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전통적인 삶의 방식을 고집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청학동을 20년 넘게 찍어온 류은규 선생의 ‘靑鶴何處-청학동 이야기’가 전시 중이다. 기자는 작가를' 만나기 위해서 강남 포스코미술관을 찾았다. 널찍한 전시장에 걸린 작품은 전지 크기 이상으로만 모두 90여 점이다. 1년에 열 차례 대형 전시가 열리는데, 사진은 이 전시가 처음이라고 한다.
큰 전시네요. 축하 드리고요. 찍기 시작한 지 오래 되셨지요? 먼저 청학동을 선택하게 된 이유와 지금까지 찍은 양은 얼마나 됩니까? 청학동이라는 곳이 흥미로운 곳이어서 누구나 한 번쯤 다녀올 수 있는 그런 곳이잖아요? 대학시절 호기심에 서클 친구들과 함께 청학동을 찾게 되었어요. 다들 한 번 다녀오고 그걸로 끝이었지만, 나는 촬영을 계속 이어나간 거죠. 지금도 계속하고 있으니까 끝난 것은 아니지요. 중국에 가 있는 지금도 1년에 서너 번 한국에 들어오면 맨 먼저 청학동으로 가서 촬영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꾸준히 찍어나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작업 양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1982년 청학동 작업을 처음 시작했을 때부터 90년까지는 거기 들어가면 한두 달씩 살면서 작업했기 때문에 양이 많았지만, 지금은 보충적인 작업을 하는 정도로 찍고 있습니다.
촬영하면서 어려웠던 점도 많으셨을 텐데…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시작했어요. 그저 신기해서 카메라를 들이대니까 “찍지 마라”고 거부반응을 보이더군요. 그래서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지요. 나이가 비슷한 또래들과 친구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이렇게 작정하고 한 번 뚫어보기로 했는데, 빈 손으로 갈 수 없잖아요. 쌀을 짊어지고 올라갔어요. 거기서 먹고 자고 하면서 또래 친구를 만들었고, 아들의 친구가 되면서 그 부모님을 촬영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그들과 가까워지면서 그때부터 조금씩 카메라를 들이대며 가족을 찍는 마음으로 본격적으로 촬영을 시작했죠.
대상에 접근하는 방법은 많지만, 현장에 가서 단순히 찍고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그곳 사람들과 가까워지면서 촬영하기로 한 것이 주효했지요. 그때 가까워진 사람들은 지금도 서로 왕래하며 오랜 친구처럼 지내고 있죠. 이 청학동 작업은 완성된 것이 아니라 이제 겨우 반 정도 끝냈다고 생각합니다. 생각 같아선 지금까지 25년 찍었으니까 앞으로 25년 더 찍어서 50년 채울 작정입니다.
전시 제목이 청학동은 어디인가? 인데 그들에게 청학동은 어떤 곳입니까?. 누구나 마음으로 그리는 고향 같은 곳이라고나 할까요? 청학이란 말은 우리가 꿈꾸는 이상향 같은 장소를 말합니다. 지금 이곳은 지명조차 붙어있지 않은 그런 곳이었는데, 청학동이란 나중에 학자들이 붙인 이름이라고 합니다. 사실 이 마을이 알려지기 전부터 일단의 사람들이 자급자족 하면서 여기서 살았는데, 지세나 산세로 보아 이곳이 바로 청학이 아닐까, 그래서 청학동이라는 이름이 붙여졌고, 우연히 그곳이 들른 등산객에 의해서 널리 알려지게 된 거지요.
이제는 청학동도 옛날 청학동이 아니라는 말을 하던데… 많이 변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제가 봤을 때는 옛날과 변한 것이 없습니다. 청학동 사람들은 자동차도 타면 안 되고, 석유를 사용해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네들이 갖고 있는 기본적인 삶의 철학이나 자세를 봐야지, 살아가는 형태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무슨 원시인입니까? 우리와 똑 같은 사람입니다. 그곳에 가니깐 돈을 받더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들에게 돈을 받도록 만든 것은 바로 우리 도시인입니다. 그들은 오래 동안 오직 농사를 지으면서 생활해왔습니다. 그러나 그 마을과 그곳에서 사는 사람들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고, 나라에서는 청학동 일대를 국립공원으로 지정해서 그들에게 농사도 못 짓게 만들었습니다. 그! 러면 청학동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사람들이 호기심으로 청학동을 많이 찾아갑니다. 그곳에는 관광객들을 맞을 별다른 시설도 없고 그래서 청학동 사람들은 민박과 식당을 운영하면서 다른 형태의 삶을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예전에 가면 그냥 재워줬어요. 지금도 나를 여전히 그냥 재워준답니다. 저는 청학동이 본질적으로는 변한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앞으로도 청학동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카메라에 오래 오래 담을 겁니다.
전시작품
코흘리개 어린아이가 이제는 어엿한 청년이 되어서 결혼도 하고, 부인과 아이랑 함께 찍은 사진을 보니까 한두 번 찍어서 끝날 작업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잘 하면 손자 사진도 볼 수 있겠네요. 그런데 지금 주로 하고 계시는 작업은 무엇입니까? 중국에서는 조선족에 관한 작업을 하고 있는데, 이것은 1998년도에 한 번 정리해서 ‘잊혀진 흔적’이라는 타이틀로 전시를 했습니다. 중국에서 항일운동을 하신 분들의 후손들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하는 궁금증에서 시작한 작업이에요.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한국과 중국은 45년 동안 국교가 단절된 상태였기 때문에 그들의 국적이나 이데올로기가 어떤 것이었든지 그 동안 한국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긴 세월을 중국에서 생활해야 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93년도에 중국 흑룡강성 하얼빈에 가서 거기서 살면서 조선족 작업을 하기 시작했지요.
중국에서 항일운동을 하신 분들의 후손들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하는 궁금증에서 시작한 작업이에요.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한국과 중국은 45년 동안 국교가 단절된 상태였기 때문에 그들의 국적이나 이데올로기가 어떤 것이었든지 그 동안 한국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긴 세월을 중국에서 생활해야 했기 때문이지요.
그 후 2000년에 ‘잊혀진 흔적2’라는 제목으로 다시 전시를 하게 되었는데, 이 작업은 그 동안 옛 사진을 모은 것을 정리한 ‘조선족 100년사’입니다. 첫 전시에서 항일운동을 하신 분들의 후손들의 삶을 작업하다가, 그 이전 분들은 어떻게 사셨을까, 하는 궁금증에서 작업을 하게 된 것입니다. 한국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김규식 선생이나 김좌진 장군의 따님, 힝일투사 리민 여사 같은 분들을 직접 방문해서 그 분들이 간직하고 있는 옛날 사진이나 그 분들의 생활을 들여다볼 수 있는 사진들을 찾았어요. 그 전시 때는 350장을 추려서 보여드리? ? 동시에 “조선족 100년사”라는 자료집도 출판을 했습니다.
요즘 젊은 친구들은 빨리 작업을 접어버리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참고 기다릴 수 있는 것도 용기라고 생각합니다. “소뼈도 우려야 제 맛이 난다.” 라는 말이 있잖아요.
현재 진행 중인 작업들은 언제쯤 전시할 예정이신지? 옛 사진을 모우는 작업을 그 후에도 계속하고 있어서 현재 4만장 정도를 가지고 있고, 항일운동 후손들만 찍는 것이 아니라 지금 조선족들의 살아가는 모습도 찍고 있습니다. 이 조선족 작업을 위해서 그 동안 여기 저기 참 많이 돌아다녔습니다. 흑룡강성에서 3년, 길림성에서 4년, 요녕성에서 1년 반, 이렇게 오랜 기간 찍어왔으니까 꽤 많은 작업 양이 쌓였습니다. 제 작업은 후닥닥 해치우는 식이 아니어서 충분한 여유를 가지고 작업을 잘 정리해서 발표할 생각입니다. 서두르지 않고 한 10년이나 20년쯤 지난 후에 정말 좋은 작업을 했구나라고 평가 받을 수 있는 그런 작업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돈도 많이 들었을 거고, 언어나 풍습도 다른 곳에서 힘 많이 드셨죠? 그야 어려웠던 때가 한두 번이 아니죠. 하지만 각오하고 시작한 것이어서 그만 두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냥 쉽게 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면 도중에 포기할 수도 있었겠지만, 처음부터 고생은 예상했던 거여서 견뎌낼 수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남북한을 합친 땅 길이의 두 배나 되는 흑룡강성이나 요령성, 길림성 같은 넓은 지역에서 조선족들이 사는 마을들을 찾아다니는 일이 힘들었습니다. 가서 그 분을 만나면 뭐가 나오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감을 가지고 어렵게 찾아갔지만, 막상 가보니 그 분이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었을 때의 허탈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지요. 가서 못 만나거나, 자료가 모두 없어져버리고 말았을 때 그럴 때가 제일 힘들었습니다.
전시장 모습
이렇게 큰 전시를 하게 된 소감 한 말씀을… 25년 동안 찍어왔고 이쯤에서 전시할 시기가 되었다고 생각해서 전시를 하게 된 겁니다. 어떻게 보여줘야 할 것인가, 청학동의 변한 모습과 변하지 않은 것, 시간의 흐름, 이곳 주민들의 희로애락, 색다른 삶의 모습 등 모든 것을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래 동안 묵묵히 작업해온 결과물들을 이렇게 훌륭한 장소에서 보여줄 수 있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자부심과 고마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화제를 좀 바꿔보도록 할까요? 지금 남경시각예술대학의 사진대학 학장과 연변대학교 예술대학 사진과 초빙교수로 재직하고 계시는데, 처음 중국에 가시게 된 계기는? 중국에는 교수가 되려고 갔던 것은 아니고 조선족 작업을 하려고 간 겁니다. 처음에는 하얼빈에 3년 동안 살았습니다. 거기서 중국말을 배우고 조선족 역사를 공부하기 시작했지요. 같은 ‘안중근 역사’를 놓고 보더라도, 북한과 남한, 일본, 중국 공산당, 중국 국민당에서 보는 시각이 모두 다릅니다. 그것이 이데올로기와 정치적인 문제이기 때문이지요. 역사를 바로 알기 위해 근대역사를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1995년부터 연변대학교 민족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있으면서 조선족 작업을 했는데, 2000년도에 연변대학교 예술대학에 사진과를 만들면서 첫 초빙교수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암실이나 스튜디오 등 시설 설계나 기자재 준비, 그리고 수업 준비 때문에 갑자기 정신이 없어지더라고요. 이러다가 내 작업을 할 수가 없겠다 싶어서 연변대를 떠나 요녕성에 있는 대련의과대학 영상예술대학 사진학과 교수로 옮겼고, 거기서 1년 반 있다가 지금의 남경으로 오게 된 것입니다. 여기 생활도 벌써 1년 반이 넘었네요.
제가 가르치는 학생들이 나에게 왜 조선족 작업을 하느냐고 질문을 합니다. 그럴 때는 저는 1960년대 중반부터 10년 넘게 청계천 사진을 찍은 일본인 사진가 구와바라 시세이 선생을 예로 들어서 설명합니다. 그 당시 우리 사진가들은 더럽고 창피한 모습은 발표를 하지 않았지요. 비록 일본인에 의해서 찍혀지긴 했지만 그 사진들이 얼마나 소중한 기록으로 우리에게 남아 있습니까? 중국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제발전이 한참 진행되고 있는 중국에서 앞으로 저와 같은 작업을 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질 겁니다. 사진의 본질은 기록성에 있지요. 그 기록으로서의 사진을 지금 찍어두지 않으면 우리는 기억도 역사도 없는 사람이 되어버리고 마는 거지요. 그래서 조선족 작업은 저에게 맡겨진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곳에 한국 유학생은 많습니까? 미국이나 일본에 비하며 적은 수입니다만, 제 생각으로는 미국, 일본을 가는 것도 좋지만, 중국에 와서 공부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중국과 한국에 도움을 주는 중간자 역할을 할 수 있을 사람도 필요하거든요. 현재 한국 작가들이 해외에 진출할 수 있게 된 것도 이런 중간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사진의 소재가 풍부하고 넓은 시야를 갖고 작업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사귀고 새로운 문화와 언어를 배울 수 있다는 이점도 있습니다. 중국은 지금 경제발전이 한창이기 때문에 취직하기도 한국보다 낫다고 생각합니다.
학교에서는 주로 어떤 과목을 가르치십니까? 입체사진=0도사진이라고요, 평면적인 사진을 입체적으로 만드는 사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진의 원점이라고나 할까요. 카메라 옵스큐라에서부터 디지털작업까지 이어지는데요. 가령 학생들과 함께 핀홀 카메라를 직접 만들어서 이미지 서클을 공부합니다. 화각이 나오면 좌우상하가 몇 도인지 알 수 있지요. 그것을 상하를 자르면 파노라마가 나옵니다. 그리고 파노라마사진을 찍을 때는 4대 이상의 카메라를 사용하는데 거기에 꼭 자기 자신의 모습이 들어가도록 해서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는 것입니다. 내면적 세계가 나올 수 있고, 그 필름을 하나로 이어나갑니다. 그러면 360도가 가능해지지요. 카메라를 좌우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상하로도 작업하게 됩니다. 상하를 다양한 각도에서 찍게 되면 360도의 사진이 나오게 되는데 그것으로 구체 안에서 들여다 보면 자신이 있고, 자신은 안에서 밖을 볼 수도 있고, 거기서 끝나지 않고 다른 다양한 표현방식을 시도합니다. 구체가 만들어지면 굴릴 수 있다, 원을 이용해서 중심을 이동할 수 있는 작업을 한다, 중심이 변하면 재미있는 사진이 나옵니다. 사진의 본질부터 시작하여 내면세계 표현, 형이상학까지 공부할 수 있는 수업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똑 같은 수업을 가르치기보다는 기능하면 현장 중심의 독창적인 수업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큐멘터리사진 수업시간에는 외국작가들의 사진을 보여주며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내 작업을 가지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작품이 좋아서가 아니라 내가 직접 찍으면서 경험한 생생한 내용들을 가르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사진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하고 싶은 말 대학생활을 할 때 다양한 분야의 책들을 많이 읽도록 권합니다. 프로로 나가거나 어떤 분야에서 일을 하건 자기 자리를 확실하게 잡으려면 인문학적인 소양이 필요합니다. 철학을 갖고 목표를 정해서 꾸준하게 나가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