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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위를 걸으심
마 14:22-36
22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23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24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
25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26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27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28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29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30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32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33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34 그들이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니
35 그 곳 사람들이 예수이신 줄을 알고 그 근방에 두루 통지하여 모든 병든 자를 예수께 데리고 와서
36 다만 예수의 옷자락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나음을 얻으니라
마 14:22-36 / [물위를 걸으신 이적;막6:45-52,요6:15-21] 예수께서는 곧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를 타고 먼저 건너편으로 가게 하고 그동안 군중을 집으로 돌려보내셨다. 23) 그런 뒤에 기도를 드리려고 산으로 올라가셨다. 밤이 되자 24) 바람이 일고 물결이 사납게 밀어닥쳐 제자들은 바다 위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25) 새벽 네 시쯤 예수께서 물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셨다. 26) 제자들은 예수께서 물위를 걸어오시는 것을 보고 겁에 질려 소리쳤다. 유령이 걸어오는 줄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27) 예수께서는 즉시 그들에게 말을 건네 안심을 시키셨다. `나다. 무서워하지 말라.' 28)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정말 주님이시면 저더러 물위로 걸어오라고 하십시오.' 29) `걸어오너라.' 주님이 말씀하셨다.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예수를 향해 물위를 걸어갔다. 30) 그러나 물결이 높이 이는 것을 보고 무서움을 느끼는 순간 물에 빠지고 말았다. 놀란 베드로는 `살려 주십시오, 주님!' 하고 소리쳤다. 31) 예수께서는 곧 손을 내밀어 그를 붙들며 `믿음이 적은 자여, 왜 나를 의심하느냐?' 하시고 32) 함께 배에 오르자 바람이 잔잔해졌다. 33)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은 예수께 절하며 `주님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34) [게네사렛에서 병자를 고치시다;막6:53-56] 일행은 바다를 건너 게네사렛 땅에 도착하였다. 35) 그곳 사람들이 예수를 알아보고 그 근방에 두루 사람을 보내어 모든 병자를 예수께 데리고 와서 36) 예수의 옷자락이라도 만지게 해달라고 청하였다. 그리고 만진 사람은 모두 병이 나았다.
예수님이 갈릴리 바다 위를 걸으십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처럼 걷고자 하였으나 작은 믿음 때문에 물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22-24) 예수님은 한적한 곳에서 홀로 기도하기 위하여서 빈들로 나오셨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왔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후에 예수님은 급히 제자들을 무리로부터 떠나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의도를 알고 예수님을 도와야 할 제자들이 자신들이 정치적 욕망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왜 바다에서 고난을 당하였을까?라는 질문에 많은 신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열광하는 군중들 가운데에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를 타고 건너가게 하셨는가에 답이 있다고 합니다. 제자들은 오병이어로 많이 고무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정치적 야심이 이 사람들에 의하여서 한 발 자국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되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예수님은 이들을 군중들로부터 떼어놓으신 것입니다. 유진 피터슨이 이 부분을 종합적으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식사가 끝나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를 타고 먼저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그동안 사람들을 돌려보내셨다. 무리가 흩어지자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 혼자 기도하셨다. 그분은 밤늦도록 거기 혼자 계셨다.” 한편 예수님은 중대한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종종 한적한 곳으로 나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막 1:35; 눅 5:15 등). 예수님 능력의 비밀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뿐만 아니라 기도를 통하여서 늘 성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25-36) 예수님 없이 육지를 떠난 배는 밤 사경(3시~6시)까지 고난을 당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없는 이들은 그들이 평생 보낸 바다의 바람도 이기지 못하는 존재였습니다. 그 고난 가운데에 제자들은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놀라서 겁에 질린 제자들을 진정시키시고, 베드로는 자신도 물위를 걷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물위의 예수님을 향하여 물위를 걸어서 가게 됩니다. 하지만 이내 바람을 보고 무서워 바다에 빠지게 됩니다. 이는 잠시라도 예수님을 잃은 인생의 연약함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베드로는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라고 예수님의 꾸짖음 들은 것입니다. 이 말씀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꾸짖음을 마음속에 새기고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가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적용: 당신의 갈릴리 바다는 무엇인가요? 거기에서 믿음 없어 빠지는 인생이 아니라 믿음으로 주님의 손을 꽉 붙잡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 안에 도사리고 있는 예기치 못한 함정을 피하려면 성령님의 신비한 임재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를 통과할 때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그 백성 앞을 떠나지 않았던 것처럼 진리의 성령님이 평생 우리를 인도하셔야 합니다. 성령님이 함께 하지 않는 발걸음은 방황하는 발걸음이 될 것입니다.
< 설 교 >
당신의 배에는 예수님이 타셨나요?
마 14:25-36 / 이정선 목사
저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타우랑가가 참 좋습니다. 좋은 이유 가운데 하나는 바다가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전에 마투아에 살 때 한번은 아내와 함께 밤에 운동한다고 바닷가까지 걸어 나갔는데, 마침 보름달이 환하게 밝았습니다. 호수 같은 바다 위에 달이 비춰서 하늘에도 달이 있고 바다에도 달이 있는 것입니다. 건너편에는 타우랑가 항구의 불빛들이 또 조화를 이룹니다. 공원 벤치에 앉아 그 광경을 바라보는데 얼마나 환상적인지, 아마 제 생애에서 본 가장 아름다운 광경 가운데 하나였을 것입니다.
또 파파모아 해변에 가면 망망대해가 펼쳐져 있습니다. 그 바다를 바라보면 가슴이 탁 트이기도 하고, 끝없는 바다를 따라 상상의 나래가 펼쳐지기도 합니다. 이처럼 바다가 우리 사는 타우랑가를 아름답게 만들어줍니다. 또 바다는 살아 있습니다. 펄떡이는 물고기들을 잡아올릴 수 있고, 수많은 생명체들이 그 바다를 집 삼아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다는 무한한 보물창고와도 같습니다.
그러나 바다가 늘 아름답고 유익한 것만은 아닙니다. 바다는 심연, 끝이 없는 깊음이라는 말이 어울릴 만큼 우리 인간에게는 도달할 수 없는 미지의 세계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바다는 인간에게 무한한 두려움과 재난을 가져다주기도 합니다.
여기 예수님의 제자들이 죽을 힘을 다해 파도와 싸우고 있는 갈릴리 바다는 사실 바다가 아니라 좀 큰 호수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인간을 공포에 빠뜨리기에 충분히 큰 호수입니다. 이 제자들 가운데 여럿은 그 갈릴리 호수에서 평생 고기잡이를 하면서 살았던 어부들입니다. 그러므로 그 호수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잔잔할 때는 한없이 평화로운 이 호수가 성났을 때는 모든 것을 삼킬 듯이 포악해진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그날 밤 제자들이 탄 배에는 죽음의 공포가 가득했습니다. 제자들의 일생에서 그 밤은 가장 길었을 것입니다. 물론 전에도 이런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살아난 경험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번에도 살아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들은 밤에 고기를 잡으러 배를 타고 나갔다가 갑자기 몰아닥친 폭풍에 목숨을 잃은 사람들을 여럿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의 목숨이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롭던 그날 밤, 갈릴리 호수는 누가 뭐래도 죽음의 바다였습니다.
그렇게 죽음의 문턱까지 와 있는 제자들이, 물론 정신이 없었겠지만, 한 가지 생각을 하는 것이 있다면, 예수님이 함께 계셨더라면 이 곤란을 겪지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그들은 만 명이 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였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그들을 군대로 조직할 수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계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안 계시는 그 잠깐 사이에 그들은 생사의 갈림길에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바로 그런 존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분과 동행하는 삶을 살 때, 우리는 하늘의 평안과 기쁨 속에서 감사하고 감격하며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떠나서, 그분의 말씀 밖에 나왔을 때, 우리에게는 불안과 두려움만 가득할 것입니다. 그 예수를 떠나서는 우리가 실패하고 우리의 삶이 곤고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생명이시고, 예수님이 우리의 승리가 되시며,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이시기 때문입니다.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셨다고 했습니다. 밤 사경이란 밤을 넷으로 나눈 중에서 네 번째 시간입니다. 그러니까 저녁 6시부터 아침 6시까지의 열두 시간을 넷으로 나누면, 새벽 3시부터 6시까지가 사경이 되겠지요. 참 예수님도 너무하셨습니다. 제자들이 그렇게 죽을 고비를 넘기고 있다는 것을 아셨을 텐데, 이왕이면 조금 서둘러 일찍 오셨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런데 밤 사경에 그러니까 밤의 마지막 시간까지 기다리셨다가 그때서야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늦게 나타나신 것은 우리에게 인내를 가르치시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오랜 세월 동안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특히 삶이 고단하고 고통스러울 때는 더 간절히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메시야는 오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기다리기만 하다가 많은 사람들이 메시야가 오시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메시야 기다리는 것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데리고 성전에 올라갔을 때, 그 아기가 메시야인 것을 알아보고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며 감사했던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경은 그를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눅 2:25)라고 소개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히 10:36).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해서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인내한다는 것은 아직 그 약속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예수님이 밤 1경이나 늦어도 2경에 오시지 않고 4경이 되어서야 나타나셨다고 원망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늦게 오시는 바람에 제자들이 밤새 죽음의 공포 속에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야 했던 것처럼, 내 삶에 하나님의 도우심이 늦어져서 내 인생이 힘들었노라고 하나님을 향하여 섭섭한 마음을 품지 않기를 바랍니다. 바울 사도의 말씀처럼, 인내는 연단을 가져오고, 연단의 결과는 소망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롬 5:4).
어쨌든 밤 사경이 되어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물 위로 걸어서 오셨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밤새 거친 풍랑과 싸우느라 녹초가 되어 있던 제자들은 물 위로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유령이 나타났다고 기겁을 하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놀래키려는 의도가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즉시 제자들에게 자신을 밝히시고 안심시키십니다.
바로 이 순간, 이 장면에 주목해 보십시오. 호수는 뒤집어질듯이 풍랑이 일고 제자들은 언제 뒤집힐지 모르는 위태로운 배 안에서 물에 빠지지 않으려고 죽을 힘을 다해 노를 젓고 있습니다. 그나마 그 미친 듯한 호수에서 그들이 살아날 유일한 희망이 그 배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배 밖에서 예수님은 아무렇지 않게 물 위를 걷고 계십니다. 조금도 위험해 보이지 않습니다. 그 순간 베드로는 위대한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물에서는 배 안에 있어야 안전합니다. 배 밖으로 나가는 것은 물에 빠져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지만 제자들이 밤새 의지했던 배 안은 전혀 안전하지 않았습니다. 그 배는 폭풍과 파도로부터 그들의 목숨을 보장해주지 못했습니다. 폭풍이 심하고 파도가 높아서가 아닙니다. 그 배가 안전하지 못한 근본적인 이유는 거기에 예수님이 계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에 대단한 경종을 울리는 상징적인 사건이 아닙니까?
오늘 우리가 생존하기 위해, 먹고 살기 위해, 이 경쟁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붙잡고 있는 것들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그것은 바다 위에 떠 있는 조각배일 수도 있고, 크고 화려한 유람선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 배에 인생을 의지하고 삽니다. 그 배에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들을 얻습니다. 그 배 안에서 우리는 안전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배에 예수님이 함께 계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밤새 죽을 고비를 넘긴 베드로가 그 새벽에 발견한 것은 예수님 없는 배 안보다 예수님과 함께 배 밖에 있는 것이 훨씬 안전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요청합니다. “주님, 나도 주님 계신 물 위로 가게 해 주십시오.”
세상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미친 짓입니다. 배에서 나와 폭풍과 파도가 몰아치는 물로 내려간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 헌신하고 주님만을 의지하며 사는 것이 세상의 가치관으로는 무모하고 미친 짓입니다. 위험 속으로 뛰어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그것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래, 오너라.” 예수님의 허락이 떨어지는 순간, 성난 파도 위로 고속도로가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 고속도로 위를 성큼성큼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에서 말하기를,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우리 말 번역이 대단히 난해합니다. 영어 NIV 성경의 번역을 봅시다. “faith is being sure of what we hope for and certain of what we do not see.” 쉬운성경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에 대해서 확신하는 것입니다. 또한 보이지는 않지만 그것이 사실임을 아는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기만 하면서 긴가 민가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비록 보이지 않지만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분명히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성은 보는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확신합니다. 베드로의 눈에는 모든 것을 삼켜버릴 듯한 파도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보니까 가장 단단하고 안전한 고속도로가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 믿음의 근거는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바라는 것을 맹목적으로 믿으면 그것이 믿음이 되는 것입니까? 보이지 않지만 확신하기면 하면 없던 것도 생기는 것일까요? 그것이 믿음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그런 맹목적인 믿음을 가지고 바다로 뛰어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가 본 것은 바다 위를 걸어오신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대한 전적인 신뢰가 바로 믿음의 근거요, 비밀입니다.
일이 잘 풀릴 것이다, 내 병이 나을 것이다, 이렇게 근거 없이 맹목적으로 믿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 병을 고쳐주실 것이라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내 감정과 내 욕망에 근거해서 하나님이 내게 축복해 주시리라고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하심에 호소할 때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리라고, 하나님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은 어느 순간에 갑자기 생겨나기보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보고 체험하면서 점점 자라납니다. 그런데 때로는 그 믿음이 장애물을 만나 퇴보하기도 합니다. 베드로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담대한 믿음으로 그는 폭풍과 파도 속으로 걸어 나갔습니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중간에 그만 이성의 덫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지? 어떻게 내가 물 위를 걷고 있는 거야? 이건 불가능한 일이잖아? 저 바람과 파도를 좀 봐. 저것들이 나를 삼켜버릴 거야. 나는 물에 빠져 죽을 거야... 그러면서 베드로는 두려움 가운데 물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베드로의 이야기일 뿐 아니라 바로 오늘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에이, 나처럼 믿음 없는 사람이 어떻게 그런 일을 해? 다른 사람들은 믿음이 있으니까 그렇지만, 나는 안 돼... 그렇게 스스로를 믿음 없음의 감옥에 가둬버립니다. 그러니까 믿음으로 행하려는 시도가 꺾여버리는 것이지요. 믿음으로 나아갔다가도 물에 빠져버리는 것입니다. 믿음은 뭐라고 했습니까? 바라는 것들을 확신하는 것이고, 또 보지 못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물에 빠진 베드로를 붙잡아 건져주시고 배에 오르셨습니다. 그 순간부터 그 배는 가장 안전한 배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순간 즉시 바람이 그쳤습니다. 배 안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절하면서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물 위로 걸어오신 이유는 제자들로 하여금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해도 좋겠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 전에,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알고 믿어야 했습니다. 그 부분이 해결되지 못하면, 예수는 힘이 없어서 붙잡혀 죽은 것으로 오해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죄를 대신 지시고 일부러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구원의 진리를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헤롯의 지명수배를 피해 숨으려고 하시다가 다시 돌아오신 예수께서 행하신 일들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돌아오시니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세요. 게네사렛 사람들이 다른 지방에까지 연락을 해서 모든 병든 자를 예수께 데려왔고, 주님은 그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함께 타신 배가 안전하고, 예수님이 계신 곳에 치유와 회복이 발생하고, 예수님이 오셔야 행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재주가 좋고 능력이 뛰어나도, 예수님 없이 하는 일들,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는 일들,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에 어긋나는 일들은 결코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우리를 파멸과 패망으로 인도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어디를 가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항상 주님과 동행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심으로 늘 승리하며 늘 행복한 삶을 살아가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풍랑 위를 걸어오신 예수님
마 14:25-32 / 이영훈 목사
<등단 후 멘트>
우리 주 예수님을 사랑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사랑의 주 예수님이 이 시간 이 자리에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언제나 이 시간 여러분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좌우 옆에 계신 분과 인사 나누겠습니다. “오늘은 참으로 좋은 날입니다.” “사랑의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 안에서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맡기는 것입니다. 내 모든 염려 근심 걱정을 주님께 다 맡기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스스로 그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일생동안 해결해 나갈 수가 없습니다. 철저히 내려놓고 맡기면 주님이 다 해결해주시는 것입니다. 개인, 가정, 생활, 자녀, 범사의 문제를 다 내려놓고 맡기십시오. 우리 개인의 문제, 가정의 문제, 생활의 문제, 주님이 다 해결해 주십니다. 우리 교회도 주님께 맡겨야 됩니다. 우리 대한민국도 주님께 맡겨야 됩니다. 맡길 때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믿음으로 찬송 부르고 맡기는 기도를 드리겠습니다.
(찬송가 382장)
너 근심 걱정 말아라 주 너를 지키리
주 날개 밑에 거하라 주 너를 지키리
주 너를 지키리 아무 때나 어디서나
주 너를 지키리 늘 지켜 주시리
어려워 낙심 될 때에 주 너를 지키리
위험한 일을 당할 때 주 너를 지키리
주 너를 지키리 아무 때나 어디서나
주 너를 지키리 늘 지켜 주시리
어려운 시험 당해도 주 너를 지키리
구주의 품에 거하라 주 너를 지키리
주 너를 지키리 아무 때나 어디서나
주 너를 지키리 늘 지켜 주시리
할렐루야. 주님이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언제든지 어느 곳에서든지 주님이 여러분과 함께하십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 개인의 모든 문제를 다 주님께 맡기고 우리 교회의 모든 문제를 다 주님께 맡기고 우리 대한민국의 모든 문제를 주님께 다 맡기고 “주님 우리를 지키시고 함께하여 주옵소서.” 통성으로 기도합니다. 주여. 주여. 주여.
(통성기도)
주 너를 지키리 아무 때나 어디서나
주 너를 지키리 늘 지켜 주시리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모든 감사 찬송 존귀 영광을 우리 주 하나님께 올려드립니다. 모든 것이 다 주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게 된 것도 주님의 은혜요. 오늘 이 시간까지 인도함 받고 부족함 없이 살아온 모든 것 다 주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갚으려야 값을 수 없는 큰 은혜를 받고도 감사하지 아니하고 우리 믿음이 연약해서 사소한 일에 낙심하고 원망하고 불평하며 남에게 상처를 주고 살았던 저희들의 모습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예수의 보혈로 덮어주시고 우리 마음 가운데 평안함을 주시고 치료와 용서의 강물이 넘쳐나서 참 기쁨과 감사함으로 주님을 섬기는 저희 모두가 되도록 도와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
<설교말씀>
할렐루야. 오늘 저는 마태복음 14장 25절 이하에 있는 말씀을 가지고 “풍랑 위를 걸어오신 예수님” 이와 같은 제목으로 함께 말씀의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함께 따라하시겠습니까? “풍랑 위를 걸어오신 예수님”, “풍랑 위를 걸어오신 예수님”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마치 큰 바다를 항해에 나가는 것과 같습니다. 배를 타고 큰 바다에 나가보면 물결도 치고 때로 풍랑이 크게 일어서 멀미도 하고 토하기도 하고 때로는 ‘이러다가 배가 뒤집히지 않나’ 하는 두려움도 다가오기도 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크고 작은 인생의 풍랑이 우리에게 닥쳐오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꼭 기억해야 될 것은 크고 작은 풍랑 그 어떤 것도 우리에게 그냥 우연히 지나쳐 가는 것이 아니라 모든 고난의 풍랑에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풍랑을 만날 때 우리는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고 주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됩니다. 풍랑을 만날 때 우리가 깨어지고 낮아져야 합니다. 풍랑을 만날 때 주님을 멀리 떠났던 우리가 회개하고 돌아와야 되는 것입니다. 풍랑을 만날 때 우리의 믿음을 견고히 해서 주님을 더욱 의지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풍랑을 잘 우리가 믿음으로 통과하고 나면 잘 이겨 나가면 하나님의 큰 축복이 큰 은혜가 우리에게 임하게 될 것입니다.
1. 삶에 다가오는 풍랑
먼저 우리 삶에 다가오는 풍랑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마태복음 14장 22절, 23절에 성경은 이와 같이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 저물 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이 장면은 이와 같은 배경을 갖고 있습니다. 바로 그 전에 예수님께서 벳새다 광야에서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남자 어른만 5천 명, 여자와 아이를 합하면 약 3만 명이 넘는 많은 군중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밤이 어두워지니까 식사를 다 배불리 하게 한 후에 다 돌려보내시고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배 타고 먼저 갈릴리 호수 건너편에 가 있어라. 내가 나중에 그쪽으로 가겠다.” 하시고 홀로 산으로 기도하러 올라가셨습니다.
자, 바로 여기에서 왜 제자들이 풍랑을 만나게 되었는가, 그 원인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해 볼 때, 예수님을 모신 제자들이 그렇게 큰 기적을 체험한 후에 예수님과 함께 남아서 잘 사람들을 돌려보내고 예수님이 산에 올라가시면 같이 올라가서 기도해야 될 터인데, 같이 올라가지 못하면 밑에서 ‘예수님, 예수님 내려오실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하고 기다리는 것이 당연한 것인데 ‘내가 사람들을 돌려보낼 테니 배 타고 먼저 건너가라.’ 하는 그 말에 얼른 배를 타고 건너가기 시작했어요.
그들은 흥분했습니다. 왜, 예수님이 보여주신 보리 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떼어주면 또 나오고 떼어주면 또 나오고 떼어주면 또 나오고 그러니깐 배를 타고 건너가면서 예수님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야, 오늘 정말 놀라운 일이 있었어. 떼어주면 또 나오고 떼어주면 또 나오고 떼어주면 또 나오데,” 안드레는 자랑했을 것입니다. “그거 내가 어린 소년한테, 보리 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를 받아 와서 예수님께 드렸기 때문에 그런 기적이 일어났지.” 뭐 그 기적에 대해서 저들이 정신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에 배가 갈릴리 호수 한복판에 들어가서 큰 풍랑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왜 풍랑이 우리에게 임합니까? 예수님을 멀리 떠났기 때문에 풍랑이 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풍랑이 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힘들고 어려울 때에 우리는 엎드려 기도하고 주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데, 실제로 큰 문제는 잘될 때입니다.
사업이 너무너무 잘되면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셔서 사업이 잘되는 데에도 그만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사업 잘되는 것 때문에 밤낮 수입만 계산하다가 둘러 앉아가지고 오늘도 최고의 매출을 올렸다고 자랑만 하다가 깊은 풍랑을 만나는 자리까지 가게 되는 것입니다. 큰 풍랑을 만나는 자리까지 가게 되어서 정신없이 자기 자랑만 하다가 예기치 못한 풍랑 속에 큰 고난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잘 될 때 조심해야 돼요. 칭찬받을 때 조심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면, 고난의 때가 축복의 때인 것입니다. 왜? 자신이 깨어지고 낮아지고 내려놓고 겸손해지고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오는 때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잘되면 사람은 한없이 교만해져서 ‘내가 참 잘난 모양이다.’ 그래서 그것을 주신 주님의 은혜를 쉽게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높은 자리에 올라갈 때 사업이 손만 되면 막 확장되고 잘되기 시작할 때 이럴 때 우리가 조심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잊지 말아야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예수를 믿는 날부터 천국을 갈 때까지 항상 우리와 함께하는데 우리가 깨어지고 낮아질수록 더 큰 은혜로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목사님으로 귀하게 쓰임을 받고 있는 우리 윤항기 목사님. 가수 윤복희 씨의 오빠인데 그 청계천 거지 소굴에서 고아로 자라난 이 분이 ‘키 보이스’라는 중창단을 만들고 그다음에 솔로로 데뷔한 이후로 크게 그의 노래가 히트하기 시작했어요.
얼마나 인기가 좋았던지 70년대 3년 동안 그의 인기가 온 한국을 뒤흔들었는데 그 당시 큰 집 한 채가 100만 원 할 때에 하루 버는 수입이 200만 원이었데요. 그러니 뭐 얼마나 돈을 많이 벌었어요. 그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돈을 벌 때에 예수 잘 믿고 하나님 잘 섬겼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멀리 멀리 멀리 간 것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노래 부르다가 기절하고 쓰러졌는데 병원에 가니 폐결핵 말기입니다. 의사가 6개월 이상 살지 못한다고 말을 합니다.
이것이 웬일입니까. 자기가 인기 절정의 시대에 무엇 하나 부러운 것이 없고 어디 가나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어서 환호를 지르고 하던 그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다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그 3년 동안 세상 쾌락에 빠져서 돈을 뿌리며 그가 죄에서 구렁텅이 속에 헤매고 있을 때 서서히 서서히 풍랑이 다가오기 시작해서 큰 풍랑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요, 그 고난의 풍랑이 그에게는 축복이 되었어요. 왜, 그 부인이 남편을 살리기 위해서 눈물로 주님께 부르짖고 40일을 금식기도 하면서 그를 예수님께로 돌아오게 만들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결국은 주의 종이 되어서 목사로서 지금 귀하게 쓰임을 받고 있습니다.
세상의 인기는 금방 사라져 버립니다. 잘될 때 더욱더 겸손하고 낮아져서 주님만 높이고 주님만 사랑하고 주님만 바라보고 나아가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제자들을 보세요. 마태복음 14장 24절에,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
큰 풍랑이 일어났어요. 그들은 갈릴리 호수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까짓 풍랑쯤이야 하고 노를 저어봤는데 이번 풍랑은 예전의 것과 다릅니다. 얼마나 풍랑이 심한지, 곧 배가 뒤집혀 죽을 것만 같은 그러한 절망적인 상황에 처했습니다.
주님을 멀리 떠나면 우리에게 이와 같은 풍랑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한 번 예수를 믿은 다음 믿음을 지켜야지 어떤 경우에도 시험 들어서 주님을 멀리 떠나면 안 됩니다. 그때 풍랑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마치 ‘이제 내가 죽을 수밖에 없구나’ 하는 그러한 절대 절망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가 늘 주님 곁을 지켰습니다마는 예수님이 붙잡히시고 난 다음에 주님을 멀찍이 따라갔습니다. 마태복음 26장 58절에,
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를 따라 대제사장의 뜰에까지 가서 그 결말을 보려고 안에 들어가 하인들과 함께 앉아 있더라
바로 그 자리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을 한 것입니다. 늘 주님 곁에 있었던 베드로가 이때만은 멀찍이 떨어져 있었고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여러분, 아무리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럽고 괴로워도 절대로 절대로 주님 곁을 떠나지 마십시오. 절대로 예배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절대 기도하는 것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절대로 말씀 묵상하는 것을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절대로 주님 섬기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일생 다 가도록 주님 내 소원 하나는 주님께로 더 가까이 더 가까이 더 가까이 가기 원합니다.
(찬송가 435장)
주께로 가까이 주께로 가오니
나의 갈 길 다 가도록 나와 동행하소서
주께로 가까이 주께로 가오니
나의 갈 길 다 가도록 나와 동행하소서
저는 제가 어려움을 당할 때나 우리 교회가 어려움을 당할 때 주님 앞에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고 저를 사랑하고 계시고 우리 교회를 사랑하고 계셔서 무언가 좋은 것을 주시려고 우리를 훈련시키시는구나. 할렐루야.
풍랑이 일어날 때 엎드려 기도하고 회개하시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로마서 5장 3절 4절 말씀 우리가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여러분 환난을 통해서 우리가 인내를 배우게 되고 인내를 통하여 우리가 연단 받고 훈련되어져서 우리의 꿈과 소망을 이루는 것입니다. 요셉이 노예로 팔려갔지만 억울하게 감옥에 갔지만 그 인내와 연단을 통하여 서른 살에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는 놀라운 꿈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연단은 축복입니다. 고난은 변장된 축복이지 절대 고난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을 통과한 후에 믿음이 자라고 우리가 주님 앞에서 모든 불순물을 제거하고 주님께서 인정하시는 그러한 귀한 인물로 그러한 모습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욥기서 23장 10절에,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할렐루야. 고난의 때에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고 깨어지고 낮아져서 주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문제 해결자 예수님
둘째로 문제 해결자 되시는 예수님에 대해서 함께 말씀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여러분, 고난을 당해도 문제를 만나도 극한 절망에 처해도 낙심하지 마세요. 문제 해결자 예수님이 여러분과 함께 계십니다. 성경 마태복음 14장 25절에,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성경은 말씀합니다. 제자들이 너무너무 힘들어서 우리 ‘이제 다 죽었구나.’ 깊은 절망에 처했을 때에 예수님이 그들에게 걸어오십니다. 풍랑 위로 걸어오신 것입니다. 파도 위로 걸어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가 밤 사경입니다. 요즘의 시간으로 말하면 새벽 세시부터 여섯 시까지 동트기 전 가장 캄캄한 그 밤에 주님이 그들에게 찾아오신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우리가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두 손 들고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간절히 부르짖을 때 그 절망의 자리로 찾아오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참으로 좋으신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치료자 예수님인 것입니다.
인간의 마지막은 하나님의 기적이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고통 가운데 처한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찾아오셔서 우리를 그 절망에서 건져 주시는 것입니다. 너무나 힘들고 지쳐서 쓰러져 기도할 힘조차 없어서 입술만 떨리고 있을 때 주님이 오셔서 우리를 어루만져주시고 우리를 붙들어 일으켜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절대 희망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생명이 되시고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시는 분입니다. 주님 앞에 나올 때 우리의 모든 문제, 어려움, 슬픔, 걱정이 다 해결될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승리의 주님. 기적의 주님, 영원한 사랑의 주님이신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홍수 위에 좌정하신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시편 29편 10절에,
야훼께서 홍수 때에 좌정하셨음이여 야훼께서 영원하도록 왕으로 좌정하시도다
그 환란과 풍파가 우리에게 홍수처럼 몰아닥칠 때 온 우주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 그 홍수 위에 좌정하셔서 “바다야, 바다야 잠잠하라. 파도야 잠잠하라. 풍랑아 잠잠하라.”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주님 은혜에 감사한지요. 우리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절대 낙심하고 포기하고 주저앉지 마시고 그 마지막 순간에 우리 주님을 꼭!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유일한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입니다.
지난해 2월 17일 주일 새벽에 동작 6교구 오진택, 윤애련 집사님의 두 딸 중 막내 혜민이가 숨소리가 이상해서 급히 앰뷸런스에 실려서 병원에 가니 뇌출혈이 있고 뇌혈관이 꽈리처럼 부풀었는데 90%가 사망해요. 터지면 사망하고, 10%는 살아도 식물인간이 된다고 합니다. 큰 병원으로 옮겼는데 보통 뇌혈관이 팽창해서 터질 때 뇌출혈이 되잖아요. 8mm에서 10mm가 되도 위험하다는데 이 꽈리처럼 부풀어 오른 것이 275mm, 275mm. 의사가 손을 못 댑니다. 또 숨골이 있어서 수술하다가 터지면 죽으니까 수술을 못 해요. 2월 19일 날 병실에 가서 학생을 위해 기도해주는데요. 의외로 이 학생은 얼굴이, 표정이 담담한 게 하나님이 함께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어요.
여러분, 믿음을 가지면 기적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꼭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들에게 역사를 하세요.
그래서 기도를 해주었는데 중환자실에 있다가 일반 환자실로 옮겼고 지금 병원에서 해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 5월에 다시 와라 해서 5월 14일 이제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아직 살아있었네.” 살아있는 게 기적이라 그래요. 그래서 수술하기로 하고 6월 3일, 수술 날짜를 잡았는데 의사선생님들이 모여서 의논하니까 아무래도 애가 수술하다가 죽을 것 같으니까 자신이 없어요. 그래서 일주일 뒤로 또 연기, 6월 11일 날 수술하기로 하고 6월 9일 제가 병원에 가서 기도를 하는데요, 혜민이나 그 부모님이나 다 믿음의 사람들이에요. 두려워 떨고 울부짖고 그러는 게 아니라 담담하게 주님이 함께하신다는 그 믿음을 갖고 기도를 받는 모습을 보면서 ‘야, 바로 여기에 기적이 있다.’ 그 다음 날 수술을 하러 가서 다시 한 번 촬영을 하는데 그 꽈리같이 부푼 것이 사라져 버렸어요. 할렐루야. 의사가 이것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는 거예요. 의사도 속으로 ‘아이, 안심이다. 내가 수술하다가 얘가 죽었으면 어떻게 할 뻔 했나.’ 보세요, 꽈리같이 부푼 것이 사라져 버렸어요. 그 믿음을 하나님이 보시고 거둬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모든 영광 돌립니다. 할렐루야.
얼마나 그 믿음이 가정에 좋은지 몰라요. 우리 혜민 학생이 와있는데 한 번 일어나 보세요. 한 번 일어나 보세요. 자리에 앉으세요. 참 믿음이 대단해요.
누구나 죽음을 눈앞에 두고 두려워할 텐데 두려움이 없어요. 젊어서 그런가. 아니, 믿음이 커서 그렇지요. 믿음이 커서. 죽음 앞에선 나이가 무슨 상관이 있어요. 다 벌벌 떨지요. 그런데 수술 앞두고도 담담하더니 다음 날 그게 사라져버리고 말았어요. 하나님이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앞을 못 보는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앉은뱅이를 일으키신 것처럼 지금도 기적을 행하고 계십니다. 믿기만 하면, 믿기만 하면 기적은 여러분의 것입니다.
주님이 지금도 우리를 초청하고 계십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3. 우리의 믿음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믿음입니다. 셋째로 우리의 믿음에 대해서 말씀드립니다. 마태복음 14장 26절 보니까,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27절에,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예수님의 제자들이 풍랑과 싸우면서 ‘이제 우리는 죽었구나.’ 하는데 저기 멀리서 뭐가 희끗희끗한 게 보이니까 “아, 유령인가보다.” 아니 좀 전에 예수님 오시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제자들이 “유령인가보다”가 무슨 말이에요. “주님이 오시는가 보다.” 그래야지.
우리들은 풍랑 위로 걸어오신 예수님을 보고 “주님이 오신다.” 그렇게 믿음으로 고백해야지. “유령인가보다” 참 하여간 한심하지요. 그런데 우리라도 그럴 때 그랬을 수 있어요.
주님이 풍랑 위를 걸어오신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한지요. 주님이 걸어오신 거예요. 주님이 걸어오신다니까요. 걱정할 것이 없어요. ‘너 근심 걱정 말아라.’ 우리가 찬송한 그대로 걱정하지 마세요. 염려하지 마세요. 슬퍼하지 마세요. 낙심하지 마세요. 포기하지 마세요. 주님이 절망의 자리에, 고통의 자리에, 신음하는 그 자리에 걸어오십니다.
그런데 28절에 베드로가 참, 성격 급한 베드로가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 나오지요. 마태복음 28절, 29절 보겠습니다.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여기까지는 참 잘 진행되는 것 같아요. 베드로가 “예수님, 예수님이시면 절 좀 물 위로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아주 자기도 예수님처럼 물 위로 걸어오면서 제자들에게 “야, 나 물 위로 걷는다.” 그렇게 하고 싶었겠지요.
여러분, 믿음을 가지면 어떤 고난의 풍랑 위에도 우리는 걸어 갈 수가 있습니다. 믿음이 문제입니다. 로마서 10장 17절에,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라고 말씀했는데, 여러분, 믿음은 말씀에 근거하는 것입니다. 내 감각과 내 이성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내 믿음에 근거해서, 말씀에 근거해서 내가 믿고 나가면 기적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믿음이란 저수지 물을 집으로 끌어다 주는 수도관과 같다. 즉 하늘의 보물을 지구에 날라다주는 수송 파이프인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요, 이거 보세요. 베드로가 갔다가 ‘내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지?’ 하고 옆을 바라보니까 풍랑이, 파도가 치는 것을 보고 가라앉습니다. 마태복음 14장 30절에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여러분, 예수님만 바라보고 나가야지 풍랑을 바라보면 빠지는 것입니다. 환경을 바라보면 빠지는 것입니다. 내 아픈 상처를 바라보면 빠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2장 2절에,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예수님께 초점을 맞추자. 예수님만 믿고 의지하고 나가자. 할렐루야.
여러분, 죽음이라는 것이 끊임없이 몰아닥칠 때 어떻게 그 공포를 이길 수 있겠습니까?
제가 김준곤 목사님의 간증을 보면서 굉장히 크게 도전을 받았어요.
2009년 2월 29일 하나님 품에 안기셨는데 이 김준곤 목사님은 사랑하는 많은 가족들의 죽음을 직접 목격했어요. 어머니와 사랑하는 사람, 세 분의 형님들이 차례로 급사해서 돌아가시는 모습을 보았고 6.25 때는 아버지와 가족들이 눈앞에서, 공산당 앞에서 죽는 모습을 보았고 어린 시절 사랑하는 동생 둘이 사고로 죽는 모습을 보았고 또 고등학교 교감까지 봉직하며 모든 것을 이루었다고 했던 착하디착한 동생이 딸, 네 명을 남겨 놓고 간암으로 죽는 고통을 겪었고 사랑하는 딸 신이가 157일 동안 위암으로 고통을 겪다가 두 딸을 남겨 놓고 세상을 떠나는 그러한 비극을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슬픔과 고통,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그분이 이길 수 있었습니까? 이렇게 고백합니다.
“정직하게 고백하면 나는 하나의 얼굴로는 웃고, 다른 얼굴로는 운다. 내 영은 주님을 찬양하고 기뻐하고 감사하며 깊은 곳에서 샘물같이 환희가 솟는다. 그러나 다른 마음의 하늘에서는 비가 끊임없이 내리고 있다. 옆을 보면 정신착란증에 걸릴 것 같고, 위를 보면 현기증이 나고, 내 안을 들여다보면 죄와 추한 것들이 있고, 과거는 회한과 슬픔뿐이고 미래는 안개처럼 불확실하고 불안하다. 나는 주님만 바라봐야 한다. 과거는 아무리 더럽고 아프고 서러워도 내일과 새해와 미래는 때 묻지 않은 순수한 페이지, 무한한 잠재적 가능성이 백지같이 열려있다. 시집가는 처녀처럼 새 날을 맞이하여, 새 집에서 새 살림 꾸려 새 삶을 살자. 한 발짝, 한 호흡, 주님을 사랑하며 창세기 첫날처럼 날마다 영원한 첫사랑으로 살자. 내게 깊은 위로와 감사와 찬송과 평안이 있다.”
예수님 안에서만 이와 같은 평안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4. 영원한 희망 예수 그리스도
마지막으로 영원한 희망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31절에 성경은 이와 같이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32절에,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주님 말씀을 기억하세요.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오늘 우리에게 주님이 주신 말씀입니다.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왜 염려하였느냐. 왜 걱정하였느냐. 내가 너와 함께하지 않느냐. 내가 너를 모든 절망에서 건져줄 것을 왜 믿지 않느냐. 나만 믿고 의지하고 바라보고 나오라.” 할렐루야. 할렐루야.
여러분, 의심이라는 것이 우리를 바다에 빠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의심은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부인하게 만들고 오해하게 만들고 의심은 불신을 가져오고. 그래서 나를 한없이, 한없이 절망의 바다로 빠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상황이라 할지라도 “주여, 나를 구원하여 주옵소서.” 주님께 부르짖고 부르짖고 또 부르짖으면 주님이 우리를 건져주시고 우리를 소원의 항구로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니 바다가 잠잠하여 졌더라. 주님께서 우리 배에 올라오시기만 하면 모든 고난의 풍랑은 잠잠해질 것입니다. 질병의 풍랑도, 가난의 풍랑도, 다툼과 갈등의 풍랑도 잠잠해질 것입니다.
낙심하지 마세요. 절망하지 마세요. 좌절하고 포기하지 마세요. 인간의 마지막은 하나님의 기적이 시작되는 시간입니다. 다 맡기세요. 철저하게 맡기세요. “주님, 주님만 바라봅니다. 주님만 믿고 의지하고 나갑니다. 주여, 나를 도와주옵소서. 파도를, 풍랑을 잠잠케 하신 주님, 이 시간 나에게 말씀하여 주옵소서. 파도야 잠잠하라. 풍랑아 잠잠하라.”
오늘 이와 같은 큰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그래서 일생동안 하나님이 함께하셔서 모든 풍랑에서 믿음으로 승리하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어떻게 세상의 바람을 잠잠케 할 수 있는가?
마 14:24-33 / 조영식 목사
0. 들어가는 글
오늘은 오월 네 번째 주일이며, 부활절 여섯째 주일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여섯째 주일이 지나신 후에 하늘로 승천했습니다. 그러므로 금년은 4월 17일이 부활절이면 사십일이 지난 금주 26일이 예수님의 승천일이 됩니다. 부활의 주님이 승천하심을 기억함으로 하늘의 소망이 넘치길 바랍니다. 오늘 본문의 흐름은 예수님이 빈 들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오천 명을 먹이시는 사랑을 베풀었습니다(마14:13~21). 오병이어의 기적 후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배를 타고 갈리리 바다를 건너가도록 했습니다(22절). 그리고 예수님은 산에 올라가서 기도하시면서 밤이 맞도록 혼자 계시고(23절), 제자들은 갈릴리 바다에서 고난의 풍랑을 만났습니다(24절). 오늘날도 한국교회가 믿음의 배를 타고 하나님 나라로 항해하다 코로나의 풍랑을 만난 것과 유사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이 고난의 풍랑을 어떻게 해결했는지를 깨닫고, 우리도 코로나의 풍랑을 잘 해결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1. 왜 주님은 물 위를 걸어오셨는가?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이 고난의 풍랑을 만났을 때 주님이 물 위를 걸어오신 마음은 무엇일까요?
첫째로 부모와 같은 사랑의 마음입니다. 주님이 물 위를 걷는 기적은 자신의 능력보다 사랑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25절). 물 위를 걷는 주님의 모습은 물에 빠져 죽어가는 자녀를 구하려고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드는 부모와 같은 사랑의 마음입니다. 부모가 위기에 빠진 자녀를 구하려고 머리로 계산하지 않고 먼저 사랑으로 행동하는 것처럼 예수님도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인공지능이 사람의 역할을 대신하는 영역들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공지능이 영원히 극복할 수 없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랑의 감정입니다. 주님이 물 위를 걷는 것은 감정이 없는 하이테크의 기적이 아니라 사랑의 감정으로 찾아오신 하이터치의 마음입니다. 세상에서 더 발전한 하이테크의 시대가 오더라도 사람들은 따뜻한 사랑을 나누는 하이터치가 더 필요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부모의 마음으로 물 위를 걸어오신 주님과 하이터치의 따뜻한 사랑을 나누며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둘째로 유령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은 주님이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질렀다”고 합니다(26절). 제자들은 바다의 풍랑보다 물 위를 걷는 유령을 더 무서워했습니다. 사람들은 존재가 불분명한 대상에게 더 큰 공포를 느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유령이라고 착각하는 제자들에게 어떻게 반응합니까? 주님은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로 두려워하는 자녀에게 부모처럼 안심부터 시키는 사랑을 보여줍니다(27절). 또한 그들에게 “나는 나다(에고 에이미)”라고 합니다(27절). 유대인은 주님이 “에고 에이미”만 사용하면 하나님을 모독했다고 돌로 쳐서 죽이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모세가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했을 때, 하나님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라고 합니다(출3:13,14). 여기서 하나님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와 주님의 “에고 에이미(나는 나다)”가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존재가 불분명한 유령으로 착각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는 ‘에고 에이미’의 하나님이 되심을 믿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풍랑은 주님의 말씀 한마디면 잠잠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주님은 물 위를 걸어오셨습니까? 그 결과에 대하여 제자들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라고 합니다(33절). 예수님이 물 위를 걷는 것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명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당시에 유대인은 천국의 바다는 풍랑이 치지 않는다고 믿었습니다. 또한 천국에 사는 의인들은 바다 위를 쉽게 걷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천국의 사람은 당연히 바다 위를 걸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유대인의 기대를 알고 주님이 바다 위를 걷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를 증명했습니다(33절). 오늘날도 우리가 고난의 풍랑을 만났을 때 하나님의 아들이 바다 위를 걸어오셔서 잠잠하게 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2.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을 수 있었던 이유는?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가 물 위를 걸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28절) 오직 부모를 의지하는 어린아이의 믿음이었기 때문입니다. 단순한 어린아이일수록 부모가 모든 것을 해줄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합니다(마18:3). 베드로의 상황을 비유로 하면 어린아이가 부모와 헤어졌습니다. 그런데 도로 건너편에 엄마의 모습이 보였을 때, 어린아이는 도로가 위험한 것을 계산치 않고 오직 엄마의 품에 안기려고 걸어갑니다. 이처럼 베드로는 부모와 같은 주님의 품에 안기려고 예수님만 바라볼 때 물 위를 걸었습니다(29절). 우리도 단순한 어린아이처럼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걸어가는 믿음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다른 제자들이 물 위를 걷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들의 눈앞에 보이는 풍랑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주님께 가는 것을 막은 장애물은 그들이 탔던 배입니다. 제자들에게 배는 바다의 풍랑에서 지켜주는 유일한 버팀목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두려워서 물에 빠지지 않도록 두 손으로 배를 붙잡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배에서 내려오는 것은 어부로서 모든 실력과 경험을 내려놓고 주님께 온전히 맡기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우리를 예수님께 가지 못하도록 막는 장애물은 세상의 고난이 아니라 내가 의지하며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의지하며 붙잡고 있는 배에서 내려와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맡길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왜 베드로는 물에 빠졌을까요? 주님보다 바람이 더 무섭기 때문입니다(30절). 우리가 단순한 어린아이처럼 주님만을 바라보며 걸을 때는 기뻤는데, 생각이 많은 어른이 되면 세상의 바람을 보며 근심의 바다에 빠집니다. 우리는 생각이 많은 어른이 되어서 어떤 바람을 바라보며 근심의 바다에 빠져있습니까? 저도 창립 20주년을 준비하면서 단순한 어린아이처럼 주님만을 바라보며 기뻐해야 하는데, 생각이 많은 어른이 되어서 주변의 바람을 보며 근심의 바다에 빠지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처럼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30절).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는 ‘만일’의 의심으로 시작하여, 바다에 빠지는 의심으로 끝났습니다(28,31절). 그러나 예수님은 ‘즉시’ 안심시키는 사랑으로 시작하여, 그의 의심에도 불구하고 변함없는 사랑으로 ‘즉시’ 붙잡아주고 있습니다(27,31절). 우리도 의심의 풍랑에서 건짐받기 위하여 주님이 변함없는 사랑으로 즉시 붙잡아 주기를 소망합니다.
3. 바다의 풍랑을 잠잠하게 하려면 무엇이 필요합니까?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이 고난의 풍랑을 해결하려면 무엇이 필요합니까? 오히려 베드로가 물 위를 걷는 사건이 고난의 본질을 잃어버리게 만들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만난 고난의 풍랑은 처음부터 끝까지 바람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어떻게 물 위를 걸었느냐’ 보다 ‘어떻게 바람을 멈추었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이 바다의 풍랑을 잠잠케 한 말씀이 두 번 나옵니다.
먼저는 제자들이 고난의 풍랑을 만났을 때 배 안에 잠자고 있는 예수님을 깨웠습니다(8:25). 그리고 주님의 말씀으로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었습니다(8:26). 우리 안에 잠자고 있는 예수님을 깨워 주님이 말씀할 때 세상의 바람이 잠잠해지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고난의 풍랑이 멈추지 않는 이유가 예수님이 잠들어 있는 신앙이 아닌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만약 예수님이 우리의 안에 잠들어 있다면 주님의 말씀이 전혀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잠들어 있는 예수님을 깨워 주님이 말씀하심으로 모든 고난의 풍랑이 잠잠하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또 하나는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이 고난의 풍랑을 만났을 때 “예수님이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쳤다”고 합니다(32절).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와서 함께할 때 세상의 바람이 잠잠해지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고난의 풍랑이 멈추지 않는다면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와서 함께하는 신앙이 아닌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만약 예수님이 우리 안에 함께하지 않는다면 의심의 풍랑이 눈을 가려서 주님의 존재가 불분명한 유령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와서 스스로 존재하는 ‘에고 에이미’의 하나님이 함께하심으로 모든 의심의 풍랑이 잠잠하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물 위로 걸어오신 예수님
마 14:23-36 / 안병호목사
요즈음 한달 사이에 아주 충격적인 일을 당한 분들이 많았다. 그 첫째는 2아이를 두고 32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한 젊은 여인, 남의 집에서 일을 돌보아주다가 강도에게 살인 당한 한 여인, 그처럼 명랑하고 놀기 좋아한 한 여인이 갑자기 췌장암으로 발견 된지 한 달 만에 많은 고통을 당하다가 세상을 떠난 여인, 죽은 자는 말이 없다고 본인들이야 어떤 충격도 고통도 없겠지만 이런 일을 당한 가족들의 충격이 얼마나 클 것인가 참으로 가슴이 아팠다. 각각 문상을 가서 똑 같은 감정을 가진 것은 영정 사진을 보자마자 왈칵 울음이 나오려고 하는 것을 참기 어려웠다.
우리가 세상을 살다 보면 우리는 참으로 감당키 어려운 큰 슬픔에 빠질 대가 있다. 우리의 힘으로 극복하기 어려운 환난을 당할 때가 있다. 이러한 때에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되는 소식은 우리 주님께서는 그와 같은 경우에 우리가 당한 어려운 현장에 찾아 오셔서 우리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우리에게 큰 위로를 주신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폭풍우를 만나 죽음의 위험에 처해 있는 제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물위로 걸어오신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서 환난과 위험에 처해 있는 인생들을 예수님은 어떻게 도우시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Ⅰ.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는 예수님이시다.
23절을 읽어보자.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 제자들은 폭풍을 만나 심한 고난을 당하고 있을 때 예수께서는 산에서 홀로 남아 기도하고 계셨다. 예수님은 어떤 기도를 드렸을까요? 요한복음 17장에 유명한 대 제사장 적인 기도의 패턴을 볼 때 예수님의 기도를 엿볼 수 있다. 예수님의 기도의 패턴은 먼저 자신을 위한 기도를 드리고 다음에 제자들을 위한 기도를 드리고 다음에 미래의 성도들을 위한 기도를 드렸다. 아마도 지금 이 상황에서도 이와 같은 기도를 드리지 않았는가, 추측할 수 있다.
자신을 위한 기도에서는 세상 사람들의 인기에 끌려 다니지 아니하게 하는 기도와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하는 기도를 드렸을 것이라 생각한다.
무리들을 위한 기도에서는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인생을 다 허비하지 말고 참 구원의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중심 한 인생을 살도록 기도했을 것이다.
그보다도 중요한 기도는 제자들을 위한 기도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제자들이 지금 처한 상황을 생각해 보면 제자들을 위한 예수님의 기도가 어떠했을까를 짐작케 한다. 제자들은 지금 말로 다할 수 없는 어려운 상황 가운데 처해 있다. 예수님은 지금 홀로 산에 계셨지만 제자들이 어떤 형편에 처해 있는가를 너무나 잘 알고 계셨다. 그들은 지금 바다 한 가운데서 폭풍을 만나 고통을 당하고 있다.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슬리므로 물결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더라.”(24) “바람이 거슬리므로”라는 말이 우리에게 암시 해 주고 있는 것은 예수께서 명하신 목적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그 길을 방해하는 바람이라는 세력이 있었으나 제자들은 물러서지 않고 바람을 대항하여 노를 저어 간 것이다. 이것이 자기의 안일과 육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하여 진리를 거역하고 말살하는 헤롯과 다른 점이다. 그들이 이런 싸움을 하고 있는 상황은 밤 4경까지 계속 된 싸움이다. 4경은 4-6시까지의 시간이니까 밤새도록 싸웠다는 것을 본다. 이미 육지에서 수리나 떠났다고 했는데 헬라어로는 “스타디우스”라고 했는데 요한복음에서는 십 여리쯤이라고 라고 번역했다. NIV에서는 3-3.5마일로 번역했다. 갈릴리 바다의 폭이 약 5마일쯤 거리인데 반 이상을 건너 간 것이다.
여기에서 제자들의 순종심과 헌신을 볼 때 얼마나 위대한가? 예수님은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계셨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실 때 그들을 단순히 그 어려움에서 구해 주시라고만 기도하시지 않으셨으리라 생각된다. 아마 하나님께 그들의 충성과 헌신에 대해서 감사 하셨을 것이고 그들이 더욱 그 어려운 싸움을 잘 싸우도록 힘주시라고 기도하셨을 것이다. 그리고 절대로 바람이 그들을 멸하지 못하도록 기도하셨다고 우리는 능히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도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듯에 순종하며 살고자 할 때 이와 같은 역풍이 불어온다는 것을 기대해야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로 많은 두려움을 갖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두려워 할 필요가 없는 것은 이와 같은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신 예수님이 계시다는 것이다. 지금도 예수님은 하나님의 우편에 우리를 위하여 중보 기도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아야한다. 우리가 분명히 주님의 명령을 좇아서 순종하면 많은 풍랑이 일고 우리를 방해하는 세력들이 많이 있을지라도 결코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이 우리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 때문이다.
Ⅱ. 친히 어려운 상황 가운데 찾아오신 예수님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이 고난당하고 있을 때 그들을 위하여 기도만 하신 것이 아니고 그들이 고난 받고 있는 현장에 찾아오신 것이다. 25절을 보라.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예수님이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심으로도 능히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을 친히 찾아 주신 것은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시며 그들의 믿음을 돕기 위해서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우리의 입장에서 도우시는 분이심을 우리가 알 수 있다.
그러나 처음 예수님이 그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그들은 유령으로 착각하여 두려워하였다. 유령이란 초자연적인 존재 앞에서 일반적으로 느끼는 감정이다. 헤롯 역시 예수를 그가 죽인 세례요한이 다시 살아났다고 하였는데 이것 역시 초자연적인 존재 앞에 느낀 감정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헤롯에게는 자신을 들어내시지 않으시고 그들을 떠나셨지만 제자들에게는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하시고 자신을 들어내신 것이다. 헤롯과 같이 비인격적인 신앙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귀신으로 생각하고 악령에 사로 잡혀 두려운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한다. 인격적인 하나님을 믿지 못한 사람은 모든 초자연적인 사건이 일어날 때 그것이 성령의 역사이든 악령의 역사이든 그것을 귀신으로 생각하고 두려워한다. 그래서 항상 두려움이 그 마음을 떠나지 않는다. 요즈음 특히 사람들은 이런 종류의 불안과 공포가 많다. 물질생활이 풍요해지고 영적인 것에 관심이 없어 질 때 사람들은 이와 같은 악령에 시달리게 된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인격적으로 믿는 자 앞에서는 항상 자기를 밝히 들어내신다.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27)는 표현은 곤경에 처해 있는 그 백성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사 41:10,13 ; 43:1 ; 44:2을 참조 “내니”(I AM)라는 말은 구약 성경의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형태의 하나의 메아리다. 곧 예수님은 절망 가운데 있는 제자들에게 신적인 계시를 보여 줌으로 구원의 소망을 주신 것이다.
오늘날에도 우리가 어떤 역경에 처 하드라도 주님을 의지할 때 하나님은 자기를 계시하시고 우리에게 능력을 보여 주신다. 여러분의 가정이 아무리 어려운 일에 처하더라도 주님은 여러분을 찾아 오셔서 내니 두려워 말라고 위로 해 주실 것이다. 여러분 가운데 사업을 하면서 어려움에 직면해 있을 때도 주님을 의지하면 주님은 여러분을 성령으로 찾아 오셔서 내니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생의 어떤 광풍이 일어나도 우리 주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를 홀로 버려두시지 않을 것이다.
아마 여러분들도 그런 경험을 많이 했으리라 믿는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풍랑을 만난 제자들처럼 자주 시련을 당할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은 결코 그런 시련을 혼자 두시지 않을 것이다. 만약 여러분이 그런 어려움을 당하면 낙심하거나 원망하지 말고 주님을 바라보며 인내하라. 그러면 반드시 주님께서 찾아 와서 위로해 주실 것이다.
Ⅲ. 예수님은 찾아 오심으로 근본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
예수님을 통해서 해결되지 못할 문제가 이 세상에는 아무 것도 없다. 아직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면 때가 아직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혹은 주님께서 보실 때 그 상황이 아직은 우리에게 더욱 유익이 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오시자 마시자 당장 바람을 잔잔케 하시지 않으셨다. 먼저 베드로를 도우신다. 베드로는 베드로다운 성품을 드러낸다. “주여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위로 오라 하소서”라고 하였다. 여기서 물이란 단순히 땅과 공기와 불과 대조된 그런 물을 의미한 것이 아니라 도무지 제어할 수 없는 광활하고 사나운 제어하기 어려운 세력을 의미한다. 그래서 문자 적으로 번역하면 “물들”(후다타)위로 베드로가 걸어갔다(29)고 하였는데 이런 표현을 관용구 적인 복수라고 한다. 창세기 1:2; 신명기 5:8; 여호수아서 3:13; 시편 107:23절 등의 예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물위로 걷는 것은 단순한 물위를 걸었다는 의미가 아니고 우리를 곤란 가운데 몰아넣은 모든 악의 세력을 굴복시킨 것을 의미한다.
베드로는 주님의 명령에 따라서 담대히 물위로 걷다가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물을 바라보는 가운데 두려워서 물에 빠지게 되었다. 자비로우신 주님은 금방 베드로의 손을 잡아 일으킨다.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고 있는 한 어떤 악의 세력도, 어떤 예측 불허의 세력도 밟아 뭉갤 수 있다는 것이다. 주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믿음을 의미한다. 주님을 바라볼 때 곧 믿음을 가지고 살 때 어떤 힘들고 어려운 일도 밟고 일어 설 수 있다는 것이다. 물에 빠졌다는 것은 잠시 동안만이라도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문제를 바라 볼 때 문제 자체에 빠진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문제 자체에 빠져서는 안 된다. 믿음으로 문제 자체를 밟고 일어 서야한다. 그러면 어떤 어려운 문제도 다 해결 될 수 있다. 우리가 문제가 있으면 그것을 두려워하고 낙심해 버리기 때문에 문제에 빠져 들어 갈 수 밖에 없다. 베드로처럼 물을 밟고 걷다가도 믿음이 없고 두려움에 빠지게 될 때 물(문제)속에 빠져 들어가게 된다.
베드로에게 믿음의 훈련을 시키신 예수님은 배에 함께 오르시자 그 풍랑이 가라앉게 되었다. 그러자 배에 있는 사람들이 다 놀라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였다.
비록 풍랑을 만나서 일엽편주처럼 금방 침몰되어 없어질 것처럼 보이던 그들은 곧 이 땅에 시작된 겨자씨와 같은 하늘나라이다. 하나님 나라의 역사는 대부분 이와 같은 미미한 가운데 시작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자라게 되면 큰 나무가 되어 모든 자에게 위로와 쉼을 주고 누룩처럼 온 인류에게 퍼져 영향을 준다. 사도행전의 역사가 바로 그런 역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우리의 인생의 삶은 결코 평탄한 길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끊임없이 위험에 처해서 두려움에 사로 잡혀 살게 된다. 아마 지금 이 자리에 계신 분들도 막연한 가운데 두려움이 있어서 항상 고통을 주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두려 워 말라. 오늘 우리 주님은 그를 따르는 제자들이 어떤 두려움의 상황에 있던지 다 알고 계신다. 그래서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시고, 그들을 찾아 주시고, 친히 그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 우리 인간적인 노력을 통해서 해결하는 것보다 주님이 해결해 주시면 가장 완전한 해결이다. 신앙생활을 해보면 해볼수록 하나님을 의지하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를 느낀다.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자. 주님은 언제나 우리를 외면하시지 않으시고 친히 찾아 오셔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물 위로 오라
마 14:22-33 / 김동호 목사
오병이어의 기적 이후 사람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우리들을 죄에서 구원해 줄 구세주로 믿었기 때문이 아니라 이와 같은 분이 왕이 되시면 먹고 사는 것은 문제도 없겠다는 지극히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저들을 피하여 숨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시는 동안 많은 병자들을 고쳐 주시었습니다. 병자들을 고쳐주신 후 습관처럼 하신 말씀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아무에게도 가서 이것을 이야기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예수님이 겸손하셔서 그러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병이나 고쳐주시는 분으로 오해할 것을 염려하셔서 그러셨던 것입니다.
저는 오병이어의 기적도 성경대로 믿고 성경에 나타나는 모든 신유의 역사를 말씀 그대로 믿습니다. 저는 예수를 잘 믿으면 형통해 지고 강건해 지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를 믿는데도 실패하고 가난해지고 어려워지는 것은 세상이 죄로 말미암아 왜곡되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부함과 형통함에 대하여 매우 긍정적인 사람입니다.
왜곡된 세상에서 바르게 살려고 하다가 가난해 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들은 참으로 훌륭한 분들입니다. 그러나 왜곡된 세상에서 바르게 살아 부해진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구원과 같은 수준의 복으로 보지 않지만 그것도 틀림없는 하나님의 축복 중에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바르게 살려고 하다가 가난해 진 사람은 인정하지만 바르게 살아 부하게 된 사람들은 도무지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것은 매우 위험한 생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그것을 바른 기독교적인 생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부함과 건강함을 긍정하지만 그것이 우리 기독교의 핵심이 아닌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것을 내세우고 강조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라고 할 수 있는 형통함과 신유의 기적이라고 할 수 있는 강건함을 영혼이 잘되는 구원과 같은 반열에 올려놓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와 같은 것을 내세워 교회를 부흥시키는 것은 건강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 때문에 자신을 왕으로 삼으려는 사람들을 피하여 숨으셨는데 교회와 목회자 중에는 오병이어와 같은 기적을 내세워 교회를 부흥시키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이야기가 곁으로 좀 많이 갔습니다. 예수님은 저들을 피하여 숨으시면서 제자들도 그곳을 떠나 가버나움으로 가라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이 제자들에게 가장 위험한 자리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비난하고 매장하려고 하고 돌을 던지는 자리가 위험한 자리인 줄로만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보다 더 위험한 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높이고 왕으로 섬기려고 하는 자리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는 예수님이 왕이 되실 분이라는 믿음이 있었고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자신들도 한 자리 하게 될 것이라는 인간적인 기대들이 있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그것 때문에 제자들끼리 다툰 적도 있었습니다. 그와 같은 마음과 기대를 가지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왕으로 섬기려고 하는 그 자리는 매우 위험한 자리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가버나움으로 멀리 배를 타고 떠나라고 명령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려고 하였던 벳세다 광야의 자리는 머물고 싶었던 자리이지 떠나고 싶은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저는 이 성경을 읽을 때마다 이 부분에 큰 은혜를 받습니다. 제자라고 다 온전한 것은 아닙니다. 저들도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이유 때문에 예수님을 왕으로 섬기려고 하였던 사람들과 똑같은 면이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에게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고 하는 절대적인 믿음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평생 두 번 다시 못 올 것과 같은 절호의 기회인데 그것을 포기하고 단번에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큰 믿음의 교훈을 주는 말씀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그와 같은 믿음 주시기를 진심으로 원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배를 타고 가버나움으로 가는데 풍랑이 일었습니다. 바람이 불었습니다. 바람이 벳세다에서 가버나움으로 분 것이 아니라 가버나움에서 벳세다로 불었습니다. 어부 출신 제자들이 많아 노를 젓는 일이 프로였지만 최선을 다하여 노를 저었음에도 불구하고 배는 가버나움으로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을 포기하지 아니하고 열심히 풍랑과 싸우며 가버나움을 향하여 노를 저었습니다.
얼마든지 포기할 수 있었는데, 포기하고 뱃머리를 돌리기만 했다면 노를 젓지 않아도 배는 자동적으로 벳세다로 갔었을 터인데, 제자들의 마음 속 에는 가버나움보다 벳세다가 있었을 터인데도 불구하고 저들은 그렇게 하지 아니하고 계속해서 가버나움으로 가기 위해 파도와 싸우고 있었습니다.
이 모습이 성경 속에서 발견되어지는 예수님의 제자들의 가장 훌륭하고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저는 개인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저와 여러분들의 신앙이 꼭 이와 같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진심으로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이와 같은 믿음을 주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면 풍랑이 입니다. 바람은 언제나 하나님 쪽으로 불지 아니하고 세상 쪽으로 붑니다. 때문에 하나님 뜻대로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리만큼 힘듭니다. 그러나 세상식대로 사는 것은 노 젓지 않아도 되리만큼 쉽고 편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가버나움을 향하여 노를 저어야 합니다. 풍랑과 싸워야 합니다. 풍랑과 파도를 두려워하지 말고 싸워야 합니다. 정면으로 돌파하여야 합니다.
그때 예수님이 풍랑 이는 바다를 걸어 제자들에게 오셨습니다. 그때 진정한 예수님과 제자 사이의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저들은 기뻐서 예수님을 저들의 배로 영접하였습니다. 만일 저들이 뱃머리를 돌려 벳세다로 향하고 있었다면 예수님께서 저들에게 오시지도 않으셨겠지만 만일 오셨다고 해도 예수님 만난 것이 기쁘지 않았을 것입니다. 부끄러웠을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을 만났다고 해도 진정한 만남이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모든 삶의 문제는 하나님을 만남으로 해결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세상의 모든 문제는 다 해결이 됩니다. 제자들은 기뻐서 예수님을 배로 영접하였습니다. 예수님과의 진정한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을 배로 모셔드리자마자 풍랑은 잠잠해졌습니다. 배는 저들이 가려던 가버나움에 무사히 이르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모든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세상의 풍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그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우리의 삶 속에 예수님은 진정으로 영접해 드리면 모든 삶의 문제와 풍랑은 해결되고 잔잔해 질 것입니다.
문제는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그때 처음 예수님을 만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들은 예수님과 늘 함께 먹고 자고 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의 진정한 만남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하여 풍랑 이는 바다와 싸울 때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이전에 저들은 예수님과 함께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만남이 없었습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생을 예수 믿는다고 하고 교회에서 살다시피 함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예수님과의 만남이 없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저들은 교회를 다니기 때문에, 직분을 받아 열심히 봉사를 하기 때문에 저들이 예수님을 만난 사람인 줄로 생각하지만 착각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은 말씀에 순종하기 위하여 세상과 싸우고 풍랑과 싸우고 파도와 싸우는 삶의 현장에서만 이루어집니다. 풍랑을 두려워하여 도망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풍랑을 핑계 삼아 벳세다로 뱃머리를 돌린 사람은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풍랑이 일고 바람이 거슬려 불어도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을 살려고 발버둥질 치고 싸울 때 우리는 드디어 그곳에서 우리를 찾아와 ‘내니 두려워 말라’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만나면 드디어 우리는 모든 세상의 풍랑을 잠재우고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풍랑과 싸웠기 때문에 승리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에 승리한 것입니다. 제자들에게는 풍랑을 싸워 이길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요구한 것은 풍랑을 싸워 이길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능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굴하지 않고 풍랑과 싸우려고 하는 믿음이었습니다. 생사를 걸고서라도 세상 식으로는 살지 않겠다는 마음이었습니다. 그 믿음과 마음이 예수님을 만나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만남으로 모든 문제는 해결이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세상과 싸워 이길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골리앗을 이긴 것이 아니었습니다. 만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능력이 되어 골리앗을 이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의 하나님의 능력을 이길 능력은 없습니다. 어떠한 세상의 풍랑도 하나님 앞에서는 다 잠잠해 질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능력을 소유하는 자에게는 세상의 어떤 문제도 더 이상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저는 그것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 안에 있는 자에게는 어떤 환난도 곤고함도 박해도 위험도 칼도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 라> (롬 8: 35 - 39)
베드로가 예수님을 향하여 자신도 물위를 걷게 해달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이 허락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고 풍랑 이는 바다에 내려섰을 때 베드로도 예수님처럼 바다를 걸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의심하고 풍랑을 바라보게 되었을 때 베드로는 바다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우리도 정말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면 능히 베드로처럼, 예수님처럼 풍랑 이는 바다를 걸을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그와 같은 믿음 주시기를 원합니다.
저는 하나님께 능력 있음을 믿습니다. 아무리 세상이 힘들고 어려워도 주 안에 있으면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하나님께 우리에게 주실 것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저는 요즘 나름대로 좀 힘든 삶을 살고 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좀 힘든 것이 아니라 많이 힘듭니다.
힘들어서 힘든 것도 있지만 힘들어서 좋은 것도 있습니다. 그것은 힘들지 않을 때 보다 하나님과 더 가까워진다는 것입니다. 성경과 찬송이 더 은혜스럽습니다. 찬송과 말씀이 3인칭으로 느껴지지 않고 1인칭과 2인칭으로 느껴집니다. 말씀과 찬송의 나의 말씀과 찬송으로 느껴집니다. 요즘 제가 열심히 마음으로 부르는 찬송이 있습니다. 그것은 458장 ‘주의 친절한 팔에 안기세’라는 찬송입니다.
< 1. 주의 친절한 팔에 안기세 우리 맘이 평안 하리니 항상 기쁘고 복이 되겠네 영원하신 팔에 안기세 주의 팔에 그 크신 팔에 안기세 주의 팔에 영원하신 팔에 안기세.
2. 날이 갈수록 주의 사랑이 두루 광명하게 비치고 천성 가는 길 편히 가리니 영원하신 팔에 안기세 주의 팔에 그 크신 팔에 안기세 주의 팔에 영원하신 팔에 안기세.
3. 주의 보좌로 나아갈 때에 기뻐 찬미 소리 외치고 겁과 두려움 없어지리니 영원 하신 팔에 안기세. 주의 팔에 그 크신 팔에 안기세 주의 팔에 영원하신 팔에 안기세.>
하나님을 만나면, 그 하나님의 팔에 안기면 모든 풍랑은 잠잠해지고 모든 삶의 문제는 해결될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 하나님을 만나고, 그 하나님의 품에 안기기 위하여 우리는 제자들과 같이 풍랑 이는 바다를 거스려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는 삶을 살기 위하여 싸워야 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오늘 말씀이 저는 좋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저는 믿습니다. 세상을 이길 수는 없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지 말고 싸워라. 핑계하지 말고, 도망하지 말고 싸워라. 그리고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만나라. 그리고 그 하나님의 품에 안겨라. 그리고 승리하라. 저는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물위로 오라’하신 말씀이 좋습니다. 우리는 모든 물에 빠질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들이지만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산다면 그 물위를 걸을 수 있는, 모든 세상의 풍랑을 이길 수 있는 그런 삶을 살 수 있게 되리라고 믿습니다.
부족하지만, 저는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여러분들도 다 그렇게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왜 의심하였느냐?
마 14:22 / 김영준목사
‘아들아 너는 왜 하나님을 믿느냐?’ 라는 책이 있습니다. 무신론자인 아버지와 크리스챤인 아들이 삼년동안 주고받은 편지의 내용을 모아서 만든 책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늘 하는 질문이 그것입니다. ‘아들아 너는 왜 하나님을 믿느냐?’ 세상 사람들은 우리에게 믿는 이유에 대해서 물어봅니다. 왜 믿습니까, 믿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믿을만한 근거가 무엇입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너는 왜 믿지 않느냐?’라고 물어보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에게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라고 물어보신 것처럼 안 믿는 것이 정상이고 믿는 것이 특별한 것이 아니라 믿는 것이 정상이고 안 믿는 것이 이상하다는 얘기입니다. 적어도 생각이 건강한 인간은 ‘왜 사느냐’라고 물어보지 않고 ‘왜 죽느냐’고 물어봅니다. 왜 사느냐고 물어보는 사람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정상이고 안 믿는 것이 비정상이기 때문에 믿는 사람에게 믿는 이유를 물어보기 보다는 안 믿는 사람에게 안 믿는 이유를 물어봐야 됩니다. 최명신 장군의 간증을 읽어보면 625 전쟁 시 정찰을 나갔다가 북한군에게 포위됐습니다. 이제 끝났구나 하고 생각하고 권총을 뽑아서 이마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는데 딸깍 소리가 나면서 불발이 됐어요. 다시 장전을 하고 쏘려고 하는데 그 사이 부관이 장군의 손을 붙잡고 ‘살라고 하는데 왜 죽으려고 하십니까?’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래서 정신을 차리고 기지를 발휘해서 거기서 탈출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 순간 그 부관이 한 말이 하나님의 말씀이에요. ‘살라고 하는데 왜 너는 죽으려고 하느냐?’
의심이라는 주제를 생각할 때마다 저는 오럴 로버츠 목사가 한 말이 생각납니다. 그분이 말하기를 ‘의심에 대해서는 내가 한 마디 밖에 할 말이 없다. 하지 말아라 - Don't do it!’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의심에 대하여 나에게 말하지 말라. 나는 내 의심도 감당치 못하겠다.’ 아까 말씀드린 ‘아들아 너는 왜 하나님을 믿느냐?’라는 책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의 입장이 뒤바뀐 것입니다. 원래는 아버지가 아들의 스승이 되어야 합니다. 인생에 대해서든 신앙에 대해서든 아버지가 가르치고 아들이 배워야 되는 입장이지만 그 부자의 경우는 뒤바뀐 것입니다. 아들이 스승이고 아버지가 학생인 것입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습니다. 이가 없으면 잇몸이라고 아버지가 만약 소경이라면 자식의 부축을 받고 인도를 받아 걷는 것처럼 나이가 어리더라도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스승이에요. 아버지는 하나님을 모르고 자식이 하나님을 안다면 자식에게라도 배워야 됩니다. 여기에 있어서는 나이를 따질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베드로는 우리 모두의 모습을 반영합니다. 평소에는 마음속에 믿음이 있는 줄로 알았어요. 내가 믿는 사람인줄 알았어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남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에 보니까 내게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내게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는 것은 그 믿음이 필요한 순간에 가서야 알게 되는 것입니다. 평소에는 잘 몰라요. 평소에는 다 믿는 것 같지요. 그러나 그 믿음을 사용해야 되는 순간에 이르렀을 때에야 진짜 믿음이냐 아니냐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평소에는 믿음처럼 보이지만 믿음이 아닌 것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지적인 동의입니다.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명제에 동의하는 것. 그게 지적인 동의입니다. 마치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시했다는 명제에 동의하는 것과 같은 차원에서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명제에 동의하는데 그것은 믿음은 아니에요. 예수님이 세상의 구주시다 라는 명제에 동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예수님을 내가 실제로 의지하기 전까지는 나는 예수를 믿는 사람이 아니에요.
두 번째는 믿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믿고자 하는 그 마음 자체가 믿음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삼십팔 년 된 병자에게 ‘네가 인자를 믿느냐?’ 그랬더니 그 사람이 대답하기를 ‘믿고자 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믿고자 하느냐’라고 물어보신 게 아닙니다. ‘믿느냐’고 물어보신 것입니다. 믿고자 하는 것은 믿는 것이 아니에요. 마음이 좋고 마음이 열려 있고 기독교에 대해서 우호적이고 그러나 거기서 끝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만약 누가 ‘인사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인사를 안한다면 그건 인사하는 게 아니지요. ‘인사드리겠습니다.’하고 인사를 해야지요.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믿을게요.’ 하고 안 믿어요. ‘교회에 나갈게요.’하고 안 나옵니다 .그래서 저는 ‘목사님, 교회에서 뵐게요.’라는 말을 안 믿습니다. 오히려 그런 말 하는 사람을 수상하게 생각합니다. 교회에 나오고 믿는 것은 실천으로 보여야지 입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제가 섬기겠습니다, 봉사하겠습니다, 입으로 선전하지 말고 실천으로 보이시기 바랍니다. 입으로 선전하는 것은 그것은 상대방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고 그 경우에 합당한 말을 하는 것이지 그것이 반드시 그 사람의 결단과 의지를 보여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입으로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믿음으로 보이지만 믿음이 아닌 것은 문화적으로 동화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평생 교회를 안 다녀본 적이 없고 주변 사람이 다 믿는 사람이고 성경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랐고 모든 면으로 볼 때 크리스챤인데 정작 마음속에는 예수님이 안 계십니다. 예수님을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내용이 비어있습니다. 마치 자동차 전시장의 컨셉트 카와 같습니다. 컨셉트 카는 그 겉만 번드르르 하지 속에는 엔진이 없습니다. 조종간도 없습니다. 컨셉트 카는 그 외형만 전시를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컨셉트 카와 같은 믿음, 내용이 없는 것은 그건 믿음이 아닙니다. 기독교 문화 속에 사는 사람 중에 이와 같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하신 질문 ‘너는 왜 의심하였느냐?’ 이것은 수사학적인 질문이에요. 그 순간에 베드로가 대답하기를 기대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는 지금 코와 입에 물이 들어가는데 거기에서 예수님의 질문에 대답을 할 여유가 없지요. ‘너는 왜 의심하였느냐?’ ‘어우, 주님, 어푸어푸 제가, 어푸어푸…’ 그건 수사학적인 질문입니다. 그 순간에 예수님이 베드로의 대답을 기대하신 것은 아니에요. 의심하지 말라, 이런 뜻으로 예수님이 그런 질문을 하신 것으로 보입니다마는 그러나 만약 예수님의 질문이 진짜 질문이라면, 정말로 예수님이 궁금해서 너는 왜 의심하느냐 라고 물어보신다면 그것은 하나의 메시지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허튼 말씀을 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한 말씀 한 말씀에 다 계시적 메시지가 담겨져 있습니다. 다 이유가 있기 때문에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너는 왜 의심했느냐?’라는 말씀 자체에도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 메시지는 우리가 의심하는 이유를 살펴보면 정당하지 않다는 얘기입니다. 사람이 정당하지 않은 이유로 하나님을 의심한다는 것입니다. 의심하는 이유를 살펴보면 우리의 의심이 얼마나 근거가 없는지를 알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아들아 너는 왜 하나님을 믿느냐?’라는 책에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물어보는 질문도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질문보다는 다른 것에 대한 질문이 더 많습니다. 예컨대 왜 하나님은 네 엄마를 살려두지 않았느냐, 왜 세상은 고난으로 가득 차 있느냐, 이런 질문입니다. 하찮은 질문은 아니에요. 진지한 질문입니다. 그러나 이것 때문에 하나님을 의심하기 보다는 하나님에게 여쭤봐야 될 질문입니다. 하나님이 대답하실 수 있는 질문이에요. 이것은 사람에게 물어봐도 사람이 대답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에게 여쭤봐야 될 질문이고 이런 질문 때문에 하나님에게 가야지 하나님을 멀리하는 것은 정당한 것이 아니에요.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부인한다면 그것은 미련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정말 계시느냐 라는 질문이라기보다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원망할 수 있다는 것은 적어도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니까 원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원망한다는 그 자체가 무의미합니다. 안 계시는 분을 어떻게 원망합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을 원망한다는 그 자체는 마음속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전제한다는 얘기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입니다. 다만 이것은 괴로운 믿음입니다. 이런 질문은 이런 질문대로 답변을 요구하지만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의심하면 그나마 대답하실 수 있는 분조차도 부인하는 것이 돼 버립니다.
그런데 그 책에서도 그렇고 우리의 경험에서도 그렇고 정당한 질문이 있고 주제넘은 질문이 있습니다. 그 책에서 ‘왜 하나님이 네 엄마를 살려주지 않았느냐’라는 질문은 정당한 질문입니다. 그러나 ‘왜 세상에는 고난이 가득 차 있느냐?’는 질문은 주제넘은 질문입니다. 건방진 질문입니다. 내가 그 모든 고난을 겪고 있는 것도 아니면서 마치 청문회를 하듯이 하나님을 문책하는 것 같은 것은 내 권한에 있는 것이 아니에요. 세상에 고난이 가득 차 있는지 어떻게 압니까. 세상을 두루 다녀봤습니까. 무엇을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 것입니까. 정작 고난당하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는데 나는 그 고난을 당하고 있지도 않으면서 제3자의 입장에서 막연하게 구경꾼으로 세상에 고난이 있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은 건방진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그런 질문을 할 권한이 없습니다. 세상에 얼마만큼의 고난이 있는지 어떻게 압니까. 나는 편안하고 남들은 고난을 겪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아요. 오히려 우리가 가난하다고 생각하는 나라의 사람들이 행복지수가 더 높아요. 방글라데시 같은 나라 행복지수가 우리나라보다 높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제넘게 그들이 우리보다도 못살고 열악한 환경에 있기 때문에 고난을 당하고 있을 것이다 라고 막연하게 생각하는 것은 주제넘은 것이고 그리고 그것은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고난에 대해서 하나님께 여쭤 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남의 고난은 그 사람이 그 고난을 어떻게 감당하는지도 모르면서 섣불리 하나님을 거론하는 것은 자칫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이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섣불리 말하는 버릇을 버려야 됩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섣불리 판단하려 하지 말고 내가 모르는 일에 대해서 섣불리 말하려고 하지 말고 내가 알고 확신하는 것에 대해서만 말하면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일에 대해서 건방집니다. 그 이외에는 사용할 단어가 없습니다. 교만하다는 말로도 말할 수 없습니다. 건방지다는 말 이외에, 주제넘다는 말 이외에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그 전모를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고 장차 어떻게 끝날지 알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장님이 코끼리 만지는 식으로 지금 내가 생각하는 것만을 가지고 섣불리 말하는 것은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것이고 내 생각을 하나님보다도 우선하는 것이 돼버립니다.
살다보면 바람을 맞습니다. 오늘 본문에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걷다가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의심하기 시작한 이유는 바람을 보고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30절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바람을 보고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심리적인 이유로 의심하기 시작했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왜 의심하였느냐?’라는 질문에 대답한다면 베드로는 ‘바람 때문에 그랬습니다.’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대답을 듣고 ‘고작 바람 때문에 나를 의심했다는 것이냐?’
우리가 살다보면 바람을 맞을 때가 있습니다. 바람을 바람의 문제로 보면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람의 문제로 하나님을 의심하게 되면 바람의 문제도 해결이 안되고 내 영혼도 피해를 입습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바람의 문제는 바람의 문제로 봐야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면 바람의 문제도 해결이 안 될뿐더러 내 영혼이 피해를 입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면 왜 내 락커가 열리지 않느냐?’라는 책이 있습니다. 제목이 재미있지요? 전혀 상관이 없는 두 가지 일을 상관있게 만드는 인간의 상상력을 보여줍니다. 전혀 상관없는 일입니다. 락커가 열리지 않는 것과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는 것은 전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왜 락커가 안 열려요? 비밀번호를 모르거나 락커가 고장이 난 것이지 그것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느냐 하는 것과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평소에 락커가 열릴 때는 하나님의 사랑을 감사하면서 살았느냐? 아니잖아요. 평소에 락커가 잘 열릴 때는 하나님의 사랑을 감사했느냐? 아니지요. 평소 고난이 없을 때에는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않고 하나님을 섬기지도 않으면서 고난이 생기면 왜 하나님을 원망합니까. 안 그렇습니까. 평소에 건강할 때는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않고 섬기지도 않는 사람이 병이 들면 그제야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때는 원망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는 것이지요. 원망하는 것은 이런 면에 있어서 하나님도 이해를 못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물어보시는 것입니다. ‘왜 너는 의심하였느냐?’ 예수님도 그 순간에 납득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처음부터 의심한 것은 아닙니다. 의심했다면 배에서 나와 물 위를 걷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라는 것은 의심이라는 것과 섞여 있습니다. 믿기 때문에 의심하는 것입니다. 아예 믿지 않는 사람은 의심도 없어요. 믿기 때문에 의심이 있는 것입니다. 믿는 과정에서 의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믿으려고 하다보니까 의심이 생기는 것이지 믿을 의지가 없는 사람은 의심조차 없습니다. 그래서 미구엘 드 우나무노라는 사람은 ‘의심하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고 폴 틸릭은 ‘의심은 믿음의 반대가 아니고 믿음의 한 요소다.’라고 말했습니다. 다만 의심을 방치하면 안됩니다. 마치 뱀을 방치하면 언젠가는 그 뱀이 고개를 들어서 여러분을 무는 것처럼 의심을 방치하면 베드로처럼 됩니다. 물 위를 걷다가 빠집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물에 빠졌을 때 ‘주님, 내 의심을 도와주세요!’라고 말하지 않고 ‘주님, 나를 구원하소서!’ 그랬습니다. 인간의 문제는 결국은 이론적인 문제가 아니고 지적인 문제가 아니고 신학적인 토론으로 해결할 수 없고 결국 우리가 주님을 의지하는 것은 우리의 질문에 대답을 해 달라는 것이 아니고 나를 구원해 달라는 것입니다. 실존적인 요청입니다. 나를 구원해 주십시오. 주님은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할렐루야!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우리가 언제 주님을 찾느냐? 내가 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예수님에게 할 수 있는 궁극적인 요청이 바로 이것입니다.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할렐루야! 그랬더니 예수님이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셨습니다. 주님은 멋있는 분이십니다. 주님, 멋있습니다. 즉시 손을 내밀어 붙잡으셨습니다. 그러나 나를 구원해 달라고 외쳐야 됩니다. 할렐루야!
파도치는 갈릴리
마 14:22-33 / 손상률 목사
복음서에 나오는 지명 가운데 갈릴리 바다는 예수님의 숨결을 가장 많이 느끼게 하는 유서 깊은 곳입니다. 산상보훈을 선포하신 팔복산, 초기 사역의 거점이 되는 가버나움과 그 인근 마을들은 모두 갈릴리 바다와 인접한 곳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바다에서 처음 제자들을 부르셨고, 또 이 바다를 중심으로 많은 교훈과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갈릴리는 육지 속에 있는 담수호(潭水湖)이지만 동서가 약 12km, 남북이 28km 정도 되는 비교적 큰 호수이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바다라고 불렀습니다. 본문 말씀에는 제자들이 그 바다에서 풍랑을 만났을 때 예수님께서 물 위로 걸어오셔서 구원해 주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람과 파도와 고난의 현장인 갈릴리 바다를 통하여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신령한 교훈을 찾고자 합니다.
1. 인간이 사는 세상을 뜻합니다.
갈릴리 바다는 아름답고 낭만이 있는 곳이지만 때때로 거센 바람과 파도를 일으키기도 합니다. 당시의 사람들에게 삶의 터전이 되고 물질과 문명의 발달을 가져다 준 이 바다가 오늘날 인간이 사는 세상을 의미합니다.
1) 어둠이 지배하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벳새다 광야에서 오병이어의 이적을 행하신 다음 제자들에게 배를 타고 건너편 마을로 가라고 하였습니다. 그 시간 예수님께서는 홀로 산위에 계셨습니다. 제자들이 탄 배는 바람으로 인하여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저물 때부터 밤 4경에 이르도록 바다 가운데서 맴돌고 있었습니다. 갈릴리의 밤은 범죄한 인간이 사는 세상을 의미합니다. 태양 빛이 없는 곳에 어둠이 깃드는 것처럼, 빛되신 예수님을 멀리 떠난 세상은 어둠이 지배하는 곳입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예수님께서 오시기 이전의 세상을 ‘흑암의 땅’과 ‘사망의 그늘진 곳’이라고 하였습니다(사 9:2). 어둠이 지배하는 곳에는 거짓과 혼란으로 얼룩져 있습니다. 진리와 비진리가 구분되지 않고 의와 불의가 혼돈되는 곳입니다.
2) 바람과 파도가 있는 곳입니다.
24절에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고 하였습니다. 갈릴리 바다는 수면이 지중해 보다 약 200m나 낮은데 반하여 좌우편에는 높은 지형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특히 동쪽에는 시리아 국경의 높고 험준한 산맥이 길게 뻗어 있어서 이따금씩 돌풍을 몰고 오기 때문에 거센 파도가 일게 되는 곳입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가다가 바람과 파도에 시달렸던 기록이 더러 있습니다(마 8:23-27). 갈릴리 바다에 예기치 못한 바람이 불고 파도가 치는 현상은 오늘날 불안전한 세상의 모습입니다. 바람이 부는 것이나 파도가 치는 것은 자연의 현상이지만 이것이 때로는 태풍이 되고 해일이 되어 무서운 재난으로 돌변해 버립니다.
3) 고통이 극심한 곳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조난을 당하고 죽음의 고비를 맞이하였습니다. 열두 명의 장정들이 있는 힘을 다해서 노를 저었고 파도를 피해 보려고 필사의 노력을 했지만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저녁 해질 무렵부터 밤 4경까지 오랜 시간 동안 파도에 시달리면서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 시간 예수님께서 저희를 구원하시고자 물 위로 걸어오셨습니다. 제자들은 물 위로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유령인 줄 알고 무서워 소리를 질렀습니다(26절). 성경은 세상 마지막이 가까울수록 자연에 이변이 일어나고 각종 재난이 겹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누가복음 21:25에 “일월성신에는 징조가 있겠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성난 소리로 인하여 혼란한 중에 곤고하리라.”고 하였습니다.
2. 은혜로운 교회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통치 영역은 눈에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총괄합니다. 곧 현세적 개념의 교회와 내세적 개념의 교회를 일컫는 것입니다. 갈릴리 바다는 각종 재난과 고통의 현세적 개념과 함께 복음의 신비가 있는 내세적 개념을 지니고 있습니다.
1) 예수님의 사역 현장입니다.
죄와 죽음 아래 있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오신 예수님께서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으시고,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가르치고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쳐 주셨습니다(마 9:35). 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다를 배경으로 펼치신 사역들을 중요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산언덕에서 팔복을 비롯한 산상보훈을 강론하셨습니다(마 5:3-7:28). 바닷가에 앉아서 많은 무리들에게 유명한 천국 비유를 설교하였습니다(마 13:1-50). 가버나움 회당을 중심으로 많은 이적을 행하셨는데 중풍병에 걸린 백부장의 하인을 고치시고(마 8:5-13), 열병으로 죽어가는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셨습니다. 가난과 질병과 재난이 상존하는 곳에서 예수님의 활동이 전개되었습니다. 이것이 지상교회의 단면입니다.
2) 신비로운 능력의 현장입니다.
본문 말씀 25절에는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파도치는 바다 위로 걸어오실 때 이 광경을 본 제자들은 유령인 줄 알고 무서워 소리를 질렀습니다(26절). 그들은 예수님께서 초자연적인 능력을 행하실 줄 몰랐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물 위로 걸어오실 뿐만 아니라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며 잔잔하라고 명령하시는 분입니다(눅 8:24). 자연이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게 되는 것은 그분이 천지와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이기 때문입니다. 그 바닷가 빈들에서 오병이어의 이적으로 수많은 군중을 먹이신 일과(14:13-21) 인근에 있는 거라사인의 마을에서 군대귀신 들린 사람을 회복시켜 주신 것도 그분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눅 8:26-39).
3) 은혜의 현장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를 처음 목격한 사람들에게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고 하였습니다(마 28:10). 갈릴리야말로 제자들에게 은혜로운 만남의 장소입니다. 예수님과 처음 만남이 이루어지던 날 말씀에 순종하여 많은 물고기를 잡았고,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눅 5:1-11). 수난절을 앞두고 최후의 성만찬을 마친 다음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예수님을 배신한 가룟 유다 뿐 아니라 큰소리 치고 장담하던 베드로마저 예수님을 부인하고 달아났습니다. 그들은 십자가의 현장이나 무덤 근처에 얼씬도 못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갈릴리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시 만나고 새로운 회복을 하게 되었으니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이 주님 교회의 특징입니다.
3.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갈릴리 바다는 제자들에게 훈련의 도장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어두운 밤 파도에 시달리며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을 때 물 위로 걸어오셨습니다. 그리고는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고 하시며 믿음을 일깨워 주셨습니다(31절).
1) 바람과 파도로 연단시키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중생한 성도에게 곧바로 천당의 낙원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세상이라고 하는 불완전한 장소에서 환난과 시험을 통하여 연단을 받게 하십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도 그와 후손이 받게 될 엄청난 축복을 약속하셨지만(창 12:1-3), 그로 하여금 한평생 나그네와 행인으로 살면서 온갖 시련을 통과하게 하였습니다(히 11:13-16). 성경 역사에 유명한 인물일수록 힘들고 어려운 과정을 거치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군인을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으로 무장시키기 위하여 유격훈련을 시킬 때 거기 알맞은 지형지물을 이용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있는 자기 백성을 연단시키기 위하여 여러 종류의 바람을 이용하십니다. 질병과 재난과 사고와 여러 가지 시련의 바람을 통과하면서 자기의 무능을 알고 주님만 의지하게 하는 믿음을 가지게 하는 것입니다(눅 8:25).
2) 구원의 확증을 보여 줍니다.
성경은 죄 아래 있는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로 통하여 멸망에서 구원 얻는 도리를 일러줍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구속사적 경륜은 인간의 지식으로 쉽게 이해되지 않는 진리입니다(마 13:11). 사람들은 처음부터 예수님의 도움을 받으려 하지 않고 할 수 있는 대로 자기 스스로 무엇이든지 이루어내려고 노력합니다. 하다가 안 될 때 외부의 도움을 청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자기들의 힘으로 노를 저으며 파도를 돌파하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초자연적인 활동이 개시되었습니다. 이미 산 에 계시던 주님께서 그 현장을 면밀히 감찰하고 계신 것입니다. 밤 4경에 인간의 능력이 한계에 미쳤습니다. 드디어 주님께서 물결 위로 걸어오셨고 배에 올랐을 때 파도가 그쳤습니다. 예수님만이 구원하는 자임을 확인시켜 주시는 장면입니다.
3) 사명을 인식하게 하였습니다.
출애굽의 영도자 모세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눈동자처럼 살피시고 독수리가 그 새끼를 보호하듯이 지키신다고 하였습니다(신 32:10-12). 이사야 43:2에는 자기백성이 물 가운데로 지나도 침몰하지 못하게 하고 불 가운데서도 불이 타지 못하게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분부하시는 목적을 이루는 사람들입니다. 갈릴리 바다는 제자들이 예수님께 받은 사명의 훈련장이었습니다. 처음 제자를 부르시고 그들에게 ‘사람 낚는 어부’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또 다시 갈릴리 바다로 찾아가셨습니다.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반복해서 “내 어린 양을 먹이라”고 하시며 사명을 인식케 하였습니다. 그가 말년에 어떤 죽음을 당하더라도 개의치 말고 오직 주님의 사명에 진력하도록 당부하신 것입니다(요 21:15-22).
물 위를 걸으신 주님
마 14:22-33 / 김충식 목사
예수님이 물 위로 걸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물 위를 걷는 장면을 연상하면서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왜 굳이 예수님이 물위를 걸어가셔야 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면서 성경이 주시는 교훈을 몇 가지 상고해봅니다.
첫째로,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민족이 그렇게도 기다리던 메시야가 자신이라는 것을 보이시기 위해 물 위를 걸으셨습니다. 크로스웨이 성경공부 교재를 쓰신 「헤리웬트」 목사님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증거하는 요소가 이사야서를 인용하여 4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환자를 고쳐주시는 치유입니다. 또 하나는 귀신들린 사람에게서 귀신을 내쫓아 주시는 축사입니다. 그리고 죽은 사람을 살리시는 것과 자연을 다스리는 것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에 많은 환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특별히 난치병과 불치병 환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때에는 귀신들린 사람들이 유난히 많았는데 귀신들린 사람을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사람을 살리는 기적도 행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는 모두가 사람 관계입니다. 네 번째 요소가 대자연 관계인데 에수님은 자연을 정복하고 다스셨습니다. 마태복음 8:23-27을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항해를 하시다가 주무시는데 바다에 큰 파도가 일어나서 배가 뒤집힐 지경까지 이르게 되어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웁니다. 제자들은 ‘주님, 우리를 구원해 주십시오’ 요청하였고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바다를 꾸짖으시며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셨을 때에, 바다와 바람이 잔잔해졌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자연을 다스리는 능력을 가지신 분임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신 일들이 마술이나 요술을 하며, 신통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람들도 어느 정도 흉내를 낼 수 있는 일들입니다. 어떤 사람은 죽은 사람을 살렸다고 하며, 불치병을 고쳤다고 합니다. 귀신을 내쫒았다고 합니다. 제갈공명도 바람을 이용하여 전쟁에서 승리하였습니다. 그러나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물위로 걸어가는 것입니다. 언젠가 TV에서 마술을 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마술사가 중국 북경의 만리장성에서 넓이가 10m는 족히 되는 성벽을 이쪽에서 저쪽으로 뚫고 나오는 것입니다. 마술은 모두 눈 속임이라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저 사람이 성벽을 뚫고 나오는가 유심히 살펴보는데도 모르겠습니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흔히 마술사들은 상자 속에 한 여인을 세워놓고 보자기를 씌운 다음에 다시 보자기를 제치면 여인은 온데간데없고 마술사의 손에 비둘기 한 마리가 있어서 비둘기를 날려 보내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마술도 점점 발전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물 위로 걸어가는 마술을 본 적은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물위로 걸으실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온 우주 만물은 지으셨을 뿐만 아니라 통치하시고 다스리시고 정복하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셨다는 것은 예수님만이 하나님이시고, 참신이시며, 만물의 주관자가 되신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만이 우리의 신앙의 대상자가 되시며, 예수님만이 구세주가 되심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참신임을 깨닫는 사람은 복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이 제자들을 지극히 사랑한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이 물위로 걸어가신 시간이 밤 4경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때에는 밤을 1경에서 4경까지 나누었는데, 오후 6시부터 이튿날 아침 6시까지를 4등분하여 나눈 것입니다. 그러므로 4경은 새벽 3시부터 6시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산에서 기도하실 때에 큰 풍랑으로 제자들이 위기에 놓인 것을 보시고,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물위로 걸어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선택하신 이후 그들을 많이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을 하든 제자들 위주였고, 제자들 중심이 될 만큼 제자들을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먼저 찾아오신다는 것입니다. 이번에도 제자들이 불러서 예수님이 오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고 부끄러움과 수치심에 사로 잡혀 나무 뒤에 숨어있을 때에 하나님이 ‘아담아 어디에 있느냐’ 하시며 먼저 찾으셨습니다. 온 인류가 죄로 인하여 물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 때 하나님은 노아를 찾아오셨습니다. 아브라함도 하나님이 먼저 찾으셨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면서 고통을 당할 때에 그들을 찾아오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또 하나의 특징은, 일시적이 아닌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든 민족이든 한 번 사랑하면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사랑십니다. 요한복음 13:1을 보면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전 세계 역사 가운데 나라를 잃고 유랑하는 백성이 2,000년이 지나서 독립 국가를 세운 나라는 이스라엘 밖에 없습니다. 주후 70년 로마의 장군인 티터스(Titus)에 의해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이 완전히 망하고, 그들은 제2의 디아스포라(Diaspora)가 되어 전 세계로 흩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민족이 2천년 후에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건국한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고려 시대 때 몽골에 의해 100년 미만의 지배를 받았는데, 거의 몽골화 되었습니다. 우리나라가 일제 식민지로 불과 35년 미만의 지배를 받았는데 거의 일본화 되어서 성(姓)도 일본 성(姓), 말도 일본말을 하는 백성이 되었습니다. 만일 일본 식민지로 100년만 지났다면 일본 제국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2,000년이 지났는데도 독립을 한 것입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은 600만 명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수 억이 되는 아랍에게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버티고 있는 것을 보십시오. 우리는 모든 면에서 남한이 월등하다고 합니다만 그러나 북한에 의해 얼마나 많은 괴롭힘을 당하면서 끌려다니고 있습니까? 만일 경제력이나 군사력이 우리보다 북한이 월등하다면 벌써 적화통일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 작은 이스라엘 민족이 생존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리면 노벨 과학상 수상자들을 분석해보면 약 30% 정도가 유대인이라고 합니다. 지구상에 흩어져있는 유대인들이 약1,500만 명이라고 합니다. 지금 전 세계 인구가 70억 명이라는데, 비율로 보면 유대인은 약0.22%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0.22%밖에 안 되는 유대인들이 노벨 과학상을 30%를 받았습니다. 유대인들이 머리가 좋다는 것은 대부분 인정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머리 못지않게 좋은 나라가 우리나라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두뇌가 명석하다는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노벨 과학상을 한 사람도 받지 못했습니다. 이런 것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까? 오직 하나, 하나님이 선택하고 사랑한 민족을 하나님이 세우시는 것으로 밖에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지극정성으로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급하셨으면 물 위를 걸으면서까지 제자들을 구하시려 하셨겠습니까? 정성은 항상 사람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지난 주간에 성도님들과 함께 어느 음식점을 다녀왔습니다. 한정식 집이었는데, 음식이 나오는 것을 보니, 음식들 하나 하나에 온 정성이 담겨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서빙(Serving)을 하시는 분이 우리들을 귀빈 모시듯 극진하게 마음이 담긴 봉사를 하는 것입니다. 매우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식사 후에 식당을 둘러보니 손님들이 매우 북적였습니다. 음식점도 손님을 극진히 대하고, 음식에 정성이 담겨있을 때 성공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불황이라고 하며, 하는 일들이 안 된다고 합니다. 그런 중에도 잘 되는 집들이 있습니다. 그 음식점을 모습을 보면서 주님의 사랑을 잠시 생각했습니다. 주님은 음식점의 손님을 섬기는 사람보다도 더욱 큰 정성으로 제자들을 사랑하시는 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주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지극했기에 그들을 구하기 위해 물 위를 걸으셨습니다.
셋째로, 주님만이 모든 환난의 해답임을 보이시기 위함입니다.
모든 환난의 궁극적인 해결자는 주님이십니다. 인간은 누구나 환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환난을 당하지 않은 분이 있다면 참으로 복이 많은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은 누구나를 막론하고 환난을 당합니다. 100% 자신하면서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환난을 만났습니다. 제자들이 환난을 만난 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닌 자연 재해입니다. 갈릴리 바다는 지역적 특성상 돌연한 돌풍과 급격한 기후 변동으로 유명합니다. 그래서 잔잔하다가도 언제 돌풍이 일어날지 모르는 곳입니다. 지금 전 세계가 자연의 재난으로 고통하고 있습니다. 온난화로 인해 생각지도 않은 폭우, 폭설, 폭염, 지진, 쓰나미와 같은 재해로 몸살을 앓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 전 태국에 홍수가 났는데, 아직도 해결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며칠 전에는 제주도에 기상관측 이래 11월로는 최대의 폭우가 쏟아져 큰 피해를 입었다고 합니다. 모든 사람은 언제 어느 때, 무슨 재난을 당할지 모릅니다. 육체적인 아픔을 비롯한 사업, 가정, 자녀, 직장, 사회생활 등에서 큰 환난, 작은 환난이 지뢰가 설치되어 있는 것처럼 도처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특히 이 근래에는 수 십년동안 우량 기업으로 있다가 하루 아침에 도산된 회사들도 많습니다. 자녀들에게 기대를 했다가 일시에 무너짐으로 큰 충격 속에 빠지는 가정들도 있습니다. 우리 말에 「밤 새 안녕」이라는 말이 실감이 될 정도로 여러 면에서 급변하는 시대를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환난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제외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도 환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환난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제자들을 향해 열심히 물 위로 걸어오시는 주님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마14:27)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도 환난을 당할 수는 있지만, 주님이 우리를 위해 기도해주신다는 것과 필요하시면 물 위를 걸어서라도 우리를 보호하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주님은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하십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안심만 시켜주시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로 하여금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특권까지 주십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본 순간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걷는 최초의 인간이 되는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환난을 당할 때에, 피하는 사람들이 아닌 오히려 환난을 딛고 일어서서 걷는 사람이라는 것을 가르쳐주십니다. 우리는 그 분이 ‘파도 위를 걸으라’ 하면 폭풍이 이는 파도를 걷기만 하면 됩니다. 나머지는 주님이 해주실 것입니다. 환난은 피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정복의 대상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 바람이 그치고 평온해졌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때에 환난은 멈춰질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 인생의 배에 승선하시기를 원합니다. 주님이 인생의 배에 오르시기만 한다면 우리 인생의 항로는 순탄하게 될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셨는가? 환난을 당하는 제자들의 문제를 해결해주시기 위함입니다. 지금도 주님은 물 위로 걸어오시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마지막으로, 배 위에 오르신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본문 33절을 보면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절을 했다는 것은 경배를 의미하는 것으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예배받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특히 제자들의 입술을 통하여 신앙고백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이 신앙고백은 후에 베드로를 통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는 고백으로 발전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을 때에 성전의 휘장이 찢어지고 지진이 일어나는 광경을 지켜 본 로마의 백부장이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마27:54)라는 신앙고백을 하게 됩니다. 그 이후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 제자들로부터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말을 들은 도마가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요20:25) 했을 때에, 예수님이 오셔서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요25:27)하시며,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25:29)하셨습니다. 그 때에 도마는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25:28)라는 신앙고백을 합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바라시는 것은 신앙고백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이 후 갈릴리 언덕에 있던 로마 병정들이 거기서 되어진 일들을 빌라도에게 보고합니다. 빌라도가 로마 황제에게 그 때의 일을 작성하여 보고했는데, 그것을 「빌라도의 편지」라고 합니다. 그 편지에서 빌라도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라는 고백을 합니다. 2000년 동안 성도들의 입술에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하는 대상인 빌라도까지도 신앙고백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지극히 사랑하셨기에 그들을 찾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당하는 환난을 해결해 주셨고, 제자들의 입술을 통하여 신앙고백을 받으셨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도 신앙고백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예배하면서 열심히 신앙고백하십시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라는 고백을 기뻐하시기에 주님은 지금도 물 위를 걸으시면서까지 우리를 찾아오시는 분이십니다.
믿음을 어떻게 지키는가?
마 14:22-33 / 김영준 목사
기독교 교계에서 소위 믿음학파의 기여를 간과할 수 없습니다. 믿음학파의 원조는 오럴 로버츠 목사 · 케네스 헤이건 목사 · 케네스 코플란드 목사 그리고 국내의 조용기 목사 같은 분입니다. 한 배를 탄 분들입니다. 이들이 번영신학을 가르친다고 비판을 받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이 어떻게 생기며 믿음이 어떻게 역사하는지를 밝혔다는 면에서 기독교 교계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믿음이라는 주제는 기독교의 역사만큼 긴 것인데 새삼스럽게 믿음이 역사하는 방법을 밝혔다는 말이냐. 그러나 일반적인 믿음과 특별한 믿음이 다르다는 점을 규명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을 보면 아홉 가지 성령의 은사 중에 믿음의 은사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믿음의 은사는 우리를 구원하는 보편적인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기적을 낳는 특별한 믿음, 은사로써의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해서 무화과나무가 뿌리로부터 말라버린 적이 있지요. 베드로가 그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하나님을 믿으라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믿음은 일반 믿음과는 다른 것입니다. 이건 기적을 행할 수 있는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일반기독교인들이 이 차이점을 픽업하지 못했느냐. 이십세기에 성령운동이 일어나고 기적이라는 것이 새삼스럽게 부각되면서 기적을 일으키는 믿음을 재발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믿음학파가 비판을 받은 이유는 이와 같은 믿음의 목적을 몇 가지로 국한시켰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건강과 축복, 병 낫는 것과 물질축복 받는 데에 이러한 믿음을 국한시켜서 health & wealth 복음이다 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가르친 믿음의 원리는 성경적이고 유효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들이 먼저 발견한 것은 무엇이냐. 어떻게 이와 같은 믿음이 생기느냐 하는 것입니다. 제가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건 굉장히 중요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한 가지 의문을 갖는 것이 우리가 늘 교회를 오고 늘 말씀을 듣고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사는데 왜 이런 믿음을 낳는 말씀을 듣는 일이 더 자주 일어나지 않느냐. 그것은 똑같은 말씀이라도 두 가지 종류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첫째는 로고스라고 일반적인 말씀이 있습니다. 두 번째는 레마라고 특별히 내게 주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바로 이 두 번째 레마입니다. 그럼 레마는 무엇이냐. 우리가 평소에 성경을 읽을 때나 성경 말씀을 들을 때는 로고스로 듣습니다.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말씀을 듣습니다. 그런데 어떤 때에는 그 중의 한 구절이 내 마음에 꽂힐 때가 있습니다. 내게 특별히 주시는 말씀으로 마치 그 구절을 통해서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시는 것처럼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 말씀이 내게 꽂힐 때 믿음이 발생합니다. 믿음이 생깁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이 들음에서 나는 것이고 우리의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레마와 같은 것입니다.
서부 아프리카 나이지리아에 벤슨 이다호사라는 유명한 부흥사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세상을 떠났지만. 그분이 젊었을 때 외국선교사님이 성경이야기를 하는 것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선교사님이 예수님이 죽은 자를 살리셨다는 말씀을 했습니다. 그 말을 듣던 벤슨의 귀가 번쩍 뜨였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를 살리셨다구요? 선교사님은 죽은 자를 살리신 적이 있습니까?’라고 물어보니까 그런 일이 없대요. 그래서 벤슨이 대답하기를 ‘저는 죽은 자를 살려보겠습니다.’ 그래서 자전거를 타고 온 마을을 다니면서 죽은 자를 찾았어요. 그날 저녁쯤 돼서 정말로 죽은 자를 찾았어요. 어느 집에 어린 딸이 세상을 떠났어요. 그래서 벤슨이 그 집에 들어가서 자기를 소개하고 ‘내가 당신의 딸을 위해서 기도해도 되겠습니까?’ 허락을 받고 방에 들어가서 열심히 기도를 하는데 아무런 변화가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이상하다, 내가 뭘 잘못하고 있나?’하고 성경을 읽어보니까 예수님이 이 죽은 소녀에게 달리다굼이라고 말씀하시는 게 있어요. ‘아, 내가 달리다굼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구나!’하고 그 소녀에게 ‘달리다굼’ 하니까 정말로 일어나더라는 것입니다. 기적이 일어났어요. 이 벤슨 이다호사가 이후에 부흥사 사역을 하면서도 죽은 자가 일어나는 일이 몇 번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 청년에게 성경을 가르치던 선교사님 자신은 죽은 자를 일으켜본 적이 없습니다. 아마도 죽은 자를 일으킬 수 있는 믿음이 본인에게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를 통하여 성경말씀을 들은 벤슨에게는 죽은 자를 일으킬 수 있는 믿음이 생긴 것을 보면 생명은 전하는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그가 전하는 말씀 속에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말씀 속에 열쇠가 있는 것입니다. 좀 더 학구적이고 신뢰할만한 신학자에게서도 똑같은 원리를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게 바로 독일 신학자 칼 바르트입니다. 칼 바르트는 성경에 대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성경책은 그냥 책꽂이에 둘 때는 책에 불과하지만 그 말씀이 내 마음에 와 닿을 때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또 이런 말도 했습니다. ‘성경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우리를 기다린다.’ 이 말은 우리가 평범하게 성경을 접해서는 결코 경험할 수 없는 신비한 역사가 가능하다는 얘기입니다. 이 성경의 구절을 통하여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시고 내게 믿음을 불러일으키시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이 들음에서 나는 원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와 같은 레마를 좀 더 자주 경험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그저 기다리기만 하면 되느냐. 소극적으로 기다리다가 은혜를 받았다는 사람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한 가지 원리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물을 포도주로 바꾸지 않았습니까. 그때 예수께서 하인들에게 항아리에 아구까지 물을 채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물을 포도주로 바꾸셨습니다. 아구까지 물을 채우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로고스를 가득 채우는 것과 같습니다. 평소에 성경말씀을 읽고 묵상해서 그 말씀, 로고스를 우리 마음속에 채워두면 필요할 때 주님이 그것을 성령으로 바꾸신다는 얘기에요. 주님이 그것을 레마로 바꾸신다는 얘기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평소에 성경말씀이 다 이해되지 않고 다 재미있게 들리지 않더라도 우리의 항아리를 로고스의 물로 채워놓는 것이 필요하다는 얘기입니다. 그것을 주님이 사용하셔서 내게 레마가 되게 하시고 내게 주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신학교에 들어갔을 때 어느 교회에 소속된 것이 아니고 또 새벽기도회를 갈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침에 일어나서 하루 일과를 시작하기 전에 적어도 한 시간은 충분히 기도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그래서 일과를 시작하기 전에 제 기숙사 방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리고 찬양을 하고 성경을 읽고 하루를 시작했는데 저는 소리를 내서 기도하려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기도하라고하면 묵상으로 기도하지 않습니까. 저는 소리 내서 기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설교를 할 사람인데 설교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입으로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기도할 때에도 제 믿음을 입으로 선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입으로 말하고 신앙의 언어를 입으로 말하는 것을 훈련하는 것이 이후에 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데 반드시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저는 소리를 내서 기도하고 기도하는 중에 찬송이 떠오르면 그 찬송을 부르고 그리고 방언으로 기도하고 방언을 통역했습니다. 그것이 이후에 저로 하여금 설교하는데 도움이 되고 예언을 하는데 도움이 되고 찬양 인도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제가 기도 인도하는 중에 찬양하는 것은 기도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서 일부러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기도하는 중에 마음에서 찬송가가 우러나오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서 우러나오는 기도, 우러나오는 찬양, 우러나오는 말씀, 여기에 성령이 주시는 은혜를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를 말하는 것이 영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우러나오는 찬양을 찬양하는 것이 영으로 찬양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우러나오는 말씀을 전하는 것이 예언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 당시에는 알지 못했지만 제가 아침마다 소리 내서 기도하고 기도하는 중에 찬양을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입으로 말하는 것이 마치 항아리에 물을 채우는 것과 같아서 이후에 성령이 그것을 가지고 예언을 하게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게 하고 찬양을 인도할 수 있도록 쓰실 수 있는 도구가 되었다고 저는 봅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면 믿음은 어디서 옵니까. 들음에서 옵니다. 믿음은 이렇게 생깁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오라’ 말씀하시니까 베드로가 물 위를 걸어 예수님께 갈 수 있는 믿음을 얻은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믿음이 어떻게 오느냐를 아는 것뿐만이 아니고 그 믿음을 어떻게 간수하느냐, 그 믿음을 어떻게 지키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을 가진 후에는 그 믿음을 시험할만한 일이 생기게 돼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을 어떻게 갖느냐를 아는 것뿐만이 아니고 믿음을 어떻게 지키느냐 하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베드로의 믿음을 시험한 것은 그가 믿음을 갖기 이전에도 존재했던 것입니다. 바람. 오늘 본문 24절에 ‘이미 바람이 거슬리므로 물결로 인하여 고난을 당하더라’ 베드로가 물 위를 걷기 이전에도 바람은 불고 있었어요. 그러나 베드로가 물 위를 걷기 시작한 다음에 이미 있었던 그 바람이 그에게 시험이 된 것입니다. 그가 물 위를 걸으면서 처음 바람이 분 게 아니에요. 그러나 믿음을 가진 다음에 이미 있었던 그 시련이 그에게 시험으로 다가온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지킬 수 있는 길은 내게 오라고 말씀하신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지 만일 눈을 돌려서 내 환경의 어려움을 바라보게 되면 나를 물 위를 걷게 했던 믿음을 상실하고 물에 빠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반대는 의심이지요. 의심은 어디서 오느냐.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의심은 지성에서 오는 게 아니고 감각에서 옵니다. 감각. 눈으로 보는 것, 귀로 듣는 것, 마음의 느낌, 마음의 두려움, 초조함, 여기에서 의심이 옵니다. 베드로도 ‘바람을 보매 두려워하여 물에 빠지느니라’ 예수님을 보고 있는 동안에는 물 위를 걸을 수 있었는데 눈을 돌려 자기의 환경을 보았더니 두려움이 생기면서 믿음을 잃기 시작한 것입니다.
믿음의 반대는 두려움입니다. 마귀는 믿는 사람을 두렵게 해서 그 믿음을 무력화시키려고 합니다. 루즈벨트의 말처럼 우리가 두려워 할 것은 오직 우리의 두려움뿐이라고 했는데 두려움이라는 것은 인간을 위축시키고 영혼을 위축시키고 믿음을 위축시키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뒤로 돌아서게 하고 또 믿음의 위력을 경험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 두려움은 감각에서 옵니다. 우리의 눈으로, 귀로, 마음으로 느끼는 거기에서 두려움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물위를 걷다가도 빠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예 베드로가 물 위를 걸어본 적이 없다면 괜찮을 텐데 이미 물 위를 걸어본 적이 있어요. 벌써 몇 번 발을 디뎠어요. 그러다가 빠지는 것은 정말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아예 믿음이 없었던 사람의 의심보다는 믿어본 적이 있는 사람의 의심이 더 무서운 것입니다. 믿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 실족하는 것이 더 하나님 나라에 있어서 손실이 되는 것입니다. 은혜를 경험해 본 적이 있고 하나님에게 헌신해 본 적이 있고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해 본 적이 있는데 도중에 어떤 일로 인하여 믿음을 상실하는 사람들이 세상에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은혜를 경험하는 것만이 중요한 게 아니고 그것을 지키고 한결같이 신앙생활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내가 은혜를 경험했다고 더 이상 실족하는 일이 없는 게 아니에요. 내가 능력을 경험했다고 더 이상 신앙생활에 어려움이 없는 게 아닙니다. 베드로처럼 물 위를 걷다가도 빠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고 천국의 영광을 경험하다가도 실족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게 더 하나님에게 실망이 되고 이웃 사람들에게 시험이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누가 우리를 건질 수 있느냐. 그건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뭐라고 말합니까. ‘주여 나를 구하소서’ SOS-Save our souls- 이것은 첫 번째 구원이 아니고 두 번째 구원이에요. 첫 번째 우리가 구원받는 것, 그것도 예수님이 구하시지만 믿음 생활하다가 물에 빠질 때 우리를 구하시는 분도 예수님입니다. 할렐루야.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미사 그를 붙드시며 말씀하시기를 믿음이 적은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입이 열 개 라고 할 말이 없지요. 왜 의심하였느냐. 주님이 우리에게 묻고자 하는 질문이 바로 그것입니다. 너는 왜 의심하느냐. 너는 왜 두려워하느냐. 너는 왜 뒤를 돌아보느냐. 너는 왜 그렇게 하느냐. 주님이 궁금하신 것입니다. 너는 왜 의심하였느냐. 믿을만한 증거를 내가 너에게 주었건만 너는 왜 그것을 보지 않고 바람을 보고 잘 걷다가 빠지느냐. 왜 믿다가 의심하느냐는 것입니다. 처음 믿는 사람, 믿지 않는 사람의 의심도 문제이지만 이미 믿다가 도중에 의심하는 것도 정말로 큰 문제요, 그런 사람도 예수님이 구원하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믿음이 적은 자여
마 14:22-33 / 홍문수 목사
성경을 읽다 보면 종종 이상한 점들이 발견됩니다. 그 중의 하나는 성경 인물을 묘사할 때 좀 심할 정도로 적나라한 모습을 보여준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베드로의 실패담이 그런 예입니다. 명색이 수제자에다 어부 출신인데 물에 풍덩 빠졌으니 체면이 말이 아닙니다. 이런 건 방송으로 비유하면 완전히 NG(No Good) 아닙니까? 빼버리면 좋을 텐데 그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드로의 입장에서 보면 얼마나 창피하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여기에 성경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마태복음의 기록자는 마태입니다. 베드로의 동료 사도입니다. 특히 베드로는 사도들 중에 수석이니까 체면을 세워줘야 되는 게 아닌가요? 적당히 PR을 해줘야 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PR이 뭐예요? 우스갯소리 같지만 이런 말이 있어요. “PR이란 피할 것은 피하고, 알릴 것은 알리는 것이다!” 그런데 마태는 베드로의 수치스런 추억을 굳이 밝히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4복음서 중에 다른 책들은 모두 생략하고 있는데 마태만 굳이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망신주려고요? 아닙니다. 의도가 있었다는 겁니다. 누구의 의도입니까? 인간 마태의 의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성경은 인간 기록자가 썼지만, 성령님의 영감을 받아 기록한 겁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의도는 인간의 진실을 보여주는 겁니다. 성경은 진실을 보여주는 책이지, 적당하게 미화시켜 보여주는 책이 아닙니다.
그 진실이 무엇입니까? 인간은 별수 없다는 겁니다. 심지어 믿음이 있노라 해도 연약한 인간인지라 실수하고 실패하기 쉽다는 사실입니다. 베드로조차 그랬다는 걸 보여주면서, 성경 독자인 우리도 그것을 거울삼고 조심하라는 말씀입니다.
아무쪼록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저와 여러분은 인생 가운데 실수와 실패를 반복하지 말고 항상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1] 인생의 모습 : 고난의 바다를 항해하는 것
먼저 오늘 본문에 베드로와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를 항해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 인생과 흡사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비유해서 말하면, 우리 인생은 고난의 바다를 항해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배경을 먼저 말씀드리죠. 바로 앞에 마14:13~21을 보면, 오병이어의 기적(五餠二魚)이 나옵니다. 많은 군중들이 예수님을 말씀을 듣다가 날이 저물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가지고 기도하신 후 나눠주니까 어떤 일이 벌어졌나요? 부녀자와 어린아이들을 제외하고 5천명이 배불리 먹고 남았습니다. 놀라운 기적이죠? 그러니까 난리가 났어요. 제자들도 흥분하고, 무리들도 흥분하고 ... 왜 그랬을까요? 본문에 기록되지 않았지만, 다른 복음서 기록과 대조해 봄으로 당시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요6:15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무리들이 예수님을 오해했습니다. 정치적인 메시아로 본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왕으로 추대하고 로마제국에 항거해서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는 생각까지 했습니다. 제자들도 덩달아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만일 분위기가 그렇게 흘러가면 예수님으로선 낭패죠. 예수님이 오신 것은 인류를 죄와 사명에서 구원하러 오신 것입니다. 지상의 나라가 아니라 하늘나라를 세우러 오신 겁니다. 이 사명과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이기에 예수님은 무리를 급히 해산시켰고 제자들도 따로 보내셨습니다.
그 당시 어두운 밤 시간에 갈릴리 바다를 건너는 것이 위험한 일입니다. 지형의 특성 상 특히 밤중에는 돌풍이 불어와 위험할 때가 종종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이 제자들을 미리 보내신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기도하기 위함이었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이 그들에게 자신이 어떤 분인지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한 왕 정도가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인생만사를 주관하시는 분임을 인식시키려는 의도였습니다.
어쨌든 이렇게 해서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를 항해하는데 풍랑을 만납니다. 베드로와 제자들 중에는 갈릴리 어부 출신이 여럿 있었지만,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24절.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 아마 육지를 떠난 지 여러 시간 지나 바다 한 가운데 있었던 것 같습니다. 거기서 풍랑을 만나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됐습니다.
게다가 그 시각이 언제였나요? 25절 보면, ‘밤 4경’(更)이라고 했습니다. 당시 시각은 낮과 밤이 구분되어 있었는데, 밤 시간을 4개로 즉 4경으로 나눕니다. 오후6~9시, 9~12시, 새로 1시~3시, 3시~6시 등입니다. 그러니까 밤 4경은 새벽 3시~6시입니다. 하루 중 가장 어두운 때입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목숨의 위협까지 느꼈을 제자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기가 막힌 상황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인생이 경험이 많다고, 실력을 갖추고 있다고 해서 풍랑이 없느냐? 아니라는 겁니다. 바다를 항해할 때 풍랑은 아무 때나 아무에게나 무차별적으로 닥쳐옵니다.
그러므로 바다를 항해하자면 풍랑이 있기 마련이라는 사실을 당연지사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바다를 항해하면서 풍랑이 없기를 바라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풍랑이 있는 게 이상한 게 아니라 풍랑이 없는 게 이상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풍랑이 없기를 기대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풍랑을 이기고 승리하는 법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배를 타는 법만 알아도 곤란합니다. 풍랑이 커지면 배를 타고 있어도 속수무책으로 난파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에는 늘 고난이 있기 마련입니다. 고난에 관한 한 마치 무균실에 있는 것처럼 예외일 수는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인생이라면 고난이 없어지기를 바라기보다 고난이 있어도 이기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2] 인생의 바다 항해법 : 믿음으로 풍랑 위를 걸으라
그러면 인생의 바다, 고난의 바다를 어떻게 항해하면 좋겠습니까? 베드로의 실패담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믿음으로 풍랑 위를 걸으라”는 겁니다.
그 시간에 제자들에게 인간적으로 가능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들의 노력도 기술도 경험도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인간의 능력은 항상 이렇습니다. 평소에는 큰 소리를 땅땅 치지만, 고난이 닥치면 오그라듭니다. 무서워서 쩔쩔 맵니다. 이 때 필요한 것은 오직 살아계신 예수님에 대한 믿음뿐입니다.
예수님은 육신적으로 멀리 계신 것 같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멀리서도 다 보고 계십니다. 알고 계십니다. 다시 말하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그들과 함께 해 주십니다. 이 사실을 믿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을 믿지 못해서 두려워하고 쩔쩔 매고 있는 겁니다. 그들의 문제는 ‘믿음 없음’ 그 한 가지였습니다. 25절.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어둠속에서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바다 위를 걸어서!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인 줄 미처 생각도 못하고 유령이라고 외칩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그들을 안심시키며 말씀하십니다. 27절.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 하나님은 항상 우리를 살펴보고 계십니다. 시34:15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그들의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 의인법이죠. 부모가 자녀를 항상 보살피는 것처럼 하나님이 눈으로 주시하고, 귀를 기울이며 보호하신다는 겁니다. 마28:20 보면 예수님이 부활 승천 하면서 남기신 말씀도 있죠. “ ...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 약속의 말씀 그대로 예수님은 오늘도 성령을 통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이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게 인생 바다를 항해하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한 가지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믿음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 아십니까? 이런 말이 있어요. 영어 두 문장을 보세요. “He is nowhere.” “He is now here.” 스펠링이 같아요. 띄어쓰기 차이에 불과한데 그 의미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믿음의 유무가 이런 차이를 만들어 냅니다. 믿음이 없으면, 예수님이 아무데도 안 계신 것 같이 느껴집니다. 그래서 고난 가운데 낙심하고 절망합니다. 반대로 믿음이 있으면, 예수님이 지금 여기에 계신 것 같이 느껴집니다. 그러니까 안심이 되고 당당하게 나아갈 수 있는 겁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정체를 밝혀주시자 가장 적극적인 베드로가 어떻게 합니까? 28절~29절을 보세요. “28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29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예수님을 바라본 베드로의 마음속에 믿음이 생긴 겁니다. 여기서 믿음은 ‘신뢰’라는 뜻입니다. 믿음의 여러 차원이 있는데, 우리 삶 속에서 능력으로 나타나는 것은 신뢰의 믿음입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 때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바다 위를 저벅저벅 걸어가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승리의 공식(기적의 공식)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됩니다. “믿음(신뢰) + 순종 = 승리(기적)” 믿음을 갖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그때 승리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기적의 역사도 일어납니다. 그래서 믿음이 중요한 겁니다. 믿음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제가 이따금 강조해서 말씀드리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 차별 안 하지만 믿음 차별 하신다!” 무슨 말인가요? 인간 세상에서는 조건 갖고 엄청 따지잖아요. 사람 평가하고 무시하고 ... 하나님은 그런 짓은 안 하신다는 겁니다. 그도 그럴 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어른이나 아이나 마찬가지예요. 높은 자가 낮은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마찬가지입니다. 왜 그렇죠? 인간은 상대적이지만 하나님은 절대적입니다. 그 하나님 앞에 인간적인 조건의 차이는 아무 것도 아닌 겁니다. 인생 살다 고난을 만나면 평소 자랑하던 간 인 조건도 별게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갈릴리 바다에 풍랑이 일어나니까 베테랑 어부 베드로나 세리 일을 하며 펜대를 굴리던 마태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서는 ‘믿음의 크기’가 ‘인생의 크기’입니다. 인생의 차이는 믿음의 차이입니다. 인생의 가장 큰 자산은 믿음입니다! 재산, 능력, 조건, 지위, 지식 등 인생의 배가 아무리 커도 거센 풍랑이 닥쳐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3] 믿음의 증진법 : 예수님께 시선을 집중하라
그러므로 무엇보다 믿음의 크기를 키우시기 바랍니다. 이게 가장 지혜로운 신앙생활이요 인생의 지혜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믿음의 증진법을 배우시면 됩니다. 성령님께서 마태에게 감동을 주셔서 굳이 본문을 기록하게 하신 의도가 바로 이겁니다. “믿음의 증진법은 바로 이런 거다! 베드로의 실패담을 통해 배워라!”
30절(상) 보십시오.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 ” 풍랑이 이는 바다 위를 걸어가던 베드로가 잠시 후 어떻게 됩니까? 한눈을 팔고 바람을 보는 순간(파도를 보았을 것) 두려운 마음이 생겼습니다. 다시 말하면 믿음이 소멸된 겁니다. 그러니까 즉시 풍덩 빠져버립니다.
다행히 그 순간도 실오라기만한 믿음도 있었기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외칩니다. 30절(하)~31절. “30 ...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베드로의 부르짖는 기도에 즉시 응답하십니다. 그리고 구해 주십니다. 그러면서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여기서 우리는 믿음을 떨어뜨리는 것 두 가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두려움과 의심입니다. 두려움은 인생 최대의 적입니다. 두려움이 닥치면 아무 것도 못합니다. 당황하게 되고 판단력도 흐려집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어느 집에 불이 났습니다. 빨리 신고를 해야 됩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급히 말합니다. “여보! 119가 몇 번이야?” 아내가 당황하며 대답합니다. “글쎄요! 갑자기 생각이 안 나네요. 여보,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죠. 빨리 114에 물어보세요!”
홍명보 올림픽축구 대표팀 감독의 경험담이 신문에 난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는 많은 국제 경기를 치룬 경험을 바탕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축구는 항상 강한 팀이 승리하는 게 아닙니다. 실제 경기장에서 그런 점을 많이 느끼곤 합니다. 마음속의 공포가 가장 큰 적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두렵고, 두려움이 몰려오면 믿음이 쪼그라듭니다.
잠29:25 보면 두려움이 얼마나 나쁜지 설명합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
의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나와 함께 계심을 의심하기 시작하면 믿음이 쪼그라듭니다. 의심이란 말은 어원적으로 둘로 갈라진다(divide)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두 마음이라는 것이죠. 이런 상태로 무엇을 어떻게 승리할 수 있겠습니까? 약1:6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아무리 애를 써도 안 된다는 겁니다. 심지어 기도해도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두려움과 의심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까요? “두려움의 치료제는 오직 믿음이다.”(노만 V. 필) 그러니까 어떻게 해서든 믿음을 키워야 합니다. 믿음을 키우려면,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는 겁니다. 계속해서! 그러나 그냥 바라보면 안 되죠. 예수님이 누구신지 잘 알고 바라봐야 합니다. 본문의 사건이 정리되면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어떻게 하죠? 33절.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이런 체험을 통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실감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미리 감지하고 예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면 두려움도 의심도 없이 쉽게 승리했을 겁니다.
여러분, 우리 믿음이란 게 아주 맹랑합니다. 금세 믿음이 있는 것 같다가도 믿음이 삭 사라지는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이미 우리에게 믿음이 있다 하더라도 계속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히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Let us fix our eyes on Jesus-NIV) 그는 ...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승리자 예수, 사망 권세 이기신 예수, 나와 함께 해 주시는 예수를 바라보라는 겁니다.
그러면 내 마음속에 믿음이 솟아나고, 뭐가 두렵겠습니까? 그럴 때 하나님의 능력이 내 삶의 현장에 흘러들어와 놀라운 승리의 역사가 나타나는 겁니다. 대하16:9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 ” 하나님의 눈과 나의 눈, 예수님의 눈과 나의 눈이 마주칠 때 역사가 일어납니다.
초등학생 시절의 일입니다. 그때는 놀 게 딱히 없었죠. 하절기에는 대개 산으로 들로 나가 놀았습니다. 어느 날 중학생 형들과 나가 놀다가 철길을 따라갔습니다. 한참 가다보니까 낭떠러지 사이로 철길이 나 있습니다. 형들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쉽게 건너갔습니다. 저는 몇 발자국 가다 그만 딱 멈추고 말았습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까 꼭 떨어져 죽을 것 같았습니다. 그냥 오면 된다고 아무리 말해도 못 고고 있으니까 한 형이 다시 돌아와 부축해 줘서 겨우 건넜습니다. 형들이 요령을 가르쳐 줬습니다. “아래 내려다 보지 말고 그냥 철길만 똑바로 봐!” 정말 그렇게 해보니까 무섭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숙달된 후에는 아예 뛰어 다녔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를 보면 두렵습니다. 주님을 바라보면 두렵지 않습니다. 담대한 믿음이 생깁니다.
사40:30~31 보십시오. “30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그러므로 계속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믿음이 쑥쑥 자랍니다. 그리고 새 힘이 넘쳐 날마다 승리할 수 있습니다. 때때로 풍랑이 닥쳐도 당당하게 건널 수 있습니다.
어느 사업가 부부의 이야기입니다. 부인은 믿음이 좋은데, 남편은 가정의 평화(?)를 위해 겨우 교회 나오던 분입니다. 그것도 항상 늦게, 슬리퍼 질질 끌면서. 사업이 자기 마음먹는 대로 잘 됐기에 아쉬울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일이 터졌습니다. 잘 가나던 사업이 부도 위기를 맞이한 겁니다. 인간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저 부도 날짜만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낙심 가운데 집에 틀어박혀 있는 남편을 보고 속이 터지던 부인이 눈물로 호소합니다. “무엇이든 해 봐야 될 게 아녜요? 사방팔방 막혀 있어도 하늘은 열려 있어요. 하나님께 기도해 보세요!” 평소에 영적 체험이 없었던 남편은 이상하게 부인의 말에 마음이 뭉클했습니다. 부부는 눈물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생각지도 않은 사람들의 도움을 부도를 막은 겁니다. 그 후 그 사업가의 믿음이 상승하고 사업도 번창하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에 정말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다른 것은 그때뿐입니다. 인생의 바다를 항해할 때 결국은 풍랑 위를 걷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게 바로 믿음입니다. 우리 주님은 항상 우리 삶 가운데 함께 해 주십니다. 이 엄연한 사실을 알지 못하고 세상만 바라보며 두려워하는 ‘믿음 없음’ ‘적은 믿음’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을 하죠! “문제가 문제가 아니라, 내 믿음이 문제이다!”
요즘 잘 듣는 찬양 중에 「You Raise Me UP」(주님 당신이 나를 일으켜주시니)이란 노래가 있습니다. 여러 찬양 가수들이 부른 것을 들어봤는데, 그 중에 가장 감동적인 것은 9살짜리 꼬마 가수 ‘코니 탤벗’(Connie Talbot)이 부르는 영어 찬양입니다. 몇 소절을 소개해 드리면 이렇습니다. “When I am down and, oh my soul, so weary, When troubles come and my heart burdened be, Then, I am still and wait here in the silence, Until you come and sit awhile with me. You raise me up, so I can stand on mountains. You raise me up, to walk on stormy seas. I am strong, when I am on your shoulders. You raise me up, to more than I can be.”(내 영혼이 지치고, 나약해질 때, 괴로움이 밀려와 나의 마음을 무겁게 할 때, 당신이 내 옆에 와 앉으실 때까지 나는 여기서 고요히 당신을 기다립니다. 당신이 나를 일으켜 주시기에, 나는 산 위에 우뚝 설 수 있고, 당신이 나를 일으켜 주시기에, 나는 폭풍의 바다 위를 걸을 수 있습니다. 당신의 어깨에 기댈 때 나는 강해집니다. 당신이 나를 일으켜 주시기에 나는 나보다 더 큰 내가 됩니다.”
아무쪼록 예수님이 우리를 보실 때 “믿음이 적은 자여!”가 아니라 “믿음이 큰 자여!” 이렇게 칭찬받을 만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인생의 바다를 항해하며 어떤 풍랑을 만날지라도 그 풍랑 위로 당당히 걸어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A. 믿음에 대하여
1. 믿음, 고난을 극복하는 믿음
2. 본문 배경 설명
B. 고난을 극복하는 믿음
1. 제자들이 물결로 고난을 당하더라 - 예수님을 떠난 인생의
고난(마 14 :22~24)
2. 예수님께서 바다 위로 걸어오시니 제자들은 놀라 유령이라고 무서워하여
- 고난 중에 찾아오시는 예수님,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불신앙(마 14:25~27)
3. 베드로가 물 위로 걸어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 믿음이 있으면 물(고난) 위를 걸음, 믿음이 적으면 물(고난)에
빠짐(마 14:28~31)
4. 예수께서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 예수님과 함께 하는
인생은 평안(마 14:32~33)
C. 풍랑 같은 고난 중에 오시는 예수님을 믿고, 바라보고
담대하여서 고난을 이기고 평안과 축복을 받는 성도가 되자
고난을 극복하는 믿음
마 14:22-33 / 김성광 목사
A. 믿음에 대하여
1. 믿음, 고난을 극복하는 믿음
드디어 미국과 이라크가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최근 신문에는 한국의 국가위험도가 높아졌다고 보도하고 있습니다. 작년보다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더 악화되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북한의 핵개발로 인해 국가위험도가 더 높아졌고, 국제적인 신용도 역시 떨어졌습니다. 한 칼럼에서는 「이라크 다음은 북한인가」라는 제목으로 현 사태의 심각성을 다루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점점 한국의 현실과 미래에 대해 불안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전쟁의 공포에 시달리는 사람들로 인해 전쟁공포증 징후가 여기저기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강남은 다른 지역보다 더 불안하다고 합니다. 달러와 금 사재기를 시작한 사람들도 있고, ‘한국을 뜨기’ 위한 준비를 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합니다.
압구정동에 사는 권씨는 하고 있던 식당을 매물로 내놓고 식당이 팔리면 곧바로 호주나 캐나다로 갈 예정이라고 합니다. 청담동에 살고 있는 개인사업가 김씨는 그가 하는 사업을 정리하고 오스트레일리아로 가겠다고 했습니다. 또 어느 벤처 회사의 사장 역시 정치, 사회 등 모든 것이 불안하다며 몇 년 동안 해외로 나갔다 온다고 합니다.
이런 여세 때문인지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코리아타운 부동산 가격이 올라가고 있다고 합니다. 한국 사람들이 가서 자꾸 집을 사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왜 불안해하십니까?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없는 다른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사무엘상 17장 47절 말씀에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고 하였습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인간끼리, 국가끼리 싸운다고 하여도 결국 그 전쟁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고 주관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나라는 하나님의 축복받은 나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나라를 반드시 지켜주실 것을 믿습니다.
저는 며칠 전에 샌프란시스코를 거쳐서 몬터레이에서 부흥회를 하고 돌아왔습니다. 여러분, 미국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나라입니다. 그 광대한 땅이라든지 경제력, 군사, 정치를 보더라도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나라라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대한민국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나라입니다. 1945년 8·15 해방을 통해 일본의 압제에서 건져주셨고, 1950년 6·25로 인해 공산주의 국가가 될 위기에서도 지켜주셨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나라를 사랑하신다는 증거입니다.
여러 가지 어려움을 많이 겪었지만 한국교회의 성도들이 기도함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키고 보호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앞으로도 하나님께서 우리나라를 지키고 보호하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두려움과 공포, 불안에서 해방되어 담대한 믿음과 신앙을 가지고 행복한 삶을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기위해서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의심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하나님 앞에 부르짖고 기도하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고, 만사형통하게 하시고, 전화위복이 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 여호와를 기뻐하는 사람들은 그 마음에 소원을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시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 38~39절 말씀에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믿음을 가지고 나가야겠습니다. 여러분의 가정과 직장, 사업장에서 믿음으로 생활하고, 국가의 장래도 믿음으로 바라보고 나갈 때 우리의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역사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2. 본문 배경 설명
사도행전 14장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벳새다 빈들에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오천 명을 먹이시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마 열두제자들은 이 기적을 보고도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말씀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제자들에게 예수님보다 먼저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 건너편으로 가라고 하시고 호수에서 큰 풍랑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그것을 통해 예수님의 도움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갑자기 풍랑이 일자 제자들은 두렵고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보내신 후, 산 위에서 기도를 하시다가 풍랑을 만난 제자들을 보시고, 물 위를 저벅저벅 걸어서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가셨습니다.
풍랑으로 인해 놀라고 정신이 없었던 제자들은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자 즉시 ‘유령이다’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하루 전에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셨는데, 그것은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유령이라고 소리를 지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하고 마음에 평강을 주셨습니다.
이 말을 듣고 베드로는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라고 간청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라’고 하시자, 베드로는 용기를 내어 배에서 뛰어내렸고, 물 위를 걸었습니다. 아마 제자들도 놀라고, 베드로 자신도 놀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물 위를 걷자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렁거렸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고 갈 때는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바람을 보고 두려워하자 몸이 물 속으로 빠져 들어갔습니다. 그가 도와달라고 소리를 지르자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셔서 손을 잡아 베드로를 건져주시며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고 책망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건져 함께 배에 오르자 바람이 그치고 평안해 졌습니다. 그때서야 제자들이 정신을 차리고 예수님께 절을 하며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놀라운 교훈을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때로는 인생에 풍랑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고난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분명히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배를 타고 저편으로 가라’고 말씀하셨고, 그 말씀에 순종하여 가는 데도 풍랑이 나타났습니다.
우리 인생에는 풍랑이 있습니다. 누구나 고난을 당할 때가 있고, 어려움을 당할 때가 있고, 낙심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 반드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 고난을 극복할 수 있고, 풍랑이 이는 물 위를 걸을 수도 있지만, 풍랑만 바라보고 이 세상만 바라본다면 낙심하고 절망하여 어려움 속으로 들어갑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심으로 고난을 극복하게 하심을 믿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나에게 믿음을 주셔서 어떤 고난도 극복하게 만들어 주시옵소서.”
성도 여러분, 모두 믿음으로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믿음을 통해서 가정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믿음을 통해서 직장과 사업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믿음을 통해서 우리나라가 하나님 앞에 더 축복 받는 나라가 될 수 있습니다. 비록 전쟁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기도함으로 승리의 역사가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말씀을 통해 고난을 극복하는 믿음에 대해 알아보고,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첫째, ‘제자들이 물결로 고난을 당하더라’고 하였습니다. 둘째, ‘예수님께서 바다 위로 걸어오시니 제자들은 놀라 유령이라고 무서워하여’라고 하였습니다. 셋째, ‘베드로가 물 위로 걸어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고 하였습니다. 넷째, ‘예수께서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고 하였습니다.
B. 고난을 극복하는 믿음
1. 제자들이 물결로 고난을 당하더라 - 예수님을 떠난 인생의 고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먼저 갈릴리 호수로 배를 타고 건너게 하시고, 자신은 혼자 기도하러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도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가정을 위해서 기도하고, 직장, 사업장을 위해 기도하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배를 타고 항해를 할 때, 24절을 보니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슬리므로 물결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더라’고 하였습니다.
배를 타면 풍랑과 물결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 갈릴리 호수는 북쪽이 레바논 산맥에 둘러싸여 있고, 남쪽은 평야가 있어서, 남쪽으로부터 바람이 불어오면 물결이 일어나서 금새 풍랑이 일고 금방이라도 빠질 것처럼 됩니다.
항해를 할 때 고난을 당하게 되는 것처럼 우리 인생에도 고난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고난이 닥치면 왜 그런 일이 생기는 지 이해를 하지 못합니다. 인생에는 고난이 닥칠 수가 있습니다. 병들 수도 있습니다. 망할 수도 있습니다. 잘못될 수도 있습니다. 사고가 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고난이 문제가 아닙니다. 고난이 닥칠 때에 그 고난을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요나 1장 3절 말씀을 보면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배를 타고 다시스로 도망을 가자 하나님께서는 태풍을 일으키셔서 고난에 처하게 하고, 요나로 하여금 물고기 뱃속에서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순종하도록 만드셨습니다.
순종하는 사람도 고난을 당할 수 있고, 불순종하는 사람도 고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교만을 버려야 합니다. 불순종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몸과 마음과 물질과 정성을 바쳐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미국의 강철왕 카네기(Andrew Carnegie ; 1835~1919)는 “성공의 비결 중 첫 번째는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남에 있다. 성공한 사람들은 대개 험한 역경 속에서 꿋꿋하게 그것을 극복해서 자기의 운명을 개척한 사람들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고난이 있는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이 크게 성공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운명이 어떠한지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운명을 어떻게 극복하고 앞으로 전진하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역경지수(Adversity Quotient)”란 역경을 이겨내는 지수를 말합니다. 그런데 크게 성공한 사람들은 대개 역경지수가 높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역경에 부딪쳤을 때 거기에 대처하는 반응을 다음의 세 가지로 보여준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포기형’입니다. 역경이 닥치면 그냥 주저앉아 포기하거나 도망을 갑니다. 두 번째는 ‘안주형’인데, 역경이 닥쳤을 때 극복하기 보다는 현상을 유지하려 하고, 적당히 편안하게 살려고 합니다. 세 번째는 ‘정복형’으로, 산을 보면 정복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있는 힘을 다해 역경을 극복합니다.
마지막 정복형의 사람들이 대부분 크게 성공합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속하십니까? ‘포기형’입니까? ‘안주형’입니까? ‘정복형’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정복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믿음을 구하는 사람과 함께하시고 승리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개인도 마찬가지이고, 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한국은 세계의 여러 나라들과 비교해 볼 때 열악한 환경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이 환경을 비관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가서 “하나님, 우리로 하여금 역경을 극복하는 믿음과 담대함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858년 뉴욕의 한 가정에 남자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 아이는 어려서부터 소아마비를 앓아 다리를 절었고, 시력도 좋지 않아 돋보기를 써야했습니다. 또 천식까지 앓고 있어 사람들이 있는 곳에만 가면 기침을 하며 호흡곤란증세를 보였습니다.
그렇게 겨우 열한 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는 아들에게 “아들아, 너는 다리도 절고, 시력도 나쁘고, 천식까지 앓고 있으니, 만일 그것이 너를 실패케 하거든 그것을 잘 극복하고, 하나님을 믿으며 그의 도우심을 구하거라. 그리하면 너는 누구보다 더 크고 훌륭한 인물이 될 거야.”라고 말했습니다.
이 아이는 아버지의 말을 듣고 소아마비, 시력이 나쁜 것, 천식은 결코 장애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그럴수록 더욱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가야 한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도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하여 23세가 되었을 때, 뉴욕 대표의회의 의원이 되었고, 28세에는 뉴욕 시장 선거에 출마했습니다. 그는 그 후 뉴욕 주지사가 되고, 미국의 부통령이 되고, 26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 1858~1919) 대통령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열악한 환경, 불행한 조건이었지만, 그러나 그것 때문에 더욱 겸손하게 하나님께 나가고, 믿음을 가짐으로 한 시대를 구하는 지도자, 정치가로서 성공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가시기 바랍니다.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겸손하시기 바랍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세계적인 위인들, 존경받고 칭찬받는 훌륭한 지도자 300명을 조사한 결과,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 ; 1882~1945), 링컨(Abraham Lincoln ; 1809~1865), 처칠(Sir Winston Leonard Spencer Churchill ; 1874~1965), 헬렌 켈러(Helen Adams Keller ; 1880~1968), 간디(Mohandas Karamchand Gandhi ; 1869~1948), 마틴 루터 킹(Jr Martin Luther King ; 1929~1968) 등 거의 50% 이상이 어려운 가정, 문제 있는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그것을 극복하고 역사적으로 빛난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긍정적인 믿음을 가지고, 적극적인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가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도와주십니다.
성도 여러분, 고난을 당하셨습니까? 낙심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 고난 때문에 예수님께서 찾아오십니다. 그 고난 때문에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 고난으로 인해 겸손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가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여러분에게 더 큰 축복과 은총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2. 예수님께서 바다 위로 걸어오시니 제자들은 놀라 유령이라고 무서워하여 - 고난 중에 찾아오시는 예수님,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불신앙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제자들이 그 바다 위로 걸어 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지르거늘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마 14:25~27)
밤새도록 기도하시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풍랑으로 인하여 고난당하고 있는 것을 아시고 도움을 주시기 위해 바다 위를 걸어 오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셨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예수님이 인간이시라면 믿을 수 없겠지만,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바다를 만드신 하나님께서 바다를 못 걷겠습니까?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로 가까이 가자 제자들은 너무 놀라 예수님을 가리켜 유령이라고 소리 지르며 무서워하였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고 하셨습니다.
아마 풍랑당한 제자들 중에서 기도하는 제자는 한 사람도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 때 기도를 했다면 기도하다가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오시는 것을 보고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했을 텐데, 제자들은 두려움에 정신이 없어 예수님을 보고도 혼비백산하여 예수님인지, 유령인지도 분별을 못했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역사인지, 사탄의 역사인지 분별을 하지 못합니다. 영의 눈을 밝히 떠야 하고,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불안해하고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질병도 하나님의 축복이 될 수 있습니다. 전쟁도 하나님의 축복이 될 수 있고, 가난도 하나님의 축복이 될 수 있고, 문제도 하나님의 축복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오시는데 인간의 눈으로 보고 유령이라고 놀라 소리 지르지 마시고 하나님께서 오신다는 것을 믿고 마음의 평강을 누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혹시 호수에서 죽는 것은 아닌지 두려워하고 불안에 떨겠지만, 마음속에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면서 끝까지 예수님께서 오실 것을 믿고 기다린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걸어오시는 것을 보고 감사하고 찬양할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과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이렇게 다릅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항상 열심히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고난을 당할 때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보고 감사하고 찬송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시편 46편 1절 말씀에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흉용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지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어쨌든 우리는 지진이 나고, 화산이 폭발하고, 홍수가 나도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세상사람들은 두려워할지라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결코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늘과 땅도, 전쟁도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기 때문에 여러분은 두려움에서 해방되어 평강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때때로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살 때, 고난은 우리에게 달려와 하나님을 찾게 하고 기도하게 만듭니다. 우리 인생에 고난이 없다면 점점 더 타락하고 죄악에 빠져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고난과 질병과 어려운 문제를 통해 우리를 겸손하게 하시고, 손을 들고 하나님 앞에 나와 회개하게 하시고, 하나님을 만나게 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찾았다면,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께 가까이 나갔다면, 그 고난은 우리에게 해가 아니라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조영한 장로님의 간증입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부친의 희망대로 경상북도 풍기에서 인삼재배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정성을 다해 수고하고 애썼지만 홍수가 나서 인삼농사를 다 망치게 되었습니다. 좌절한 그는 농사를 그만두고 지방공무원으로 취직을 했는데, 공무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곧 그만두었습니다.
세 번째로는 주택건설사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사업을 시작했는데, 그것은 잘 될 때는 잘되지만 안 될 때는 안되고 하다보니 그것도 결국 실패하였습니다.
그는 여러 번의 실패로 이제는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해 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반드시 보람 있는 일을 해야 하는데 무슨 직업을 가졌으면 좋겠습니까?”
그러자 갑자기 그에게 믿음이 생기고, 아이디어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국내 최초로 무인주차관리시스템을 개발하여 대표적인 기업으로 성장하고 성공을 하였습니다. 그의 RF 무정차요금징수 시스템은 영종도 공항, 가락동 농·수산시장, 코엑스 주차장에 설치하여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이 하지 못한 일을 앞장서서 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어떻게 그렇게 선견지명이 있어서 그런 사업을 하게 되었습니까?” 하고 질문을 했습니다. 그는 “하루도 쉬지 않고 하나님께 새벽기도를 하고 믿음으로 성공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하루도 쉬지 않고 새벽기도를 했더니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시고 지혜를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아무 것도 없고 불확실하고 어려운 상황에 있다 할지라도 열심히 하나님 앞에 새벽기도를 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성공시켜 주시고, 아이디어를 주시고, 믿음을 주십니다.
조영한 장로님은 하나님 앞에 축복을 많이 받아 교회에 충성하는 것은 물론, 미자립교회 지원, 군선교 활동, 장애시설 지원, 미혼모 시설 지원 등의 구제사업을 하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능력주시는 대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겠다고 간증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모두 성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도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부자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으로 착한 일을 많이 하고 전도도 많이 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베드로가 물 위로 걸어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가는지라 - 믿음이 있으면 물(고난) 위를 걸음, 믿음이 적으면 물(고난)에 빠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대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마 14:28~31)
예수님께서 오라고 하시자 베드로는 그 말씀에 순종하여 배에서 물 위로 뛰어내렸습니다. 그러자 베드로의 몸이 물에 가라앉지 않고 물 위를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도 놀라고 제자들도 놀랐습니다.
자연적인 현상으로 볼 때 사람이 물 위에 있으면 당연히 가라앉아야 하는데,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바다에 뛰어들었던 베드로는 가라앉지 않고 물 위를 걸어서 예수님께로 갔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자신도 놀랄만한 축복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다른 사람이 하지 못하는 역사를 행할 수 있습니다. 기적을 행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못한다는 것, 안된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은 것처럼 여러분도 직장과 사업, 인생에서 물 위를 걷는 기적 같은 역사가 나타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바람이 불어 바다의 물결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요동을 치자 갑자기 겁이 나고 의심이 생겼습니다. 의심이 생긴 순간, 베드로는 그만 물 속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하는데, 바람을 보니까 무서운 마음과 두려운 마음이 생긴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여러분, 부르짖고 기도해야 합니다. 베드로가 소리를 지르자 예수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베드로를 구원하시면서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라고 하셨습니다.
누구나 믿음은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크고 많아야 하는데, 믿음이 작으면 믿는 척만 합니다. 믿음이 커야 큰 역사가 나타납니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하나님 앞에 큰 믿음을 가지고 나가시기 바랍니다.
의심하는 것과 믿음이 적은 것은 같은 것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있다고 주장을 하여도 의심하는 것은 믿음이 적은 것입니다. 여러분, 의심한다고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한 평생을 의심하면서 살지 마시고, 믿음으로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야고보서 1장 6~8절 말씀에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라고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기도하지만 믿음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한 쪽에는 의심이 있습니다. ‘내가 기도한다고 이루어지겠는가, 정말 응답을 받겠는가’ 하는 의심스러운 생각을 하면 그 사람은 응답을 받지 못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 기도하고 충성하고 봉사할 때 ‘하나님, 나에게 믿음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긍정적인 믿음, 구원 받을 만한 믿음, 축복 받을 만한 믿음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대부분 많은 사람들은 안 될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은 부정적인 믿음을 가지고 산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긍정적인 믿음을 가지고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미국의 사상가 에머슨(Ralph Waldo Emer-son ; 1803~1882)은 “기둥이 약하면 집이 흔들리는 것처럼 믿음이 약하면 생활이 흔들린다.”라고 말했습니다.
종종 “나는 왜 인생에 걱정과 근심이 많이 생깁니까? 왜 사업이 잘되지 않습니까? 내 기도는 왜 응답받지 못합니까?”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믿음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먼저 “하나님, 나에게 큰 믿음을 주시옵소서. 반석 같은 믿음, 하나님의 말씀만을 믿고 의지하는 믿음, 살아 있는 믿음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라고 믿음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독일의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 14983~1546)는 역사적으로 큰일을 했습니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인해 전 세계가 변화를 받아 새로워지는 역사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종교개혁을 하면서 여러 가지 어려움과 목숨의 위협을 당하는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친구 멜랑크톤(Philipp Me- lanchthon ; 1497~1560)은 그에게 어려운 문제가 없느냐는 편지를 썼습니다. 그러자 그는 “언제 우리에게 문제가 없었던 때가 있었느냐? 문제가 있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믿음이 없는 것이 문제다.”라고 답장을 보냈습니다.
다시 말하면 문제가 있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문제가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문제가 없으면 기도도 하지 않고 교만해집니다. 타락합니다. 하나님을 모른다고 합니다. 문제가 자꾸 생겨야 하나님께 기도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도할 제목을 주심으로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고, 기도하게 만드십니다.
여러분, 문제가 있는 것도 큰 축복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문제가 없으면 기도하지 않고, 교만과 불신앙에 빠집니다.
정연금 자매는 교회는 다니지만 믿음도 없고 말씀도 믿지 않고 그저 적당히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다 하루는 기도제목이 생겼습니다. 세 살 된 딸아이가 이유도 없이 밤낮 울어댔기 때문입니다. 병원을 다녀도 원인을 알 수 없자 하나님만이 고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를 하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그는 아이를 데리고 기도원으로 가서 3일 동안 금식기도를 했습니다. 그러자 울던 아이가 울음을 뚝 그쳤습니다. 그래서 그의 마음속에 하나님께 기도하면 된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믿음이 생기니까 그에게 또 다른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렇게 순하던 남편이 갑자기 강퍅해져서 교회를 가지 못하게 하고 직장도 그만두고 매일 술만 마셨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이제는 남편만 믿고 살 수 없으니 담대한 믿음을 달라고 기도하고, 직장을 그만 둔 남편을 대신하여 생계를 꾸리기 위해 식당을 차려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그 식당은 20개의 공장에서 정기적으로 밥을 대어 먹을 정도로 장사가 잘되었습니다. 그래서 300만원으로 시작한 식당이 1억을 벌게 되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가정을 축복해주시고 안정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딸을 통해 기도의 연단을 시키시더니 남편이 직장을 잃어 가정이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용기와 믿음을 가지게 하시고 가정을 안정되게 하는 축복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고통 중에 믿음을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께 가까이 가도록 만드셨다는 것을 간증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연단과 시련을 통해서 기도하게 만들어 주시고 그 기도를 통해서 더 큰 축복을 체험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4. 예수께서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 예수님과 함께 하는 인생은 평안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마 14:32~33)
예수님께서 물에 빠져 가는 베드로를 잡고 함께 배에 오르시자 풍랑이 심하던 바다가 잠잠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면 잠잠하게 됩니다. 내 마음도 안정이 되고, 모든 환경도 정리가 됩니다.
여러분, 항상 예수님과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떠나고 예수님을 떠나고 말씀을 떠나고 교회를 떠나니까 여러 가지 문제가 자꾸 생기고 걱정과 근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살고 예수님을 마음속에 모시고 산다면 모든 바람과 풍랑이 잠잠하게 되고 평강케 되는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배에 있던 제자들은 예수님께 절을 하며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할 때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몰랐는데 물 위를 걸어오셔서 풍랑을 잠잠하게 하시니 비로소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구주로 고백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항상 하나님 중심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을 마음속에 모시고, 하나님 아버지를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할 때 어떤 풍랑도 다 잠잠케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두려움과 공포도 다 물리치고 마음의 평강을 누리고 기쁘게 살 수 있습니다.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평강 가운데서 안정된 삶을 살아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43장 2~3절 말씀에 하나님께서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물 가운데를 지나거나 불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도우심이 나타납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삶을 살기 위해 “오늘도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시고, 내일도 함께 해 주시고, 평생에 하나님과 늘 동행하는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그 사람의 인생은 행복한 인생이 됩니다. 형통한 축복을 받습니다(창 39:2). 대적과 싸워 승리합니다(신 20:4). 창대케 됩니다(대하 1:1).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통해서 기적을 체험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막 5:40~42).
박순보 장로님은 대구 성서공업단지에서 폴리에스터 직물 염색가공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공장을 하기 전에는 열심히 기도를 했는데, 공장이 자리 잡고 잘되자 자신도 모르게 기도도 하지 않고 교회도 가지 않고 돈 벌고 쓰는 재미에 빠져 장로임에도 불구하고 주일에 낚시를 가고, 심지어는 아이들까지 데리고 놀러가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은 장로님의 부인인 권사님이 “여보, 하나님께 이래도 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장로님은 “나 혼자 해도 회사가 잘 돌아 가니까 걱정하지 마.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셔도 괜찮아.”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공장이 부도가 나고 말았습니다. 그제야 장로님은 “하나님, 용서해주세요. 제가 너무 교만했습니다. 이제부터 사나 죽으나 하나님을 위해 살겠습니다. 나를 좀 살려주십시오.” 하고 철저하게 회개하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렇게 매일 기도를 하고 있는데 어느 날 아는 후배가 찾아와 자신이 경영하던 공장을 사정이 생겨 못하게 되었다며 맡아 달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공장을 맡아 다시는 교만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하나님께서 함께 해달라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자 공장이 얼마나 잘 되는지 연간 매출 60억에 달하게 되었고, 다시 성공하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하나님과 항상 함께 하기를 원합니다.” 하고 간증을 하였습니다.
여러분, 재물을 모았다고 교만하지 마십시오. 공장과 회사가 잘 돌아간다고 큰소리치지 마십시오. 하나님 앞에 경거망동한 행동을 하거나, 함부로 말하지 마십시오. 그런 사람들은 반드시 실패합니다. 그러나 끝까지 겸손하게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하고 영광 돌리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30배, 60배, 100배, 1,000배, 10,000배로 축복과 은총을 베풀어주십니다.
C. 풍랑 같은 고난 중에 오시는 예수님을 믿고, 바라보고 담대하여서 고난을 이기고 평안과 축복을 받는 성도가 되자
성도 여러분, 어떤 고난과 고통을 당했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믿음으로 극복해서 승리하고 성공하고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도행전 11장 23절을 보면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있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개구리를 연상하면 됩니다.
개구리는 발바닥에 빨판이 있어 한번 달라붙으면 떨어지지 않습니다. 어디에 붙어 있든지 한번 붙으면 거꾸로 들어도 붙어 있고, 넘어져도 붙어 있고, 항상 붙어 있습니다.
개구리가 빨판이 있어 달라붙으면 떨어지지 않는 것처럼, 우리도 믿음의 빨판으로 전쟁이 나든지, 불경기가 되든지, 하여간 교회에 열심히 붙어 충성하면 하나님께서 피할 길을 주시고, 만사형통하게 만들어 주시고, 은혜와 축복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베드로가 바람소리를 듣고 물결을 바라본 것처럼 환경을 바라보고 낙심하고 절망하여 하나님을 멀리 떠나지 마시고,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찰싹 달라붙어서 승리하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파도 속에서
마 14:22-33 / 홍정길 목사
풍파 속에 주님이 누워 계셨습니다. 제자들은 죽게 된 줄로 알고 주님을 깨웠습니다. 일어나신 주님께서는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셨습니다. 그 때, "네 믿음이 어디 있느냐? 너에게 있다는 믿음이 이런 위기 때 정말 값어치 있느냐?" 물으셨던 주님이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또 거의 같은 환경을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다른 것이 있다면 그 때는 낮이었는데 지금은 밤입니다. 그 때는 주님께서 배 안에서 주무시고 계셨는데 지금은 주님께서 계시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덩이로 오천 명을 먹이시자 사람들은 예수를 왕으로 삼고자 왕관을 만들어 그 머리에 씌우려고 들었습니다. 예수께서 그 무리들을 해산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먼저 벳세다로 가라. 내가 나중에 가리라."고 명하시고 사람들을 모두 흩으신 다음 홀로 산으로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제자들은 배를 타고 반대편을 향해서 나아갔습니다. 바람이 붑니다. 밤 사경 그러니까 새벽 3시부터 6시까지인데, 아무리 노력해도 거센 바람을 거스릴 능력이 없어 배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우왕좌왕합니다. 아마 어두웠기 때문에 목표도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그들이 몹시 괴로워하고 있을 때에 주께서 친히 물위를 걸어오셨습니다. 지금 바람과 파도와의 싸움으로 두려움에 꽉 차 있던 그들 앞에 이상한 물체가 바다 위로 저벅저벅 걸어오자 제자들은 심히 두려워했습니다. "유령이다."고 외치는 소리에 주께서 "내니 두려워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저들을 안심시킬 때 시몬 베드로는 주님께 요청합니다. "주님, 만일 당신이 주시거든 나를 명해서 당신처럼 바다 위를 걷게 해주소서." 주께서 "오라" 명령하시니까 그는 바다를 육지처럼 걸어서 예수님 앞에 나타났습니다. 걷다가 갑자기 그의 시선이 바람이 만들어내는 큰 파도, 울렁거리는 파도에게로 옮겨지자 주님을 향한 신뢰가 무너져 바다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외쳐댑니다.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님께서는 즉시 손을 내밀어서 저를 건져주셨습니다.
우리 또한 파도 속에 있습니다. 저번에는 예수님이 계셨는데 지금은 계시지 않는 상황, 외롭게 나 홀로 싸우는 싸움을 계속 해야되는 상황 가운데 있습니다. 그런 내게 오늘 이 시간 주께서 하시고 싶은 첫 번째 말씀은 믿음은 자기 확신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신 주님을 신뢰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어떤 사람이 기도를 열심히 했습니다. 기도할 때 병도 낫습니다. 기도했더니 안 되는 일이 되어집니다. 그의 믿음 생활이 점점 다양해지자 욕심이 생깁니다. 내가 예수님 같은 기적을 꼭 하나 하고 싶다. 기적 중에서도 물위를 걷고 싶다. 그리고는 금식하고 철야하면서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는 "주님 믿습니다." 하고는 바다에 들어갔는데 풍덩 빠졌어요. 그래놓고 친구에게 하는 말이 "믿어도 안되더라."입니다. 그 때 옆에 있던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야, 너와 베드로의 형편은 다르다. 베드로는 주님께서 오라고 해서 갔는데 주님께서 너보고 바다로 오라고 그랬니?" 자기 확신, 자기 신념을 믿음이라고 강조하는 설교를 많이 봅니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 아닙니다. 오히려 믿음의 가장 큰 적입니다. 믿음대로 된다는 말, 그 말은 내 의지대로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믿음의 대상이신 우리 주님을 향한 신뢰입니다. 베드로는 이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고백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주시면 당신은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바다를 육지처럼 걸을 것을 믿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당신만 걸을 뿐 아니라 나도 걷게 해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는 믿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많은 사람이 믿음을 나로부터 시작하려고 듭니다. 아닙니다. 믿음은 나에게로부터 우리 주님께로 신뢰의 대상을 바꾸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정말로 전능하신 주님을 믿고 있는가? 나의 구속주 되신 주님을 믿고 있는가? 어느 때나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을 참으로 인격적으로 믿고 신뢰하는가를 다시 점검해보십시오. 베드로가 물위를 걷는 기적을 행할 수 있었던 것은 전능하신 주님을 온전히 알고 신뢰하는데서 시작되었습니다. "당신이 물위를 걷는 것 당연합니다. 당신은 나로 하여금 이 물위를 걷게 해주실 전능하신 분이신 것을 내가 믿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주의 명령 따라서 물위를 걷습니다. 그러다가 앞에 나타난 파도를 보고 빠져서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는 모습을 봅니다.
여기 두 번째로 우리가 배워야 될 것이 있다면 믿어도 똑같이 믿는 것이 아니라 기질대로 믿는다는 것을 알아야겠습니다. 베드로는 다혈질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중간이 없습니다. 전부이든지, 아무 것도 아니든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누구라 하더냐?" "당신을 예레미야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엘리야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선지자라고 합니다." 그 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묻습니다. 이 때, 시몬 베드로는 확신에 차서 대답을 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내가 믿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복되도다. 이를 알게된 것은 네가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알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네가 안다. 네가 온전한 믿음을 가졌다." 그랬는데, 몇 절을 더 읽어가면 그 구세주와 주님으로 오신 주님께서 자기의 오신 목적을 말씀하십니다. "내가 얼마 있다가 관원들에게 붙잡혀가서 모진 고난을 당한 다음에 십자가에서 죽으리라." 그랬더니 베드로는 금새 "그리 마옵소서."라고 합니다. 바로 전까지 "주는!"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당신이 말하면 무엇이든지 들어야 되는 "주님"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순간에 "주님, 말 같은 소리하지 마시오. 어떻게 그런 소리를 할 수 있습니까?" 주님의 인격 전체를 부정하는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이리 저리 말을 바꾸기 시작합니다.
또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겼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예수께서 발을 씻기니까 숨 죽인 채 말도 못하고 황공무지해서 어쩔 줄 모르는데, 베드로는 자기 앞에서 예수님이 수건을 가지고 대야에 물을 담아 발을 씻기려고 드니까 "주님, 다른 사람은 씻겨도 나는 절대로 안됩니다." 하고 거절합니다. 그런데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씻기지 않으면 너는 나와 상관없다." 그랬더니 "주님, 그러려면 내 전신을 다 씻어주시옵소서." 안한다고 그랬다가 전체를 다 씻기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고통의 때에 제자들이 다 떠난다는 예언을 듣고 그는 외칩니다. "다른 사람은 다 떠날지라도 나는 당신 떠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주님 곁에 있다가 몰려드는 사람들 사이에 조그마한 칼을 뽑아 말고라는 사람의 귀까지 잘랐습니다. 용감무쌍한 것 같았습니다. 그렇지만 더 어려운 핍박이 오니까 그는 한 계집종의 신랄 앞에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아니, 맹세하며 부인합니다. 나중에는 저주하며 부인하는 베드로의 모습을 봅니다.
사람들이 예수 믿어도 똑같이 믿지 않습니다. 요한은 요한 같이 믿고 베드로는 베드로같이 믿고 바울은 바울처럼 믿습니다. 바울은 담즙질 사람이었기 때문에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그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행 20:24) 담즙질은 목표를 한번 세우면 죽어도 합니다. 그러니까 목숨까지 버리겠다고 합니다. 기질대로 믿습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기질은 우리 믿음의 반석이 될 수가 없습니다. 내가 내 기질을 통해서 예수님 믿을 수밖에 없지만, 그러나 기질에 의지하는 믿음이면 안됩니다. 내 기질을 성령님께서 주장하실 때, 가장 아름다운 기질로 쓰임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 때까지 베드로는 기질대로 믿었습니다.
그런가하면 우리가 시험에 질 때를 자세히 살피면 이미 주께서 우리를 위해 다 이루시고 해결해주신 사건 앞에서 다시 반복해서 무너지는 것을 봅니다. 지금 베드로가 바다 위를 걸었습니다. 그랬더니 파도가 일어났습니까? 아닙니다. 이미 노한 풍랑이 배를 흔들고 있었고 파도는 배를 삼킬 듯이 몰아붙이고 있었습니다. 그 정황 속에서 주께서 오라 하니까 갔습니다. 그 파도가 베드로를 삼키지 못한 채 예수님의 명령 따라 순종하고 있었습니다. 주께서 해결해 놓으셨습니다. 그런데 잘 가다가 이미 주께서 해결해 놓은 그 파도를 보고 빠졌단 말이예요. 우리가 이렇게 실패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어떤 일에 실패해서 고통을 받았지만 주께서 그 실패를 회복시켜주셨습니다. 믿음으로 잘 갑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그 실패와 비슷한 경우가 닥치니까 믿음을 포기하고 무너지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또 과거에 지었던 죄, 우리 주님께서 내 모든 죄를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멀리 옮겨졌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 같이, 안개의 사라짐 같이 내 죄를 도말하신 주의 완전한 용서를 믿습니다. 내 죄가 주홍처럼 붉을지라도, 먹장처럼 검을지라도, 흰눈처럼 양털처럼 십자가 위에서 완전히 해결해주신 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승리하고 잘 살다가도 어느 날 비슷한 죄의 유혹이 닥치면 그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쉽게 무너집니까? 이미 주께서 해결해주셨습니다.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가면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유혹 앞에 무너져버린다면 무서운 파도를 보고 믿음을 잃고 물 속에 빠져버렸던 베드로와 같은 처지가 될 것입니다. 주께서 해결해 놓으셨기 때문에 아무리 파도가 크게 불어닥쳐도 머리털 하나 젖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믿음이 흔들려서 파도에 허우적거리고 있는 베드로 같은 내 모습을 삶 속에서 얼마든지 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오늘도 우리 주님을 찬양해야겠습니다. 믿음이 너무 연약하고 부족해서 주님께서 나 같은 것을 돌보지 않을 것 같지만 "나를 구원해주소서."라고 손을 뻗치는 베드로의 외침에 주님은 사랑의 손으로 그를 붙잡아 다시 일으켜 세워주십니다. 말 한마디로 "그대로 떠올라라." 라고 하면 떠올랐을 텐데 사랑의 주님은 직접 손으로 붙잡아주십니다.
풍랑 속을 걸어오신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살펴보게 됩니다. 첫째로 우리 주님은 풍랑으로 고통받는 제자들에 대해서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주님의 기도가 저들을 붙잡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기도하는 분입니다. 먼저 보낸 제자를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절망할 때, 아무도 나에게 관심 가져주지 않아 외로울 때가 있습니다. 그 때도 우리 주님은 나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우리가 잘 부르는 찬송의 가사 처럼 "누군가 날 위하여 누군가 기도하네. 내가 홀로 외롭고 지쳐서 넘어져있을 때 누군가 날 위하여 기도하네" 우리 주님은 보좌 우편에서 이 험한 인생의 풍파를 헤치면서 살아가는 나를 향해서 기도하는 주님이십니다.
두 번째로 그 분은 보시는 분입니다. 같은 내용을 마가복음 6장에서 기록한 것을 보면 재미있는 기록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바람이 거스리므로 제자들의 괴로이 노 젓는 것을 보시고..."(막 6:48) 예수님께서 계셨던 그 해협을 지나가 호숫가에서 배 저어가는 제자들을 보셨다는 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추측키로는 그 캄캄한 밤에 보이기는 뭐가 보였겠습니까? 그러나 전능하신 주님께서 세상에 보지 못하는 것이 없으신 눈으로 제자들이 고통 당하고 있는 모습을 보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주님은 내 한숨도 들으십니다. 내 억울함도 보십니다. 아무도 모르게 흘리는 눈물을 우리 주님은 보십니다. 주님 앞에는 빛과 어둠이 일반입니다. 세상에 주님 앞에 감추인 것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주께서 나를 버리셨다고 외치자 이사야 49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사 49:15-16) 우리 주님은 나를 보시는 주님입니다. 노 저어 가는 내 인생 항해 길에서 고통받아 기진해 쓰러져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그 때도 나를 찾아오신 주님입니다. 그 찾아오심은 어떤 세력도 막을 수 없습니다. 양 한 마리가 높은 산에 홀로 도망갔을 때, 목자이신 주님은 끝까지 찾아가서 그 양을 목에 안았습니다. 그 때까지 쉬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불구덩이에 갇혀 있었습니다. 아무도 도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 불을 뚫고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찾아가셨습니다. 그 주님은 오늘 이 시간에 도저히 사람이 접근할 수 없는 그 무서운 풍파를 헤치고 걸어가십니다. 전능하신 주님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도우러 가는 그 길에 물은 중력의 법칙을 버리고 아스팔트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님은 어디나 찾아가십니다. 누구와도 함께 가십니다. 내가 믿음이 약해서 쓰러져 바다에 휩쓸리려고 들 때도 사랑의 손길로 나를 붙잡아 주십니다. 일으켜 세워주십니다. 감사한 것은 "너 믿음이 없다. 왜 네가 믿음이 없느냐?" 그렇게 꾸중하지 않고 "네가 믿음을 갖기는 가졌었어. 그래서 물위를 걸을 때도 있었어. 그렇지만 네가 믿음이 적구나. 만약 네가 큰 믿음을 가졌다면 마치 저 홍해를 끝까지 걸었던 너희 조상 믿음의 선조들처럼 역사상 처음으로 호수 위를 걸어 육지까지 가는 사람이 되었을 텐데... 네가 나를 믿었다면 내가 어떤 존재인가를 확실히 믿었다면 너는 끝까지 승리했을 텐데... 그러나 네가 믿음은 가졌지만 연약한 믿음을 가졌다. 그래서 너는 빠질 수밖에 없었지만 나는 너를 지금도 사랑한다. 내 구원의 손을 붙잡아라. 내 사랑의 손을 붙잡아라"라고 일으켜 세워주십니다.
우리 주님은 나를 위해서 기도하신 주님입니다. 내 모든 고통의 현장을 보시는 주님이십니다. 억울해서 견딜 수 없는 분들 계십니까? 그 억울함을 아시는 분이 계십니다. 보시는 분이 계십니다. 겉도 아시고 속도 아시고 밖의 표현도 아시고 속의 생각도 아시는 그 분, 모두 보시는 주님은 내가 힘이 없어 기진할 때도 찾아오십니다. 그 분이 나를 찾아오심을 막을 세력은 없습니다. 믿습니까? 그리고 그 분은 내가 쓰러졌을 때의 적은 믿음을 멸시하지 아니하시고 사랑으로 구원해주실 주님입니다. 믿습니까? 이 주님을 오늘도 찬양합시다.
그 주님을 평생 섬겼던 토플레디라는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은 42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청교도였는데, 얼마나 병을 많이 앓았던지 사람들은 그를 움직이는 종합병원이라고 했습니다. 평생을 아픔과 고통 속에 살았지만 그의 마음속에서는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늘 찬양했습니다. 그 중에 우리가 아는 찬송가 "만세 반석 열리니 내가 들어갑니다. 창에 허리 상하여 물과 피를 흘린 것 내게 효험되어서 정결하게 하소서"를 작사했습니다. 또 우리에게 늘 격려를 주고 위로를 주는 귀한 찬송을 남겨주었습니다. "고요한 바다로 저 천국 향할 때 주 내게 순풍주시니 참 감사합니다." 태평성세가 되어서 고요한 바다로 항해하는 그 때를 하나님 앞에 찬양하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2절은 바뀝니다. "큰 물결 일어나 나 쉬지 못하나 이 풍랑 인연하여서 더 빨리 갑니다." 무서운 노도광풍이 부는 풍랑의 밤에도 그는 믿고 있습니다. 이 바람이 나를 침몰시킬 수 없다는 것, 단지 이 흉맹한 바람은 기껏해야 내가 가고자 하는 곳까지 며칠 가야될 것을 단숨에 가게 만드는 지름길로 인도하는 운반기구에 불과하다고 그는 노래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항해 인생길 갈 때 주님께 간구해야 될 기도제목이 있습니다. "주여, 내게 믿음을 더해 주옵소서. 이 항해 길 인생 가는 동안 주여, 큰 믿음을 주시옵소서." 이것이 우리의 기도 제목이 되어야 됩니다. 우리 모두 찬송가 503장을 의미를 생각하며 같이 찬양하겠습니다.
"고요한 바다로 저 천국 향할 때 주 내게 순풍주시니 참 감사합니다.
큰 물결일어나 나 쉬지 못하나 이 풍랑 인연하여서 더 빨리 갑니다.
내 걱정 근심을 쉬없게 하시고 내 주여 어둔 영혼을 곧 밝게 합소서.
이 세상 고락간 주 뜻을 본받고 내 몸이 의지없을 때 큰 믿음 줍소서. 아멘“
인생의 태풍속에서
마 14:22-33 / 김형준 목사
초등학교 1학년 산수 시간,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덧셈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1더하기 1은 얼마죠?” “2지요?” “2더하기 2는 얼마입니까?” “4지요?” 그리고 아이들에게 약간 어려운 질문을 합니다. “6더하기 6은 얼마입니까?” 1학년짜리 꼬마들이 손가락으로 덧셈을 해보자니 손가락 두 개가 모자랍니다. 하다가 안 된 한 어린이가 하는 말. “쉬운 건 지가 다하고”
우리는 새로운 것을 배우고 나면 제대로 배웠는지,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지 점검을 받아봐야 합니다. 그것을 테스트라고 합니다. 테스트를 통해서 더 배워야 할 것은 없는지, 잘못 이해하고 있는 부분은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테스트는 배우는 사람에게도 반드시 필요하지만 가르치는 선생님도 이를 통해 바르게 가르쳤는지 점검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신 후 질문을 자주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했는지 혹은 엉뚱하게 인식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알고 싶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신앙의 본질적인 모습은 말씀 듣고, 기도하고, 예배드릴 때뿐만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 신앙인다운 선택과 행동을 할 때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오늘 주님께서는 신앙인에게 어려운 일을 때때로 허락하셔서 우리가 진짜 믿음의 사람인지를 확인하고자하십니다. 오늘 제자들이 받는 테스트를 보면서 우리도 주님의 마음을 찾고 다시 읽는 시간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22절에서 아주 재미있는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경험하고 난 제자들을 예수님은 서둘러서 배를 태워 건너가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순종하여 배를 탄 제자들은 가는 길이 평탄할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상 밖의 엄청난 태풍과 폭우에 시달려 무려 9시간 동안 사투를 벌입니다. 예수를 믿다보면 이런 경우를 종종 당합니다. 예수를 믿고 순종함으로 인생이 평탄하고, 안고 있던 문제도 해결되고, 생활은 더욱 편안할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태풍과 어려움으로 정신없습니다. 하나님은 왜 당신의 말씀에 순종한 제자들에게 인생의 태풍을 허락하셨을까요? 주님은 왜 주님 말씀 따라 살고자하는 우리에게 어려운 일을 겪게 하시는 것일까요?
우리는 몇 주간 계속해서 인생의 광야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광야에서 복잡한 세상에서는 들을 수 없었던 하나님 음성을 듣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주 음성에 집중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기회로 주신 것입니다. 인생 광야와 마찬가지로 평범한 속에서 들으면 들을 수 없고, 들어도 쉽게 잊어버릴 음성에 대해 ‘주목(attention)’하라고 태풍을 통해 또한 경고하십니다. 광야와 마찬가지로 태풍 속에서 우리게 진정 하고 싶은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때는 하나님께서 항상 세 가지를 보이시는데, 첫째는 환경을 살피게 하시고, 둘째는 우리 자신의 실체를 보게 하시고, 셋째는 그 가운데 계신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보게 하십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태풍을 통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인생에 대해서 알기를 원하십니다. 24절 말씀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슬리므로 물결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더라’고 했습니다. 인생의 길을 항해에 비유합니다. 인생은 순탄하게 흘러갈 때도 있지만 걸음걸음 마다 역풍이 불어올 때도 많습니다. 모든 것이 순탄하면 좋으련만 역풍이 불어올 때 마다 거스르고 나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 수 없습니다. 여기서 물결이라고 표현된 단어를 분석하면 큰 파도가 쉴 새 없이, 끊임없이 몰아치는 것을 표현하는 헬라어입니다. 또 ‘고난을 당하였더라’는 뜻은 임신한 엄마가 아이를 해산할 때의 울부짖음과 괴로움을 말합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불어오는 역풍을 맞으며 피곤하고 지치도록 노 젓던 제자들이 고통스러워서 해산하는 여인이 고함을 지르는 것과 같은 괴로움 중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또한 ‘한밤중’이란 단어에서 쉴 곳을 찾을 수도 볼 수도 없는 우리 인생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어려움과 고난을 이기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이 세상은 원래가 시험과 고통이 많은 세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해줍니다. 우리는 보통 이 땅이 아름답고 아름답기 때문에 살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땅의 것으로 여기서 새로운 멋진 인생을 세울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기대했던 세상은 어느 한 순간 내게서 모든 것을 빼앗고는 고통과 아픔으로 몰아갈 수 있음도 압니다.
몇 주 전, 예쁜 얼굴과 모습을 사고로 다 잃어버린 이지선 자매의 조용하지만 중요한 충고를 기억할 수 있습니다. 자매는 이렇게 간증했습니다. “저는 고통이나 불행과는 전혀 상관없는 인생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도서관에서 나올 때만 해도 새로운 미래를 생각하며 희망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불과 몇 분이 채 안되는 짧은 순간 제 인생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불행이라는 운명이 왔습니다. 여러분, 제가 그랬듯이 불행의 주인공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 누구라도 될 수 있습니다. 불행한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마시고 그들을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덧붙입니다. “그래도 저는 얼굴에 화상을 입었기에 겉으로 쉽게 드러나니 이야기라도 할 수 있지만, 말 할 수 없는 마음의 상처로 말도 못하고 끙끙거리며 고통 받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인생은 우선에는 대단해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어느 날 불어온 태풍은 소중한 것을 다 빼앗고 맙니다. 배의 방향을 바꿔버리기도 하고 파손시키기도 합니다. 욥은 한순간에 인생의 폭풍으로 재산과 자녀, 아내와 건강까지 잃게 됩니다. 이렇듯 세상에는 사랑할 것도, 자랑할 것도 없는 곳입니다.
이번 ‘매미’의 영향으로 130여명의 사람이 사망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들이 태풍에 휩쓸려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장래가 촉망되던 한 예비부부의 죽음은 많은 사람을 비통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의 사랑과 미래가 함께 사라졌습니다. 부서진 희망의 조각들만 부모 가슴에 상처로 남기고 그들은 그렇게 떠나가 버렸습니다. 대구 지하철 참사로 두 딸을 잃은 40대 어머니는 아픔을 견디지 못하여 방황하다가 이번 태풍에 휩쓸려 함께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제 아버지만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남겨진 아버지의 몸부림 속에 바로 우리의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비단 이 가정만의 불행입니까? 우리에게도 언제든 닥칠 수 있는 불행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이렇듯 고통이 가득한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안 먹고, 안 입어 가며 모았던 무려 5조 5천여억 원 상당의 재산상 피해도 입었습니다. 태풍이 휩쓸고 간 자리는 다시 복구 할 수 있다지만 무너진 마음의 둑은 누가 재건해 줄 수 있을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만난 태풍을 통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땅을 피상적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곳곳 깊숙이 죄로 말미암아 신음하게 된 이면을 직시하라 말씀하십니다. 전도서 2장 22절부터 23절까지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으로 소득이 무엇이랴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라고 말씀합니다. 바로 알게 될 때 우리는 진정으로 이 땅에 마음을 두지 않습니다.
둘째, 하나님은 태풍을 통해서 제자들이 자기 자신들을 살피기 원하셨습니다. 26~27절은 두려워하는 제자들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그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무서워하고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의해서 봐야 할 것은 제자들은 어부 출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바다를 잘 압니다. 거친 태풍을 여러 번 겪어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태풍 앞에서 너무나 무기력한 모습으로 사투를 벌이며 죽음만이 마지막 종착역인양 스스로 삶을 포기하고 있습니다.
큰 문제없는 평소에는 물질이나 경험, 권력, 지식 등이 자신을 지켜주는 것이라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소중히 여깁니다. 그러나 정작 태풍이 불 때 도움을 얻지 못하고 비참해질 뿐입니다. 제자들이 두려워하고 무서워한 이유는 주변에 도와줄 사람이 없다는 것 때문입니다. 얼마든지 어려움을 만날 수 있습니다. 어려울 때 도와줄 사람이 있다면 그토록 힘들지는 않을 것입니다. 배는 이미 육지에서 수리나 떨어져 있습니다. 때는 밤입니다. 아무도 도와줄 수 없습니다. 바로 이 사실이 태풍을 만난 사람들을 더욱 고독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에게는 태풍을 벗어날 희망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아니, 희망은 바로 곁에 있었지만 볼 줄 아는 눈이 없었습니다. 그들을 도와 줄 주님이 계셨지만 찾지도 보지도 못했습니다. 주님을 ‘주님’으로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가끔 신문에서 자살하는 사람들의 기사를 보며 우리는 ‘왜 자살을 할까? 그래도 살길이 있었을 텐데......’ 생각하기 쉽습니다. 우리 눈에는 살 길이 보이지만 당사자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를 보십시오. 그들은 슬픔과 절망으로 젖어있었기 때문에 주님이 동행하셨건만 알지 못했습니다. 마찬가지로 고난을 당할 때 아무리 둘러봐도 희망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절망하는 것입니다.
제자들과 같이 두려워하는 우리를 두고 성경은 ‘둔하여졌다’고 말합니다. 존 맥스웰 목사님은 두려움이라는 것은 '무기력을 낳고, 모든 일을 미루어서 행동하지 않게 하고, 삶의 의미를 느끼지 못하게 하며, 자기 연민에 빠지게 하며, 변명으로 그의 삶을 살게 하며, 에너지를 잘못 사용하여 오히려 자신을 죽이는데 에너지를 사용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두려워하는 제자들의 모습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입니다. 평소 자랑하며 스스로 대단한 것처럼 여기던 우리는 태풍 앞에 한갓 보잘 것 없는 피조물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진짜 모습, 우리가 있던 진짜 삶의 자리를 명시해주는 장면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드러나지 않고 있다가 베드로가 배를 떠나 물위를 걷기 위해 배에서 발을 떼는 순간 발견되는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가 예수님을 진정 주인으로 신뢰하기 전에 있던 삶의 자리는 ‘배 안’인 것입니다. 배가 태풍으로부터 나를 지켜줄 것이라 아주 자연스럽고도 의심 없이 믿습니다. 우리를 보호해 줄 뿐만 아니라 우리의 품위와 삶의 안전을 약속해 줄 것이라 생각합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이 안락과 안주의 배 안에서 태풍을 맞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배가 나를 태풍으로부터 보호해 줄 것이라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시카고의 윌로우크릭 교회에서 설교 목사로 계셨던 존 오트버그 목사는 ‘당신의 배는 무엇입니까?’라는 제목의 설교를 통하여 이렇게 말씀합니다. ‘배는 하나님과 상관없이 당신에게 안락과 안전을 보장하는 모든 것이다. 배는 당신이 유혹 받을 때, 인생의 폭풍이 일 때 의지하고 싶은 모든 것이다. 타고 있으면 너무 편안해서 물 위에 계신 예수님께 가지 못 한다 해도 포기할 수 없는 모든 것이다. 배는 극한적인 제자훈련의 모험으로 가려는 당신을 붙드는 모든 것이다. 당신의 두려움이 그것을 말해준다. 자신에게 물어보라. 모든 것을 뒤로 하고 믿음으로 발걸음을 내딛으려할 때 가장 버리기 두려운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당신의 직업인가, 관계인가, 명예나 자존심인가, 또는 은밀한 사생활인가, 아니면 성공인가 아니면 인정받고 싶은 욕구인가?’
존 목사님의 말씀처럼 배 안에 머무는 것은 안주하는 것입니다. 배 안에 안주하게 되면 5달란트와 2달란트 그리고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들 중 한 달란트를 받은 이와 같은 사람입니다. 물위를 걷는 것이 두려워서 자신이 가진 한 달란트를 붙들고 안주하려 한다면 반드시 슬퍼하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경고하신 주님의 경고를 듣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믿음의 걸음을 걷지 않으면 우리는 실패를 경험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실패 없는 길이 오히려 결과적으로는 죽음의 길이 될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니고데모도 배를 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젊은 부자 관원인 그에게 예수님을 따르기 원한다면 안주의 배에서 나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가진 모든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예수님을 따르라 말씀하시지만 니고데모는 아주 고급스러운 요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이 배를 떠날 수 없습니다.”라고 선언하고는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대로 배를 떠나서 물 위를 걷는, 주님을 의지하고 나가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야 할 참 된 삶을 살았습니다. 이제껏 지켜준다고 믿었던 배를 버려두고 예수님의 말씀을 의지해서 물 위를 걷는 그의 걸음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걸음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나로 물 위를 걷게 하시는 주님의 테스트에서, 주님을 의지하며 태풍 가운데서도 한 걸음 한 걸음 내 딛는 믿음으로 예수님께 답하시지 않으시렵니까?
진정 자신을 볼 수 있는 사람, 자신의 참된 실체를 볼 수 있는 사람 그 사람만이 겸손할 수 있습니다. 겸손한 사람만이 주님의 말씀을 따라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셋째, 하나님께서 태풍을 통해서 제자들에게 가르치려 하셨던 것은 참된 주님을 발견하는 것이었습니다. 27절 말씀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말씀합니다. 또 33절 말씀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는 고백이 나옵니다. 그동안 제자들은 예수님을 바르게 고백하지 못했습니다. 오병이어 사건을 경험하고 난 후 제자들은 예수님을 정치적 메시아, 경제적 메시아로 이해하며 왕으로 세우고자 했습니다. 본문 첫 구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시는데 앞서 제자들을 빨리 건너편으로 가게 하십니다. 그렇게 하신 이유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인간적으로 이해하여 왕으로 세우고자하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주님을 그렇게 알기를 원치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가 예수님 당신의 모습을 온전히 발견하기를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같은 사건을 기록한 마가복음 6장 48절 ‘바람이 거스르므로 제자들이 괴로이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 즈음에 바다 위로 걸어서 저희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지나가다’는 헬라어로 ‘파레르코마이’인데, 이것은 구약 성경을 헬라어로 옮길 때 사용된 단어로 ‘하나님의 나타나심, 신현,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나타내는 전문 용어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께서 노 젓고 있는 제자들 옆을 지나가신 것은 ‘나는 물위를 걸어 다니고 있다. 너는 태풍에 시달리고 있니?’ 하며 과시하기 위함이 아니라 고통스러운 삶의 현장에 메시야로서 나타나기 위한 의도가 담겨있는 것입니다. 그 어느 누구도 구원해줄 사람 없을 때 그 고통과 고난에서 건져줄 메시야로 말입니다. 여러분, 이 원어는 모세와 엘리야에게 나타나셔서 그들 앞을 지나가실 때도 사용되었던 단어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메시지를 전달하실 때 불타는 떨기나무나 바람으로 혹은 물 위로 걷기 등을 통해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셨습니다. 그 부름 앞에 응답했던 사람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즉,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님이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 앞을 지나갔던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보여주기 위한 의도가 있었습니다. ‘내니 두려워 말라’라고 말하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보십시오. 원래 헬라 원어는 주어를 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동사 속에 이미 주어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굳이 주어를 쓰는 경우는 강조할 때입니다. 태풍 속에 노 저으며 사투를 벌이는 그들에게, 또 유령이라 외치는 그들에게 ‘내니 두려워 말라’의 ‘에고 에이미’라 말씀하심은, 모세가 하나님께 ‘하나님, 저 백성에게 나를 누가 보냈다고 할까요?’ 라는 질문에 ‘스스로 있는 자’가 보내었다고 하라신 하나님의 말씀과 같습니다. 고통과 괴로움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다가가셔서 ‘나는 하나님이다! 나는 메시야다! 나는 너희의 제사장이요 왕이요 너희의 선지자다! 너희의 짐을 대신 져주고 너희를 인도하고 보호할 참 진리의 하나님이다!’라는 사실을 확고히 해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럴 때 다른 제자들은 주님을 영접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보았습니다. ‘주여’라고 부릅니다. ‘구세주여, 제가 주님을 믿습니다. 주님께서 물 위를 걸으신다면 물의를 걸으신 주님의 능력으로 능히 나도 물 위를 걷게 하실 수 있습니다.’ 태풍이 불고 배 안에서도 안전할 수 없는 때에라도 베드로는 물 위를 걷게 하실 수 있을 것이라 믿었습니다. 고난과 절망과 좌절의 현장 속에서 구세주 되신 하나님을 알고 바로 고백하였습니다. 베드로는 가장 어렵고 심각한 상황 속에서 주님의 임재하심을 체험하며 태풍 가운데 걸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14장에서 한두 장 지나면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곳에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시는 유명한 질문과 고백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하는데 이 고백은 본문의 물위를 걷는 사건과 전혀 무관하지 않은 것입니다. 베드로는 아무도 도울 수 없는 가운데 찾아오셔서 도와주시고 구세주가 되셔서 물 위를 걷게 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이야 말로 전능하신 구세주라는 것을 결론으로 얻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단순히 우리가 주님을 선지자나 선생 정도로 알고 있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이미 밤은 깊었고, 육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며, 태풍은 불고 아무도 도와줄 수 없는 그 때에 물 위를 걸어오셔서 친히 하나님이 되어주실 분으로 우리의 인격과 마음을 다해 받아들이고 또한 고백하기를 원하십니다. 야곱은 벧엘 광야에서 돌베개를 베고 잤습니다. 이 돌 베개는 말씀 드렸던 것처럼 두려움과 외로움, 고독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곳에서 그가 하나님을 발견했을 때 돌베개는 오히려 주님을 섬기는 전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기름을 붓고 섬기는 제단이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많은 이유 중에 삶의 폭풍과 어려움 가운데서 만났던 주님을 섬기고자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주님은 오늘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우리가 깨닫기를 원하시고,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 이 땅의 썩어질 것에 집착하지 말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눈에 좋아 보이는 것들도 영원히 간직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원하십니다. 그리하여 영원한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을 열어주시고자 하십니다. 또한 진정한 우리 모습을 보게 만드십니다. 배 안에 안주하고 있는 나, 내가 의지하고 있는 그 어떤 것이라도 결국 파선하고 말 것이라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에 진정 의지해야 할 바는 내 자신이 아니며 고난과 역경 속으로 걸어오시는 주님이라는 사실을 믿고 의지합시다.
인생의 태풍을 만나셨습니까? 그동안 배워온 주님 신뢰하는 믿음을 테스트해 볼 기회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물 위를 걷게 하시듯 능력의 주님을 체험할 수 있는 중요한 순간인 것입니다. 풍랑으로 인해서 세상 줄이 끊어졌을 때 진정 믿고 사랑해야 할 그 분, 의지할 하나님을 믿음으로 고백하며 나아간다면 오늘 우리 삶은 태풍 가운데서도 물 위를 걷는 베드로의 삶이 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통해서 보기 원하십니다. 지금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 개인 개인을 통해서 물 위를 걷는 베드로의 삶을 보기 원하고 계십니다.
풍랑 한 가운데서
마 14:22-33 / 김홍규 목사
n the midst of a storm
아이들과 함께 놀이터에 가면 가장 무서운 것이 롤러 코스터(Roller Coasters)입니다. 저는 약간의 고공 공포증이 있어서 높은 데 올라가는 것은 딱 질색입니다. 더군다나 진절머리나게 무서운 속도로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습니다. 텍사스 알링톤에 있는 「SIX FLAGS」에 가면 별의별 이상한 이름이 붙은 롤러 코스터를 볼 수 있습니다. 'Mr. Freeze,' 'Flashback,' 'Texas Giant,' 'Runaway Mountain,' 'Shockwave,' 'Judge Roy Scream,' 등등의 무시무시한 이름들이 붙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최근에 나온 롤러 코스터는 'Titan'이라는 이름이 붙은 괴물입니다. 지상에서 255 피트나 높이 우뚝 솟아 있는데 시속 85마일로 떨어집니다. 저같이 겁 많은 사람은 심장이 떨려서 도저히 타지 못할 터인데도 사람들은 이 'Titan'이라는 이름이 붙은 롤러 코스터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겨우 3.5 분 정도 밖에 안 걸리는 이 놀이기구를 타기 위해서 사람들은 1시간씩이나 줄을 서서 기다린다고 합니다.
여러분이 오늘 'Titan'이라는 롤러 코스터를 탄다면 어떻게 할까요? 아마 '주여!' 하고 저절로 주님을 찾으실 것입니다. 제발 시간이 빨리 지나가서 이 괴물에서 내려오기만 하고 기대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꼭 이와 같은 위기에 빠진 제자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 바로 전에 보면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셔서 오천 명이나 되는 무리를 먹이셨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친히 이 많은 사람들을 다 돌려보내시고 잠시 휴식을 취하며 기도하시려고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이 때 주님은 제자들을 갈릴리 바다에서 배를 타고 먼저 건너편으로 가게 하셨습니다. 아마도 제자들까지도 다 따로 떨어지게 해놓으시고 홀로 기도하시려고 그러셨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날이 저물었는데 예수님은 계속해서 산에서 기도를 하고 계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 없이 바다 위에서 배를 타고 항해를 하던 제자들에게 갑자기 어려운 일이 닥쳤습니다. 24절에 보면 "배가 이미 육지로부터 수리나 떠나" 있었다고 했는데 한 3-4 마일 정도 떨어졌을 것입니다. 어쨌거나 갈릴리 바다 정 중앙에 왔는데 풍랑을 만나서 큰 고난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와 같이 큰 위기에 처한 제자들 앞에 홀연히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25절에 보면 '밤 4경'이라고 했는데 4경은 유대 시간으로 새벽 3시부터 6시 사이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새벽 미명 시간에 풍랑을 만나 어쩔 줄 몰라 하는 제자들 앞에 나타나셨던 것이지요. 본문 말씀은 특히 위기에 처한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 어떻게 했는지 집중적으로 보도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 말씀이 주는 영적 교훈 네 가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① 우리가 탄 인생 배에 풍랑이 닥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두 가지를 한번 깊이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첫째는 '배'이고 두 번째는 '풍랑'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이 세상에서는 하는 일이 전부 배로 비유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 우리의 교회, 우리의 직장, 우리가 사는 사회, 나라, 그리고 전 세계가 모두 배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배는 순풍에 돛을 달고 항해를 안전하게 잘 하다가도 언제 어느 때에 풍랑을 만날는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의 가정에 이혼이라는 풍랑이 닥쳐 올 수도 있고, 우리의 교회에 시련이 올 수도 있고, 우리의 직장에 대대적인 감원과 해고 바람이 일어날 수도 있고, 우리 사회에 무서운 테러가 생길 수도 있고, 나라 전체가 전쟁에 빠져들 수도 있고, 또 전 세계가 위기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 그 어떤 배도 풍랑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우리는 중동에서나 일어날 법했던 전대미문의 테러 사건이 세계의 수도라 할 수 있는 뉴욕 한 복판에서 그대로 일어났던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미국 군사력의 상징인 '펜타곤'이 습격을 당했다면 이 세상에 더 이상 안전한 곳은 없습니다!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 위에서 작은 어선을 타고 가다가 큰 풍랑을 만났던 것처럼 우리 역시 이런저런 풍랑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운명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탄 배가 풍랑을 만날 때 예수님께서 반드시 나타나시게 되어 있습니다. 본문 말씀에 보더라도 새벽 3시경 예수님께서 바다 위를 걸어서 풍랑을 만나 쩔쩔 매는 제자들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문제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몰라 봤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26절에 보니까 예수님을 본 제자들이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를 질렀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귀신으로 오해하고 무서워했던 것입니다.
② 예수님이 우리 곁에 찾아 오셔도 몰라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탄 배에 큰 위기가 닥칠 때마다 주님은 분명히 찾아오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눈이 가려져 그 주님을 몰라봅니다. 믿음이 적어서 그 주님을 오해합니다. 그래서 주님을 내치고 딴 것에다가 구원을 요청합니다. 점쟁이를 찾아가고, 힘있는 빽이 어디 없는가 기웃거리고, 풍랑을 피할 길을 세상에서 열심히 찾습니다. 그러나 그런 세상적인 방법에는 진정한 해결책이 없습니다. 일시적인 위로와 잠시동안 풍파를 피할 수는 있지만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똑바로 보고 그 예수님께 의지할 때에만 우리의 배는 풍랑을 피하고 평안을 찾을 수 있습니다.
어떤 교인이 목사님께 한 가지 부탁을 했습니다. 자기가 지금 사업상 급한 일에 얽매여 있어 자기 아내를 공항에서 픽업해야 하는데 할 수가 없으니 목사님이 대신 픽업해주시면 고맙겠다는 부탁이었습니다. 목사님은 기꺼이 도와주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은 이 교인의 부인을 한번도 본적이 없었기 때문에 공항에 나가서도 누군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도대체 부인이 어떻게 생겼는지 인상착의를 말해달라고 주문했습니다. 그 때 이 남편은 자기 아내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매우 쉽습니다. 모든 어두컴컴한 장소에, 마치 구름 뒤편으로부터 태양이 갑자기 나타났을 때처럼, 불이 환하게 들어올 때, 이 환한 빛이 어디에서 오는지 그 소스를 찾으시면 거기에 바로 제 아내가 서 있을 것입니다."--"That's easy. When the whole dismal place lights up, as if the sun suddenly came from behind the clouds, just find the source of that radiance. That'll be my wife."
예수님이 꼭 이와 같으십니다. 빛나는 모습으로 여러분에게 다가올 때 영접하십시오! 오늘 여러분이 탄 배에 갑자기 풍랑이 닥칠 때 예수님께서 찾아오십니다. 그 환한 얼굴 예수님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을 알아보고 즉시 영접하십시오! 그 분이 풍랑을 멈출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풍랑 만난 배에 찾아오신 예수님은 27절에서 제자들에게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주님이 제자들 곁에 계시니 무서운 풍랑이 제자들이 탄 배를 때려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말고 안심하라는 말씀을 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들은 베드로가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이렇게 외칩니다. 28절에 보면,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위로 오라 하소서"고 말합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믿습니다. 빨리 제 배 위에 타셔서 풍랑을 꾸짖어 주소서!" 이렇게 말한 것이 아니라 "만일 당신이 진짜 나의 주 예수님이시라면 당신처럼 저도 바다 위를 한번 걸어 보게 해보소서! 그러면 믿겠습니다." 하면서 주님을 시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같이 이렇게 우리는 주님을 시험할 때가 있습니다. "주님, 당신이 정말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면 이렇게 한번 해보시지요. 그러면 제가 당신이 진짜 주님인 줄로 믿겠습니다." 우리는 완전한 신뢰와 순종 없이 그저 주님을 테스트해보려고 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결국 이와 같이 예수님을 시험하는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물 위로 걸어 오라!"고 명령하십니다. 베드로가 배에서 즉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님 가까이 가려는데 그만 물에 빠지게 됩니다. 왜요? 주님을 보지 않고 바닷물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 신뢰하는 마음보다 바다가 자기를 삼킬 줄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가득찼기 때문에 물에 빠져 들어갔던 것입니다!
③ 풍랑을 보지말고 주님을 바라봐야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 곁에 오셔서 우리를 도우시려고 할 때 우리는 주님을 온전히 신뢰해야 합니다. 우리의 배를 무섭게 흔드는 풍랑을 보면 우리는 두려움에 빠져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참 능력이 되심을 믿고 주님만 바라봐야 합니다. 히 12: 2에서 말씀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우리의 힘과 방패와 구원이 되시는 예수를 바라볼 때 우리는 두려움을 이길 수 있습니다. 풍랑을 이기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불란서 대혁명이 일어났던 해에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어떤 주교(bishop) 한 분이 감옥에 갇혀서 나중에 처형되었습니다. 이 주교가 투옥된 토굴처럼 생긴 지하 감옥에는 빛이 들어오도록 작은 창을 하나 달아놓았습니다. 그런데 이 창은 십자가 모양으로 생겼습니다. 이 주교가 처형을 당한 뒤 사람들은 창문 위에는 '높이'(height)라는 글씨가, 그리고 창문 밑에는 '깊이'(depth)라는 글씨가 각각 쓰여져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창문 양쪽에는 '길이'(length)와 '넓이'(breadth)라는 글자가 각각 쓰여져 있었습니다. 이 네 가지 글씨는 모두 순교 당한 주교가 직접 쓴 것이었습니다. 이 주교는 세상을 떠나기 바로 직전의 몇 시간을 십자가를 깊이 명상하면서 보냈습니다. 그러면서 이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하나님의 높고도 깊으며, 길고도 넓은 사랑을 다 체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이 네 글자를 손으로 써놓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주교는 도저히 주님을 볼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주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주님의 높고도 깊은, 길고도 넓은 사랑을 보았던 것입니다. 이 주교처럼, 무서운 풍랑이 우리를 삼키려 할 때도 우리는 그 풍랑 뒤에서 서 계시는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 풍랑을 잠재워 주시고 우리를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풍랑을 보다가 물 속에 빠져 들어가던 베드로는 이 때 간절히 부르짖게 됩니다. 30절 후반부를 보세요.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여러분 성경에 나오는 가장 짧은 기도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베드로가 외쳤던 이 기도입니다. "Lord, save me!" 베드로는 물에 빠져 죽어가면서 주님을 향하여 구원을 요청했습니다. 베드로의 기도를 들으신 주님은 믿음 없는 베드로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를 버리시지 않습니다. 31절에 보면 즉각 손을 내미셔서 베드로를 붙잡아 주십니다. 그러면서 점잖게 타이르십니다.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면서 베드로의 믿음 없음을 꾸짖고 계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베드로가 탄 배에 함께 오르십니다. 그랬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④ 예수님을 배에 모시기만 하면 풍랑은 즉시 그치게 됩니다.
그렇게 무섭게 날뛰던 폭풍우가 예수님께서 배에 타시자마자 멈추고 맙니다. 옳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 배를 위협하는 모든 풍랑을 잠재우시는 분이십니다! 가정이라는 배를 사정없이 공격하던 풍랑도 예수님께서 주인이 되실 때 사라집니다! 직장, 사회, 국가, 전 세계 그 어떠한 배를 뒤흔드는 무서운 풍랑도 주님을 당해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33절에 배에 탄 제자들이 외쳤던 것처럼 예수님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여러분의 배에 주인이 되도록 하십시오! 예수님이 선장이 되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배를 무섭게 흔드는 풍랑이 멈추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신기하기 짝이 없는 평안이 여러분의 배 안에 찾아 올 것입니다.
미국의 전설적인 법정 변호사(trial lawyer) 가운데 에드워드 베넷 윌리엄스(Edward Bennet Williams)라는 사람이 죽어가고 있었을 때 어떤 사람이 그가 워싱턴 디 씨에서 얼마나 큰 능력과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인가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이 때 윌리엄스는 이렇게 반문했다고 합니다. "능력이라고요? 나는 이제 진짜 능력을 만나려고 합니다."--"Power? I'm about to meet real power." 윌리엄스가 옳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능력과 모든 자랑은 뜬구름 같은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오직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시는 주님만이 진정한 능력이 되십니다.
베클레브 헤이블(Vaclav Havel)은 현대인들은 "모든 것이 가능하지만 아무것도 확실치 않은 세상"--"everything is possible, and nothing is certain"--속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과학기술이 발달해서 모든 것이 가능한 세상 속에 우리는 삽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확실치 않은 혼돈의 세계 속에서 우리는 또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탄 배에 어떤 일이 생길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오늘 이와 같은 불확실성의 시대 속에서 주 예수님을 여러분의 인생 배에 주인으로 모십시오. 예수님이 주인이 되는 배마다 풍랑이 멈추고 평안과 기쁨이 찾아 올 것입니다. 아멘.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말라
마 14:22-33 / 정영도 목사
▣ 주 제 / 시험,평안
▣ 요 절 / (사 41:10)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도 입> <찬송 503장>
고요한 바다로 저 천국 향할 때 주 내게 순풍주시니 참 감사합니다.
큰 물결 일어나 나 쉬지 못하나 이 풍랑인연하여 더 빨리갑니다.
우리는 항상 평안하고, 안락한 생활을 원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 중에 때때로 풍랑을 허락하신다. 그 풍랑 가운데서 하나님은 우리를 구체적으로 만나주시고, 하나님의 비밀이 담긴 멋진 작품을 우리를 통해서 만드시는 것이다.
연주를 듣다가 왕이 벌떡 일어났다는 그 유명한 ‘할렐루야’를 작곡한 헨델은 건강이 매우 나빴다고 한다. 그는 병을 고치기 위해 재산을 모두 탕진했고, 그러고도 모자라서 남의 돈을 빌려 썼다. 그러나 건강도 찾지 못했고 돈도 갚지 못했다. 결국 반신불수의 비참한 상태로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그때 그는 불행했고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그가 남긴 불후의 음악인 할렐루야를 작곡한 곳은 바로 이 감옥이다.
소설가 O.헨리도 마찬가지다. 그는 은행원으로 근무할 때 부정 대출에 관련되어 감옥에 들어가야만 했다. 거기에서 그는 무료함과 고독을 견디는 방편으로 글을 썼다. 그것이 저 유명한 「마지막 잎새」다.
1. 풍랑이는 바다를 항해하는 것은 주님의 뜻
1)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고통당하는 우리 인생에 대한 두 가지 비유
① <광야 길>에 비유하였다.
건조한 땅- 길이 없는 메마른 땅
(신 8:15)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건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물을 굳은 반석에서 내셨으며
신 8:16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② 또 한 가지는 <苦海>- 풍랑이는 바다를 항해하는 사공에 비유
순풍에 돛을 달 때는 내 세상 같으나, 비바람이 휘몰아쳐서 성난 파도가 배를 삼키고자 할 때면 과히 지옥을 방불케 한다. 죽을 맛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은 그 풍랑속에서 주님을 만나 구원을 받고,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신다.
(시 107:25) 여호와께서 명하신즉 광풍이 일어나서 바다 물결을 일으키는도다
(시 107:26) 저희가 하늘에 올랐다가 깊은 곳에 내리니 그 위험을 인하여 그 영혼이 녹는도다
(시 107:27) 저희가 이리저리 구르며 취한 자같이 비틀거리니 지각이 혼돈하도다
(시 107:28)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서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시 107:29) 광풍을 평정히 하사 물결로 잔잔케 하시는도다
(시 107:30) 저희가 평온함을 인하여 기뻐하는 중에 여호와께서 저희를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시는도다
2) 광야와 풍랑이는 바다는 둘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영원한 영광의 나라로 인도하는 방법이다.
구약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로 인도하여 약속의 땅에 이르게 한 것이나, 풍랑으로 인하여 주의 제자들이 고난을 당하는 것은 주의 뜻이었다는 것이다.
①간단한 본문 설명-베세다 광야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시고난 후에 예수님께서는 무슨 뜻이 계셨는지, 제자들을 채족하셔서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게 하시는 것이었다.
② (마 14:22)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2. 고난 당하는 주의 백성의 모습
1) 주의 뜻에 순종하여 항해하는 제자들에게 풍랑이 일기 시작하였다.
(24절)
우리가 주의 길을 갈 때에 만사 형통한 것이 아니다. 마침내 복을 받게 하시지, 마침내 축복받기 전에는 우여곡절이 있고, 시험과 환난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적용> ① 가정-
② 교회-
2) 이 때에 주님은 어디 가셨는가? (23절)
주님은 따로 제자들만 보내신 후에, 산에 올라가서 혼자 기도하고 계신 것이었다. 또 다른 사건에는 풍랑이 일 때에 주님은 주무시고 계셨다고 했다.
이 때쯤 되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원망하기 마련이다.
구약출애굽기에서 이스라엘이 광야길에서......
(출 14:11)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이같이 우리에게 하느뇨
(출 14:12)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고한 말이 이것이 아니뇨 이르기를 우리를 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뇨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주여,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
(막 4:38)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3) 그러나, 주님은 항상 우리 곁에 계신다.
①출애굽기- 불기둥.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시고, 앞서 장막칠 곳을 예비하시더라.
②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 기도하셨는데, 무엇을 위해서 기도하였겠는가? 제 자들을 위해서
4) 그럼으로, 우리는 주님을 의심하지 말고, 믿음으로 바라보야 하며, 우리의 시선을 오직 주님께 집중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시험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워진다.
제자들의 실패? (26절) 주님을 유령으로 여긴 사람들-믿음없는 제자들의 모습
예화> 한 성도의 자식을 잃은 아픔을 믿음으로
은혜받은 성도가 시골에 교회였나 보다. 큰 행사를 앞두고 교회당 청소를 하러 갔다가 그만 아이가 화장실에 빠져죽는 아픔을 당했다. 그 아픔을 딛고 일어나서 부른 찬송이 복음송
하나님 한번도 나를 실망시킨적 없으시고
언제나 공평과 은혜로 나를 지키셨네
오 신실하신 주 오 신실하신 주 내 너를 떠나지도 않으리라
내 너를 버리지도 않으리라 약속하셨던 주님 그 약속을 지키사
이후로도 영원토록 나를 지키시라 확신하네
나의 인생에 불어닥친 풍랑은, 우리에게 있는 시련은 주님의 실수가 아니라 주님의 높은 깊은 경륜 속에서 이루어지는 비밀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이 고통에서 빨리 헤어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까?
3. 주님을 시험의 현장 한 가운데로 모셔들여야 한다.
1)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사 43: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사 43:3)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2) 나를 위기에서 구원하시려고 닥아오시는 주님을 영접하자
베드로의 실패 - 주님을 영접하면 될 터인데, 자신이 주님의 흉내를 내고자하였다. 우리는 그저 주님을 나의 왕, 나의 구원자로 모셔드리기만 하면 된다.
우리 가정에 첫 자리에 모시자
우리 교회의 첫 자리에 주님을 모시자!
주님을 의심치 말고, 믿음으로 나아가자!
그럴 때에 물가운데 있을지라도, 불가운데를 지날 지라도 주님이 여러분을 지켜주실 것이다.
(사 41:10)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물 위로 가게 하소서
마 14:22-33 / 김삼환 목사
제가 몇 년 전에 브라질 상파울로에서 집회를 마치고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모든 절차를 다 밟고 비행기가 이륙했습니다. 늦어도 한 20분 정도가 되면 비행기는 제 궤도에 들어서서 정상적으로 순탄한 비행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이십분 정도 되니까 조종사의 안내 방송이 있었어요. "여러분, 우리는 지금 굉장히 어려운 곳에 와 있습니다. 제가 꼭 이 곳을 통과해야 되겠는데 여러분, 이십분동안 저를 믿어주시고, 안전벨트를 꼭 메시고, 어떤일이 있더라도 흔들리지 말고 참아 달라"는 방송이었어요. 비행기를 타다가 이런 소리는 처음이었어요. 마음이 착찹하고, 기분이 이상하더라구요. 조금 있는데 비행기가 흔들리기 시작하는데 그냥 흔들리는 정도가 아니예요. 마치 연이 떨어지듯이 그냥 곤두박질 치는 거예요. 비바람이 몰아치고, 상식선에서는 한 만미터 올라오면 그런 것이 없는 것인데 번개가 치고 비바람이 몰아치는데 너무나 이상한 거예요.
부흥회가 별거 없더라구요. 그 곳에서 부흥회는 저절로 되는 거예요. 눈물이 나고, 회개가 되고, 말할 것 없어요. 한 번만 살려 달라고 하구요. 회개하지 못한 것 다 회개하고, 금방 천국문이 열려지는 거예요. 이번에 집에 가면 잘할 것이고, 교회에서도 충성할 것이고, 새벽기도는 말할것도 없고, 저절로 하나님 앞에 서원이 되고요. 아주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몰라요. 살아나리라는 기대를 못할 정도로 비행기가 흔들리는 거예요. 비행기가 가끔 가다가 이상 기류를 만나면 참 고생 한다고 하지요. 김포공항에 계시는 우리 집사님 이야기를 들으면 비행기 날개가 떨어져서 들어오는 경우도 있대요. 대단한 일이 잖아요. 우리가 그런일을 만나지 않아야 되지만은 우리가 비행기 많이 타면 안 만날 수 없는 것이지요. 그렇게 어려운 고비를 넘긴 일이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지금 경제적으로 많이 어렵다는 이야기를 우리가 듣고, 또 경험하고 있습니다. 제2의 IMF가 오는 것이 아니냐? 이렇게 우려하는 분도 국민 가운데 80%이상이 그런 걱정을 하고 있다는 뉴스도 들었습니다. 태풍이 대체로 잘 피해 갔는데 금년에는 두 번이나 내륙으로 통과를 했습니다. 가로질러 가면서 엄청난 피해를, 아픔을, 농민들에게 가져다 주고, 얼마나 일년 내내 기대를 하던 한 곳이 농토가 무너지니까 천지가 무너지는 것이지요. 또 석유값이 얼마나 오르는지요. 작년에 $15, $16 하던 것이 $32, $35 되니까 우리는 석유로 인해 연결이 안되는 제품이 없습니다. 다 에너지 석유로 만들고 있고요. 움직이는 것 다 석유인데 만드는 제품들이 다 석유와 연결되어 있는데 석유값이 이렇게 올라가니까 대기업 할 것 없이 전 국가적으로 어려움이 있고 우리나라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선진국도 도로를 폐쇄하고 주유소 습격하고, 차를 다 세워놓고, 고속도로를 가로막고 있는... 나라마다 지금 석유값으로 인하여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모든 어려움이 이상 난기류와 같이 우리에게 닥칠때가 많습니다. 항상 평안합니까? 항상 건강합니까? 항상 행복합니까? 항상 잘 살 수 있어요? 그런 길은 없는 것이지요. 난데없이 생각지 않았던 슬픔도 오고, 환란도 오고, 시험도 오고, 풍랑도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일생동안 영원히 항상 고생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에게 닥쳤던 그 풍랑도 비행기에 있었던 그 이상 기류도 20분 지나니까 지나가는 거예요. 안전벨트 꼭 매고, 지나가면 어려움은 반드시 지나가게 되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어려움 속에서 낙심하거나 좌절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신앙의 안전벨트, 기도의 안전벨트, 어려울 때를 위해서 벨트가 있는 것입니다. 모든 벨트는 어려울 때에 바짝 조이면 어려움은 넘어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가정의 어려움이든 국가의 어려움이든 교회의 어려움이든 간에 어려움이 있는 것은 정상입니다. 얼마나 그 국민이 슬기롭게 이겨낼 수 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사랑하는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를 다닐 때 큰 풍랑을 만났습니다. 예수 잘 믿는 주님이 선택한 제자들에게도 풍랑이 있었습니다. 예수 잘 믿는 주님이 선택한 제자들에게도 풍랑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 하나님이 제일 사랑하는 삶이었지만 흉년이 있었고, 이삭과 야곱도 흉년이 있어서 요셉은 애굽에 팔려가서 흉년으로 인하여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으로 완전히 이주하기까지 그런 고생을 하지 않습니까? 다윗에게도 어려움이 있었고, 사무엘에게도 어려움이 있습니다. 모든 분들에게 어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보면 어려울 때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찾아 오셨어요.
환란중에 주님은 우리를 찾아 오십니다. 혼자 있지 않습니다. 혼자 우리가 파도와 싸우도록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주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늘에서 이 땅으로, 땅에서 또 땅으로 내가 있는 모든 처소에 주님이 항상 오셔서 외로운 곳에 함께 주무시고, 입원한 곳에 같이 치료를 받으시고, 부끄러움과 환란과 눈물중에 같이 눈물 흘리시면서 내 눈물을 닦아주시는 주님이신 줄 믿습니다. 사람은 어려울 때 떠나가지요. 그러나 주님은 어려울 때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 중요한 것은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더 굳센 의지와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어려움을 바라보면 큰 어려움도 적게 보이고, 또 넉넉히 이길 수 있는 소망을 가지고 지나가면 우리는 어려움에서 반드시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의지가 너무 약합니다. 현대인들은 어려움에 대처하는 능력이 너무 약합니다. 그래서 당황하고, 시험들고, 어려움보다 더 큰 피해를 입게 되는 것이 오늘 현대인들인 것입니다. 나만 외로운 것 아닙니다. 저는 우리 성도들을 보면 너무 좋은 환경, 좋은 직장, 부족함이 없는데도 외로워해요. 모든 좋은 조건 속에서도 시험이 잘 들어요. 모든 사람들은 대체로 낙심도 잘하고, 괴로움도 많고, 고민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우리를 찾아오시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나를 구원하러 오시는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나를 치료해 주실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영국에는 개인이나 국가가 위기에 처할 때 격언처럼 하는 말이 있습니다. 신문에 Burton Bait 기억하라! 개인적으로도 어려움이 있으면 Burton Bait호를, 기억하라, 부모가 자녀에게,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Burton Bait호를, 기억하라. 이 배는 130년 전에 만든 해군 수송선입니다. 이 배가 케이프타운이라고 하는 아프리카 최남단을 통과하다가 케이프타운 65km 지점에 암초에 부딪혀서 이 배가 가라앉게 되었어요. 이 배에 구조선은 3척밖에 없었습니다. 몇 백명의 사람이 있는데 구명정은 3척 뿐입니다. 그 때 사령관은 모든 군인들을 갑판위에 질서 있게 세우고, 구명정을 내려놓고 여자들과 어린아이들과 힘이 없는 노인들을 먼저 실었습니다. 그리고 군인들에게 지시했습니다. 이제 여러 분들은 배 위에서 물에 뜰 수 있는 것은 다 떨어뜨리십시오. 배에 있는 모든 물 위에 들 수 있는 것은 다 떨어 뜨렸습니다. 여러분도 다 뛰어내리세요. 모든 사람은 다 뛰어 내렸고, 물 위에 뜬 것들을 붙잡고 헤엄을 치며 나갔습니다. 마지막 사령관도 뛰어 내렸습니다.
간단한 이야기 같지만은 사람들은 대체로 어려움이 있을 때 우왕좌왕 합니다. 몰립니다. 서로 내가 살겠다고 합니다. 이성을 잃습니다. 신앙을 잃습니다. 내 혼자 생명을 건지려고 하다가 며칠 전에도 불이 나서 차례대로 나오면 다 살 수 있는데 전부 몰립니다. 그래서 나만 살아야 되겠다. 정신을 잃어 버리는 것입니다. 끝났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위기를 당하였을 때 침착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어떤 위기 속에서도 우리의 소망이 되시는 주님, 다니엘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풀무불 속에서도 살려 주시는데 능치 못하심이 없는 우리 하나님을 믿으면서 가정에나 기업에나 우리의 주변에서 어떤 어려움이 있을때라도 우리는 담대해야 합니다. 침착해야 합니다. 조용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나라만 어려운 줄 아세요. 세계 경제 대국인 일본, 우리보다 열배 스무배 잘사는 일본도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6 - 7년을 불경기로 보내고 있습니다. 세계에 있는 일본의 땅을 모두 팔고요, 동경시내 땅 값이 반으로 줄어 들었어요. 일본은 지금 경제 성장이 zero입니다. 몇 년을 그렇게 내려 옵니다. 그러나 얼마나 조용합니까? 침착합니다. 독일도 보세요. 지금을 제외한 경제 대국이 일본과 독일입니다. 그러나 동, 서독이 통일된 다음에 경제가 그렇게 어려울 수가 없습니다. 우리 선교사가 지금 그 곳에 가 있잖아요. 저도 그 곳에 가보니까. 그 전 독일이 아니예요. 계속하여 지금 뒤떨어지고 있습니다. 세계를 삼키려고 하던 독일이 경제 2등국으로 물러 앉고 있습니다. 그래도 조용합니다. 침착합니다. 그런 어려움이 어디 있느냐 할 정도로 독일은 슬기롭게 이겨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어려울 때마다 꼭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어려움 속에서 누구를 원망하거나 치우치거나 흔들려서는 안됩니다. 나만, 우리만, 우리집만 이렇게 어렵다는 생각을 하면 안되고 오히려 우리보다 더 큰 어려움을 당하고도 잘 이겨내는 민족을 우리가 본 받아야 할 줄 믿습니다. 특별히 교인들은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살아야 합니다. 어려울수록 정직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려울 때 제일 문제가 사기범이 얼마나 많이 등장을 하는지요. 거짓말해서 나만 살겠다고 한 사람이 천가정을 망치고, 몇백 가정을 망치고, 도망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려울 때 정직해야 합니다. 빛나는 것이지요. 캄캄한데 누구에게나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이지요. 어려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어머니가 없는 두 부자가 하루는 빵을 사다가 먹는데 빵 속에서 금이 나왔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세상에 가난하던 이 집에 금덩어리가 나왔으니 팔자를 고친것이지요. 우리 같으면 그 금을 갖고 싶었지만 "아빠, 빵 주인이 모르고 빵 속에 금이 들어 갔나봐요. 가져다가 드려야지요." "그래, 금을 얼마나 찾겠느냐?" 두 부자는 빵을 들고 빵집으로 갔어요. "아저씨, 빵 속에 금이 들어있었어요. 저희는 빵만 샀지 금을 산게 아니예요." 주인은 기쁜 모습으로 대하며 그 빵집 주인은 굉장한 부자였는데 많은 재산을 물려줄 자식이 없었어요. 그러던중 정직한 사람을 찾았어요. 그는 금덩어리를 여러곳에 넣었어요. 그러나 아무도 금을 다시 가져온 사람은 없었어요. 그런데 가난한 이 두 부자가 가져 왔어요. 그는 기뻐하며 그 많은 재산을 그 두 부자에게 주었고, 잘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수지 맞은 거예요.
어려울수록, 가난할수록, 정직해야 됩니다. 여러분, 내 정직함만 보이면 정직하다는 이 말만 들으면 우리는 이 세상 어디 가서도 살 수 있습니다. 어디서 살든지 내 주변에서 나를 볼 때 신용있는 사람으로 인정할 수 있도록 여러분을 관리해야 합니다. 어려울수록 소망을 가지세요. 좋은 것을 생각하세요. 주님이 함께 하심을 믿으세요. 주님을 바라 보세요. 나 혼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질병 환란을 당할지라도 주님은 내 곁에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 나의 친구 아멘. 아멘. 예수 나의 사랑 아멘. 아멘. 예수 나의 기쁨 아멘. 아멘♪ 예수가 나의 기쁨이 되십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십니다.
저의 친구 목사님 가운데 이명중 목사님이 계신데 이 목사님은 25년전에 해군 군목으로 군에 입대했어요. 군대가 다 어렵지만 특히 해병대는 훈련이 어렵습니다. 굉장히 어렵습니다. 하루는 팬티만 입고 집합하더래요. 군에는 그런일이 많습니다. 이 목사님이 팬티를 찾으니 팬티가 없는 거예요. 누가 가져간 거예요. 군에는 없는 것이 많아요. 자기 것이 없어지면 다른 사람것을 훔쳐가고, 또 다른 사람이 가져가고 해서 없는 일이 많아요. 모자도 없는 일이 많아요. 누가 가져가면 어떻게 하느냐 하면 남의 중대에 가서 누가 화장실에 앉아 있으면 앉아 있는 사람의 모자를 벗겨오는 거예요. 앉아서 볼일을 보는 중이라 따라 올수도 없는 거예요. 그러면 이것이 자꾸 넘어가는 거예요. 없으면 안되니까요. 이 목사님은 자기의 것이 없어졌지만 다른 것을 가져올 수가 없어서 바지만 입고 집합했어요. 조교가 왔는데 모두가 팬티만 입고 서 있는데 혼자 바지를 입고 있으니까 온갖 욕을 하면서 발로 배를 차고 개 잡듯이 두드려 패더라는 거예요. 군목이나 군의관이나 법무관도 들어와 있지만 훈련은 같이 받아야 하는 거예요. 목사님을 마구 때리는 거예요.
그리고 중대장한테 불려 갔어요. 팬티만 입으라고 했는데 너는 왜 바지를 입었느냐? 군은 복종인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느냐 하는 거예요. 목사님이 대답합니다. "저는 목사입니다. 저는 제가 잃었다고 훔칠수가 없습니다. 제 것은 누가 가져가 버렸습니다." 중대장이 보고는 이 분은 진짜 목사님이시다. 해서 그 이후로 군생활을 아주 잘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그 목사님을 믿어주는 거예요. 입던, 안 입던, 조금 어렵다고 해서 남의 것을 훔치고 하면... 믿는 사람에게 와서 스톱되어야지 계속 이어지면 이 사회가 어떻게 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다 훔쳐도 내게 오면 그 일이 끝나고 다 거짓말해도 내게 오면 거짓말이 끝나야 되는 것입니다. 다 불의하고, 다 바람 피워도 내게 오면 바람이 끝나야지 계속 동남풍이 진행해서야 되겠느냐 하는 거예요.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남의 나라에서도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었는데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이 안 계시는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바다에서도 함께 하시고, 산에서도, 들에서도, 전쟁 중에서도 함께 하시고, 환란을 당할 때도 기근을 당할때도 만군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데 우리는 풍랑이 일지라도 치우치지 말고 주님을 기다리고 주님을 바라보고 걸어오시는 주님을 맞이하고, 주님과 함께 험한 세상을 승리하는 걸어가는 성도 되시기를 바랍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믿고, "주여, 나로 물 위로 걸어오라 하소서" 주님을 바라보고 물위를 걸어 갔습니다. 기독교는 철학적인 종교가 아닙니다. 수양의 종교도 아닙니다. 감상의 종교도 아닙니다. 자기 완성을 위해 힘쓰는 도의 종교가 아닙니다. 기의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요, 생명의 종교요, 구원의 종교입니다. 없는데서 있게 하시는 창조의 종교요, 죽은자도 살리시는 생명의 주님이신 줄로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바다라고 해서, 산이라고 해서 못 건너는 것이 아닙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우리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능력을 우리는 의지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 땅을 떠날 때 말씀하셨어요. 너희는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누가복음에 보면 너희는 귀신을 쫓아내며 뱀을 집으며, 병든자를 고치며, 복음을 증거하며, 하나님과 함꼐 하는 주님과 함께 하듯이 오늘 우리와 함께 하셔서 능력있는 모든 것을 다스리고 보존하는 능력있는 주의 자녀가 된 줄 믿습니다.
베드로는 주님과 함께 물위를 걸어가다가 오늘 본문에 보면 물에 빠졌다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가 예수를 평생 잘 믿으면 좋겠지요. 그런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사람은 다 세상을 사랑하고, 원치 아니하는 길을 걸어가고,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고, 실수하고,범죄하고, 넘어지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교회를 사랑하다가도 뒤로하고, 주의 종을 믿다가도 불평 불만하고, 이것이 사람이예요. 예수님의 제자들도 다 주님을 저 버렸구요. 배반했구요. 욕하구요, 물에 빠지기도 하구요, 실수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주님은 이러한 우리를 사랑하시고, 끝까지 버리지 아니하시고, 용서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인간은 모두가 약점이 있습니다. 결심하지만 결심대로 살지 못하고, 서원하지만 서원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세상을 바라보면 빠지지만은 세상을 늘 바라봅니다. 세상을 사랑합니다. 자기를 믿고 자기를 의지합니다. 사람을 믿지 말라고 했는데 사람을 철썩같이 믿다가 어려움을 당합니다. 물질을 사랑하고, 쾌락을 사랑하고, 권력을 의지하고, 죄에 타협하는 것이 우리 인간인 것입니다. 이러한 연약한 우리 인간을 주님은 언제나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하시고, 한 번 죄 지었다고 해서 나를 죄인으로 보지 아니하세요. 어떤 사람도 주님은 장점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하셔서 위대한 베드로처럼 하나님이 들어 쓰시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교회와 멀어지면 늘 넘어지지요. 기도하다가 기도의 힘이 떨어지면 우리의 마음이 무너지고 연약해 질때가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우리를 다시 일으키시는 주님이십니다. 어떤 목사님이 강단에서 설교하시다가 종이를 교인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여러분, 이 곳에 무엇이 보입니까? 점이 보입니다. 많은 사람은 종이를 볼 때 점을 봅니다. 주님은 우리를 그렇게 보지 않아요. 한 사람에게 약점이 있으면 그것만을 봅니다. 실수가 있으면 실수를 그 전체의 인격으로 보아서 매장을 하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주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볼 때 깨끗한 종이로 보시고, 이 점을 가지고 주님은 훌륭한 스케치를 해서 멋진 작품으로 만들어 내시는 주님이십니다.
부모의 눈도 그래요. 부모는 자녀가 잘못하거나 실수를 해도 이만한 잘못 없는 아이가 어디 있느냐고 부모는 사랑의 눈으로 보기 때문에 크게 보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사랑의 주님이예요. 세상은 한가지 점만 있으면 그것 때문에 망해요. 살 수 없어요. 일할 수 없어요. 어디가서든지 버림받아요. 그러나 주님은 여러분의 약점을 적게 봅니다. 아주 커다란 종이에 조그마한 점에 지나지 않습니다.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남들처럼 무슨 부족함이 있고, 배우지 못한 것이 있고, 실수가 있고, 잘못이 있을지라도 주님은 그로 통하여 여러분을 들어 쓰시고, 더 위대한... 오늘 내게 이 문제가 있으므로 하나님은 그 방면을 통하여 힘을 주셔서 더 큰 일을 하게 하실 줄 믿습니다.
제가 어제 신문을 보니까 미국의 기업가운데 금년에 600대 기업중에 대학을 못 들어가고 대학 공부를 안 했는데도 미국 600대 재벌 기업에 들어간 분들이 많이 있더라구요. 지금은 능력만 있으면 또 요즈음 벤처라는 것이 있잖아요. 꼭 일등 해서만이 아닙니다. 어려움을 이길 수 있는 신앙과 의지만 있으면 얼마든지... 우리나라도 아니고 미국에서 대학도 안 나오고, 몇 만명을 거느릴 수 있어요? 그러나 사람이 부족한 줄 알고, 더 열심히 하는 사람이 계속하여 발전할 수 있는 거예요.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약한 자를 들어 강한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능력의 주님이신줄 믿습니다. 사람은 다 부족함이 있습니다.
저는 이번 올림픽 게임 가운데 배구와 농구를 자주 보았어요. 우리 배구가 얼마나 잘하는지요. 남녀 배구 팀들이 러시아를 이기구요, 대단해요. 러시아가 세계 챔피언이었거든요. 미국하고도 이기구요, 얼마나 신나는지요. 그런데 배구, 농구 선수들 보면 배구는 6명이 하는데요. 그냥 코트가 꽉 찹니다. 공이 넘어오면 2m의 장대같은 자들이 앞을 가로막으면 공이 날아올데가 없습니다. 빈틈없이 막아냅니다. 그래도 스파이크하면 그대로 꼿이거든요. 너무너무 신나요. 배구, 농구를 볼 때 완벽한 방어를 해도 약점이 있는 것을 적이 아는 거예요. 만약에 미스를 하지않고, 3시간을 공이 왔다갔다한다고 생각해 봐요. 누가 그것을 보겠어요? 몸서리나서 그것을 보러 안 가지요. 약점에, 빈자리에 공이 꼿이는 것을 볼때에 신나는 것이지요.
사람이 약점이 있는 것, 그것이 아름다움이에요. 아내가 약점이 없어봐요. 그게 귀신이지 사람이에요? 약점 하나 있다고 그것을 들춰내고 그러면 안됩니다 남편에게 약점이 있어야지요. 약점이 없는 사람은 천사지 사람이 아니예요. 오늘 우리 모든 성도들이 주님의 눈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물에 빠져도 주님을 다시 붙잡으면 일어설 수 있습니다. 나는 왜 이러는지 몰라. 나는 왜 이렇게 약한지 몰라. 다 그래요. 이러한 연약한 우리를 주님은 오늘도 사랑하시고,. 기도하면 빨리 손잡아 주셔서 물에 빠진 우리를 건져 주실 줄 믿습니다.
시편 107편에 사람이 흑암에 거하고,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사람이 곤고와 고통을 당하는 것은 지존자의 뜻을 멸시하고, 하나님의 뜻을 떠나서 그런 어려움이 왔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떠날 때 언제나 물에 빠지는 것을 알고 시편 51편에 나오는 다윗처럼, 베드로처럼 하나님앞에 눈물로 울부짖고, 회개할 때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건져 주실줄 믿습니다. 답답할 때 골프치면 좋지요. 그러나 골프쳐서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골프치는 것은 대체로 6시간 정도 걸립니다. 차타고 가야지요, 4시간 정도 돌아야지요, 목욕도 해야지요. 그리고 밥먹고 오면 8시간 잡아야 됩니다. 그렇다고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 되나요? 조금 좋지요. 안 나가는 것 보다 낫지요. 그러나 30분만 찬송불러봐요. 성령충만. 일나요. 일... 20분만 기도해 봐요. 그건 죽어도 안하고, 가방만 메고 가려고 하면 안됩니다.
성령 충만해서 물에 빠진 우리 자신부터 일어나기 위해서 기도의 손을 붙잡고 찬송의 입을 열고, 천국을 향하여 주님을 향하여 마음을 열기 바랍니다. 소망을 가지십시오. 우리는 어려워도 주님이 함께 하시면 분명히 이길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저는 책을 볼 때 타이틀이 뭐냐 하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그런데 어떤 책을 보면 목사님인데도 타이틀이 좋지 않을때가 있어요. 얼마전에 어떤 목사님 책을 보니까 제목이 '고독한 나그네 목회'. 교인들도 고독해 하고, 낙심이 많은데 목사 마저 '고독한 나그네 목회'라. 그렇게 해서야 어떻게 목회가 되겠어요. 하숙생인가 나그네인가... 제목을 고독한 나그네와 함께 하시는 주님. 이렇게 하든가. 무슨 소망이 있어야지요. 무슨 염세주의적 이런 말을 쓰는 것이 좋은게 아니예요. 물에 빠진 인생, 허우적 거리는 기업, 우리는 주님을 붙잡는 목회를, 소망있는 말을 해야 합니다. 어려울수록 그런 소망있는 용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갈릴리 바다 풍랑 가운데 찾아오시는 주님. 환란중에 함게 하시는 주님. 나의 길을 인도하시는 선한 목자. 할렐루야. 남은 여생 우리에게 어떤 어려움이 올지라도 주님과 함께 이 풍랑 이겨내고, 또다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는 성도 되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아는 예수
마 14:22-33 / 김창인 목사
I. 함께 하시는 예수(22-25절)
"내가 예수님을 안다"고 할 때 우리는 두 가지 면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내가 어떤 사람을 안다고 할 때 그 사람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의 설명을 듣고 배워서 아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그런가하면 그 사람의 전기를 읽고 그 사람이 어디서 나고, 어떻게 자랐고, 무엇을 배웠고, 또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등 책을 통해서 아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나 혼자만 알고 있을 뿐이요 친분 관계는 조금도 없습니다. 안다고 하는 둘째의 뜻은 함께 만났고 함께 살아서 경험하고 체험해서 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는 것은 직접 부딪쳐서 아는 것이기 때문에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친히 알 수가 있을 뿐 아니라 이런 경우에는 깊은 친분 관계가 맺어집니다. 그래서 만나게 되면 안부도 전하게 되고 나의 일을 같이 의논도 하게 되고, 염려도 하게 되고 서로 돕게 됩니다. 그러나 배워서 아는 경우는 돕는다는 것은 생각도 못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아는 예수"를 들어서 알고 배워서 아는 예수가 아닌, 삶 속에서 만나고 직접 체험해서 안다고 하는 뜻에서 정한 제목입니다. 그러므로 바꿔 말하면 "내가 만난 예수"라는 말이 되겠습니다. 그러면 내가 아는 예수, 내가 체험한 예수는 어떤 분이십니까? 22절부터 25절까지의 말씀에서 보는 대로 "함께 하시는 예수님"입니다.
1) 뒷일을 함께 하십니다(22절)
첫째로는 "예수께서 함께 하신다, 즉 바꿔 말하면 뒷일을 함께 해주신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바로 그 앞에 보면 너무너무 은혜로운 장면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한번은 큰 잔치를 열었는데, 그 잔치는 말씀의 잔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남자만 오천여 명이었으니까 여자와 아이를 합하면 적어도 만 명은 넘는 큰 무리가 모였습니다. 장소는 벳세다 광야입니다. 얼마 동안 모였느냐 하면, 3일 동안이나 모였습니다. 예수님을 강사로 모시고 얼마나 큰 말씀의 잔치를 열었는지 그 사람들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집에 돌아갈 것도 잊어버리고, 또 먹을 것이 떨어진 것도 잊어버리고 말씀에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다가 집회가 끝났습니다. 집회가 끝나서 돌아가야 되는데 주님은 멀리서 온 사람들이 돌아가다가 시장해서 쓰러질 것까지 걱정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부분하심을 받들어 거기서 찾아낸 것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였습니다. 주님이 축복하시니 그 무리가 다 먹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았습니다. 그 동안 수고 많이 한 제자들에게는 한 바구니씩 나누어 주셨습니다. 이런 축복의 잔치, 은혜의 잔치가 벌어진 끝입니다. 바로 이 일이 끝난 후의 장면이 방금 읽어 드린 22절의 말씀입니다. 축복을 나누어 먹고 누렸으니 얼마나 귀합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그 잔치가 끝나자마자 제자들을 재촉해서 건너편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무리를 다 보내고 그 무리가 다 떠나나 다음에 가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끝까지 함께 하시고 뒷일까지 돌보아 주겠다는 뜻입니다.
또 이 말은 크게 은혜를 받았으면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어디로 돌아가느냐? 일터로 가라는 것입니다. 직장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았으면 직장으로 가고, 은혜를 받았으면 가정으로 가야합니다. 은혜 받고 다른 곳으로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은혜 받은 곳은 이곳이지만 일하는 일터로 자기가 처한 곳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오늘날 우리들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은혜 받는 곳은 바로 이 모임, 이 자리입니다 그러나 이 자리가 일터는 아닙니다. 여기서 은혜를 받고 새 힘을 받은 다음에는 여러분의 일터로 돌아가야 합니다. 여러분의 일터는 가정에 있습니다. 여러분의 일터는 직장에 있습니다. 거기 가서 빛이 되고 소금이 되고, 거기 가서 전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의 원리이고, 예수님이 오늘 가르쳐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일터가 있는 줄 잘못 아는 교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여전도회가 일터인 줄 알고, 남전도회가 일터인 줄로 알고, 청년회가 일터인 줄로 착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거기 모여서 은혜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영적 실력을 키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가서 학생들은 학교에 가서, 청년들은 직장에 가서, 주부들은 가정에 돌아가서, 거기 가서 교인 노릇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일터인 줄로 잘못 아니까 모여서 엉뚱한 짓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자들에게는 바다 저 건너편에 너희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고 일감이 있으니 그곳에 가서 일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셔서 깨끗이 마무리를 해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끝까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뒷일을 돌보아 주신 예수님이십니다.
2) 기도로 함께 하십니다(23절)
다음에는 기도로 함께 하셨습니다.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누가복음 22장을 보면, 한번은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청구서 하나가 하나님께 들어왔습니다. 그 청구서를 보니 마귀란 놈이 베드로를 내 달라고 했습니다. 왜 그러느냐고 하니까 베드로가 제가 잘 믿는다고 뻐기고 뽐내는데 밀 까부르듯 키질을 하여 탁 쳐내버리면 자기가 안 떨어져 나갈 재간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 베드로를 내 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셔야 어떻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이런 어려운 상황에 놓였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야 사단이 너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를 청구하였으나 내가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 위해 기도 했나니 네가 돌이킨 후에 형제를 굳게 하라"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까지 한 것은 마귀가 까부른 것입니다. 그래도 쳐내지 못하고 떨어져 나가지 아니한 것은 뒤에서 예수님이 기도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날 위해 기도해 준다는 것은 대단히 복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다 보내신 다음에 홀로 산으로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누구를 위해 기도하신 것입니까? 은혜 받고 간 사람들, 세상으로 일터를 찾아 일하러 간 사람들, 새 일감이 기다리는 곳으로 찾아간 제자들을 위해서 주님께서 기도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기도함으로 일하러 간 모든 백성들과 함께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여러분들을 위해 이름을 적어 놓고 기도할 때마다 기도한다면 나도 그 가정에 참여하고 함께 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주님이 나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는 것은 기도로써 나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오늘도 내일도 이 세상 떠날 때까지 주님께서는 기도로 함께 해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참여로 함께 하십니다(24-25절)
다음에는 참여로 함께 하십니다. 바꿔 말하면 직접 함께 하신다는 말입니다.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슬리므로 물결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더라.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이 말씀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참 은혜가 됩니다. 배가 육지에서 수리나 떠나서 바다 한 가운데로 갔습니다. 그런데 그 시간이 제 4경이었습니다. 4경이란 말은 새벽 3시부터 6시까지입니다. 성경에 보면 밤을 사경으로 나눕니다. 저녁 해질 때를 6시로 계산해서 첫 3시간을 1경, 또 그 후의 3시간을 2경, 그 후의 3시간을 3경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제 4경은 새벽 3시부터 6시 사이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다 보내고 산으로 올라가셨는데 새벽 3시가 넘도록 기도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을 보내고 사람들을 흩어 보낼 때가 해가 저물기 전이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적어도 10시간은 기도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한 가지 이상한 사건이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가라고 하는 곳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풍랑을 만났습니다. 바다에 풍랑이 일어났기 때문에 밤새도록 갔는데도 수리밖에 가지 못한 것입니다. 풍랑이 얼마나 심했는지 밤이 맞도록 갔는데도 갈릴리 바다를 건너지 못한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고, 주님이 시키는 대로 하고, 가르는 곳으로 갔는데도 앞으로 나가기가 그렇게 어려울 정도로 심한 풍랑을 만난 것입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데, 내 사업을 해 나가는데, 내 가정생활을 해 나가는데 고난과 시련이 닥쳐왔다는 뜻입니다. 그것도 주님의 말씀대로 살고, 주님께서 시키는 대로 하고, 제법 봉사를 한다고 하는데도 그럴 때가 있습니다. 그러니 이런 고난이 닥쳐오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것을 아셨습니다. 다 아시면서도 가만히 내버려두신 것입니다. 그런데 끝까지 그냥 두지는 않았습니다. 또 그냥 기도만 하고 계시지도 않았습니다. 직접 찾아오셨습니다.
그러면 왜 주님께서 그 고난을 보시고 알면서도 내버려두셨습니까? 그것은 조금 전에도 설명을 드렸습니다만 갈릴리 바다로 가기 전에 벳세다 들판에서 엄청난 은혜의 체험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갈릴리 바다로 장면을 옮겨가면서 거기서는 예수님의 새로운 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것을 볼 때 예수님께서 가만 내버려두신 것입니다. 그래서 풍랑 속에서 예수님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고난을 한참 당하고있을 때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내 가정이 고난 당하는 것을 모르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또 그것을 내버려두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이 직접 오셔서 손댈 때까지 주님의 계획이 계셔서, 섭리가 계셔서, 그 때까지 내버려두시는 것입니다. 그 때는 주님이 오실 때 인줄로, 직접 나와 함께 하시는 때 인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끝까지 함께 하시고, 기도로 함께 하시고, 참여함으로 직접 함께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II. 도와주시는 예수님(26-32절)
1) 말씀으로 도와주십니다.(26-27절)
첫째로 말씀으로 돕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말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구경만 하고 있지 않습니다. 직접 도우시는 예수님입니다. 친히 도우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제자들이 그 바다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지르거늘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예수님께서는 말씀 한마디로 얼마나 큰 도움을 베풀어주시는지 모릅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어떤 사업을 해 나가다가 어려움에 부딪혀 고비를 넘기느냐 못 넘기느냐 하는 위기를 만날 때 권세 높은 사람이 한마디만 해 주면 문제가 해결됩니다. 그것이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모릅니다. 권세 높은 사람의 말 한마디가 이렇게 큰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 한 마디 해 주시면 얼마나 큰 도움이 되겠습니까?
제자들은 지금 안팎으로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집채같은 큰 풍랑이 일어나서 감당해내지 못하고 죽을 것만 같습니다. 밖으로부터 위험과 거기서 느끼는 공포가 있었습니다. 그런가하면 큰 물결 속에서 이상한 물체가 나타났는데 우리가 흔히 쓰는 말로 유령인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무서워 소리를 지르며 비명을 질렀습니다. 얼마나 급하면 비명을 질렀겠습니까? 이럴 때 주님은 즉시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하셨습니다. 주님의 그 한마디 말씀에 제자들의 공포가 다 사라졌습니다. 주님의 말씀 한마디가 그렇게 불안해 떨던 제자들의 마음에 큰 평안을 주셨습니다.
2) 구원으로 도와 주십니다(28-31절)
다음에는 구원으로 도와 주십니다.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 대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고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28-32절) "내니 두려워 말라"하시니 베드로가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래서 "그럼 주님 나에게 오라고 명령만 내리십시오. 그러면 뛰어들겠습니다" 하는 자세였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신앙의 좋은 면입니다. 풍랑이 있는 바다에서는 가장 안전한 곳이 배입니다. 배는 안전하고 바다는 위험한 것입니다. 풍랑이 있는 바다에서는 사람이 배 안에 있는 것이 가장 합리적입니다. 아무리 수용을 잘 해도 바다에 뛰어드는 것은 불합리한 일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이 오라는 명령 한마디에 합리로 뛰어들고 안전에서 위험으로 듭니다. 바로 이것이 믿음입니다.
다음에는 실패의 면을 본문을 통해서 가르쳐 줍니다. "오라"하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뛰어들었습니다. 어느 정도 걸어갑니다. 얼마나 걸어갔습니까? 주님이 가까이 계셨다면 아무리 캄캄한 바다 위라 할지라도 알아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잘 알아보지 못할 정도의 먼 거리에 계셨습니다. 그러니까 주님 앞으로 걸어간 것입니다. 가다보니 풍랑이 집채같이 닥치는데 무서워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앞을 가로막은 풍랑 때문에 풍랑 뒤에 계시는 예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우리가 믿음에 실패하는 면이 이것입니다. 내게 어려운 고난과 고민, 좌절, 혹은 불행이 닥쳐올 때 그것과 씨름하고 그것만 아파하다가 그 풍랑 속에서 숨어 역사 하시는 예수님을 놓쳐버리는 때가 있습니다. 그 때가 내 믿음이 가라앉는 때입니다. 예수님을 놓쳐버리면 죽을 수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풍랑 속에서도 반드시 영접할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풍랑 속에서도 나를 위해 역사하고 계시는데 그 예수님을 내가 놓쳤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물에 빠져 들어갔습니다. 이제는 죽게 되었습니다. 믿는 사람이 주님을 놓쳐 버리면 "죽어, 죽어"하는 일만 생깁니다. 그럴 때에 살 길이 무엇입니까? 본문을 보면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짤막한 기도 한마디입니다. 즉 기도가 나를 살립니다.
기도할 때가 바로 주님의 손에 붙잡히는 순간입니다. 그 순간 주님께서 얼마나 급한지 즉시 손을 내밀어 잡아주셨습니다. 급하면 급하게 응답이 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삶을 다시 얻은 것입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죽음의 두려움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은 내가 이런 일을 당했을 때 구경만 하고, 말만하신 것이 아니라 직접 손을 내밀어 개입하사 나를 구원하심으로 도와주셨다"라고 어디 가서든지 간증할 수 있는 간증거리를 갖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도 성경을 배우려고만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믿음은 이론이 아닙니다. 믿음은 지식이 아닙니다. 믿음은 체험이요 삶입니다. 여러분들도 모두 이런 체험적인 신앙을 가지고 또 어디가나 간증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깨닫도록 도와주십니다(32절)
그 다음에는 깨달음의 도움입니다.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느니라"(31절-32절). 여기 보면 참 재미있는 말씀이 나옵니다. 배는 여기 있고 주님은 저기 있어서 분간을 못할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니 베드로가 바다에 내리자 마가 풍덩 빠진 것입니다. 얼마쯤 걸어가다가 빠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붙잡아 배에까지 왔습니다. 주님과 함께 걸어서 손을 잡고 왔습니다. 주님의 손에 붙잡히니 바다도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 풍랑, 즉 고난 위에서도 살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배에 함께 오르니 풍랑이 잔잔해지더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흔들리고, 정말 몸둘 바를 모르던 배가, 바다가 조용해지니 평안해지더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배에 오르시매 평안해졌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이 내 마음에 들어오면 불안에 또 혹은 좌절에 떨던 내 마음이 평안해지고, 시험이 있던 내 가정에 주님이 들어오게 되면 평안해지고, 내 직장에 내 사업터에 주님이 들어와서 주님이 함께 하시면 그 사업에 평안이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주님의 제자들이 깨달았습니다. 주님의 손에 붙들리니까 이렇게 재미있고, 주님의 손에 붙들리니까 정말 신기하고, 주님이 들어오시니 평안이 이루어지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또 풍랑을 제어할 능력도 있으셨지만 우리들로 하여금 새 체험을 하게 하고 우리를 새 신앙의 차원으로 인도해 주려고 주님이 이런 계획을 하셨다는 새로운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깨닫지 못하고 불안에 떨고 그 고난만 아파하던 제자들이 주님을 통해서 이런 깨달음을 받은 것은 얼마나 큰 도움인지 모릅니다. 내가 모르고 있을 때 깨우쳐 주는 것은 큰 도움이 됩니다. 여러분들에게도 주님의 계획을 모르고 불안해 할 때 주님께서 그때 그때마다 새로운 체험으로 깨닫게 해 주시는 도움이 있기를 바랍니다.
III. 키워주시는 예수(33절)
1) 예배하는 사람으로 키우십니다(33상반절)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여기 절한다는 말의 헬라어 원문은 프로스퀴네오(προσκυνεω)입니다. 이 프로스퀴네오라는 말은 우리 성경에는 세 가지로 번역되었습니다. 첫째는 절한다. 둘째는 경배한다. 셋째는 예배한다고 번역을 했는데, 이 말은 특히 예배한다는 말로 많이 쓰여지는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절을 한다는 것은 실감이 잘 안 납니다. 예수님이 지금 보이는 분으로 안 계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의 피부에 와 닿는 것은 예수님께 예배한다는 말입니다.
제자들은 그 때가 예수님과 함께 배를 타고 11시 대예배로 작정하고 드리는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누가 억지로 참여하자니까 끌려와서 참여하는 예배도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은 그 바다에서 주님을 새롭게 만났고, 무섭고 놀라운 은혜를 받고 저마다가 감격스러워서 누가 시작하자는 말도 없이 하나같이 예배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이것은 돈을 받고 한 것이 아닙니다. 누가 시켜서 마지못해 한 것도 아닙니다. 은혜 받은 사람은 반드시 예배하기 마련입니다. 그것도 기쁨으로 합니다. 이런 사람이 된 것은 주님께서 키워주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항상 이렇게 예배하는 사람으로 주님이 늘 키워주실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아멘의 사람으로 키우십니다(33중반절)
다음에는 아멘의 사람으로 키웁니다. "가로되 진실로"라고 했습니다. 유대 사람들은 진실이란 말과 믿음이란 말을 따로 쓰지 아니합니다. 아멘이란 말은 "믿는다, 진실하다"라는 뜻으로 같이 씁니다. 본문에는 유대 사람들이 쓰는 히브리말은 아닙니다. 본문은 물론 알레또스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믿는다는 것과 진실하다는 말을 하나로 보았습니다. 예를 들면 예수를 믿는다는 것과 진실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진실하지 못하다면 그 믿음은 가짜라는 것입니다. 진실과 믿음이 따로 있을 때 그것은 믿음도 아니고 진실도 아닙니다. 믿음의 별명이 진실이고 진실의 별명이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 "진실로"라는 말은 "내가 믿습니다"라는 말로 고쳐해도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절하며 "주여 내가 믿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믿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이 자기네들이 잘나서 만든 것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이 키워주시니 된 것입니다. 이처럼 지금 우리의 이만한 믿음도 예수님께서 키워주신 것입니다.
3) 고백하는 사람으로 키우십니다(33하반절).
다음에는 고백하는 사람으로 키우십니다.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여러분 사람의 아들은 사람입니다. 똑 같은 사람입니다. 돼지의 아들은 돼지이고, 개의 아들을 개입니다. 사람이 아들을 낳으면 사람입니다. 즉 똑 같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것은 하나님이다 하는 말입니다. 제자들이 지금까지 그런 고백을 한 적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알고 체험한 후에는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열 두 사람이 하나같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가장 정확하게 보고 체험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을 누가 키워주었습니까? 혼자 컸습니까? 주님이 키워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이런 체험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도 이렇게 키워주실 줄로 믿습니다.
바람이 거슬릴 때
마 14:22-33 / 박조준 목사
여러분께서 기도로 도와 주셔서 지난 한 달 동안 구라파와 미주 전도여행을 무사히 끝마치고 돌아오게 된 것을 감사합니다. 구라파, 스웨덴, 스톡홀름 집회를 인도하고 서독에 있는 프랑크 푸르트 집회를 인도한 후 대서양을 건너 와서 뉴저지 노회 연합 집회를 인도했습니다. 그리고 시애틀과 포틀랜드 집회를 끝내고 돌아오려는데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이민 교회 중에 제일 큰 교회 중의 하나인 로스엔젤레스에 있는 동양 선교교회에서 집회요청을 했습니다. 보통 미국이나 구라파 집회는 주초에 대개 직장에 나가기 때문에 주말에 하는데 주말에 하게 되면 제가 일주일 을 더 체류해야 하기 때문에 할 수가 없다고 하였더니 주초에라도 해 주면 좋겠다고 하여 모험 삼아 주초에 월, 화, 수 사흘 동안 집회를 인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와 주시고 여러분께서 기도해 주셔서 주초 집회는 어려운데도 그 교회 창립 19 년 사상 최초의 주초 집회였는데도 주말 집회보다 오히려 더 많은 분이 모이고 집회가 크게 잘 돼서 교회가 참 기뻐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기도로 도와주신 덕분인 줄로 믿 습니다.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복음을 전하는 일이 얼마나 바빴던지 쉴 시간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형편을 보아서 한적한 곳에 가서 쉬려고 하게 되면 그곳까지 사람들 이 따라오고, 어떤 때는 예수님의 일행보다 사람들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을 때도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한번은 예수님이 너무 피곤해서 조용한 곳으로 배를 타고 가는데 사람들이 그것 을 보고 걸어서 그곳까지 와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조금도 짜증스러운 표정이나 귀찮다는 마음없이 이 무리를 보실 때 목자 없는 양 같 이 불쌍히 여겨서 여러 가지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날은 저물어 가는데 빈들에서 사먹을 것 도 없으니 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먹게 하자고 제자들은 예수님께 말씀 드렸지만 예수님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그 당시 유대 민족은 로마의 식민지로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어려운 형 편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농사를 지어서 곡식을 생산하지만 좋은 곡식은 다 로마로 가져가고 유대 사람들은 거의 연명이나 할 정도로 어려운 가운데 있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그 민족을 보실 때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문자 그대로 목자 없는 양처럼 처량하기 이를 데 없이 보셨습니다.예수님은 자기 민족을 볼 때 가슴이 찢어지게 아프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나오사 그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 쌍히 여겼다고 또 다른 복음에 보면 민망히 여겼다고 했습니다. 마침 어떤 소년이 자기가 먹으려고 준비해 가지고 왔던 보리떡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가 있 는 것을 알고 이 사실을 말씀 드렸더니 그 모든 사람들을 50명씩 혹은 100명씩 떼를 지어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신 다음에 주님이 이 떡을 가지고 나누어 주시고 생선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다 배부르게 먹고 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두 바구니에 가득 차게 거두었고 그때 먹은 사람 이 남자 장정만 오천 명이 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어린애들과 여자들의 숫자를 합하면 아마 만 명이 훨씬 넘었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 십시오. 보리떡 다섯 덩이 생선 두 마리를 가지고 만 명이 넘는 사람이 배부르게 먹고도 열두 바구니가 남았다고 하니 이것은 문자 그대로 기적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에게 무엇이 꼭 필요하다고 인정 될 때는 기적을 통해서라도 그들의 필요를 채 워 주셨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에 예수님은 즉시 제자들을 재촉해서 자기가 사람들을 돌려보낼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사람들이 다 돌아간 후에 기도하시기 위해 산으로 가셨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떡 다섯 덩이와 생선 두 마리를 가지고 오천 명이 먹고도 남게 하는 기적을 볼 때 많은 유대 사람들은 큰 감격을 얻었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왜냐 하면 이런 분을 이 나라 의 왕으로 세우게 되면 이 나라 식량 걱정이 없겠구나 해서 억지로라도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 고까지 했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은 피해서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또 예수님의 제자들 나름대로 만일에 우리 선생님이 이 나라 민족의 왕이 된다고 하면 틀림없 이 우리가 한 자리씩 차지하게 될 것인데 하는 생각으로 마음속이 부풀어 있었습니다. 이것을 알게 되신 예수님은 그들을 멀리 바다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했습니다. 날이 저물어 제자들이 탄 배는 바다 가운데 있게 되었고, 예수님만 산에 홀로 남아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갈릴리 바다 서쪽에는 헐몬산이라는 높은 산이 있는데 그 상상봉에는 사철 눈이 덮 여 있기 때문에 찬바람이 요단 계곡을 타고 내려 불게 되면 갈릴리 바다에는 갑자기 거센 물결 이 일곤 합니다. 이렇게 갈릴리 바다의 폭풍은 갑자기 들이닥치고 맹렬한 것이 그 특징이었습니 다. 오늘 주신 말씀에 바람이 거슬리므로 제자들이 노를 저었다 고 하였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는 갈릴리 바다에서 자란 사람이 여럿 있었 습니다. 어부 출신인 베드로와 안드레 요한과 야고보가 전부 그런 사람들 아닙니까? 그들은 누 구보다도 갈릴리 바다의 형편을 잘 아는 사람이요, 더구나 배를 처리해 나가는 기술도 누구한테 떨어지지 않는다고 자부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힘과 지식, 기술과 경험만 가지고 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얼마나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 때가 마침 밤 사경쯤 되었다고 하였는데 매우 깊은 밤이었습니다. 어두운 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에서 기도하시다가 제자들이 바람 때문에 곤란을 겪고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 리고 바다 위로 걸어서 저희에게 오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이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것을 보고 유령이 나타나게 되었으니 얼마나 무섭고 떨렸겠습니까? 이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 게 되버리고 말았습니다. 저희가 다 예수를 보고 놀랐다고 했습니다. 이때 놀라 무서워 떨고 있 는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안심하라. 나다. 두려워 말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 그 노한 바다 물결이 잔잔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제자들이 왜 무서워했습니까?
이는 저희가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분하여졌 습니다 라고 성경은 말씀했습니다. 우리 사람들은 다 부족하고 약하기 때문에 지난 일들을 잘 잊어버립니다. 더구나 가슴 아팠던 일은 잘 잊어버리지 아니하지마는 좋은 일, 감격스러웠던 일 은 얼마 안 가서 잊어버리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민족을 보세요. 애굽에서 종살이하고 고생하던 것, 무엇으로 어려움을 다 표현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런 가운데 저희가 울고 부르짖어서 하나님이 저희의 눈물을 보시고, 부르 짖음을 들으시고, 그들의 우고를 아셔서 종살이하고 있던 애굽에서부터 하나님의 종 모세를 통 해서 끌어내시지 않았습니까? 이스라엘 민족이 약속의 땅을 향해 나가다가 홍해로 가로막히게 되었습니다. 뒤에는 바로 왕 이 보낸 근위대가 뒤쫓아오고 있었습니다. 이때 이스라엘 자손이 겁에 질려 여호와께 부르짖고 모세를 향해서는 원망을 합니다. 애굽에는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내 이 광야에서 죽게 하십니까? 우리가 뭐라 고 했습니까? 우리를 버려 두라고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애굽 사 람을 섬기는 것이 이 광야에서 이렇게 나와 죽는 것보다는 솔직히 낫지 않습니까? 하면서 모세 를 향하여 원망하고 대들게 되었습니다. 그때 모세는 백성들을 향해서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 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못할 것이로다. 하나님이 너희를 위해서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 라. 그리고 모세는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 때 큰 동풍이 밤새 도록 불어서 바닷물이 물러가고 물이 갈라져서 바다가 마른 땅이 되고 이스라엘 백성이 바다 가 운데 육지로 걸어가게 되었습니다. 그 좌우에는 물이 벽이 되어 높이 서 있었습니다. 온 이스라 엘이 무사히 홍해를 육지처럼 건너게 되니 뒤에서는 바로 왕의 병력이 뒤쫓아옵니다. 그 때 모 세가 다시 손을 들어 바다 위로 내밀자 하나님의 말씀대로 높은 벽을 이루고 있던 바닷물이 다 시 합치는데 좇고 있던 애굽의 바로 왕 군대는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바닷물이 다 삼켜 버리 게 되었습니다. 출애굽기 14장 마지막 부분에 보면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베푸신 큰 일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 종 모세를 믿었더라 했습니다. 그리고 15장 에 보면 그 은혜를 행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노래한 대목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다음 16장을 보면 신 광야에 이르렀을 때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말하기를 우리가 애굽 땅 에 고깃간 옆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너 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끌어내서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구나 하면서 모세를 또 원망하 고 시기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바로 이것이 사람입니다. 그처럼 감격해 하고 좋아하던 때가 바로 엊그제였는데 오늘 좀 어렵다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두려워하는 게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바로 그날 저녁에 예수님이 보리떡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로 그 수많은 사람들을 먹이고도 남게 하는 기적을 보고 감격했는데 몇 시간이 지나지 못해서 세찬 바람과 물 결이 밀려온다고 두려워 떨게 된 것입니다. 그 동안에 그들의 마음이 그만 둔해지고 만 것입니 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가 얼마나 크다는 사실을 잊지 않 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가운데 내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하기 어려운 처지에서 고민하는 분 혹 계십니까? 과거에 그와 같은 자리에서도 건져주신 하나님의 도우심을 꼭 기억하시기를 바 랍니다.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에서 여기까지 도와 주셨습니다.이 말씀의 배후에는 지금 여기까 지 도와주신 하나님께서는 장차 거기까지도 도와주시겠다는 약속이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합니 다. 그러므로 과거에 나를 도와주신 하나님을 믿고 감사하는 사람은 지금 어떤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고 해도 두려워하거나 겁내거나 원망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제자들이 왜 무서워했습니까? 예수님과 멀리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 을 바로 보지 못하고 주님이 오시는 것을 유령으로 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까 물위로 걸 어오시는 주님을 보고 제자들이 놀래서 유령이라고 하면서 무서워 소리지를 때 주님께서 자신을 확인시키면서 안심시켰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너무 감격해서 만일 주님이시거든 저를 명해서 물위로 걸어오라 하세요 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주님이 그럼 오라 하니까 베드로가 성큼 배에서 내려서 물위를 걸어서 예수님 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게 되었습니다. 파도가 얼마나 높은지 예수님이 파도 때문에 보이지 아니 할 정도까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보일 때는 예수님을 보고 믿음을 가지고 물위로 걸어 나갈 수 있었던 베드로가 파도 때문에 예수님이 안 보이고 물결만 보이니까 그만 겁이 나고 무서워졌 습니다.
이것 보세요. 무서운 생각이 드는 순간 베드로는 물 속으로 빠져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그렇 습니다. 우리에겐 주님이 멀어지면서 무서워집니다. 겁이 납니다. 무서워지면 물 속으로, 세상 속으로 빠져 들어갑니다. 여러분 언제나 주님 가까이 있어야 합니다. 물결이 높을수록 주님께 더 가까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물결이 높아도 물결 때문에 주님이 안 보여도 물결 뒤에 주님 이 계신 것을 믿기만 하면 절대로 빠지지 않습니다. 주님 가까이 오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무서워하는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무서워서 유령인줄 알 고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유령이 아닌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마가복음 6장 50절에 보 면 저희가 다 예수를 보고 놀랐습니다. 이 때 예수께서 더불어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주신 이 말씀에 보면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주님을 보고 놀라 유 령이라 하여 무서워 소리치는 제자들에게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고 말 씀하셨습니다. 나다. 안심하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어려운 자리에 이를 때 주님은 가까이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두려워서 부르짖을 때 즉 시 대답하십니다. 마음 놓아라,안심하라, 나다, 이 얼마나 우리에게 친근감을 주는 말씀입니까? 여러분 나를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내가 나요 라고 말합니까? 생소한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서 거기에서 여보세요, 누구세요 하는데요 나요 그런 사람 있습니까? 정당하게 자기 이름을 대어 나는 아무개라는 사람이고 무엇을 하는 사람입니다 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가까운 사람에게 전 화하거나 친구가 가까운 친구한테 전화할 때 누구세요? 하면 나다, 나다 하는 말 한 마디로 저 쪽에서 내 친구 누구로구나 하는 것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사랑하는 남편이 집에 있는 아내에게 전화를 합니다. 여보세요 하고 저쪽에서 물어옵니다. 누 구세요 합니다. 나는 누구, 누구요 하고 이름을 댑니까? 그런 남편 있어요? 없어요. 나요 한 마 디로 통합니다. 왜냐 하면 가까이 알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서 나다 하는 말씀 만 해도 아하 예수님이구나 하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예수님과 가까워지는 여러분 되 시기를 바랍니다. 사도행전 9장에 보면 사울이 살기가 등등해서 다메섹 성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숨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해 가지고 대제사장으로부터 다메섹의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해서 예수 믿는 사 람을 만나면 누구든지 결박해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고 다메섹 성으로 가던 중이었습니 다. 갑자기 하늘에서 강한 빛이 비추는 것을 보고 사울이 땅에 엎드렸습니다.
하늘에서 소리가 났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 그 때 사울이 뭐라고 했어요? 주여 누구십니 까 하고 물었습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대답하셨습니다. 분명히 들으세요. 사울더러 사울아 나다 말씀하지 않고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하셨습니다. 왜요 사울이 예수님을 알지 못했 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의 음성을 들을 때 주님으로 알 수 있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이런 복 을 다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요한복음 10장에 보면 나는 선한 목자라 하시면서 내가 내 양을 알 고 내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다 고 하였습니 다. 선한 목자가 되시는 우리 주님께서는 그의 양인 우리의 심령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얼른 찾아 오십니다. 양은 오목한 것을 좋아해서 편안한 자리에 눕다가 그만 발랑 나자빠지게 되면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일어나지를 못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목자는 언제나 양무리를 보살피고 있다가 자빠져서 발버둥치고 고생하는 양을 보게 되 면 얼른 가서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워준다고 합니다. 그렇게 아니할 때 양은 혼자서 자빠져서 네 다리를 허우적거리며 안달하다가 지쳐서 죽어 버리고 만다고 합니다. 사실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지 아니하시면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 습니다. 바다에 익숙하고 파도와 바람을 잘 극복하는 경험 있는 예수님의 제자들로서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경우가 있어서 결국 괴로워 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기술과 힘 그리고 경험의 한계 에 부딪힐 때 어떻게 할 바를 몰라 방황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에 바로 주님께서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바람과 바다를 잔잔하게 해 주십니다. 보십시오. 제자들이 고생하는 모습을 주님이 보시 고 계셨습니다. 나 혼자 고생하는 것 아닙니다. 주님이 내가 고생하는 것 다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밤 사경이면 가장 어두운 때입니다. 가장 곤란한 때입니다. 손들 수밖에 없는 때입니다. 바로 주님 이 찾아오십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가장 필요할 때, 고난의 절정에 이르렀을 때 찾아 오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위 로가 필요합니다. 제가 이번 구미 전도 여행을 하면서 전에 깨닫지 못한 것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10년 전만 하 더라도 우리 한국 사람들이 외국에 가서 이민 생활이 그리 오래지 않았습니다. 이제 만 이십 년 쯤 지내고 나니까 예기치 않았던 문제들이 자꾸 나오는데 많은 고민과 번민에 봉착한 집들을 발 견할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이 교육열로 유명합니다.
그래서 어느 나라에 가도 그 나라에서 가장 우수한 학생들 중에서 우리 한국 학생들이 끼어 있는 것을 보면 자랑스럽기가 이를 데 없습니다. 지난 번 미국에서 고등학생들 영, 수 경시대회가 있었는데 전체 만점 받은 학생이 미국에서 여섯 학 생이 나왔습니다. 그 중 두 학생이 한국 학생이었습니다. 남학생, 여학생 두 학생이 우리 한국 학생이었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수학은 잘 한다고 해도 영어에서 만점 받는 것은 미국 학생 들도 어렵습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 학생들이 인정 받은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 한국 학생들이 공부 잘 하는 것만을 바라며 한국말은 쓰지 않고 영어만을 쓰다보니 한국 학생들이 영어만 하지 한국말은 모릅니다. 여기에 문제들이 자꾸 생깁니다. 이젠 커서 사춘기가 지났습니다. 그런데 부모와 말을 하려고 해도 영어가 통하지 않습니다. 간단한 말은 통하는데 심각한 말이 부모와 통하지 않으니까 이 아이들은 부모와 있으면서도 고아와 비슷합니다. 어느 교회 집사님의 기막힌 하소연을 들었습니다. 한국에서 연세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에 가서 자기 나름대로 소위 엘리트라고 자부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영어 잘 하고, 사업 잘 해서 돈 잘 벌고 고급 차 사고, 좋은 것 쓰고 살며 자기로서는 이민이 성공했다고 생각해 누구한테나 긍지 를 가지고 폼을 내면서 사는 사람들 아이가 고등학교 2학년인데 학교에서 아들이 공부하는 것을 한번 가보고 싶고, 또 아버지가 이렇게 훌륭한 아버지인 것을 다른 학생들에게 한번 보여 주고 싶은 속셈이 있어서 학교를 찾아갔습니다. 아들이 나오더니 조금도 반가운 기색이 없이 한 모퉁 이로 그 아버지를 모시고 가더니 아버지 다시는 오지 마세요. 아버지가 왜 이렇게 초라해 보입 니까? 애들한테 부끄러워요. 이제는 오시지 마세요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이 말을 들은 아버지 가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아 아들 보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여러분 기술, 지식, 경험, 노력 이것이면 다 됩니까? 이것 가지고 안 되는 한 가지가 있습니 다. 만일에 그 아들에게 무엇보다도 믿음을 집어 넣었더라면 아마 그 아들은 아버지를 자랑스럽 게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 없는 눈으로 아버지를 보니 코 납작하고, 눈 조그맣고, 키 작 고 서양 사람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란 말입니다. 초라하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가 슴 아파하는지도 모르고 다시 오지 말라고 말한 것 아닙니까? 여러분 우리의 기술이나 경험이나 지식이 틀렸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의 힘 가지고, 기술 가지고 못하는 한계에 이를 때가 있습니다. 힘이 없고 무서워 떨고 있는 우리에게 힘으로써 함께 해 주시는 위로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주님이 보이지 않아 믿음이 흔들려 물 속으로 빠지기 전에 베드로처럼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그때 주님이 찾아오십 니다. 그리고 즉시 손을 내밀어 붙잡아 건져 주십니다.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을 하는가. 여러분 왜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의심합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우리를 돌보고 인도하 십니다. 잔잔한 때만 아니라 풍랑 속에서도 인도하십니다.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사 랑은 두려움을 내어쫓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사랑을 믿는 사람은 어떤 처지에서도 두려움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모든 것이 합력해서 소원을 이루시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 의 생활 환경에 풍랑이 일어난 갈릴리 바다 같이 불운한 것입니까? 그래서 무서워하고 겁이 난 분은 안 계십니까? 분명히 들으세요. 지금도 주님은 여러분이 당하는 고민을 아시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사랑하십니다. 지금도 버리지 아니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을 하느냐? 이것은 예수님의 능력을 왜 의심합니까? 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바로 몇 시간 전에 예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똑똑히 보았습니다. 보리떡 다섯 덩이와 생선 두 마리로 그렇게 많은 사람을 먹이고도 남은 놀라운 능력을 보았습니 다. 그러나 그 놀라운 능력 행함을 잊어버렸습니다. 우리 가운데 곤란한 환경에서 무서워하는 분이 계십니까? 여러분의 과거를 돌이켜 보세요. 어 려운 환경 가운데서 건져 주셨는데 지금 당하는 어려운 환경에서도 주님이 나를 건져 주시지 않 겠습니까? 주님은 전능하십니다. 우리가 온전히 그 분을 믿기만 하면 무엇이나 우리를 위해서 해 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꼭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위로가 필요합니다. 신령한 눈으로 풍랑 속에서도 주님을 밝히 보실 수 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신령한 귀로 안심하라. 나다 하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시기를 바랍 니다. 그래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담대히 사시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과 함께 우 리 나라에 닥친 모든 어려운 문제가 해결되는 놀라운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인생 풍랑은 누구에게나 어디든지 있습니다
마 14:22-33 / 고일성 목사
미국 스탠포드대학과 마운르 시온병원이 1992년도 공동으로 지난8년 동안 3천5백명의 건강한 남자들을 대상으로 성격과 질병 발병률과의 관계를 연구했다. 영구결과 성질이 급한 사람은 느긋한 사람보다 심장마비 증세가 2-3배 높다는 것이었다. 미국 심장협회의 의견 역시 느긋한 성격을 가지는 것이 혈압이나 핏속의 콜레스테롤 농도를 낮추는데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러한 조급한 성격을 고치려면 웃으며 살 것, 다른 사람의 말을 끝까지 들을 것, 작은 실수를 꼬집지 말 것, 친구에게 전화나 편지를 할 것, 그리고 인생은 미완성임을 항상 생각한다고 했다. 한 사람이 육체의 건강을 유지하는데 있어서도 느긋한 인생관을 가지는 일이 필요하다면 예수를 믿고 그 삶이 거듭나고 영생을 얻는 일에는 더 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다.
나에게 주어진 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풍파를 겪어본 사람들은 풍파없이 산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고 좋은 것인가를 압니다. 병을 얻어 병상에 누워 본 경험을 가진 사람은 건강의 중요성을 그 누구보다도 절실하게 깨닫게 됩니다.
사업에 실패하여 빚쟁이에게 쫓기고 가정의 행복이 깨어져서 큰 풍랑을 겪으며 온갖 처절한 경험을 했던 사람은 안정된 생활이 얼마나 중요하며 평소에 씀씀이를 줄이는 생활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절실히 알게 됩니다.
그러기에 모두가 인생을 큰 굴곡없이 살고자 원하며 평화롭게 살기를 원하고 안정을 원합니다. 가정이 안정되기를 바라며, 사회가 안정 되기를 바라며, 나라가 안정되기를 바라며 세계가 안정되기를 바라는 것은 우리 모두의 한결같은 마음입니다.
때로는 슬픔과 실망의 풍랑이 우리를 무자비하게 내려칩니다. 어떤 때는 정신차릴 여유도 없습니다. 숨이 콱콱마킬 정도로 답답하고 괴롭습니다. 옛부터 인생을 항해와 같다고 했는가? 그러기에 그 어떤 사람도 일생 동안 한번도 인생의 폭풍을 만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 세상은 망망대해요, 인생 여정도 일엽편주와 같아 인생고해(人生苦海)나 인생항로라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인생을 일엽편주로, 세상을 바다로 본다는 것인데 특히 믿음의 성도님들은 인생이라는 조각배를 타고 천국으로 긴 여행을 떠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인생 바다에는 고요하고 순하며 잔잔한 때도 있지만, 때로는 크고 작은 광풍이 일어 풍우대작하고 큰 물결이 일어날 때가 있습니다.
사랑과 미움의 광풍이 있는가 하면 만남과 사별, 이별의 광풍도 있고, 실패와 성공의 광풍도 있습니다. 이런 광풍을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교회적으로, 국가적으로 만나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항해란 결코 쉬운 것은 아닙니다, 순풍에 돛단 듯이 평안히만 갈 수 있다면 무슨 걱정과 근심이 있겠습니까만은 평안히 갈 수 없는 항해이기에 아픔이 있습니다. 때로는 폭풍을 만나고 암초에 걸리고 짙은 안개 때문에 방향을 잃기도 합니다.
우리 인생항해에도 표류하거나 파선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추위와 한발 때문에, 갑자기 쏟아지는 우박 기근과 질병, 전쟁과 홍수와 같은 풍랑이 있습니다. 실직과 실패 승리와 패배 등 개인과 가정적으로 당하는 풍랑도 있습니다.
우리는 풍랑을 알기에 풍랑이 없는 것을 바라고 기대하고 사는 것입니다. 인간이 바라는 욕구 가운데 강한 욕망 중의 하나가 삶의 평안입니다. 혹시 어려움이 있을 때 빨리 어려움이 지나갔으면, 슬픔이 지나갔으면, 아픔과 고통이 빨리 지나갔으면 하고 바라는 평안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고통이 그칠 날이 없습니다. 어제도 겪었고 오늘도 겪을 것이며 내일도 겼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고통이 멈출 날들을 기대하면서 삽니다.
내일은 풍랑이 그치겠지 이렇듯 심한 폭풍이 그치기를 기다리면서 오늘까지 세월에 속아 살아 왔고 또 앞으로도 살아가야 합니다. 그게 인생입니다.
때로는 풍랑이 그치기를 바라다가 풍랑 속에 빠져 죽는 허다한 인생의 씁쓸한 모습을 보기도 합니다. 우리가 당하는 풍랑이 빨리 끝나면 좋겠는데 사실은 인간이 당하는 풍랑 같은 괴로움은 죽음이 올 때까지 그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고달픈 날들이 지나고 나면 언젠가는 쨍하고 볓들날처럼 좋은 날이 오리라 기대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쓰디쓴 날이 다하면 달콤하게 느껴지는 그런 날이 온다고 믿고 기대속에 삽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괴로움이 그칠 날이 없습니다.“인생은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라”했듯이 사실 인생살이란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네 인생살이가 이처럼 풍랑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바람과 풍랑에 묻혀 침몰 당해야만 합니까?.
부새의 시 가운데“저 산넘어 행복이 있다고 말하기에 아! 님따라 갔다가 눈물만 머금고 돌아왔네 저 산너머 행복이 있다고 말 하건만--”사실이 그렇습니다. 마치 바다에 풍랑이 그칠 날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좋은 날을 기대하면서 날마다 귀한 시간만 보내고 있는 것이 인생입니다.
바다에 풍랑이 일듯이 이 세상은 환란이 있습니다. 무엇 하나 소원이 이루어지면 이제 더 이상 바랄 것 없을 것 같지만 어디 그렇습니까? 갈수록 태산이 아닙니까? 걱정이 그칠 날이 없고 문제는 계속되지 않습디까? .
그렇다면 언제까지 풍랑이 그치기를 바라고만 있겠습니까? 기다리면서 산다는 것도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하고 찾아 나설수도 없습니다. 하도 세상이 위험하고 유혹도 많고 시험도 많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넋잃고 가만히 앉아만 있을 수도 없는 노릇아닙니까? .
본문에서는 제자들은 풍랑과 싸우며 애를 태웠습니다.
제자들은 풍랑을 인하여 사경을 헤매고 있었습니다.
도대체 제자들을 이처럼 사경에 이르게한 풍랑은 무엇입니까? 우리 주위에는 많은 사람들이 풍랑을 만났고 지금도 만나고 있으며 앞으로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 풍랑은 어인 일입니까? 저는 이 시간 갈릴리 바다를 여행하는 중에 풍랑을 만난 제자들 일행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던져 주는 몇가지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1. 그 좁은 바다에도 풍랑은 있다는 사실입니다.
갈리리 바다는 큰 바다라기 보다는 호수와 같은 작은 바다입니다. 그래서 갈리리 호수, 게네사렛 호수로 불리워지기도 했습니다.
남북의 길이가 20Km, 바다의 깊은 곳은 200m 정도, 평균 높이 90m, 언덕으로 둘러싸여 있고, 북쪽에는 그 유명한 요단강이 흘러 들러와서는 남쪽으로 흘러 나갑니다.
그런데 이 같은 조그마한 호수에 바람으로 말미암아 물결이 일고, 큰 풍랑이 넘실거렸다는 사실입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 자신의 인생의 삶이 때로는 한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100년을 산다는 학이나 거북이에 비하면 기껏 살아보아야 70, 그것도 강건하면 80뿐이라고 했습니다(시편90편10절). 그것 마저도 수고와 슬픔이요 신속하게 날아가 버립니다. 정말 잠깐입니다.
그 잠깐에 불과한 그것도 손바닥만한 넓이의 인생의 항해나마 고요한 때가 없으니 참으로 가련하기 그지없는 인생들입니다. 자식이 많으면 나뭇가지에 바람잘 날이 없다고 하듯이 파도 없는 날이 없고, 잔잔할 때가 없습니다. 큰 파도와 작은 물결은 매일 계속됩니다.
그 짧은 한 평생을 평안히 살다가 죽는다 할지라도 그짧음이 한이 된다는데 그 짧디 짧은 기간이나마 가난과 질병과 이별과 고독과 슬픔과 죽음과 실패와 탄식의 연속이니 우린들 어찌하겠습니까?.
종교개혁자 ‘칼빈’은 인생항로야 말로 예측하기도 어렵고 풍랑이 그치지 않음을 이렇게 말했습니다“나는 우리가 우리 앞 길을 내다보지 못한다는 것을 경험에 의하여 배우게 되었다.
내가 안일하고 고요한 생활을 할 수 있다고 느끼는 그 순간, 전혀 생각하지도 않았던 사건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인생은 왜 이처럼 괴로운가?”과연 세상은 덧없는 곳이고, 인생은 괴로운 존재인가? 이처럼 탄식하는 인생의 문제는 예로부터 많은 철인들도 풀지 못해 고민해 온 문제들입니다. 그래서 세상을 고해(苦海)라 말하지 않습니까?.
파라문 교도들은 어린아이가 어머니를 통하여 울면서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 “아! 너는 왜 괴로운 세상에 왔느냐? 차라리 무가 나으니라”면서 축하가 아닌 생을 저주 한다는 것입니다. 지혜의 왕 솔로몬 왕도 말하기를“죽는 날이 낳는 날 보다 났다”고 하였습니다(전(7:1).
그렇습니다. 세상의 삶은 고통의 연속입니다. 가뭄이 오고, 홍수가 오고, 추위가 오더니 더위가 오고, 전쟁과 불황이 옵니다, 도산과 부도가 납니다. 죽음과 질병이, 고통과 슬픔이 계속 됩니다. 사업의 실패, 친구의 배신, 마음이 맞지 않는 부부의 문제, 이웃과의 불화, 서로간의 미움 질투, 시기와 다툼, 정신적인 고통 등 말로 헤아릴 수 없는 불행이 연속극 상영하듯이 줄줄이 뒤따라 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겨우 백년도 못산다는데 무서운 시련과 시험은 도처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호수와 같은 갈리리 바다에도 풍랑이 있듯이 우리의 인생에도 풍랑이 있습니다. 짧디 짧은 인생의 삶에도 풍랑이 있음을 잊지 말고 매사에 작은 일에도 소홀함이 없어야 합니다.
2. 제자들이 주님의 명령에 따라 행하다가 풍랑을 만났습니다.
여러분! 요나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다시스로 도망가는 길에 풍랑을 만났다면 억울할 것도 없고, 불순종의 댓가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주님의 명령에 따라 가버나움으로 가다가 풍랑을 만났으니 도대체 어찌된 일입니까?. 순종했는데 풍랑을 만났으니 어떻게 합니까?.
이 세상에는 상선벌악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보편적인 원리입니다. 악한 자가 고생하고, 악한 자가 중병을 당하고, 악한 자가 잘못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기에 선은 악보다 더 나아야 합니다. 선을 행하는 자가 악을 행하는 사람보다 잘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순종했던 제자들이 풍랑을 만났습니까? 진실하고 충성된 자가 모진 풍랑을 만나 헤어나지 못한 것은 어찌된 일입니까? “악인의 길이 형통하고 패역한 자가 복을 받음은 웬 일입니까?(렘12:1).
악하고 모진 사람이 고생하는 것은 당연하거니와 의인이 환란을 당하는 것은 무슨 연유입니까? 불량한 자가 중병과 고생당하는 것은 그의 죄값이겠지만 , 진실한 성도가 애타해야 하는 것은 웬 일입니까?
물론 모든 의인이 다 환란을 당하는 것도 아니고, 모든 악인 다 형통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의문은 모든 사람들이 다 알고 싶어하는 문제인 것 만은 사실입니다.
정말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하나님은 왜 거짓말 하는 자가 활개를 치고 다니며, 진실한 자가 수난을 당하는 것을 못 본체 합니까?.
못되고 악한 마음을 품고 유혹한 자는 보디발의 아내였는데,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옥에 갇힌 자는 요셉이었습니다. 믿음으로 제사를 드린자는 아벨인데 그 좋은 신앙 때문에 하나님의 버림을 받은 가인이 휘두르는 무지한 칼에 죽어야 했습니다. 불의한 헤롯이 죽어야 마땅한데 그가 오히려 요한에게 모든 것을 덮어씌워서 요한의 목을 베었습니다. 진리가 매맞고 불의가 세상에서 활개치며 지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게 세상입니다.
3. 인생 풍랑은 예수님을 더욱 의지하게 하려는 하나님의 섭리임을 알라.
제자들이 예수님을 떠나 가버나움으로 가고 있었는데 풍랑은 바로 이때 찾아 왔습니다. 예수의 사람들은 예수를 떠나서는 살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대개의 경우 사람들은 살 가능성,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힘이 있으면 자기 자신을 의지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 매달립니다. 그러나 그런 가능성마저 희미해 지고 힘이 부닥히면 그때 비로서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라, 그 호홉이 끊어지면 당일에 그도모가 소멸하리로다,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146:3-5).
전적으로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신앙은 세상의 것을 완전하게 포기할 때 생기는 것입니다. 평안하고, 건강하며, 물질의 풍부함과 행복은 다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 때문에 아쉬운 것이 없다고 하나님을 찾지 않으면 그것들은 언젠가는 여러분에게 크나큰 화가 될 수 있습니다.
신앙인들 가운데 보면 축복이 감사해서, 베풀어주신 은혜가 고마워서 하나님을 찾는 자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들 보다는 험한 풍랑 헤어나지 못해서 하나님을 찾는 자가 그 얼마입니까?. ‘에크하르트’는 말하기를“그대를 완전에로 태워다 주는 가장 빠른 발의 짐승은 고난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고난과 역경은 하나님을 찾게 합니다.
이 세상에서 걱정근심 없이 편하게 살 때는 모두가 무신론자가 되었다가도 위험한 항해길에서 풍랑을 만나면 그때는 자신도 모르게“오! 마이갓”하면서 하나님을 찾는 자들이 많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은 형통하고, 순종하는 자의 길에는 풍랑이 일고 그것도 좁은 인생길에까지 찾아 오는 풍랑이 야속하기도 하고 순종의 길에 웬 풍랑이야 하면서 원망스럽기조차 할 때가 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잘 못 얻으면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고, 자포자기하거나 도가 지나치면 하나님이 어디있으냐면서 결국 교회를 떠나는 어리석은 자들이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이 세상에는 인간의 좁은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 만은 다 알고 계십니다. 믿습니까?.
4. 풍랑은 하나님을 만나는 좋은 기회입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좋은 것일지라도 인생의 깊은 고뇌를 풀어주지는 못합니다. 현대인들은 오늘이 중요하지 내일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내일의 면류관 보다는 오늘의 평안에 대하여 더 관심이 있습니다.
고난은 축복에로 이르는 관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경험해 본 사람의 간증일 수는 있지만 현재 풍랑속에서 허우적 거리는 사람에게는 별로 힘이 되지도 않고 오히려 사탕발림의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선배들은 오늘도 험한 풍랑 속에서 허둥대는 우리들에게 귀한 교훈을 주셨습니다.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그는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도 에수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그들은 새힘을 얻고 예루살렘으로 다시 올라갔습니다.
제자들도 풍랑을 만나 큰 고생을 하고 있었을 때 예수님이 찾아오셔서“내니 두려워 말라, 안심하라”고 맣씀하셨고 그때 풍랑은 잔잔해졌습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만나면 이 세상 풍랑은 어느 순간에 잔잔해 집니다. 예수님이 찾아 오시면 광풍은 멎고 맙니다.
우리는 풍랑을 원치 않습니다. 안전한 인생 항해를 원합니다. 그러나 때때로 풍랑을 만나 사경을 헤맬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라도 낙심하지 맙시다. 왜냐하면 바로 그때가“주님께서 가까이 계시사 도우시려고 오시는 때이기 때문입니다” 믿습니까?.
우리가 고난 당할 때 홀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칠배나 뜨거운 풀무불 속에 던져졌을 때 그들만 있은 것이 아니라 천사가 그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모리안 산으로 갔을 때 주님은 아브라함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풍랑 많은 인생 살이에 우리는 혼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어느 사이엔가 우리 곁에 오셔서 구원의 손길을 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오고오는 세대에 있어서 풍랑만난 인생에게 예수는 무엇하고 계신가를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풍랑 중에서도 주님을 모시고 사는 은혜를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한 젊은 의사가 알프스 몰불랑 정상을 정복했다. 알프스 등산로의 출발지점 샤모니에서는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환영할 준비를 하였다. 그런데 그 의사는 정상에 깃발을 꽂고 하산하던 중 베이스켐프에 도착하자 그만 긴장이 풀리고 말았다. 그러다 보니 모든 것이 귀찮아지고 안전을 위해 감았던 로프가 거추장스럽게 느껴졌다. 그는 로프를 풀어버리고 안내원의 도움 없이 자기가 앞장서겠다고 했다. 안애원은 위험하다고 만류했다.
“선생님, 아직 몽불랑 정복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샤모니에 무사히 도착하기까지 저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의사는 계속 고집을 부렸다.
그들은 하산하기 시작했다, 얼마 가지 못해서 앞서 가던 의사는 급경사에서 미끄러져 굴러 떨어졌다. 그를 도와줄 장비가 없었으며 더구나 그가 로프를 풀어 버렸기에 안내원은 발만 동동 구르며 지켜보아야 했다. 앞서가던 의사의 시체는 비탈 아래 기슭에서 발견되었다.
자기를 환영할 준비로 바쁘던 그 시각, 의사는 자신을 지탱하던 로프에 실증을 느껴 그것을 풀어버린 뒤 얼마 되지 않아 자신이 정복한 그 산자락에 묻히고 만 것이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하나님의 섭리는‘로프’처럼 우리를 안전하게 인도합니다. 때때로 우리는 그것에 싫증을 느끼지만 영원한 안식처에 도착할 때까지는 주님의 인도하심을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인생항해에 있어서 믿을 수 있는 인도자가 누구이겠습니까?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은 이미 항해를 마치신 분입니다. 주님은 이미 모든 풍랑과 고난, 역경 죽음까지 승리하신 분입니다. 주님은“내가 세상을 이기었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이미 죽음과 음부의 권세까지 이기신 분이 아니십니까?
주님은 이미 인생항로에서 갖는 고난과 역경을 친히 경험하셨기에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 우리를 가장 잘 이해하시고 도와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다 알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님은 믿음직한 인도자가 아니십니까? 주님을 나의 인생항해의 인도자로 모시면 안심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도와주시고 구원해 주십니다. 이 시간부터 주님을 여러분의 가정의 주인으로 모십시요. 행복한 가정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사업의 인도자로 추대하십시요, 그러면 여러분의 사업이 튼튼할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의 풍랑을 혼자 만나면 감당하기 어렵지만 주님과 함게 당하면 문제가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 배에 함께 계시면 거센 파도가 일어나도 말씀 한마디로 바람은 그치고 풍랑은 잔잔하여 영원한 목적지 하늘 나라에까지 안전하게 인도해 주십니다.
5. 주님과 함께 항해하면 폭풍 중에서도 평화로운 항해를 할 수 있습니다.(평화를 얻습니다)
1) 슬픔의 폭풍 속에서도 평화를 줍니다.
요한복음11장에“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이것을 네가 믿는냐?”고 하셨습니다. 죽음의 어두움이 변하여 영원한 생명의 영광을 안겨주는 말씀입니다. 주님이 아니면 슬픔의 폭풍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2) 생의 모든 문제의 폭풍 속에서 평화를 줍니다.
걷잡을 수 없는 의심과 긴장, 그리고 불분명한 태풍이 우리에게 닥쳐옵니다.
그런 때는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알지 못하고 당황하게 됩니다. 혹 어떤 때는 생의 기로에 서서 어느길을 택해야 될는지 알지 못하고 서 있을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주님을 찾으면 주님은 우리에게 갈 길을 분명하게 보여주십니다.
3) 근심의 폭풍 속에서 평화를 줍니다.
평화의 적은 근심입니다, 나 자신을 위한 근심,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근심,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근심, 등 수 없이 많습니다. 근심은 내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그 때에 갖게 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하였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피난처 이십니다, 주님은 광풍속에서도 우리에게 펴화를 주십니다, 이 주님을 온전히 의지합시다.
한 주간도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14:1)는 말씀을 부여잡고 주님을 온전히 믿고 의지하다가 풍랑 속에서 건짐받고 평화를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