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정치 갈등으로 매일매일 시끄럽고 경제는 하향세를 달려
국민들은 죽겠다고 야단이다.
매주 토요일마다 열리는 광화문 애국집회는 결정적 한방이
없어서인지 문재인 대통령과 그 참모들 성토하고 그것을 2년 넘게 하고 있다
이 상황에 대해 해결책이 없는가?
시간이 갈수록 대한민국은 무너지는데 ............
4일 토요일 오후 4시 쯤 광화문에 도착하니 마이크로
성토하는 소리가 작아지는 것으로 봐서
애국 시민들이 청와대로 행진하러 간 모양이다
어떤 애국시민의 카톡 프로필에 "하늘이시여" 라는 구호가 있었다.
기자도 오늘의 한국의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서 여태
인간적인 방법을 다 동원 했지만 답이 나오지 않으므로
이제는 하늘의 도움을 구하지 않을 수 없는 심정에 도달했다.
"하늘이시여! 하늘이시여! 대한민국을 살릴 수 있는 힌트를
주소서. 그것도 좀 확실한 힌트를 요!"
이번 토요일은 평소보다 늦은 시간에 광화문 애국 현장에 나갔다.
여태 성실히 애국 집회에 나가고 많은 사람 만났지만 해답을 찾을 수 없었다.
대한민국 이 어려운 시점에서 해결책이 좀 없을까?
혼란의 원인은 무엇이며 무엇보다도 대책은 없는가?
이 혼란의 주범은? 北 김일성 이었네
<기자와 대담한 金日成 대학 출신 탈북민 A선생. 사진 찍는 것을 싫어했다.>
광화문 광장에서 평소에 안면이 있는 북한 金日成 대학 출신
탈북민 A선생이 지나가고 있었다. 불렀다.
전에 그가 유인물도 줘서 받았지만 자세히 읽지 못했다.
혹시 이 사람한테서 무슨 해답이 있을까 해서 대화를 시작했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까 이 사람은 요즘 인기 있는 태영호 공사
보다 한 수,두수 위의 정보를 가진 사람 이었다.
태영호 공사는 그가 북한에서 생활하고 북경 베이징대 외국어과 ,
영국 공사 등이 그의 정보 였으나 이 사람은 김일성이
살아 생전에 지시하는 것을 직접 듣고 본 것이었기 때문에
김일성의 생각, 김일성의 對 대한민국 赤化前略을 엿볼수 있고
그런데 “당시의 김일성이 지시한 것이 한국에 와서 보니
그대로 시행되고 있는 것이 놀랍다”고 했다
A선생(편의상 이하 A선생이라 칭함)은 김일성大를 졸업하고
(63년 3월 입학,67년 8월 졸업) 北韓 노동당 중앙당 선전부에
있었기 때문에 김일성의 지시를 직접 들었다는 것이다.
그가 김일성에게 직접 들은 것 몇 가지를 요약해본다
김일성의 對南(대남) 赤化(공산화)戰略 지시 사항
1. 대한민국 정부 재정을 고갈 시켜라(1967~68년)
방법은?
1) 무상복지를 확대하라. 자동으로 한국의 재정이 고갈 될 것이다
(요즘 지자체, 이재명 시장 당시의 성남시로 시작하여 박원순씨가
있는 서울시가 청년 수당이라고 무상으로 돈을 퍼 주고 있으며
동아일보 4/25일자에는 한 오피니언은 순진하게
“경제 下手의 나랏 돈 풀기”란 글을 썼는데 이 A선생의
발언으로 미루어보면 나랏돈 푸는 사람이 바보 같은 경제 하수인가?
아니면 김일성의 대한민국공산화 행동대 역활을 하는 사람인가?
이 오피니언은 “포퓰리즘으로 나라 망하는 것은 순식간,
확장 재정 하려면 정책방향 먼저 수정하라”고 요구 하는데
상대가 이 말을 들을 바보로 보이는가?
그들은 골수에 사무친 대한민국공산화 행동대 아닌가?
그들은 죽은 金日成의 명을 받들고 한국을 죽이기로 하고
칼을 빼 들고 오는 사람이 아닌가? 그들이 경제 下手 인가?
2. 대기업을 매판 자본으로 몰아붙여서 고사 시켜라
(현재 KAL이 여러 가지 시비에 걸려 조회장이 홧병으로 타계 했고
새로운 회장 체제에서 향후가 불투명하고 그 외 다른 기업들은
어떤가? 최근 민노총들의 활동이 활발하다.
우리 국민들이 볼 때 민노총이라는 단체는 노동 약자들이
임금을 올려 달라고 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A선생의 말을
듣고 보니 그 이면이 보인다. 민노총의 최종 목표는
한국 기업 망해먹기가 아닌가? 그 핵심에 공산혁명가들이 활동한다는 이야기)
3.1967년 8월 대남공작원들에게 한 김일성의 지시.
한반도의 공산화를 위한 결정적 시기에 대하여.
" 결정적 시기는 저절로 오지 않습니다.
혁명정세는 오직 혁명가들의 끈질긴 노력에 의하여 성숙되게 됩니다.
혁명의 객관적 정세가 아무리 성숙되었다 하더라도
혁명가들이 주동적으로 조성하지 않으면 결정적 시기는
절대로 오지 않습니다.혁명적 대사변을 주동적으로 맞이하기
위하여서는 객관적 형태의 대중투쟁을 적극 조직 전개하여
적들의 강경한 탄압을 유도하여야 합니다.경우에 따라서
시위도중 경찰에 의하여 살해된 것처럼 위장하여
자해공작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시위군중들이 동료들의
피를 보게 되면 더 격렬하게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4. 1960년 4월 19일의 단초, 마산 김주열군 사건은
北 김일성의 전략적 지시 사항
김일성은 “남한에서 학생 혁명을 일으키라” 지시
“그러기 위해서는 한 놈을 자해 시켜라
피를 보면 군중은 폭발한다.“ 고 말했다. 그가 김주열군 이었나?
<4.19 단초 김주열 군. EBS캡쳐>
<사진:1960년 4월 11일 감주열군의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 떠 오르고 난 뒤 다음 날 ,
12일 자 조선일보. 마산의 격분." 사체보자 폭발 "제하의 기사>
그러면 이들 중,4.1960년 4.19일의 단초, 마산 김주열군 사건을
더 자세히, 깊히 알아보자
이 A씨는 김일성은 (대남 적화통일을 위해서)
“반파쇼민주화운동을 전개하라”고 했으며 학생시위를
하고 혁명을 일으키라고 지시 했으므로,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김일성의 지시인
“대남 적화통일전략 반파쇼민주화운동”이라고 정의한다.
즉 그것은 공산 혁명을 위한 전초전 이었다.
요즘 한국에 지도급에 있는 사람들이(4.19는 지금으로 부터
59년 전 이니까 당시 20세라면 자금은 79세) 4.19를
직,간접 경험 했고 직접 참여한 사람은 마치 거룩한 일을
한 양, 민주인사라고, 그리고 그것을 민주화 운동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한국의 1등 신문 조선일보 류근일씨는
5월 14일 자 칼럼에서 ‘왕년의 민주투사들이 만드는
공포의 공수처’라는 글을 썼는데 이것을 A선생은 한국의
민주화는 김일성의 남한 공산화운동이라고 하므로
한국에 덮힌 어두운 그림자, 암호가 풀리는 순간이다.
류근일씨의 ‘왕년의 민주투사들이 만드는 공포의 공수처’는
암호를 풀면 “왕년의 김일성의 남한 共産化운동 투사들이
만드는 공포의 공수처”가 아닌가?
이것을 더 깊히 풀기 위해서 지금으로부터 59년 전으로 되돌아 가 보자
다행히 EBS에서 자료를 잘 정리 해 둔 게 있었다.
김주열 군은 머리에 최류탄이 정통으로 박혀 행방불명
28일 후에 바다에 시신으로 떠 올랐다.
<사진 설명; 당시의 보도된 신문 자료와 사진. 4
월 11일 최류탄이 머리에 직격으로 박혀 마산 앞바다에 떠오른 김주열군. 한
국 경찰은 최류탄을 쏘아도 곡선으로 쏘지 시민들에게 직격탄을
쏘지 않는게 규범이고 또 상식이다.
北 김일성의 주문대로 국민들이,민중이 분노하게 끔 일을
만들어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EBS에서 잘 정리한 영상이 있었다. EBS 영상 캡쳐)>
<당시의 이상한 행불(행방불명)자들이 5명 있었는데 4명은
며칠 후 귀가 하고 김주열군만 행불. 28일 뒤 시신이 되어
바다에 떠 올랐다. 그런데 한국 경찰이 젊은이를 왜 잡아가나?
그럴 리 없고 이유도 없다.
당시 간첩이 많이 득실 거렸고 북한의 적공부
(현 통일전선부 전신,국내, 국외 팀들도 있었다.),에서
매일 목공소(북한 각 부대의 간첩을 파견하고 안내하는 역활)를
통해서 간첩을 남파시켰고 서울에 와서 지휘부 학생들 만나
술 사주고 작업비를 지원 했다고 한다.
그 때는 북한 쪽이 대한민국 보다 경제력이 나았다 함>
<사진 ;김주열군의 최류탄이 머리에 박힌 각도와 위치.
이것은 으쓱한 골목에서 희생자 김주열군을 눕히든지
세우든지 해서 최류탄을 이마에 대고 직격탄으로 쏜 게 아닌가?>
1960년도 사회 분위기는 간첩이 득실거렸고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한 학생이 최류탄을 맞아 사망했다는 소리에 공산당들이 준동한다고 경고 했다.
<1960년 4월 15일 자 조선일보. 이승만 대통령은
“공산당(요즘 언어로는 간첩)이 들어와 뒤에서 조종” 했다고 말했다.>
이 사건은 55년이 지난 2015년 11월 14일 광화문에서
농민 시위 때 백남기 농민 사망 사건과 흡사한 것을 볼 수 있다.
“한 놈을 자해 시켜라.피를 보면 군중은 폭발한다.
”-김일성의 공산혁명 전략
백남기 농민이 경찰 물 대포에 쓰러질 때 빨간 우의를 입은
자가 나타나서 쓰러진 백남기 농민을 가격했다고 많은 사람들이 증언 했다.
그것으로 촛불집회가 동력을 더 얻었다.
4.19가 실패(대한민국을 공산화 접수실패)로 끝난 후
北에 4.19 용사 사진전이 있었다.
<4.19에 사망 21명, 부상 172명이 있었다. -출처;위키 백과>
당시 희생자들이 北 지역의 각 작업장, 공장,가게 등에
명예작업 반장, 명예 공장장, 가게에는 명예 점장이라는
이름으로 사진이 붙어 있었고 교복 입은 사람, 농민, 넥타이를 멘
사람 등이 있었다. "그 명예 책임자들을 한국에서는
민주화운동가라고 부르고 4.19를 민주화 혁명이라고 부르네요"
76년 4월 김일성은 “통전부(통일전선부)에 4.19 같은 사건
일으키기 위해 우리의 혁명가들을 남조선 현지에 내려 보내라” 지시
-계속