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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장 철장방의 패배
이윽고 계단에서 저벅저벅 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리더니 아홉 사람이 올라왔다. 웃고 떠드는 것으로 보아 기분이 아주 좋은 모양이었다. 그들은 이층에 두 무리의 손님이 있는 것을 보았다. 구양적네 세 사람에 대해서는 별로 꺼리지 않는 눈치였으나, 자기들과 맞은편에 앉아 있는 동남쪽 창문가의 식탁을 건너다보고는 금세 표정이 흐려졌다. 그중 한 사람이 말했다.
"방주님, 자리를 바꾸시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복판에 선 사람이 대답했다.
"괜찮아, 우리들이 여기 앉으면 돼."
먼저 말을 꺼냈던 사람이 공손히 대답한 뒤 구양적네가 앉은 곳에서 의자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걸 소맷자락으로 먼지 하나 없이 깨끗이 닦은 후 자기네 방주에게 앉도록 권하고, 주인을 불러 술과 안주를 청했다. 주인이 물러가자 아홉 사람은 조용히 앉아서 술과 안주가 올라오기를 기다렸다.
구양적은 이 아홉 사람들 중 적어도 일곱 사람은 무예가 뛰어나다고 짐작했다. 그들 중 가장 억센 기상을 지닌 사내가 상관위 방주로 마흔 고개를 넘은 것 같았다. 무쇠로 부어 만든 것 같은 시커먼 손만 보아도 출중한 장법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대뜸 알 수 있었다. 이들은 위층에 올라올 때만 해도 웃고 떠들어댔지만, 식탁에 모여 앉은 거지 무리를 발견한 뒤로는 하나같이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가운데 앉은 방주가 한마디했다.
"빨리 먹고 떠나자."
그는 다시 입을 꾹 다물고 안주가 오기만 기다렸다. 안주가 오자 다들 게걸스레 먹어댔다. 그들 방주만 먹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먹는 모습을 지켜 보고 있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가 먹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았다.
한참 후에 술집 주인이 술단지를 하나 가져다 그의 앞에 놓았다. 이 상관위 방주란 사내는 술단지 뚜껑을 열고 코로 냄새를 맡았다.
이때 문어귀에서 꼬마 사내아이 하나가 달려 들어왔다. 한눈에 거지 아이임을 알 수 있었다. 아이는 넝마 같은 옷을 입고 시커먼 두 손을 허우적거리면서 상관위 방주 앞을 지나쳤다. 그곳을 지나 거지 무리가 모여 앉은 식탁으로 달려가 먹을 것을 구걸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너무 서두르다가 그만 술단지를 잡은 방주의 팔을 툭 쳤다. 술단지가 바닥에 떨어지는 걸 보고 거지애는 겁이 나
서 비명을 질렀다.
술단지가 바닥에 부딪쳐 박살이 나려는 순간, 방주가 히죽 웃으면서 발끝으로 술단지를 차 올렸다. 그러자 술단지가 솟구쳐 올라 다시 머리 위쪽으로 날아 내려오는 게 아닌가? 그는 대뜸 두 손을 뻗어 술단지를 받았다.
상관 방주 옆에 있던 사내가 거지 아이를 냉큼 붙잡았다.
"네 애비 상이라도 당했느냐?"
거지 아이는 겁에 질려 말은 못하고 질질 울기만 하더니 땅바닥에 꿇어 엎드려 살려 달라고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사내는 방주가 말은 안 하지만 자기가 거지 아이를 한바탕 때려 줄 것을 바란다고 여겼는지, 일어서서 큰소리로 꾸짖었다.
"네 놈을 때려죽이지 않으면 나중에도 말썽을 부릴 거야!"
그 사내는 주먹을 들어 거지 아이를 때리려 했다.
그 순간 상관위 방주 옆에 앉아 있던 체구가 큰 젊은이가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제지를 했다. 그는 거지아이를 보면서 몇 년 전 제 모습을 떠올렸던 것이다.
그날도 상관위 방주가 주루에 들어왔을 때 다른 쪽에 개방의 어른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구천인은 그 당시 구걸로 연명해 가고 있었다. 상관위에게 구걸을 한다는 것이 그만 술단지를 와락 쏟아부어 혼찌검이 날 판이었다.
그때 갑자기 상관위 옆에 앉아 있던 사내가 벌떡 일어나면서 구천인의 옷자락을 와락 낚아챘다. 거지 아이의 너덜너덜한 옷자락이 뭉청 뜯겨져 나갔다. 거지 아이는 엉엉 울면서 대들었다.
"내 옷을 내놔요, 옷을 내놔요!"
그 사내가 소리를 꽥 질렀다.
"듣기 싫어! 네가 우리 방주님의 술을 쏟았지만 널더러 술을 내놓으라고 하지 않았다. 그까짓 넝마조각이야 찢어지면 어떠냐? 어디 한번 된매를 맞아 볼래?"
옆의 사내가 매를 들려는데 상관위 방주가 말리더니, 몸을 낮추면서 친절하게 물었다.
"네 이름이 뭐냐?"
거지 아이는 방주가 몸을 낮추고 자기에게 상냥하게 말을 걸자 울음을 그치고 겁먹은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거지 아이는 입속말로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구천인( 千 )이라고 해요."
상관위 방주가 유쾌하게 웃어젖히며 말했다.
"훌륭한 이름이로구나! 천인이라, 그럼 네 키가 아주 크겠구나, 허허허!"
거지 아이가 정색하며 대꾸했다.
"내 키는 별로 안 커요. 난 두 번째로 크지요. 내 형은 구천장( 千丈)인데 나보다 더 커요. 내 여동생은 구천척( 千尺)인데 나보다 키가 작구요."
한쪽에서는 소씨 거렁뱅이를 비롯한 개방파 사람들이 상관위의 태도를 주시해 보고 있었다. 만에 하나 상관위가 험악하게 군다면 소씨 거렁뱅이는 손에 쥐고 있는 젓가락을 날려 그 사내의 팔뚝에 정확히 꽂았을 것이다. 그런데 다행히 상관위 방주가 상냥한 기색으로 거지 아이에게 말을 건네자 소씨 거렁뱅이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상관위 방주가 거지 아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 이름은 상관위다. 내 이름이 네 이름보다 못하구나."
그리고 방주는 고개를 돌려 다른 사람에게 분부했다.
"가삼(賈三) 동생, 자네 맞은편 가게에 가서 옷을 좀 사 오게. 최고급으로 말이네."
가삼은 영문을 몰라 물었다.
"방주님, 누구의 옷입니까? 방주님의 옷이 더러워져서 갈아입으시려고요?"
"바보 같은 소리! 내가 무슨 옷을 갈아입어? 이 아이, 아니 이 구 공자님의 옷을 보란 말이다. 네가 찢어서 볼썽사납게 되었잖아. 어서 가서 새 옷을 사다가 갈아입혀 줘라."
가삼은 내막은 알 수 없었으나 방준의 명령이므로 더 묻지 못하고 나는 듯이 달려나갔다.
"그래, 형과 누이동생은 어디 있니?"
상관위가 아이에게 물었다.
그 말에 아이는 눈물을 홀리며 우는 소리로 대답했다.
"모두…… 남의 집에서 삯일을……."
"남의 집이라니? 누구네 집에서?"
상관위의 기색은 여전히 부드러웠다.
"장대선(張大善)네 집에서 일해요. 형은 심부름을 하고 누이동생은 종으로 있어요."
"그 장대선이란 사람이 너희들에게 잘 대해 주더냐?"
상관위의 물음에 구천인이라는 아이는 대답도 못하고 엉엉 울었다. 가슴이 미어지는 모양이었다.
"내가 네 형과 누이동생을 데려오면 어떨까?"
"안 돼요. 장대선이란 사람이 가만 놔두지 않을 거예요. 우릴 때려죽일 거예요."
아이는 놀라서 부르짖다시피 했다.
"그 사람이 네 형에게 은자를 얼마나 주지?"
상관위가 물었다.
"은자는 안 주고 그냥 밥만 줘요."
어린아이의 대답에 상관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네 형을 불러다가 내 일을 돕게 하고 네 누이동생도 불러다가 내 일을 돕게 해서 매달 은 30냥씩을 주면 어떨까?"
상관위의 말에 구천인의 눈이 둥그래졌다. 그는 의아한 듯이 말했다.
"지금 날 놀리는 거죠?"
"내가 왜 널 놀리겠니?"
상관위는 그러면서 몸을 돌려 옆에 있는 키 큰 사나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키 큰 사나이가 은자 한 정(錠)을 꺼냈다. 상관위는 그 은자를 손에 들고 아이에게 말했다.
"이건 50냥짜리 은괴란다. 가져가서 형과 누이동생에 보여 줘라. 그래도 그들이 안 오겠다고 하겠느냐?"
이렇게 큰 은자를 난생 처음 본 구천인은 너무나 놀랍고 기뻐서 더듬더듬 말했다.
"제……제가 마……말하면 꼭 올 거예요."
그러자 상관위는 옆사람에게 분부했다.
"자네가 장대선 씨에게 말해서 이 아이의 형과 누이동생을 우리방(幇)으로 데려오게."
지시를 받은 자는 즉시 일어서서 장대선을 만나러 갔다.
소씨 거렁뱅이의 얼굴에 의혹의 그림자가 얼핏 스쳐 지나갔다.
'흥, 도대체 저 사람이 왜 저러는 걸까? 자기가 뭐 보살(菩薩)이라도 되는 모양이지?'
철장방의 방주 상관위가 어린아이에게 그토록 부드럽고 정답게 구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하나같이 괴이하게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철장방' 하면 강호에서 악명 높기로 유명할 뿐만 아니라 강호의 백도(百道)나 흑도(黑道)를 막론하고 타매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상관위는 이 악명 높은 철장방의 방주로 흉악하기로 소문이 자자한 인물이 아니던가. 그런 상관위가 오늘 왜 이렇게
곰살스럽게 구는 것일까.
상관위가 아이를 자리에 앉히자 부하들 중 하나가 소리쳤다.
"주인 어디 있어? 당장 이리 와 봐!"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술집 주인이 잰걸음으로 다가왔다. 철장방의 위엄을 알고 있는지 주인은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며 굽신거렸다.
"무슨 일인지 그저 분부만 하십쇼, 방주 나으리."
"이 술단지에 독을 넣었지?"
그의 말에 술집에 앉아 있던 모든 사람들의 안색이 일제히 변했다.
술집 주인은 대경실색하여 급히 손을 내저었다.
"독이라니요? 아이고, 방주 나으리. 무슨 농담을 그렇게 하십니까? 이 술은 금방 꺼낸 상등술인뎁쇼. 그럴 리가 없습니다, 방주 나으리. 나으리께선 농담으로 하시는 말씀이라도 전 간이 떨어집니다요."
그러자 상관위는 듣기 싫다는 듯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질렀다.
"이 아이와 부딪치는 바람에 술이 쏟아졌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이 술에 독이 있는 줄도 모르고 고스란히 당할 뻔했다. 내가 이 술을 마시고 죽어 나자빠졌어야 네 속이 후련했을 텐데 말야!"
상관위는 손을 뻗쳐 술집 주인에게 일장을 갈기려 했다. 철장방 방주의 손바닥에 한 번만 맞아도 목숨이 끊어지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 술집 주인은 벌벌 떨며 입을 열었다.
"고정합쇼. 방주 나으리, 고정합쇼. 소인이 가서 영문을 알아보겠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어쨌다는 거냐?"
상관위는 버럭 소리쳤다.
"하지만 술에 독이 있다는 건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이 말이냐? 내가 할 일이 없어 네 따위와 농담이나 하자는 건 줄 알아? 이 상관위가 네 놈에겐 그렇게 실없는 놈으로 보이느냐?"
상관위는 생각할수록 화가 치미는지 눈을 부라리더니 단지를 번쩍 들어 일격을 가했다. 그러자 바닥은 순식간에 술천지가 되었고 술에서는 '칙칙' 하고 거품 끓는 소리가 났다. 독이 든 게 분명했다. 술집 주인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할말을 잃은 듯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이래도 잡아뗄 테냐?"
주인은 찍소리도 못한 채 술이 괸 바닥만 멍청히 바라볼 뿐이었다.
"감히 우리 방주를 독주로 해치려 들다니! 이 놈이 대관절 담이 얼마나 크기에 이런 짓을 한 거야?"
상관위 옆에 있던 카 큰 사나이가 비아냥거리며 일어서더니 다짜고짜 술집 주인의 멱살을 거머쥐었다. 뜻밖의 상황에 당황한 술집 주인은 변명하려고 정신을 가다듬었으나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몰라 두서없이 더듬거리기만 했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보는 이로 하여금 더욱 의심만 가중시켰다. 키 큰 사나이는 참을 수 없다는 듯 비수를 빼어 들고 소리쳤다.
"네 이 놈! 이래도 딴소리를 할 테냐? 누가 한 짓인지 당장 이실직고 하지 않으면 단칼에 네 놈 숨통을 끊어 버릴 테다."
이때 전체 청우루의 주인이 위층에서 들려 오는 시끌벅적한 소리에 어떤 하릴없는 놈들이 소란을 떠는가 싶어 돼지처럼 비대한 몸을 이끌고 올라왔다. 그는 눈앞의 광경을 보고는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아이고, 야단났네. 강호의 패거리들을 건드려 놓았으니 이 주루는 이제 요절나게 생겼구나.'
그는 속으로는 비명을 지르면서도 겉으로는 사람 좋은 웃음을 띄우며 빌기 시작했다.
"손님, 제발 고정하시지요. 무슨 일인지 몰라도 못마땅한 게 있으시면 분부만 내리십쇼. 당장 시정하겠습니다요. 그저 분부만 합쇼."
그러자 키 큰 사나이는 이층의 술집 주인은 떼밀어 버리고 이번엔 전체 주루의 주인인 뚱뚱보의 멱살을 거머쥐었다.
"그래 네가 이 주루의 주인이렷다? 좋다. 그럼 너하고 시비를 가려 보자."
"이러지 맙쇼. 제발 이러지 맙쇼. 어떤 분부라도 기꺼이 시행하겠으니 제발 이 멱살은 좀 놔 줍쇼."
"이깟 정도로 웬 엄살이냐. 목숨을 부지하고 싶거든 사실대로 말 해! 대체 어떤 놈의 짓이야?"
이때 별안간 누군가 큰소리로 비웃었다.
"저것들 좀 보라지. 도저히 눈뜨고는 못 봐 주겠군. 이거야 삶은 소대가리가 앙천대소할 일 아닌가? 한낱 계명구도(鷄嗚狗盜) 무리에 지나지 않던 철장방이 하루아침에 득의양양 사람 대접을 받겠다는 거야 뭐야?"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아닌 소씨 거렁뱅이였다. 그는 한 손에 술잔을 든 채 게슴츠레한 눈으로 계속 떠들어댔다.
철장방 패거리들은 일제히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소씨 거렁뱅이를 비롯하여 한쪽 탁자를 차지하고 앉아 있는 사람들은 모두 개방의 사람들이었다. 철장방 패거리들은 그들이 개방의 보통 제자들이 아니라 수뇌 인물들임을 술집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알아보았다. 그 속에는 개방의 새로운 방주인 소씨 거렁뱅이는 물론 근래 강호에서 크게 명성을 떨치고 있는 홍칠도 끼여 있었다.
홍칠이 말석에 앉아 있는 걸로 보아 소씨 거렁뱅이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신분이 모두 홍칠보다 높은 모양이었다. 철장방 패거리들로서는 그들과 부딪치지 않는 것이 상책이었다. 사실 술집에 들어서는 순간 그들을 발견하고는 아래층으로 내려가려고 했었다. 그랬던 것을 방주 상관위가 눌러앉히는 바람에 마지못해 주저앉았는데 결국 이런 식으로 얽혀 들고야 만 것이다.
'이거 야단났군.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상문성(喪門星) 소씨 거렁뱅이의 노여움을 샀다가는 큰 화를 당하는데.'
철장방 사람들은 찍소리도 못한 채 불안에 휩싸였다. 그렇다고 철장방 방주인 상관위가 그냥 못 들은 척 물러설 수는 없었다.
"선배님, 우리 철장방을 너무 얕잡아 보시는 거 아닙니까?"
"철장방이 도대체 뭔데? 내 일도 돌볼 새가 없는데 철장방이고 뭐고 그런 건 알 것 없고, 이거나 좀 보라구. 내가 입은 이 옷 어떤가? 멋지지?"
그의 말에 상관위는 벨이 뒤틀리는 것을 눌러 참으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소씨 거렁뱅이를 향해 공손하게 읍하였다.
"저희 눈이 멀지 않았다면 선배님은 소씨 나으리심에 틀림없으시지요?"
그의 말에 소씨 거렁뱅이는 손을 활활 내저었다.
"선배님은 무슨 말라 비틀어진 선배님이냐? 그리고 무슨 놈의 나으리야? 난 거렁뱅이야! 소씨 거렁뱅이. 알겠지? 잘 기억해 둬라."
상관위는 소씨의 모욕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으나 끝까지 눌러 참으며 은근히 응수했다.
"선배님, 저희들 일에 선배님께서 간섭하시는 걸 보니 이 독주와 선배님네 개방이 무슨 관련이라도 있는 게 아닌가 싶군요?"
그러나 소씨 거렁뱅이는 그의 말에는 아랑곳없이 상관위 앞으로 걸어와 바닥에 쏟아진 술을 보며 말했다.
"관련은 무슨 개떡 같은 관련! 우리 개방은 강호를 떠다니면서 독을 쓰고 암살이나 하는 비열한 짓은 절대 안 한다. 우린 매사에 정정당당한 걸 좋아하지."
소씨 거렁뱅이는 엄숙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듣자니 한 달 전에 너희들 철장방 사람들이 태호(太湖)에서 어선 열두 척을 공격하여 사람을 죽이고 물건을 빼앗았다는 소문이 있던데, 그게 사실이냐?"
상관위는 술에 독약을 넣은 게 바로 이자들이라고 단정했다.
"소씨 거렁뱅이 나으리, 우리 철장방과 겨루어 보려고 찾아오신 듯하온데?"
그의 말에 소씨 거렁뱅이는 냉큼 탁자 위에 뛰어올라 쪼그리고 앉더니 아홉 명의 철장방을 내려다보았다.
"네 말이 맞았다. 한번 겨루어 볼 생각인데 어떠냐? 이 거렁뱅이가 요즘 심기가 좋지 못하거든. 먹고 입고 자는 것까지 죄 남한테 간섭을 받으려니 심기가 편할 수가 있겠어? 아무래도 한바탕 운동을 해야 심기가 풀어질 성싶구먼. 상관위, 자네도 방주 나도 방주인데 우리 둘이 한판 붙어 볼까? 어때?"
"그럼 그러지요."
상관위가 차갑게 대꾸했다. 그러자 상관위의 수하들이 일제히 달려들 기세가 되었다. 상관위는 얼른 제지했다. 개방의 고수들이 한 무리 앉아 있는데 그들 역시 무리로 달려들 경우 철장방이 패할 것이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재빨리 속으로 생각했다.
'듣자니 소씨 거렁뱅이는 입은 칼날 같아도 마음은 무르다고 하니, 일 대 일로 싸우는 편이 이로울 것이다. 싸우다가 내가 진다 해도 설마 죽이기까지야 하겠어?'
한편 이 광경을 지켜 보고 있던 사람들은, 철장방 방주 상관위가 감히 천하에서 제일 큰 방(幇)인 개방의 방주 소씨 거렁뱅이와 겨루려 하는 것을 보고 그가 필시 초인적인 무공을 지니고 있는가 보다고 생각하였다.
가뜩이나 심기가 불편해 있던 소씨 거렁뱅이는 뜻밖에도 상관위가 도전적인 자세로 나오자 이 기회에 단단히 혼찌검을 내주자고 작정했다. 그는 너털웃음을 웃으며 탁자에서 뛰어내렸다.
"강남 무림에 쌍어(雙魚), 음검(陰劍), 철장(鐵掌), 이 세 패거리가 있다는 건 일찍부터 들어 알고 있다. 내가 철장방 두목을 찾아 한번 속시 원하게 몸 좀 풀어 보려고 벼르고 있었는데, 마침 이렇게 제 발로 찾아왔으니 잘됐다.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고 원망일랑 말아라."
그는 팔짱을 끼고 서서 마치 판소리나 하듯 목청을 빼며 사설을 엮어 내려갔다.
거렁뱅이 신세 한심타고 사람마다 비웃지만
세상일이 꼭 그런 것만은 아니지, 아니고말고.
타령하며 개 쫓으며 남들은 문전걸식하지만
유독 이 소씨 거렁뱅이만은 그뿐만이 아니네.
강산도 쉽게 변한다는 강산이개(江山易改)!
강산이개 요리만은 기가 막히게 잘해서
이름이 났더라, 천하에 이름이 났어.
소씨 거렁뱅이는 일순 사설을 멈추고 술잔을 집어 들더니 "얏!" 하고 소리를 지르며 한손을 모로 세워 칼로 내려찍듯 상관위를 향해 날렸다. 상관위도 만만치 않게 맞받아 소리를 지르며 공격 태세를 취했다.
철장방은 사문방파(邪門幇派)의 한 갈래로, 방주는 역대를 내려오면서 독특한 철장 무공을 익히게 되어 있다. 이 무공은 오로지 방주에게만 전하는 것으로 다른 사람은 알지 못한다. 이 독특한 철장 무공은 반드시 한 단계 한 단계 순서와 절차를 밟아 가며 익혀야 한다. 4단까지 익히면 돌과 나무를 단번에 빠갤 수가 있다. 5단에 이르러 철장 한 장(掌)을 내리치면 돌과 나무가 겉은 멀쩡한
것 같지만 속은 그렇지 않아, 나무는 그 속이 톱밥처럼 변하고 돌은 절구질이나 당한 듯 가루가 된다. 그리고 6단이나 7단에 이르면 철장이 미치는 힘은 물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미치어 사람을 조금만 스쳐도 피가 말라 즉사한다. 철장방 방주 상관위의 철장은 6단에 이르러 있었다. 그래선지 그가 공격 태세를 취하는 순간 그에게선 범상치 않은 날카로운 기(氣)가 뿜어져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씨 거렁뱅이는 아랑곳없이 여전히 너털웃음을 웃으며 떠들어댔다.
"너한테는 네 장법(掌法)이 있고 나한테는 내 장법이 있다. 네 장법이 강철 같은 철장법이라면 내 장법은 두부처럼 무른 두부장법이지. 철장법이 이길지 두부장법이 이길지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알 일이고!"
소씨 거렁뱅이는 다시 손바닥을 쳐들어 공격 태세를 취하였다.
소씨 거렁뱅이의 장법을 본 상관위는 속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장법을 쓸 때 먼저 상삼로(上三路)로부터 손을 쓴다. 사람의 손과 팔은 상체와 통해 있기 때문에 먼저 가슴 앞, 옆구리, 허리로부터 손이 나와야 손 쓰기가 쉬운 법이다. 그런데 이 소씨 거렁뱅이의 장법은 희한하게도 머리께에서 손을 내어 몸 앞으로 가져오는데 이렇듯 둔한 동작으로 도대체 어떻게 힘
을 쓰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소씨 거렁뱅이의 이 장법은 개방 방주들이 역대로 내려오면서 물려받은 개방 최상의 장법, 강룡십팔장(降龍十八掌)이다. 소씨 거렁뱅이의 일장이 나가자 바람이 씽 일며 그 장력에 스친 물건들이 순식간에 산산조각이 났다.
하지만 소씨 거렁뱅이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눈 깜짝할 새에 손바닥을 옆구리로 쑥 내밀었다. 그러자 상관위 뒤에 있던 탁자가 풍비박산이 난 것은 물론이고, 철장방 네댓 명도 그 장풍(掌風)에 스쳐 얼굴이 아리고 가슴이 에이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아주 대단한 장법이었다.
이 장법은 강룡십팔장 중의 한 가지 술수인 항룡유회(亢龍有悔)로 엄청난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소씨 거렁뱅이가 가볍게 일장을 내쳤을 뿐인데도 상관위는 그 엄청난 위력에 비틀비틀 뒷걸음질치다가 하마터면 거꾸러질 뻔하며 사색이 되었다.
'정말 보통 장력이 아니구나. 저 소씨 거렁뱅이가 강룡십팔장에 조금만 더 힘을 넣으면 목숨이 붙어 나지 않겠어.'
상관위는 순간 주춤했다. 그러나 그는 곧 이를 악물고 덤벼들었다. 이 많은 사람 앞에서 소씨 거렁뱅이에게 항복한다면 강호의 조롱과 모욕을 장차 어떻게 견디랴 싶어 그대로는 도저히 물러설 수가 없었던 것이다.
두 사람이 싸우는 동안 술집에는 개방의 무리들과 철장방 일행 외에도 주루 주인과 열세 살 난 소년 하나가 이 광경을 지켜 보고 있었다. 구천인이라는 이 총명한 아이는 조금 아까 자기에게 무척 다정하게 대해 주던 상관위가 행여 싸움에 지기라도 하면 어쩌나 걱정스레 바라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방금 상관위는 그에게 선뜻 은자 50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형 구천장, 누이동생 구
천적이 와서 철장방 일을 거들어 주면 밥도 먹여 주고 매달 30냥씩 주겠다고 약속했던 것이다. 그러니 소년에게 상관위는 귀인인 셈이었다. 그에 반해 그와 싸우는 소씨 거렁뱅이는 나쁜 놈으로 보였다. 소년은 상관위가 일장에 거렁뱅이 놈을 쳐죽이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워 죽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는 상관위가 반드시 이길 것이며, 그렇게 되기만 하면 자기들 삼남매는 당장에 철장방에
가담하리라고 굳게 마음먹고 있었다.
소씨 거렁뱅이의 항룡유회로 인해 타격을 받은 상관위는 가슴이 뻐근해지며 숨결이 가빠옴을 느꼈다. 그는 얼른 숨을 조절하여 다시 철장법을 썼다. 그러나 소씨 거렁뱅이는 몸을 빙그르 돌리며 뒤로 출장(出掌)하여 두 번째 술수인 견룡재전(見龍在田)을 썼다. 그런데 이 술수가 어찌나 맹렬한 힘을 가졌던지, 힘을 다한 게 아니었는데도 상관위는 다시금 뒤로 물러나다가 벽에 뒤통수를 찧고
말았다.
싸움이 진행되는 동안 철장방 패거리들은 모두 잔뜩 긴장해서 가슴을 졸이고 있는 반면 개방 패거리들은 도리어 태연하게 앉아 있었다. 홍칠은 이쪽 싸움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등을 돌리고 말석에 앉아서 목을 젖히고 술만 꿀꺽꿀꺽 마시고 있었다. 그 밖의 다른 여덟 사람도 소씨 거렁뱅이 싸움은 알 바가 아니라는 듯 주거니 받거니 떠들며 술만 퍼마셨다.
그런데 철장방 패거리들은 갈수록 긴장하여 병기들을 움켜쥐고 눈 한 번 깜짝하지 않고 둘의 싸움을 지켜 보고 있었다. 일단 상관위가 위험하다 싶으면 그중 여섯이 동시에 덤벼들 태세였다.
"상관위, 조심해라!"
소씨 거렁뱅이는 필사적으로 덤벼드는 상관위에게 틈을 주지 않고 다시금 일장을 갈겼다. 손바닥을 잽싸게 뒤집으며 갈기는 이 용전어야(龍戰於野)라는 장법은 신묘하기 그지없어서 상관위의 몸은 맥없이 붕 떠올라 저만큼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상관위는 몸을 일으키지 못한 채 악에 받쳐 부르짖었다.
"더러운 거렁뱅이! 날 죽일 테면 죽여 봐라!"
이 꼴을 본 철장방 패거리들은 결국 참다못해 병기를 들고 노호처럼 소씨 거렁뱅이에게 달려들었다.
소씨 거렁뱅이는 그들은 안중에도 두지 않고 뒷짐을 진 채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칼은 그의 목으로 날아들고 검은 그의 가슴을 찌르려 하며 독사 같은 채찍은 그의 목덜미를 휘감으려 했다. 어린 구천인마저 일어나서 소씨 거렁뱅이를 죽이라고 외쳐 댔다.
한동안 툭탁거리는 소리와 칼날 부딪치는 날카로운 소리만이 술집 안에 가득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채찍은 맥없이 허공을 가르고 칼은 마룻바닥에 푹 꽂히고 한 자루의 장검은 탁자 위로 날아가 박혔다. 모든 반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미친 듯이 덤벼들던 철장방 패거리들은 그만 기가 꺾여 소씨 거렁뱅이를 멍청히 바라보았다. 모두 꿀 먹은 벙어리마냥 침묵했다.
소씨 거렁뱅이는 더 이상 상대할 가치가 없다는 듯 본래의 자세로 돌아가며 호통을 쳤다.
"네 이 놈 상관위, 그래도 너가 명색이 방주라는 체면을 봐서 더는 손을 쓰지 않겠다만, 너희들이 강남에서 한 악행에 대해서는 이제 양 장로(長老)께서 낱낱이 상기시켜 줄 것이다."
그러자 술좌석에서 가장 상석에 앉아 있던 금의파의 개방 장로가 다가왔다.
"철장방이 이 이태 동안 해 놓은 업적이 실로 적지 않으렷다? 나도 눈이 있어 견식을 좀 넓혔는데, 그간 적어 놓은 행적들을 방주님께 좀 읽어 드릴까 한다."
그는 퉁퉁한 얼굴에 미소를 떠올리며 품에서 양피지 몇 장을 꺼내 들고는 뒤적이며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작년 5월 초닷샛날, 설류장(雪柳庄) 노소 백삼 명을 죽이고 금과 은을 도합 3만 냥 빼앗아 갔다. 작년 가을엔 영웅 서 노인의 환갑에 뛰어들어 서른일곱 명을 독살시키고 아녀자들과 아이들을 납치해 갔다. 작년 춘월(春月) 18일엔 서역 대사막의 백타산장 사람들을 셋이나 죽이고 그 시체를 황야에 내던졌다. 지난달 초아흐렛날, 철장방 방주 상관위는 처가쪽 사람을 일곱이나 죽이고 집을
불살라 죄증을 없애고는 그 살인 죄명을 우리 개방에게 덮어씌웠다."
근거가 분명한 죄증 앞에서 아연실색한 천장방 패거리들은 서로 얼굴만 쳐다볼 뿐 말이 없었다. 죄상을 읽어 가는 양 장로의 음성은 염라부 지옥의 판관 목소리처럼 차디찼다. 양 장로는 잠깐 읽던 것을 멈추고는 칼날 같은 눈길로 철장방 패거리들을 쏘아보았다.
"계속해서 읽어 볼까?"
상관위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장탄식을 했다.
"이기면 왕, 지면 역적으로 몰리기 마련, 진 놈한테 온갖 죄를 덮어씌우기야 간단한 일 아니겠소. 내가 한 일만큼은 누구보다 나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소."
죄를 시인하는 건지 부인하는 건지 알 수 없는 모호한 소리였다.
소씨 거렁뱅이는 탁자에 걸터앉으며 물었다.
"손 장로, 상관위가 이렇듯 많은 죄를 저질렀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소?"
소씨 거렁뱅이는 개방에서 규율을 위반한 제자를 다스리듯 그 처벌 여하를 집법장로(執法長老)에게 물었다. 집법장로는 이 물음이 타당치 않음을 알고 있었으나 방주의 말이니 그 자리에서 탓할 수 도 없었다. 집법장로는 정중한 태도로 대답했다.
"제 생각으로 저 사람은 극악무도하기가 이를 데 없어 개방의 율(律)에 따라 먼저 방에서 축출한 다음 죽여 마땅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손 장로는 말은 이렇게 하였으나 그 말 역시 스스로도 어색하고 적절하지 않게 여겨졌다. 상관위는 철장방의 방주다. 그런데 개방의 제자도 아닌 그를 '먼저 방에서 축출한다'고 하는 것이 이치에 닿는 소린가? 그러나 어쨌든 개방의 율에 따라 '죽여 마땅하다'는 말을 하였으니 그것으로 됐다고 그는 자신을 합리화시켰다.
소꺼 거렁뱅이가 엄숙하게 말했다.
"그렇지, 죽여 마땅하지, 마땅하고말고. 그렇다면 죽게 해 줘야지."
소씨 거렁뱅이는 손짓을 했다.
개방의 율에 의하면 방주의 말은 곧 법이나 다름없다. 그러니 소씨 거렁뱅이의 이 말 한마디가 철장방 방주의 운명을 결정해 버린 셈이었다.
그러나 주위에 서서 이 광경을 지켜 보던 사람들은 심히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개방이 예의지방(禮儀之幇)이라면 도리를 지켜야 하지 않는가? 철장방이 잔인한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백주에 이 주루에서 사람을 죽이려 하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송의 형률에는 형장, 유배, 교살 같은 것이 있고, 가장 엄중한 것으로 는 음짐(飮塢 ; 짐주를 먹여 독살시키는 것), 분시(分尸), 참수(
斬首) 등도 있지만 그것은 관이 판결할 일이지 일개 개방 방주가 말 한마디로 좌지우지할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때 철장방의 한 노인이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상관위를 돌아보며 외쳤다.
"철장방의 단검(斷劍) 질의(那義), 용편(龍鞭) 장립(章立), 소유신(小游神) 호산아(虎傘兒), 곡소신(哭笑神) 정씨 형제, 박도(薄刀) 서명(緖明)은 방주님을 대신하여 죽기를 원하나이다."
그리고는 개방 쪽을 향해 어깨를 펴고 돌아서며 늠름하게 말했다.
"개방 사람들은 들으시오. 저희 철장방이 오늘 여기서 패하여 방주께선 중상을 입었지만, 만일 그대들이 저희 방주를 해치려고 한다면 우리 여섯이 먼저 자결하겠소."
그는 칼집에서 칼을 쑥 뽑아들었다. 그 칼은 절반 동강이 난 단검이었다. 그는 그 검을 자기의 목에다 가져다 대며 소리쳤다.
"저희 방주를 해치지 마시오. 저희 방주에게 욕을 보임은 저희에게 욕 보이는 것보다 몇 배 더 참을 수 없소."
그러자 다른 다섯 명도 병기를 들어 일제히 자결할 태세를 취하였다.
원래 개방 사람들은 철장방을 대단히 업신여기고 있었다. 그 같은 사악한 사문파엔 정직한 인물도 없고 용감하고 의로운 인물은 더욱 없을 것이라고 여겨 왔다. 그런데 지금 이 여섯 사람의 거동을 보자 개방 사람들은 실로 숙연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소씨 거렁뱅이 역시 뜻하지 않은 상황에 난감해져 머리를 긁적거렸다.
"이런 젠장, 이렇게 되면 일이 엉뚱하게 돌아가잖아. 놈은 죽지 않겠다니 못 봐주겠고, 죽지 않아도 되는 놈들이 죽겠다니 답답한 일 아닌가. 이거야말로 내가 만드는 요리 강산이개나 다를 바가 없군 그래."
사람들은 '강산이 변하기 쉽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금방 이해했다. 소씨 거렁뱅이가 홍안루 요리사로 있을 적에 이 괴상한 이름을 가진 요리로 명성을 날렸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던 것이다.
소씨 거렁뱅이는 실로 답답했다. 철장방 패거리 여섯이 정말로 자살하여 그 소문이 퍼진다면 강호에서 개방의 체면은 여지없이 깎여 내릴 것이다.
소씨 거렁뱅이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가쁜 숨을 몰아쉬며 쓰러져 있는 상관위를 걱정스레 바라보던 소년 구천인은 그의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알았다. 구천인은 얼른 튕겨 일어나 상관위에게로 달려갔다.
"정신 차리세요. 정신 차리세요, 어르신. 죽으면 안 돼요."
그는 엉엉 울면서 상관위를 흔들었다.
"제가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어르신처럼 좋으신 분은 뵙지 못 했어요. 날 데리고 가겠다고 했잖아요? 우리 형과 누이동생에게 일자리도 주고 매달 은자 30냥빅 주겠다고 하셨잖아요? 착한 어르신, 정신 차리세요. 이대로 죽으면 안 돼요, 착한 어르신……."
애간장을 끊는 듯한 아이의 통곡 소리가 술집 안에 가득 찼다. 이를 지켜 보던 소씨 거렁뱅이와 개방의 다른 장로들은 자기도 모르게 코끝이 아려옴을 느꼈다. 어린것의 울음 때문에도 상관위에게 손을 대기는 어렵게 돼 버렸다.
상관위의 몸에 엎드려 통곡하는 아이를 끌어내고서까지 상관위를 죽인다는 것은 강호의 호걸이라 자처하는 그들로서 차마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들은 가슴이 미어지게 통곡하는 아이를 망연자실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는지 손 장로가 나서서 아이를 달래기 시작했다.
"얘, 울지 말고 일어나거라. 저 사람은 착한 사람이 아니다. 저 사람은 네가 이렇게 통곡할 만한 가치가 없는 사람이야."
"이 어르신이 왜 나빠요? 나쁜 사람은 당신들이에요."
눈물 범벅이 된 얼굴을 치켜 들며 아이가 항의했다.
"네가 잘 몰라서 이러는 거야. 저 사람은 사람을 수 없이 죽였어. 선량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을 말이다. 그 때문에 그 가족들은 집 없이 떠돌아다니고 있지. 그런데도 착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 죽여 마땅한 사람이다."
"오히려 당신들을 죽여야 해요. 당신이 죽어야 해요!"
어린 구천인은 소씨 거렁뱅이를 손가락질했다. 소씨 거렁뱅이는 기가 막히다는 듯 웃으면서 손가락으로 자기 코끝을 가리키며 물었다.
"나 말이냐? 내가 죽어야 마땅하다? 그래. 난 일찍부터 죽어야 했다. 그런데 왜 아직도 죽지 않았을까? 그건 내가 저 상관위처럼 악한 짓을 아직 덜한 탓이지. 알아듣겠냐?"
"이 어르신이 당신들한테 무슨 나쁜 짓을 했어요? 주루에 올라와 술만 마셨는데. 그러다가 술에 독이 있어 물어 본 것뿐인데 무엇이 나빠요? 당신들은 이 어르신을 나쁘다지만 내 보기엔 당신들이 나빠요. 당신이 먼저 싸움을 걸었잖아요. 당신이야말로 천하의 악인이에요."
구천인은 생각할 수록 악이 받치는지 다짜고짜 소씨 거렁뱅이에게 달려들더니 필사적으로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러자 줄곧 한쪽에 서서 사태를 관망하고만 있던 홍칠이 불쑥 한마디 했다.
"사부님, 그만 하고 가십시다!"
"뭐, 가자고? 거 참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구나. 자식, 네 생각이 그렇다면 가야지. 가자는 데 가야지."
소씨 거렁뱅이는 말을 마치자 홍칠과 더불어 몸을 솟구치는가 싶더니 창 밖으로 가볍게 몸을 날려 멀어져 갔다.
소씨 거렁뱅이가 사라지자 개방의 장로들도 금의파, 오의파 할 것 없이 전부 누각을 내려와 각기 헤어졌다.
시간이 흐르자 상관위는 서서히 의식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는 기쁨을 감추며 부하에게 물었다.
"개방 사람들이…… 이젠…… 이젠 다 갔느냐?"
"다 갔습니다. 이 아이 덕입니다."
단검 질의가 머리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는 방금 있었던 일을 상관위에게 소상히 아뢰었다.
"얘야, 넌 벌써 두 번째로 날 살려 주는구나."
자초지종을 들은 상관위는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끼며 아이에게 따뜻한 눈길을 주었다. 아이는 말없이 상관위를 바라볼 뿐이었다.
옛 기억을 더듬던 구천인의 눈빛이 흐려졌다. 그 자리에서 이 상관위를 만나지 못했던들 자기는 한낱 거지로 떠돌며 사람들에게 조롱과 업신여김을 받았으리라. 그날의 치명타를 완전히 치유하지 못한 사부 상관위를 안타깜고 경모에 가득 찬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는 천천히 시선을 벌벌 떨고 있는 아이에게 던졌다. 그리고는 말없이 은전 한 잎을 내주며 어서 가라고 손을 내저었다.
놀란 아이가 잠시 멀뚱하게 서 있더니 상관위가 고개를 끄덕이자 허리를 연신 굽혀 대며 황급히 줄행랑을 놓았다.
"그럼 이젠 떠나자. 여긴 우리가 오래 머물 곳이 못 된다."
상관위도 쓰라린 기억이 떠오르는지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철장방 사람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뒤를 따랐다. 체구가 큰 구천인이 힐끗 소씨 거렁뱅이 쪽을 쳐다보았다.
그들이 마차를 불러 타고 완전히 그곳을 떠나자 구양 형제와 모용쟁은 묘한 기분에 휩싸여 잠자코 술만 마셨다. 구양적이 아쉽다는 투로 입을 열었다.
"동생, 소씨 거렁뱅이의 장법은 정말 천하에 드문 장법이라더군. 절세신공(絶世神功)이라던데? 개방의 한다 하는 인물들의 무공을 보지 못한 게 아쉽군."
셋은 개방과 철장방이 한판 대결을 기대했었다. 그런데 긴장감이 잠시 맴돌았을 뿐 아무 일도 없듯 철장방은 서둘러 빠져 나가고 그들이 가고 나자 개방의 무리들은 조금 전 그 논의로 다시 열을 올렸다.
"저와 저 끝에 앉은 홍칠이 함께 황궁 안의 어선방에 간 적이 있는데, 어선방 음식 맛이 정말 별미더군요. 그 원앙오진회(鴛鴦五珍贈)라는 요리는 정말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맛이 기막혔어요. 천상일미라는 말이 왜 나왔는지 알겠더라구요. 지금도 그 맛을 생각하면 침이 넘어가요. 형님, 제가 보기에 개방엔 대단한 고수들이 많은 것 같아요."
"동생, 홍칠이가 소씨 거렁뱅이의 제자라고 했지?"
"글쎄 그건 저도 잘 몰라요. 황궁 어선방에서 홍칠이와 황궁 다섯 요리사들이 싸울 때 그런 말을 합디다만, 정말로 홍칠이 소씨 거렁뱅이의 제자인지는 모르겠는데요? 그와 소씨 거렁뱅이가 허물없이 지내며 무슨 말이든 거침없이 해대는 걸 보면 사제지간은 아닌 것 같은데……."
"그것만 갖고야 알 수 있나."
구양적은 이렇게 말하면서 속으로 '동생이 나와 내 스승 간의 일을 알면 놀라겠구나' 생각했다. 구양적의 스승도 다정다감한 사람이어서 속세의 예의범절과는 거리가 있었던 것이다.
세 사람은 어느 정도 배가 불러 오자 비로소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비록 남방의 대도시처럼 번화하지는 않아도 변량도 큰 도시라서 사막에 있을 때와는 달랐다. 모용쟁은 여인들에게 필요한 물건들, 이를테면 수놓는 실이나 분함 같은 것들을 사기 위해 구석구석을 살폈다. 그런 물건들을 사게 되면 얼굴에 웃음꽃을 피우며 구양 형제한테도 살갑게 굴었다.
구양적은 참을성이 많은 사람이라 모용쟁이 원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말없이 들어주곤 했다. 그래서인지 모용쟁도 구양적에 대한 태도가 유난히 부드러웠다.
모용쟁과 형 구양적의 태도를 살피던 구양봉은 이 기회에 두 사람만의 오붓한 시간을 갖게 해 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마침 훌륭한 묘안이 떠올랐다. 그는 형에게 선비들이 모여 있는 국자감(國字監)에 가 보자고 제의했다. 그의 짐작대로라면 구양적과 모용쟁은 분명 그런 곳에 가서 뭘 하겠느냐며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었다. 역시 구양봉의 짐작은 적중했다.
구양적은 동생의 의도를 눈치채지 못한 채 이렇게 말했다.
"정 가고 싶으면 혼자 가거라."
첫댓글 ``@-@``
감사합니다.
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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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감합니다
ㅎㅎ
즐감 ~~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