비는 예수님이 죽은 자로부터 부활하셨다는 확증입니다. 오병이어 사건은 예수가 메시아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오병이어의 사건 이후에 예수가 유월절 생명의 떡이라고 증거합니다.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요6:3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것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 말씀합니다.
마가는 또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기 전에 모든 사람들을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했다고 기록합니다.(막6:39) 이스라엘의 기후를 보면 우기와 건기로 나눠지는데, 건기는 4월 부터 10월까지였습니다. 이때는 잔디가 다 마르기 때문에 푸른 잔디 위에 무리를 앉히셨다는 것은 4월초인 유대인의 유월절 명절 직전에 이 기적을 행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유월절 어린양 되시는, 그리스도 안에게 새로운 삶의 문이 열려지는 예표인 것입니다.
14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병든 사람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주님은 목자 없이 방황하는 무리들의 삶을 불쌍히 보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육신의 배고픔을 외면하지 않으시며, 아픈 사람들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인간의 삶의 허전함이 다 채워질수 없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목자 없이 살아가는 것은 결국 죽음에 처하게 되는 매우 절망적이고 희망이 끊어진 상황을 뜻하는 것입니다. 헬라어로 스플랑크니조마이 (σπλαγχνίζομαι)는 ‘불쌍히 여기다.’ 애끓는 마음입니다. 성경에서는 이 단어가 나올 때마다 예수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예수의 기적은 항상 영혼들을 향한 애끓는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예수는 인간을 위한 그리스도로 오셨음을 오병이어를 통해 드러내는 것이지요. 참된 신앙인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시고 예수가 복된 소식임을 하나님의 시선에서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뜨거운 사랑에 눈을 뜨고, 우리가 서로 나누어야 할 책임에 대해서는 긍휼한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2. 오병이어는 물질만능주의 시대에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15 저녁이 되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말했습니다. “이 곳은 외딴 곳이고, 시간도 너무 늦었습니다. 사람들을 이제 보내어, 마을에 가서 먹을 것을 각자 사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필립얀시는 크리스챤 투데이(Christian today)에 기고한 논설에서 우리에게 3가지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돈을 어떻게 벌었는가? 돈을 어떻게 쓰는가? 돈이 당신에게 무엇을 하는가?
오늘날 이 시대는 돈 때문에 언제든지 주님을 버릴 수 있는 시대입니다. 주머니에 돈이 없으면 초조해지지만 주님이 계시지 않는 마음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세상은 더 벌고, 더 누리기 위한 삶을 추구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것을 증명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세상의 것을 증명하기 위해 치열한 삶의 자리를 쌓아두지 마십시오. 이 땅에서의 소유는 절대 영원하지 않습니다. 물질은 자신에게 주신 소명 만큼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창조의 순간에 돈은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매일 돈으로 살아가는 시대입니다. 복의 개념을 성공의 자리에 오르는 것으로 결정해 버렸고, 믿음의 개념도 물질의 척도로 생각하게 되는 유혹이 있습니다. 돈은 하나님의 자리를 소리 없이 대신해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했는데 인간은 세상을 돈으로 바꾼 것입니다. 그래서 탐욕의 신앙은 돈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표적에서 기적에 더 관심을 갖는 것은 예수님 보다 다른 것들을 더 사랑하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보지 못한 채 표적에만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도 표적이 보여주는 그 뜻을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세상보다 크신 주님의 손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내것을 나누고 베풀때 우리의 삶에도 2만명여 명을 먹이고도 남음이 있는 오병이어의 풍성한 신비가 경험될것입니다.
날이 저물어 가는 때는 사람들이 다 떠나가고 무엇을 얻을 수도 없고 기대할 수도 없는 고독한 시간입니다. 제자들은 마을로 가서 필요한 양식을 준비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갈 필요가 없다. 내게 머무르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음식이 있는 세상으로 갈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안식처가 세상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좀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내 뜻대로 안되고, 처한 상황들이 어려울 때에도 현재는 알 수 없지만 주님께 머무르라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에서 있어서 하나님의 품을 느끼고 하나님의 숨을 마음에 넣는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성도들은 예배를 통해 주시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맛보아야 합니다.
주님은 빈들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성취될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배고픔을 채워줄 안식처가 세상에 있을꺼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불안감을 잊기 위해서 더 화려한 세상속으로 나아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불안할수록 주님께 좀더 머무르십시요.
16 “갈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나님 나라의 일을 위해 기꺼이 가진 것을 내어드릴 준비가 되어 있다면, 하나님은 작은 것을 통하여서도 오병이어의 기적을 이루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삶의 변화가 찾아오고 마음의 변화가 찾아올때에 더 많은 것을 함께 나누시기 바랍니다.
초대교회의 나눔은 그들 안에 부어진 하나님의 사랑,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그리스도의 피를 공유한 온전한 나눔이었습니다. 빈들에 모인 모든 무리는 주안에서 한 가족이 된것입니다. 케임브리지 공동체 안에도 오병이어를 통한 예수님의 마음이 삶에 담아지는 풍성한 나눔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케 해주시려고 오셨습니다. 세상은 불과 30초도 안되는 광고를 통해서 우리에게 결핍을 주입합니다. 소비자들의 결핍을 찾아내 이를 채우기 위한 수많은 광고가 지금도 전 세계에서 쏟아집니다. 어디를 둘러봐도 하나님이 존재하심을 믿지 않으면 평생을 신앙과 불신앙 사이에서 흔들리며 머물 곳을 찾지 못하고 더 깊어지는 결핍속에서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필요를 공급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삶이 절망적일때 일수록 더 큰 은혜를 주십니다. 더 큰 은혜를 사모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문제를 만나면 평소보다 더 절박하게 기도하게 되고 마음을 쏟으며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어거스틴의 참회록에 보면 비슷한 고뇌의 상황들 속에서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르는 어린 아이 음성으로 ‘집어 들어 읽으라. 집어 들어 읽으라’는 노랫소리가 들려왔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쏟아지는 눈물을 억누르며 하나님의 명령이라 생각하고 책을 펴 들고 읽었던 것이 로마서 13장 13-14절이었습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2만여명이 모인 그곳은 날이 저물어가는 밤에 모두가 그리스도의 빛을 밝히는 한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캄캄하고 암흑같던 그곳에 하나님의 전등이 켜지고, 온갖 음란과 더러운 것과 속된 것과 가증한 것들이 판치던 일들도 주님께서 감사기도를 드릴때 떡과 물고기는 이제 어두운 밤이 밝히는 주님의 도구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모인 모든 무리들은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주님의 기적을 본 것입니다.
빈들에 모여 있던 무리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며 선조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먹던 하늘의 만나를 기억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하루에 먹을양 만큼만 공급 받았습니다. 쌓아 놓은 양식이 나를 살리고 풍성하게 해줄것 같지만 그것은 결국 썩을 양식일 뿐입니다.
19 사람들을 풀밭에 앉게 하신 후,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바라보며 감사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그 다음에 제자들에게 그것들을 떼어 주셨고, 제자들은 그것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20 모든 사람들이 먹고 배가 불렀습니다. 먹고 남은 조각들을 거두었더니, 열두 바구니에 가득 찼습니다. 21 먹은 사람은 약 오천 명이나 되었는데, 이는 여자와 어린이가 포함되지 않은 숫자입니다.
3. 오병이어의 표적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담겨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표적은 때가 찬 하나님의 구속 경륜이 함께 있었고, 그 속에 하나님의 비밀과 놀라운 뜻이 담겨 있었습니다. 벳새다의 날이 기울어져도 그곳은 결코 캄캄한 빈 들일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그 공간, 시간 속에 구원의 주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원받는 백성들의 공동체는 예배를 위해 존재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이야기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오셨고 그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독사’라는 단어는 내가 생각한다는 뜻의 ‘도케오’에서 파생된 말입니다. 영어의 도그마(dogma)인데, 성서에서는 주로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나타내는데 사용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영광은 성육신 사건입니다. 예수는 고난 받으심으로 그분의 영광을 성취하십니다. 사도 요한에 따르면 성육신 하신 예수의 모습에서 하나님이 영광이 드러납니다. (요 1:14) 성육신 하신 예수는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나타내시는게 사역 전체의 목적이었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전서 4:16)
우리는 말하는 것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해야 합니다. 우리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는 것입니다. (고전 10:31)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길들여진 사람'의 삶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사역 가운데 물고기와 보리떡이 끝없이 계속 생겨나는 풍요로운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지 않을 때 손에 들린 물고기와 보리떡은 끝없이 계속 생겨났습니다. 그 능력은 바로 ‘쌓아 둠’에서가 아니라 ‘나눔’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나눔을 통해 내것을 잃어버리는 것 같으나 하나님 나라로 보면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채우는 것입니다. 작은 헌신이 하나님 나라에 어떻게 사용될 지 우리의 시선으로는 알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의 작은 마음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릴 때에 오병이어와 같은 기적이 하나님의 손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식어진 마음앞에 덩그러니 놓여 있기도 하고 매일 반복되는 삶속에서 은혜와 실망의 경계선에서 고민하기도 합니다. 가도 가도 끝없는 빈들 같아서 멈추어야 할지 더 가야 할지 모를때도 있겠지요. 평범함의 자리를 두려워 하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바라보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내 삶에 물고기 두마리와 보리떡 다섯개 밖에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쓰시도록 온전히 순종하며 드려 보십시오. 그 작은 순종과 헌신을 통해 하나님은 더 큰 하나님의 나라를 보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기적을 보고 놀라기만 하는 신앙 생활에 머무르지 마십시오. 우리는 더 이상 표정으로 반응하고 끄덕이면 안됩니다. 내가 그 기적의 현장을 이해하고 살아내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지금 나의 삶에 가지고 있는 것이 나에게 안정감을 줄지라도 오병이어의 기적 앞에 있던 이름도 모르는 그 어린 아이가 만난 은혜의 현장이 우리의 삶에 임해야하지 않겠습니까?
저 멀리에서 누군가 받은 은혜를 구경만 하고 있던 잠자던 나의 마음을 깨우십시오. 하나님 내 손에 있는 것이 비록 작을지라도 혹은 너무 커서 주님께 전부를 드리기 어렵지만 이 모든것이 주님의 손에 들려 쓰임받기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오병이어는 일용할 양식을 먹으며,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를 갈망하며 자들에게 알게 해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사랑하는 케임브리지 여러분.
오병이어의 기적은 그저 기록된 말씀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질문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시겠습니까?
요한복음 6장에는 한 어린아이가 가져온 것이라고 되어 있지만, 여기에는 누구의 것인지 분명하게 나와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가지시고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셨을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보잘것없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그곳에 모인 무리를 모두 먹이고도 남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참 하찮은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쓰임 받는 것은 주님께서 하늘을 우러러 감사하시고 축복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병이어가 주님의 손에 들려질 때, 감사와 축복이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해결책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가진 것을 가지고 해결하려고 하지만 도저히 계산이 나오질 않습니다.
특별히 사명자로 살아가는 우리를 절망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요?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에게는 능력이 없는데 ‘너희가 하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가진 것에 대한 한계를 가지고 ‘하소연’하는 것이 아니라, 그 한계를 가지고 주님께 나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중에 참 인상적인 구절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축사하시기 전에 본문 19절에 보니까,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왜 무리를 앉히셨을까요?
우리가 의문을 가지고 성경을 보면 대답해 줍니다. 너희가 가진 것은 이것뿐인데,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을 보라는 것입니다. 아주 중요한 것을 보이기 전에 잠시 침묵과 여유를 가지는 것입니다. 아니, 1등을 발표하기 전에 북을 치며 긴장을 고조시키는 것처럼 클라이맥스로 치닫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클라이맥스가 언제일까요?
우리의 능력이 극대화되는 순간이 아니라, 우리의 가진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쓰임받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다 하고, 이제 하나님이 하실 일을 기대하며 기다리는 순간입니다. 마치 중요한 순간을 기다리는 아이가 침을 ‘꼴딱’ 삼키며 기다리는 순간입니다.
출애굽기 14장 14절에서는 홍해를 앞에 두고 바로의 군대들이 뒤를 쫓아오는 순간에 모세가 말합니다.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이제는 하나님께서 일하실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서에서 출애굽 한 백성이 가나안에서 첫 번째 전투를 벌이고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기 위해 7일 동안 성을 돌 때,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통해 백성들에게 명령한 것이 무엇입니까?
성을 돌 때 ‘아무 말도 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매일 한 바퀴씩 성을 돌아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순간에 불평하거나 소리 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순간에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조용히 앉아야 하는 것은, 이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순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나의 가진 것을 내어놓고, 내 능력을 하나님께 맡기고 기대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인생 최고의 순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은, 우리 인생에서 최고의 일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주님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라고 고백하는 순간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닙니다.
‘주님 나에게는 가진 것이 이것밖에는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가장 명확하게 드러나는 때는 우리의 부족한 순간입니다.
오늘 마지막으로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목회자의 마음”이 될 것 같은데, 아마도 예수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올해 나온 책 중에 돌아가신 하용조 목사님이 나눈 인터뷰 글들을 모아 [그날의 대화]라는 제목으로 나온 것이 있습니다. 조용기 목사님과 하용조 목사님과의 대화였는데, 두 분 다 건강의 문제를 가지고 살았던 분이죠.
하 목사님이 조용기 목사님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조 목사님도 그런 말씀을 많이 들었을 것 같아요. 다른 사람들은 고치면서 당신은 왜 아프냐는 말이요.”
조용기: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지만, 옛날에 많은 병자를 위해 기도하고 나서 “하나님 저도요”라고 기도했습니다. 병든 사람들이 너무 고통스러워하니까 불쌍해서 기도했습니다. 제게 은사가 있어서 한 것도 아닙니다. …
2002년 아프리카에서 집회할 때였습니다. 사람들이 스타디움을 가득 메우고 대통령, 각료들이 도착했는데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는 거예요.
“주님, 일어나 강단으로 갈 수 없는데, 누구에게 말할 수도 없고 어느 누가 부축해 줘야 나갈 수 있겠습니다. 주님, 이번만 설교하고 죽어도 좋으니까 창피를 안 당하게 일으켜 주십시오.”
그러고 나서 겨우 일어나 걸어나갔는데, 설교를 시작하니까 성령님이 힘을 주셨어요. 설교 도중 쓰러질 것 같은 생각이 자꾸 들면서도 설교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죠. 그리고 병자들을 위해 기도했는데, 또 많은 사람이 나았어요. 그래서 속으로 하나님께 기도했어요. “하나님 저도요. 저 많은 사람이 기도로 낫는데, 왜 저는 안 낫습니까?”
하용조:
처음에 암을 발견하고 수술을 받으려 할 때, 서울에서 수술받으면 소문이 나겠더라고요. 제가 죽는 것은 두렵지 않은데, 우리 교인들이 실망할 것 같아서 그게 두려웠어요.
조용기:
저는 주일마다 번지 점프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말씀에 묶여 있다고 생각하고 번지 점프를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줄을 잡아 주시지 않는다면 저는 그냥 떨어지고 마는 겁니다.
제가 살려고 하다 보니까 다른 사람들을 살리게 되었습니다. 제가 살기 위해 말씀을 찾고 말씀을 증거하다 보니까 저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은혜를 받고 교회로 모였습니다.
제가 신령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40일 금식기도 하는데, 저는 금식기도 못 합니다. 체질이 약해 사흘만 금식하면 졸도해요. 그러니까 최자실 목사님이 살아 있을 때 항상 저를 위해 대신 금식해 주셨어요.
기적은 하나님밖에 붙들 수 없는 심정으로 살아갈 때 경험하는 것이죠.
우리가 기적의 주인공이 될 수도 있지만, 그저 우리를 기적의 도구로 사용하실 때도 있습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가 기적의 매개체가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저는 다는 아니지만, 하용조 목사님과 조용기 목사님의 마음을 이해합니다. 저도 공중의 줄 하나를 붙들고 있는 심정으로 강단에 서야 했을 때가 있었기 때문이죠. 그리고 그렇게 힘든 순간에도 교인들을 바라보며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들어 기도했기 때문이죠.
기적은 모든 것이 채워짐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부족함 가운데 일어나는 것이 정상적인 것 같습니다.
기적은 신학적 지식과 관계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마음입니다. 기적은 간절한 마음 가운데서 체험하게 되는 마음입니다.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것이죠. 문제를 회피하는 자들은 절대로 기적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문제를 가지고 주님께 나아오는 자들만이 주님이 행하시는 기적을 스릴 있게 만나게 됩니다.
하용조 목사님이 이렇게 말을 했더군요.
“저는 믿음이란 항상 낭떠러지에 서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큰길을 걷는 게 아니라 낭떠러지에 떨어지는 심정으로 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기적이 필요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우리는 성령님의 역사를 가장 강하게 경험하는 것이 아닐까요?
감사는 기적을 낳는다
마 14:13-21 / 오정호 목사
스코틀랜드의 알렉산더 와이트 목사님은 강단에 설 때마다 항상 감사기도로 시작했습니다. 많은 경우 날씨와 관련하여 감사기도를 하곤 했습니다. 어느 주일은 폭풍우가 몰아쳤습니다. 성도들은 "우리 목사님이 오늘은 어떻게 감사기도를 하실까?" 궁금해하며 목사님의 기도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드디어 목사님의 기도가 시작되었습니다. "오! 사랑의 하나님, 다른 날들은 오늘과 같은 날씨가 아닌것을 감사드립니다."
여러분, 감사는 체질입니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감사를 하든지 습관적으로 불평을 하게 되어있습니다.
본문은 오병이어의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 아이가 가져온 물고기 두 마리를 우리 주님께서 축사하시고 나눠주시자 오천명이 배불리 먹고 열두광주리가 남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하게 된 하나의 동기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우리 주님의 감사의 축사입니다. 주님이 축사하시기 전에는 어린아이 하나가 먹을 정도의 양식밖에 되지 않았지만 축사를 통해서 오천명이 배불리 먹게 되는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이 사건이 우리에게 깨닫게 해주는 것은 한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할 때부터 새로운 기적의 역사는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감사는 기적을 낳습니다.
감사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삶의 모습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신 것은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말씀합니다(롬8:29). 우리가 주님의 형상을 본받는다는 것은 곧 주님의 마음을 본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감사에 대해서 어떻게 교훈합니까?
1. 신앙은 감사로 표현됩니다(19절).
기업들은 상반기 결산을 합니다. 경제적인 대차대조표를 만들어 얼마나 효율적인 기업경영과 이윤을 남겼는지 평가합니다. 예수믿는 우리는 경제적인 대차대조표 뿐만 아니라 우리의 감사가 하나님께 얼마나 온전히 드려졌는가를 점검하는 감사의 대차대조표를 만들어야 합니다. 내게 주신 직분, 일용할 양식, 믿음, 가족, 직장, 환경, 하나님의 복주심의 손길 등에 대해서 얼마나 마음을 열고 감사했는지 점검해보십시오.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서 내게 감사할 환경을 주신다면 왜 감사하지 않겠느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변변치 않은 보리떡 다섯 개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서도 감사하셨다면 우리는 그보다 훨씬 더 풍요로움을 경험하는 것으로 인해 감사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부모세대보다 훨씬 더 풍요롭고 윤택한 환경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전보다 오늘에 더 감사가 풍성해야 합니다. 감사는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내면의 문제입니다. 신앙의 문제입니다. 우리의 중심에 살아있는 감사가 있다면 우리의 신앙은 생명력과 역동성이 있는 신앙이 될 수 있습니다.
한 소년이 자신의 친구가 자기 아버지의 비밀스러운 서랍을 열어보고 그 속에 품격없는 잡지를 발견했다고 자랑거리처럼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친구의 말을 들은 소년은 집으로 돌아가 자신의 아버지의 서랍안에는 무엇이 들어있는지 열어보았습니다. 그곳에는 아버지의 "기도일기"가 들어있었습니다. 매일매일의 감사제목과 기도제목이 기록되어 있었는데 기도제목에는 자신의 이름이 하루도 빠지지 않고 기록되어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소년은 '우리 아버지의 마음속에 항상 감사가 있고 내가 있구나' 생각하며 뜨거운 감동을 느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의 서랍에는 무엇이 들어있습니까? 마음의 서랍속에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께 대한 궁극적인 감사가 있다면 여러분은 삶에 어떤 도전과 어려움이 닥쳐온다 해도 흔들리거나 좌절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작고 보잘 것 없음에 대해 회의와 불신앙을 드러냈지만 주님은 있는 그대로 하나님께 가지고 나아가 감사할 때 하나님의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여러분은 금년 상반기를 어떻게 결산하시겠습니까? 대나무가 매듭을 짓고 성장하듯이 주님앞에 감사와 감격으로 매듭을 짓는다면 새로운 하나님의 은혜가 전개될 것이며 신앙의 성장과 성숙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심리학자 매슬로우(Abraham. H. Maslow 1907-1970)는 '욕구의 위계질서(Hierachy of Needs)' 이론을 통해 인간의 욕구는 하위욕구인 신체적욕구에서 부터 안전의 욕구, 애정의 욕구, 자아존중의 욕구, 자아실현의 욕구라는 상위 욕구로 발전해간다고 합니다. 우리는 여기에 신앙의 욕구를 최상위 욕구로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믿는 사람은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고 감사하며 살아야겠다는 욕구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감사의 수준은 어디까지 이르렀습니까? 일용할 양식에 대해서 감사하십시오. 여러분의 직분에 대해 감사하십시오. 자녀들에게 감사를 가르치십시오. 신앙은 반드시 감사로 표현됩니다. 여러분의 마음의 서랍에 감사를 차곡차곡 쌓아가십시오.
2. 감사는 반드시 풍성한 열매로 나타납니다(20-21절).
우리는 결과를 통해서 감사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감사가 선행된 후에 오병이어의 놀라운 결과가 나타났음을 말해줍니다. 이것이 바른 순서입니다. 성숙한 성도가 되기 위해서는 감사의 속도가 빨라야 합니다. 감사를 유보하지 마십시오. 감사할 조건에 대해서는 즉시 감사하십시오. 바울은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말합니다(빌4:6-7). 감사가 전제된 기도에 놀라운 응답의 역사가 있습니다.
현대경영학의 대가인 피터 드러커(Peter F. Drucker 1909∼)교수의 저서 '프로페셔널의 조건'의 마지막장에는 이런 글이 있습니다. "당신이 세상을 떠났을 때 주위 사람들이 당신을 어떤 사람으로 기억할 것인지 생각하라" 피터 드러커 교수는 우리의 인생을 경영할 때 본질을 붙잡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을 떠날 때 어떤 모습으로 기억되기 원하십니까? 감사의 사람으로 기억되기 원하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주신 엄청난 축복에도 불구하고 항상 불평과 불만으로 싸여있는 사람으로 기억되기 원하십니까? 감사는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의 태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감사를 풍성하게 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세례요한의 순교소식을 들으시고 빈들로 나가셨습니다(13절). 도시의 소음과 번잡함을 다 뒤로하고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을 위해 빈들로 나가신 것입니다. 성공지향적인 인간의 다툼과 소란이 있는 곳에는 감사가 자리잡을 수 없습니다.
"한 왕이 화려한 궁전에 방 하나를 마련하고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가끔 왕은 그 방안에 들어가서 한참을 있다 나오곤 했습니다. 어느 날 한 신하가 우연찮게 그 방을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그 방에는 오직 목동의 남루한 옷 한 벌만이 걸려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아마 다윗을 빗대어 만든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다윗은 과거 목동이었던 자신의 본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면서 자신을 왕으로 세워주신 하나님의 뜻과 은혜를 잊지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피조물인 인간은 거룩하신 하나님앞에서 자신의 본모습을 발견할 때에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빈들의 시간, 하나님의 음성이 임하는 고요한 시간에 우리의 내면을 감사로 채울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의 성장과 성숙을 위한 감사의 지수를 업그레이드하십시오.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는 감사, 기적을 창출하는 감사를 회복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