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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아들이 잡혀 넘어갈 것이다.
연중 제25주일: 나해
복음: 마르 9,30-37
오늘의 독서와 복음도 제자들에게 십자가의 신비를 계속 일깨워주고 있다. 여기서도 역시 “예수님은 누구시냐?” 하는 문제이다. 베드로는 십자가 없는 영광의 그리스도만을 생각하여 스승의 수난을 거부했던 것처럼 오늘도 제자들은 수난에 대한 두 번째 예고를 듣고 같은 태도를 보인다.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마르 9,32). 오늘 복음을 보면 수난 예고를 듣고도 제자들은 깨닫지 못한다. 제자들이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으니 다른 군중들이야 말할 것도 없다. 그러기 때문에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는 그 여정이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 그 길은 아무도 제지할 수 없는 길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31절). “넘어가다, paradidotai”라는 동사는 수동형으로서 예수께서 이행하지 않을 수 없는 하느님의 뜻을 암시한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승리가 있다.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31절). 이렇게 승리의 빛이 비치고 있지만, 사도들은 도무지 깨닫지 못한다(32절). 메시아의 고통은 그들에게 터무니없고 부활의 영광도 체험해 보지도 않았고 상상도 안 되는 엄청난 사건이다. 두려움에 싸여 어쩔 줄을 몰라 했다(32절).
복음은 메시아의 수난 앞에 두려움에 싸여 있는데, 제자들은 누가 제일 높은지를 다투는 장면을 소개한다. 이것은 하느님의 길과 인간의 길이 얼마나 다른지를 제시하기 위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버리기까지 스스로 낮추시는 데 반해, 사도들은 걸레 조각 같은 명예 다툼에 몰두하고 있다. 자기 자신을 스스로 초라하게 만들고 있다. 이 같은 일은 우리 공동체에서도 흔히 일어날 수 있다. 만일에 그렇다면 교회의 참모습은 상실될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35절). 이것은 무질서를 의미하지 않는다. 인간 공동체나 교회 안에도 다른 형제들을 보살펴줄 첫째 자리를 차지할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고 하신다. 다만, 첫 자리의 의미와 권위의 의미를 뒤집어놓으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모든 면에 있어서 자기보다 낫다고 여겨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사람만이 첫 자리를 차지할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형제들을 위해 십자가에 자신을 바치는 행위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써 당신의 왕권을 획득하셨다. 참된 권위라는 것은 봉사와 사랑에서 비롯됨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공명심으로 가득 찬 적대감이나 천박한 감정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코 교회는 고사하고 그 어떤 인간 공동체도 제대로 이루지 못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제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 그들 가운데 세운 뒤 그를 안으시며 그들의 본보기로 제시해 주신다. 이렇게 어린이에게 관심을 보인다는 사실은 당시의 상황에서 혁신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37절). 여기에는 두 가지 사실을 담고 있다. 첫째는 아무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던 어린이들과 같이 ‘꼴찌’가 되는 것이 당신 자신을 비천한 사람들과 동일시했던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라는 점이다. 즉 사도들이 예수님의 참된 증표가 되려면 어린이와 같이 보잘것없는 꼴찌가 되어야 하고 그때 첫째가 될 것이다.
두 번째는 모든 어린아이는 무한한 가치와 품위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예수께서는 어린아이들과 같은 보잘것없는 이들 안에 신비롭게 현존하신다. 즉 배고픈 이들, 목마른 이들, 병든 이들, 감옥에 갇혀있는 이들 등 그들 가운데 항상 현존하신다(참조: 마태 25,31-46). 바로 그들의 품위와 가치를 존중해주시고 그들의 나약함을 감싸주시기 위해 그들 가운데 계시다. 그래서 그 어린이들이 당신의 사랑과 아버지 사랑의 성사라고 하신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37절).
어린아이의 미소와 사랑스러움과 같은 단순한 사실들의 가치를 발견한다면 2독서에서 말씀하시는 참된 지혜가 이루어질 것이다. “위에서 내려오는 지혜”(야고 3,17)는 겸손되이 항구히 원함으로써만 가질 수 있는 하느님의 선물이다. 그 지혜가 우리 마음에 올 때 “평화로운”(야고 3,17) 그 지혜는 우리와 다른 모든 사람을 위한 ‘평화’의 풍성한 열매를 가져다줄 것이다. “여러분의 싸움은 어디에서 오며 여러분의 다툼은 어디에서 옵니까? 여러분의 지체들 안에서 분쟁을 일으키는 여러 가지 욕정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은 욕심을 부려도 얻지 못합니다. 살인까지 하며 시기를 해 보지만 얻어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또 다투고 싸웁니다.”(야고 4,1-2). 윗자리를 차지하고 싶은 어리석은 욕망이 인간의 마음과 사회에 야기하는 부패의 면모를 이보다 더 사실적으로 표현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의 가르침을 올바로 실천할 수 있어야 함을 느낀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 9,35). 이 가르침은 무엇보다 먼저 우리 공동체 안에서 실현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 자신이 이 세상에 보여줄 수 있는 표징은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사랑과 봉사를 통한 세상의 변화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바로 나 자신으로부터의 변화이며 기적을 이루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진정한 봉사와 사랑(꼴찌)을 통하여 진정한 권위(첫째)를 드러낼 수 있는 우리 자신이 될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 조욱현 신부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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