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서예를 하는 몇 분을 만나 보았는데 모두들 '板殿판전'이란 글씨를 핸드폰에 저장해 두고 수시로 꺼내어 감상하는 것이었다. 나도 그 글씨를 전송받아 나름대로 살펴보았으나 잘 쓴 글씨라고 말하기가 어려웠다.
여기저기 문헌을 뒤져보니 판전板殿은 1855년에 남호 스님과 추사 김정희 선생이 뜻을 모아 판각한 화엄경 소초 81권 을 보관하기 위해 지은 곳으로 봉은사에서 가장 오래된 전각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나의 관심사인 판전은 이 판전이란 전각에 걸려 있는 현판의 글씨 '板殿 '이다. 추사는 이'板殿'을 쓰고 나서 사흘 후 세상을 떠났다.
구전으로 전해 들은'板殿' 글씨 가 추사 선생의 마지막 작품이라 는데 흥미가 일었다. 밤잠을 설치고 9월 12일 수은주가 30도를 넘는다는 예보에 냉수 한 병을 등산 가방에 넣고 집을 나섰다. 지하철 9호선 봉은사역에서 내려 1번 출구를 나와 얼마쯤 걸으니 봉은사가 보였다.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위치한 수도산 봉은사! 앞에 서서 살펴보니 여느 사찰보다 일주문이 웅장하고 멋이 있어 보였다. 사찰에 들어서는 첫 번째 문을 일주문이라 하는데, 봉은사에서는 진여문眞如門 이라고 한다, '진여眞如'란 사물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라는 의미로, 진여문에 들어선다는 것은 곧 부처님의 세상에 들어간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리라.
일주문을 지나 툭 튀어나온 큰 눈을 부릅뜨고 두리번거리는 사천왕상을 힐끔힐끔 쳐다보면서 자비가 가득한 3,300분의 관세음보살 원불이 모셔져 있다는 법왕루法王樓에 이르렀다.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신 대웅전을 향하려고 하는데 극락왕생을 비는 영가등 靈駕燈이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화려하다기 보다 엄숙하고 장엄한 느낌이었다.
날씨는 덥고 몸은 지쳐갔다. 오늘 봉은사를 찾은 목적은 판전에 걸려 있는 '판전'이란 현판을 살펴보는 일이었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수행하는 선불당은 물론 지장전, 봉은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야경을 볼 수 있다는 미륵대불과 미륵광장마저도 멀리서 한참을 바라만 보고 지나쳐야 했다.
그러는 중에 드디어 판전 앞에 도착했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일자형 남향 건축물이다. 이곳 판전에는 화엄경 80권을 비롯하여 3,438 점의 경전을 보관하고 있어 부처님의 가르침인 법法의 보고다. 그래서인지 시험 합격을 바라는 기도성취 전각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오늘도 판전 3차 100일 기도에 참석한 사람들로 법당은 만원이다. 판전 내부를 전부 다 들여다보지는 못하고 판전 정면에 부착해 놓은 현판을 보았다.
板殿!판전이라고 쓰인 좌측에는 작은 글씨로 '七十一果病中作' 이라고 세로로 쓰여 있다. 일흡한 살의 과천 사는 추사가 병중에 썼다는 것인데 '七十一果'는 추사가 일흔한 살이 되면서 새로 쓰던 호이기도 하다.
'판전' 현판 밑에서 위를 쳐다보고 수없이 살펴봐도 잘 쓴 글씨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KBS에서 대하사극을 여럿 연출한 한 전직 PD는 이 '板殿' 이란 글씨를 고졸 古拙의 표본이라고 했다는데, 내 눈에는 영 젊은 선비의 서투른 글씨로만 보인다. 고졸이란 '기교는 없으나 예藝스럽고 소박한 맛이 있다'는 뜻이다. 또 한 서예가는 이 '板殿'은 "자형字形이 어리숙하고 점획이 꾸밈이 없는 졸박한 필치의 동자체"라고 하면서, "특히 전殿 자의 왼 삐침을 삐치지 않고 중봉세 中鋒勢를 유지하여 위아래로 그은 다음 칠십일과병중작 七十一果病中作 낙관으로 마무리한 점은 청정무구한 심상을 드러낸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추사의 대표작이라고 하는 <세한도歲寒圖>에 관한 감흥도 마찬가지다. 초가집인지 기와집인지 모를 밋밋한 집 한 채에 거친 필치로 노송 몇 그루를 그렸다. '歲寒圖'란 제목과 함께 오랫동안 의리를 지켜온 제자 우선 이상적藕船 李尙迪에게 준다는 완당의 낙관이 찍혀 있고 발문이 붙어 있다.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 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 날이 추워진 후에야 비로소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안다. 백과사전은 "거칠고 메마른 붓질"이니 "마른 붓질"이니 하며 "극도의 절제와 생략을 통해 문인화의 특징을 엿볼 수 있는 조선 후기 대표적인 문인화로 평가된다"고 하지만, 그림 자체만으로는 그 예술성을 통 모르겠다.
전문가들이 그리하거니 말거나 큰 감흥을 받지 못한 채 돌아설까 하다가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이고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인다던 무학대사의 농담이 생각난다. 아! 그렇구나. 내가 어찌 감히 저 글씨가 잘 써졌니 못 써졌니 판별할 수 있단 말인가? 반식자우환半識者憂患이라고 가만히 있으면 넘어 갈 일을 괜히 아는 척했다가 밑천 드러나면 그 일을 어찌 감당하려고. 누군가 잘 쓴 글씨라고 하면 아는 척 모르는 척 그런가 보다 하면서 살자.
김효곤
전 해양수산부 포항 목포 제주지방해양수산청장, 한국항만연수원장 대한민국서예술대전 추천 서예가 아침에 당현천을 산책하고와 라면을 끓여 먹고 한숨 잔다. 라면 맛이 그렇게 좋다. 수필도 쓰고 행복한 하루하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